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69년 시아드 바레(Siad Barre)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국가인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친소련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는 미국과 중국과 교섭을 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덕분에 미국도 소말리아를 지지했습니다. 그리초 최초 5년 동안은 사회 개혁도 하고, 부족주의 타파도 한다고 하고, 공공사업도 벌였으며 평판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급격한 부족주의 해체를 포함한 개혁조치들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부족의 권한을 줄이는 것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와 암살시도가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집권 22년중에서 괜찮았던 초반 5년이 끝나고, 17년간의 암흑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1990년에는 마침내 소말리아 최대 부족인 하비야부족의 통일 소말리아 회의(United Somali Congress, USC)가 결성되었고  1990년 3월 반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1991년 1월 26일 결국 소말리아 최대 부족 출신이었던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rah Aidid)가 이끄는 USC가 모가디슈를 공격해 시아드 바레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명목상으로 알리 마흐디 무하메드가 임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친미 정책을 펼치던 시아드 바레가 반란군에 의해 축출을 당해 나이지리아 망명길에 오르자 미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소말리아 북쪽에 위치한 아덴 만을 건너면 예멘이고 동시에 중동으로 산유국과 가까우며, 그 산유국 중에 하나가 이라크였습니다. 1년 전 걸프전처럼 중동에서 유사시 즉각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의 주둔지로는 소말리아가 최적이었습니다.

 

 

당시 중동에 미군을 주둔시키기 힘든 데에 결정적인 이유가, 그 당시 이스라엘이 레바논과 전쟁 중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자국 내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영토 분쟁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즉 중동 내부에서의 전쟁 불씨가 미군에게까지 번질 우려가 있어서 소말리아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습니다. 또한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으며, 인도양으로도 바로 진출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뿔이었습니다.

 

▲당시 미 해병대 파병을 실시간 생중계한 CNN 영상

당시 소말리아 내부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심각한 내전이 발생하여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UN은 소말리아를 안정시키기 위해 병력을 파병하였지만 소말리아 USC를 이끌던 아이디는 UN에 철군을 주장하였고 그러던 과정에서 UN군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UN은 미국에 미군 파병을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1992년 12월 9일 소말리아 민간인 안전 확보, 상황발생시 교전 임무를 띠고 미 해병대 1800명이 선봉대로 소말리아 인근 해안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는 전투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걸프전 이후 미국의 두 번째 전투부대 투입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특종이 되었습니다.

 

 

미 해병대가 상륙하고 난 후 제3강습상륙대대, 제10산악사단 등이 추가로 투입되었습니다. 결국 1993년 3월까지 파병 미군은 25000명으로 증가되었으며 이것을 '희망회복작전'이라고 불렀습니다. 미군은 식량 배급 차량이 지나는 길목마다 장갑차가 배치돼 무장세력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했고, 더 위험한 곳에는 전차와 공격 헬리콥터가 동시에 투입되는 등 안전확보에 대단히 공격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렇게 미군 덕택에 식량배급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으면서 내전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군 해병대 선봉이 상륙한지 3일만에 알리 마흐디와 파라 아이디드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소말리아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UN은 1993년 5월 미군의 철수와 함께 다국적군 약 28,000명을 소말리아로 파명하게됩니다. 파병한 나라는 35개 나라였으며 우리 대한민국의 상록수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3년 6월 5일 파키스탄군이 주축이 된 UN평화유지군과 아이디드군이 정면 충돌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UN 평화유지군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아이디드군이 라디오 방송으로 UN평화유지군을 비난하였는데 이제 화가 난 UN군은 아이디드군이 점령하고 있던 선전기구로 활용되던 라디오 시설과 언론사, 무기 시장을 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군 경기갑 여단을 파견했는데, 거꾸로 아이디드 군의 매복에 당한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로 파키스탄군 24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하는, UN 평화유지군 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죽은 파키스탄군의 일부가 시체훼손이 되면서 끌려다니는 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CNN에 보내고 UN 철수를 요구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6일,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의 찬성으로 채택된 안보리 837 결의안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발을 빼고 있던 클린턴에게 미군을 파견하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결국 UN평화유지군은 파라 아이디드를 상대로 싸우는 전투 작전으로 변질됐으며 다국적군도 완전 전투부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유지 작전이 전투작전으로 변질될 것까지 예상을 못한 파키스탄은 핵심 전투병력을 모조리 철수시켰고, 짐바브웨와 루마니아, 스웨덴도 이러리라곤 예상을 못해 병력을 철수시키자 이어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기세가 등등해진 파라 아이디드는 이걸 또 선전하면서 자칭 소말리아의 대통령으로 군림했습니다.

