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태평양전쟁 당시 미 해군의 중순양함이엇던 인디애나폴리스는 1930년대에 취역한 후 몇 번의 개장을 받아 화력과 대공지원능력을 향상시켜 오키나와 공격에도 참여했습니다. 인디애나폴리스는 일본 자살공격대 카미카제 공격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혁혁한 전과를 기록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형 전투함은 자체 스크류 소음이 크기 때문에 대잠작전 관련 장비는 탑재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구축함급 이하의 호위함과의 이동이 필수사항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였던 1945년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인디애나폴리스는 함장 찰스 B. 맥베이 3세 대령의 지휘아래 1196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B-29가 출격대기중인 티니안 섬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에는 역사를 뒤바꿀 물건인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재료. 고농축 우라늄을 싣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 해군은 이 임무를 극비임무로 취급했으며 일본 해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가 단독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맥베이 대령은 호위함을 여러번 요청했으나 지휘부는 이를 묵살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것은 모든 비극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45년 7월 28일 무사히 화물을 실어 날랐던 인디애나폴리스는 다음 작전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 섬으로 이동을 시작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이미 비밀 준수가 필요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상부에서 호위함을 붙여주지 않아서 단독으로 항해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항복을 하기 보름 전 7월 30일 새벽. 일본군 잠수함은 이를 발견하고 어뢰 6발을 발사시켜 2발을 명중시키며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킵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침몰에 걸린 시간은 약 12분이었습니다. 인디애나폴리스 중순양함의  침몰 직후 함장은 즉시 구조신호를 보내고, 승무원들에게 퇴함명령을 내려서 폭발 직후 사망한 300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모두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생존자는 900명에 가까웠습니다.

 

 

그 곳에서 빨리 구조가 이루어졌으면 모두가 생존했겠지만 무려 4일이나 지난 1945년 8월 2일, 정기적으로 정찰을 하는 해군 항공기가 처음으로 바다위에 떠있는 생존자들을 발견하고 구조를 시작하였고 그 후 약 이틀간 구축함까지 동원되어 모든 생존자를 건져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남은 최종 생존자는 316명이었습니다. 식수와 의약품이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약 5일간  생존자들은 바다 위에 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다위에서 탈진한 수병들은 서서히 죽어가거나 환각증세까지 보였습니다. 문제는 수병들이 표류한 그 주변해역은 상어 떼의 출몰지였습니다. 상어들은 처음에는 미 해군 수병들의 시체를 노렸고 그 다음에는 주변의 부상자를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해군 비행기가 구조하는 도중에 상어가 생존자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과거 임팔 전투 당시 일본군이 바다악어 집단 서식지에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한 부대가 악어 떼들에게 통째로 잡아먹힌 이래 최악의 참사였습니다.

 

 

함장 맥베이 대령은 이 순간까지도 구조신호를 계속 보냈고, 조명탄과 거울까지 동원해 구조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습니다. 침몰 직후의 구조신호는 근처의 미 해군 수신소가 감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한 수신소는 당직사관이 술에 취해서 곯아 떨어져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수신소에서는 당직사관이 놀고 있느라고 신호자체를 무시했으며 마지막 수신소까지 일본군의 계략이라고 판단해 구조신호자체를 무시했습니다.

 

▲괌으로 이송된 인대아나폴리스의 생존 수병들 1945년 8월

 

사실 당시는 그 누구도 감히 미 해군의 함선을 가라앉힐 거라 의심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사건은 미 해군에게도 충격이었지만, 언론에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당시 인디애나폴리스 함장 멕베이는 그야말로 대역죄인이 되었습니다. 멕베이는 애타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구조 요청을 보냈는데 왜 응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미 해군의 공식 답변은 '구조 요청 없었음'이었습니다. 미 해군으로서는 어떻게든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맥베이 대령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후 니미츠 사령관은 멕베이를 원상복귀시키고 제독으로 승진시키지만 1949년 소장을 끝으로 사실상 불명예 제대를 하였습니다그 뒤에도 수백 명의 젊은이들을 상어밥으로 만들었다는 대중들과 유족들의 비난을 뒤집어쓴 채 맥베이 대령은 1968년 70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수십 년 뒤 미국의 열 두 살 소년이 영화 죠스를 보게 되었는데 소년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퀸트의 경험담에 전율했고 그 사건의 무대가 된 인디애나폴리스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료를 조사하던 소년은 그 배의 함장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 내막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무죄 탄원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소년의 활약으로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인디애나폴리스 사건의 대규모 조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경악할만한 사실이 여럿 밝혀졌는데 당시 멕베이 함장이 구조 요청을 했었다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미 상원 군사위원장 존 워너 의원 앞으로 편지가 한 통 도착하였는데 당시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던 일본군 잠수함 I-58 함장 하시모토 모치츠라가 쓴 것이었습니다.

 

'당시 어뢰공격을 지시했던 장본이으로서, 저는 멕베이 대령이 왜 군사법정에 세워졌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경계태세를 소홀히 했다는 유죄 이유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당시 인디애나폴리스는 어떤 방비를 하고 있더라도 격침이 간으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인디애나폴리스의 승무원들은 끔찍했던 전쟁과 그 결과에 대해 서로를 용서했으며 이제 귀하와 귀하의 나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멕베이 대령에게 내려진 부당한 혐의를 벗겨 주실 것을 믿습니다.'

