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겨울철 차량 관리법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여름철 차량 관리입니다. 이런 여름철 무더위엔 사람도 힘들지만, 자동차도 무척 힘들어 합니다. 특히 낮에는 자동차 내부 온도가 70도 이상까지 올라갑니다. 뜨거운 무더위를 견디며 더 뜨거운 아스팔트를 달려야 하는 자동차를 위해 필요한 여름철 무더위 자동차 관리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베터리 점검

외부 열기로 인해 뜨거워진 베터리는 폭발할 수 있습니다. ‘인터스테이트 베터리 (Interstate Batteries)’에 따르면 “3년 이상된 베터리를 사용하는 자동차 중 30%가 베터리를 자체 충전하지 못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고 말했습니다.

 

둘째 타이어 공기압

적절하게 공기가 들어간 타이어는 타이어펑크를 예방하고 타이어 수명을 연장시켜줍니다. 권장 공기압보다 적게 공기가 들어간 타이어는 지면과 마찰시 더 많은 열을 발생시키고 특히 더운 날씨에는 타이어를 더 닳게 만듭니다. 따라서 여름철, 타이어 공기압은 적정치보다 조금 높게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셋째 에어컨 점검

 

차량의 에어컨이 예전과 다르게 시원하지 않다면, 에어컨 시스템 내에 냉매가 누수되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또한 금이간 유리나 벤트는 더운 공기를 차량 내부로 들어오게함으로 즉시 교체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넷째 엔진 냉각수

국민안전처에서 발표한 자동차 사고 통계에 따르면 엔진과열에 따른 자동차 화재가 18.5%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된 화재원인이 엔진 과열인 만큼 무더운 여름철에는 엔진을 식혀주는 역할을 하는 냉각수의 상태를 꼭 체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냉각수가 적당량 채워져 있는지, 시원함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를 미리 체크해야겠습니다. 급히 냉각수를 보충해야 하는데 준비된 냉각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가능한 순도가 높은 증류수, 수돗물, 혹은 알갱이가 없는 음료수로 대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생수나 지하수 등은 산이나 염분이 포함된 액체는 엔진이나 관련 배관을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섯째 브레이크 점검

여름에는 아스팔트가 달궈져 도로의 표면온도가 60도 이상까지 상승하게 됩니다. 이렇게 뜨거운 노면을 달리게 되면 자동차의 브레이크 마찰열이 높아져 베이퍼 록(Vapor Lock)현상이 발생할 위험이 있습니다. 베이퍼 록(Vapor Lock)이란 브레이크액이 마찰열에 의해 끓어오르면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도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위험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브레이크액은 시간이 흐를수록 수분의 함유량이 증가되기 때문에 고온 다습한 여름에는 안전을 위해 자주 점검을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섯 태양 피하기

뜨거운 태양 때문에 실내에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차량 내부가 뜨겁다면, 차의 모든 문을 열어놓고 더운공기를 내보내야 합니다. 또한 비닐이나 가죽시트는 여름날 더욱 뜨거워지기 때문에 그늘에 차를 주차하지 못한다면 운전석이나 운전대 만큼은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가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병이나 캔 외에도 라이터, 카메라, 노트북, 휴대전화 등을 차에 보관하면 뜨거운 열로 인해 부풀어 올라 폭발하여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매년 여름철, 닫힌 차 안에서 발생하는 질식사고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체구가 작은 어린아이들은 신체 균형을 잃는 속도가 성인에 비해 3-5배 빠르며, 밖에서도 식별이 쉽지 않습니다. 잠깐이라도 어린이와 반려동물을 차안에 혼자두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9조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남자들이 군입대를 하게되면 늘 밥 챙겨 먹여 주시던 어머님의 감사함을 느끼고 하기 싫은 빨래 할 때마다 어머님 생각이 납니다. 그래고 군대에 와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손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이렇듯 군대는 자신을 더 성숙하게 만들어주고 처음느끼는 경험들을 많이 겪게됩니다. 남자들이 군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TOP 7을 소개합니다.


 

1.  보충대 박스편지

 

보충대에서 입영할 때 자신이 입었던 옷들과 소지품들을 장정소포를 통해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보내게 됩니다. 보충대에 있으면 집에 연락을 하고 싶어도 전화를 사용할 수 없기때문에 장정소포에 부모님께 첫 편지를 남기게 됩니다.


 

2.  훈련병 시절 끝날때 

 

훈련병들이 마지막 훈련은 바로 행군입니다. 아직 이등병 계급장도 달지 않은 훈련병들에게는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훈련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행군까지 끝내고 나면 곧 집에 갈 수 있을거 같고 군 생활이 끝난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대배 치가 되어 그동안 정들었던 동기들과 헤어질 때는 눈물을 흘리는 훈련병들도 보입니다.


