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북한은 미국이 사소한 도발의 징후를 보인다면 선제공격으로 맞서겠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핵 항공모함 칼빈슨호의 아시아 지역으로의 이동하였을때 북한은 "그 누구이든 사소한 도발의 징후라도 보인다면 단호한 선제공격으로 침략의 아성을 불 마당질해버릴 만단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미국의 강력한 항공모함 전단을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일까요?

 

▲북한의 신형대함미사일이 미국 항공모함을 겨냥하고 있는 모습

          

북한은 미국의 항공모함에 대응하여 수소탄을 장착한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미국의 항공모함전단을 핵미사일을 터트려 소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핵미사일이 항공모함 전단 상공에서 터지면 그 열과 충격파로 모든 기기들이 다 망가지고 그리고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살아남기 힘들다고 합니다.

 

 

북한은 지난해 화성계열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이용하여 핵탄두를 미군들이 들어오는 남측 항구 상공에 터트려 모조리 소멸하는 시험 발사 훈련을 성과적으로 진행했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중국의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둥펑21-D와 같은 역할을 북한의 화성계열 핵미사일이 할 수 있게 성능을 개량한 것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사실 이런 핵 미사일이 정확하게 맞추지 못하더라도 항공모한 전단 상공에다가 핵무기를 터트리면 호위함 등 주변의 모든 함선이 반격도 못하고 무력화될 수 있으며 만약 호위 핵잠수함이 살아 있다면 북한에 대해 보복 공격을 가할 수는 있겠지만 북한이 항모전단에 핵미사일 선제타격을 가할 때쯤이면 핵어뢰로 무장한 북한의 잠수함이 수중 미국의 핵잠수함을 제압하는 작전에 돌입할 것이고 설령 북한의 잠수함을 미국 잠수함이 먼저 제압하고 생존한다고 해도 보복 공격을 북한 본토에 해야 하는데 그것은 미국 본토에 대한 보복 핵공격을 초래하는 일이어서 미국의 수뇌부들도 북한 본토에 대한 핵미사일 공격은 쉽게 결정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북한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미 과학 전문매체 '파퓰러 미캐닉스'(PM)에 따르면 북한이 미국의 항공모함을 격침하는데 대함 미사일, 전투기, 잠수함, 핵탄두 적재 중거리 탄도미사일 등을 동원할 수 있지만, 효과는 사실상 없으며 불가능하다고 분석했습니다. 항공모함 자체 그리고 항공모함 전단의 방어력을 볼 때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또한 북한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미국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수 있는 미사일도 보유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4월 29일 북한이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했지만 공중에서 폭발했었습니다. 북한이 실패한 미사일은 중장거리 미사일(IRBM)인 북극성 계열 또는 스커드-ER 등 북한이 최근 새로 개량한 미사일이었습니다.

 

▲중국이 생각하는 둥펑21-D로 미국 항공모함을 격침하는 모습

 

하지만 북한과 중국은 다릅니다. 미국 항공모함에 비해 중국의 랴오닝호 항공모함이 어른 대 유치원생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랴오닝호가 서태평양에 진출하여 휘젖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대만해협을 지나 동중국해로 진입하여 사드배치 한미일에 대해 경고 항해를 자신있게 진행하고 있는 것도 둥펑21-D라는 대항공모함 타격용 핵미사일을 장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둥펑으로 항모를 정확하게 타격할 필요도 없이 상공에다 핵탄을 터트리면 호위함을 포함한 미국 항모전단은 모조리 불타게 된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항공모함을 격침시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북한과 중국의 허세에 불과해 보입니다.

 

 

북한의 1년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2~3억 달러도 안 되는데, 북한 수준에서 미국의 항모전단 하나를 가지려면 100년 동안 무역한 돈을 꼬박 모아도 모자랍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항모전단을 무려 11개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항공모함이 들어와 전투를 시작하면 북한 반항공망은 하루도 안돼 완전히 격멸됩니다. 실제로 예전에 걸프전 때 이라크 방공망이 세계 5대에 든다고 했는데 하루 만에 다 파괴됐습니다. 미국은 이미 위성이나 정찰기로 북한 방공망 지도를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전쟁 즉시 각 레이더에 엄청난 위력을 지닌 폭탄 몇 개씩 떨굽니다. 이렇게 무서운 항공모함의 위력을 전 세계에서 북한군만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자랑하는 핵무기는 정말 무서운 무기입니다. 사실 어떻게든지 북한의 핵보유만은 막았어야 했습니다. 94년 북미제네바합의만 이행했더라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을 이제 북한은 극강 수소탄까지 보유한 핵대국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2000년 10월 12일 아덴 만 해역에서 통상적 작전을 수행하던 미 해군의 알레이 버크급 이지스 구축함 일명 콜함(DDG-67 USS Cole)은 연료 보급을 목적으로 아덴항에 입항하여 연료 보급 작업 및 통상 정비, 승조원의 휴식 등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현지시각 11시 18분 소형 모터보트 1척이 저돌적인 돌격으로 콜 함의 좌현 중앙 부분과 충돌함과 동시에 폭발했습니다.

 

 

이 모터보트에는 두 명의 선원(테러범)이 타고 있었고, 이들을 목격한 승조원들의 경계심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충돌 직전까지 웃으며 손까지 흔드는 등의 행동을 했었습니다.

 

 

미 해군 함정이 외부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1987년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 USS 스타크 함이 페르시아 만에서 이라크 공군의 오인 공격으로 엑조세 대함 미사일에 피격당한 이후 13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이 공격으로 19명이 전사하고 39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피격 부위가 콜 함의 승조원 식당 부근으로, 조리 직별 인원들 및 이른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승조원들이 주 희생자였습니다.

