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북한은 지난 60년간 수령독재체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해왔고 핵과 미사일을 끊임없이 개발해 왔습니다. 경제적 실패와 정치적 탄압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입니다. 외통수로 가는 길인데, 결국 내부개혁은 어렵고 체제붕괴로 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이 스스로 체제를 유지 못해 실패하면 우리가 빨리 개입해서 북한을 안정시키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흡수통일하지 않으면 중국이 흡수통일하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중국은 북한이 붕괴한다면 우리나라와 미국보다 먼저 평양을 점령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난다면 한국이 군사분계선에서 고전하며 북한군의 두터운 방어선을 뚫고 올라올 기간에 중국은 북중국경의 북한 예비부대를 가볍게 밀어내고 내려가 이미 평양을 점령하고 우리나라 국군을 맞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군이 북한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현 북부전구, 동부전구, 중부전구 및 기타 집단군 증원 병력과 무장경찰까지 도합 50~6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무장경찰을 제외한 중국 지상군은 85만 명에 불과하지만 실상 무경이 인민해방군 부대 일부의 편제만 바꾼 거라 사실상의 정규군은 무경을 포함하여 150만 이상으로 보는 게 정확합니다.

 

 

또한 중국은 북한 내 급변사태에 대비해 국경지역에서 10만 명의 대규모 병력과 탱크 등을 동원한 종합훈련을 실시하였는데 상황 발생 시 1개 여단을 북한의 영변 핵시설에 투입해 장악하고 두만강 하구를 막아 미국과 일본 잠수함의 침입을 차단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짧게는 한 달, 길게는 6개월 내에 평양을 점령하는 시나리오를 두고 훈련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중국은 현재 국경 주변 각 현에 1500명 규모의 수용소를 설치해놓고 있습니다.

 

 

정말로 북한이 완전히 중국의 영토가 되어버리는 일이 만약 성사된다면 중국은 북한주민들의 국적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중국 국적으로 바꿀 것이며 북한은 조선족자치구나 조선성으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될 것입니다. 또한 중국이 북한을 흡수한다면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되는 나라는 대한민국, 대만, 그리고 좀 더 추가하여 몽골이며, 동남아와 남아시아(인도 제외), 중앙아시아 역시 중국의 직접적인 세력권에 들고 일본까지 가시권, 거의 사실상 중국의 직접 세력권에 맞딱뜨리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 중 우리나라는 더 말할 필요도 없고, 일본의 경우에도 중국이 북한 지역만 합병해도 충분히 일본의 안보적 부담 및 위협은 지금보다 수 배로 증가하게 됩니다. 이는 미국에게도 아시아권에서 상당한 영향력 상실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 지경까지 되면 중국은 로마 제국지중해처럼 황해, 그리고 부분적으로 동해라는 안전한 내해가 생기는 셈이고, 이곳에서 항모전단이나 기타 해상병기 같은 해군력을 마음 놓고 키울 수 있습니다. 또한 동해로 진출이 가능하게 되어 미국과 한일의 대잠망이 이전보다 배 이상으로 확충되지 않으면 중국 잠수함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어려워집니다.

 

C4I 체계란 Command(지휘), Control(통제), Communication and intelligence(통신과 정보)의 약자인 C3I에 Computer(컴퓨터)가 합쳐져 생긴 약자입니다. 전장에서 지휘관이 성공적인 지휘 및 통제를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시간과 지점, 정확한 정보를 필요하며 통신수단을 이용하여 신속히 정보를 전파 또는 전송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지휘, 통제, 통신 및 정보의 4가지 요소를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전산화함으로써 지휘관이 실시간 작전대응능력을 갖도록 지원하는 체계가 이 C4I라고 할 수 있습니다.

 

C4I 체계는 지휘정보체계와 정보수집체계, 그리고 통신망으로 구성됩니다. 전장의 환경에 따라 공중 지휘통제체계와 해상 지휘통제체계로 나뉘며 지휘 크기에 따라 전략 지휘통제체계와 전술 지휘통제체계로 나뉘고 전술 지휘통제체계는 다시 기능통제체계와 화력지원체계, 방공체계, 군수지원체계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C4I체계의 적용을 기본적인 지상전술체계에 맞추어 설명해본다면, 지상전술 C4I는 전술통신체계 스파이더(SPIDER)를 기반으로 정보보호체계, 56종 7000점의 공통-응용 소프트웨어, 접속 장치, 지원 장비로 구성되며 군단 - 사단 - 연대를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휴대용 위치보고접속장치, 정찰용 무인항공기(UAV), 지상감시 장치, 전자전 장비, 표적 탐지 레이더, 포병대대 전술사격지휘체계, 저고도 탐지 레이더등 정보 수집 자산등과 연동됩니다.

