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현존 최강의 공격 헬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분들이 AH-64D 아파치 공격 헬기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미 육군의 계획대로만 됬다면 지금 이야기할 RAH-66 코만치가 최강의 타이틀을 차지 했을 것입니다. 코만치라는 애칭은 미국 육군 헬기 작명 전통대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부종중 하나인 코만치족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RAH-66 코만치는 본래 경공격 헬기인 AH-1 코브라와 정찰 헬기인 OH -58 을 대체하기 위한 경공격 및 정찰 헬기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제작사인 보잉 시코르스키 사는 이 헬기를 단순히 정찰/경공격 헬기로만 개발하진 않았습니다. 당시의 최신의 스텔스 기술과 지금까지의 헬기 제작 기술을 총 동원하여 탄생한 코만치의 시제기는 가히 공격헬기의 혁명이자 헬기계의 F 22 랩터라고 불릴 만한 헬기였습니다. 일단 무엇보다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이 헬기의 독특한 스텔스 외형이었습니다. 최대한 각진 외형과 무기를 내부에 수납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레이다 반사 면적을 최소화 했습니다. 또 금속제가 아닌 복합소제로 만든 외피는 레이더 반사를 최소화 시킵니다. 결과적으로 이 헬기는 AH 64 아파치보다 레이더 반사를 663분의 1이나 줄일 수 있었고 적외선은 2.75분의 1, 소음은 1.6분의 1 수준으로 낮춰 생존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래 전장에서 보다 생존성을 높일 수 있는 설계인 것입니다. 또 코만치 헬기는 뜨거운 배기 가스를 테일 로터에 공기에 섞어서 버리는 신기술을 통해 적의 열추적 미사일을 따돌리는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헬기의 가장 큰 적인 휴대용 미사일에 대한 대비도 잘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코만치 헬기는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아파치 헬기보다 작은 헬기지만 무장에 있어서도 크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벼운 헬기에 강력한 엔진을 달아서 많은 무기를 달고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 무장으로 XM 301 20mm 포와 내부의 무장 수납 공간과 외부의 보조 날개를 포함 총 14개의 헬파이어 미사일이나 혹은 28개의 스팅어 미사일, 혹은 56발의 2.75인치 히드라 로켓포를 탑재할 수 있습니다. 

 

 

또 아파치 보다 30% 가벼운 복합 소제 기체에 엔진 파워는 아파치 보다 10% 작을 뿐이여서 아주 민첩하고 기동성이 빠릅니다. 측면 비행과 후진속도는 무려 120km/h가 넘었는데 현재 제식화된 공격 헬리콥터 중 가장 빠른 Ka-50 호컴이 100km/h가 넘는 수준이란걸 생각하면 가히 엄청난 성능이였습니다.

 

코만치의 최초 시제헬기는 95년에 제작되었고 이후 두번째 시제기는 98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본래 계획은 정찰 헬기였지만 최신 기술을 집적해 만들다 보니 성능도 향상되고 가격도 같이 뛰게 되어 결국 AH 64 아파치 헬기까지 교체할 차세대 공용 헬기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 육군은 2000년 340억 달러의 거금을 들여 1213기의 코만치 헬기를 확보하려 했으나 이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일단 예산이 자꾸 삭감되면서 650기로 생산댓수가 줄었습니다.

 

 

그러면서 가격은 점차 상승하여 유닛당 가격은 2400만 달러에서 3200만 달러가 되었으며 생산 댓수가 줄어듬에 따라 개발비를 포함한 대당 단가가 치솟아 나중엔 무려 8100만 달러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 헬기가 기존의 교체하고자 하는 헬기보다 너무 비싸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가의 헬기로 악명을 떨치는 아파치 헬기를 능가하는 가격이 되어 버렸고 미 육군은 최소 819기의 코만치를 원했지만 미의회와 예산부처는 난색을 표명했습니다.

 

 

