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매우 강렬한 폭력이 펼쳐지는 공간 속에 던져졌던 사람들, 특히 군인들에게 많이 나타납니다. PTSD는 딱히 사람을 가려가며 발현되는 증세가 아니기 때문에 공병 의무관 심지어는 직접 전장에 나서지도 않는 미군의 무인정찰기 프레데터 조종사중에서 PTSD 환자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경우 이라크 참전 군인들에게서 폭넓게 PTSD가 나타나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랜드 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160만 명의 장병 중 30만 명이 PTSD의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국군 또한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로 해군과 함께 연평도 장병들의 PTSD 검사를 실시했으나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몇몇을 빼고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이 자체적으로 병사들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평범한 병사들의 98%는 첫 교전을 겪은 뒤 어떻게든 충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98%라는 비율에는 전장을 겪은 장교들도 동의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라크 내지는 아프가니스탄 참전 경험이 있는 미군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PTSD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잘 보면 PTSD 신고를 한 미군들은 하루에 3번씩 6알의 안정제를 먹어가며 일하고 있으며, 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6.25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이 당연히 겪었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 군인이 40년이 지나서도 악몽 때문에 신경정신과 치료를 10년 넘게 받고 교회나 절이나 성당도 가고 자살미수까지 겪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론도 되지 않고 묻혔다가 530GP 사건 이후 알려졌으나, 늘 그랬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잊혀졌습니다.

 

 

사람마다 정신력이 다르니 단정지을 수 없지만 실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PTSD에 걸릴 확률은 최대 50% 정도로,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미군 베트남전 참전용사 중 PTSD 환자의 비율을 가장 높게 잡은 수치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미군 베트남전 참전용사 280만 명 중 최대 150만 명이 PTSD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실제 전쟁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섭고 더 큰 아픔을 남기게 됩니다.

 

한국인만 모르는, 미국에선 유명한 한국의 고양이가 있습니다. 위에 사진은 미국인들이 살면서 꼭 한번씩 보게되는 한 장의 사진입니다. 1952년 한국전쟁에서 해병대 프랭크 프레이터(Frank D. Praytor)상사가 태어난지 2주 된 새끼고양이 미스 햅(Miss Hap)에게 스포이드로 우유를 먹이는 모습입니다. 프랭크 프레이터 상사는 이 새끼 고양이에게 '미스 햅(Miss Hap)'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 뜻은 '나쁜 때에 나쁜 장소에서 태어났다'입니다.

 

 

미스 햅은 한국전쟁에서 어떻게 미 해병대원을 만나게 되었을까..

미 해병대 1사단은 1952년 8월경부터 서부전선에 위치한 벙커 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중공군으로부터 고지를 사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0월 6일 중공군들은 시간당 1,000발에 달할 정도의 엄청난 곡사포와 박격포를 쏘며 총공세를 펼쳤지만 미 해병대는 필사적으로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전처부대로 나간 다른 해병대원이 고양이가 울어대자 사살했고 어미 곁에 있던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발견해서 데리고 오게 됩니다. 하지만 미 해병대 흥보부는 사실을 말하면 부정적인 인식이 야기될 것을 우려해 '중공군 박격포탄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각색했고 프랭크 프레이터 상사도 침묵했습니다.

 

 

그렇게 미스 햅을 맡은 프랭크 프레이터 상사는 분유캔을 따서 미스 햅에게 스포이드로 먹이는 등 자식처럼 고양이를 정말 아겼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마틴 라일리 하사가 이 모습을 촬영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레이터 상사는 이 사진을 '월간 해병대(Leatherneck Magzine)에 사진과 함께 이야기를 보냈다가 1953년 AP통신과 뉴욕타임즈 등 수많은 신문에 게재되며 특종이 되었습니다.

 

 

이후 프레이터 상사는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미스 햅은 한국에 남아 해병대 공보부처(PIO)의 마스코트가 되면서 전 해병대원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미스 햅은 공보부처의 직원중에서도 콘라드 피셔 상병을 마치 엄마처럼 따랐습니다.

 

 

그리고 시카고 트리뷴의 월터 시몬즈 기자는 1953년 2월 21일자 기사로 미스 햅의 자란 모습을 기사로 다루었는데 피셔상병의 어깨에 올라탄 미스 햅이 자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군 해병대가 한국에서 철수할 때 '미스 햅'도 함께 미국으로 떠났고 미국의 언론들은 미스 햅을 '전쟁터에서 피어난 소중한 생명'이라고 보도하며 환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