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현대전은 스마트 전쟁으로 불리지만 아직도 많은 전장에서는 구형 무기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개발 당시의 성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구형 무기들은 현대적인 무기들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꾸준한 성능개량을 거쳐 현대전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무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 미 육군 제식 병기로 등록되면서 많은 관심을 받는 무기가 바로 칼 구스타프 무반동포입니다.

 

 

칼 구스타프 무반동포는 스웨덴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시제품이 개발된 이후 꾸준한 개량을 통해 능력을 향상해 왔습니다. 1948년, 스웨덴군이 8.4cm ‘그라나트게바Granatgevär m/48’이라는 제식명으로 채택했으며 칼-구스타프 M1으로도 불렀습니다. 이후 유럽 각국에서 분대급 대전차무기로 채택하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개량형인 M2 버전이 발표되었고 기존에 사용하던 탄은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 M1 버전을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육상자위대에서 1979년부터 제식화기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84년까지는 스웨덴에서 직도입했으나 이후 호와 공업에서 라이센스 제작하고 있습니다. M2 버전은 표적별 사거리가 이동표적 150m, 고정표적 700m로 M67 무반동포의 이동표적 200m, 고정표적 300m와 비교하여 고정표적 사거리는 훨씬 길었습니다.

 


1991년 발표된 M3 버전은 얇은 강철제 포신을 탄소섬유로 감쌌고 일부 외장품은 알루미늄 합금이나 플라스틱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미 육군 제 75레인저 연대가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 육상자위대에서도 M3가 배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 9월 최신 버전인 M4가 사브 보포스社에 의해 공개되었습니다. M2/M3에서 거의 완성된 무기이니만큼 큰 변경점은 보병이 조작하기 쉽도록 중량을 7kg 미만으로 줄이고 길이를 약간 감소, 신형 광학장비를 다는 정도의 소소한 개량이 이루어졌습니다.

  

 

칼 구스타프는 위에 설명처럼 꾸준하게 개량됐지만 84mm라는 구경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벼운 중량 외에 운영국들이 선호하는 이유로는 다양한 탄약 종류를 꼽을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개발된 탄약은 대전차용 2종류, 건물파괴 등 다목적용 3종류, 대인용 2종류, 연막탄과 조명탄 등 지원용 2종류, 총 11가지 실탄과 훈련탄 5종류를 갖추고 있습니다.

 


칼 구스타프가 운용하는 탄들은 장갑차량용 HEAT탄과 HE탄이 있으며, 이중목적 고폭탄HEDP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현대전장에 필수적인 탄약이 개발되면서 효용성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 동안 무반동총들은 포신 뒤로 분출되는 엄청난 화염으로 인해 건물 내부 등 밀폐된 공간에서의 사용에 제약이 많았습니다.

 

 

사브 보포스社는 이 문제를 해결할 신형 탄약 개발에 착수하였고 2013년 12월 HEAT 655 CS 포탄을 발표했습니다.

 

 

이렇듯 칼 구스타프 무반동포는 뛰어난 성능과 비교적 작은 사이즈, 가벼운 무게로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지금까지도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2009년에 라이센스 도입을 시도했었지만 예산 문제로 무산되면서 도입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칼 구스타프 최신 버전 M4를 사브 보포스社에서 우리 대한민국 특수전사령부에 도입 제안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단군의 요술봉이라고 불리우는 현궁은 Fire & Forget 물론 탑어택도 가능한 3세대 대전차 미사일에 해당하는데, 3세대부터는 너무 비싸서 대전차 이외의 용도로 쓰기에는 매우 꺼려질수밖에 없는게 현실입니다. 또한 현재 우리의 주적인 북한은 3세대 전차가 없으며 1세대 2,000대 2세대 1,800대가 전부입니다. 개인적으로 칼 구스타프는 한국군에게도 잘 어울리는 무기라고 생각됩니다

 

1994년 당시 영변 폭격 직전 상황까지 갔던 미국이 마지막 순간 폭격을 철회한 것은 북한의 반격으로 한국이 대규모 전쟁 재앙에 휩싸일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23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비약적인 군사기술혁신(RMA)으로 한반도의 대재앙 가능성을 상당부분 줄일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됩니. 개전 첫날밤 첫 공중폭격으로 북한군의 전투력을 90% 이상 무력화해, 한국을 향한 북한군의 직접 화력을 잠재울 수 있다면 가장 최고의 시나리오입니다. 한반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을 수 있는 미군의 선제공격 시나리오를 긴급 입수해 소개합니다.

 

(한반도 상공에서 북 겨냥 폭격 훈련실시한 미 공군 B-52H 모습)

 

미 국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첫 단추가 끼워지게 됩니다. 괌의 앤더슨 기지는 5,000m의 긴 활주로 2개와 여분의 활주로가 구축되어 있다. 세계의 어느 미군 기지보다 넓습니다.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이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B-52 폭격기 300대가 폭격활동을 벌였습니다. 이곳에서 ‘스텔스 전략폭격기(B-2)’ 여섯 대가 어느날 한반도로 발진합니다.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게 하는 특수 도료를 기체 표면에 바른 B-2는 JDAM(위성 시스템으로 유도되는 정밀 폭탄, 이라크전에서 위력 발휘) 폭탄을 잔뜩 적재합니다.

