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북한은 미국이 사소한 도발의 징후를 보인다면 선제공격으로 맞서겠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핵 항공모함 칼빈슨호의 아시아 지역으로의 이동하였을때 북한은 "그 누구이든 사소한 도발의 징후라도 보인다면 단호한 선제공격으로 침략의 아성을 불 마당질해버릴 만단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미국의 강력한 항공모함 전단을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일까요?

 

▲북한의 신형대함미사일이 미국 항공모함을 겨냥하고 있는 모습

          

북한은 미국의 항공모함에 대응하여 수소탄을 장착한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의 항공모함전단을 핵미사일을 터트려 소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핵미사일이 항공모함 전단 상공에서 터지면 그 열과 충격파로 모든 기기들이 다 망가지고 그리고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살아남기 힘들다고 합니다.

 

 

북한은 지난해 화성계열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이용하여 핵탄두를 미군들이 들어오는 남측 항구 상공에 터트려 모조리 소멸하는 시험 발사 훈련을 성과적으로 진행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중국의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둥펑21-D와 같은 역할을 북한의 화성계열 핵미사일이 할 수 있게 성능을 개량한 것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사실 이런 핵 미사일이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더라도 항공모한 전단 상공에다가 핵무기를 터트리면 호위함 등 주변의 모든 함선이 반격도 못하고 무력화될 수 있으며 만약 호위 핵잠수함이 살아 있다면 북한에 대해 보복 공격을 가할 수는 있겠지만 북한이 항모전단에 핵미사일 선제타격을 가할 때쯤이면 핵어뢰로 무장한 북한의 잠수함이 수중 미국의 핵잠수함을 제압하는 작전에 돌입할 것이고 설령 북한의 잠수함을 미국 잠수함이 먼저 제압하고 생존한다고 해도 보복 공격을 북한 본토에 해야 하는데 그것은 미국 본토에 대한 보복 핵공격을 초래하는 일이어서 미국의 수뇌부들도 북한 본토에 대한 핵미사일 공격은 쉽게 결정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북한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미 과학 전문매체 '파퓰러 미캐닉스'(PM)에 따르면 북한이 미국의 항공모함을 격침하는데 대함 미사일, 전투기, 잠수함, 핵탄두 적재 중거리 탄도미사일 등을 동원할 수 있지만, 효과는 사실상 없으며 불가능하다고 분석했습니다. 항공모함 자체 그리고 항공모함 전단의 방어력을 볼 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또한 북한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미국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수 있는 미사일도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4월 29일 북한이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했지만 공중에서 폭발했었습니다. 북한이 실패한 미사일은 중장거리 미사일(IRBM)인 북극성 계열 또는 스커드-ER 등 북한이 최근 새로 개량한 미사일이었습니다.

 

▲중국이 생각하는 둥펑21-D로 미국 항공모함을 격침하는 모습

 

하지만 북한과 중국은 다릅니다. 미국 항공모함에 비해 중국의 랴오닝호 항공모함이 어른 대 유치원생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랴오닝호가 서태평양에 진출하여 휘젖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대만해협을 지나 동중국해로 진입하여 사드배치 한미일에 대해 경고 항해를 자신있게 진행하고 있는 것도 둥펑21-D라는 대항공모함 타격용 핵미사일을 장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둥펑으로 항모를 정확하게 타격할 필요도 없이 상공에다 핵탄을 터트리면 호위함을 포함한 미국 항모전단은 모조리 불타게 된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항공모함을 격침시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북한과 중국의 허세에 불과해 보입니다.

 

 

북한의 1년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2~3억 달러도 안 되는데, 북한 수준에서 미국의 항모전단 하나를 가지려면 100년 동안 무역한 돈을 꼬박 모아도 모자랍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항모전단을 무려 11개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항공모함이 들어와 전투를 시작하면 북한 반항공망은 하루도 안돼 완전히 격멸됩니다. 실제로 예전에 걸프전 때 이라크 방공망이 세계 5대에 든다고 했는데 하루 만에 다 파괴됐습니다. 미국은 이미 위성이나 정찰기로 북한 방공망 지도를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전쟁 즉시 각 레이더에 엄청난 위력을 지닌 폭탄 몇 개씩 떨굽니다. 이렇게 무서운 항공모함의 위력을 전 세계에서 북한군만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자랑하는 핵무기는 정말 무서운 무기입니다. 사실 어떻게든지 북한의 핵보유만은 막았어야 했습니다. 94년 북미제네바합의만 이행했더라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을 이제 북한은 극강 수소탄까지 보유한 핵대국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2000년 10월 12일 아덴 만 해역에서 통상적 작전을 수행하던 미 해군의 알레이 버크급 이지스 구축함 일명 콜함(DDG-67 USS Cole)은 연료 보급을 목적으로 아덴항에 입항하여 연료 보급 작업 및 통상 정비, 승조원의 휴식 등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현지시각 11시 18분 소형 모터보트 1척이 저돌적인 돌격으로 콜 함의 좌현 중앙 부분과 충돌함과 동시에 폭발했습니다.