 

1999년 이 편지를 보낸 하시모토는 1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그 해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맥베이 함장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구소련 시절부터 핵잠수함 강국으로 명성을 날린 러시아는 그만큼 크고 작은 사고 또한 많이 발생해서 여러 차례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습니다. 1960년대 이래 20여 척의 잠수함이 침몰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개는 함내의 어뢰 폭발이나 다른 선박과의 충돌, 혹은 승조원의 기관 조작 실수 등의 이유로 비극을 맞았습니다. 심해를 잠항하는 잠수함의 특성상 잠수함은 한번 침몰하게되면 거의 대부분의 승조원들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를 초래합니다.

 

지금까지 러시아의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냈던 사건을 꼽으라면 지난 2000년 8월 침몰한 쿠르스크 호 침몰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핵잠수함 K-141이라고도 불리는 쿠르스크 호는 구소련 시절 건조된 것으로 최대 24기의 핵탄두 미사일을 탑재하고 수심 500m까지 잠항할 수 있는 최신예 잠수함이었습니다. 또한 4층 건물 높이에 축구장 두 개를 합친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으며, 2중 강철로 이루어진 선체 덕분에 안정성 면에서도 기존의 잠수함들보다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2000년 8월 12일 ‘절대 침몰 불가’라는 예상을 뒤엎고 구소련의 자존심에 커다란 흠집을 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훈련 중이던 쿠르스크 호가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해저 108m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승조원 118명 전원이 사망했으며, 인양된 후에 건진 시신도 12구에 불과했습니다. 함수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해 그쪽에 몰려 있던 군인들 대부분이 폭발과 함께 공중으로 분해됐던 것입니다.

 

 

사고 원인에 대한 의혹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처음에는 미국이나 영국의 잠수함과 충돌했다고 주장했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주장이 신빙성이 없다며 반박했습니다. 두께 40㎝의 2중 강철로 이루어진 쿠르스크 호가 그 정도의 충돌로 침몰했을 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러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침몰 원인은 “함내의 어뢰에서 불량연료가 누출되어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폭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어뢰의 압축가스로 사용된 과산화수소에 있었으며, 이로 인해 어뢰 2기가 연속으로 폭발해 침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더 불러일으켰던 것은 승조원들의 생존 가능성을 둘러싼 논란이었습니다. 침몰 후에도 한동안 살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23명의 승조원들이 과연 함내에서 얼마나 버티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조작업이 조금만 빨리 진행됐어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러시아인들은 정부의 늑장대응과 안이한 대처에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침몰 후 생존자가 있었다는 안타까운 사실은 인양된 시신 한 구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쪽지를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드미트리 콜레스니코프 중위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쪽지에는 사고 발생 후 함내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쪽지에는 “두 번의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함수가 심하게 흔들렸으며, 대부분의 승조원들은 폭발과 함께 즉시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한 “모든 생존자들이 함미 부분으로 이동했다. 현재 23명이 살아 있다. 우리 중 선체 표면으로 접근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적혀 있어 생존자들이 탈출을 시도했던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처음에는 또박또박 쓰인 글씨가 끝으로 갈수록 휘갈겨진 것으로 미루어 글을 쓰는 도중에 비상등이 꺼진 것으로 추측됐으며, 쪽지의 마지막 부분에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감각에 의지해 글을 쓴다. 이제 가망이 없을 것 같다. 누군가 이 글을 보기만 해도 좋겠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이 얼마나 오래 살아 있었는지, 산소 부족으로 인한 질식사였는지 아니면 함내로 스며든 해수 때문에 익사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쪽지로 인해 몇 가지 사실은 확인됐습니다.

 

 

러시아 해군은 침몰 즉시 구조작업을 벌였다고 주장했지만 쪽지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그렇지 못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선체를 두드려서 생존자가 있는지를 살폈다는 러시아 해군의 주장과 달리 콜레스니코프의 쪽지에서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 러시아 정부와 해군의 태도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처음 서방 언론을 통해 사건이 보도된 후 이틀이 지나서야 침몰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또한 ‘이미 모두 사망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영국이나 노르웨이 등의 도움을 거부했었습니다.

 

 

2003년 발간된 <타임 투 다이-쿠르스크 호 비극의 숨겨진 이야기>의 저자인 영국의 로버트 무어 기자 역시 책에서 “쿠르스크 호 침몰은 예정된 비극이었다”고 말하면서 러시아 정부의 잘못된 결정과 정치적 실수로 118명의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고 지적했습니다.

 

C-130 허큘리스 수송기는 오랜세월 서방측 가장 중요한 중형 수송기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만큼 여러가지 형태로 개조도 많이 되었는데 지금으로부터 54년전에는 항모에 이착함 할 수 있는 형태로 개조가 시도된 바 있습니다. 그것도 현재 니미츠급 항모보다 작은 포레스탈 (USS Forrestal, CV-59)였습니다.

 

(항모에서 이착함 하는 C-130. 1963 년   Credit : US Navy)

 

1963년 사실 미 해군은 갈수록 늘어만 가는 항공모함의 물자 요구량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보금품이 떨어져서 육지로 정박을 할 수 없었고 헬기로 수송하는 양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형 4 발 엔진 수송기를 이착함 시킬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게됩니다. 당시 미 해군이 가진 슈퍼 캐리어인 포레스탈이면 일단 가까스로 C-130 의 이착함이 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하게 됩니다. 

