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일단 전설의 특수부대라고 불리는 이집트의 777부대를 소개하기 전에 777부대의 전신인 사이카(번개) 부대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1978년 2월 19일 키프로스에서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사다트의 절친한친구를 니코시아 힐튼호텔에서 암살한 두명의 암살범들은 인질 30명을 잡고 키프로스 정부로부터 DC-8 여객기 한대를 얻어내는데 성공합니다. 남은인질 18명과 근처의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했지만 어느나라도 착륙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암살범들은 지중해를 빙빙 돌다가 키프로스의 수도인 니코시아로 되돌아갔고 키프로스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협상의 타협점을 찾아 가던 그날 밤 한대의 C-130 수송기가 나르나카 국제공항의 활주로에 착륙하였습니다. 이 수송기는 이집트 대통령이 자신의 친구를 암살한 암살범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45명의 이집트 특공대 샤이카 부대를 태운 이집트 공군기였습니다.

 

 

하지만 키프로스 당국과 전혀 협의가 없었고 착륙허가 조차 받지 않은 이집트의 공군기를 지켜본 키프로스 군과 경찰은 사이카 부대를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고 발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착륙과 동시에 번개처럼 대테러작전을 시행하려고 했던 사이카 부대는 키프로스 군과의 전투가 먼저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이카 특공대원들은 전부 키프로스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최강의 대테러 작전을 보여주려고 했던 이집트는 실패한 작전이였지만 포로가 되었다가 살아돌아온 사이카 대원들을 영웅으로 대접하였고 이에 미국도 테러리스트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있는 행동이라며 추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집트는 사이카 부대의 오명을 씻기 위해 사이카 부대를 777부대로 부대명을 바꾸고 영국의 SAS와 미국의 Special Forces에게 특수훈련을 받게됩니다. 그리고 1985년 11월 23일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110명을 태운 이집트 항공 소속 보잉 737기가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됩니다.

 

 

7년전 굴욕을 갚기 위해 777특공대는 말타의 루가 공항으로 향합니다. 이번엔 몰타정부에게 구출작전을 벌여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몰타에 도착한 777 부대는 진압작전을 계획하는데 11월 25일 아침, 기내 음식물 제공을 빌미로 문이 열린 틈에 위장한 특수부대원이 문을 확보하고 미리 동체 하부에 숨어있던 특수부대원들이 재빠르게 진입하여 테러범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이를 위해 미리 새벽부터 야음을 틈 타 777부대원들은 재빠르게 동체 밑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필이면 공항 측에서 활주로의 라이트를 모조리 꺼버린 것입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테러범들이 문을 열고 밖을 살피던 도중 접근하던 부대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테러범들은 곧바로 승객들에게
수류탄 4개를 던지고 무차별 총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에 조급해진 777부대는 곧바로 기체 하부 화물칸을 폭파하고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물에 이 옮겨붙어 기체가 화염에 휩싸이고, 뛰쳐나오는 인질들에게 몰타군 스나이퍼의 오인사격까지 벌어져 88명의 인질 중 56명이 사망하고, 승무원 2명, 테러리스트도 1명이 사망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의 리더였던 알리 레자크는 혼란한 와중에 승객으로 위장병원까지 실려갔지만 이집트 특수부대의 추격 끝에 붙잡혔습니다.


하지만 몰타 작전에서 성급하게 화물칸을 폭파한 탓에 발생한 화재로 수많은 인질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변명을 할 수 없는 대참사였던 탓에 777부대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부터 어떤 테러리스트도 학살자 집단인 777부대가 있는 이집트 항공기는 납치하지 않는다고 많이 떠돌고 있지만 아직도 이집트에는 폭탄 테러같은 많은 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집트 777 부대에 대하여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1980년대에 미국의 NASA는 우주왕복선을 개발하면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미국의 라이벌이었던 소련도 우주왕복선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러시아어로 '눈보라'라는 뜻으로 소련의 우주오아복선 계획에 의해 유일하게 완성된 부란(Буран)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부란은 미국에 비해 늦게 만들어진 만큼 미국의 우주왕복선과 달리 제작 당시 동원할 수 있는 최신 우주기술을 총동원하여 제작되었습니다.

 

 

부란의 제원은 전장 36.4M 날개 너비 24M 전체 중량 105톤, 발사 시 탑재 가능 중량 30톤, 귀환시 탑재 가능 중량은 20톤이였으며 탑승 가능 인원은 승무원 2~4명, 탑승객 6명으로 총 10명까지 가능하였습니다.

 

 

그리고 1988년 11월 15일 눈구름과 발마이 강한 카자흐스탄의 바이콘르 코스모드롬에서 부란은 거대한 에네르기아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습니다. 부란은 세 시간 동안 지구를 두 바퀴 돈 후에 아무런 오점을 남기지 않고 안전하게 착륙하였습니다.

 

▲미국 나사의 우주왕복선과 부란의 비교 사진

이 우주왕복선 오토파일럿 기능은 지상 관제 센터에서 컴퓨터로 원격 조작한 것인데, 우주선의 원격 조작은 비행기의 원격 조작이나 오토파일럿과는 차원이 다른 극도로 어려운 작업이며, 소련이 우주왕복선의 무인 비행에 성공하자 NASA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결국 NASA도 우주왕복선의 오토파일럿 기술 개발에 착수했지만 끝끝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부란은 2010년 미국의 X-37이 재돌입 후 자동 착륙을 하기까지 유일한 자동재돌입 및 착륙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작업용 로봇팔도 미국 우주왕복선은 1개밖에 없지만 부란에는 2개가 달려 하나가 고장나거나 파괴되더라도 다른 하나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당시 NASA는 우주왕복선이 대기권 진입시 기체 내부의 온도 상승을 막는 기술이 없어서 우주왕복선의 연료가 대기권 진입시에 기체의 온도 상승이나 기체 내 압력 폭증으로 인해 폭발하지 않도록 모든 연료를 우주상에 버리고 대기권에 진입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우주왕복선은 활공 비행을 통해 지구로 귀환했고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폭풍이 온다면 우주왕복선의 비행 경로가 틀어져 지정된 지점으로 귀환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우주왕복선은 발사 당일뿐만 아니라 귀환 당일에도 기상이 좋아야 했고, 당연히 발사일을 선정하기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그러나 부란의 경우에는 대기권 진입시에도 기체 내의 압력과 기온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기술이 적용되어 우주상에서 연료를 버리지 않고 대기권을 진입하였으며, 대기권 진입 이후에는 제트엔진을 가동하여 목표지점으로 얼마든지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단, 1988년 우주비행을 한 1호기에는 제트엔진이 없었습니다. 비행 이후 제트엔진을 달았지만 소련이 붕괴되어 처녀 비행이 마지막 비행이 되어 버렸고 유인 비행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트엔진을 장착한 부란은 전시물로 전락하였습니다.

 

2002년 5월 12일에 부란이 격납고가 폭발로 무너지면서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고가 아니라 러시아에서 직접 폭발시켜 묻어버린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부란을 보관하던 격납고는 북측동과 남측동 총 2개 동으로 1986년에 건축한 것인데 이 중 북측동은 부란을 조립하는 곳으로, 엄청난 무게의 부란을 격납고 공중에 매달아 둘 정도로 견고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너진 것을 보면 북측동과 남측동이 함께 붙어있는데도 북측동만 도려낸 듯이 무너져 버렸고 이는 폭탄에 의한 발파가 아니면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러시아 우주당국은 이 사건이 일어나자 부란의 시체잔해물과 건물의 잔해물을 씯어낸 듯이 치워버려 이러한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