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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유리한 상황일때 만약 전진을 멈추면 적에게 병력을 재정비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준다는 것은 군사상식에서도 가장 기초입니다. 한번 승리하면 적에게 숨쉴 틈도 주지 않고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합니다. 물론 병참상의 부담이나 아군의 피로 또한 고려해야 하지만 여기에 매달려 유리한 시기를 놓치면 더 큰 손실을 감내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북아프리카에서의 롬멜이고 국공내전에서의 마오쩌둥입니다.

 

마오쩌둥은 만주에서 승리한 후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하합니다. 이로 인해 병사들의 피로는 한계에 직면하고 병참선도 늘어질대로 늘어집니다. 장제스가 충분한 예비병력이 있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면 공산군의 전진을 손쉽게 막아내고 다시 전세를 역전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그렇게 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속전속결로 밀어붙여 내전 3년만에 광대한 중국 대륙 전체를 석권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왜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단숨에 남하하지 않았을까요

 

 

첫째 김일성은 대규모 군대를 지휘한 경험도 일천한 아마추어 전략가였으며 충분한 준비 없이 당장의 군사적 우세함만 생각하고 전쟁을 졸속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개인적으로 "서울이나 대도시 점령에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해서는 안되며 적 주력을 신속하게 섬멸하여 단숨에 남하해야 한다"라고 조언까지 했습니다.

 

북한의 서울 점령 기간 동안 벌어진 정치 선동 행사모습

그러나 수도 점령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에 목적을 둔 김일성은 이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점령한 다음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고 남한정권에 가담한 정치가, 재야 인사 등을 체포하고 학살하는데 급급했습니다.

 

 

둘째 한강교를 폭파되자 북한군은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충분한 도하장비를 준비하지 않은데다 이미 미공군의 전략폭격으로 병력의 주간 이동과 병참선에 큰 타격을 입기 시작하였습니다. 6월 28일부터 시작된 미공군의 전략폭격은 오폭으로 남한군이나 민간인에게도 극심한 피해를 주었지만 북한군 역시 큰 타격을 입었으며 김일성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여 스탈린에게 소련공군의 개입을 강력하게 요청하게 됩니다.

 

 

애초에 충분한 준비 없이 졸속으로 전쟁을 시작한 대가였습니다. 만약 서울을 점령하지 않고 우회했다면 북한군은 훨씬 용이하게 속전속결로 한반도 전역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셋째 서부전선의 승리와는 달리, 동부전선에서는 우리 국군 6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북한군 제2군단의 춘천 점령이 일시적으로 지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국군 주력에 대한 포위 섬멸에 차질이 발생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차질은 결코 전체적인 전쟁 흐름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으며 사실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범위였습니다. 그런데 조금의 차질조차도 향후 작전에 큰 지장을 준 이유는 북한군의 예하 사단장들이 창의성이 부족하고 수동적이며 지휘 계통의 경직성으로 상급 지휘관의 명령이 없을 경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이 북한군과 국공내전기 인민해방군과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국공내전 당시 마오쩌둥은 옌안의 토굴에 앉아서 간섭을 남발하는 대신, 기본 방침만 정하고 실무 차원에서는 예하 부대에 최대한의 행동상 재량권을 부여하여 지휘관들이 진퇴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오쩌둥 자신은 현대적인 군사 교육을 단 한번도 받은 적도 없고 몇권의 책을 읽었을 뿐 기초적인 군사 상식도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 덕분에 린뱌오, 펑더화이, 천이, 류보청 등 지휘관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신속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김일성은 히틀러마냥 모든 지휘권을 자신이 틀어쥐고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책임만 주고 권한은 주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은 2개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사단은 군단 지휘부의 지휘를 받아야 함에도 실제로는 김일성의 직접 지휘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전쟁 기간 내내 부대의 효율적 지휘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습니다.

 

 

통신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각각의 부대는 전황의 전체 흐름이나 타 부대, 심지어 자신의 개별부대조차 어떤 상황에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김일성 또한 전황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잠망경 없는 잠수함이었던 장제스와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지금도 김씨왕조는 다른 건 몰라도 권력 유지를 위해 군권만큼은 반드시 자기가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시간을 지연하게 된 이유는 우리 ​김홍일 장군이 패잔병들을 모은다음 한강 이남의 지연전을 맡아 훌륭한 지연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지연전은 북한군의 도하를 잠시나마 지연시키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적 여유를 벌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국 부산까지 순식간에 밀려 버렸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