 

 

미 해병대의 USMC KC-130F (BuNo 149798)가 이 위험 천만한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1963년 10월에서 11월 사이 테스트가 진행되었습니다. 항모 포레스탈 위에서 총 29 회의 touch and go landing (착함 후 감속없이 바로 다시 이륙) 와 21 회의 착함 훈련(unarrested full-stop)을 실행하였습니다.

 

 

이 테스트를 진행한 조종사인 제임스 플래틀리 (James H. Flatley III)는 사실 이전에 4발 엔진 항공기를 조종해 본 경험이 없는 미 해군 조종사였지만 "스모키" 스토벌 (Smokey" Stovall) 및 에드 브레넌 (Ed Brennan) 등과 함께 이 위험천만해 보이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비행 수훈 십자 훈장 (Distinguished Flying Cross) 을 받았습니다.

 

 

미국 해군은 C-130이 25,000 파운드 (11 t)의 화물을 싣고 2,500 마일 (4,000 km)을 비행한 다음 항공모함에 착륙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렇게 테스트는 성공이었지만 결국 미 해군 수뇌부는 이 중형 수송기가 안정적으로 항모에 착함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통상적인 항모 탑재 수송 임무 ("Carrier Onboard Delivery" (COD)) 투입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항모 갑판 위에서 운용하기에 너무 큰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54년간 허큘리스나 그 비슷한 크기의 항공기가 항모에 착함할 일은 없었습니다. 미래에 엄청나게 큰 항공모함이 탄생한다면 모를까 당분간은 이런 시도는 더 이뤄지긴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 테스트에 사용된 C-130 은 퇴역후 현재 플로리다에 있는 국립 해군 항공 박물관 (National Museum of Naval Aviation) 에 기증되어 '역사상 항모에 이착함한 가장 거대한 항공기'라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후 미 해군은 최대이륙중량 23톤인 C-2 그레이하운드 수송기를 개발하였습니다.

 

사무실은 직장인들에게 또 하나의 집이라고 불립니다. 하루 중 최소 8시간씩, 주 5일 동안 일하고 쉬고 또 일하는 공간입니다. 이왕이면 최적의 업무환경에서 보다 더 기분좋게 일을 하면 능률도 쑥쑥 오르겠죠! 사무실 책상에 필요한 아이템 10가지를 소개합니다.


 

1. 모니터 메모 보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이를 잊지 않기 위한 메모는 필수입니다. 모니터 메모 보드는 자주 사용하게 되는 전화번호나 메일주소 등을 붙여놓기도 좋으며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들을 포스트 잇에 적어 붙여준다면 일을 하다가도 수시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2. 미니 화분 

 

녹색 식물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효과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큽니다. 녹생은 하루종일 사무실에 있는 동안 느껴지는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며 모니터에 시달린 눈을 편히 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몇몇 식물들은 공기를 정화하고 전자파를 흡수하는 성질까지 갖고 있어 직장인의 사무실 책상에는 꼭 필요한 아이템입니다.


 

3. 발 해먹 

 

아침과 저녁까지 사이즈가 달라질 정도로 퉁퉁 붓는 발을 위한 최고의 아이템이 바로 발 해먹입니다. 많은 직장인분들이 불편한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하고 슬리퍼로 갈아신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루종일 구부리고 있는 무릎을 쫙~ 펴줄 수 있는 발 해먹을 한번 사용해보신 분들은 완전 중독됩니다.


 

4. 아로마 디퓨저

 

직장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아로마 향의 디퓨저를 사용한다면 아로마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잦은 야근이나 업무 과다로 인해 피곤할 때는 레몬, 유칼립투스, 자스민, 로즈마리 등의 아로마 향을 선택해주시면 피로감은 사라지고 집중력은 향상됩니다.


 

5. 가족사진

 

바쁜 업무와 단조로운 일상에 지친 직장인들이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바로 가족입니다. 사무실 책상 한편에 가족사진이 있다면 더욱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6. 모니터 거울 

 

물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내는 것이 직장인의 본분이지만 가끔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내 자리 뒤에 상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이 모니터 거울이 있다면 상사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피해 쉬는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7. 사무실용 가습기 

 

건조한 사무실 공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습기가 필수입니다. 특히 요즘같이 건조하고 황사도 많은 봄 날씨에는 집만이 아니라 사무실도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주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습기는 종류가 너무나도 다양하고 가격도 천차만별입니다. 사무실 용으로는 세척이 간편하고 필터 교체가 필요없는 초음파 가습기나 천연 가습기가 좋습니다.


 

8. 텀블러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성인의 하루 물 섭취 권장량은 1.6~2L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루 물 섭취량을 조사한 결과 직장인들의 물 섭취량은 권장량에 한참 못 미치는 1L가 조금 넘는 정도라고 합니다. 물만 잘 마셔도 봄철 불청객인 황사와 미세먼지를 몸 밖으로 상당수 배출해낼 수 있으며 변비나 체중 감량 등 직장인들의 고민거리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9. 마우스 손목 받침대

 

오랜 시간 컴퓨터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직업병인 VDT 증후군은 눈의 피로와 두통, 손목, 관절, 목, 어깨 부위 통증을 가져옵니다. 이런 VDT 증후군은 제대로 된 컴퓨터와 주변기기 사용만으로도 상당수 호전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많이들 불편을 호소하는 목과 어깨 부위의 통증은 모니터 높이를 제대로 맞춰주시면 예방이 간으하고 속목이 시큰거리는 경우 속목에 무리가 덜 가도록 마우스 손목 받침대를 사용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10. 케이블 홀더

 

대부분 사무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선들이 지나다니고 있습니다. 휴대폰 충전, 노트북, 가습기, 이어폰 등 정말 지저분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간단한 케이블 홀더 하나면 정말 깔끔하게 정리가 가능합니다!