 

 

그 뒤를 전략폭격기(B-1) 편대가 뒤따르게 됩니다. 괌섬은 아시아 대륙에 가장 가까운 미국 영토입니다. 괌에서 북한까지는 직선거리로 4,000km. 이 폭격기들로서는 4시간도 채 안 걸립니다. 괌에서 날아온 폭격기 편대가 한반도 상공에 도달할 시각, 레이저 조준 무기를 장착한 ‘스텔스 전술폭격기B-2’ 편대가 한국의 군산 비행장에서 발진합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동해와 서해 등 한반도 주변 해역의 미 해군함정과 잠수함에서도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327발이 칠흑같이 어두운 북한의 밤하늘로 낮게 날아갑니다.

 

 

괌섬에서 날아온 폭격기들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폭격을 시작할 무렵 미 본토의 미주리 주에서 출격한 B-2 폭격기 6대가 시간차를 두고 한반도 상공에 도착합니다. 이 B-2은 1,000파운드짜리 JDAM 24발과 2,000파운드짜리 JDAM 16발을 각각 적재합니다. 해가 뜨기 전에 북한의 주요 군사목표물 1,016여 곳이 모두 지상에서 사라집니다. 미군 폭격기에서 쓰는 폭탄과 토마호크 미사일의 명중률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이 정도의 비행기로도 북한의 군사 목표물을 정확하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기지, 핵시설, 주요 군 지휘통제 시스템 등이 선제공격대상입니다. 민간인 피해자는 거의 없습니다. 이때부터 북한군은 통신을 할 수도, 대공포를 쏠 수도, 비행기를 띄울 수도, 미사일을 쏠 수도 없는 19세기 군대로 변해 버립니다. 지휘능력을 상실한 북한군은 전투 능력도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습니다.

 


미국의 북폭 시나리오는 이렇게 진행될 것입니다. 여러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국제사회가 납득할 만한 핵개발을 멈추지 않는다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실제로 미 태평양사령관은 북한에 대한 공격 계획인을 이미 세워놓고 있습니다. 이 작전 계획은 이라크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습니다.

 

 

미 태평양사령부는 북한을 자세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사령부가 현재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북한을 폭격했을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반격입니다. 1994년 핵위기 때 영변폭격 직전까지 갔던 미국이 공격을 실행하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은 북한의 반격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1995년 12월 미 국방정보국(DIA) 보고에 따르면 91년 이래 북한군 지상전력 가운데 가장 심각한 위협사항은 휴전선 바로 북쪽에 배치된 240mm 방사포와, 170mm 장사정포였습니다. 당시 보고에 따르면 240mm 방사포대는 주로 서울 서북방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제620 포병군단 소속이고, 170mm 장사정포대는 독립 중포병여단 소속입니다. 1994년 당시 미군은 이 재래식 야포가 전쟁초기 24시간 안에 50,000발 가량을 서울을 향해 쏠 수 있다고 계산했습니다.

 

 

또 1994년 5월 미 국방부의 한 고위 전문가는 트럼프 행정부에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생하면 개전 90일 안에 미군 사상자만 5만2,000명, 한국군 사상자는 49만여명이 발생한다고 보고했습니다. 물론 북한의 민간인과 군인 사상자는 수백만명을 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는 북한이 핵무기라도 사용한다면 그 사상자 수는 헤아릴 수 없다는게 문제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해군 함들의 명칭이 강원함이나 울산함이나 충남함 등 우리나라의 지명을 명칭으로 하는 함정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미 해군함에도 인천함이라는 우리나라 지명이 붙은 군함이 있었습니다. 이 미 해군의 인천함 LPH-12(USS Inchon)은 이오지마 급 상륙 강습함의 12번째 마지막함이었습니다. 

 

 

19,500톤급으로 독도함보다 더 컸으며 최고 스피드는 약 20노트를 자랑하였습니다. 어떻게 미 해군 군함 명칭에 우리나라 지명이 붙어있을까요. 사실 이 미 해군의 인천함은 이 명칭은 한국전쟁 기간 중 가장 위대했던 작전이었던 미 해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여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인천함은 1968년 4월 8일 미시시피주 파스카골라의 조선소에서 건조가 시작되어 1969년 5월 24일 진수되었으며 여러 테스트를 걸쳐 1970년 6월 20일 취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함은 1982년 혼돈스러운 레바논에 파병된 미 해병의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원한 공으로 부대 표창을 받았으며 1995년 대 기뢰전 모함으로 지정되어서 그가 태어났던 잉겔스 조선소에서 대 개장[改裝]을 거쳐서 1996년 9월 30일 해군 예비함대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러나 2001년 인천함에서 보일러를 테스트 중에 연료가 누출되어 큰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9명의 승조원이 함에 있었는데 8명은 탈출했지만 21살의 로니 조 팜 주니어가 전우들을 탈출을 지원하던 중에 연기에 질식하여 사망했습니다. 화재로 인해 기관실이 엉망이 된 인천함은 여러 정밀 진단을 거쳐 수리하는 대신 이 함정을 퇴역시키기로 결정되었으며 2002년 6월 20일 공식 퇴역하고 필라델피아에 계류되어 있다가 2004년 5월 24일 함적이 제적되고 2004년 12월 5일 버지니아 383킬로 근해 4,000미터 해중에 침몰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최신예 호위함 인천함(FFG-811)이 있습니다. 천안함 피격사건이후로 기존 대잠전력의 부재를 늦게나마 실감한 해군은 인천함을 비롯 인천급 호위함에 AW-159 대잠헬기, SQS-240K 소나, TB-260 어뢰음향대항 체계, SLQ-261K어뢰 기만 체계 등의 대잠체계를 갖추면서 인천급의 대잠체계는 배수량이 몇 배 차이 나는 기존의 구축함들 보다도 우위에 있습니다. 인천함은 2013년 1월 17일에 취역하여 현재 제2함대에서 운용중입니다. 