 

 

이 모터보트에는 두 명의 선원(테러범)이 타고 있었고, 이들을 목격한 승조원들의 경계심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충돌 직전까지 웃으며 손까지 흔드는 등의 행동을 했었습니다.

 

 

미 해군 함정이 외부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1987년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 USS 스타크 함이 페르시아 만에서 이라크 공군의 오인 공격으로 엑조세 대함 미사일에 피격당한 이후 13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이 공격으로 19명이 전사하고 39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피격 부위가 콜 함의 승조원 식당 부근으로, 조리 직별 인원들 및 이른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승조원들이 주 희생자였습니다.

 

 

이후 미군 및 CIA의 조사 결과, 공격의 배후는 알 카에다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명확한 물증이 없었던 데다, 시기적으로 대선이 불과 1달 앞이라 빌 클린턴 행정부가 무리한 보복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미국은 아무런 보복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알 카에다가 미국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건이 되었으며 알 카에다의 조직규모나 능력이 지금까지의 테러 조직들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것 또한 증명되었습니다.

 

당시 함장이었던 항해중령 커크 립폴드는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으로 얻은 미 해군의 교훈이 반영되어, 그가 승조원들에게 규정된 수준의 당직을 세우는 등 경계를 태만히 하지 않았고, 또 위와 같은 자살 테러는 예측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감안해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공격받았던 콜 함은 이후 2년여에 걸친 수리 끝에 2003년 11월 29일 현역에 재복귀했고, 2006년에는 사고가 난 아덴 만 해역으로 재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4월 22일. 6년 동안의 법정 투쟁 끝에 이 사건으로 희생된 승조원들의 유가족들에게 최소 $200,000 이상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신의 방패라 불리던 미 해군의 이지스함이 테러범의 소형 보트에 어이없이 공격을 받은 사건으로 세계 해군은 자살공격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실제 이후 스리랑카 내전에서 타밀 반군이 정부군 고속정을 소형 보트를 이용한 자살공격으로 격침시키기도 하는 등, 이러한 방식의 공격이 해상력이 없다시피한 반군 세력이나 테러 조직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물리학자 존 브란덴버그 박사는 화성에 아무런 생명체가 살지 않는 이유를 핵전쟁으로 모두 섬멸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화성에서 핵전쟁이 벌어진 증거로 화성 토양을 말하였는데 화성 토양의 색깔과 합성물질을 살펴보면 '핵융합-핵분열 조합으로 이루어진 폭발'의 결과물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버튼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핵전쟁은 절대 벌어지면 안되는 인류의 재앙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절대 핵전쟁을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핵전쟁의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기밀해제 되어 공개된 위 지도를 보시면 1956년 핵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이 핵무기들을 쏟아부을 위치들이 나와있습니다. 물론 현재는 핵전쟁의 가능성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냉전이 한창일 때는 언제 핵전쟁이 시작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전면핵전쟁계획 SIOP(Single Integrated Operational Plan)입니다.

 

 

SIOP이 계획은 핵전쟁 뿐만이 아니라 핵공격 후의 미군작전계획도 같이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선제공격시에는 3200발의 핵미사일을 일단 발사하고 핵전쟁 뒤 살아남은 잔존 NATO군과 기타 친미진영 군대가 소련으로 진격하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북한과 중국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계획이었지만 정말 핵전쟁이 발생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핵전쟁이 벌어지고 세계 곳곳에서는 핵폭발 뒤의 낙진방사능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얼마 못 살 것입니다.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큼 방사능이 사라지는데는 평균적인 물건으로 70년 정도가 걸립니다. 핵전쟁 뒤에는 핵전쟁으로 나온 먼지들이 지구 상공을 뒤덮어 지구의 온도가 곤두박질쳐 핵겨울이 찾아온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상 과장에 가깝습니다. 그 온도 변화는 얼마 가지 않을 것이며, 그리 심각할 정도의 온도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북한이 우리나라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의 대피시설은 화생방 방호도에 따라 1등급에서부터 4등급까지 나누어집니다. 3~4등급은 실상 ‘우리집 지하실’ 수준에 지나지 않고, 핵전쟁 상황에서 유효한 것은 1등급 뿐입니다. 그런데 1등급 대피시설은 전국에 총 15개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총 수용가능 인원은 1만200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핵전쟁이 벌어지면 지하 깊은 곳으로 피하면 된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말그대로 지하 깊은 곳까지 피해도 시간의 문제일 뿐 지하5,4,3층까지 지표의 빗물이 새어든 보급수 탓에 방사능에 오염됩니다. 1등급 대피시설이 되어야 자체 발전시설과 오염 측정기, 전자기파나 핵 충격파를 막을 수 있는 방폭문, 2주 이상 유지할 수 있는 비상식량이 갖춰집니다.