 

포카리 스웨트 CF는 단순 이온 음료 광고를 넘어 청순하고 트렌디한 여배우만이 할 수 있는 광고로 통합니다. 일명 '포카리걸' 이라 불리는 역대 20명에 대해 소개합니다.

 

1. 최윤희(1987년,1988년)

 

 

아시아 인어라고 불렸던 수영 선수 최윤희는 포카리 스웨트 광고 모델로 1987년과 1988년에 활동하였습니다. 조오련 이후 10년만에 나온 아시안 게임 수영 금메달이라는 실력에 미모를 겸비했기에 당시 최윤희는 최고의 여자 스포츠스타였고 일찍이 국민 여동생의 위치에 올랐었습니다

 

2. 박영선(1989년)

 

 

2대 포카리 걸 박영선은 긴머리에 청순한 얼굴로 1989년 광고에 출연했습니다.

 

3. 김혜수(1990년)

 

 

앳된 모습의 김혜수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타고난 미인입니다. 얼굴, 몸매도 되는데 연기력까지 출중하고 예능감도 좋습니다.

 

4. 고현정(1991년)

 

 

당시 최고의 여배우였던 고현정은 해변에서 정말 청순한 모습을 보여주며 남심을 사로잡았습니다.

 

5. 김윤정(1992년)

 

 

배유 김윤정은 이 광고에서 대학생 역할을 맡아 청순하면서 풋풋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6. 김지수(1993년)

 

 

1992년 SBS 2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배우 김지수는 데뷔 1년만에 포카리 걸로 해변에서 광고를 찍었습니다.

 

7. 심은하(1994년)

 

 

많은 남자들의 이상형 배우 심은하도 포카리 스웨트 광고를 거쳤습니다.

 

8. 장진영(1997년)

 

 

1993년 미스 대전·충남 진으로 뽑힌 후 광고 모델로 활동하다 인기에 힘입어 포카리 걸이 되었습니다.

 

9. 김규리(1998년)

 

 

1994년 KBS '신고합니다'로 데뷔한 배우 김규리는 여행 컨셉로 포카리 스웨트 광고를 찍었습니다.

 

10. 손예진(2001년,2002년,2007년,2008년)

 

 

이 시리즈물의 컨셉을 정립한 손예진의 CF를 보면, 긴 생머리의 미녀가 순 백색의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찰랑 휘날리며 남유럽의 하얀집과 푸른 해변가의 강렬한 색채 대비에 광고모델의 청순함을 극대화 시키는 CM송까지 가미하는 등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시킨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11. 한지민(2003년)

 

 

 

 

손예진에 이어 포카리 스웨트 광고 모델을 한 한지민은 워낙 순수하고 청순한 이미지였기에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2. 박신혜(2004년)

 

 

2003년 이승환의 뮤직비디오로 데뷔하고 탄력을 받아 2004년 포카리 스웨트 모델로 활동했습니다.

 

13. 이연희(2005년)

 

 

 

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미소로 지금까지도 청순함으로 많은 남심을 사로잡고 있는 이연희도 2004년 집을 짓는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14. 고은아(2006년)

 

 

양재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2004년 9월에 데뷔하여 8개월 만에 무려 7편의 CF에 출연하며 결국 포카리 스웨트까지 출연하였습니다.

 

15. 김소은(1998년)

 

 

'지칠 떈 하늘을 봐' 귀여운 모습으로 해변에서 신발 던지기를 하는 모습이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16. 양진성(2010년)

 

 

이화여대 조형예술학을 전공한 배우 양진성은 2010년 포카리 스웨트 모델로 뽑혔습니다.

 

17. 문채원(2011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네요 문채원은 2011년 포카리 스웨트를 찍었는데 손예진 다음으로 가장 잘 어울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18. 박세영(2013년)

 

 

상명대 영화과를 졸업한 박세영은 지난 2013년 포카리 스웨트 모델로 뽑혔습니다.

 

19. 이다인(2014년)

 

 

배우 견미리의 딸 이다인은 2014년 도시편 포카리 스웨트 광고에 출연하였습니다.

 

20. 김소현(2015년)

 

 

밝고 건강한 느낌을 주는 김소현은 개인적으로 손예진에 이어 장기적으로 활동해도 될 정도로 정말 잘 어울립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보면 불쾌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약간의 예의만 갖추어도 넘어갈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몇몇 운전자들 때문에 화가 치미는 일이 허다합니다. 최근 들어 보복운전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서로 운전 매너를 지켜가며 양보하는 마음을 갖고 운전하면 별일 없이 지나갈 일이 보복운전에서 큰 사고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로교통법 개정안에는 보복운전을 저지를 경우 1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도록 했고 중앙선 침범, 앞지르기 방법 위반 등 보복운전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만약 보복운전을 당하신다면 최대한 다툼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사고 전후 상황을 생생하게 촬영하는 블랙박스는 처벌과 피해 보상에 결정적인 증거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필수로 장착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행복한 도로모두의 안전을 위해 지켜야 할 운전 매너 10가지를 소개합니다.


 

1. 무리한 끼어들기, 꼬리물기 No!!!