 

그리고 필리핀 해군의 신형함정 도입사업에서 최종적으로 한국의 인천급이 결정되었으며 현대 중공업에서 2017년까지 설계를 확정한 후 건조를 진행해 2019년 후반과 2020년 중반에 1척씩 인도될 예정이며 국산 무장으로 대함미사일은 해성 대함미사일, 어뢰는 청상어가 장착된다고 합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중국 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 당시 중국공군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으나 그 성과는 미미하기 그지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당장 서류상의 비행기 숫자와 실제 보유한 비행기 숫자가 완전히 다른 것은 기본인데다가 파일럿도 서류상에 이름만 걸고 실제로는 딴 일을 하는 부잣집 자제들이 상당수라서 실질적인 전투력이 바닥을 뚫을 정도로 낮았습니다.

 

 

반면 일본 육군과 해군은 중국 전토를 제 집 안마당처럼 날아다니며 폭격을 가하고 큰 피해를 주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중극은 다른 나라에서 파일럿과 전투기를 사올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도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이란 예감을 하고 있었기에, 일본을 견제할 방법으로 미국인 파일럿과 전투기들을 보내는데 합의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여러가지 이류로 반일감정이 높았으며 중국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도 형성되고 있었기에 미 정부에서 미국인 지원단이라는 이름 하에 조직을 편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것이 아닌 만큼, 군인은 보낼 수 없었기때문에 미군은 파일럿들에게 전역 신청을 받은 뒤, 민간인 신분으로 P-40 워호크 전투기의 제작사인 커티스사의 직원으로 '취업'시켜 중국에 '서비스'차 보낸다는 명목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플라잉 타이거즈라는 애칭으로 중국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모인 대원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미군도 전쟁에 대비하여 우수한 파일럿들은 놔두고 골칫덩어리들을 우선적으로 전역시켜 중국으로 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본급 600달러, 편대장 650달러, 대대장 750달러에 격추가 확인되면 대당 500달러 보너스라는 두둑한 수입에 만족하며 지원하였습니다.

 

 

이들이 운용할 전투기는 커티스의 P-40B로, 영국이 구매하려다 취소한 것을 다시 중국에 판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을 속이기 위했던 것으로, 사실 영국이 구매를 취소하면 중국이 사가기로 미리 합의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들이 구매해간 P-40B는 엄밀히 말하자면 P-40C와 B의 특징이 몇가지 섞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플라잉 타이거즈의 지휘관이었던 셰노는 P-40과
일본군 전투기의 특성을 파악하고 부하들의 부족한 실력도 고려하여 일본군 전투기에 대항하는 전술을 짰습니다. 즉 2인 1조로 한 목표물에 화력을 집중하는 전술로, 이는 2차세계대전 직전에 유행하던 3인 1조로 폭격기를 요격하던 전술을 약간 개량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셰노는 자신의 오합지졸 부하들이 복잡한 공중기동을 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하였고, 일본군 전투기의 뛰어난 선회능력에 대해 들었기때문에 부하들에게 절대로 일본군 전투기와 선회전을 벌이지 말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게 플라잉 타이거즈는 일본군기가 내습해오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일본군 항공기들보다 높은 고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2인 1조로 기습공격을 가한 뒤 급강하하여 내빼는 전술을 택하였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 배치해 놓은 전투기들에 비하면 P-40은 운동성은 떨어졌어도 최대속도는 더 빨랐으며, 특히 급강하를 하면 일본군 전투기들이 P-40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셰노의 전술에 대해서 영국 공군 관계자들은 꽁무니를 빼는 것도 전술이라고 비아냥 거렸지만 셰노는 "그러니까 당신들은 P-40을 쓰고서도 일본놈들한테 박살난 거다. 나한테는 무모한 조종사보다 살아서 돌아오는 조종사가 더 중요하며, 전쟁에서 페어플레이 따위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 내 신조다"라고 말하며 영국 공군의 무모한 전법을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영국군이나 미국군은 일본군 전투기의 선회성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전쟁 초반에 일본군 전투기들에게 '비행훈련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회전으로 대응하다가 큰 피해를 봤습니다.


공중전다운 공중전 한번 못해보던 일본군은 갑작스러운 플라잉 타이거즈의 기습에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 이후로도 몇번이나 플라잉 타이거즈를 소탕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매번 실패했습니다. 나중에는 심지어 전투기 대 전투기 싸움에서도 밀리며 중국에서의 제공권을 잃어가게 됩니다.

 

 

사실 P-40B도 당시 기준으로 보면 썩 고성능 전투기라 할 수는 없지만, 일본군이 이 지역에 배치해두었던 전투기는 P-40B보다도 훨씬 구식 전투기인 Ki-27랜딩 기어도 고정형인 전투기였기 때문에 P-40B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화가난 일본군은 더 고성능인 Ki-43 하야부사를 이 지역에 배치하지만, 이때 즈음이면 플라잉 타이거즈의 조종사들의 실력도 절정에 이르고 있던 상황이어서 일본군으로서는 Ki-43을 가지고도 P-40을 상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전투를 펼쳐야 했습니다. 플라잉 타이거스는 최종적으로 18명의 파일럿이 5기 이상을 격추한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습니다. 플라잉 타이거스는 일본군 항공기 296기를 격추하고 1000명 이상의 파일럿을 지옥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플라잉 타이거즈는 진주만 공습으로 일본과 미국이 정식 전쟁에 돌입한 이후로는 미군에 편입되며 사라지게 됩니다.