 

 

이후 미군 및 CIA의 조사 결과, 공격의 배후는 알 카에다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명확한 물증이 없었던 데다, 시기적으로 대선이 불과 1달 앞이라 빌 클린턴 행정부가 무리한 보복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미국은 아무런 보복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알 카에다가 미국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건이 되었으며 알 카에다의 조직규모나 능력이 지금까지의 테러 조직들과는 수준이 다르다는 것 또한 증명되었습니다.

 

당시 함장이었던 항해중령 커크 립폴드는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으로 얻은 미 해군의 교훈이 반영되어, 그가 승조원들에게 규정된 수준의 당직을 세우는 등 경계를 태만히 하지 않았고, 또 위와 같은 자살 테러는 예측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감안해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공격받았던 콜 함은 이후 2년여에 걸친 수리 끝에 2003년 11월 29일 현역에 재복귀했고, 2006년에는 사고가 난 아덴 만 해역으로 재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4월 22일. 6년 동안의 법정 투쟁 끝에 이 사건으로 희생된 승조원들의 유가족들에게 최소 $200,000 이상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신의 방패라 불리던 미 해군의 이지스함이 테러범의 소형 보트에 어이없이 공격을 받은 사건으로 세계 해군은 자살공격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실제 이후 스리랑카 내전에서 타밀 반군이 정부군 고속정을 소형 보트를 이용한 자살공격으로 격침시키기도 하는 등, 이러한 방식의 공격이 해상력이 없다시피한 반군 세력이나 테러 조직들에게 널리 알려졌습니다.

 

물리학자 존 브란덴버그 박사는 화성에 아무런 생명체가 살지 않는 이유를 핵전쟁으로 모두 섬멸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화성에서 핵전쟁이 벌어진 증거로 화성 토양을 말하였는데 화성 토양의 색깔과 합성물질을 살펴보면 '핵융합-핵분열 조합으로 이루어진 폭발'의 결과물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버튼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핵전쟁은 절대 벌어지면 안되는 인류의 재앙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절대 핵전쟁을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핵전쟁의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기밀해제 되어 공개된 위 지도를 보시면 1956년 핵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이 핵무기들을 쏟아부을 위치들이 나와있습니다. 물론 현재는 핵전쟁의 가능성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냉전이 한창일 때는 언제 핵전쟁이 시작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전면핵전쟁계획 SIOP(Single Integrated Operational Plan)입니다.

 

 

SIOP이 계획은 핵전쟁 뿐만이 아니라 핵공격 후의 미군작전계획도 같이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선제공격시에는 3200발의 핵미사일을 일단 발사하고 핵전쟁 뒤 살아남은 잔존 NATO군과 기타 친미진영 군대가 소련으로 진격하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북한과 중국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계획이었지만 정말 핵전쟁이 발생한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핵전쟁이 벌어지고 세계 곳곳에서는 핵폭발 뒤의 낙진방사능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얼마 못 살 것입니다.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큼 방사능이 사라지는데는 평균적인 물건으로 70년 정도가 걸립니다. 핵전쟁 뒤에는 핵전쟁으로 나온 먼지들이 지구 상공을 뒤덮어 지구의 온도가 곤두박질쳐 핵겨울이 찾아온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상 과장에 가깝습니다. 그 온도 변화는 얼마 가지 않을 것이며, 그리 심각할 정도의 온도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북한이 우리나라에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의 대피시설은 화생방 방호도에 따라 1등급에서부터 4등급까지 나누어집니다. 3~4등급은 실상 ‘우리집 지하실’ 수준에 지나지 않고, 핵전쟁 상황에서 유효한 것은 1등급 뿐입니다. 그런데 1등급 대피시설은 전국에 총 15개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총 수용가능 인원은 1만200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핵전쟁이 벌어지면 지하 깊은 곳으로 피하면 된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말그대로 지하 깊은 곳까지 피해도 시간의 문제일 뿐 지하5,4,3층까지 지표의 빗물이 새어든 보급수 탓에 방사능에 오염됩니다. 1등급 대피시설이 되어야 자체 발전시설과 오염 측정기, 전자기파나 핵 충격파를 막을 수 있는 방폭문, 2주 이상 유지할 수 있는 비상식량이 갖춰집니다.

 


충격적인것은 군사 시설을 제외하면 서울에는 1등급 대피시설이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유일한 1등급 대피시설인 서울시 신청사도 비상 상황시 행정업무 및 지휘통제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며 실제 상황에서 민간인이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핵전쟁 이후의 서울에는 청와대 공무원과 서울시 공무원만 남게 된다는 뜻입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자신 동네 대피시설의 위치를 국가재난정보센터 홈페이지(www.safekorea.go.kr)에서 한번쯤은 확인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홈페이지 접속 후 상단 '민방위' 코너에 들어가 '시설·장비·화생방'의 대피시설을 클릭해 해당지역을 검색하면 됩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은 국가의 첫 번째 책무입니다. 그러나 국방비 규모가 세계 10위권인 우리나라의 국가안보는 여전히 취약한 상태입니다. 제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있다 하더라도 위기에서 제 국민을 지키지 못하면 그 국가는 존립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을 잊지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이 23일 오후 2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묘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때는 5년간 단 한건도 군사적 충돌이 없었고 국민과 장병의 안타까운 희생이 단 한병도 없었다"고 말하며 안보에 유능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미국뿐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도 싫은 소리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사병출신이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 정부부터 계속 이어져 오던 이지스함 도입사업, 공중조기경보기 도입사업, 초음속 대함 미사일 최신기술 등 확보, KT-1 기본훈련기, T-50 고등훈련기 등 한국형 전투기 개발, 아시아 최대의 강습상륙함 ‘독도함’ 도입, K1A1, K2, k9등 육군 화력 증가. 병사들 월급 인상 등을 실현했습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국방예산이 해마다 평균 8.8% 증가했고, 각종 무기와 장비를 도입하기 위한 전력 증강 예산인 방위력 개선비의 평균 증가율은 무려 11.7%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2003년 6월 2일, 조영길 당시 국방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핵 추진 잠수함 건조 계획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한국형 핵 잠수함 개발 사업은 이렇게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날짜를 따서 ‘362 사업’이라고 명명돼 비밀리에 착수됐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우리 해군은 벌써 핵 잠수함 2척을 확보했겠지만 아쉽게도 362 사업은 1년 여 만에 종료됐습니다. 비밀 사업이었는데 한 언론의 보도로 외부에 노출됐기 때문이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북송금특검, 이라크파병, 한미FTA, 제주해군기지 등 중요한 외교안보사안이 있을 때 항상 내부에서 찬반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거쳤습니다. 사안의 성격상 필요하면 민정수석실과 정무수석실(후엔 시민사회수석실), 국민참여수석실 등 비외교안보 부서까지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제나 토론을 모두 경청한 후 최종 결단을 내렸습니다. 대통령이 혼자 결정하는 법이 없었습니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반미였다고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한미 동맹에 대한 그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그 이상이였습니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가 FTA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 동맹에 큰 공헌을 했다. -전 미 NSC마이클 그린 선임 보좌관 -

