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미국을 승리로 이끌 조지 C. 마셜 원수가 1943년에 육군성해군성을 통합해야 한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제안은 1947년에 미 국방부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과정 가운데 육군 항공대가 끝끝내 미 공군으로 독립하였고, 행정도 육군과 따로 운영하며 육군에 휘둘리지 않았던 미 해군은 자신들의 존재에 위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공군핵무기를 바탕으로 전쟁의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꿀 기세였습니다.


그렇게 미 공군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미국 정부는 해군 항공대와 해병대 등 해군청 소속의 군사집단을 감축하려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
해군항공모함을 예로 들며 해군의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미 정부와 미 해군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었고 해군장관 출신의 초대 국방장관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은 해군의 주장을 반영하다가 물러나고 해리 트루먼의 측근인 루이스 존슨이 국방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1949년 상반기, 미 해군이 핵폭탄 투하가 가능한 폭격기 운용을 위해 건조에 돌입했던 초대형 항공모함인 USS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SS United States) 함의 건조가 주문한지 하루만에 취소되었습니다. 1949년 3월 28일 당시 국방장관인 존슨이 의회에 상임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해군청장이었던 존 설리번과 루이스 덴펠드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수많은 제독들이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며칠 뒤 국방장관인 존슨은 해병대를 방문해 해병대 항공대의 항공 자산을 공군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미 해군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 계획은 취소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해군청장을 경질하고
제복군인 최선임인 해군참모총장도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그 와중에 전 해군청장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이 우울증으로 입원해 있던 해군병원에서 투신하여 자살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소련의 핵개발이 성공하여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핵전쟁이 벌어질 경우 인류가 멸망한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재래식 무기의 중요성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미 국회는 항공모함을 건조하기로 계획합니다. 게다가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해군과 해병대의 맹활약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해군의 중요성이 다시 인정받아서 해군축소는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이후 해군은 자살한 포레스탈 장관의 명복을 빌고자 재개한 초대형 항공모함 프로젝트를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으로 명명하였고, 이후 하이먼 리코버의 주도로 원자력을 함정의 동력원으로 쓴다는 발상을 내놓아 오늘날의 위엄 돋는 원자력 해군화에 성공하였으며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 전략공군사령부를 운영해 핵무기를 독점하던 공군이 해군의 반격으로 국직부대인 전략사령부(United States Strategic Command; USSTRATCOM)로 통합되어 해군과 공군 대장이 번갈아가며 사령관을 맡게되면서 냉전 초기에 위풍당당했던 미 공군의 위세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현재도 미 해군은 미군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집단으로, 미국 국방예산의 반이 넘어가는 60% 가량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미국의 강대한 힘이 바다로부터 투사되는 막대한 군사력에서 나오는 걸 생각하면 해군을 감축하려했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했으며 현재 미 해군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듯 미 해군 제독들의 노력으로 세계 최강의 미 해군이 완성될 수 있었으며
 미 해군 항공대는 이후 미 해군력의 주축으로서 세계 1위 미 공군에 이어 세계 2위라는 공군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무장공작원을 훈련시켜 북으로 보냈던 HID(Higher Intelligence Department)는 한국군이 미군과 별도로 조직해 만든 첩보부대입니다. 1948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전쟁 당시 활동했던 북파공작원들은 HID의 고유명칭을 육군첩보부대로, 통상명칭을 육군 4863부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HID는 전쟁 당시 약 30개의 부대를 운영했습니다. 당시 국군 15개 사단에 파견대를 두고 있었으며, 전방의 주요지역에는 따로 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제4863부대(HID)소속 부대중에 SC지대라는 부대가 있었습니다. 200명 정도로 구성됐으며 특징은 부대원이 화교인 외인부대라는 것이였습니다. SC란 말 자체는 서울 차이니스(seoul chinese)의 준말로 한국에 체류했던 화교란 뜻입니다. 10주간의 양성훈련 후에 장병들은 12명씩 조를 나눠 육군방첩부대에 분산배치되었습니다.

 

▲북파 공작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SC부대원

 

그리고 중국어, 한국어가 능통했기에 무장공작대원 70명은 전방에 배치되어 중공군을 만나면 중국어를 사용하고 북한군을 만나면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적들의 부대, 인원, 위치같은 첩보수집을 하며 때로는 요인암살, 납치, 파괴공작까지 완벽하게 펼쳤습니다. 이들이 적진에 들어가면 10명중 3명만 살아 돌아올 정도로 위험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특히 서부전선에서의 전투와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1953년 9월에 SC지대가 해체되기 전까지 많은 공적들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부대 해체 당시 무장공작대원 생존자는 20명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끝까지 군에 남아 중공군 포로 설득과 대북 방송 중국어 파트 등과 심리전 등에서 근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군번도 한국인도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과 혜택없이 서서히 잊혀졌습니다. 그나마 1971년 부대원 53명이 종군기장을 받았고 75년에 10명이 보국포장을 받았으면서 위안이 됐겠지만 화교참전용사로서 끝내 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하였고 대부분의 화교용사들은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화교참전용사들을 위한 추모비 건립이 추진되기도 하였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국적이 어디든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영웅들이 이렇게 잊혀지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우리나라의 적이었던 중공군 유해들은 정성스럽게 송환시켜주면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바친 이들을 위한 추모비가 없다는게 정말 아이러니 한 상황입니다. 대부분 화교참전용사들은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져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고 그들이 원했던 군번없는 용사들의 공적비와 국립묘지 안장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왜 중국으로 가지 않았냐고? 허허, 내 피로 지킨 이 땅이 바로 내 고향이고 나도 한국사람과 다를 바 없어. 국적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화교참전용사 지건반씨가 2003년 한 잡지사와 인터뷰에서 남긴말-

 

자유대한민국을 지켰던 무명용사들이여.. 감사합니다...그리고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