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미국은 프레데터 무인정찰기를 공격기로 사용한 이후 중동 지역 전쟁에서 정말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런 무인공격기의 성능에 매우 만족해서 프레데터 B 무인공격기를 개발하게 되었고 지금 현재도 자주 운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프레데터 무인기 판매에 만족한 미국의 군수업체 제너럴 아토믹스는 미래에 쓰일 신형 무인기 개발에 나섰는데 그게 바로 프레데터 C 어벤저(Avenger)입니다.

 


프레데터 C 어벤저는 다른 무인기 형제들보다 훨씬 진보한 무인공격기로 스텔스기로 개발되었습니다. 프레데터 C 어벤저 기존 무인기들은 단가 절감을 위해 터보 프롭 엔진을 사용하는데 프레데터 C 어벤저는 스텔스를 추구하다보니 제트엔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 제트엔진을 사용하다보니 추력이 매우 좋아져서 프레데터 B 리퍼 무인기보다  최대이륙중량이 8.255kg으로 MQ-9 리퍼의 최대이륙중량인 4,760kg에 거의 2배 정도 증가하였으며 MQ-9리퍼보다 약 50% 더 빠른 속도를 낼수 있습니다.

 

 

 

프레데터 C 어벤저의 최고속도는 시속 740km 수준이며 넓은 날개 때문에 작전시간이 20시간이나 가능합니다. 상승고도 역시 기존 MQ 시리즈보다 높은 6만피트 상공까지 상승이 가능하여 전반적인 비행특성면에서 이전 무인공격기들을 압도하는 성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텔스특성을 활용하여 차세대 전장에서 방공망이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지역이라도 공격가능합니다. 그리고  전자 광학 센서 시스템 역시 진보하여 F35 전투기에 탑재된 광학타켓팅 시스템인 EOTS 소형버전인 ALERT (Advanced Low-observable Embedded Reconnaissance Targeting)가 탑재되어 지상 공격목표물을 광학적으로 타겟팅하여 공격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Lynx 합성개구레이더를 탑재해서 탐지능력이 굉장히 좋아졌으며 정찰기에 쓰이는 MS-177 다중 분광 카메라를 장착할 수 있어서 정찰기 용도로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데 10km 상공 위에서도 고해상도 촬영이 가능합니다.

 

 

 

특히 프레데터 C 어벤저에는 내부 무장창이 달려 있어서 최대 1600kg의 폭탄과 미사일을 내부에 장착할 수 있고 무인공격기지만 2천 파운드 폭탄을 발사할 수 있습니다. 무장 능력은 전투기 수준으로 엄청납니다. 외부 무장은 최대 6곳으로 기존 무인기보다 2곳 정도 많습니다. 이는 전투기 수준의 무장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점은 어벤저 무인기는 내부 무장창에 레이저 무기 시스템을 탑재할 수 있어서 레이저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레데터 C 어벤저를 개발한 제너럴 아토믹스는 드론 제작업체로 유명하지만 지난 15년간 레이저포 연구를 해왔으며 미 국방부에 150kW 액체 레이저 포를 납품하는 등 레이저포 분야에서도 미국의 다른 방산업체보다 앞서고 있습니다. 출력 150kW는 미 해군이 페르시아만에 배치한 해군함정 폰스함에 설치된 30kW급 레이저포 출력의 다섯 배로 매우 강력합니다. 30kW의 출력도 드론을 파괴하거나 조그만 선박에 구멍을 낼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리고 현재 알려진 바로는 프레데터 C 어벤저의 레이저포는 한번 충전으로 5~6회 발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미국이 운용중이 프레데터나 MQ-9 리퍼는 탑재된 헬파이어 미사일을 모두 발사하면 재무장을 위해 기지로 돌아와야 하는데 프레데터 C 어벤저는 기지 복귀 없이 장시간 체공하면서 공격이 가능합니다.