 

그리고 전시작전통제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에 강력하게 추진했었습니다. 그리고 재임 당시인 2006년 12월 21일, 서울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자리에서 전시작전통제권 관련해 작심하고 기존 군 장성들을 비판했습니다.

 

"자기들 나라, 자기 군대, 작전통제도 한 개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들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얘기입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사진출처: 노무현 재단)

전작권 환수 문제는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간에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2006년 노무현-부시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전작권 전환에 공감대를 모았습니다. 이듬해인 2007년 2월 한미 양국은 국방장관 회담에서 2012년 4월 17일자로 전작권을 한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해 최종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전작권 전환 시기가 연기되었고 시간이 지나 전작권 전환은 기약 없이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임기동안 열심히 대한민국의 자주국방을 꿈꾸고 노력하셨던 진정한 안보 대통령이셨습니다.

 

6.25 한국전쟁 시작과 함께 철도직원 약 67%인 1만9300여 명의 철도직원이 교통부 산하 전시군사수송본부에 배속돼 병력과 군수물자, 피난민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 중 287명이 전사했습니다. 이 중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딘 장군 열차구출작전'은 미국 특수부대와 대한민국 철도원이 함께 펼친 철도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깃든 구출작전으로 꼽힙니다. 그 중 가장 뜨거운 애국심을 보여준 김재현 기관사에 대해 소개해보겠습니다.

 

 

김재현(金裁鉉 예안 김씨 26대손)은 1923년 9월 21일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44년 일제강점기 당시 철도국에 입사하여 대전기관차사무소 기관사로 일하였습니다. 그러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임시수도였던 대전을 방어하던 미 육군 제24보병사단장인 육군소장 윌리엄 F. 딘(William Frishe Dean)장군은 퇴각중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실 F.딘 장군은 맥아더 장군의 모든 전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7월 19일 새벽 북한 육군의 포로가 된 F. 딘 장군을 구출하기 위해 미 특공대원 33명이 대전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이들의 작전 성공 가능성은 높지 않았고 이들의 생환 가능성은 희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동 수단은 바로 기관차였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기관차를 운전할 기관사가 지원을 안 하는 상황이였습니다.

 

 

바로 그때 가장 먼저 김재현 기관사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 위험한 작전에 자원하였습니다. 당시 김재현 기관사의 나이는 28살이였으며 1남 1녀의 가장이었습니다. 본무조사 황남호, 보조조사 현재영 등과 증기기관차 미카 3-129호, 석탄차, 화차 각 1량씩을 연결된 열차를 몰고 미 육군 특공대 33명과 함께 저녁 6시경 이원역을 출발, 대전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증기기관차 가감간을 잡고있는 김재현 기관사 모습

 

그러나 특공 대원들이 딘 장군을 발견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다시 옥천역으로 후퇴하던 중, 세천역 부근 세천터널에서 매복해 있던 북한 육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대부분의 특공대원과 함께 28살 꽃다운 나이에 마지막 순간까지 운전대를 놓지 않고 순직했습니다. 특공대원들은 다수의 사상자가 났으며 남은 승무원 2명 중 1명도 총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동료들에 의해 영동산 아래에 묻혔다가 휴전 후 고향 논산으로 이장되었고, 1983년 기차 기관사로는 최초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영관급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역무원으로 근무하였고 외손자는 2005년 코레일에 입사하여 대전광역시에 있는 시설장비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외할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2011년 철도기관사 면허를 땄습니다.

 

 

2012년 미국 국방부로부터 '특별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이 상을 받는 사람은 김재현 기관사가 유일합니다. 민간인 신분으로서, 살아올 가망이 희박한 작전에 참여를 자원하여 공을 세운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편 김재현 기관사의 유품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철도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가 몰았던 미카 3-129 증기기관차는 2008년 10월 17일 등록문화재 제415호로 지정되었으며 한 때 대전철도차량관리단에 정태 보존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 현충원 내 철도추모관에 야외전시중입니다.

