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미국의 재래식 동력함인 CV-63 키티호크(Kitty Hawk)가 2009년 퇴역하면서 미국의 모든 항공모함들이 핵추진함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을 만큼 이제는 의의가 많이 감소하였지만 엔터프라이즈는 세계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961년 취역하였으니 벌써 50여년 가까이 바다를 누비고 있는 셈인데, 수차례에 걸쳐 실전 투입도 되었고 한반도에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에도 등장하여 그 위용을 뽐내고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엔터프라이즈인 CVN-65 가 미 해군 최초의 엔터프라이즈는 아닙니다. 통상 해군의 군함명은 인물명, 지역명, 역사적 사건명 등 여러 사유로 결정되는데 그렇게 작명된 수많은 선명 중에서도 두고두고 기억하여야 할 가치를 지닌 특별한 선명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해군의 충무공 또는 이순신과 같은 함명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영예로운 선명을 지닌 군함이 퇴역하면 새로운 군함이 선명을 승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세계최강 미 해군에서는 엔터프라이즈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 되는데, 미 해군 함명들 중 가장 많이 계승 되어온 이름이며 또한 이름에 걸맞게 많은 전공을 세웠던 선명이기도 합니다. 1775년 5월 18일 영국으로부터 노획한 70톤짜리 소형 범선이 최초로 엔터프라이즈로 명명된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을 승계하여 왔습니다. 2012년 12월 1일에는 미 해군의 8번째 엔터프라이즈 CVN-65가 버지니아주 노포크 군항에서 퇴역하였는데 버락 오바마까지 참석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미 해군 불침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라는 함명이 미국의 차세대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의 3번함으로 계승될 것이 선언되었습니다.

 

 

 

사실 엔터프라이즈 중에서 전사에 그 명성을 길이 남긴 것은 7호 엔터프라이즈인 항공모함 CV-6 입니다.  1938년 5월 12일 요크타운 클래스 ( Yorktown Class )의 2번 함으로 취역한 CV-6는 미드웨이해전에서 승리를 엮었고 솔로몬해전에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미 해군의 전설이 된 함정입니다. 바로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이 불침의 영광과 전통이 되도록 만든 주인공이었습니다.

 

 

미 해군에 비하면 역사가 일천한 우리 해군은 앞에서 언급한 충무공처럼 역사적인 인물 외에는 승계하여 사용할 만큼 전통 있는 함정명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록 함정명은 아니지만 함번으로 한국 해군의 전설이 되고 있는 자랑스러운 이름이 있습니다. 1999년 발발한 제1연평해전과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에서 연거푸 대승을 이끈 참수리 325호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특히 참수리 325호의 승전이 빛난 이유는 아군의 피해는 거의 전무한 상태로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전쟁이후 남북 정규군간의 최초 충돌이었던 1999년 1차 연평해전은 국군에게 더 할 수 없는 자신감을 이끌었는데 당시 북한 경비정을 패퇴시킨 것이 바로 참수리 325호였습니다. 그리고 2009년의 대청해전은 잘못된 교전 규칙으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은 승리였던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의 아쉬움을 한방에 날려 보낸 쾌거였습니다.

 

 

참고로 대청해전 당시 북한 경비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 있던 해군 고속정 4척 가운데 ‘참수리 325호’만을 표적으로 삼아 선제공격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군 당국은 "북한 경비정은 우리 고속정 4척 중 참수리 325호를 겨냥, 25㎜와 37㎜ 함포 50여발을 쏴 이 중 15발이 명중되었는데 당시 북한군이 NLL을 넘기 전부터 참수리 325호를 목표로 삼아 도발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었습니다. 

 

325호라는 함번이 정식 함명이 되기는 곤란한 점이 있겠지만 이미 325호는 한국 해군에게 함번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훗날 고속정들이 노후화 되어 퇴역하더라도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처럼 후속함정에게 325호의 전통이 승계되어 계속 사용됨으로써 그 용기와 기백이 영원히 알려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전쟁은 누구도 좋아서 하는게 아니오. 이건 의무이지. 국민이 침략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싸워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소.'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아흐마드 샤 마수드(페르시아어:احمد شاه مسعود)는 판지시르의 사자, 아프가니스탄의 국가 영웅, 세계 최강이었던 외세의 압제와 맞서 싸우며 민중의 안생과 조국의 발전을 도모한 리더, 이슬람의 이순신으로 불립니다. 마수드는 1978년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세력이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자 마수드는 자신의 고향인 판지시르 계곡에 본거지를 구축하고 게릴라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자신들의 꼭두각시 카르말 정권을 출범시키자 마수드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략적 계획을 짜게 됩니다. 첫쨰, 민중들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 군대 양성 둘쨰, 비정규전의 수행과 그 동안 거점인 판지시르의 적극적 사수 셋째 "전략적 공세"로 마수드의 군대가 북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제압 , 넷째 마수드의 원리를 나라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정권을의 붕괴였습니다.