 

 

또한 프레데터 C 어벤저는 기존 MQ-9 리퍼를 위한 지상 관제 시스템과 호환이 가능하며 2명으로도 조작이 가능하고 스스로 자율적으로 지상 표적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대당 가격이 약 1,500만 달러 수준으로 높은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있어서 미래에는 정말 많이 쓰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로 F-35A 양산가격으로 추정되는 1억 1천만 달러의 거의 1/10 수준인데 F-35A 1대의 도입비용으로 약 9~10대가량의 프레데터C 어벤저(Avenger)운용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장거리탄도탄을 발사 단계에서부터 탐지, 추적해 상승 단계에서 요격하기 위해 프레데터 C 어벤저까지 가세한다면 북한의 탄도탄에 대한 미사일 방어망이 한층 두터워질 것으로 보입니다.

 

1969년 시아드 바레(Siad Barre)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국가인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친소련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는 미국과 중국과 교섭을 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덕분에 미국도 소말리아를 지지했습니다. 그리초 최초 5년 동안은 사회 개혁도 하고, 부족주의 타파도 한다고 하고, 공공사업도 벌였으며 평판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급격한 부족주의 해체를 포함한 개혁조치들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부족의 권한을 줄이는 것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와 암살시도가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집권 22년중에서 괜찮았던 초반 5년이 끝나고, 17년간의 암흑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1990년에는 마침내 소말리아 최대 부족인 하비야부족의 통일 소말리아 회의(United Somali Congress, USC)가 결성되었고  1990년 3월 반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1991년 1월 26일 결국 소말리아 최대 부족 출신이었던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Mohamed Farrah Aidid)가 이끄는 USC가 모가디슈를 공격해 시아드 바레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명목상으로 알리 마흐디 무하메드가 임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친미 정책을 펼치던 시아드 바레가 반란군에 의해 축출을 당해 나이지리아 망명길에 오르자 미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소말리아 북쪽에 위치한 아덴 만을 건너면 예멘이고 동시에 중동으로 산유국과 가까우며, 그 산유국 중에 하나가 이라크였습니다. 1년 전 걸프전처럼 중동에서 유사시 즉각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의 주둔지로는 소말리아가 최적이었습니다.

 

 

당시 중동에 미군을 주둔시키기 힘든 데에 결정적인 이유가, 그 당시 이스라엘이 레바논과 전쟁 중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자국 내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영토 분쟁이 진행중이었습니다. 즉 중동 내부에서의 전쟁 불씨가 미군에게까지 번질 우려가 있어서 소말리아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습니다. 또한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으며, 인도양으로도 바로 진출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뿔이었습니다.

 

▲당시 미 해병대 파병을 실시간 생중계한 CNN 영상

당시 소말리아 내부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심각한 내전이 발생하여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UN은 소말리아를 안정시키기 위해 병력을 파병하였지만 소말리아 USC를 이끌던 아이디는 UN에 철군을 주장하였고 그러던 과정에서 UN군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UN은 미국에 미군 파병을 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1992년 12월 9일 소말리아 민간인 안전 확보, 상황발생시 교전 임무를 띠고 미 해병대 1800명이 선봉대로 소말리아 인근 해안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는 전투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걸프전 이후 미국의 두 번째 전투부대 투입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특종이 되었습니다.

 

 

