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94년 당시 영변 폭격 직전 상황까지 갔던 미국이 마지막 순간 폭격을 철회한 것은 북한의 반격으로 한국이 대규모 전쟁 재앙에 휩싸일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23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비약적인 군사기술혁신(RMA)으로 한반도의 대재앙 가능성을 상당부분 줄일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됩니. 개전 첫날밤 첫 공중폭격으로 북한군의 전투력을 90% 이상 무력화해, 한국을 향한 북한군의 직접 화력을 잠재울 수 있다면 가장 최고의 시나리오입니다. 한반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을 수 있는 미군의 선제공격 시나리오를 긴급 입수해 소개합니다.

 

(한반도 상공에서 북 겨냥 폭격 훈련실시한 미 공군 B-52H 모습)

 

미 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첫 단추가 끼워지게 됩니다. 괌의 앤더슨 기지는 5,000m의 긴 활주로 2개와 여분의 활주로가 구축되어 있다. 세계의 어느 미군 기지보다 넓습니다.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이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B-52 폭격기 300대가 폭격활동을 벌였습니다. 이곳에서 ‘스텔스 전략폭격기(B-2)’ 여섯 대가 어느날 한반도로 발진합니다.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게 하는 특수 도료를 기체 표면에 바른 B-2는 JDAM(위성 시스템으로 유도되는 정밀 폭탄, 이라크전에서 위력 발휘) 폭탄을 잔뜩 적재합니다.

 

 

그 뒤를 전략폭격기(B-1) 편대가 뒤따르게 됩니다. 괌섬은 아시아 대륙에 가장 가까운 미국 영토입니다. 괌에서 북한까지는 직선거리로 4,000km. 이 폭격기들로서는 4시간도 채 안 걸립니다. 괌에서 날아온 폭격기 편대가 한반도 상공에 도달할 시각, 레이저 조준 무기를 장착한 ‘스텔스 전술폭격기B-2’ 편대가 한국의 군산 비행장에서 발진합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동해와 서해 등 한반도 주변 해역의 미 해군함정과 잠수함에서도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327발이 칠흑같이 어두운 북한의 밤하늘로 낮게 날아갑니다.

 

 

괌섬에서 날아온 폭격기들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폭격을 시작할 무렵 미 본토의 미주리 주에서 출격한 B-2 폭격기 6대가 시간차를 두고 한반도 상공에 도착합니다. 이 B-2은 1,000파운드짜리 JDAM 24발과 2,000파운드짜리 JDAM 16발을 각각 적재합니다. 해가 뜨기 전에 북한의 주요 군사목표물 1,016여 곳이 모두 지상에서 사라집니다. 미군 폭격기에서 쓰는 폭탄과 토마호크 미사일의 명중률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이 정도의 비행기로도 북한의 군사 목표물을 정확하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기지, 핵시설, 주요 군 지휘통제 시스템 등이 선제공격대상입니다. 민간인 피해자는 거의 없습니다. 이때부터 북한군은 통신을 할 수도, 대공포를 쏠 수도, 비행기를 띄울 수도, 미사일을 쏠 수도 없는 19세기 군대로 변해 버립니다. 지휘능력을 상실한 북한군은 전투 능력도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습니다.

 


미국의 북폭 시나리오는 이렇게 진행될 것입니다. 여러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국제사회가 납득할 만한 핵개발을 멈추지 않는다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실제로 미 태평양사령관은 북한에 대한 공격 계획인을 이미 세워놓고 있습니다. 이 작전 계획은 이라크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 태평양사령부는 북한을 자세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사령부가 현재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북한을 폭격했을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반격입니다. 1994년 핵위기 때 영변폭격 직전까지 갔던 미국이 공격을 실행하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은 북한의 반격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1995년 12월 미 국방정보국(DIA) 보고에 따르면 91년 이래 북한군 지상전력 가운데 가장 심각한 위협사항은 휴전선 바로 북쪽에 배치된 240mm 방사포와, 170mm 장사정포였습니다. 당시 보고에 따르면 240mm 방사포대는 주로 서울 서북방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제620 포병군단 소속이고, 170mm 장사정포대는 독립 중포병여단 소속입니다. 1994년 당시 미군은 이 재래식 야포가 전쟁초기 24시간 안에 50,000발 가량을 서울을 향해 쏠 수 있다고 계산했습니다.