끝내 2004년 미 육군과 의회는 결국 코만치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냥 기존의 헬기를 개량해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이 AH-64D 아파치가 도전자 코만치를 물리치고 공격헬기계의 챔피온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 이유입니다. 결국 코만치는 최소되고 F -22 랩터는 살아남은 이유는 결국 육군과 공군에서의 중요도의 차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F 22 또한 비용이 급상승 하면서 취소 이야기가 여러차례 나왔었지만 F-22가 아니면 전투기 전력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기 어려운 미 공군 입장에서 F-22 는 포기하기 어려운 전투기였습니다. 하지만 미 육군은 코만치 헬기가 없이도 미 육군은 압도적이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엄청난 성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때문에 날지 못한 비운의 헬기로 남게되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후에 상륙한 10군단을 워커 8군(낙동강 방어선) 밑으로 넣지 않고 그대로 경쟁시키며 진격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렇게 10군단은 동부전선, 8군은 서부전선으로 나뉘어 진격하다가 중공군의 대대적인 역습에 큰 피해를 입고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됩니다. 일선 지휘관들은 중공군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경보를 계속 울렸지만 최고사령부가 완전히 무시했고 중공군의 포위망 안으로 병력을 밀어넣는 오판을 하고맙니다. 그 중에서 가장 참담했던 장진호 전투 그리고 전멸당하고도 언급조차 안되는 부대 이야기입니다.

 

 

 

위 그림을 보시면 한국전쟁 당시 최정예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망 안에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진호에서 해병부대만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미 제7 보병사단 기동부대 맥클린은 군단의 우익을 방어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잘 알려지지않았으며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이 없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붉은 색 화살표가 있는 지역이 맥클린 기동부대의 위치입니다. 이 부대는 포병, 대공포와 차량을 갖춘 3개 대대, 총 3,200명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맥클린 기동부대는 해병대에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해병대는 2차대전을 겪은 역전의 용사들인 반면에 맥클린 기동부대는 훈련이 되지 않은 병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병대는 방한복을 잘 갖춰입은 반면에 맥클린 부대는 영하 30도 아래의 기온에서도 면군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왼쪽이 맥클린 대령, 오른쪽이 페이스 중령)
맥클린 부대는 1950년 11월 27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정찰소대를 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 밤, 중공군 사단병력이 산개된 방어선 안으로 쏟아져들어왔습니다. 첫날밤 전투에서 1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튿날 맥클린은 모든 병력을 불러들였고 페이스 중령에게 퇴각로인 방어선 남쪽을 보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페이스는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얼어붙은 장진호 반대편의 사격을 받았습니다. 그와 부대원은 대응사격을 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맥클린은 아군의 오인사격이라고 생각하고 얼음판 위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공군의 사격을 받아 쓰러졌고 중공군이 와서 쓰러진 그를 끌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맥클린 부대는 페이스 부대가 되었습니다. 새 지휘관이 된 페이스 중령은 방어선을 제대로 정비하고 해병 전폭기의 화력지원과 탄약보급을 받으며 버텼습니다. 그렇게 버티면서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후방의 모든 부대가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포위된 페이스 부대는 이제 자력으로 장진호에서 빠져나가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페이스는 부상병을 트럭에 싣고 후방으로 향하는 위험한 길에 나섰습니다. 얼어붙은 장진호를 건널 것인지 아니면 꼬불거리는 산악로를 따라 내려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페이스 중령은 장진호의 얼음이 너무 얇아서 트럭이 건널 수 없다고 보고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개활지에서 몸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바로 중공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는데 중공군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를 벌이다 보니 지원을 나온 미 전폭기가 아군과 중공군 사이에 네이팜탄을 터뜨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온몸이 화염에 뒤덮인 병사들이 땅에 구르고 동료들이 불을 끄려고 했지만 인화물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트럭은 부상자로 가득찼고 규율이 무너지면서 장진호로 도망치는 병사들이 속출했습니다.

 


밤이 되자, 페이스 중령은 퇴로에 사격을 퍼붓고 있는 고지 1221을 점령하고 퇴로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페이스 중령은 총을 쥘 수 있는 부상병까지 모아 고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고지로 올라간 병사들은 중공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당황스럽게도 돌아오지 않고 산을 넘어 남쪽으로 향했고 페이스 부대의 나머지 병력과 트럭은 그대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밤 전투 그리고 병력이탈로 전력이 크게 약해진 페이스 부대는 날이 새면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중공군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버려지는 트럭이 늘어갔고 갈수록 도로봉쇄망이 두터워졌습니다. 버려진 미군전차로 중공군이 막고있는 도로를 도저히 뚫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페이스 부대의 최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밝으면서 중공군은 얼마 남지 않은 페이스 부대에게 달려들어 트럭 안에 수류탄을 던져넣고 나머지 병사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제 남은 탈출로는 장진호 얼음판이었습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얼음 위로 기어갔고 반대편 해병대가 달려와서 그들을 구조하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3,200명 중 겨우 385명이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페이스 부대의 비극과 분투는 많은 시간이 흘러스 재조명되었으며 1999년 페이스 부대에 훈장을 수여했고 2000년에는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가 해병대의 초대를 받아 장진호 전투 행사에 참석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자료에서 그들의 희생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