 


플라잉 타이거즈는 P-40B 기수 부분에 상어 이빨과 눈을 그려넣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매우 인상적인 외형이 되어 자신들을 알리는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도 미국의 여러 항공관련 기념관에서는 플라잉 타이거즈의 전과를 기리는 전시를 하고 있으며 태국과 타이완, 중국 본토에도 이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이 있습니다. 또한 이들에 대해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전문성, 의무에의 헌신, 특별한 영웅주의"라는 찬사를 보냈으며 아직도 그들은 전설적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의 육군은 북쪽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삼면의 바다를 향해서도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얼룩무늬 제복을 입은 육군이 경비정을 타고 푸른 바다의 파도를 가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경계 임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알고계셨나요? 바다의 육군이라 불리는 육군경비정 부대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육군경비정 부대가 바다에서 사용하는 군함은 바로 PBR-15입니다. 20t급으로 해군 기준의 정(500t 미만)보다도 한참 작은 규모의 배이나 작은 덩치 탓에 수심 1.5m의 수영장 깊이 정도의 수상에서도 활동이 가능하며 다른 군함에 비하면 엄청난 빠른 속도(최대35knot)를 자랑합니다. 또한 최대 운항시간은 8시간이며 K6 중기관총 1정, M60경기관총 1정, K2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장점으로 인해 주로 북한 반잠수정 격침작전 같은 대간첩 작전에 참여하여 왔고, 1998년 북한 반잠수정 침투 사건 당시 육상 초소 TOD와 연계하여 북한군 반잠수정을 탐지해내고, 또 2005년 중국에서 밀입국하는 선박을 단속해내는 혁혁한 공을 세워왔습니다. 평소에는 크기가 작고, 육군 소속이기 때문에 해안선에서 5.5km까지의 작전구역 제한선 이상 못 벗어나는 철저한 연안 경계 임무를 주로 맡으며 잠수함(정)이나 적군 수중침투를 감시하는 매복 초계작전을 펼칩니다.

 

 

정장과 부정장 등 간부가 경비정의 운용을 담당하는데 육군임에도 항해사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보통 정장은 중사 수준에서 보임되고, 물론 당연한 거지만 부사관은 진급 상한선이 있기에 준위가 최종계급입니다. 승조원은 8명으로 보통 부사관과 병사들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북한 경비정보다는 좋지만....)

하지만 배가 노후화되고 침실이 부족해 겉구조, 중량, 엔진, 조타실, 사통체계, 기관실과 침실, 탐지, 방호성능 등의 개수가 필요하단 말이 많은 상황인데 2017년에는 다량의 육군 경비정이 퇴역하게 되므로 연·해안 경비전력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해안경계를 대한민국 해군으로 완전 이관하면 끝나는 문제지만 부유물과 진흙이 많은 지역이나 얕은 1.5m 수심에서 기동이 가능한 함정이 거의 전무하며, 있기는 해도 짧은 시간밖에 운항하거나 기동할 수 없는 고속단정이기에 신형 경비정이 필요해보입니다.

 

 

육군경비정 부대는 해안선과 감시, 밀입국 선박 단속과 대간첩 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군의 연안 감시 전력이자, 육군의 참수리이자 어떤 의미로 주변국과 전시상황에는 최전방 JSA, GOP부대, 비무장지대 수색대와 해군 2함대 다음으로 후방 속의 전방 부대입니다.

아! 마지막으로 육군도 군함이 있는데 공군도 설마 있을까? 라는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겁니다. 공군에도 배를 타는 공군병이 있습니다. 공군방공유도탄사령부 소속의 사격지원대에서 바다에 표적기 회수하러 가는 항해병(실제 보직명)이 있습니다,

 

현존 최강의 공격 헬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많은 분들이 AH-64D 아파치 공격 헬기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미 육군의 계획대로만 됬다면 지금 이야기할 RAH-66 코만치가 최강의 타이틀을 차지 했을 것입니다. 코만치라는 애칭은 미국 육군 헬기 작명 전통대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부종중 하나인 코만치족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RAH-66 코만치는 본래 경공격 헬기인 AH-1 코브라와 정찰 헬기인 OH -58 을 대체하기 위한 경공격 및 정찰 헬기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제작사인 보잉 시코르스키 사는 이 헬기를 단순히 정찰/경공격 헬기로만 개발하진 않았습니다. 당시의 최신의 스텔스 기술과 지금까지의 헬기 제작 기술을 총 동원하여 탄생한 코만치의 시제기는 가히 공격헬기의 혁명이자 헬기계의 F 22 랩터라고 불릴 만한 헬기였습니다. 일단 무엇보다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이 헬기의 독특한 스텔스 외형이었습니다. 최대한 각진 외형과 무기를 내부에 수납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레이다 반사 면적을 최소화 했습니다. 또 금속제가 아닌 복합소제로 만든 외피는 레이더 반사를 최소화 시킵니다. 결과적으로 이 헬기는 AH 64 아파치보다 레이더 반사를 663분의 1이나 줄일 수 있었고 적외선은 2.75분의 1, 소음은 1.6분의 1 수준으로 낮춰 생존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미래 전장에서 보다 생존성을 높일 수 있는 설계인 것입니다. 또 코만치 헬기는 뜨거운 배기 가스를 테일 로터에 공기에 섞어서 버리는 신기술을 통해 적의 열추적 미사일을 따돌리는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헬기의 가장 큰 적인 휴대용 미사일에 대한 대비도 잘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코만치 헬기는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아파치 헬기보다 작은 헬기지만 무장에 있어서도 크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벼운 헬기에 강력한 엔진을 달아서 많은 무기를 달고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본 무장으로 XM 301 20mm 포와 내부의 무장 수납 공간과 외부의 보조 날개를 포함 총 14개의 헬파이어 미사일이나 혹은 28개의 스팅어 미사일, 혹은 56발의 2.75인치 히드라 로켓포를 탑재할 수 있습니다. 

