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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21일 오전, 중국 해군의 북해함대 소속 P-6 후추안급 고속어뢰정 편대 6척이 기동훈련차 산둥반도칭다오 항을 출항하였습니다. 편대가 예정된 훈련을 마치고 귀항하는 도중, 산둥반도 동쪽 20해리 해상에서 편대 소속 어뢰정 3213호정의 통신사와 항해사가 AK-47 자동소총을 난사하여 6명을 사살하고 2명을 중상입힌 뒤 편대를 이탈하여 우리나라 방향으로 항진하다가 흑산도 근해에서 연료가 소진되어 표류했습니다.


반란 발발 15시간 뒤인 3월 22일 오전 11시경, 조업을 마치고 귀항 중이던 우리나라
어선 제6어성호가 3213호정의 조난수신호를 발견, 3213호정을 예인하였으나 신고가 늦어졌는데 당시 제6어성호가 어선망인 RF-201 통신기 고장으로 해상에서의 어뢰정에 대한 신고가 불가능하였으며 같은 날 오후 8시경 군산항에서 인근경찰 초소신고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군산 해경을 경유해 해군과 정부에도 통보되었습니다. 그리고 해군은 즉각 작전중인 전 함정에 긴급전보로 구조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실제로 중국 3213호정을 예인하는 모습

3213호정의 소속이 당시 미수교국인 중국 해군 함정인 점을 중시하여, 3213호정이 표류한 해역을 전담하는 해군 제3해역사령부는 사건 해역에 함정을 집결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예하 함정을 동원하였습니다. 또한 목포에서 수배한, 중국집을 경영하는 칭다오 출신 화교 임영정 씨를 통역으로 고속정 PKM-69호정 편으로 데려와 험악한 분위기의 3213호정 승조원들을 진정시키고 무장을 해제시켰습니다.


다음날인 3월 23일 새벽 06시 50분경, 3213호정을 찾아 나선 3척의 중국 해군 함정
이 집결중인 우리나라 해군 동해급 초계함 수원함유도탄고속함 PGM-61 등의 우리나라 해군 함정과 대치했고, 이후 기어링급 구축함과 고속정 2개 편대, S-2 대잠초계기 등이 증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해군은 중국 함대에게 우리나라 영해에서 즉각 퇴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함대는 오전 9시 하왕등도 1km까지 접근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해군이 먼저 발포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그리고 1985년은 군인들의 사소한 다툼으로도 전쟁으로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해군이 우리 요구에 순응하지 않자 우리나라 공군 전투기가 출격하는 등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긴장된 분위기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계속된 우리 해군의 퇴거 요구로 인해 당일 09시 38분 중국 해군 함정들이 우리 해군이 요구한 해역 밖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외무부 대변인을 통하여 중국 함정들의 한국 영해 침범에 대한 엄중한 항의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항의각서를 전달받은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부주의로 인해 우리나라 영해로 중국 함대가 진입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3213호정과 그 승조원의 송환 및 대한민국 영해 침범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각서를 우리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가 이 사과를 받아들이고 이틀 뒤인 3월 28일 오전 11시에 양국의 중간 지점인 공해상(위도 36N, 경도 124E)에서 3213호정과 사망한 승조원의 시신 및 생존 승조원 전원을 중국 해군에 인계했습니다. 이로써 세계의 관심을 모았던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당시 두 명의 망명 희망자까지 망명을 받아주지 않고 그대로 송환시켜 버린 것에 대해서 약간의 비판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반란에 살인을 일으킨 범죄자 신분의
군인까지 망명을 받아주기란 국제법상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었고, 중국 측이 크게 반발해 사건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컸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또한 북한이 미국의 푸에블로호를 납치하듯이 명백히 영해를 침입한 중국 함정을 나포는 못할지라도 포격을 할 수 있지 않았냐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것은 지극히 계획적인 도발행위로서 국가의 안위에 대한 저들의 판단기준에서 국제법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야만적인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함정의 우리 영해 진입은 지극히 우발적인 사고로서 사전에 예측이 불가하였습니다.

 

 

결국 사건을 일으킨 주범들인 중국의 통신사와 항해사는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었고, 반역죄와 살인죄로 기소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총살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