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北 기관총 쏘면 우리는 대포로 적을 응징하는 것이 군인 임무"

-백골전설 故 박정인 장군-

 

백골부대의 전설이라 불리는 故 박정인 장군이 1961년 전방 연대장을 할 때였습니다. 군사분계선을 적이 멋대로 오가며 아군과 물물교환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그가 중대장에게 “적이 넘어오는데 왜 그냥 두느냐”고 물었습니다. 중대장은 “건드리면 보복하기 때문에 그대로 둔다”고 답했습니다. 대대장도 똑같은 대답을 하자 박정인 장군은 고함을 버럭 질렀습니다.

 

박정인 장군(왼쪽)이 6.25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노획한 적의 무기 앞에서 찍은 모습

 

“대대장의 총과 무기는 목숨을 걸고 조국의 땅을 지키라고 준 것이다. 적의 손가락이 넘어오면 손가락을 자르고, 발가락이 넘어오면 발가락을 잘라라. 그게 대한민국이 당신을 무장시킨 유일한 이유다. 우리 지역에 침투하는 적은 즉각 사살하거나 포로로 하라!”

 

 

그리고 박정인 장군은 후속조치로 연대 내에 특공소대를 편성했습니다. 얼마 후 인민군이 군사분계선을 또 넘었는데 사단 수색중대가 사격을 실시하였으며 특공소대를 현장에 출동해 북한군 부상병 5명을 생포했습니다. 이후 생포된 북한군을 구하기 위해 북한군이 추가 도발을 해 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박정인 장군은 확성기를 들고 “전차로 증강한 1개 연대가 대기하고 있으니 올 테면 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주춤한 북한군은 별다른 공격 없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사단장이 된 박 장군은 사라졌던 '백골' 결례 구호를 부활시켰으며 부대원들이 남쪽을 향해 총검술 훈련을 하자 "왜 부모가 계신 남쪽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느냐 김일성이 있는 평양을 향해 총검술 훈련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훈련장에서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는 장병들을 보고선 당시 소변기로 쓰이던 81mm 탄통 방향을 모두 북쪽으로 바꿨습니다. "전쟁 역사에서 언제나 최고의 무기는 군인정신"이란 소신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당시 사건 기사

 

백골부대 사단장이었던 1973년 3월 7일 오후 1시20분, 긴급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철원 비무장지대 내에서 표지판 정기 보수작업을 마치고 귀대하던 백골부대원을 향해 북한이 기습총격을 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공격으로 황정복 대위, 김윤복 중사, 서휘수 병장 등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박 장군은 즉시 북한군에 대한 응징책을 준비시키고 현장에 가서 마이크로 북한군의 사격중지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부상자와 소대병력은 여전히 위험지역에 있었고, 적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포병출신이었던 박 장군은 사단 관측기를 띄워 적진 559GP를 관측한 후 결단을 내렸습니다. 사단 포병대대를 총동원해 포를 발사했습니다. 그리고 백골 포병부대의 105mm와 155mm 곡사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습니다.

 

 

그날 박 장군은 6·25 전쟁 휴전 이후 북한 지역에 처음으로 포격을 가한 지휘관이 됐습니다. 부상자를 구출하기 위해 백린 연막탄도 동시에 발사했으며 북한군은 사격을 멈추고 도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박 장군은 먼저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부대원에게 총격을 가한 북한군과 김일성(金日成)을 제대로 혼내 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사단 내 모든 군차량을 동원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DMZ 남방한계선 바로 앞까지 돌진하게 했습니다.

 

 

이에 우리 군의 야간기습으로 오해한 김일성은 즉각 전군 비상 동원령을 내릴정도였습니다.

 

 

1975년 귀순한 북한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을 통해 그날의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밝혀졌는데 유 소위는 “그날 백골 포병부대의 포탄 1발이 정확히 막사에 명중해 인민군 36명이 사망했다”“지금도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1985년 9월 20일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으로 평양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함남 도민희, 이상순 회장에게 북한의 고위 관료가 찾아와 "함남 신흥 출신 박가라는 요란한 사단장은 지금 뭘하오"라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2013년 7월 29일 인터뷰 당시 박정인 장군은 "괴로군은 몇 번이나 도발해도 그만인데 우리는 거기에 대응하면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처벌하니 부대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본때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격하고 옷을 벗었다. 일본놈들과 북한놈은 약자를 계속해서 잡아 누른다. 강하게 나가면 꼼짝 못한다. 적이 침범하면 즉각적으로 대응해 자기들의 책임 구역을 지켜야 한다. 국가가 준 무기를 가지고 국가가 준 부하들 데리고 응징해야한다. 그게 군인!" 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박 장군의 가족은 3대가 육사 출신입니다. 왼쪽부터 박정인 장군(육사 6기), 아들인 박홍건 예비역 대령(육사 31기), 손자 박선욱 대위(육사 64기)

 

시간이 지나고 김정일이 무서워 벌벌 떨었던 박정인 장군이 2016년 2월 3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故 박정인 장군님을 생각하면 괜시리 연평도 포격, 천안함 사태, 제2연평해전, 목함지뢰사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동안 정부는 '선 조치 후 보고'라는 북한 대응지시를 내렸지만 현재까지 북한도발에 우리 군이 응징차원의 조치를 취한 경우는 故 박정인 장군의 73년 사례를 제외하면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우리 군이 K-9으로 대응사격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