 


이들로부터 수집된 정보를 통해 지휘소에서는 실시간으로 전장의 모든 상황을 낱낱히 육안으로 보게 됩니다. 즉, 무인정찰기가 보내오는 영상이 좌표와 함께, 실시간으로 지휘소에 보고되어 위치보고접속장치를 통해 부대의 위치가 자동적으로 상황도에 표시됩니다. 또 저고도 탐지 레이더에 의해 탐지된 항공기의 항적 역시 상황도에 나타나게 됩니다. 디지털 지도에는 표적들의 거리, 방위각, 이동시간등이 자동적으로 표시되어 나타납니다.

 

 

정보, 작전, 화력, 전투근무지원 등의 참모와 실무 장교들은 컴퓨터에 사전 입력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각종 상황들을 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분석하여 대응 수단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지휘관 또한 이 같은 실시간적인 현황 파악과 참모 협조를 통해 빠르게 지휘 결심한 후 정확하게 명령을 하달해 선제타격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적의 움직임을 인식하여 대응하기까지와의 절차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으며, 육해공군 삼군의 유기적 협력과 정밀타격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C4I 체계는 24시간 동안 중단하지 않고서도 운용이 가능하고 상급 부대와의 연락이 두절되더라도 독립체계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야전의 상황을 고려해 개발함으로써 야전지역에서의 운용성과 생존성 또한 높습니다.

 

 

대표적인 C4I 체계로는 미군이 운용중인 FBCB2-JCR이 존재합니다. 미군은 전차, 장갑차, 수송트럭등에 단말기를 장착하고서 운용중이고, 거의 모든 지상군 전투부대의 C4I 체계 통합을 완료했습니다. 비전투부대와 CAS1를 해당 공역에서 수행하는 헬기와 전투기등에도 이를 적용할 계획입니다.

 


우리 국군의 합동지휘통제체계(C4I)는 육군의 ATICS, 해군의 KNCCS, 공군의 AFCCS로 연계된 체계를 합참과 작전사까지 연계해 지휘통제를 위한 합동지휘통제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국군은 이와는 별개로 KJCCS와 JADOCS2와 연동하여 실시간으로 감시, 결심, 타격이 가능한 JFOW-K체계를 구축함에 따라 합동참모부 중심의 대화력전 수행체계를 확립시켰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군 C4I의 노후화가 심각하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육군이 보유한 전술체계망(ATCIS)서버 499대 가운데 492대(99%)는 기준 수명인 6년 이상 운용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네트워크 장비 1600대도 모두 운용 기간이 기준 수명 7년을 넘어섰으며 노트북 9174대 가운데 3189(34%)도 기준 수명을 초과했으며 이 때문에 육군의 워게임을 실행하면 서버가 다운되거나 전장 정보를 원활하게 공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에 우리 육군은 2018년부터 3294억원을 투입하는 ATCIS 2차 성능 개량 사업으로 노후화한 장비를 교체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2022년에야 끝나기 때문에 일부 서버는 수명 주기의 2.7배인 16년 동안 사용해야 할 상황입니다. 국회도 6년 만에 데스크톱 컴퓨터를 교체한다고 하는데 전시에 24시간 운용하며 표적정보 통합, 화상회의, 감시 및 타격체계 연동 등 두뇌 역할을 하는 핵심장비인 C4I 장비에 대해 더 신경을 써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빨치산 공비의 정식명칭은 조선인민유격대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대남적화의 선행단계로서 북한 전역을 무력남침을 수행하기 위한 기지로 만들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 조성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군사력을 증강함과 동시에 1949년 7월 월북자를 비롯한 다양한 인원들로 편성된 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렇게 인민유격대는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반란사건으로 진압부대가 호남과 경남 지역에 집중돼 후방경비가 허술해지고 남한사회가 혼란해지자 본격적으로 남한에 침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거의 정규군의 일개 부대와 비슷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가 잘리자 퇴로를 잃어버린 북한군 잔당과 북한의 남한 각 행정부처, 그리고 협력세력들은 퇴로를 잃은 채 무장세력으로 정착됩니다. 이들은 북한이나 서로간의 연계가 거의 되지 않고 각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백선엽 백야전전투사령관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30일 전북 남원시의 정보(G-2)상황실에서 열린 참모회의에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작전지도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

 