 

 

3.  자대에서 첫 후임이 생겼을 때

 

자대 배치를 받고 한달만에 후임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10개월동안 후임없이 막내로 군생활을 하셨던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무래도 기다렸던 후임이 생기게 되면 마치 막내 동생 챙기듯 챙기게 됩니다. 그리고 후임이 생겼다는 이유로 한 일주일 정도 기분이 계속 좋아지게 됩니다.


 

 

4.  처음으로 느껴보는 CS가스

 

대한민국 국군에서 화생방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실시하는 화생방 훈련으로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가리지 않고 모두 실시합니다. 훈련소에서 각개전투를 끝내고 가스 실습을 앞둔 훈련병들에게 '가스 실습 할래?, 각개전투 20번 더 할래?'하고 물으면 다들 가스 실습을 택하지만, 가스 실습이 끝난 후 '가스 실습 한 번 더 할래?, 각개전투 200번 더 할래?'하고 물으면 각개전투 200번을 택하게 됩니다.


 

 

5.  죽을만큼 힘든데 반복구호

 

유격체조 일명 PT(Physical training)는 미 육군에 의해 최초로 개발한 근육 강화 운동 프로그램입니다. 총 14개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8번 몸통 받쳐 온몸 비틀기는 전국민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악명 높은 동작 중 하나입니다. 그런 유격체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누구나 공감하는 추억 하나!! 바로 마지막 구호 생략입니다. 순식간에 전우애를 원수애(?)로 만드는 순간입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제일 앞줄에 있는 사람들이 횟수를 잘 들어두었다가 마지막 구호 횟수 직전에서 목소리를 크게 외쳐야 합니다


 

 

6.  모기와 함께하는 야간근무

 

모기의 공습은 보통 야간근무 때 이루어집니다. 전방의 모기는 군복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두터운 군화까지 뚫고 들어옵니다. 그렇기에 전방 GOP 군인들은 야간근무에 투입되기전 모기약 스프레이를 온몸 구석구석 칙칙 뿌려야합니다. 모기에 물리면 경계근무에 여러가지로 지장을 주기 때문에 모기에 물리지 않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7.  기다리고 기다린 전역날

 

자대배치와 함께 자신의 관물대에 부모님이나 여자친구 사진을 붙여놓고 자신의 좌우명을 써놓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인들이 좌우명에 전역날이 들어간 목표를 써놓습니다. 그리고 꿈만 같은 전역날이 다가오게 됩니다. 만약 같은 부대에서 2년 가까이 같이 구르다가 같은 날 전역하는 동기가 있을 경우 헤어지기 전 같이 낮술을 마시며 전역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북한과 북한과 함께하는 중국 러시아의 위협 탓에 유달리 무기 성능과 수량에 민감하면서도 예산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좋은 물건을 많이 사면서도 그 무기의 성능에 맞는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값도 싸야 한다는 매우 어려운 조건으로 장비를 구매합니다. 또한 까다롭게 무기를 구매하는 대한민국의 무기 대량 구매는 판매되는 무기의 선전 효과에도 좋기 때문에 다른 중소국가에 2차, 3차로 판매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대표적으로 싱가포르 공군이 라팔을 떨어뜨리고 F-15SG를 선정한 건 한국군이 F-15K를 도입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214급 잠수함의 경우도 그리스가 불만을 제기할때는 다른 국가들도 도입을 망설이다가 한국군이 도입해서 쓰는 걸 보고 터키와 포르투갈도 계약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가 예산에 비해 해외 무기를 수입을 아주 잘 구매하기 때문에 다른나라 무기도입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전설로 통하는 한국군의 놀라운 무기 구매 방법을 소개합니다.

 

대한민국 첫 전투함

한국전쟁 이전, 손원일 제독이 함선을 구매하려 했을 때 척당 2만 달러를 불렀던 순찰정 화이트헤드를 미 해양대학교로부터 18,000달러에 구매하였습니다. 450톤으로 1950년대 당시 남북한 해군함정들 중 가장 컸습니다. 이 화이트헤드가 바로 대한민국 첫 전투함 백두산함입니다. 또 미 서해안의 산 피에트로 항으로 이동해 배를 각각 금강산함, 삼각산함, 지리산함이란 이름으로 3대나 사오고, 예인비도 판매측이 부담하였습니다.


 

 

당시 최강의 전투기 F-4 팬텀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서서히 철수하기 시작하자 남베트남은 미국한테 무기를 요구하였고 미국은 적당히 사용할만한 전투기로 F-5를 제공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F-5를 제공하기로 하고 한국 공군에 빌려줬던 F-5A 프리덤 파이터 36대를 도로 가지고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옥만호 공군참모총장은 "F-5A 못 준다. 정 가져가려면 팬텀 주고 가져가라"고 말하였고 미국은 절충안으로 F-5와 F-4를 2:1로 교환하는것을 제안하고 18대의 팬텀을 우리군에 3년간 임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종전 후 미국이 도로 찾아가려 하자 주영복 공군참모총장이 방위성금을 걷어 완전히 구입했다고 합니다.


