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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투사(KATUSA)는 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the United States Army의 약칭으로 미군부대에 배속돼 근무하는 한국군 병사를 말합니다. 카투사는 한국전쟁에 당시 파병된 유엔군에게 가장 큰 에로사항은 언어소통과 익숙지 못한 한반도 지형이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50년 8월 15일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의 구두협약을 맺으면서 탄생하였습니다.

 

 

한국전쟁 카투사는 전사율이 높은 보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우들과 똑같이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지내왔다고 오해받은 경우가 많으며 한국전쟁에 카투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국전쟁 당시 누구보다 용감했었던 카투사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951년 초 경기 덕정 인근에 배치된 호주군 대대에 배속된 카투사

 

당시 카투사는 유엔(UN)군에 배속되어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캐나다·호주·프랑스·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그리스 군대에 배속되었으며 첫 카투사는 50년 8월 16일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한 313명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K로 시작하는 군번이 주어졌지만 당시 카투사는 대부분 군번도 계급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카투사 징집 기준은 소총을 어깨에 메고 땅에 닿지 않으면 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카투사들은 미 육군 7사단에 배속되어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여했는데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안되지만 당시 미 7사단에 병력 50%가 카투사였다고 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카투사는 서울을 탈환하면서 북으로의 진격을 계속했습니다. 이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11월 21일 압록강변의 혜산진과 초산까지 진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은 최소 만명 이상 전사하였지만 카투사 875명도 전사하거나 실종되기도 하였습니다.

 


장진호 전투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군의 가장 굴욕적인 전투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사실 혹한의 추위 속에 유엔군은 17일간 장진호 주변에서 사실상 중공군을 괴멸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중공군의 중동부 전선 남하가 지연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공군의 최종 진격 목표는 부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진호 전투에서 카투사 역할이 괸장히 컸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카투사의 활약은 엄청났습니다. 카투사는 북한군의 방어진지를 찾아내고 북한군과 한국군을 식별하였으며 임무와 포로를 심문하는 일까지 모두 맡았으며 유엔군 일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두려움 없이 앞장서서 싸우는 용감한 전사였습니다.

 

 

전쟁터에서 수색·안전 정찰 등 위험한 일도 카투사의 몫이었으며 박격포·무반동총·탄약 등의 무거운 병기류 운반도 하는 등 전쟁터 모든 곳에 카투사가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4만3000여명이 참전했고, 이 가운데 9000여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습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 쌓아 올린 혁혁한 전공 속에는 4만3000여 명의 카투사들의 이 흘린 피와 땀, 노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카투사들은 내가 지휘해 본 가장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들은 절대 술에 취한 채 나타나지 않았다.

지칠 줄 모르며 군기가 서 있었고 지식습득능력이 우수했다.”

-6·25전쟁 이후 미 2사단에서 대대장을 지낸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 저서中-

 

 

현재 현역으로 근무하고 있는 카투사는 약 3600명이며 카투사 지원 규정상 지원 횟수가 평생 단 1회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매년 약 2000명을 선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한미군 50여 개 지원대에 배치되어 보병· 포병·기갑·공병·통신·보급·행정·헌병 등 다양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