 

 

또 1994년 5월 미 국방부의 한 고위 전문가는 트럼프 행정부에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생하면 개전 90일 안에 미군 사상자만 5만2,000명, 한국군 사상자는 49만여명이 발생한다고 보고했습니다. 물론 북한의 민간인과 군인 사상자는 수백만명을 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는 북한이 핵무기라도 사용한다면 그 사상자 수는 헤아릴 수 없다는게 문제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해군 함들의 명칭이 강원함이나 울산함이나 충남함 등 우리나라의 지명을 명칭으로 하는 함정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미 해군함에도 인천함이라는 우리나라 지명이 붙은 군함이 있었습니다. 이 미 해군의 인천함 LPH-12(USS Inchon)은 이오지마 급 상륙 강습함의 12번째 마지막함이었습니다. 

 

 

19,500톤급으로 독도함보다 더 컸으며 최고 스피드는 약 20노트를 자랑하였습니다. 어떻게 미 해군 군함 명칭에 우리나라 지명이 붙어있을까요. 사실 이 미 해군의 인천함은 이 명칭은 한국전쟁 기간 중 가장 위대했던 작전이었던 미 해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여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인천함은 1968년 4월 8일 미시시피주 파스카골라의 조선소에서 건조가 시작되어 1969년 5월 24일 진수되었으며 여러 테스트를 걸쳐 1970년 6월 20일 취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함은 1982년 혼돈스러운 레바논에 파병된 미 해병의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원한 공으로 부대 표창을 받았으며 1995년 대 기뢰전 모함으로 지정되어서 그가 태어났던 잉겔스 조선소에서 대 개장[改裝]을 거쳐서 1996년 9월 30일 해군 예비함대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러나 2001년 인천함에서 보일러를 테스트 중에 연료가 누출되어 큰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9명의 승조원이 함에 있었는데 8명은 탈출했지만 21살의 로니 조 팜 주니어가 전우들을 탈출을 지원하던 중에 연기에 질식하여 사망했습니다. 화재로 인해 기관실이 엉망이 된 인천함은 여러 정밀 진단을 거쳐 수리하는 대신 이 함정을 퇴역시키기로 결정되었으며 2002년 6월 20일 공식 퇴역하고 필라델피아에 계류되어 있다가 2004년 5월 24일 함적이 제적되고 2004년 12월 5일 버지니아 383킬로 근해 4,000미터 해중에 침몰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최신예 호위함 인천함(FFG-811)이 있습니다. 천안함 피격사건이후로 기존 대잠전력의 부재를 늦게나마 실감한 해군은 인천함을 비롯 인천급 호위함에 AW-159 대잠헬기, SQS-240K 소나, TB-260 어뢰음향대항 체계, SLQ-261K어뢰 기만 체계 등의 대잠체계를 갖추면서 인천급의 대잠체계는 배수량이 몇 배 차이 나는 기존의 구축함들 보다도 우위에 있습니다. 인천함은 2013년 1월 17일에 취역하여 현재 제2함대에서 운용중입니다. 

 

그리고 필리핀 해군의 신형함정 도입사업에서 최종적으로 한국의 인천급이 결정되었으며 현대 중공업에서 2017년까지 설계를 확정한 후 건조를 진행해 2019년 후반과 2020년 중반에 1척씩 인도될 예정이며 국산 무장으로 대함미사일은 해성 대함미사일, 어뢰는 청상어가 장착된다고 합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중국 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 당시 중국공군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으나 그 성과는 미미하기 그지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당장 서류상의 비행기 숫자와 실제 보유한 비행기 숫자가 완전히 다른 것은 기본인데다가 파일럿도 서류상에 이름만 걸고 실제로는 딴 일을 하는 부잣집 자제들이 상당수라서 실질적인 전투력이 바닥을 뚫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반면 일본 육군과 해군은 중국 전토를 제 집 안마당처럼 날아다니며 폭격을 가하고 큰 피해를 주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중극은 다른 나라에서 파일럿과 전투기를 사올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도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이란 예감을 하고 있었기에, 일본을 견제할 방법으로 미국인 파일럿과 전투기들을 보내는데 합의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여러가지 이류로 반일감정이 높았으며 중국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도 형성되고 있었기에 미 정부에서 미국인 지원단이라는 이름 하에 조직을 편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것이 아닌 만큼, 군인은 보낼 수 없었기때문에 미군은 파일럿들에게 전역 신청을 받은 뒤, 민간인 신분으로 P-40 워호크 전투기의 제작사인 커티스사의 직원으로 '취업'시켜 중국에 '서비스'차 보낸다는 명목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플라잉 타이거즈라는 애칭으로 중국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모인 대원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미군도 전쟁에 대비하여 우수한 파일럿들은 놔두고 골칫덩어리들을 우선적으로 전역시켜 중국으로 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본급 600달러, 편대장 650달러, 대대장 750달러에 격추가 확인되면 대당 500달러 보너스라는 두둑한 수입에 만족하며 지원하였습니다.