 

 

1980년, 파키스탄 쪽의 루트로부터 어렵게 입수한 7백여 정의 구식 소총과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은 1천여 명에 불과한 병사들을 이끌고 마수드는 무자헤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난민이나 마찬가지였던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은 마수드의 지도를 거치면서 1984년 5천 명의 강병으로 성장했고, 종전이 된 1989년, 마수드 휘하 무자헤딘의 수는 무려 1만 3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마수드는 적의 주력과 정면에서 맞붙어야 하면서 외부의 지원은 거의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휘하의 무자헤딘을 엄청난 규모로 만들었습니다.


소련군 역시 자신들의 유일한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는 마수드를 최우선 제거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수드와 그 휘하의 무자헤딘에 활약에 화가난 소련이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를 때려잡겠다고 스페츠나츠를 포함하여 만 명 단위의 병력을 동원하고 폭격기까지 투입해서 대공세를 가한 횟수만 무려 9회였습니다.

 


1983년, 소련은 마수드에게 정전을 제안하였고 마수드는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소련의 속셈은 일단 자신들의 전력을 재정비하고 다른 곳부터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 기간을 적절히 사용한 것은 오히려 마수드였습니다. 1983년 7월 마수드는 파완, 라그만, 카피사, 쿠나르, 바다크샨 타카르, 바그란과 쿤드즈를 포함하는 북 아프가니스탄 7개 주의 130명의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모았고, 그 곳에서 무자헤딘들의 행동을 확실히 조절하기 위한 군사 협의체인 감독 의회(Shura-ye-nazar)를 창설합니다. 감독 의회를 통해 마수드는 정치적, 인종적인 문제로 분열되어 있어서 각자 움직이던 무자헤딘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마수드의 영향력은 본거지인 판지시르를 넘어 타카르, 발한 주까지 뻗어나갔고 카르말 정권은 기겁하며 소련군에게 판지시르에 대한 공격재개를 요청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하기는 소련군도 마찬가지였고 아예 마수드 세력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Tu-16 폭격기를 동원하여 판지시르 계곡에 전략 폭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수드는 이미 카르말 정권에 침투시킨 첩자로부터 이 사실을 전달받았고 소련군의 폭탄은 5만 명의 거주민이 모두 떠난 텅 빈 계곡에 떨어졌습니다.

 


1984년, 소련-공산 아프간 군은 2만 1천여 명이 동원된 7차 공세를 시작했으나... 무자헤딘 5천여 명의 반격에 2천 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후퇴해야 했고,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 군 5백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한 데 이어 공산 아프간 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면서 결국 소련측은 1986년 판지시르에 대한 공세를 중단, 1988년 즈음 소련군은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당시 마수드는 미국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을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마수드는 자신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이 외세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꼭두각시 정부를 세운 소련이나 이를 핑계로 무자헤딘에게 무기 지원을 하려는 미국이나 똑같은 외세로 봤기 때문이였습니다.



2001년 9월 9일, 벨기에 여권을 소지한 서방 기자들이 마수드를 취재하러 왔었고 그들을 응대하던 마수드는 기자들로 위장한 알 카에다 소속 자폭테러범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48세였습니다.

 

 

이틀 후 9.11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내놓으라고 탈레반에게 요구했으나 자신들의 숙적인 마수드를 제거해준 알 카에다를 탈레반 정권이 내놓지 않았고 결과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슬퍼했습니다.

 

 

 

마수드는 '판지시르의 사자'등의 별명으로 불렸으며 말 그대로 전설이나 다름없는 게릴라 지도자였습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시기에는 타지크족이라는 특성상 미국의 지원을 거의 못 받는 상황에서도 가장 혁혁한 전공을 올렸습니다.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수립된 후 마수드는 국가의 영웅으로 선포되었고 기일인 9월 9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국가기념일이기도 합니다. (비탈레반 지역에서만)

 

