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제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이 완벽하게 패망하자 1945년 4월에 아돌프 히틀러는 자살하였고 5월 7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이후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베를린 분할통치가 시작되었고 4개국은 독일의 행정권, 통치권을 수행하였고 군대는 해산되었으며 숨어있던 나치 독일의 고위급들은 전부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은 나치 독일이 일부 기술에서 미국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고 이 부분의 기술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뉴욕을 공격하기 위한 잠수함 발사 로켓, 대공 미사일, 가변익 제트 항공기, 대륙간 탄도 미사일, 생화학 무기 등 일부 분야에서는 나치 독일이 수년을 더 앞선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이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정말 나치 독일이 조금만 더 많은 자금과 시간이 있었다면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기술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나치 독일은 반중력(Anti-Gravity)에너지와 같은 초과학 기술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대전 당시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비행물체(UFO)에 대한 연구도 진행중이었습니다.

 

 

덕분에 이 나치 독일의 비밀무기 저장소와 각종 도면은 곧바로 미국 백악관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이후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인계 받은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정리와 소련을 견제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수행중이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재빠른 판단을 내렸고 당시 정보기관 임무를 수행했었던 전략사무국 OSS (CIA의 전신)에 임무 떨어졌습니다.

 

 

그 임무는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을 소련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최대한 많이 포섭하는 임무인 페이퍼 클립(Operation Paperclip)의 작전이였고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OSS 요원에게도 페이퍼 클립 작전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OSS는 즉시 임무를 수행할 요원들을 소집, 브리핑 후에 급파 되었고 독일 현지에서 활동중인 OSS 요원들과 접촉하여 페이퍼 클립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OSS 요원들과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미국에 무사히 하면서 페이퍼 클립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사실 이 나치 과학자들 중 2/3가 나치당이나 나치 친위대,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요원이었지만 미국 OSS 요원들이 이들의 전범기록을 삭제함으로서 무사히 미국 입국이 허가되었고 1955년 이후 총 760명 이상이 미국 시민권자로 입국하여 미국 과학계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이 강세를 보인 분야와 독일이 강세를 보인 분야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독일이 항복한 후 2년 동안 미국은 독일에서 전리품으로 기술과 과학 지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이러한 기술의 값어치는 현재 시가로 1000억 달러 수준이며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15조 6000억 원에 이르는 가격에 이르는 정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나치 독일의 Horten Ho229 전투기는 발견되자 노스롭 그루먼 사로 보내져서 시험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소련군에게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생산시설은 파괴되었습니다.

 

 

 

또한 이들 나치 과학자들이 미국 과학계로 진출하고 난 뒤인 1958년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고 초기 직원 8,000명중 나치 독일에서 이주한 과학자들은 대략 500명 가량이 되었는데 이들은 텍사스의 블리스 요새, 뉴멕시코의 화이트샌즈 등에 분산시켜 유도 미사일과 탄도 미사일 기술을 전수받았고 이것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설립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개발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페이퍼 클립 작전은 정말 신의 한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