 

실제로 교통량이 많지 않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거리에 나가보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해 끼어들기와 꼬리물기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출퇴근 시간이 되면 끼어들기, 꼬리물기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2. 방향지시등은 기본 매너

 

차선을 바꾸려 할 때, 옆 차선의 자동차가 충분히 인지할 수 있도록 최대한 멀리서 방향지시등을 켜는 것은 기본 매너입니다.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는 것이 불쾌감을 주는 최악의 매너 1위로 뽑힐정도입니다. 방향지시등을 꼭 습관화 해야겠습니다.


 

 

3. 보행자 우선

 

모든 운전자는 운전자이기 이전에 보행자입니다. 하지만 운전대만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사실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아직 보행자 신호가 녹색등인데도 정지선을 넘어 횡단보도까지 진입하는가 하면, 몸이 불편한 보행자가 조금만 늦게 길을 건너도 위협하듯 경적을 울리기도 합니다. 매너운전의 기본원칙 중 한 가지는 바로 ‘보행자 우선’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보행자의 안전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5. 경적은 꼭 필요 시 한번만

 

도로 소음 공해의 주범인 자동차 경적 소리는 사람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합니다. 자동차 경적은 천둥이나 전기톱 소리랑 맞먹는 110 데시벨 이상의 소음을 만든다고 합니다.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청각 손상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큰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경적은 꼭 필요한 상황에서 한 번만 짧게 눌러 주시길 바랍니다.


 

 

6. 고속도로 차선 매너

 

고속으로 주행하는 고속도로에서는 다른 차량과의 흐름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차량의 흐름에 방해가 될 때는 가장자리 차로로 변경합니다. 또, 고속도로에서는 앞지르기 차로가 존재하므로 주행차로처럼 운행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앞지르기 차로에서 서행하는 것은 차량흐름을 방해하는 주원인이 됩니다.


 

 

7. 어두워지기 전에 미등

 

야간 운전시나 터널에 진입할 때는 어두워지기 전에 남보다 먼저 미등을 켜 자신의 차 존재를 다른 차가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한적한 지방도나 국도를 달릴 때는 상향등을 적극 사용하는 것이 좋지만 반대 차선에 차가 보이거나 앞서 달리는 차가 나타나면 반드시 하향등으로 낮춰 다른 운전자가 눈이 부셔 운전에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8. 운전 중 스마트폰 사용 No!!

 

스마트폰 사용은 전방을 주시하는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에 사고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작년에는 휴대전화나 라디오 등 전자기기 조작으로 일어난 교통사고가 약 4천 건이나 발생해 66명이 숨지고 부상자는 6천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운전 중에 잠시 딴짓 하다가는 본인과 다른 운전자 모두에게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9. 주차 매너

 

옆차와 간격을 고려하지 않고 문을 여는 경우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옆차에 흠집을 남기게 되므로 항상 옆차와 간격을 계산하고 주차 해야합니다. 그리고 간혹 초보운전자는 주차칸 안에 주차하기를 버거워하는 경우 주차선을 어기고 주차하는 때도 있습니다.  한 대의 차량이 이중 주차를 해버리면 다른 차량의 주차공간을 빼앗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10. 응급 차량

 

응급차, 소방차 등 긴급 차량에는 반드시 길을 양보해야 합니다. 편도 1차선 도로에서는 오른쪽 가장자리로 진로를 최대한 양보하면 됩니다!


 

Bonus 비상등

 

비상등은 위급한 비상 상황에서 켜는 등으로 갑자기 차를 급정거할 때나, 운전자 혹은 차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비상등을 켜는 것은 독특한 의미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감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차선을 변경하여 끼어들 때나 주변 차량에 미안한 일이 생겼을 때 잠깐 비상등을 깜빡여서 “미안합니다” 또는 “감사합니다”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류신 IL-28은 소련 공군용 제트 엔진 폭격기입니다. 소련은 총 6,316 대, 중국은 319 대 이상을 제작했습니다. 디자인은 완전 구식, 구형과도 같아보이지만 우수한 성능 덕분에 60여년간 여러나라에서 운용되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와 대치 중인 북한에서도 주력 폭격기로 사용하고 있는 기종입니다.

 

▲북한 의주 비행장에 배치중인 IL-28과 개조버전인 H-6

 

IL-28 폭격기는 현재 북한의 주력 폭격기로써 전투력 측면에서는 형편없습니다. 일단 워낙 오래된 기체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신형 전투기들이나 강력한 레이더 능력을 갖춘 대공망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 기종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북한의 핵무기입니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통해 우리나라에게 타격을 주려고 한다면 핵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IL-28 폭격기입니다.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 당시 공군참모총장은 '북한의 IL-28은 저고도에서 2만~3만 피트의 고고도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2~3톤 무게의 핵탄두를 운반할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IL-28 폭탄창의 모습(동체 내부 폭탄창에 3톤의 폭탄 탑재 가능)

 

기본적으로 폭격기이기때문에 날개 아래에 폭탄과 보조연료탱크를 매달아야 하는 전투기들과 달리 3톤에 폭탄을 온전하게 보관하며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 폭탄창에 북한의 핵무기가 들어가게 된다면 아무리 구식 폭격기라고해도 우습게 볼 일만은 아닙니다.