각 세력은 행정구역 도 단위로 활동하였는데 경남도당, 경북도당, 전남도당, 전북도당 등 상당수의 세력이 태백산맥에서 뻗어 나온 산들에 터를 잡고 활동하였기 때문에 태백산맥, 그 중에서도 지리산은 빨치산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빨치산은 대한민국 육군과 경찰로 구성된 1차 대공세로 인해 그 위세를 잃었으며 2차 대공세때 완전히 작살나 버려 이후에는 더 이상 조직적인 부대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후 망실공비란 이름으로 경찰서 형사들의 추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자신을 지지해준 조선인민유격대를 정규군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데려갈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난뒤에도 빨치산 세력에게 산에서 내려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만 전해주었을 뿐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측이 정전협정때 제발 조선인민유격대원들을 데려가라고 먼저 제의했는데도 북한측에서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탈북자들 증언에 의하면 조선인민유격대는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존재이며 기껏해야 남조선 내 자발적인 혁명전선, 즉 제2전선으로 불릴뿐이었다고 합니다.

 

(애국심으로 자원해서 빨치산 공비 토벌에 나선 전라도 청년들)

 

1948년 11월부터 6·25전쟁 직전인 1950년 3월까지 모두 10회에 걸쳐 침투해 온 유격대원 수는 무려 2,40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인민유격대는 국군과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2,000여 명이 사살 또는 생포되었지만 나머지 400여 명은 남한 각지의 오지에 틀어박혀 북한의 남침 직전까지 계속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전방 사단의 일부와 후방 3개 사단을 포함해 총 4개 사단병력과 경찰병력을 토벌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빨치산 공비 토벌에 나서 지리산 정상까지 소탕에 성공하여 태극기를 게양한 모습)

 

1955년 4월 1일이 되서야 지리산 입산통제가 해제되어 누구나 지리산 등반에 나설 수 있게 됐으며 정부는 1955년 5월 23일 빨치산 토벌이 종료됐음을 정식으로 발표했습니다. 마지막 빨치산 테러분자 정순덕은 민가에서 밥이나 훔쳐먹는 망실공비 수준으로 지내다 1963년 11월 12일 오전 11경에 총격전 끝에 체포됐습니다.

 

미국이 핵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4년이나 지나서야 독자적인 핵폭탄 개발에 성공한 소련은 핵무기 보유고에서도 미국에 뒤졌지만 미국의 핵공격시 보복 핵무기를 적국으로 실어나를 수송수단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대륙간 폭격기 제작은 기존의 비행기술사양을 훨씬 능가하는 비행기를 만드는 고도로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그러한 폭격기의 설계 임무는 당시 뛰어난 항공기 설계자였던 안드레이 투폴레프에게 맡겨졌지만, 그는 임무수행을 단호하게 거절했고 이 때문에 스탈린을 직접 대면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결과적으로 최단 기간 내에 신형 폭격기를 설계하는 책임은 투폴레프의 제자인 블라디미르 먀시셰프(В. Мясищев)에게로 1951년 넘겨졌습니다. 신형 폭격기 제작 프로젝트를 위해 제23시험설계국이 다시 문을 열었고 먀시셰프가 수석 설계자로 임명됐습니다. 소련 정부 앞으로 낸 보고서에서 먀시셰프는 시속 900km, 항속거리 11,000~12,000km의 원거리 폭격기를 제작 계획을 밝혔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6개월 후 집중된 작업이 결과 먀시셰프의 설계를 재현한 미래의 폭격기 실물크기모형이 완성됐습니다. 최초의 시제기 제작은 하루 24시간 3교대 작업으로 진행되어 불과 몇 개월만에 이륙가능한 비행기가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1953년 1월 20일 10분 간의 M-4 처녀비행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뒤를 이어 공장 시험 1단계에서 추가로 27회의 비행이 이어졌습니다. M-4 폭격기의 주력 무기는 2.9Mt급 수소폭탄 RDS-37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RDS-37은 한 도시 전체 또는 한 산업지역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었습니다.

 

 

M-4는 그 외에도 폭발력이 좀더 작은 핵폭탄 및 재래식 폭탄, 기뢰, 어뢰 및 유도미사일도 운반할 수 있었으며 23mm포 NR-23 9대 또는 23mm 포 AM-23 6대 등 강력한 방어무기도 갖추게되었습니다. 그렇게 M-4는 맞상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전략폭격기 B-52보다 몇 달 앞서 공군에 편성돼 운용이 시작되었고 전투 부대에 실전 배치된 세계 최초의 대륙간 핵무기 수송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 M-4 폭격기는 미국에서 소련의 들소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신형 폭격기의 운용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종시스템의 잦은 고장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상당히 오랫 동안 설계자들을 가장 괴롭힌 문제였습니다. M-4는 조종이 매우 까다로운 기계로 여겨졌으며 특히 이착륙시 조종간 제어에 엄청난 체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취약한 온도조절 시스템은 조종사들에게는 큰 고통을 안겨주었는데 높은 고도로 올라가면 조종실 내 온도가 영하로 떨어졌기 때문에 조종사들은 체온유지를 위해 모피옷을 입고 비행기를 조종해야 했습니다.