하마스 (Hamas)는 어느 관점이냐 따라 평가가 나뉘어 지는데, 팔레스타인의 정당이면서, 무장 단체, 테러조직이기도 합니다. 아랍어로 하마스는 알라를 따르는 헌신과 열정을 뜻하기도 하며 하마스 단체에서는 "힘과 용기"로 설명합니다. 1989년 이스라엘군을 공격해 2명의 이스라엘 병사를 사살하면서 그 이름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하마스는 여성들에게 억압적인 규제를 강요하고, 이 중 물담배 금지령 같은 부분은 전통 이슬람 율법에도 언급이 없는 부분이라 반감을 사기도 했으며, 자살 폭탄 테러를 주도하는 집단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이들의 테러는 이스라엘 민간인, 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예루살렘 등지에서 폭탄 테러, 그것도 여자들까지 가담하는 자살 폭탄 테러로 그 과격성이 수많은 팔레스타인 저항 조직들 중에서도 가장 심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2003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이스라엘인 민간인에 대한 테러를 저지르는 하마스를 계속된 처벌 요구에도 벌하지 못하자, 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을 공격해 팔레스타인 정부 청사 건물을 박살내고 팔레스타인의 수장 야세르 아라파트를 사실상 가두고 촛불에 의존하여 집무를 하게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박탈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의 강경책은 오히려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를 사 이스라엘과의 타협을 주도해온 파타에 등을 돌리고 과격파인 하마스를 지지하는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2006년 6월 이스라엘의 함정이 가자 지구의 해변에 포격을 가해 피서를 즐기고 있던 수십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이스라엘 정부는 인명피해가 하마스가 해변에 묻어놓은 지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너무 말이 안되는 주장이었기에 국제적인 비난을 샀으며 이 도발을 계기로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2012년 11월 초 이스라엘군은 당시 하마스의 리더였던 아흐메드 알 자바리를 미사일로 공격해 사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어린이도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후계자가 지정되어 있기에 리더의 사망은 혼란을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보복에 나선 하마스측의 로켓 공격으로 11월 15일 이스라엘 민간인 3명이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이에 반격으로 하마스는 포격을 가하지만 이스라엘의 요격 병기 아이언돔이 90% 가량의 요격률을 보이면서 대부분 막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격을 잘 막는다고 무작정 좋아만 할일이 아닌것이 아이언 돔은 그 가격이 하마스가 쏴대는 까삼 로켓의 수십배에 달하는 비싼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마스는 극렬 테러리스트들로부터 팔레스타인 독립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등 정말 다양한 평가를 받습니다. 현재 캐나다, 유럽 연합, 미국, 이스라엘 등으로부터 테러리즘 단체로 지정된 상황이나 러시아, 중국, 그리고 주변 아랍 국가는 하마스를 독립군으로 보고있으며 테러 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마스는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 공격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학교와 식당 등 전략적 가치도 없고 전투 지역이 아님이 분명한 곳임에도 자살폭탄테러를 저지르고 하마스가 가하는 로켓 공격은 민간인 피해를 불러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마스의 리더인 칼레드 마살은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최대한 자제하겠다고 선언했지만 하마스는 민간인에 대한 로켓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마스는 과격한 이슬람 근본주의를 신봉하는 것으로 악명높습니다. 여성들에게 히잡을 강요하여 강제로 쓰게하지 않나 해변, 수영장, 결혼식 및 각종 행사장에서 남녀를 분리하게 하는 성차별을 실시하며 서양 스타일의 의복과 문물, 음악을 악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하며 비보이나 힙합도 싫어하여 못하게 합니다. 또한 술 역시 싫어하여 집에서만 마시게 합니다.

 

 

하마스의 알-카삼 사단은 이스라엘 국방부가 추정하기로는 약 1만 5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5개의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중 약 1~2천명 정도가 이란이나 시리아에서 정규 훈련을 받고 돌아온 정예병이며 이 정예병들은 하마스의 특수부대원들로 전투력이 이스라엘 특수부대들과 비슷한 전력입니다.

 

 

그리고 기계화부대가 없어서 일반 자동차를 개조한 테크니컬을 사용하며 이스라엘 전차에 맞서기 위해 대전차무기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복장도 중동의 무장단체들과는 확실히 다른데 테러리스트가 아닌 정규군이라 할수 있는 수준입니다. 공군과 포병이 없어서 그렇지 보병전이랑 시가전에서는 중동에서 최고라는 이스라엘군에 밀리지 않습니다.

 

 

하마스는 서구권에서 테러 단체로 지정되어 있고 이스라엘의 감시 때문에 대놓고 무기를 수입하기 힘든 상황이기에 대부분의 무기를 가자 지구에 자력으로 만들어 사용하거나 무기상으로부터 이란,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를 통해 밀수합니다. 특히 하마스의 후원국인 이란에서 무기를 지원받다보니 무기들의 상당수가 이란제입니다.

 


이렇듯 전쟁도 불사하며 앙숙관계를 이어온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현재는 '암묵적 동맹관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는 가자지구를 IS가 장악하려고 하기때문입니다. 또한 이슬람 극단주의자 단체인 '살라피스트'를 비롯한 여러 소규모 단체들은 호시탐탐 하마스의 자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은 현재 하마스와 충돌 없는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