 

OH-6 헬기 대량구매

베트남전에서 헬기가 활약하는 것을 보고 탐이 났던 한국군은 휴즈사의 OH-6과 벨사의 OH-58에 경쟁입찰하게 됩니다. 이 때 미군의 경헬기 납품 경쟁에서 OH-58에 패해 돈이 급하던 휴즈사는 파격적으로 싼 값을 불렀습니다. 원래 한국군은 AH-1같은 본격적인 공격헬기를 원했지만, 어렵던 시절 이런 고가의 헬기를 다수 들여오기는 무리였고 OH-6은 AH-1의 반값도 안돼서 이것을 257대 구매하게 됩니다. 1970년대 당시 세계적으로 공격헬기를 보유한 나라는 거의 없었고, 200대 이상의 헬기를 원했던 한국의 경제사정상 이보다 더 좋은 헬기를 갖기는 힘들었습니다.


 

엄청난 밀땅으로 탄생한 K1전차

미국M60 패튼 전차를 팔기를 거부하자 한국군은 독일 크라우스 마파이(Krauss-Maffei) 사와 접촉해서 레오파르트1 도입 계약 체결 직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은 ROKIT 사업을 제안했고, 그 결과물이 K1 전차입니다. 당시 한국군이 독일, 미국을 두고 밀땅하지 않았다면 한국군의 주력 전차는 21세기에도 M60이나 레오파르트 1이 될 뻔했습니다.


 

 

록히드의 특별 서비스를 받은 KF-16

KFP사업 당시 한국 공군은 선회전 성능이 좋은 미 해군의 F/A-18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싼 탓에 대량 도입이 불가능하자, 다른 후보기종인 F-16을 도입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 공군은 계속 F/A-18을 사고 싶어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면서 여러가지 옵션을 챙겨오게 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미군보다 빨리 인수받은 AIM-120B형 그리고 어떤 동맹국에게도 수출한 바 없는 AGM-88, 그리고 F-16이 여러 면에서 마개조가 된 점입니다. 그러니까 KF-16의 성능은 전부 한국에 판매하기 위해 록히드가 부담한 특별 서비스였습니다. 그리고 AIM-120B의 도입가격은 초기 생산형이라 비쌀 수밖에 없는데도, 현재 시세와 크게 차이가 안날 정도였습니다.


 

 

F-15계열 중 최고 사양 F-15K

미 공군이 F-15 200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이를 판매한다는 움직임이 보이자 한국 공군은 FX 사업에 유로파이터, 수호이 그리고 궁극의 라팔을 후보로 올리면서 경쟁을 펼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과 보잉사는 한국 공군이 바로 구매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국 공군이 다른모습을 보이자 황급히 F-15의 판매가를 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마음이 다급했던 보잉사는 처음 제안한 F-15E를 더욱 강력하게 업그레이드한 F-15K로 바꿔서 제안하면서도 오히려 값은 F-15E보다 더 싸게 불렀습니다. 당시 FX사업에 참여했던 실무자의 말에 따르면 도입 관련하여 미군 + 보잉사 vs. 한국 공군간의 엄청난 설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국군은 기존에 제시했던 값에 비해 훨씬 싼 값에 F-15K를 도입하게 되었고 당시 F-15K의 성능은 현존하던 F-15 계열 중 최고 사양을 자랑했습니다.

 

미 해군의 스프루언스급 구축함 초도함인 스프루언스(DD-963 Spruance)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드웨이 해전에서 프랭크 J. 플레처 제독과 함께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일본 함대를 박살낸 공로자인 레이먼드 D. 스프루언스 제독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은 모두 31척이 건조되어 1980~90년대 미 해군의 주력 대잠 구축함으로 활약했습니다.

 

 

이 함은 이전의 함정들과 달리 미국 해군 최초로 가스터빈엔진을 채용한 함정입니다. 또한 양산 효과를 높이기 위해 블록형 건조를 채용하였습니다. 대형 함정임에도 불구하고 ECM(전자방해기술)을 최소화하고 정숙성을 극대화하였고 기존의 주력대잠무기인 Mk.46 어뢰뿐만이 아니라 대잠 로켓인 ASROC 채용하는등 대잠능력에 특화된 함정입니다. 또한, 토마호크 미사일 탑제하여 중장거리 대지 타격능력을 부여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활약을 하며 미 해군의 주력 대잠 구축함이었지만 2005년을 마지막으로 DD-985 USS Cushing함이 퇴역하면서 이제 스프루언스급은 미 해군 함대에서 현역으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퇴역 후 헐값으로 중국 해군에 매각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실제 매각된 것은 스프루언스급의 배리에이션 함인 키드급 방공구축함이었습니다.