 


실전배치 후 찻 3년 간 수 많은 사고가 있었고 6건 이상이 재난급의 사고가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M-4의 주력기지가 있었던 엥겔스 시에서 사M-4 조종사들의 부인들이 활주로로 뛰쳐나와 비행을 중단시킨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다. 게다가 M-4를 새로 개발된 세계 최강의 수소폭탄 차르봄바(Царь-бомба)투하를 냉전의 자식이라 불렸던 동시대 폭격기 Tu-95에게 뺏았겻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시험 과정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항속거리였습니다. M-4의 최대 항속거리는 약속된 수치의 절반인 9,500km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미국 본토로 날아가 폭탄을 투하한 후 자대로 복귀할 연료가 부족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효과적인 수단은 단 하나, 공중재급유였습니다. M-4를 위한 특별 공중재급유 시스템 '코누스'는 사실상 또 다른 M-4를 공중급유기로 개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M-4는 1957년 2월 8일 두 차례의 재급유를 받아며 17시간에 걸쳐 1만 4,500km를 비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땐 이미 M-4를 성능에서 훨씬 능가하는 최신 폭격기 3M이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생산된 M-4 전량을 항공급유기로 개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최강의 폭격기를 꿈꿨던 M-4는 하늘을 나는 주유소가 되어 90년대 초까지 사용됐습니다. 그리고 결국 1997년 8월 M-4 전량 폐기되어 고철로 분해되며 쓸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초음속 전투기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다 보면 비행기의 노즐 뒤로 긴 불꽃을 내 뿜으며 비행하는 전투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전투기가 초음속으로 비행하기 위해 애프터버너(After burner)를 작동시키는 것인데 보통 비행기의 제트엔진은 자체 가진 추진력으로 초음속을 돌파하기 어렵고 애프터버너를 통해 초음속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애프터버너는 터보제트엔진의 추진력을 향상시키는 장치로 한번 연소가 이루어진 제트엔진 고온의 배기가스에 제트 엔진의 터빈 뒤쪽에서 다시 연료를 분사하여 더 큰 추진력을 얻게 해주는데 애프터버너의 긴 파이프처럼 생긴 구조물은 실제로는 자세히 보면 표면에 작은 구멍들이 무수히 나있으며, 이곳에서 연료가 분사됩니다.

 

 

애프터버너는 이미 뜨거워진 배기가스에 연소를 분사하기 때문에 별도의 점화장치도 필요없습니다. 다만 연료와 배기가스가 잘 섞이도록 불꽃안정기란 구조물이 있는데 제트엔진 뒤에서 보면 동심원 모양으로 여러개의 고리가 보이는 그 구조물입니다. 이것이 와류를 만들어 배기가스를 일부러 흐트러트려서 연료와 잘 섞이게 해줍니다.

 

 

애프터버너를 사용하면 굉장히 큰 소음이 발생하는데, 대형 여객기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소형인 제트전투기가 이륙시에 더 시끄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큰 불꽃이 생기는데 여객기와 달리 전투기의 노즐에서만 이륙시 불꽃이 생기는 것도 이 애프터버너 때문이다. 이 불꽃에는 다이아몬드나 원판 모양의 무늬가 생기기도 하는데, 불꽃 내부에서 복잡한 충격파들이 생기다 보니 부분적으로 공기밀도와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애프터버너를 작동시키면 통상적으로 기존 엔진보다 1.5배의 추진력이 증가합니다. 하지만, 1차로 연소된 배기가스에 2차로 다시 연료를 분사하기 때문에 연료 소비가 2~3배 이상 증가합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전투기는 계속 애프터버너를 사용하지 않고 급하게 이륙하거나, 적기를 향해 고속으로 비행해야 할 때, 그리고 초음속 이상의 속도로 비행해야 할 때 애프터버너를 사용합니다. 