 

한국전쟁에서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 중 하나는 미 군인의 희생입니다. 미국이 참전한 4대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가운데 비율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미군은 특히 적지 않은 장군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해 희생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원수를 비롯하여 미군 장군의 아들 142명이 참전한 가운데 무려 35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의 참전 결정

서울이 함락 후인 50년 6월 28일(한국은 29일) 17시 국가안보회의 직전 있었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유엔의 경찰행위라고 부를 수 있느냐?"라고 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국가안보회의에서 가능한 지상군을 배재하고 해공군 위주의 지원을 맥아더에게 지시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그 정도 지원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가 다음날 새벽인 6월 30일에 보낸 전문은 "자신이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였습니다. 그러면서 세부적으로 연대 단위의 미국 전투 부대를 긴급 투입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2개 사단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유엔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유엔의 깃발 아래 모였고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 6개 국가가 군대 파견을 약속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미 해군의 화력
당시 미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항공모함은 총 15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7척의 공격용 항공모함(CV), 4척의 경항공모함(CVL), 4척의 호위항공모함(CVE)이 있었습니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에서는 정규 항공모함만 11척이 77기동함대에 배속되어 주로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항공모함을 제외한 아이오와급 전함들도 대활약하였는데 16인치 함포가 포함된 4백만발의 포탄을 발사 하여 지상군에 대한 화력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미 해군의 활약에 비해 미 해군이 받은 피해는 4척의 소해함정과 1척의 원양 예인선이 적 기뢰에 의해 침몰한 것이 전부일 정도로 거의 일방적인 게임이었습니다.

 


미 해군 항공대 소속인 제24항모항공단(CAG)은 정규함공모함 함재되어 해군 예비항공편대 22개를 포함하여 총 100개의 편대가 한국전에서 활약하였습니다. 이들과 지상기지 해병항공대는 미 공군 출격횟수인 392,139회의 70%에 달하는 275,912회 출격하여 북한-중공군을 항공기 공포증에 걸리게 만들었습니다. 피해는 적 대공화기에 의해 599대, 사고 등으로 인해 85대 등 총 68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 피해를 입은 항공기는 전투기 400대, 공격기 140대, 관측기 12대, 헬기 8대, 초계기 2대, 순찰기 1대, 수송기 1대엿습니다.

 


미 해군과 육군과 달리 미 공군의 주적은 소련 공군이었습니다. 소련군은 비밀리에 북한 공군과 방공군으로 참전하여 미 공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6.25를 다룬 서적을 봐도 북한 공군에 대한 이야기는 소련군에 비교하면 거의 나오지 않는 수준입니다.

 

엄청난 미국의 군수지원

미 군수지원부대는 미군뿐만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 전체에 대한 군수지원을 책임졌습니다. 최초에는 1950년 7월 4일 미 8군이 부산기지사령부를 설치한 것으로 시작되어, 7월 13일 제8군 예하인 편제표상 10만 명 이하의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군수부대인 B형 군수부대로서 부산군수사령부로 개편되었습니다. 당시는 일선부대의 요청->부산군수사령부->미8군 후방사령부->후방사령부(본토) 체계였습니다. 미8군 후방사령부의 경우 한국에서 전장이 확대 될 것을 예상하고 50년 8월 25일 제8군 후방사령부를 기간으로 하여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주일군수사령부를 일본에 창설하였습니다.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까지 끌어모은 미국

원래 전쟁이 6월 25일에 일어난 이유가 북한이 8월 15일까지 한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필요기간인 50일을 역산하여 나온 날짜였습니다. 8.15까지 통일은 물 건너갔으니 이때 북한군은 8.15까지 대구를 점령하겠다며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해야 한다며 배에 태웠다가, 낙동강이 무너지게 생겨서 배에 내렸다가 다시 배에 타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8월 14일이었습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참이던 그 8월 14일, 미 육군 주방위군 27개 사단중 8개 사단과 20개 연대전투단중 3개 연대전투단을 포함하여 1,457개의 주방위군 부대가 동원되었습니다. 이들 부대로는 28·31·37·40·43·44·45·47 보병사단과 3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43개 대공포 대대로 총 138,600명이 현역으로 소집되었습니다. 이중 40·45사단은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1951년 중공군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 전선교대 부대가 되었습니다.

 


주방위군과 마찬가지로 동원령에 따라 미 육군 예비군은 6,687개 부대중 934개 부대가 현역으로 소집되었고 이에 따라 장교 46,920명, 사병 150,807명 등 총 197,727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초기 현역으로 전환된 43,000명의 예비역 장교를 포함하여 244,300명의 장병이 소집되어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병력들을 소집하여 투입한 육군과 달리 미 해군은 퇴역한 군함 등 장비에 대한 보충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해 8월 28일에는 수많은 예비군과 함께 예비항공모함 프린스턴함(USS Princeton, CV-37)을 재취역하여 한국전에 투입하였고, 이어 1951년에는 순양함 본 홈 리차드, 에식스, 앤티텀함이 재취역하였으며, 약 22개 해군 예비 전투기편대가 제7함대기동군(Striking Force)에 현역으로 편입되어 한국 상공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미 공군의 경우 공군 주방위군 소속의 F-51전투기 145대를 소집하여 한국전선에 보냈습니다. 또한 437 예비병력수송항공단, 452 예비항공폭격단, 403 예비병력수송한공단을 현역으로 소집하고 51년에는 주방위군의 116·136 전투폭격비행단을 현역으로 동원하여 52년 7월까지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전쟁기간중 공군 주방위군 22개 비행단과 공군예비군 10개 비행단, 그리고 10만 명의 공군예비군이 현역으로 소집되었습니다.

 


미 해병대의 경우 전쟁발발시 현역은 74,279명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도서를 보면 미 해병 1사단이 이름만 존재하지 실병력이 없어 미 전역+예비군을 소집해서 채워넣어 작전에 투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950년 7월 그나마 남아있던 제5해병연대는 제1임시해병여단의 모체가 되어 한국으로 출발하였고, 전 세계에 있는 해병부대들은 1사단의 깃발아래 모이기 위해 해체되었습니다. 또한 해병편성예비군 33,528명을 현역으로 소집하였고 해병지원예비군 90,944명 중 51,942명이 현역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이들 예비역 중 장교 79%, 사병 77.5%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었습니다.