 

 

남미의 우방국 칠레에 매각하자는 의견은 상당히 심도깊에 논의되어 의회에서 수출동의를 얻는 절차를 밟을 뻔 했으나, 페루 등 다른 중남미 국가와의 균형 문제 등으로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은 미국 우방국과 진행된 훈련에서 목표물 또는 미국이 개발한 신무기의 화력 테스트 용도로 끌려나와 대부분 수장당했습니다.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을 굳이 수장시킬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원래 미국은 심지어 대형 항공모함 아메리카마저 차기 항모 건조시 항모에 대한 위협과 그 피해수준을 반영하겠다는 이유로 대함미사일, 함포, 자유낙하폭탄, 레이저 유도폭탄, 기관포, 어뢰, 기뢰 등등 온갖 방법으로 테스트하다 바다로 시키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31척이나 되는 많은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이 모두 수장된 것은 아니고 4척은 영화 촬영용 소품으로 제공되었으며 DD-964 폴 포스터 함 1척은 아직 2017년 현재 신형 장비 시험함으로 사용되며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영화 촬영용 소품으로 제공된 4척의 스프루언스급은 처참하게 폭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칠레가 미국에 스프루언스급 팔아달라고 요청했을 때가 바로 이 시기였는데 미국은 타국에서 주력함으로 쓸 수 있는 핵심 전투함을 영화 소품으로 날려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미 해군이 비싼 구축함을 너무 어이없이 처분한 것 같아보이지만 스프루언스급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적 물적 비용소모가 있고 해체하는 것도 결국은 돈드는 작업인데 뒤처리를 영화제작자들이 떠 맡는 것이니 거저 넘겨줘도 미 해군 입장에선 딱히 손해 볼 일은 아니였습니다. 이렇듯 과거부터 현재까지 미국은 다른나라에게는 주력이 될 수 있는 군사무기들을 더 강력한 새로운 무기들이 등장하면 가차없이 처분하고 있습니다.

 

큰 편대를 이룬 대형폭격기들이 융단을 까는 것처럼 지상에 수많은 포탄을 투하하면서 그 지역을 완벽히 초토화 시키는 작전을 융단폭격(Carpet bombing)이라고 부릅니다. 현재는 미군이 주로 사용지만 사실 시초는 영국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다른 군대와 마찬가지로 영국군도 폭격기 편대가 낮에 이륙해서 표적을 조준하여 폭탄을 투하하였지만 폭격기들은 폭격기들대로 적 요격기에게 격추당하였고 당시의 열악한 조준기 탓에 폭탄은 폭탄대로 죄다 빗나갔습니다.

 

 

그래서 아예 적 요격기의 위협이 덜한 밤에 폭격을 하는 한편, 한 번에 엄청난 수의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서 표적뿐만 아니라 그 일대, 혹은 도시 하나를 통째로 쑥밭으로 만드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의외로 이 당시 미군은 융단폭격을 해도 표적지역 일대를 뒤덮는 것보다는 최대한 표적을 정조준하여 핀포인트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영국군의 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보다 미 공군의 B-24나 B-17폭격기가 더 크지만 폭탄 탑재량은 절반 가량밖에 안 되었습니다. 표적을 핀포인트 공격할 것이므로 폭탄을 대량 투하할 필요는 없고, 대신 표적을 확인하려면 표적이 보이는 낮에 폭격해야 하므로 달려드는 적 요격기에 맞서기 위해 폭탄 탑재량을 늘리는 대신 방어기총을 늘리는 쪽을 택하였습니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부터 많이 사용되었으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융단폭격이 많이 이루어졌었습니다. 다만 이 융단폭격이란 전술 자체가 목표를 정확히 타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어쨌든 그 목표지역 부근 전체를 폭격하는 것이므로 그 임팩트에 비해 사실 효율은 매우 낮습니다.

 

 

예를 들어 공장 하나 부수는데 실제로는 폭탄 두 어발만 명중해도 충분하지만 명중률이 그렇게 높지않았기 때문에 수십대의 폭격기가 떼지어 날아가야했고 당연히 수 십대의 폭격기가 출격하려면 생산비, 유지비가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게다가 폭격기만 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폭격기들이 적진에 침투하기 위해서 적 전투기나 대공망도 무력화 해야 하므로 융단폭격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필요한 자원과 인력은 엄청났습니다.