 

 

또한 너무 자주 애프터버너를 사용할 경우 장기적으로는 엔진 수명을 깎아 먹습니다. 최근에는 제트엔진의 고성능화 덕분에 애프터버너를 이용하지 않고도 초음속 이상의 속도를 얻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슈퍼크루징(Supercruising) 능력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의 최신예 전투기인  F-22 렙터에 장착된 F119 엔진의 경우, F100보다 22%나 강해진 추력 덕분에 애프터버너를 안 켜고 마하 1.72의 속도로 초음속 비행이 가능합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제트 엔진의 고성능화와 비행기 기체의 최첨단 설계로 가까운 미래에는 애프터버너 없이도 초음속이 가능한 비행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1948년부터 시작된 제1차 중동전쟁부터 2차, 3차 중동전쟁은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초반에 큰 피해를 보게 된다. 1973년에 이스라엘과 중동제4차 중동전쟁은 흔히 욤 키푸르 전쟁 또는 10일 전쟁이라 불립니다. 이 중동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가 이스라엘의 저력에 대해서 인정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피는 반드시 피로 되갚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특히 이 욤키푸르 전쟁에서 시리아군의 골란고원 공격에 대해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골란 고원에 어둠이 내리던 1973년 10월 4일 이스라엘 수비군의 상황도 밤만큼이나 어두웠습니다. 전략 요충지 골란 고원의 북쪽 절반을 수비하는 이스라엘 국방군 IDF 소속의 제7기갑연대는 겨우 40대의 전차만이 움직일 수 있었던 반면에 시리아는 500여 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제공권을 잃은 상태였고 시리아군은 이스라엘 제7기갑연대가 가지고 있던 것보다 뛰어난 야간관측 장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시리아군이 이스라엘 제7기갑연대가 버티고 있는 수비를 성공적으로 뚫고 전진해서 고원을 차지한다면 이스라엘은 두 조각으로 나누어질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10월 6일 시리아 전차들이 공격했고 이스라엘 제7기갑연대는 대대가 높은 지대의 포격위치에서 시리아 전차 60여 대를 파괴시키며 첫 번째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숫자의 열세를 우수한 공군력으로 메웠는데 골란 고원 전투에서는 시리아의 근접 대공망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골란 고원 전투의 첫 무대는 말 그대로의 전차전이었고 이런 형식의 전투는 당연히 이스라엘군의 최고 장기였습니다.

 

 

그렇게 전투가 계속되었고 해를 등지고 있는 동안에는 유리했던 이스라엘군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더 뛰어난 야간장비를 갖춘 시리아군이 유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위해 시리아군은 압박을 가하면서 이스라엘 진지 앞 100m까지 전진하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큰 희생을 치른전진이었습니다.

 

 

10월 7일 새벽이 밝아오자 100대 이상의 처참한 전차잔해가 계속에 흩어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10시경 시리아는 더 보강된 전력으로 공격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골란 고원의 이스라엘군은 겨우 40대의 전차로 시리아의 최신형 전차 500대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무장한 시리아 기갑보병 장갑차들은 다시 한번 어둠을 틈타 이스라엘 방어진지 50m까지 접근했지만 끝내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8일 새벽 1시 시리아는 공세를 멈추고 파괴된 차량들을 수습했습니다. 그리고 3시간 뒤 시리아군은 남은 병력으로 다시 공격을 하면서 혼전의 상황을 보였으나 시리아군 사령관이 타고있던 전차가 직격탄을 맞아 사령관이 전사하면서 야간공세는 다시 취소되었습니다. 그리고 10월 9일 오전 시리아군이 별 위력이 없는 포격을 퍼붓자 이스라엘은군 500m 뒤로 후퇴시키고 포격이 멎자마자 원위치로 복귀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를 노린 시리아군은 빠르게 전진해서 이스라엘군이 수비위치를 갖추기도 전에 산등성이까지 접근하였고 그렇게 전차 백병전이 펼쳐졌습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를 치루면서 이스라엘 제7기갑여단이 가지고 있던 전차중 겨우 7대만 움직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설상가상으로 시리아군이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할 때에는 한 대의 전차당 4발의 포탄만 남아있었습니다.

 

 

포위될 위기에 제7기갑여단의 남은 병력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려고 하는 순간 이스라엘 지원군 전차 13대가 도착하면서 시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순식간에 30대의 전차를 파괴시켰습니다. 이에 시리아군은 대규모 지원군이 왔다고 착각하고 혼란 속에서 전장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제7기갑여단의 전차병들은 50시간 이상을 잠 한숨 못자고 필사의 전투를 벌이면서 살아남았습니다.

 

 

결국 10월 10일 미국의 지원이 이루어졌고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대한 전면적 반격(Counter-offensive)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완전히 박살난 시리아군은 500대가 넘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골란 고원에는 그 당시 파괴된 전차들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2017년 현재 많은 나라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골란고원을 시리아 영토로 표기하여 여행금지 구역에 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직도 이스라엘이 지배하고 있으며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군의 전력은 중국군에 비해 여전히 수십 년 앞서 있지만, 미국은 중국과 같은 잠재적인 경쟁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2010년 중국이 배치한 탄도미사일 ‘DF-21D’는 미군을 긴장시켰습니다. 중국의 항모킬러라 불리는 DF-21D 미사일은 미군 항공모함에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였습니다. 또한 미국 의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까지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미사일을 탑재한 수상 전투함과 잠수함 351척을 배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 미국이 현재 배치하고 있거나 앞으로 배치할 예정인 수상 전투함과 잠수함은 67척뿐입니다. 또한 중국은 우주와 사이버 공간에서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정말 중국은 알려진 것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을까요? 세계적인 국방・안보 전문 싱크탱크인 미국의 랜드연구소가 중국의 군사력에 대해 다소 뜻밖의 평가를 내렸습니다. 중국군의 전력이 예상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평가하는 과대평가 받고 있는 중국 군사력의 치명적인 단점이 무엇인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징병 문제