 


충격적인것은 군사 시설을 제외하면 서울에는 1등급 대피시설이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유일한 1등급 대피시설인 서울시 신청사도 비상 상황시 행정업무 및 지휘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며 실제 상황에서 민간인이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핵전쟁 이후의 서울에는 청와대 공무원과 서울시 공무원만 남게 된다는 뜻입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자신 동네 대피시설의 위치를 국가재난정보센터 홈페이지(www.safekorea.go.kr)에서 한번쯤은 확인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홈페이지 접속 후 상단 '민방위' 코너에 들어가 '시설·장비·화생방'의 대피시설을 클릭해 해당지역을 검색하면 됩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은 국가의 첫 번째 책무입니다. 그러나 국방비 규모가 세계 10위권인 우리나라의 국가안보는 여전히 취약한 상태입니다. 제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있다 하더라도 위기에서 제 국민을 지키지 못하면 그 국가는 존립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을 잊지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이 23일 오후 2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묘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때는 5년간 단 한건도 군사적 충돌이 없었고 국민과 장병의 안타까운 희생이 단 한병도 없었다"고 말하며 안보에 유능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국뿐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도 싫은 소리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사병출신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 정부부터 계속 이어져 오던 이지스함 도입사업, 공중조기경보기 도입사업, 초음속 대함 미사일 최신기술 등 확보, KT-1 기본훈련기, T-50 고등훈련기 등 한국형 전투기 개발, 아시아 최대의 강습상륙함 ‘독도함’ 도입, K1A1, K2, k9등 육군 화력 증가. 병사들 월급 인상 등을 실현했습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국방예산이 해마다 평균 8.8% 증가했고, 각종 무기와 장비를 도입하기 위한 전력 증강 예산인 방위력 개선비의 평균 증가율은 무려 11.7%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2003년 6월 2일, 조영길 당시 국방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핵 추진 잠수함 건조 계획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한국형 핵 잠수함 개발 사업은 이렇게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날짜를 따서 ‘362 사업’이라고 명명돼 비밀리에 착수됐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우리 해군은 벌써 핵 잠수함 2척을 확보했겠지만 아쉽게도 362 사업은 1년 여 만에 종료됐습니다. 비밀 사업이었는데 한 언론의 보도로 외부에 노출됐기 때문이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북송금특검, 이라크파병, 한미FTA, 제주해군기지 등 중요한 외교안보사안이 있을 때 항상 내부에서 찬반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거쳤습니다. 사안의 성격상 필요하면 민정수석실과 정무수석실(후엔 시민사회수석실), 국민참여수석실 등 비외교안보 부서까지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제나 토론을 모두 경청한 후 최종 결단을 내렸습니다. 대통령이 혼자 결정하는 법이 없었습니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반미였다고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한미 동맹에 대한 그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그 이상이였습니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가 FTA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 동맹에 큰 공헌을 했다. -전 미 NSC마이클 그린 선임 보좌관 -

 

그리고 전시작전통제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에 강력하게 추진했었습니다. 그리고 재임 당시인 2006년 12월 21일, 서울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자리에서 전시작전통제권 관련해 작심하고 기존 군 장성들을 비판했습니다.

 

"자기들 나라, 자기 군대, 작전통제도 한 개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들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기입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사진출처: 노무현 재단)

전작권 환수 문제는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간에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2006년 노무현-부시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전작권 전환에 공감대를 모았습니다. 이듬해인 2007년 2월 한미 양국은 국방장관 회담에서 2012년 4월 17일자로 전작권을 한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해 최종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전작권 전환 시기가 연기되었고 시간이 지나 전작권 전환은 기약 없이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임기동안 열심히 대한민국의 자주국방을 꿈꾸고 노력하셨던 진정한 안보 대통령이셨습니다.