 

 

또한 피아구분이 당연히 안 되게 때문에 위험요인의 존재 여부를 알아보지 않고 무작정 융단폭격을 퍼붓는 것은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으며 이렇게 표적 일대를 폭탄으로 도배하는 융단폭격은 민간인과 건물, 문화재 등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재앙입니다. 물론 총력전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의 융단폭격 작전은 연합군이 파리로 진격하는 요충지였던 프랑스의 캉 폭격, 독일 남부의 주요 거점 도시였던 드레스덴 폭격과 도쿄 대공습이 가장 유명합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집중 폭격 대상이 수도 서울과 평양이었는데 정말 남아나는 것이 없었습니다.평양에서 북한군들은 미군의 융단폭격이 두려워 지하 생활까지 했다고 하며, 특히 전략 요충지였던 원산은 하도 폭격을 맞아 원산폭격이라는 말이 생길정도 였습니다. 

 

 

현대에는 스마트 폭탄 같은 정밀타격무기가 발달하였으며, 이로 인해 보다 적은 노력으로 한 발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 가능해졌으므로 목표물의 위치만 정확히 알면 융단폭격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밀타격무기의 값이 아직까지는 엄청나게 비싼데다가 산개한 적군 보병같이 정밀폭격시 손해가 나는 표적이 증가하였고, 목표물의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필요성만 생긴다면 폭격기를 아직도 운용하고 있는 미국이나 러시아라면 도심지역에 대해서도 다시 융단폭격을 실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국 B-52 폭격기가 융단폭격 훈련을 하는 모습

사실 민간인 지역만 아니라면 여전히 미군은 융단폭격을 종종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질적인 피해를 주기 위한 것 보다는 심리전의 일환으로, 설사 적 병력이 폭격에 피해를 입지 않아도 이 융단폭격을 당하거나 목격하게 되면 사기가 뚝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IS를 폭탄으로 쓸어 버리겠다. 융단폭격을 하고 모래가 어둠 속에서 빛날 수 있는지 지켜볼 것이라며 IS에 경고를 하기도 하였으며 미국은 이라크 등지에서는 사전 경고한 다음에 적이 숨어있는 곳 근처의 빈땅에 일부러 융단폭격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는 2015년 시리아의 IS기지와 정유시설을 초토화하기 위해 융단폭격을하고 그 동영상을 공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융단폭격에 무서움을 알고있는 북한은 미국의 폭격기 B-1B 랜서가 한반도에서 상공 훈련을 실시하기만 하여도 엄청난 비난을 하고있습니다. 실제로 B-1B 랜서는 융단폭격을 할 수 있는 가공할 파괴력을 갖추고 있으며 통합정밀직격폭탄인 제이담(JDAM) 뿐 아니라 비유도 일반폭탄 등 최대 60톤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미국 폭격기 3형제의 맏형 B-52의 2배 수준입니다. 그리고 유사시 B-1B폭격기는 유사시 최고 속도로 괌 기지 이륙 후 2시간이면 평양에 도착하여 융단폭격을 할 것입니다.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석 달 전인 1953년 4월 27일,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이 일본과 한국 등 14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꽤나 노골적인 심리전을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종살이에서 해방돼 새로운 삶을 원하는 모든 용감한 파일럿들에게”로 시작된 그 선무방송은 전장의 단골 레퍼토리인 귀순 권유인 듯 보였지만, 내용은 훨씬 파격적이었습니다.

 

 

일단 그 대상이 당시 소련의 최신예 전투기 미그(MIG) 15기 조종사들이였습니다. 결함 없는 미그기를 몰고 귀순할 경우 조종사에게는 5만 달러를 주고, 첫 귀순자에게 한해 5만 달러를 보너스로 지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사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이지만 거액을 미끼로 귀순을 종용한다는 자체가 비도덕적이라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유엔군 마지막 작전인 ‘물라 작전(Operation Moolah)이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게 무슨 ‘작전’씩이나 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복잡한 심리 전술적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때는 휴전 직전이었고, 한 뼘 땅을 두고 사활을 건 전투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51년 11월 전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구소련 미그 15기는 미 공군 주력 F-86 세이버(Sabre)에 비해 최고속도는 느렸지만, 1만m 이상 고도 기동력과 급강하 능력면에서 앞섰습니다.

 

 

소련이 공식 참전국이 아니어서 소수의 파일럿과 전투기만 제공한 탓에 중공 및 북한군 조종사들의 조종능력이 미군의 전투 비행능력에 밀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무거운 37미리 포까지 갖춘 미그 15기의 공격 능력은 미 공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당시 미군은 미그 15기의 제원 및 성능에 대한 정보가 사실상 전무했고, 그건 한국전쟁으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B-29 슈퍼포트리스에 120만장의 삐라를 싣고있는 미군 병사모습

 

1953년 4월 27일 미 공군의 폭격기 B-29 슈퍼포트리스는 한국어,중국어,러시아어로 된 120만 장의 삐라를 당일 공산진영 공군 기지가 있던 압록강 유역에 뿌린 것을 시작으로 신의주 의주 등지로 전단을 실어 살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후 8일 동안 모든 미그기는 지상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5~6월이 됐는데도 소련의 미그-15기 전투기 출격은 21%로 감소했습니다. 이에 소련은 당연히 값싼 속임수이며 국제법 위반이라며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정전 이후인 1953년 9월 21일 10시 평양 인근 순안 비행장을 훈련차 발진한 북한 인민해방군 공군 노금석이 자신의 ‘레드 2057’ 미그 15기를 몰고 북한의 다른 전투기들의 별다른 방해 업이 휴전선을 넘어 김포의 미군 비행장에 착륙하게 됩니다.

