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쿠바 위기, 베트남전, 걸프전 등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순간마다 미국 군사력을 상징해온 항공모함이 바로 사라토가호 USS Saratoga (CV-60)입니다. 사라토가호는 냉전이 한창이던 1956년 취역해 1994년 퇴역한 사라토가호는 길이 324m, 폭 76.3m의 비행갑판, 시속 35노트(70㎞), 탑재 함재기 70~90대, 탑승 승무원 5,500명의 대형 항공모함이였습니다.

 

 

이 사라토가호는 중동과 인연이 정말 깊었습니다. 베트남전 이후 한동안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이 항모가 다시 유명해진 것은 1986년 이탈리아 여객선 아킬레 라우르호 납치사건때문이였습니다. 당시 지중해를 항해 중이던 여객선을 4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이 탈취하였고 납치되어있던 유대계 미국인 탑승객을 살해하면서 지중해 해역을 담당하는 6함대 소속 사라토가호가 긴급출동하였습니다.

 

 

사건 중재에 나선 이집트 정부는 테러범들의 신병을 넘겨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테러범들을 여객기에 탑승시켜 이들의 최종 목적지였던 튀지니행을 허용하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미국은 사라토가호에서 F-14 톰캣 전투기를 발진시켰고 이후 튀니지로 향하고 있던 테러범들의 여객기를 공중납치해 이탈리아의 사고넬라 미군기지로 강제 착륙시켰으며 그 다음 테러범의 체포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여객기 내에는 테러범들의 호송 임무를 맡은 이집트의 최정예 특수부대 777부대원들도 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은 미 대통령의 특명으로 현장에서 테러범 제압을 기도하던 미 합동특수전사령부 소속 데브그루 요원들과 이집트의 777부대원들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까지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의 강력한 요구로 테러범들의 신병은 이탈리아로 넘겨졌으며 데브그루 요원들은 결국 빈손으로 현장에서 철수하게 되었으며 이 사건의 주범이었던 아부 아바스는 결국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후인 2003년 4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외곽에서 JSCO에 체포되게 됩니다.

 

 

이 뿐만아니라 사라토가호는 일명 '사막의 폭풍작전'으로 잘 알려진 1991년 걸프전에서도 홍해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라토가는 취항 직후 독일 화물선과 충돌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사고를 겪었습니다. 특히 1987년 사라토가호에서 발진한 톰캣 전투기가 오인 발사한 공대공 미사일로 미 공군 소속 RF-4C 정찰기를 격추했으며 걸프전 직전에는 이스라엘 하이파 근처에서 승무원들을 태운 운반선 사고로 21명이 목숨을 읽기도 하였습니다.

 

(우측이 사라토가호)

이후 시간이 지나 미 해군은 퇴역한 사라토가호를 해상 군사 박물관으로 사용하려고 했으나 예산 문제로 실행하지 못한 채 고철 덩어리로 남겨두었다가 2014년 폐선 처리 전문업체 ESCO 마린사에게 해체 비용 약 10원을 주고 계약하면서 미국 군사력의 상징이었던 사라토가호는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67년전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워 북한이 기습 남침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에 열세였던 우리 국군은 전차는 물론, 이를 막아낼 대전차 무기도 없이 T-34 전차의 위력에 밀려 순식간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습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당일 미국에 전투기 지원요청을 했고, 다음날 미국은 극동공군사령부를 통해 F-51D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긴급지원하게 됩니다.

 

(대구 기지에서 찍힌 F-51 무스탕)
당장 26일 긴급소집된 조종사는 수원에서 수송기편으로 일본 이즈다께 기지로 출발했으나 기상상황과 전황악화로 단한번의 비행훈련을 마치고 일주일만에 대구기지에 투입됩니다. 우리나라 공군의 소속된 무스탕 전투기는 다음날인 7월 3일 첫 실전을 치루게 됩니다. 무스탕 편대는 첫 임무부터 동해안 묵호, 삼척지구에서 상륙하는 북한군의 전차와 차량의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왼쪽에서 다섯번째에 이근석 대령과 국민 성금으로 도입한 T-6기 건국호 모습)

우리 공군의 첫 전투기 무스탕은 북한군 T-34앞에 무력하게 당하던 지상군에게 하늘의 수호자, 하늘의 케딜락이라고 불렸습니다. 특히 이근석 대령은 공군의 전설로 불리는데 자신의 전투기가 피격당하자 탈출하지 않고 끝까지 조종간을 잡은 채 적 전차를 향해 돌진해 산화하는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나라 공군사상 최초의 전투기로 기록된 무스탕 전투기는 제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프로펠러 전투기로 당시 최고의 전투기였으며 최고의 프로펠러 전투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제 2차세계대전 당시
비행거리가 다른 전투기들에 비해 매우 길었기 때문에 독일 상공에서 연합군 폭격기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습니다. 우수한 성능을 앞세워 독일 공군의 제트엔진 전투기였던 메서슈미트 Me-262를 격추하기도 했던 우수한 전투기입니다.

 

(F-51 무스탕에 새겨진 신념의 조인)

우리나라 공군은 그런 F-51 무스탕 전투기 총 133대를 도입, 총 8495회 출격했습니다. 당시 한국전쟁 기록사진을 보면 무스탕전투기 기수부분에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라는 글귀가 보이는데 이는 한국공군 조종사의 양성에 기여한 딘 헤스대령이 “신념을 갖고 하늘을 난다”는 뜻을 자신의 무스탕전투기에 새겨 넣으면서 우리공군의 활약을 나타내는 별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군은 무스탕을 이용해 항공전 역사상 가장 힘든 작전으로 꼽히는 승호리 철교폭파작전, 평양대폭격 작전, 351고지지원 작전 등을 성공리에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도 오래전에 생산되었던 F-51 무스탕은 아직까지 280기정도가 남아 국제 항공레이스나 민간 애호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6.25 전쟁은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과거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있을 수 있도록 해준 전쟁당시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고 기리는 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