현대적인 군대를 갖추려면 고등교육을 받은 신체 건강한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중국군의 임금과 처우가 매우 열악한 나머지 정신질환을 결격 사유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고 랜드 보고서는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대기오염은 중국인들의 폐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 자녀’ 정책 때문에 엄격한 군율을 견디기에는 나약한 ‘소황제’들이 양산됐다고 지적했습니다.


 

 둘째 작전수행능력

중국군은 후방지원과 공군의 전략 및 수행능력에 문제가 있으며, 공군인력 부족·방공편대 미비·대잠 작전능력 결여도 지적됐습니다. 또한 랜드 연구소는 중공 해군이 군함과 잠수함을 함께 편성한 부대로 작전수행할 경우 현대화로 복잡해진 무기운용체계에 우왕좌왕할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공군 역시 재래무기와 현대무기를 함께 운용하는 데다 특수작전이나 극한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중국군의 단점으로 뽑았습니다. 장기간 동안 중국군의 지상군과 공군, 해군이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셋째 심각한 군 부패

 중국공산당은 국방산업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일궈냈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이권독점, 무경쟁, 관료주의, 부정부패, 품질불량, 불합리한 계획과 구매시스템의 고질적인 폐해에 외국 군수업체로부터의 기술이전 제한까지 걸려 있습니다. 중국의 펑황’(鳳凰) 위성TV 군정관찰실이라는 군대 감시 프로그램에서 “청두군구에서 자체평가를 실시한 결과 몇몇 분야에서 중국군 전력이 인도군대에 못미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보도했습니다. 또한 업친데 덮친격으로 부패로 인한 전력누출 역시 심각한 수준입니다. 중공군 쿤룬옌(昆侖岩) 소장은 “군 부패가 사상 전례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고 개탄했고, 뤄위안(羅援) 전 소장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부패 근절 안 하면, 전장에 나가기도 전에 패배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넷쨰 실전경험

중국 군전문가들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중국군 하사관이나 이등병 가운데 실제 총격전을 경험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중국군이 마지막으로 참전한 것은 1979년 베트남과 치른 국지전이었는데, 당시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섯째 뒤쳐지는 필수기술

랜드 연구소는 중국군이 대잠수함전 등 여러 필수 영역에서 훨씬 뒤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군사위성을 향해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기술에 중국이 투자한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이 모아졌지만, 군사정보를 얻기 위해 중국군이 우주에 더욱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초음속 미사일이라고 하더라도 공격 대상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게다가 중국 미사일 기술이 진보할 때 미국의 방어 능력도 발전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중국산 전투기 능력

중국군 전투기는 지상 근무 요원들이 폭탄을 탑재하는 효율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표준보다 크게 떨어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나토 표준은 2차 폭탄 탑재 시간이 20분이지만 중국 전투기는 3배가 넘는 60분이나 걸린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스라엘 전투기의 2차 폭탄 탑재 시간은 12분에 불과합니다. 제 3,4차 중동전의 사례를 보더라도 전투기 수의 우위가 공중전 승리에 절대 요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투기 수는 400대에 불과하고 아랍국가 전투기들은 이보다 훨씬 많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 조지 C. 마셜 원수가 1943년에 육군성해군성을 통합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제안은 1947년에 미 국방부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과정 가운데 육군 항공대가 끝끝내 미 공군으로 독립하였고, 행정도 육군과 따로 운영하며 육군에 휘둘리지 않았던 미 해군은 자신들의 존재에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공군핵무기를 바탕으로 전쟁의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꿀 기세였습니다.