 

 

 

당시 한국측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사건 발생 후 며칠 후에 한국군에 통보를 한 미군은 미그-15기를 즉각 분해한 뒤 다음 날 C-124 수송기에 실려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로 이송됐습니다.

 

 

그리고 약 2주일간 오키나와에서 미그-15기를 연구한 미국 기술진들은 미그기와 세이버기의 기체 성능은 거의 동등하지만 조종사의 훈련 상태 및 조종 기술이 미군이 뒤쳐진 걸로 파악하였고 후에 미군의 조종 훈련 교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미그-15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공군 노금석 상위는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닉슨 부통령의 미국의 닉슨 부통령의 환대를 받으며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이미 북한에서 탈출한 어머니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새 인생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름을 미국식인 케네스 로우로 개명하고 델라웨어 대학에서 전기공학 학위를 받은 후 항공 엔지니어로서 엠브리-리들 항공대학에서 항공공학 교수로 17년 간 재직 후 은퇴, 현재 플로리다 데이토나 비치에 거주 하고 있습니다.

 

일단 전설의 특수부대라고 불리는 이집트의 777부대를 소개하기 전에 777부대의 전신인 사이카(번개) 부대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1978년 2월 19일 키프로스에서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사다트의 절친한친구를 니코시아 힐튼호텔에서 암살한 두명의 암살범들은 인질 30명을 잡고 키프로스 정부로부터 DC-8 여객기 한대를 얻어내는데 성공합니다. 남은인질 18명과 근처의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했지만 어느나라도 착륙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암살범들은 지중해를 빙빙 돌다가 키프로스의 수도인 니코시아로 되돌아갔고 키프로스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협상의 타협점을 찾아 가던 그날 밤 한대의 C-130 수송기가 나르나카 국제공항의 활주로에 착륙하였습니다. 이 수송기는 이집트 대통령이 자신의 친구를 암살한 암살범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45명의 이집트 특공대 샤이카 부대를 태운 이집트 공군기였습니다.

 

 

하지만 키프로스 당국과 전혀 협의가 없었고 착륙허가 조차 받지 않은 이집트의 공군기를 지켜본 키프로스 군과 경찰은 사이카 부대를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고 발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착륙과 동시에 번개처럼 대테러작전을 시행하려고 했던 사이카 부대는 키프로스 군과의 전투가 먼저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이카 특공대원들은 전부 키프로스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최강의 대테러 작전을 보여주려고 했던 이집트는 실패한 작전이였지만 포로가 되었다가 살아돌아온 사이카 대원들을 영웅으로 대접하였고 이에 미국도 테러리스트와 타협하지 않는 용기있는 행동이라며 추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집트는 사이카 부대의 오명을 씻기 위해 사이카 부대를 777부대로 부대명을 바꾸고 영국의 SAS와 미국의 Special Forces에게 특수훈련을 받게됩니다. 그리고 1985년 11월 23일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110명을 태운 이집트 항공 소속 보잉 737기가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됩니다.

 

 

7년전 굴욕을 갚기 위해 777특공대는 말타의 루가 공항으로 향합니다. 이번엔 몰타정부에게 구출작전을 벌여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몰타에 도착한 777 부대는 진압작전을 계획하는데 11월 25일 아침, 기내 음식물 제공을 빌미로 문이 열린 틈에 위장한 특수부대원이 문을 확보하고 미리 동체 하부에 숨어있던 특수부대원들이 재빠르게 진입하여 테러범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이를 위해 미리 새벽부터 야음을 틈 타 777부대원들은 재빠르게 동체 밑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필이면 공항 측에서 활주로의 라이트를 모조리 꺼버린 것입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테러범들이 문을 열고 밖을 살피던 도중 접근하던 부대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테러범들은 곧바로 승객들에게
수류탄 4개를 던지고 무차별 총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에 조급해진 777부대는 곧바로 기체 하부 화물칸을 폭파하고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물에 이 옮겨붙어 기체가 화염에 휩싸이고, 뛰쳐나오는 인질들에게 몰타군 스나이퍼의 오인사격까지 벌어져 88명의 인질 중 56명이 사망하고, 승무원 2명, 테러리스트도 1명이 사망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의 리더였던 알리 레자크는 혼란한 와중에 승객으로 위장병원까지 실려갔지만 이집트 특수부대의 추격 끝에 붙잡혔습니다.