미 해병대가 상륙하고 난 후 제3강습상륙대대, 제10산악사단 등이 추가로 투입되었습니다. 결국 1993년 3월까지 파병 미군은 25000명으로 증가되었으며 이것을 '희망회복작전'이라고 불렀습니다. 미군은 식량 배급 차량이 지나는 길목마다 장갑차가 배치돼 무장세력의 공격을 사전에 봉쇄했고, 더 위험한 곳에는 전차와 공격 헬리콥터가 동시에 투입되는 등 안전확보에 대단히 공격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렇게 미군 덕택에 식량배급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으면서 내전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군 해병대 선봉이 상륙한지 3일만에 알리 마흐디와 파라 아이디드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민주당 클린턴 행정부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소말리아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UN은 1993년 5월 미군의 철수와 함께 다국적군 약 28,000명을 소말리아로 파명하게됩니다. 파병한 나라는 35개 나라였으며 우리 대한민국의 상록수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3년 6월 5일 파키스탄군이 주축이 된 UN평화유지군과 아이디드군이 정면 충돌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UN 평화유지군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아이디드군이 라디오 방송으로 UN평화유지군을 비난하였는데 이제 화가 난 UN군은 아이디드군이 점령하고 있던 선전기구로 활용되던 라디오 시설과 언론사, 무기 시장을 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군 경기갑 여단을 파견했는데, 거꾸로 아이디드 군의 매복에 당한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로 파키스탄군 24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당하는, UN 평화유지군 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죽은 파키스탄군의 일부가 시체훼손이 되면서 끌려다니는 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CNN에 보내고 UN 철수를 요구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6일,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의 찬성으로 채택된 안보리 837 결의안이 나오게 되는데 이는 발을 빼고 있던 클린턴에게 미군을 파견하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결국 UN평화유지군은 파라 아이디드를 상대로 싸우는 전투 작전으로 변질됐으며 다국적군도 완전 전투부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유지 작전이 전투작전으로 변질될 것까지 예상을 못한 파키스탄은 핵심 전투병력을 모조리 철수시켰고, 짐바브웨와 루마니아, 스웨덴도 이러리라곤 예상을 못해 병력을 철수시키자 이어 다른 나라들도 덩달아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기세가 등등해진 파라 아이디드는 이걸 또 선전하면서 자칭 소말리아의 대통령으로 군림했습니다.

 


뒤늦게 파견한 미군은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하고 파라 아이디드가 이끄는 무장세력을 완전 해산시키기 위해 수시로 공격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무장 세력, 동조자 등을 사살하는 과정에서 목표물을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대규모 민간인 오폭이 이어졌으며 이 사건으로 아이디드에 저항하던 소말리아 부족과 군벌들이 아이디드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소말리아의 전쟁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당시 실제 파병된 미 레인저 대원들 모습

그리고 그 상황을 취재하던 기자 4명이 소말리아 군중에게 살해당했으며 이후 미군 헌병이 사망하고 부상당하는 일이 계속 되자  미합중국 육군 소장윌리엄 F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JSOC(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가 소말리아에 파병됩니다. 파병된 부대는 레인저 3대대 B중대, 델타포스 C분견대, 제160특수작전항공연대 "나이트 스토커"(The Night Stalkers) 예하 헬리콥터 16대(MH-60 블랙호크, MH/AH-6 리틀버드)와 조종사 및 정비병, DEVGRU, 제24 특수전술대대 소속 CCT항공구조사의 총인원 450여명이 파견되었으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가디슈 바로 앞 바다에 CVN-72 에이브라함 링컨 항공모함과 항공모함 소속 제11 비행단도 배치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얼마나 자신만만했는지 무려 모든 작전을 3주만에 끝낸다 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1주일 동안에 병력을 소말리아에 전개하고, 2주차에는 아이디드를 색출해서 검거하고, 3주차에 아이디드의 잔존 세력과 지휘체제를 붕괴시킨 다음에 깔금하게 소말리아를 떠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8월 30일 새벽 2시에 첫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레인저와 델타 포스팀이 패스트로핑을 했고 전범 9명을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이들이 전범이 아니라 국제구호단체 요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개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4번이나 더 출격했으나 번번히 허탕을 쳤으며 그렇게 목표인 3주의 시간이 모두 흘러갔습니다.


