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학교를 중퇴하고 창업을 한다는 선택을 한다는게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빌 게이츠, 헨리 포드, 마크 저커버그는 명문대를 그만두고 창업해 부호가 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학교를 때려치우고 세계적인 창업성공을 이룬 10인을 소개해보겠습니다. 


 

1.  래리 엘리슨

 

래리 엘리슨은 글로벌 IT기업 오라클이 창업자입니다. 20살에 시카고대 컴퓨터 공학과를 중퇴했습니다. 영화 아이언맨 2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하와이에 '래리 앨리슨 섬'이라는 섬도 갖고 있습니다.


 

2.  아만시오 오르테가

 

오르테가는 학교를 14살에 그만두고 스스로 디자인한 옷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 그가 창업한 의류 유통회사가 바로 ‘자라’입니다. 이제 세계 어디서나 ‘자라’ 매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합니다.


 

3.  리카싱

 

리카싱 청쿵그룹 회장은 15살에 중학교를 그만뒀습니다. 시곗줄 판매원, 찻집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부동산 개발을 주업으로 하는 청쿵그룹을 창업하였으며 홍콩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뷰티·건강 유통망과 에너지 공급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4.  셸던 아델슨

 

셸던 아델슨은 ‘글로벌 카지노의 제왕’으로 불립니다. 카지노회사인 라스베이거스 샌즈의 창업자가 바로 아델슨 회장입니다. 이스라엘 일간지인 ‘이스라엘 데일리’를 보유하고 있고, 미국 정치계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는 뉴욕시티대학을 19살 때 중퇴했습니다


 

5.  폴 엘렌

 

폴 엘렌 20살 때 워싱턴주립대를 그만두고 가전소매회사 허니웰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빌 게이츠를 만나서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창업하였습니다. 미국 미식축구팀 시애틀 시혹스, 프로농구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즈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6.  카크 커코리안

 

커크 커코리안 트라신다그룹 창업자는 ‘도박 천국’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사업에 투자해 성공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중학생 시절 자퇴해 권투선수로 활동하다 조종사로도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5년 별세했습니다.


 

7.  얀 쿰

 

20살에 미국 산호세 대학을 자퇴했고 야후의 보안 책임자로 일하다 창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페이스북에 메신저 앱 와츠앱(WhatsApp)을 190억달러에 매각해 전세계 미디어를 장식한 인물입니다. 그렇게 그의 주머니에 들어온 현금은 68억달러였습니다.


 

 

8.  수바쉬 찬드라

 

수바쉬 찬드라 지(Zee) TV 회장은 대표적인 인도의 ‘미디어 거물’입니다. 12살에 학교를 자퇴했던 그는 인도 최초 위성방송인 힌디 채널을 1992년 설립하였으며 현재 지 TV 네트워크는 167개국에 5억명의 시청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9.  오르지 오조르 칼루와

 

칼루아는 학내 분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나이지리아 마이두구리대에서 퇴학당했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로부터 35달러를 빌려 사업을 시작했하였고 나이지리아 최대 미디어그룹인 슬록(Slok) 창업자가 되었습니다.


 

10.  엘리자베스 홈스

 

19살에 스탠퍼드대를 중퇴한 홈스는 의료 연구실에 혈액검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테라노스(Theranos)라는 회사를 차렸습니다. 테라노스는 최근 의료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사가 되었으며 그는 세계 최연소 여성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흔히 미국이 국익을 위해서 우리나라를 도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한국전쟁 발발하기 두어달 전에 미국 트루만 행정부는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아치슨 독트린을 발표하였습니다. 2차 대전 이전에는 미국은 외국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는 고립정책, 즉 몬로 독트린을 고수하여왔었습니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이 소련의 스탈린에게는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아치슨 선언을 한지 두어달 만에 그것을 스스로 번복하는 것은 대국의 위상에 맞는 일이었습니다. 정치적 논리를 따진다면 당시 미국이 참전할 이유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아치슨 선언을 스스로 뒤집어엎으면서 한국전쟁 발발 닷새만에 미국의 참전을 선언하였을까요?

 

 

작은 이유로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에 또 다시 시련이 닥친 것을 가슴아파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 기독교 탄압을 이겨낸 한국인들이 모처럼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공산당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북한에 이어 남한까지 적화되는 것을 미국 선교사들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으며, 미국이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선교사들의 탄원은 미국의 참전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맥아더 장군의 역할이 컸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아더 장군은 아무 호위병 없이 헬기를 타고와 전쟁이 전개되는 상황과 한강 이남의 지형을 관찰하였습니다. 이미 인민군이 장악한 지역에 홀로 들어와 지형을 관찰한다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서울 시민들이 쌀이며 이불이며 등에 얹고 황급히 남쪽으로 피난하는 행렬을 보면서 그의 마음이 뜨겁게 움직였습니다.

 

 

그는 그때 단지 전쟁 전문가의 눈으로 이국인을 바라보듯 한국인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국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느꼈으며, 수천년의 역사에서 많은 시련을 가졌던 한국 민족의 시련이 또다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아픔을 느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을 위한 애국심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전을 결심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의 참전 결심이 미국 참전의 결정이었습니다.