하지만 몰타 작전에서 성급하게 화물칸을 폭파한 탓에 발생한 화재로 수많은 인질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변명을 할 수 없는 대참사였던 탓에 777부대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부터 어떤 테러리스트도 학살자 집단인 777부대가 있는 이집트 항공기는 납치하지 않는다고 많이 떠돌고 있지만 아직도 이집트에는 폭탄 테러같은 많은 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집트 777 부대에 대하여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1980년대에 미국의 NASA는 우주왕복선을 개발하면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미국의 라이벌이었던 소련도 우주왕복선을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러시아어로 '눈보라'라는 뜻으로 소련의 우주오아복선 계획에 의해 유일하게 완성된 부란(Буран)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부란은 미국에 비해 늦게 만들어진 만큼 미국의 우주왕복선과 달리 제작 당시 동원할 수 있는 최신 우주기술을 총동원하여 제작되었습니다.

 

 

부란의 제원은 전장 36.4M 날개 너비 24M 전체 중량 105톤, 발사 시 탑재 가능 중량 30톤, 귀환시 탑재 가능 중량은 20톤이였으며 탑승 가능 인원은 승무원 2~4명, 탑승객 6명으로 총 10명까지 가능하였습니다.

 

 

그리고 1988년 11월 15일 눈구름과 발마이 강한 카자흐스탄의 바이콘르 코스모드롬에서 부란은 거대한 에네르기아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습니다. 부란은 세 시간 동안 지구를 두 바퀴 돈 후에 아무런 오점을 남기지 않고 안전하게 착륙하였습니다.

 

▲미국 나사의 우주왕복선과 부란의 비교 사진

이 우주왕복선 오토파일럿 기능은 지상 관제 센터에서 컴퓨터로 원격 조작한 것인데, 우주선의 원격 조작은 비행기의 원격 조작이나 오토파일럿과는 차원이 다른 극도로 어려운 작업이며, 소련이 우주왕복선의 무인 비행에 성공하자 NASA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결국 NASA도 우주왕복선의 오토파일럿 기술 개발에 착수했지만 끝끝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부란은 2010년 미국의 X-37이 재돌입 후 자동 착륙을 하기까지 유일한 자동재돌입 및 착륙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작업용 로봇팔도 미국 우주왕복선은 1개밖에 없지만 부란에는 2개가 달려 하나가 고장나거나 파괴되더라도 다른 하나로 작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당시 NASA는 우주왕복선이 대기권 진입시 기체 내부의 온도 상승을 막는 기술이 없어서 우주왕복선의 연료가 대기권 진입시에 기체의 온도 상승이나 기체 내 압력 폭증으로 인해 폭발하지 않도록 모든 연료를 우주상에 버리고 대기권에 진입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우주왕복선은 활공 비행을 통해 지구로 귀환했고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폭풍이 온다면 우주왕복선의 비행 경로가 틀어져 지정된 지점으로 귀환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우주왕복선은 발사 당일뿐만 아니라 귀환 당일에도 기상이 좋아야 했고, 당연히 발사일을 선정하기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그러나 부란의 경우에는 대기권 진입시에도 기체 내의 압력과 기온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기술이 적용되어 우주상에서 연료를 버리지 않고 대기권을 진입하였으며, 대기권 진입 이후에는 제트엔진을 가동하여 목표지점으로 얼마든지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단, 1988년 우주비행을 한 1호기에는 제트엔진이 없었습니다. 비행 이후 제트엔진을 달았지만 소련이 붕괴되어 처녀 비행이 마지막 비행이 되어 버렸고 유인 비행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트엔진을 장착한 부란은 전시물로 전락하였습니다.

 

2002년 5월 12일에 부란이 격납고가 폭발로 무너지면서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고가 아니라 러시아에서 직접 폭발시켜 묻어버린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부란을 보관하던 격납고는 북측동과 남측동 총 2개 동으로 1986년에 건축한 것인데 이 중 북측동은 부란을 조립하는 곳으로, 엄청난 무게의 부란을 격납고 공중에 매달아 둘 정도로 견고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너진 것을 보면 북측동과 남측동이 함께 붙어있는데도 북측동만 도려낸 듯이 무너져 버렸고 이는 폭탄에 의한 발파가 아니면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러시아 우주당국은 이 사건이 일어나자 부란의 시체잔해물과 건물의 잔해물을 씯어낸 듯이 치워버려 이러한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 주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미 해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이란 정부는 재래식 전투로는 미 해군을 이길 수 없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해군력이 약한 이란은 소형 잠수함과 고속정, 기뢰 등 기습과 매복 같은 일종의 ‘바다 게릴라전’에 유리한 무기를 대거 실전 배치하면서 일명 벌떼 전술(swarm techniques)을 사용합니다.  벌때 전술은 크기가 작고 무장도 약한 소형 보트들을 많은 숫자로 여러 방향에서 대형 군함을 동시 공격하고 적이 강력한 무장으로 대응 사격을 가하기 전에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공격 방식입니다.