 

 

북한은 일류신 Il-28 경폭격기를 80여대 보유하고 있으며 폭격기 전대를 이뤄 운용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북한군이 핵공격을 할 경우 이 폭격기를 최우선적으로 사용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IL-28은 아음속(亞音速)의 구형 폭격기이기 때문에 극초음속의 중장거리 미사일에 비하면 위험도는 떨어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탄두의 경량화가 필요한 미사일에 비해 비교적 제작과 탑재가 용이하므로, 당장이라도 북한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수 있도록 만든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일례로 미국은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앨러모고도(Alamogordo)에서 핵실험을 하고, 며칠만에 핵폭탄을 조립해 다음달인 8월 6일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로 히로시마를 폭격한 바 있습니다.

  

IL-28 제원

기장: 17.65m
기폭: 21.45m
기고: 6.7m
자체중량: 12,890kg
최대이륙중량: 23,200kg
수평순항속도: 740km/h
승무원: 3명
추력: 2 X 5,952Ibs(2,700kg) Klimov VK-1 터보제트 엔진
실용상승고도: 12,300m
최대속도: 900km/h
항속거리: 1,094km
최대폭장: 3t(핵폭탄 포함)

 

 

북한의 폭격에 대응하는 우리나라 최신식 전폭기 F-15K는 AIM-9X, AIM-120, AMRAAM 등 공대공 미사일 외에 장거리 공대지 미사일 SLAM-ER, 정밀 폭격기 가능한 유도폭탄 JDAM 등을 장착할 수 있으며 전투능력을 높이고 레이더 성능이 개선된 최덤단 최신 기종입니다. 북한의 구형 폭격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실전경험 충분한 현존 전폭기 중에는 최고의 성능을 자랑합니다.

 

중국이 인도양 지역 (IOR)으로 확장하고 남중국해 거의 전부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인도 아시아 태평양 연안이 화약고로 변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공세로 일본, 필리핀, 베트남, 대만,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를 비롯한 이웃 국가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1992년부터 인도 해군 (IN)과 미국 해군이 번갈아 가며 인도와 서태평양에서 거의 매년 실시하고 있는 말라바(Malabar) 훈련에 최근 일본 해상 자위대(JMSDF)가 이 합동 훈련에 참가하게 되면서 화가 난 중국은 미국과 일본이 내세워 온 '항행의 자유'명문을 역이용해 일본 영해를 통과하거나 인도함정을 추적하는 해상시위로 맞불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미국이 “아시아 지향” 정책을 추구하는 의도를 아시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을 차단하고 아시아 국가가 해양 분쟁에서 중국에게 반대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실제 미국과 일본에 밀착하고 있는 인도를 공개적으로 견제하면서 인도 북동부 지역을 침범하며 무력 시위를 벌이는 등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19일 인공섬 공사를 시작하는 모습

 

 

그러면서 중국은 모래를 준설하여 암초에 인공섬을 만들고 군사화하며 지역 내 해양 자원에 대한 접근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중국해 하이난 섬에 주요 함대 및 핵잠수함 기지를 만들고 지역 내 모든 미국 기지와 해군을 공격할 수 있는 정밀 순항 및 첨단 탄도 미사일을 배치하여 해양 입지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중국의 군사시설이 건설되고 있는 곳은 피어리 크로스 암초, 미스치프 암초, 수비 암초등 스프래틀리 제도에 있는 인공섬 3곳입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산하 '아시아 해양 투명성 이니셔티브' ​(AMTI)가 지난달 촬영한 위성 사진에 따르면 중국의 인공섬에는 전투기 24대와 대형기 4대가 들어갈 수 있는 격납고가 완공됐고,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를 위한 개폐식 지붕의 강화 엄폐시설도 확인됐습니다. 피어리 크로스 암초와 수비 암초에는 새 레이더 안테나도 설치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이 스프래틀리 제도에 전투기와 이동식 발사 미사일 등 군사 장비를 언제든지 배치할 수 있다고 AMTI는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중국이  2013년부터 남중국해에 해저 3000m에서 50명이 동시에 최대 2개월까지 머물 수 있는 가로 22m, 세로 7m, 높이 8m, 무게 약 250t인 '용궁'이라는 이름의 유인해저기지 건설이라는 장기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에 인도는 어떤 나라보다 많이 미국과 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있으며 2016년 최대 국제 해양 전쟁 훈련 RIMPAC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구매한 보잉 C-17 글로브마스터 III 수송기 2 대를 비롯한 인도 공군기 12대가 미국 공군이 동맹군과 함께 실시하는 핵심 공대공 전투 훈련인 레드 플래그에 참가했습니다.

 

 

인도의 거대한 7615km 해안선은 아라비아 해, 벵골 만 그리고 인도양과 인접해있습니다. 인도의 안다만 섬과 니코바르 섬은 인도 본토보다 태국에 더 가깝습니다. 인도 해군은 서쪽 페르시아 만에서 동쪽 말라카 해협까지 뻗어있는 인도양 지역 바다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서쪽에서는 파키스탄 그리고 동쪽과 남쪽은 중국이 해군 전투력을 꾸준히 강화함에 따라 과거 이들 연안 국가와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인도는 긴급히 상황에 따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이에 탄도 미사일 잠수함 4척 (SSBN), 핵추진 공격용 잠수함 6척 그리고 디젤-전기 잠수함 53척으로 구성된 가장 큰 공격용 잠수함 함대 중 하나를 갖춘 중국은 2020년까지 4320 해리 (8000km)까지 핵탄두 1톤을 보낼 수 있는 JL-2 미사일 12기를 각각 장착한 진급 094형 SSBN 8척을 완성시킬 계획입니다.