 

항공모함은 함재기 운용을 전문적으로 하는 군함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거대한 무기입니다. 그만큼 많은 나라들이 꿈꾸고 있는 항공모함은을 보유한 국가는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지금 가장 강력한 항공모함으로는 건조비용만 12조 7천억원이 들어간 미국의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이 있지만 이런 강력한 항공모함이 탄생하기 이전까지 수많은 항공모함들이 탄생하였고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오늘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린 항공모함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레인저급 항공모함

 

미 해군 최초로 설계 당시부터 항공모함으로 설계되어 1934년에 취역했으며, 그 이전의 렉싱턴급 항공모함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건조가 중단된 순양전함의 함체를 급히 설계 변경하여 만들어진데 비해 효율적인 설계로 만재배수량 17800톤, 전장 234미터, 비행갑판폭 33.35미터라는 더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더 효율적인 항공기 운용능력을 자랑했습니다.

 

 

여러가지 결함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평양 전쟁에 실전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대서양 함대에서 한척한척 항공모함이 태평양 방면으로 배치될 때도 끝까지 대서양에 남아 대서양 유일의 대형항모이자 미 정규항모로써 공적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대서양에서 공적을 하나둘 쌓던 레인저는 전쟁 말기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하여 훈련 항모로 종사하였고 종전 후에는 각지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들을 본토로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1947년에 퇴역하여 해체되었습니다.


 

    렉싱턴급 항공모함

 

렉싱턴급 항공모함은 미 해군에서 제대로 만들어진 최초의 항공모함입니다. 미 해군은 항공모함을 보유하기위해서 각종 순양함에 임시갑판을 만들어서 실험했고 이 실험이 성공함에 따라서 해군에 항공모함을 도입하기 위한 최초의 항공모함 CV-1 랭글리를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말이 좋아 항공모함이지 랭글리는 석탄 운반선에 비행갑판을 설치한것에 불과했고 항모 운용 경험을 쌓는것 이상을 기대하는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미 해군은 오마하급 경순양함을 개량하여 항공모함을 도입하기로하면서 렉싱턴급 순양전함을 개조하였고 1929년에 정식으로 해군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이 랙싱턴급 항공모함은 다른나라의 개조형 항공모함에 비해서 월등하게 좋은 성능을 보였으며 기본적으로 순양전함 선체다보니 속도가 우수해서 218,000마력으로 35.6노트를 질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1년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그때 렉싱턴 항공모함을  회항시키려고 했으나 전투시 충격등으로 인해 알 수 없는 대폭발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유폭으로 상당한 치명상을 입은 렉싱턴을 결국 포기하기로 결정하였고 아군 구축함의 어뢰로 자침되었습니다.


 

 

    오더시티 항공모함

 

1940년에 독일 상선 하노버를 노획하여 1941년 6월 20일에 준공된 영국의 항공모함입니다. 당시 영국은 한시라도 빨리 독일의 유보트를 막기 위해 급하게 개조해서 함재기 격납고가 없었기에 함재기 탑재수는 고작 8기에 불과했으며, 전장 144.8m에 전폭 17.1m라는 매우 작은 규모의 항공모함이였습니다. 그리고 1941년 9월부터 대서양 해전에 참전했으나, 동년 12월에 유보트에 격침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격침되기 전까지 독일군의 정찰기를 쫒아내고 유보트를 선제발견해서 공습해서 격침하는 등 항공모함의 능력을 입증함으로서, 영국의 대 유보트 전술 확립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류조(龍驤)급 항공모함

 

1929년 11월 26일 진수, 1933년 5월 9일에 취역해서, 1942년 8월 24일에 침몰한 일본의 항공모함입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일본의 해군력은 영국미국의 6할로 제한되어있었지만 일본은 배수량이 1만톤 이하인 항모는 몇대를 만들든 조약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서 1만톤 이하의 소형항모를 전력화할 계획을 세우게됩니다. 그렇게 계획했던 류조급 항공모함이 거의 완성되어 가던 무렵 체결된 런던 해군 군축조약으로 1만톤 이하의 항공모함도 조약에 의해 항모 제한에 들어가게 되었고 일본은 억지로 격납고를 2층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래도 우역곡절 끝에 완성되었고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한 류조는 동부 솔로몬 해전에 참가하게 됩니다. 본대와 분리되어 미끼가 된 류조는 미국의 핸더슨 비행장 폭격을 위해 항공대를 출격시켜 폭격은 성공하였고 이후 미군에게 발견되어 B-17의 공격을 받지만 모두 피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렉싱턴급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에게 공습을 받고 어뢰 한발과 폭탄 네발을 맞고 침몰하게 됩니다.


 

    베아른급 항공모함

 

프랑스의 본격적인 첫 항공모함입니다. 베아른급 항공모함에는 당대의 선진적 설계들이 투입되어 건조되었고 이후 근대적 항공모함 설계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건조 당시인 1920년대에는 초기형 항모세대의 최종주자에 걸맞는 선진적 설계를 가진 항공모함이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의 엄청난 항공기술의 발달은 베아른을 퇴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시기, 항공기들의 기본속력은 400~500km/h로 올라가고 이에 따라 기체가 커지고 중량도 늘어나고 있었지만 베아른은 1930년대에 등장한 신형기들을 운용하기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터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지만 비행기운송으로만 이용되는 수모를 겪게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유일의 항공모함이었던 베아른은 연습용으로만 사용되다가 1967년 3월 21일 이탈리에서 해체되었습니다.


