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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공비의 정식명칭은 조선인민유격대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대남적화의 선행단계로서 북한 전역을 무력남침을 수행하기 위한 기지로 만들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 조성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군사력을 증강함과 동시에 1949년 7월 월북자를 비롯한 다양한 인원들로 편성된 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렇게 인민유격대는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반란사건으로 진압부대가 호남과 경남 지역에 집중돼 후방경비가 허술해지고 남한사회가 혼란해지자 본격적으로 남한에 침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거의 정규군의 일개 부대와 비슷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가 잘리자 퇴로를 잃어버린 북한군 잔당과 북한의 남한 각 행정부처, 그리고 협력세력들은 퇴로를 잃은 채 무장세력으로 정착됩니다. 이들은 북한이나 서로간의 연계가 거의 되지 않고 각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백선엽 백야전전투사령관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30일 전북 남원시의 정보(G-2)상황실에서 열린 참모회의에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작전지도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

 

각 세력은 행정구역 도 단위로 활동하였는데 경남도당, 경북도당, 전남도당, 전북도당 등 상당수의 세력이 태백산맥에서 뻗어 나온 산들에 터를 잡고 활동하였기 때문에 태백산맥, 그 중에서도 지리산은 빨치산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빨치산은 대한민국 육군과 경찰로 구성된 1차 대공세로 인해 그 위세를 잃었으며 2차 대공세때 완전히 작살나 버려 이후에는 더 이상 조직적인 부대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후 망실공비란 이름으로 경찰서 형사들의 추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자신을 지지해준 조선인민유격대를 정규군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데려갈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난뒤에도 빨치산 세력에게 산에서 내려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만 전해주었을 뿐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측이 정전협정때 제발 조선인민유격대원들을 데려가라고 먼저 제의했는데도 북한측에서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탈북자들 증언에 의하면 조선인민유격대는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존재이며 기껏해야 남조선 내 자발적인 혁명전선, 즉 제2전선으로 불릴뿐이었다고 합니다.

 

(애국심으로 자원해서 빨치산 공비 토벌에 나선 전라도 청년들)

 

1948년 11월부터 6·25전쟁 직전인 1950년 3월까지 모두 10회에 걸쳐 침투해 온 유격대원 수는 무려 2,40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인민유격대는 국군과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2,000여 명이 사살 또는 생포되었지만 나머지 400여 명은 남한 각지의 오지에 틀어박혀 북한의 남침 직전까지 계속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전방 사단의 일부와 후방 3개 사단을 포함해 총 4개 사단병력과 경찰병력을 토벌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빨치산 공비 토벌에 나서 지리산 정상까지 소탕에 성공하여 태극기를 게양한 모습)

 

1955년 4월 1일이 되서야 지리산 입산통제가 해제되어 누구나 지리산 등반에 나설 수 있게 됐으며 정부는 1955년 5월 23일 빨치산 토벌이 종료됐음을 정식으로 발표했습니다. 마지막 빨치산 테러분자 정순덕은 민가에서 밥이나 훔쳐먹는 망실공비 수준으로 지내다 1963년 11월 12일 오전 11경에 총격전 끝에 체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