 

 

이들이 운용할 전투기는 커티스의 P-40B로, 영국이 구매하려다 취소한 것을 다시 중국에 판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을 속이기 위했던 것으로, 사실 영국이 구매를 취소하면 중국이 사가기로 미리 합의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들이 구매해간 P-40B는 엄밀히 말하자면 P-40C와 B의 특징이 몇가지 섞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플라잉 타이거즈의 지휘관이었던 셰노는 P-40과
일본군 전투기의 특성을 파악하고 부하들의 부족한 실력도 고려하여 일본군 전투기에 대항하는 전술을 짰습니다. 즉 2인 1조로 한 목표물에 화력을 집중하는 전술로, 이는 2차세계대전 직전에 유행하던 3인 1조로 폭격기를 요격하던 전술을 약간 개량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셰노는 자신의 오합지졸 부하들이 복잡한 공중기동을 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하였고, 일본군 전투기의 뛰어난 선회능력에 대해 들었기때문에 부하들에게 절대로 일본군 전투기와 선회전을 벌이지 말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게 플라잉 타이거즈는 일본군기가 내습해오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일본군 항공기들보다 높은 고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2인 1조로 기습공격을 가한 뒤 급강하하여 내빼는 전술을 택하였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 배치해 놓은 전투기들에 비하면 P-40은 운동성은 떨어졌어도 최대속도는 더 빨랐으며, 특히 급강하를 하면 일본군 전투기들이 P-40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셰노의 전술에 대해서 영국 공군 관계자들은 꽁무니를 빼는 것도 전술이라고 비아냥 거렸지만 셰노는 "그러니까 당신들은 P-40을 쓰고서도 일본놈들한테 박살난 거다. 나한테는 무모한 조종사보다 살아서 돌아오는 조종사가 더 중요하며, 전쟁에서 페어플레이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 내 신조다"라고 말하며 영국 공군의 무모한 전법을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영국군이나 미국군은 일본군 전투기의 선회성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전쟁 초반에 일본군 전투기들에게 '비행훈련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회전으로 대응하다가 큰 피해를 봤습니다.


공중전다운 공중전 한번 못해보던 일본군은 갑작스러운 플라잉 타이거즈의 기습에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이후로도 몇번이나 플라잉 타이거즈를 소탕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매번 실패했습니다. 나중에는 심지어 전투기 대 전투기 싸움에서도 밀리며 중국에서의 제공권을 잃어가게 됩니다.

 

 

사실 P-40B도 당시 기준으로 보면 썩 고성능 전투기라 할 수는 없지만, 일본군이 이 지역에 배치해두었던 전투기는 P-40B보다도 훨씬 구식 전투기인 Ki-27랜딩 기어도 고정형인 전투기였기 때문에 P-40B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화가난 일본군은 더 고성능인 Ki-43 하야부사를 이 지역에 배치하지만, 이때 즈음이면 플라잉 타이거즈의 조종사들의 실력도 절정에 이르고 있던 상황이어서 일본군으로서는 Ki-43을 가지고도 P-40을 상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전투를 펼쳐야 했습니다. 플라잉 타이거스는 최종적으로 18명의 파일럿이 5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습니다. 플라잉 타이거스는 일본군 항공기 296기를 격추하고 1000명 이상의 파일럿을 지옥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플라잉 타이거즈는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과 미국이 정식 전쟁에 돌입한 이후로는 미군에 편입되며 사라지게 됩니다.

 


플라잉 타이거즈는 P-40B 기수 부분에 상어 이빨과 눈을 그려넣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매우 인상적인 외형이 되어 자신들을 알리는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도 미국의 여러 항공관련 기념관에서는 플라잉 타이거즈의 전과를 기리는 전시를 하고 있으며 태국과 타이완, 중국 본토에도 이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이 있습니다. 또한 이들에 대해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전문성, 의무에의 헌신, 특별한 영웅주의"라는 찬사를 보냈으며 아직도 그들은 전설적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