 

 

    소류(蒼龍) 항공모함

 

소류(蒼龍)는 1933년 일본의 마루2 계획으로 건조된 중형 항공모함입니다. 항공모함의 가장 중요한 함교는 우현 전방부에 존재했으며 우현 중간에 하향식 연돌이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15만 마력을 자랑하는 소류의 최대 속력은 34.9Kt 이 속도는 정규항모중 가장 빠른 함선이었습니다. 1938년 중일전쟁때 광동 침공 작전에 첫 출전을 했고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에도 참가했었습니다. 그리고 침몰 당시 탑승 인원은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지만 소류의 정원이 1,103명으로 야나기모토 류사쿠 함장 이하 준 사관 35명 부사관 683명 합계 718명이 전사했습니다.


 

 

    다이호(大鳳) 항공모함

 

일본군항공모함으로 1941년 7월 10일 카와사키 조선에서 기공, 1943년 4월 7일 진수, 1944년 3월 7일 준공되었습니다. 다이호의 가장 강력한 장점이 바로 방어력이었는데 추축국 최초의 장갑항공모함으로써 비행갑판에 25mm의 특수강판(DS강판)에 75mm의 CNC갑판을 붙여 500kg 폭탄의 급강하폭격에 대한 내구성을 높혔으며 주요부분에 16mm 고장력강과 32mm CNC 강판에 의한 수평방어와 160mm~55mm 두께의 CNC 강판을 붙인 수직 방어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필리핀 해 해전으로 첫 출전을 나섰지만 미국의 어뢰 1발에 허무하게 침몰하면서 전체 승조원 2,150명 중 1,650명이 전사하였고 필리핀 해 해전은 일본 해군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이 다이호 항공모함의 허무한 침몰로 인해 일본 항모 기술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며 왜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 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절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많은 전함이 파괴되었고  태평양 전쟁 초창기 살아남은 항모들이 미국 태평양 함대 작전의 주 타격력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결과 전함과 전함 사이의 함포결전이 아닌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사이의 항공전 위주로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항공모함들이 손실되었습니다. 요크타운급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중요한 건 요크타운급은 하나같이 죽기 전까지도 일본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길동무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초기, 미국이 일본에게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던 것은 바로 이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의 엄청난 활약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독도에 대한 일본의 도발이 계속되는 가운데,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일본과 중국의 영토분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두 나라가 각각 센카쿠 상륙에 나서면서 갈등에 불이 붙었습니다. 미국의 국방·행정 분야의 대표적인 싱크탱크 랜드연구소가 중국과 일본이 센카쿠 열도를 놓고 전면전을 벌이면 중국이 단 5일 만에 압승한다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은 센카쿠 열도를 넘어 오키나와 동부인 사키시마 제도(미야코야에야마 제도)에서도 충돌이 빚어질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센카쿠 열도에서 중·일간의 우발적 충돌이 전면적 군사행동으로 치달을 경우를 가정해 분석한 결과 4~5일 만에 일본 해상 자위대가 큰 피해를 입으며 전쟁에 패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미국은 중국 공격으로피해를 우려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랜드연구소가 예상한 센카쿠 열도를 놓고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 시나리오를 소개합니다.

 


전면전 첫날
댜오위다오 해역에 일본 극우단체 회원을 태운 배가 나타나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며 모든 장면을 영상에 담아 유튜브에 게시하며 중국을 향해 도발합니다. 이에 중국은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무장한 연안경비대와 해군병력을 급파해 현장에서 극우단체 회원을 체포하고 중국으로 연행합니다.  

 

전면전 둘째날

일본이 해상자위대 소속 함선과 F-15전투기 편대를 보내지만 중국군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일본은 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합니다. 미국은 구축함을 파견하지만 중국과의 전면적 대결을 피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공세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게 됩니다.

 

전면전 셋째날
댜오위다오 해역에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형 중국 연안경비함이 조어도 주변을 돌며 항의 시위를 벌이던 일본 어선을 들이받아 침몰시킵니다. 이에 일본 해상자위대가 반격하자 중국은 즉시 항공기와 대함 미사일로 치명적인 대응을 가합니다. 순식간에 두 척의 일본 함정이 침몰하고 해군 500명이 사망합니다. 고민하던 백악관은 잠수함에 명령을 내려 중국의 미사일 구축함 두 척을 격침시켜 수백명의 중국 해군 병사가 사망합니다.

 

전면전 넷째날
미국의 대응에 중국 지도부는 크게 놀라고 수뇌부는 절충 대응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일본 자위대에 대한 공격은 계속 퍼붓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사이버공격을 개시합니다. 미국 대도시 LA와 샌프란시스코가 단숨에 어둠에 휩싸이게 됩니다. 또한 미국 나스닥의 시장 거래 시스템을 공격해 수백억 달러 가치의 주식을 휴지조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보유 중인 미국 국채를 투매해 미국 달러 가치 폭락을 유도합니다. 

 

전면전 다섯째날
해상자위대 전력의 1/5 이상이 타격을 입고 전사자가 수백명을 넘어서게 됩니다. 중국은 일본 본토에도 공격을 감행 전력망과 정유시설을 파괴합니다.
해상자위대의 참패 후 본토가 공격받자 일본은 또다시 미국에 다급한 지원 요청을 보냅니다. 그러나 미국은 지원을 거부합니다. 미국은 확전을 막는게 최대 목표로 전투 해역에서 일본 전력의 본토 철수를 지원합니다.