그러다가 투입 한 달 만인 9월 21일, 아이디드 지지 세력으로 합류한 오사만 알리 아토를 체포하는데 성공합니다. 알리 아토를 체포하자 화가 난 파라 아이디드는 미군이 보이면 생포고 뭐고 다 필요없고 무조건 죽이고, 미군의 차량은 무조건 파괴하라고 지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9월 25일, 모가디슈 남쪽 공업지대(New Port Facility) 상공을 비행하던 제101공중강습사단 소속 블랙 호크를 무장세력이  총격을 가했고 이후 RPG-7에 한 방에 격추돼 3명의 승무원이 사망하게 됩니다. 아이디드는 이걸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본인이 직접 라디오에 출연하기까지 해서 자기가 직접 격추시켰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개리슨 장군이 지휘하는 JSOC는  9월 25일 발생한 블랙 호크 다운 사건으로 파라 아이디드 체포에 속도를 내기로 결정하였는데 주변인들을 차례대로 체포해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뒤 파라 아이디드를 체포한다는 기존 계획에서 조금 더 나아가, 파라 아이디드의 참모인 오마르 살라드 엘미(Omar Salad Elmi)와 명목상 내무장관이자 정치고문인 모하메드 하산 아왈(Mohamed Hassan Awale)을 먼저 체포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1993년 10월 3일 13시 50분, 소말리아 정보원에 의해 살라드 엘미가 목표 건물에 들어온 게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험비와 트럭 무리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미군에 대한 불신이 쌓인 소말리아 민병대 (무장한 민간인)가 무장 세력에게 빠르게 전파되하였고 또한 거리에 쓰레기 더미와 불타는 타이어 등을 쌓아 미군의 접근을 봉쇄해 방향을 돌렸습니다.

 

▲블랙호크 헬키 슈퍼64 실제 추락 사진

결국 지상군이 목표건물에 늦게 도착하면서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RPG-7에 블랙호크 헬기(슈퍼 61)이 맞으면서 추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추락한 블랙호크 헬기에 민병대가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문제는 추가 지상지원을 위해 추락지로 날아가던 또 다른 블랙호크 헬기(슈퍼 64)마저 RPG-7 로켓에 피격됩니다. 그렇게 임무 종료 무전과 함께 임무를는 실패하였고 지상군과 나머지 병력들은 모가디슈 공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약 99명의 병력이 슈퍼 64 추락지에 묶여 있었습니다.이에 JSOC 소속 지상군은 고립된 병력을 탈출시키기 위해 차량에 주무장을하여 투입되었으며 이 뒤를 말레이시아, 독일 다국적군 소유의 100여 대가 넘는 장갑차와 파키스탄 다국적군 소유의 M48 전차가 따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국적군 소유의 장갑차가 격파되고 다국적군에도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미군은 18명이 죽고 7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군에서도 1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으며, 파키스탄군 역시 1명의 사망자, 2명의 부상자가 나왔습니다. 소말리아의 경우 아이디드 쪽의 발표에 따르면 315명이 죽고 812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미국과 UN의 자체조사에 따르면 약 1500에서 3000여명 정도가 사망 혹은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사망자 18명 + 부상자 73명은 월남전 이후 벌어진 마야게즈 호 승무원 구출작전의 실패 다음으로 미군에게 큰 피해 규모였고, 전면전인 걸프전에서조차 50만 명의 미군 중 294명이 전사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뼈아픈 피해였습니다. 또한 그 18명이라는 사망자가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의 특수부대인 델타포스, 미 육군 최정예 보병인 레인저, 그리고 야간 침투가 전문인 정예 강습 조종사인 것을 감안하면 '20명에 근접하는 사망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미국은 두 번 다시 약소국의 내전에 끼어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북한 대공망 설명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1만'입니다. 대략 1만문이 넘는 밀집된 방공망이라는 뜻 입니다. 그리고 이 1만 방공망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부품은 각종 고정, 견인식 AA GUN입니다. 현재 북한이 보유한 것으로 여겨지는 방공포는 대략 15종으로 알려져 있고, 이 중 대부분이 1985년 이전 장비품들입니다. 여기서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는 14.5mm체계 4종을 제외하면 11종이 남게 됩니다.

 

 

대략 1995년까지 북한의 방공포 세력은 14.5mm체계까지 더해 8000여문으로, 97년 무렵이 되면 대략 7500문까지 그 숫자가 축소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85mm체계를 중심으로 축소되고 있었는데 85mm체계는 노후화로 인한 자연 도태중이었고, 붕괴된 경제로 인해 더 이상 숫적 충원이 불가능했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방공포 세력이 2000년 무렵이 되면 11,000문으로 대거 강화되게 됩니다. 숫적으론 3,000여문이 증원된 셈입니다. 북한은 이 무렵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무기를 구매하였습니다.