 

 

또 아파치 보다 30% 가벼운 복합 소제 기체에 엔진 파워는 아파치 보다 10% 작을 뿐이여서 아주 민첩하고 기동성이 빠릅니다. 측면 비행과 후진속도는 무려 120km/h가 넘었는데 현재 제식화된 공격 헬리콥터 중 가장 빠른 Ka-50 호컴이 100km/h가 넘는 수준이란걸 생각하면 가히 엄청난 성능이였습니다.

 

코만치의 최초 시제헬기는 95년에 제작되었고 이후 두번째 시제기는 98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본래 계획은 정찰 헬기였지만 최신 기술을 집적해 만들다 보니 성능도 향상되고 가격도 같이 뛰게 되어 결국 AH 64 아파치 헬기까지 교체할 차세대 공용 헬기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 육군은 2000년 340억 달러의 거금을 들여 1213기의 코만치 헬기를 확보하려 했으나 이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일단 예산이 자꾸 삭감되면서 650기로 생산댓수가 줄었습니다.

 

 

그러면서 가격은 점차 상승하여 유닛당 가격은 2400만 달러에서 3200만 달러가 되었으며 생산 댓수가 줄어듬에 따라 개발비를 포함한 대당 단가가 치솟아 나중엔 무려 8100만 달러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 헬기가 기존의 교체하고자 하는 헬기보다 너무 비싸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고가의 헬기로 악명을 떨치는 아파치 헬기를 능가하는 가격이 되어 버렸고 미 육군은 최소 819기의 코만치를 원했지만 미의회와 예산부처는 난색을 표명했습니다.

 

 

끝내 2004년 미 육군과 의회는 결국 코만치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냥 기존의 헬기를 개량해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고 이것이 AH-64D 아파치가 도전자 코만치를 물리치고 공격헬기계의 챔피온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 이유입니다. 결국 코만치는 최소되고 F -22 랩터는 살아남은 이유는 결국 육군과 공군에서의 중요도의 차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F 22 또한 비용이 급상승 하면서 취소 이야기가 여러차례 나왔었지만 F-22가 아니면 전투기 전력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기 어려운 미 공군 입장에서 F-22 는 포기하기 어려운 전투기였습니다. 하지만 미 육군은 코만치 헬기가 없이도 미 육군은 압도적이였습니다. 결국 그렇게 엄청난 성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때문에 날지 못한 비운의 헬기로 남게되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후에 상륙한 10군단을 워커 8군(낙동강 방어선) 밑으로 넣지 않고 그대로 경쟁시키며 진격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렇게 10군단은 동부전선, 8군은 서부전선으로 나뉘어 진격하다가 중공군의 대대적인 역습에 큰 피해를 입고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됩니다. 일선 지휘관들은 중공군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경보를 계속 울렸지만 최고사령부가 완전히 무시했고 중공군의 포위망 안으로 병력을 밀어넣는 오판을 하고맙니다. 그 중에서 가장 참담했던 장진호 전투 그리고 전멸당하고도 언급조차 안되는 부대 이야기입니다.

 

 

 

위 그림을 보시면 한국전쟁 당시 최정예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망 안에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장진호에서 해병부대만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미 제7 보병사단 기동부대 맥클린은 군단의 우익을 방어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잘 알려지지않았으며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이 없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붉은 색 화살표가 있는 지역이 맥클린 기동부대의 위치입니다. 이 부대는 포병, 대공포와 차량을 갖춘 3개 대대, 총 3,200명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맥클린 기동부대는 해병대에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해병대는 2차대전을 겪은 역전의 용사들인 반면에 맥클린 기동부대는 훈련이 되지 않은 병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병대는 방한복을 잘 갖춰입은 반면에 맥클린 부대는 영하 30도 아래의 기온에서도 면군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왼쪽이 맥클린 대령, 오른쪽이 페이스 중령)
맥클린 부대는 1950년 11월 27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정찰소대를 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 밤, 중공군 사단병력이 산개된 방어선 안으로 쏟아져들어왔습니다. 첫날밤 전투에서 1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튿날 맥클린은 모든 병력을 불러들였고 페이스 중령에게 퇴각로인 방어선 남쪽을 보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페이스는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얼어붙은 장진호 반대편의 사격을 받았습니다. 그와 부대원은 대응사격을 했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맥클린은 아군의 오인사격이라고 생각하고 얼음판 위로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공군의 사격을 받아 쓰러졌고 중공군이 와서 쓰러진 그를 끌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맥클린 부대는 페이스 부대가 되었습니다. 새 지휘관이 된 페이스 중령은 방어선을 제대로 정비하고 해병 전폭기의 화력지원과 탄약보급을 받으며 버텼습니다. 그렇게 버티면서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후방의 모든 부대가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포위된 페이스 부대는 이제 자력으로 장진호에서 빠져나가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페이스는 부상병을 트럭에 싣고 후방으로 향하는 위험한 길에 나섰습니다. 얼어붙은 장진호를 건널 것인지 아니면 꼬불거리는 산악로를 따라 내려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페이스 중령은 장진호의 얼음이 너무 얇아서 트럭이 건널 수 없다고 보고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개활지에서 몸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바로 중공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는데 중공군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를 벌이다 보니 지원을 나온 미 전폭기가 아군과 중공군 사이에 네이팜탄을 터뜨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온몸이 화염에 뒤덮인 병사들이 땅에 구르고 동료들이 불을 끄려고 했지만 인화물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트럭은 부상자로 가득찼고 규율이 무너지면서 장진호로 도망치는 병사들이 속출했습니다.