 

중국vs일본 전면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군사전문가들은 중국의 우세와 일본의 우세로 갈리는데, 해군의 경우는 일본의 우세라는 데 대부분이 동의하지만 공군은 중국 측의 우세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F-15J의 지속적인 개량과 F-35의 도입으로 인해 항공력에서도 질적 우위를 보이고 있어 일본이 우세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미국은 센카쿠 열도 분쟁에서 일본을 계속 지지해왔으며, 미일 방위조약에 의거하여 일본이 공격을 받을 경우 혹은 미국 우방국간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경우 한정으로 개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의 최우선적인 핵심 동맹국입니다. 비록 미국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중요협력도는 차이가 있어도 현재 아시아 정책에서 미국이 일본을 포기한다는 것은 미국이 동아시아 전체에서 철수하여 태평양 반분을 승낙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실상 중국이 동아시아 역내 패권국으로 성장해 미국에 도전하는 것을 방치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미국은 냉전 당시 중부 유럽에서 소련을 군사적으로 봉쇄하고 저지했던 것과 동일하게 행동할 것으로 예상되며 미국이 일본 편에서 개입할 가능성이 많이 높아보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나 우리나라의 배타적 경제수역과 방공식별구역의 방어와 통제를 위해서 군사력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전면 개입하여 서태평양 연안 전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우리나라는 아마 중국이 먼저 전면 공격하거나 일본 본토를 직접 타격하는 등 선을 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서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미국이 전면전에 들어가면 참전할 의무는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 우리나라의 군사력이 중국으로 향하거나 한반도 밖으로 이탈하여 일본을 지원하는데 투입되지 않도록 북한이 도발을 하도록 지원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결론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이 패할 경우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2015년 5월 1일 의무후송항공대는 육군 항공작전사령부와 국군의무사령부가 장병 공모를 통해 선정한 '메디온(MEDEON) 부대'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군은 2018년에 메디온 부대를 창설할 예정이었으나 2014년 6월 동부전선 22사단에서 총기 난사사건이 발생한 뒤 응급처치와 후송이 늦어져 5명이 사망하면서 창설 계획을 3년 앞당기게 된 것입니다.
메디온의 의미는 '의무(MEDICAL)'와 '후송(EVACUATION)', 그리고 헬기의 이름인 '수리온(SURION)'의 합성어로 특히 마지막 온(ON)은 ‘쉬지 않고 계속’이라는 영문적 의미와 ‘온전하다’, ‘완벽하다’라는 한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메디온 부대는 경기도 포천시와 용인시, 강원도 춘천시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만약 장병들이 훈련이나 작전을 수행하는 도중 부상이나 응급 후송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되면 국군의무사령부 응급환자 지원센터로 신고하게 되며 응급환자 발생에 대비해 24시간 출동대기를 하고 있던 메디온 부대가 신속하게 출동하게 됩니다. 

 

 

메디온부대 창설 이전에 긴급 의무후송 임무수행이 68%에 그쳤던데 반해, 지금은 97%까지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메디온부대의 역할이 빛을 발한 것은 2015년 8월 북한의 지뢰도발 때였습니다. 북한의 지뢰도발로 응급환자가 발생하자 포천기지에서 이륙한 헬기가 18분 만에 현장에 도착(상황접수 후 29분 만에 도착)하여, 환자를 후송했습니다. 그 덕분에 김정원 하사와 하재헌 하사는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 전방 GOP 사고 때는 지형이 험준해 차량 이동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헬기로 이동한다 해도 응급처치할 수 있는 의무 장비가 없는 수송용 헬기였기 때문에 생명을 잃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메디온 부대로 인해 신속한 응급처치와 후송을 통해 골든타임을 확보해 우리 장병들의 생명을 구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메디온 부대는 최신 기종인 수리온(KUH-1) 6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승무원을 제외하고 응급 군의관과 의무부사관이 함께 한 팀을 이루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헬기에는 심실제세동기.정맥주입기.인공호흡기 등 항공후송용 응급처치세트(EMS-Kit)를 갖추고 있으며 자동비행조종장치(AFCS), 디지털 전자지도, 전방관측적외선장비(FUIR), 위성.광성항법장치(GPS/INS)등 최첨단 장비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의무후송헬기에 장착된 장비들은 지상병원의 응급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 육군은 메디온 부대가 창설되기 이전에는 춘천과 포천 2곳의 블랙호크(UH-60) 헬기로 의무후송을 해왔습니다. 당연히 블랙호크 헬기는 의무후송 전담 헬기가 아닌데다 야간·악천후 비행에도 어려움이 따랐었습니다. 또한 블랙호크 헬기의 비행 가능 기상조건이 보통 2마일(3.2km)인데 수리온 헬기는 1.5마일이며, 운고도 1천500피트에서 1천피트로 낮아지면서 야간이나 악천후에도 임무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디온 부대는 헬기 1대 당 조종사/부조종사/승무원/군의관/응급구조사 등으로 구성된 5명이 1팀으로 이루어졌으며 군의관도 기존 6명에서 9명으로 늘어났으며 조종사는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소속 우수 요원들이 배치되면서 NFL(비행금지선)이북 지역 비행 자격도 주어져있습니다.

 

현재 메디온부대는 의무후송헬기 현재는 수리온헬기에 응급처치 키트(EMS KIT)를 장착해 사용하고 있으나, 앞으로 전용기는 수리온헬기를 개조한 의무후송전용헬기를 도입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29일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의무후송전용헬기의 개발을 완료하면서 2018년부터는 의무후송전용 헬기가 전력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한민국 해군(Republic of Korea Navy)은 해상작전 및 상륙작전을 수행하고, 대한민국 국군의 주요 조직으로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수행하는 해병대를 예하에 두고 있습니다. 이 상륙작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상륙함이 필요한데 상륙함은 바다에서 육지로의 전력투사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군함을 말하며, 상륙함에는 상륙작전을 위한 별도의 장비와 병력을 실을 수 있는 공간 및 탑재장비를 운용할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륙함으로 분류될 수 있는 군함의 범위가 넓어서 수십톤급의 소형 상륙정에서부터 4만톤이 넘는 강습상륙함까지 크기와 종류가 천차만별입니다. 또한 꼭 전시가 아니라도, 섬에 주둔한 군부대에 대한 군수지원 임무, 재해현장에서의 구호활동 등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계 2위 규모의 해병대를 자랑하는 우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륙함은 어떤게 있을까요


 

 

     고준봉급 상륙함 LST

 

1990년대 이전까지 대한민국 해병대의 주요 양륙수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건조한 LST(전차양륙함)를 받아와서 '운봉급'이라고 명명한 상륙함입니다. 상륙용 함정이 전투함처럼 거친 해양환경에 노출되어 함체가 외부충격으로 손상될 일도 없으므로 그만큼 오랜 기간동안 운용이 가능하긴 하지만, 수십년간 운용해 왔기에 슬슬 한계점에 다다라서 운봉급의 퇴역을 대비하여 후속 LST 건조사업에 착수하면서 고준봉급이 탄생하였습니다.