그렇게 미 공군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미국 정부는 해군 항공대와 해병대 등 해군청 소속의 군사집단을 감축하려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
해군항공모함을 예로 들며 해군의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미 정부와 미 해군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었고 해군장관 출신의 초대 국방장관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은 해군의 주장을 반영하다가 물러나고 해리 트루먼의 측근인 루이스 존슨이 국방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1949년 상반기, 미 해군이 핵폭탄 투하가 가능한 폭격기 운용을 위해 건조에 돌입했던 초대형 항공모함인 US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SS United States) 함의 건조가 주문한지 하루만에 취소되었습니다. 1949년 3월 28일 당시 국방장관인 존슨이 의회에 상임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해군청장이었던 존 설리번과 루이스 덴펠드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수많은 제독들이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며칠 뒤 국방장관인 존슨은 해병대를 방문해 해병대 항공대의 항공 자산을 공군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미 해군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 계획은 취소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해군청장을 경질하고
제복군인 최선임인 해군참모총장도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그 와중에 전 해군청장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이 우울증으로 입원해 있던 해군병원에서 투신하여 자살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소련의 핵개발이 성공하여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핵전쟁이 벌어질 경우 인류가 멸망한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재래식 무기의 중요성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미 국회는 항공모함을 건조하기로 계획합니다. 게다가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해군과 해병대의 맹활약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해군의 중요성이 다시 인정받아서 해군축소는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이후 해군은 자살한 포레스탈 장관의 명복을 빌고자 재개한 초대형 항공모함 프로젝트를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으로 명명하였고, 이후 하이먼 리코버의 주도로 원자력을 함정의 동력원으로 쓴다는 발상을 내놓아 오늘날의 위엄 돋는 원자력 해군화에 성공하였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 전략공군사령부를 운영해 핵무기를 독점하던 공군이 해군의 반격으로 국직부대인 전략사령부(United States Strategic Command; USSTRATCOM)로 통합되어 해군과 공군 대장이 번갈아가며 사령관을 맡게되면서 냉전 초기에 위풍당당했던 미 공군의 위세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현재도 미 해군은 미군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집단으로, 미국 국방예산의 반이 넘어가는 60% 가량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미국의 강대한 힘이 바다로부터 투사되는 막대한 군사력에서 나오는 걸 생각하면 해군을 감축하려했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했으며 현재 미 해군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듯 미 해군 제독들의 노력으로 세계 최강의 미 해군이 완성될 수 있었으며
 미 해군 항공대는 이후 미 해군력의 주축으로서 세계 1위 미 공군에 이어 세계 2위라는 공군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무장공작원을 훈련시켜 북으로 보냈던 HID(Higher Intelligence Department)는 한국군이 미군과 별도로 조직해 만든 첩보부대입니다. 194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전쟁 당시 활동했던 북파공작원들은 HID의 고유명칭을 육군첩보부대로, 통상명칭을 육군 4863부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HID는 전쟁 당시 약 30개의 부대를 운영했습니다. 당시 국군 15개 사단에 파견대를 두고 있었으며, 전방의 주요지역에는 따로 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제4863부대(HID)소속 부대중에 SC지대라는 부대가 있었습니다. 200명 정도로 구성됐으며 특징은 부대원이 화교인 외인부대라는 것이였습니다. SC란 말 자체는 서울 차이니스(seoul chinese)의 준말로 한국에 체류했던 화교란 뜻입니다. 10주간의 양성훈련 후에 장병들은 12명씩 조를 나눠 육군방첩부대에 분산배치되었습니다.

 

▲북파 공작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SC부대원

 

그리고 중국어, 한국어가 능통했기에 무장공작대원 70명은 전방에 배치되어 중공군을 만나면 중국어를 사용하고 북한군을 만나면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적들의 부대, 인원, 위치같은 첩보수집을 하며 때로는 요인암살, 납치, 파괴공작까지 완벽하게 펼쳤습니다. 이들이 적진에 들어가면 10명중 3명만 살아 돌아올 정도로 위험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특히 서부전선에서의 전투와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1953년 9월에 SC지대가 해체되기 전까지 많은 공적들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부대 해체 당시 무장공작대원 생존자는 20명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끝까지 군에 남아 중공군 포로 설득과 대북 방송 중국어 파트 등과 심리전 등에서 근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군번도 한국인도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과 혜택없이 서서히 잊혀졌습니다. 그나마 1971년 부대원 53명이 종군기장을 받았고 75년에 10명이 보국포장을 받았으면서 위안이 됐겠지만 화교참전용사로서 끝내 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하였고 대부분의 화교용사들은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화교참전용사들을 위한 추모비 건립이 추진되기도 하였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국적이 어디든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영웅들이 이렇게 잊혀지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우리나라의 적이었던 중공군 유해들은 정성스럽게 송환시켜주면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바친 이들을 위한 추모비가 없다는게 정말 아이러니 한 상황입니다. 대부분 화교참전용사들은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져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고 그들이 원했던 군번없는 용사들의 공적비와 국립묘지 안장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왜 중국으로 가지 않았냐고? 허허, 내 피로 지킨 이 땅이 바로 내 고향이고 나도 한국사람과 다를 바 없어. 국적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화교참전용사 지건반씨가 2003년 한 잡지사와 인터뷰에서 남긴말-

 

자유대한민국을 지켰던 무명용사들이여.. 감사합니다...그리고 미안합니다..