 


뒤늦게 파견한 미군은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하고 파라 아이디드가 이끄는 무장세력을 완전 해산시키기 위해 수시로 공격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무장 세력, 동조자 등을 사살하는 과정에서 목표물을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대규모 민간인 오폭이 이어졌으며 이 사건으로 아이디드에 저항하던 소말리아 부족과 군벌들이 아이디드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소말리아의 전쟁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당시 실제 파병된 미 레인저 대원들 모습

그리고 그 상황을 취재하던 기자 4명이 소말리아 군중에게 살해당했으며 이후 미군 헌병이 사망하고 부상당하는 일이 계속 되자  미합중국 육군 소장윌리엄 F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JSOC(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가 소말리아에 파병됩니다. 파병된 부대는 레인저 3대대 B중대, 델타포스 C분견대, 제160특수작전항공연대 "나이트 스토커"(The Night Stalkers) 예하 헬리콥터 16대(MH-60 블랙호크, MH/AH-6 리틀버드)와 조종사 및 정비병, DEVGRU, 제24 특수전술대대 소속 CCT항공구조사의 총인원 450여명이 파견되었으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가디슈 바로 앞 바다에 CVN-72 에이브라함 링컨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소속 제11 비행단도 배치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 무려 모든 작전을 3주만에 끝낸다 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1주일 동안에 병력을 소말리아에 전개하고, 2주차에는 아이디드를 색출해서 검거하고, 3주차에 아이디드의 잔존 세력과 지휘체제를 붕괴시킨 다음에 깔금하게 소말리아를 떠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8월 30일 새벽 2시에 첫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레인저와 델타 포스팀이 패스트로핑을 했고 전범 9명을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이들이 전범이 아니라 국제구호단체 요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개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4번이나 더 출격했으나 번번히 허탕을 쳤으며 그렇게 목표인 3주의 시간이 모두 흘러갔습니다.


그러다가 투입 한 달 만인 9월 21일, 아이디드 지지 세력으로 합류한 오사만 알리 아토를 체포하는데 성공합니다. 알리 아토를 체포하자 화가 난 파라 아이디드는 미군이 보이면 생포고 뭐고 다 필요없고 무조건 죽이고, 미군의 차량은 무조건 파괴하라고 지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9월 25일, 모가디슈 남쪽 공업지대(New Port Facility) 상공을 비행하던 제101공중강습사단 소속 블랙 호크를 무장세력이  총격을 가했고 이후 RPG-7에 한 방에 격추돼 3명의 승무원이 사망하게 됩니다. 아이디드는 이걸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본인이 직접 라디오에 출연하기까지 해서 자기가 직접 격추시켰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JSOC는  9월 25일 발생한 블랙 호크 다운 사건으로 파라 아이디드 체포에 속도를 내기로 결정하였는데 주변인들을 차례대로 체포해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뒤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한다는 기존 계획에서 조금 더 나아가, 파라 아이디드의 참모인 오마르 살라드 엘미(Omar Salad Elmi)와 명목상 내무장관이자 정치고문인 모하메드 하산 아왈(Mohamed Hassan Awale)을 먼저 체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1993년 10월 3일 13시 50분, 소말리아 정보원에 의해 살라드 엘미가 목표 건물에 들어온 게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험비와 트럭 무리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미군에 대한 불신이 쌓인 소말리아 민병대 (무장한 민간인)가 무장 세력에게 빠르게 전파되하였고 또한 거리에 쓰레기 더미와 불타는 타이어 등을 쌓아 미군의 접근을 봉쇄해 방향을 돌렸습니다.

 

▲블랙호크 헬키 슈퍼64 실제 추락 사진

결국 지상군이 목표건물에 늦게 도착하면서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RPG-7에 블랙호크 헬기(슈퍼 61)이 맞으면서 추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추락한 블랙호크 헬기에 민병대가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문제는 추가 지상지원을 위해 추락지로 날아가던 또 다른 블랙호크 헬기(슈퍼 64)마저 RPG-7 로켓에 피격됩니다. 그렇게 임무 종료 무전과 함께 임무를는 실패하였고 지상군과 나머지 병력들은 모가디슈 공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약 99명의 병력이 슈퍼 64 추락지에 묶여 있었습니다.이에 JSOC 소속 지상군은 고립된 병력을 탈출시키기 위해 차량에 주무장을하여 투입되었으며 이 뒤를 말레이시아, 독일 다국적군 소유의 100여 대가 넘는 장갑차와 파키스탄 다국적군 소유의 M48 전차가 따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국적군 소유의 장갑차가 격파되고 다국적군에도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미군은 18명이 죽고 7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군에서도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으며, 파키스탄군 역시 1명의 사망자, 2명의 부상자가 나왔습니다. 소말리아의 경우 아이디드 쪽의 발표에 따르면 315명이 죽고 812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미국과 UN의 자체조사에 따르면 약 1500에서 3000여명 정도가 사망 혹은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사망자 18명 + 부상자 73명은 월남전 이후 벌어진 마야게즈 호 승무원 구출작전의 실패 다음으로 미군에게 큰 피해 규모였고, 전면전인 걸프전에서조차 50만 명의 미군 중 294명이 전사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뼈아픈 피해였습니다. 또한 그 18명이라는 사망자가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특수부대인 델타포스, 미 육군 최정예 보병인 레인저, 그리고 야간 침투가 전문인 정예 강습 조종사인 것을 감안하면 '20명에 근접하는 사망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미국은 두 번 다시 약소국의 내전에 끼어들지 않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