 


밤이 되자, 페이스 중령은 퇴로에 사격을 퍼붓고 있는 고지 1221을 점령하고 퇴로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페이스 중령은 총을 쥘 수 있는 부상병까지 모아 고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고지로 올라간 병사들은 중공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당황스럽게도 돌아오지 않고 산을 넘어 남쪽으로 향했고 페이스 부대의 나머지 병력과 트럭은 그대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밤 전투 그리고 병력이탈로 전력이 크게 약해진 페이스 부대는 날이 새면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중공군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버려지는 트럭이 늘어갔고 갈수록 도로봉쇄망이 두터워졌습니다. 버려진 미군전차로 중공군이 막고있는 도로를 도저히 뚫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페이스 부대의 최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밝으면서 중공군은 얼마 남지 않은 페이스 부대에게 달려들어 트럭 안에 수류탄을 던져넣고 나머지 병사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제 남은 탈출로는 장진호 얼음판이었습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얼음 위로 기어갔고 반대편 해병대가 달려와서 그들을 구조하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3,200명 중 겨우 385명이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페이스 부대의 비극과 분투는 많은 시간이 흘러스 재조명되었으며 1999년 페이스 부대에 훈장을 수여했고 2000년에는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가 해병대의 초대를 받아 장진호 전투 행사에 참석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자료에서 그들의 희생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8월까지 북태평양에서 태풍이 10~12개 정도 발생해 이 중 2개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합니다. 평균적으로 여름철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태풍은 2.2개입니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강한 바람과 비를 피해 차량을 안전하게 보관하는데 성공하지만 태풍 후 자동차 점검에 소홀하면 태풍 후유증으로 인한 2차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때문에 태풍 후 자동차 점검을 꼭 해야합니다.

 

 

아무리 자동차를 안전한 곳에 보관한다고 해도 습기로부터는 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차내의 습기는 자동차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각종 전기장치들의 결함을 유발해 돌발 상황의 위험을 높일 수 있고,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합선, 퓨즈 단선이나 엔진 이상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습한 여름철에는 에어컨, 와이퍼 등 자동차의 전기에너지 사용량이 커져 여느 때보다 방전될 확률도 높습니다. 또 습기가 차량 내에 남아있으면 곰팡이 등 세균이 번식하기 쉬어 건강마저 해칠 수 있습니다. 이에 장시간 동안 비온 뒤에는 차량의 습기관리가 필수입니다.

 

 

차량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닛을 열고 배터리의 케이블을 분리한 후, 트렁크를 비롯해 모든 차문을 열고 햇볕에 건조시켜주면 됩니다. 정비소를 찾아 압축공기를 이용해 습기를 날려버린 후 햇볕에 건조시키면 좀 더 빠르게 습기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태풍 후 보통 맑은 날씨가 이어지는데, 이때 낮 동안 주차 시 창문을 2cm 정도 열어두고 통풍을 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여기에 트렁크와 바닥매트에 신문지를 깔아두면 습기제거에 도움이 됩니다.

 

 

차량 내 곰팡이는 먼지와 함께 기관지 건강 악화의 주범이 될 수 있으며 습기를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장시간 운전을 할 경우 감기 또는 기관지염 등에 걸릴 수 있으니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바람에 날린 작은 돌이나 이물질들이 전면부 유리를 상하게 할 수 있기때문에 유리창에 금이 간 곳은 없는지 전면유리창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태풍이 온다면 침수된 적이 있었던 장소에는 차량 주차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강변이나 하천, 교량 밑은 가급적 주차하지 않는 것이 예방책입니다. 수해 발생시 빠른 시간 내에 고지대 혹은 견인이 가능한 지역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엔진이나 변속기 등 차량 내 주요 부품에 물이 들어가 심각한 손상을 입을 확률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차를 할때는 차량 전면이 출구를 향하게 하는 것이 유사시 차량을 빠르게 이동시키기에 수월합니다.

 

 

그리고 만약 차량이 침수 피해를 입었을 경우 절대 시동을 켜서는 안 됩니다. 차를 빨리 옮겨야 한다는 조급하고 당황한 마음에 시동을 걸어버리면 오히려 엔진 내부로 물이 유입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보닛을 열어 배터리 단자를 분리하고, 이후 전자제어장치, 엔진오일, 필터류, 변속기 오일 등의 오염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또 엔진룸과 차내에 유입된 이물질은 압축공기와 세척제를 이용해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쩔 수 없이 침수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시속 20km 이하로 최대한 서행해 엔진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리고 침수된 차량은 자동차보험의 '자기차 손해 담보'에 가입돼있어야 보험사에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 안에 놓아둔 물품은 보상받을 수 없습니다. 문이나 선루프 등을 열어놔 침수가 됐다면 자기 과실로 인정, 보상에서 배제된다고 하니 꼭 명심하세요!