 

6.25 한국전쟁 시작과 함께 철도직원 약 67%인 1만9300여 명의 철도직원이 교통부 산하 전시군사수송본부에 배속돼 병력과 군수물자, 피난민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 중 287명이 전사했습니다. 이 중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딘 장군 열차구출작전'은 미국 특수부대와 대한민국 철도원이 함께 펼친 철도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깃든 구출작전으로 꼽힙니다. 그 중 가장 뜨거운 애국심을 보여준 김재현 기관사에 대해 소개해보겠습니다.

 

 

김재현(金裁鉉 예안 김씨 26대손)은 1923년 9월 21일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44년 일제강점기 당시 철도국에 입사하여 대전기관차사무소 기관사로 일하였습니다. 그러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임시수도였던 대전을 방어하던 미 육군 제24보병사단장인 육군소장 윌리엄 F. 딘(William Frishe Dean)장군은 퇴각중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실 F.딘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모든 전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7월 19일 새벽 북한 육군의 포로가 된 F. 딘 장군을 구출하기 위해 미 특공대원 33명이 대전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들의 작전 성공 가능성은 높지 않았고 이들의 생환 가능성은 희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동 수단은 바로 기관차였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기관차를 운전할 기관사가 지원을 안 하는 상황이였습니다.

 

 

바로 그때 가장 먼저 김재현 기관사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 위험한 작전에 자원하였습니다. 당시 김재현 기관사의 나이는 28살이였으며 1남 1녀의 가장이었습니다. 본무조사 황남호, 보조조사 현재영 등과 증기기관차 미카 3-129호, 석탄차, 화차 각 1량씩을 연결된 열차를 몰고 미 육군 특공대 33명과 함께 저녁 6시경 이원역을 출발, 대전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증기기관차 가감간을 잡고있는 김재현 기관사 모습

 

그러나 특공 대원들이 딘 장군을 발견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다시 옥천역으로 후퇴하던 중, 세천역 부근 세천터널에서 매복해 있던 북한 육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대부분의 특공대원과 함께 28살 꽃다운 나이에 마지막 순간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고 순직했습니다. 특공대원들은 다수의 사상자가 났으며 남은 승무원 2명 중 1명도 총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동료들에 의해 영동산 아래에 묻혔다가 휴전 후 고향 논산으로 이장되었고, 1983년 기차 기관사로는 최초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영관급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역무원으로 근무하였고 외손자는 2005년 코레일에 입사하여 대전광역시에 있는 시설장비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외할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2011년 철도기관사 면허를 땄습니다.

 

 

2012년 미국 국방부로부터 '특별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이 상을 받는 사람은 김재현 기관사가 유일합니다. 민간인 신분으로서, 살아올 가망이 희박한 작전에 참여를 자원하여 공을 세운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편 김재현 기관사의 유품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철도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가 몰았던 미카 3-129 증기기관차는 2008년 10월 17일 등록문화재 제415호로 지정되었으며 한 때 대전철도차량관리단에 정태 보존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 현충원 내 철도추모관에 야외전시중입니다.

 

한국전쟁에서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 중 하나는 미 군인의 희생입니다. 미국이 참전한 4대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가운데 비율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미군은 특히 적지 않은 장군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해 희생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원수를 비롯하여 미군 장군의 아들 142명이 참전한 가운데 무려 35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의 참전 결정

서울이 함락 후인 50년 6월 28일(한국은 29일) 17시 국가안보회의 직전 있었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유엔의 경찰행위라고 부를 수 있느냐?"라고 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국가안보회의에서 가능한 지상군을 배재하고 해공군 위주의 지원을 맥아더에게 지시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그 정도 지원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가 다음날 새벽인 6월 30일에 보낸 전문은 "자신이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였습니다. 그러면서 세부적으로 연대 단위의 미국 전투 부대를 긴급 투입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2개 사단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유엔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유엔의 깃발 아래 모였고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 6개 국가가 군대 파견을 약속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미 해군의 화력
당시 미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항공모함은 총 15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7척의 공격용 항공모함(CV), 4척의 경항공모함(CVL), 4척의 호위항공모함(CVE)이 있었습니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에서는 정규 항공모함만 11척이 77기동함대에 배속되어 주로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항공모함을 제외한 아이오와급 전함들도 대활약하였는데 16인치 함포가 포함된 4백만발의 포탄을 발사 하여 지상군에 대한 화력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미 해군의 활약에 비해 미 해군이 받은 피해는 4척의 소해함정과 1척의 원양 예인선이 적 기뢰에 의해 침몰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거의 일방적인 게임이었습니다.