 

▲작년 6월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기지에 중국 해군 다칭함·타이후함(빨간 네모)이 인도 해군 샤크티함(파란 네모)이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모습

 

미국은 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모든 나라를 위해 항행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이미 인도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강력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17개 그리고 대한민국에 12개의 미군 기지가 있습니다.

 

1990년대 이전까지 중국 잠수함대는 한때 90척이 넘는 수준으로 숫적으로 볼 때는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소련의 1950년대 수준으로 개발된 잠수함을 카피생산했던 수준으로 위협적인 전력으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잠수함대는 1990년부대 현대화되기 시작하여 약 50척규모로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진일보한 전력으로 미국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가장 관심있게 보고 있는 중국 잠수함 전력은 바로 진(晋)급 핵잠수함입니다. 이 핵잠수함은 원자력 탄도탄 잠수함인 SSBN 계열에 속하는 전략 잠수함입니다. 진(晋)급 핵잠수함은 구 소련 붕괴당시 입수한 Victor lll 클래스 원자력 잠수함의 설계도를 토대로 만들어진 잠수함으로 선체가 완전히 새롭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 092 하급 SSN 선체를 개량한 잠수함입니다.

 


진급 잠수함 수중 배수량은 1,1000톤이며 전장 140m, 전폭 10m, 흘수 8m. 승조원 140명. 최고속력 수중 24노트 그리고 H/SQC-207 소나와 6개의 533mm 어뢰발사관과 사정거리 15km인 Yu-3 어뢰 12발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진급 094 SSBN을 상징하는 탄도미사일인 사정거리 7,200km JL-2 SLBM이 12발 장착됩니다.

 


진(晋)급 핵잠수함이 처음 등장하였을때 미 해군 정보국(ONI,Office of Naval Intelligence)에서는 진급 잠수함을 추적하여 관련 성능을 평가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해군 정보국(ONI)은 미 의회에 중국 진급 잠수함의 소음정도가 30년전 건조된 구소련의 델타3급 보다 소음이 더 커서 전략적인 가치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위 그래프 사진을 보시면 진급 잠수함(적색 원)의 소음도를 비교한 내용으로 아직 러시아 잠수함들과 비교하여 정숙성에 대한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초기형의 경우 소음도가 무려 140db 수준에 달했던 093 하급 SSBN 선체를 개량한 태생적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본토 타격을 위해서는 태평양부분까지 진출해야 하는데 이미 소음으로 인하여 진출과정에서 생존성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핵미사일을 발사할수 있는 플랫폼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기는 합니다. 미해군 정보국(ONI)의 보고서에서는 진(晋급 핵잠수함에 탑재되는 탄도미사일 JL-2 의 7,200km의 사정거리는 중국해에 진출하여 발사할 경우 본토 타격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또한  JL-2의 공표된 사정거리 보다는 실제 사정거리는 좀 더 낮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진급 전략 핵잠수함의 실질적인 성격이  미국이나 러시아등의 전략 보복무기 성격이 아니며 러시아와 인도 그리고 괌 &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를 유사시 공격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진급 잠수함은 현재까지도 미국과 일본의 합동 대잠망을 돌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잠수함대 중 소음문제가 대폭 개선된 최신형 디젤 잠수함의 경우와 다르게 SSBN의 경우는 소음문제로 인하여 한계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중국의 최신형 디젤잠수함의 경우는 상당히 위협적이지만 진급 093 SSBN는 외부 과시용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중국은 현재 4기의 진급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으며 2020년까지 최종적으로 8번함까지 취역시킬 계획입니다.

 

9월 15일은 디데이(D-day)라는 암호명으로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장 성공한 상륙작전으로 꼽히는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날입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스스로도 ‘5000대 1의 도박’이라고 말했을 만큼 성패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작전이었습니다.

 


북한 인민군은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우리 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 밖에 걸리지 않았을 만큼 전세는 급변하게 됩니다. 허리가 잘린 인민군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급격히 세력이 약화됐고 곧 패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하기 전 난관이 많았습니다. 당시 인천의 항만은 대규모 함정이 입항하기에는 수로가 매우 좁았고, 조수간만의 차가 7~10m나 돼 안정적인 상륙작전을 벌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습니다. 특히 작전 당일 인천항의 만조시간은 2시간 밖에 되지 않아 위험부담이 컸습니다. 인민군이 진지를 구축하고 강력하게 저항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엔군사령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 수뇌부와 마찬가지로 기만전술을 쓰기로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6개월 전부터 스웨덴, 노르웨이가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프랑스 칼레에서 상륙작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허위정보를 꾸준히 흘렸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1944년 전세를 뒤집기 위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6·25전쟁 초기 유엔군사령부도 7만명이 넘는 병력과 260여척의 함정이 참여하는 역사적인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두 가지 묘안을 짜냈습니다.

 


우선 유엔군이 남쪽인 전북 군산으로 상륙한다는 거짓 소문을 내는 한편 실제로 군산을 포격해 인민군의 주의를 돌렸습니다. 또 상륙이 한반도 동쪽에서도 동시에 이뤄질 것으로 오인하도록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 낙동강 전투가 치열했던 경북에서 상륙작전도 벌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장사상륙작전’입니다.

 

 

​경북 영덕에서 남쪽으로 15km, 포항 북쪽 26km에 위치한 동해안의 작은 어촌 장사동(현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인천상륙작전 불과 한 달 전인 8월 16일 국군 3사단이 북한군 12사단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하자 해상으로 철수했던 독석동과 인접한 지역입니다. 