 

대한민국 육군특공대북한군이 20만에 달하는 특수부대를 보유하면서 우리나라 국가안보에 큰 심리적 부담요인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효율적인 국군의 명령체계 하에서 운용 가능하고, 작계지역 침투•정찰감시•타격 및 탐색격멸을 주임무로 하는 특공대를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육군의 특공대는 특수전사령부 소속이 아니고 통합된 사령부도 없고, 여러 개의 '특공 부대'가 각 상위 부대 하에 있습니다. 각 군사령부 예하에 후방지역작전부대인 특공여단이 소속돼있고, 각 군단 예하에 적지종심작전부대인 특공연대가 소속돼있습니다.

 

 

 

특공연대의 경우 육상침투와 같은 특수전 임무를 수행하며, 특공여단의 경우 공수부대 개념을 잇는 헬기 공중강습(헬리본) 정예 부대입니다. 특공연대의 경우 군단급 임무의 변화로 공지 합동작전까지 담당하며 임무의 다양화와 전문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군 GP가 점령당했을 때 GP탈환작전을 실행합니다.


 

   제201특공여단

 

경북 경산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황금독수리 부대라고 부릅니다. 제201특공여단은 2군사령관의 직속 부대답게 후방에 위치했음에도 신막사 전환이 빨랐고 각종 지원 보급 역시 빵빵한 편이며, 이슈가 되는 행사등에 동원 되는 일이 많은데다 심지어 대통령 경호작전에도 동원됩니다. 대체적으로 후방 부대들에 비해 훈련 양이 많고, 행군 거리도 상당하며, 짬이 찬 병사들은 20Km 행군정도는 3-4시간안에 웃으면서 주파합니다.
유격은 대체로 3사관학교의 유격장인 화산 유격장에서 받게되는데 1주일 받기도 힘든 유격훈련을 2013년도 부터 1달간 실시한다고 합니다.


 

   제203특공여단

 

제2작전사령부 소속에 용호 부대입니다. 이 부대는 특이하게도 1999년부터 2005년 사이 육군항공작전사령부 예하 제1공중강습여단으로 재편되었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연예인 신정환정훈병으로 복무한 바 있고 앙골라로 파병도 갔다왔습니다. 참고로 고문관이라 부대에서 앙골라로 보내버렸다는 말도 떠돌긴 하는데, 해외파병은 100% 지원제이며, 여러가지 심사를 거쳐 선정되는 되다가, 파병이 결정되고 강도높은 훈련을 받습니다.  


 

   700특공연대

 

수도군단 소속으로 충의특공부대, 올빼미 부대로 불리며 원래 708이었는데 700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위수지역이 서울이기에 아주 좋은 출타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701특공연대

 

제1군단 소속으로 경기도 파주에 위치해있으며 비호 부대라고 부릅니다. 현재 간부개편으로 인해 병사체계가 아니며, 간부화작업으로 특전사 인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개 대대와 연대본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개 대대마다 3개 지역대 및 대대본부/본부중대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연대 사격장이 산을 넘어가야 있기 때문에 산을 타고 사격하러 가며 부대 뒤에 박달산이 있어 대부분의 훈련은 박달산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702특공연대

 

제2군단 소속으로 불사조 부대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부대는 1982년 국군의 날에 만들어진 최초의 특공연대 중 하나입니다. 이 부대의 출신자들이 각 특공연대의 모태가 되어 각 군단의 특공연대가 되었습니다. 진짜사나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천하장사인 이태현이 이 부대의 천리행군 마지막 코스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703특공연대

 

제3군단 소속으로 인제에 위치하여 있으며 불사조 부대/가리산 부대로 불리며 유명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투입되었습니다. 703특공연대는 북한군 경보병 여단에 대응하기 위해 창설됐으며 특전사 하사관 일부 병력과 702특공연대 1개 대대 그리고 예하 각 사단 수색대대 병력으로 1983년 4월에 창설되었습니다.


 

   705특공연대

 

제5군단 소속으로 표범 부대라 불립니다. 이 부대도 702특공연대와 마찬가지로 1982년 국군의 날에 만들어진 최초의 특공연대 중 하나입니다. 가수 에디킴(김정환)이 이 부대 출신이며 에디킴이 소속됐던 1대대는 독립대대이며, 군단유격장을 관리하며 군단의 모든 유격훈련 담당하고 있습니다. 2대대가 국군 처음으로 전통무술 특화부대가 됐는데, 덕분에 1대대는 특공무술 특화대대로 편성되었습니다. 1대대는 또한 국군 처음으로 미해병대의 전장순환운동(Combat Circuit Training)을 시범도입했었습니다.


 

   706특공연대

 

제6군단 소속으로 흑표범 부대라고 불립니다. 1983년 705특공대 및 수색대 보병부대를 주축으로 창설되었습니다. 1994년 9월 제6군단이 기동군단으로 개편될때 6강습대대로 같이 개편되었으나 2000년 10월 제6군단이 원상복귀되면서 6강습대대도 706특공연대로 원상복귀된 역사가 있습니다. 인기 드라마 아이리스 1화에서 이병헌의 707특임대 시절 장면을 촬영하는 등 미디어에 자주 등장한 부대이기도 합니다.