고준봉급 상륙함은 운봉급과 달리
K1 전차가 출입할 수 있도록 출입구를 좀더 확대해서 해병대도 K1 전차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헬기 이착륙용 갑판도 설치하면서 상부 구조물 중심이 운봉급보다 약간 앞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주요 상륙훈련 참가는 물론이고, 상륙함이라서 수송량도 많은데다 부두 시설이 필요 없이 직접 접안하여 물자를 하역할 수 있기에 남아시아 지진해일로 인한 재해현장 구호물자 수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준봉급 상륙함의 제원은 만재배수량 4200톤, 길이 107m, 너비 15m, 흘수 3m, 승무원 120명이며 수송능력은 차량 700톤, 상륙정 200톤입니다. 함 명칭은 봉우리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는데 고지 탈환의 의지를 담았다고 합니다.(LST-681 고준봉, LST-682 비로봉, LST-683 향로봉, LST-685 성인봉) 4척 모두 경상남도 창원진해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해군 제5성분전단 53상륙전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천왕봉급 상륙함 LPD

 

천왕봉급 상륙함은 해병대의 오래된 상륙함인 운봉급과 고준봉급을 대체하기 위해 건조한 4500톤급 LPD(토크형 플랫폼)상륙함입니다. 또한 항해레이더, 탐색레이더, 전투체제, 76mm 함포, RAM, 미사일 기만 체제 등이 탑재되었으며 상륙병력은 병력 700명에 다양한 전투차량 탑재와 이를 상륙시키기위한 LCM급 상륙정 3대가 탑재됩니다. 상륙정은 100명의 병력과 전차1대를 수송 가능하고 속력은 20노트 정도입니다. 상륙정은 2척은 주 갑판에 1척은 후방 웰독에 수용하며 헬기는 2대 운영합니다.

 

 

천왕봉급은 기존 고준봉급의 2배에 이르는 수송능력을 가지고 있고 대공미사일을 장착하는 등 고준봉급 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성능을 통해 상륙함의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는 해병대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2013년 9월 11일에 천왕봉급 상륙함의 1번함의 진수가 거행되었으며 함명은 '천왕봉'함(LST-686)으로 정해졌습니다. 천왕봉함은 인수 평가 기간을 거친 뒤 2014년에 해군에게 인도 이후 전력화 과정을 거쳐 2015년에 실전 배치 되었고 2015년 10월 부산 관함식에 참가하였습니다. 2번함 '천자봉함'(LST-687)은 2015년 12월 15일, 3번함 '일출봉함'(LST-686)은 2016년 10월 25일 진수하였으며 올해 11월에 취역할 예정입니다.


 

     독도급 강습상륙함 LPH

 

사실 우리 해병대는 미국에 이은 세계 제2위 규모의 해병대 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그동안 상륙함 전력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였습니다. 이런 해병대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건조된 독도급 강습상륙함은 2017년 현재 대한민국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강습상륙함이자 제7기동전단과 대한민국 해군 전 함대를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기함입니다.

 

 

독도함은 여러 모로 새로운 플랫폼에 대한 기술 획득 및 체계 확인에 대한 실험적인 군함이자, 90년대 해군의 꿈이 투영된 군함. 원래 계획은 3번함까지 전력화하는 것 이였지만 1번함을 운용해 본 결과, 설계 전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드러난 부족한 제원과 새로운 플랫폼에 대한 운용 노하우가 생각보다 장기간 필요한 점 때문에 데이터 습득과 실험적인 성향을 반영하여 1번함만 제작되었습니다.

 

 

독도함은 거대한 함체 내부에 작전지휘 시스템은 말할 것도 없고 종합병원 수준의 의료설비와 PX, 체력단련실 등 편의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으며, 후방도크가 있는 설계로 헬리콥터 모함과는 다르게 항공대 운영보다 호버크래프트의 운용을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독도함의 수송 능력은 헬리콥터 7대, 전차 6대(공기부양정 탑재까지), 상륙돌격장갑차 7대, 트럭 10대, 야포 3문, LSF-2 고속상륙정 2척, 승조원 300명, 상륙군 700여 명을 동시에 수송 할 수 있습니다.

 

 

약 6400㎡(길이 200m, 폭 32m)규모의 비행갑판은 6~8대의 UH-60 기동헬기가 동시에 뜨고 내릴 수 있으며 독도함에 착함한 헬기는 다른 헬기들이 뜨고 내릴 수 있도록 바로 블레이드(날개)를 접은 뒤 함 좌우에 설치돼 있는 20톤 규모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비행갑판 밑에 있는 격납고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2014년 8월 12일 2번함의 건조가 공식 승인되었고 2020년까지 전력화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2번함인 마라도함은 기존에 독도함에서 축적된 운용데이터를 토대로 건조될 것으로 보이며 2번함인 마라도함의 건조가 완성된다면 우리 해병대의 상륙능력은 엄청나게 향상될 것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서해와 동해 양쪽 해안에서 동시에 작전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