 

 

이란 해군의 이 벌때 전술의 핵심인 소형 보트는 속도가 상당히 빨라서 대형 함정이 포착하는 건 물론 대응하기도 까다롭습니다. 그리고 원격조종 보트까지 사용하면서 인명 손실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란이 이렇게 벌때 전술 훈련을 계속해서 하는 주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항공모함입니다.

 

 

2014년 이란은 미 해군의 나미츠급 항공모함의 모형을 개봉될 영화의 세트를 위해 만들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위성 사진에 포착된 이란이 만든 나미츠급 항공모함의 모형을 실제 크기의 2/3규모로 건설하였습니다. 당시 군사전문지 IHS 제인스는 빈센스 사건때 당시 미 해군 항모가 있지도 않았다며, 굳이 항모를 영화에 넣을려면 CG로 충분히 구현할수도 있다면서 괜히 항모를 만들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말그대로 이 모형 항공모함은 영화의 세트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였습니다. 자국 해군의 벌때 전술을 훈련하기 위해 미 해군 항공모함의 모형을 제작한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2015년 이란은 걸프해역의 전략요충지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 항공모함 모형 폭파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2016년에는 이란이 미 항공모함으로 추정되는 군함 근처로 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이 포착되었고 미 해군은 이 동영상을 공개하였으며 얼마 후 미 항공모함 해리 트루먼호가 이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다가 이란 해군이 발사한 로켓에 맞을 뻔했었습니다.

 

 

이란 해군 사령관 Ali Fadavi 제독(해군소장)은 벌때 훈련을 마친 뒤 PressTV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항공모함에는 방대한 무기고 내에 미사일과 로켓, 어뢰 등 막대한 양의 탄약이 실려 있다"면서 "항공모함에 미사일 한방만 제대로 명중시켜도 대단히 큰 규모의 유폭으로 이어질 것"이라면서 단발에 미 항모를 격침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이란 해군이 미 항공모함에 벌때전술로 수십척의 고속정을 동원하여 저렇게 미사일과 어뢰를 쏘려면 항공모함 이전에 항공모함을 호위하는 구축함과 함재기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미 해군의 항공모함이 단독으로 행동하는 상황은 보기힘듭니다.

 

모든 군인은 기본적으로 보병입니다. 보병이란 ‘도보로 행군하고 싸우는 전투병’을 뜻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병은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병과이기도 합니다. 고대의 보병은 칼이나 창, 방패 등으로 무장했고 이러한 무장은 현대에도 거의 그대로 이어져 그 형태와 화력만 더욱 강화됐을 뿐 보병 병기가 갖고 있는 기본 속성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록 보병 개개인이 가진 힘은 미약하지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처럼 밀집 대형을 이룬 보병은 전장에서 절대적 위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호프리테스(Hoplihes)라 불리는 중장(重裝)보병이 군대의 중심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2m 이상의 긴 창과 검으로 무장을 하고, 보통 가로·세로 8명씩 모두 64명으로 편성된 방진(phalanx)이라고 하는 밀집대형을 이루었습니다. 로마 군단도 그리스와 비슷한 중장보병이 군대의 핵심이었는데, 이러한 중장(重裝) 보병 전술의 도입은 전투 양상마저 개인들끼리 치고받는 육박전에서 집단전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고대의 보병 전투에서는 왼손엔 각자 방패들 들고, 어깨를 서로 밀착시킨 형태로 밀집해서 오른 손에 잡은 창을 앞으로 겨눈 상태로 싸움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패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왼쪽에 있는 전우의 오른쪽 부분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기에 방패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과거 전쟁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이기조차 하는 오늘날의 군대에서도 훈련소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오와 열입니다. 특히 해병대 훈련단에서는 소대장들이 훈련병들에게 "해병은 죽어서도 오와열을 맞춘다"라고 외칩니다.

 

 

해병대는 정말 어떤 조직보다 오와열을 지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합니다. 또한 보병이 대열을 지어 뭉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열과오를 맞추어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이 고전적인 방식은 남북전쟁에서 부터 사라졌습니다.

 

(사진출처: 해병대 공식블로그)

 

열과오를 맞추어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방식이 사라진 현재도 오와열을 중요하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적과 맞닥뜨릴 때 인간은 누구나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열을 이루게 하여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신뢰입니다. 흐트러짐 없이 오와열로 정렬된 군대는 국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신뢰를 줍니다. 가장 기본적인 오와 열부터 차원이 다른 해병대가 강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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