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C4I 체계란 Command(지휘), Control(통제), Communication and intelligence(통신과 정보)의 약자인 C3I에 Computer(컴퓨터)가 합쳐져 생긴 약자입니다. 전장에서 지휘관이 성공적인 지휘 및 통제를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시간과 지점, 정확한 정보를 필요하며 통신수단을 이용하여 신속히 정보를 전파 또는 전송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지휘, 통제, 통신 및 정보의 4가지 요소를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전산화함으로써 지휘관이 실시간 작전대응능력을 갖도록 지원하는 체계가 이 C4I라고 할 수 있습니다.

 

C4I 체계는 지휘정보체계와 정보수집체계, 그리고 통신망으로 구성됩니다. 전장의 환경에 따라 공중 지휘통제체계와 해상 지휘통제체계로 나뉘며 지휘 크기에 따라 전략 지휘통제체계와 전술 지휘통제체계로 나뉘고 전술 지휘통제체계는 다시 기능통제체계와 화력지원체계, 방공체계, 군수지원체계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C4I체계의 적용을 기본적인 지상전술체계에 맞추어 설명해본다면, 지상전술 C4I는 전술통신체계 스파이더(SPIDER)를 기반으로 정보보호체계, 56종 7000점의 공통-응용 소프트웨어, 접속 장치, 지원 장비로 구성되며 군단 - 사단 - 연대를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휴대용 위치보고접속장치, 정찰용 무인항공기(UAV), 지상감시 장치, 전자전 장비, 표적 탐지 레이더, 포병대대 전술사격지휘체계, 저고도 탐지 레이더등 정보 수집 자산등과 연동됩니다.

 


이들로부터 수집된 정보를 통해 지휘소에서는 실시간으로 전장의 모든 상황을 낱낱히 육안으로 보게 됩니다. 즉, 무인정찰기가 보내오는 영상이 좌표와 함께, 실시간으로 지휘소에 보고되어 위치보고접속장치를 통해 부대의 위치가 자동적으로 상황도에 표시됩니다. 또 저고도 탐지 레이더에 의해 탐지된 항공기의 항적 역시 상황도에 나타나게 됩니다. 디지털 지도에는 표적들의 거리, 방위각, 이동시간등이 자동적으로 표시되어 나타납니다.

 

 

정보, 작전, 화력, 전투근무지원 등의 참모와 실무 장교들은 컴퓨터에 사전 입력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각종 상황들을 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분석하여 대응 수단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지휘관 또한 이 같은 실시간적인 현황 파악과 참모 협조를 통해 빠르게 지휘 결심한 후 정확하게 명령을 하달해 선제타격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적의 움직임을 인식하여 대응하기까지와의 절차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으며, 육해공군 삼군의 유기적 협력과 정밀타격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C4I 체계는 24시간 동안 중단하지 않고서도 운용이 가능하고 상급 부대와의 연락이 두절되더라도 독립체계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야전의 상황을 고려해 개발함으로써 야전지역에서의 운용성과 생존성 또한 높습니다.

 

 

대표적인 C4I 체계로는 미군이 운용중인 FBCB2-JCR이 존재합니다. 미군은 전차, 장갑차, 수송트럭등에 단말기를 장착하고서 운용중이고, 거의 모든 지상군 전투부대의 C4I 체계 통합을 완료했습니다. 비전투부대와 CAS1를 해당 공역에서 수행하는 헬기와 전투기등에도 이를 적용할 계획입니다.

 