 

현존하는 각종 군용기에서 가장 독특한 비행 방식을 가진 오스프리의 탄생은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에 벌어진 작전이 계기가 되는데 1979년에 벌어진 이란 혁명으로 테에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 점령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1980년 4월 24일에 미국 대사관의 인질을 구출하기 위한 이글 크로우 작전(Operation Eagle Claw)을 개시합니다.

 

 

이글 크로우 작전이 벌어지는 테헤란으로 진입하기 위해 작전팀 델타포스, 미 육군 레인저, 독일 주둔 제10 특수전 그룹에 13명의 시가전 점문팀까지 가세해 작전팀 200명이 모이게 됩니다. 게대가 미 펜타곤은 미 육군의 헬기를 피하고 항모에 탑재가 가능하다는 이유로 미 해군의 항모 니미츠에서 RH-53D시 스텔리온을 예비기에 포함하여 8대를 배정하고 제공권 확보를 위해 F-14를 준비하고 미 공군은 MC-130 6대, AC130E/H 4대, C-141 2대를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RH-53D 시 스텔리온은 항속거리와 속도가 부족하였고 그 때문에 비행코스 중간의 사막에 착륙해서 재급유를 받는 중간 집결지인 데저트 원을 설정하였고 특수전 부대는 4월 24일 오후 10시에 데저트 원에 도착하였지만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니미츠에서 이륙한 RH53D는 사막의 모래폭풍에 휘말려 1대는 불시착하였고 1대는 다시 귀환하였으며 다머지 6대는 각각 다른 방향에서 최대 1시간 30분이나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예정이 어긋나버렸습니다.

 

 

결구 이글 크로우 작전은 즉각 중지되었는데 제저트 원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C-130수송기의 옆에서 연료를 가득 채운 RH-53 3호 헬기가 C-130의 터보프롭엔진이 일으킨 후류에 휘말려 델타 대원들을 태운 C-130에 충돌하며 대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이글 크로우 작전은 취소되었고 인명피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 작전의 여파로 미국의 특수전 체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특수전 헬기에 새로운 요구사항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미군은 1981년 JVX(Joint-service Vertical take-off/landing Experimental) 계획을 시작하게 되었고 벨과 보잉사가 합작한 팀이 개발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온 해결책이 바로 틸트 로터(Tilt Rotor)방식이었는데 틸트로터 방식은 로터(Rotor)의 방향이 바뀌는(Tilt) 비행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날개 양끝에 엔진을 장착시킨 프로펠러를 위/아래로 회전시켜 수직 이착륙과 고속 비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헬기와 고정익 터보프롭기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개발한 새로운 기체는 기존 XV-15를 기초로 크기를 늘린 형태가 되었고 1985년 1월부터 V-22라는 재식명칭이 부여되고 미 해병대가 주도하고 미 해군과 미 육군이 참가하여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하였고 1988년에 V-22 오스프리의 시제 1호기가 완성되엇습니다. 그렇게 개발이 시작된지 25년이 지난 2006년 오스프리 실전 비행대의 편성이 이루어졌고 2007년에 미 해병대와 미 공군의 실전 비행다가 처음으로 배치되었습니다.

 

 

헬기보다는 터보프롭기에 가까운 외형을 가진 V-22 오스프리 틸트로터기의 최대 장점은 헬기는 따라올 수 없는 고속 기동성능과 고정익 터보프롭기는 할 수 없는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항공기입니다. 이 V-22 오스프리가 고속 기동성능과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것은 6200마력 이상의 출력을 자랑하는 롤스로이스 앨리슨 AE1107C 터보샤프트 엔진을 2기나 장착하고 있기때문입니다.

 

 

V-22 오스프리 틸트로터기의 순항속도는 446km/h, 최고속도는 510km/h를 발휘하는데 CH-53과 비교하면 무려 2배에 달하는 속도이고 최대 항속거리는 무려 8,889km로 CH-53의 3배가 넘는 수치이며 V-22 오스프리는 CH-53보다 더 멀리 비행할 수 있고 목표지점에 CH-53 슈퍼 스텔리온의 절반 정도의 시간에 도착할 수 있으며 중간에 적에게 공격당할 확률도 감소하여 생존성도 높습니다.

 

 

V-22 오스프리의 탑재능력은 병력용 좌석을 탑재하면 24명까지 탑승할 수 있으며 최대 32명의 전투병력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화내의 기내 탑재량은 전투임무인 경우에는 4.5톤이며 최대 9톤까지 탑재할 수 있으며 기체 외부의 후크로 6.8톤까지 매달아 공수가 가능합니다.

 

 

이렇듯 긴 항속거리와 수송기와 헬기의 역할을 병행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여러 국가에서 꽤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비싼 가격 역시 대규모 양산으로 상당히 떨어지고 있는 상태라, 더더욱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은 도입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2018년까지 17대를 도입하기로 하였고 이스라엘은 2013년에 이미 도입하였습니다. 이외에도 크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나라로는 아랍 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이탈리아, 영국, 노르웨이, 브라질, 콜롬비아, 싱가포르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별 없는 편이라는 게 대체적인 반응입니다. 특수전 소요나 서북 도서 등에서 제2의 위기상황 발생 시 병력 수송과 대규모 주민 대피 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속도와 수송력이 높은 V-22 오스프리는 정말 좋지만 개인적으로도 도입은 힘들어보입니다. 하지만 V-22 오스프리는 2017년 1월부터 군산 미군기지에 오스프리 4대가 배치돼 주야간 비행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