 

한국군에서 유일한 대(對)테러 전문부대인 707특임대는 88서울올림픽 개최와 관련, ‘국가 대테러활동지침’이 제정된 1982년에 창설됐습니다. 특전사 예하 여타의 공수부대들과 달리 특전사령관 직속인 이 부대는 1개의 고공지역대와 1개의 해상지역대, 2개의 특공지역대로 구성돼 있습니다.

 

 

707특임대는 사실 한국군 최초의 대테러 부대인 606특공부대를 본떠 만들어졌습니다. 1978년 창설된 606부대는 청와대 경호실 직속으로 비밀스럽게 운용되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직후 소리 없이 사라진 비운의 부대입니다. 707부대는 신문이나 방송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며 인터넷에 들어가면 이 부대와 관련된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606부대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렵고 언론에 소개된 적도 없습니다. 그 정도로 이 부대의 존재는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606부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이며 그 계기는 1977년 10월에 발생한 독일 민항기 루프트한자 납치 사건입니다. 1977년 10월13일 승객 86명을 태운 루프트한자 여객기가 권총과 수류탄을 든 테러범 4명에 의해 공중 납치됐었습니다. 남녀 각 2명씩인 테러범들은 여객기를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 강제 착륙시키고는 RAF(Red Army Faction·적군파) 재소자 전원 석방을 요구했습니다.

 

 

관제탑 협상팀과 납치범들 사이에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독일의 대테러 특수부대인 GSG-9 요원들이 비밀리에 기체에 접근하였고 섬광탄을 터뜨리며 기내에 진입한 이들은 5분 만에 납치범들을 제압하고 승객 전원을 구해냈습니다. 승객 중에는 경상자가 3명 있었을 뿐 단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었으며 범인 4명 중 3명은 사살됐고 1명은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됐습니다.

 

 

GSG-9은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있었으며 40여 개 국가에서 대테러 특공대를 만들기 위해 GSG-9에 협조를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대테러 특수부대 창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창설 요원은 전원 특전사 소속이며 특전사 예하 각 여단에서 무술 고단자와 사격 특기자를 중심으로 뽑았습니다. 이들은 공군항공의료원에서 정밀 신체검사를 받고 엄격한 신원조회를 거쳐 606특공부대로 전입시켰습니다.

 

 

그렇게 모인 606부대원들은 기존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원들보다 훨씬 센 훈련을 받았습니다. 무술훈련, 사격훈련, 낙하훈련, 항공기 침투 훈련이 대종을 이뤘는데, 골절환자가 속출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이었다고 합니다. 606부대원들은 하나같이 무술 유단자였지만 매일 몇 시간씩 무술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606부대원들이 익힌 무술이 바로 실전무술, 혹은 살상무술로 불리는 특공무술입니다.

 

 

항공기 침투 훈련은 606부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훈련이었습니다. 부대의 주된 임무가 항공기 납치범을 제압해 인질을 구출하는 것이니만큼 가장 중요한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대한항공에서 제공한 낡은 비행기가 훈련 대상이자 훈련 장소였습니다. 부대원들은 매일 밤 이 비행기를 납치된 비행기라고 가정하고 침투하는 훈련을 되풀이했습니다.

 

 

또한 특수부대인 만큼 구보 등 체력 강화 훈련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이틀에 한 번씩 총기를 지니고 배낭에 30㎏의 모래주머니를 넣은 채 10㎞를 달렸으며 무장구보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모래주머니의 무게를 다시 재는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었다고 합니다. 606부대부대원들은 이처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세계 최고의 대테러부대를 꿈꾸었습니다.

 

 

5공 출범 후 606부대는 대통령 경호와 대테러 두 가지 임무를 병행하였으며 부대 이름도 제27특공부대로 바뀌었습니다. 대테러 훈련보다는 경호 업무 비중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에 대비해 경찰특공대가 만들어지면서 606부대는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부대가 해체되었으며 부대원들은 대부분 ‘고향’인 특전사로 돌아갔습니다.

 

 

606부대 출신 이봉상 예비역 소령은 606부대 같은 대테러 전문부대가 해체된 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금 현재 707부대도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긴 하지만 606부대만큼 인질 구출을 위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606부대원들은 극약 사용법과 특수무기 사용법, 요인 암살 훈련까지 받았지만, 707부대엔 이런 훈련 내용이 없다고 합니다. 좋은 뜻으로 만들어졌는데 제대로 쓰이지도 못한 채 해체된 606부대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