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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22일, 오전 11시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해군 예인정 (YTL)이 침몰해 해군과 해양경찰 훈련병 159명(해군 109명, 해경 50명)이 숨지는 대참사가 일어납니다. 이날 사고는 해군 병 159기와 해경 11기 훈련병 311명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전적지인 한산도 제승당과 충렬사를 참배한 뒤 예인정을 타고 모함인 LST-815(Landing Ship Tank, 전차양륙함) ‘북한함’으로 이동하던 중, 갑자기 몰아닥친 파도를 피하기 위해 예인정이 급선회를 시도하다 균형을 잃고 전복, 침몰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사고 해역 지도
당시 사고 해역에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 초당 최대풍속 18m의 강풍이 불어 파고가 1~2m로 높았고, 기온마저 영하 20도까지 떨어져 있었습니다. 영하의 바닷물에 빠진 훈련병들은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짠물을 연신 들이키며 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하나 둘씩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사고직후 부근을 지나던 민간선박들이 재빨리 훈련병들을 구조하는 모습

 

마침 풍랑 주의보를 접하고 항구로 피항 하던 어선들이 달려와 구조작업에 나섰지만, 예인정에 타고 있던 인원 중 절반이 넘는 젊은 군인들이 차디찬 겨울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인정(YTL)은 주로 다른 선박을 예항(曳航) 또는 압항(押航)하는 소형 함정입니다. 그런데 당시 해군은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에서 탑승정원 150명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을 태우고 무리한 운행을 강행했고, 거기다 정장의 미숙한 조함 지휘가 겹쳐진 전형적인 인재였습니다.

 

 

그리고 훈련병들이 민무늬 전투복에 전투화 차림이었던 것도 사상자를 늘리는 데 한몫했습니다. 물에 빠지면 헤엄에 방해가 되는 신발을 신속히 벗어야 하는데, 목이 긴 전투화는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특히 한국 해군은 함정에서의 전투화 착용을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엄금하고 있으며, 신병 및 부사관 교육 과정의 마지막에 행하는 함정 견학도 훈련복이 아닌 근무복 및 해상병전투복 차림으로 바뀌었습니다.

 

 

사고 직후 정부는 해군 참모총장과 참모차장을 경질하고 진해 해군 교육단장과 신병훈련소장을 직위 해제하는 한편 훈련소 대대장 등 인솔 책임자 3명을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해군으로서도 숨기고 싶은 흑역사였으며 군사정권의 시퍼런 서슬에 억울함을 유가족들은 드러내지 못했고, 그동안 위령제도 자체적으로 치뤄왔습니다.

 

 

2004년, 사고에서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주축이 되어 ‘해군 해경 159위 위령탑 건립위원회’가 발족하면서 통영시와 함께 사고 현장에서 1km 떨어진 정량동 망일봉에 위령탑을 건립하였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해군 역사상 최고의 수치였으며 현재까지도 전시가 아닌 평시 해난사고 중 세계 해군 사상 가장 많은 인명 손실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군 당국도 ‘해군의 수치’인 이 사건이 거론되는 것을 꺼려 왔으나, 이런 안타까운 사건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지며 1998년부터 통영 해군 전우회와 함께 합동위령제를 주관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