 

 

비록 본의는 아니었을지라도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에 징집된 한국인들이 미군과 전쟁을 벌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미국 여론이 최소한 포로수용소 전범은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 일본은 미군포로 수용소에서 잔혹한 행위를 한 병력은 일본군이 아니라 한국인 병력이었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미국인들에게는 한통속으로 보였으며 한국은 2차대전 전범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무엇때문에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땅에서 피를 흘렸을까... 때는 바야흐로 미국에서 아메리카 드림이 실현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카우보이의 서부 개척 시대도 지나고 1920~1930년 대의 경제 공황도 끝나고, 2차 대전도 종전되고 미국 경제는 건국 이래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밝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징집되어 한국 땅에서 오만 명 이상 전사하고 오만 명 이상 부상당하고 또 많은 이들이 북한에 포로로 끌려가거나 실종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은 한국 역사를 잘 몰랐으며, 한국인은 일본의 용병로 여겨지던 때에 맥아더 장군의 한국 민족의 대변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적어도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해 맥아더는 미국 트루만 문민 정부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6월 29일 새벽 6시에 맥아더 장군이 그의 전용기 C-54를 타고 와서 한강 남쪽 제방을 순시했던 것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여기서 인천상륙작전의 아이디어가 스쳐갔다는 사실입니다.

 

 

국군 십만 명이 지키던 삼팔선을 인민군 십삼 만명의 병력이 공격하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이 한강까지 후퇴하는데 사흘밖에 안 걸렸습니다. 이것은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국군이 후퇴하였으며 이대로 가면 보름 내에 한국은 공산당 군대에 완전 점령당하게 됨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의 머리에 인천상륙작전의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인민군의 진격이 빠르면 빠를 수록 보급로는 길어지고, 그 보급로와 후방의 퇴로를 차단하면 적은 궤멸하게 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정세를 파악한 맥아더 장군은 즉각적으로 트루만 대통령에게 한국전쟁 참전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 30일 새벽4시 57분에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전쟁개입 결심을 받아낸 맥아더 장군은 7월 1일 새벽 세시에 스미스 부대를 파병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투병 병력이 없는 부대였습니다. 2차대전 종전 후 평화를 구가하던 때이기에 일본에 주둔한 미국 사령부에는 행정병 등 비전투병과 병력들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역할은 인민군에 대항하기보다 인민군이 부산마저 함락하는 것을 하루라도 저지시키는 것이었으며, 일차 파병 병력 8천명은 한국 도착 후 며칠 만에 전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제 25사단이 부산에 속속 들어왔습니다.

 

 

피난 정부가 있는 부산을 결사적으로 사수하는 근 석달 간의 낙동강 전투에서 십만 명의 미군 병력이 손실되자 미국 워싱턴의 트루먼 정부는 한국전에서 손을 떼고자 하는 방침을 세웁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중국 장개석 총통의 대만 망명정부처럼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와 더불어 십만 명의 한국인을 제주도로 이주시키고, 제주도에서 한국 정부의 명맥을 유지시키는 것을 북한이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미군은 철수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있음을 밝히며 오히려 본국으로부터 대규모 병력 증파를 요청했습니다. 사실, 9월 15일 밀물 때의 월미도의 수심이 너무도 깊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의 참도들도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이유라는 것이 맥아더 원수의 논리였습니다. 한국전에서 손을 떼는 것을 검토하던 미국 국방성 관리들도 당시 태평양의 시저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려는 고집을 꺽지 못하고 그가 요구하는 해병 병력을 추가 파병하여 주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으며,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국군과 유엔군은 승승장구하며 북진하였습니다. 압록강까지 이루는 북한 전지역에 태극기가 휘날리며 그토록 그리던 조국 통일의 순간이 목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김일성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임으로 한국 전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양국에 외교를 맺고 있던 인도 정부가 중국 정부에 미국 트루만 행정부는 맥아더의 북진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한 정보였으며, 이에 안심한 모택동은 백만 대군으로 알려진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여 인해전술로 한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하였습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맥아더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군대와 달랐습니다. 후대 사가의 시각에서 중공군은 일종의 자살 공격대였습니다. 당시 한국전에 참전한 중공군 병력에게는 일주일 분의 미수가루만 지급되었는데 그것은 살아서 돌아오라는 파병이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은 침대도, 취사병도, PX 사병도, 이발병도, 행정병도 필요없었다. 단지 그들은 일주일분의 미수가루만 배낭에 메고 진격할 뿐이었습니다.

 

 

그 엄청나게 추운 지역에서 이런 중공군을 막아 싸우려면 미군도 정규전 이외의 전략이 필요했지만 미국 본토에서 승인하지 않으므로 맥아더 장군은 병력 철수밖에 대안이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태평양의 한 작은 섬 웨이크섬으로 호출하며 비밀 회동을 갖습니다. "둘이 마지 못해 악수하는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은 험악하게 굳어 있었다"고 미국 역사는 기록합니다. 이 비밀 회동에서 트루만은 맥아더에게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예정인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자신은 전혀 정치적 야망이 없는 군인임을 맥아더 장군은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대권에 도전할 뜻이 없음을 확인한 트루만은 안심하고 그를 극동 미군총사령관의 직에서 해임하였습니다. 한국을 구출하려는 그의 그 모든 노력에 대한 댓가는 태평양의 황제라 불리던 자리에서 불명예 해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인으로서 한국인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피부색이 다른 우리 민족의 애국자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이 미국인의 전쟁이 되게 한 인물이며, 그가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십만 명의 미국인의 피를 흘리는 것을 아끼지 않았기에 한국과 미국은 혈맹의 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에게 해임당한 맥아더 장군이 귀국하자 뉴욕 연도에 7백만이 넘는 환영 인파가 몰려나와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그 날 맥아더 장군이 귀국하던 날 뉴욕시 고층 아파들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색종이가 휘날리며 전 뉴욕시를 덮었으며, 연도에 미처 나가지 못한 시민들도 모두 옥상과 베란다와 창가로 모여들어 그를 환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 역사의 명연설문 중 하나로 꼽히는 그의 귀국 연설을 그가 즐겨 부르던 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just fade away)라는 말로 마무리하였을 때 전 미국은 함께 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