3사단 지휘부는 포항여중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이 분전한 덕분에 인민군의 공격을 피해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이 전투는 330만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재연돼 국민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장사상륙작전도 포항여중 전투와 마찬가지로 학도병들의 희생에 모든 것을 맡긴 슬픈 역사였지만 인천상륙작전에 가려 지난 67년 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좌초한 대한민국 민간 상륙정 '문산호'와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국군 제1유격대대(명부대) 소속 학도병모습


극비로 수립된 작전명 174호. 9월 13일 오후 부산항 제4부두에는 2700t급 상륙함(LST) ‘문산호’에 탑승할 학도병들이 모였습니다. 육군본부는 상륙작전을 위해 이명흠 대위를 지휘관으로 하는 독립유격대 1개 대대를 차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름만 ‘유격대’였을 뿐 편성된 이들의 대부분은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동안 훈련받은 앳된 10대 학도병이었습니다. 실탄을 채 10발도 채 쏴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 군에서 보급받은 것이라곤 소련제 장총과 배낭, 인민군 군복, 물 약간, 건빵 한 봉지, 미숫가루 세 봉지가 전부였습니다.

 


낙동강 전선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끊는 작전에 투입된다는 설명이 곁들여졌습니다. 원래 이 작전은 위험한 임무 특성상 미 8군이 수행해야 했지만 미군은 “실패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우리 군에 떠넘겼습니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던 육군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학도병들에게 작전을 배정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학도병 772명은 전란의 회오리 속에서 오로지 애국심 만으로 군에 자진입대한 이들이었습니다. 수개월째 이어진 전쟁으로 마음마저 피폐해진 그들이었지만 사기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14일 새벽 상륙함은 드디어 장사해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상륙작전은 시작부터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거센 파도가 일면서 문산호는 해변에서 30m 가량 떨어진 지역에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바다에 뛰어든 학도병 60여명이 제대로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물에 빠져 숨졌습니다. 무사히 헤엄쳐 해변에 도달한 이들이 밧줄을 소나무에 연결해 다른 많은 대원이 해안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이날 오전 문산호는 심한 파도에 떠밀려 바다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고난은 이어졌습니다. 상륙 직후부터 1개 대대 규모의 인민군이 해안 앞 200m 고지에서 공격해왔습니다. 오후 2시 30분 미 해군 구축함 함포지원을 받아 간신히 적을 물리친 학도병들은 빠르게 동해안의 7번 국도를 차단하고 다수의 적 진지를 파괴했습니다. 상륙, 전투 과정에 ‘유격전의 귀재’로 불렸던 군사고문 전성호 대령, 민간인 황재중 선장 등 2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다음날 오전 6시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인민군 5사단 등 적 정예병력을 만나 악착같이 싸웠습니다. 인민군은 대규모 상륙부대가 들이닥친 것으로 판단해 전차 4대를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학도병들이 사용해야 할 탄약 대부분은 배와 함께 물에 가라앉았고, 배낭에 든 보급품은 불과 3일치였지만 전투는 계속됐습니다.​

 


상륙 6일째인 19일 드디어 조치원호가 장사해안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민간인 선장은 인민군의 공격이 두려워 침몰한 문산호와 멀리 떨어진 곳에 배를 대려고 했습니다. 미군 고문관으로 참가한 프랭크 스피어 소령이 다그쳐 겨우 문산호 동북쪽 약 400m, 육지에서 300m 떨어진 지점에 닻을 내리고 구조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학도병 39명은 적의 공격과 구명대가 유실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복귀하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거나 죽음을 맞았습니다. 일부는 우리 군이 북진하는 과정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배에 타지 못한 인원 외에도 작전 중 전사한 인원이 총 139명이나 됐고, 90여명이 부상했습니다. 나머지 인원들은 다행히 7시간에 걸친 결사적인 구조작업으로 조치원호를 통해 부산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상륙작전은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작전 상황이 제대로 명시된 공식문서조차 없었습니다. 생존 대원들의 입을 통해서만 일부 내용이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시 평양방송은 아군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습니. 특히 우리 1군단은 인천상륙작전 뒤 교착상태였던 낭동강 전선을 돌파해 북상할 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교란작전 때문에 인민군 5사단과 2군단이 주력부대를 전선에서 이탈시켜 동해안에 집중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1997년 3월 해병대원들이 갯벌에 묻힌 문산호를 발견하면서 역사는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역사 재조명 필요성을 느낀 영덕군은 지난해부터 1년 4개월 동안 부산의 한 조선소에서 문산호 복원 작업을 진행해 길이 90m, 폭 30m, 높이 26m의 배를 건조했습니다. 원래 배보다는 길이 10m, 너비 5m 가량을 줄인 축소 모형입니다. 2015년 5월 복원된 문산호는 바지선으로 옮겨져 장사해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상륙작전 65년 만의 일이였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사망하기 4년 전 772 유격동지회에 전한 서한입니다.

이종훈 회장 귀하.

최근에 보내주신 귀하의 편지를 통해 772 유격동지회가 결성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귀하의 동지들이 수행한 전투는 혁혁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 772 유격대 동지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 귀하의 동지들에게 제 진심어린 안부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들을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1960. 10. 31 더글라스 맥아더


역사는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인천상륙작전의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도 잊지 않은 역사를 우리도 되돌아 봐야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