 


미 해군 항공대 소속인 제24항모항공단(CAG)은 정규함공모함 함재되어 해군 예비항공편대 22개를 포함하여 총 100개의 편대가 한국전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이들과 지상기지 해병항공대는 미 공군 출격횟수인 392,139회의 70%에 달하는 275,912회 출격하여 북한-중공군을 항공기 공포증에 걸리게 만들었습니다. 피해는 적 대공화기에 의해 599대, 사고 등으로 인해 85대 등 총 68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전투기 400대, 공격기 140대, 관측기 12대, 헬기 8대, 초계기 2대, 순찰기 1대, 수송기 1대엿습니다.

 


미 해군과 육군과 달리 미 공군의 주적은 소련 공군이었습니다. 소련군은 비밀리에 북한 공군과 방공군으로 참전하여 미 공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6.25를 다룬 서적을 봐도 북한 공군에 대한 이야기는 소련군에 비교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 수준입니다.

 

엄청난 미국의 군수지원

미 군수지원부대는 미군뿐만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 전체에 대한 군수지원을 책임졌습니다. 최초에는 1950년 7월 4일 미 8군이 부산기지사령부를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어, 7월 13일 제8군 예하인 편제표상 1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B형 군수부대로서 부산군수사령부로 개편되었습니다. 당시는 일선부대의 요청->부산군수사령부->미8군 후방사령부->후방사령부(본토) 체계였습니다. 미8군 후방사령부의 경우 한국에서 전장이 확대 될 것을 예상하고 50년 8월 25일 제8군 후방사령부를 기간으로 하여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주일군수사령부를 일본에 창설하였습니다.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까지 끌어모은 미국

원래 전쟁이 6월 25일에 일어난 이유가 북한이 8월 15일까지 한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필요기간인 50일을 역산하여 나온 날짜였습니다. 8.15까지 통일은 물 건너갔으니 이때 북한군은 8.15까지 대구를 점령하겠다며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해야 한다며 배에 태웠다가, 낙동강이 무너지게 생겨서 배에 내렸다가 다시 배에 타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8월 14일이었습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참이던 그 8월 14일, 미 육군 주방위군 27개 사단중 8개 사단과 20개 연대전투단중 3개 연대전투단을 포함하여 1,457개의 주방위군 부대가 동원되었습니다. 이들 부대로는 28·31·37·40·43·44·45·47 보병사단과 3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43개 대공포 대대로 총 138,600명이 현역으로 소집되었습니다. 이중 40·45사단은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1951년 중공군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 전선교대 부대가 되었습니다.

 


주방위군과 마찬가지로 동원령에 따라 미 육군 예비군은 6,687개 부대중 934개 부대가 현역으로 소집되었고 이에 따라 장교 46,920명, 사병 150,807명 등 총 197,727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초기 현역으로 전환된 43,000명의 예비역 장교를 포함하여 244,300명의 장병이 소집되어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병력들을 소집하여 투입한 육군과 달리 미 해군은 퇴역한 군함 등 장비에 대한 보충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해 8월 28일에는 수많은 예비군과 함께 예비항공모함 프린스턴함(USS Princeton, CV-37)을 재취역하여 한국전에 투입하였고, 이어 1951년에는 순양함 본 홈 리차드, 에식스, 앤티텀함이 재취역하였으며, 약 22개 해군 예비 전투기편대가 제7함대기동군(Striking Force)에 현역으로 편입되어 한국 상공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미 공군의 경우 공군 주방위군 소속의 F-51전투기 145대를 소집하여 한국전선에 보냈습니다. 또한 437 예비병력수송항공단, 452 예비항공폭격단, 403 예비병력수송한공단을 현역으로 소집하고 51년에는 주방위군의 116·136 전투폭격비행단을 현역으로 동원하여 52년 7월까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전쟁기간중 공군 주방위군 22개 비행단과 공군예비군 10개 비행단, 그리고 10만 명의 공군예비군이 현역으로 소집되었습니다.

 


미 해병대의 경우 전쟁발발시 현역은 74,279명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도서를 보면 미 해병 1사단이 이름만 존재하지 실병력이 없어 미 전역+예비군을 소집해서 채워넣어 작전에 투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0년 7월 그나마 남아있던 제5해병연대는 제1임시해병여단의 모체가 되어 한국으로 출발하였고, 전 세계에 있는 해병부대들은 1사단의 깃발아래 모이기 위해 해체되었습니다. 또한 해병편성예비군 33,528명을 현역으로 소집하였고 해병지원예비군 90,944명 중 51,942명이 현역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이들 예비역 중 장교 79%, 사병 77.5%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