우리 국군의 합동지휘통제체계(C4I)는 육군의 ATICS, 해군의 KNCCS, 공군의 AFCCS로 연계된 체계를 합참과 작전사까지 연계해 지휘통제를 위한 합동지휘통제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국군은 이와는 별개로 KJCCS와 JADOCS2와 연동하여 실시간으로 감시, 결심, 타격이 가능한 JFOW-K체계를 구축함에 따라 합동참모부 중심의 대화력전 수행체계를 확립시켰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군 C4I의 노후화가 심각하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육군이 보유한 전술체계망(ATCIS)서버 499대 가운데 492대(99%)는 기준 수명인 6년 이상 운용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네트워크 장비 1600대도 모두 운용 기간이 기준 수명 7년을 넘어섰으며 노트북 9174대 가운데 3189(34%)도 기준 수명을 초과했으며 이 때문에 육군의 워게임을 실행하면 서버가 다운되거나 전장 정보를 원활하게 공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에 우리 육군은 2018년부터 3294억원을 투입하는 ATCIS 2차 성능 개량 사업으로 노후화한 장비를 교체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2022년에야 끝나기 때문에 일부 서버는 수명 주기의 2.7배인 16년 동안 사용해야 할 상황입니다. 국회도 6년 만에 데스크톱 컴퓨터를 교체한다고 하는데 전시에 24시간 운용하며 표적정보 통합, 화상회의, 감시 및 타격체계 연동 등 두뇌 역할을 하는 핵심장비인 C4I 장비에 대해 더 신경을 써야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빨치산 공비의 정식명칭은 조선인민유격대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대남적화의 선행단계로서 북한 전역을 무력남침을 수행하기 위한 기지로 만들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 조성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군사력을 증강함과 동시에 1949년 7월 월북자를 비롯한 다양한 인원들로 편성된 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렇게 인민유격대는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반란사건으로 진압부대가 호남과 경남 지역에 집중돼 후방경비가 허술해지고 남한사회가 혼란해지자 본격적으로 남한에 침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거의 정규군의 일개 부대와 비슷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가 잘리자 퇴로를 잃어버린 북한군 잔당과 북한의 남한 각 행정부처, 그리고 협력세력들은 퇴로를 잃은 채 무장세력으로 정착됩니다. 이들은 북한이나 서로간의 연계가 거의 되지 않고 각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백선엽 백야전전투사령관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30일 전북 남원시의 정보(G-2)상황실에서 열린 참모회의에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작전지도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

 

각 세력은 행정구역 도 단위로 활동하였는데 경남도당, 경북도당, 전남도당, 전북도당 등 상당수의 세력이 태백산맥에서 뻗어 나온 산들에 터를 잡고 활동하였기 때문에 태백산맥, 그 중에서도 지리산은 빨치산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빨치산은 대한민국 육군과 경찰로 구성된 1차 대공세로 인해 그 위세를 잃었으며 2차 대공세때 완전히 작살나 버려 이후에는 더 이상 조직적인 부대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후 망실공비란 이름으로 경찰서 형사들의 추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자신을 지지해준 조선인민유격대를 정규군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데려갈 생각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난뒤에도 빨치산 세력에게 산에서 내려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만 전해주었을 뿐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측이 정전협정때 제발 조선인민유격대원들을 데려가라고 먼저 제의했는데도 북한측에서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탈북자들 증언에 의하면 조선인민유격대는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존재이며 기껏해야 남조선 내 자발적인 혁명전선, 즉 제2전선으로 불릴뿐이었다고 합니다.

 

(애국심으로 자원해서 빨치산 공비 토벌에 나선 전라도 청년들)

 

1948년 11월부터 6·25전쟁 직전인 1950년 3월까지 모두 10회에 걸쳐 침투해 온 유격대원 수는 무려 2,40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인민유격대는 국군과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2,000여 명이 사살 또는 생포되었지만 나머지 400여 명은 남한 각지의 오지에 틀어박혀 북한의 남침 직전까지 계속 저항하였습니다.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전방 사단의 일부와 후방 3개 사단을 포함해 총 4개 사단병력과 경찰병력을 토벌작전에 투입하였습니다.

 

(빨치산 공비 토벌에 나서 지리산 정상까지 소탕에 성공하여 태극기를 게양한 모습)

 

1955년 4월 1일이 되서야 지리산 입산통제가 해제되어 누구나 지리산 등반에 나설 수 있게 됐으며 정부는 1955년 5월 23일 빨치산 토벌이 종료됐음을 정식으로 발표했습니다. 마지막 빨치산 테러분자 정순덕은 민가에서 밥이나 훔쳐먹는 망실공비 수준으로 지내다 1963년 11월 12일 오전 11경에 총격전 끝에 체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