 

 

이런 급작스런 숫적 충원은 Zu-23계열과 23mm계열 방공포로 대표되는데, 대략 이 계열모델로만 2,500여문이 충원되었습니다. 이러한 숫적충원은 이 무렵 동구권 국가의 붕괴 및 동유럽 상당국가가 서방제 무기체계로 무장하면서 재고를 국제시장에 방출하였는데 이를 북한이 구매하였습니다. 그 외에 M-1939로 대표되는 중국제 37mm대공포를 석탄, 마그네사이트 등의 현물거래를 통해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23mm/37mm체계는 사실 큰 위협이라 볼 수가 없고, 북한이 달러를 취득하기 시작한 2000년을 전후해 도입한 가장 위협적인 방공무기라 하면 KS-19, KS-12로 대표되는 대구경 방공포. 그리고 ZSU-57-2 57mm 쌍열 자주방공포입니다. KS-12/19는 도합 900여문이 도입, ZSU-57-2는 250량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북한은 대규모 관제 레이더를 늘리는 방식보단 소형 이동식 레이더를 다수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북한 산악지형 특성상 다수의 음영지역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음영지대를 커버할 수 있는 다수의 레이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한민국 공군의 주야간 저고도 고속침투능력은 1980년대 북한이 가장 부담스러워 한 전력이었습니다.

 

▲북한의 촘촘한 '1만' 방공망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선 한/미 연합공군이 가진 막강한 SEAD/DEAD전력 때문에 소형 이동식 레이더를 다수 배치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시리아등지에 이동식 레이더를 수출한 것에도 보여지는데 당연히 성능과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저고도 방공무기를 통제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이런 소형레이더 역시 이동형이기에 그 성격은 게릴라 운용이란 뜻입니다. 지속적인 이동을 통해 비정기적으로 레이더를 가동하고 그 때마다 최소한의 정보를 방공포대에 전파하는 식의 운용을 해야 됩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숫자의 레이더를 살려놓느냐가 북한 방공망 기능보존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약점은 저고도 밀집 방공망을 자랑으로 삼는 북한 방공망에게 심각한 과부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북한은 필요할 경우에만 레이더를 가동해 특정 공역에 화망을 덮는 방식을 선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1만여문에 달하는 막대한 방공포들 중에서 뛰어난 탐지장비를 장착한 대한민국 공군 전술기의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고사화기는 그 중에서도 소수 장비한 85mm/100mm대공포 뿐이며 그나마도 임시 가동한 레이더를 사실상 포기하고 나서야 가능한 대응입니다. 레이더를 하나 버리는 대신 1회의 응전기회를 얻는 셈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희생을 치룬다고 해도, 현대적인 서방 전술기들은 좀처럼 저고도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보통 랜턴의 표적지시가 25,000피트(7,600미터)에서 이뤄지며 JDAM은 그보다 더해서 45,000피트(13,700m)고도에서 운용되는데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방공포는 북한에 전무합니다. 즉, 전쟁초기 JDAM을 통해 미리 점지해둔 고가치 목표를 모두 파괴할 때까지 한미 연합공군은 북한이 원하는대로 저고도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한국공군 주력 전술기는 주야간 가리지 않고, 방공화망의 위협없이 안전하게 정밀타격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이러한 북한의 구식방공체계는 무인기에겐 위협이 될 수 있겠으나 애초 유인기 대신 버리는 패로 운용하게 될 무인기입니다.

 

한만디로 대한민국 공군은 지속적인 전술기 도입과 현대화로 북한 방공망 정도는 쉽게 무력화할 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북한 방공망은 조밀하지만, 분명 노후화되어 있고 소수의 핵심 체계를 제거하면 사실상 걸프전에서의 바그다드 상공처럼 무의미한 폭죽놀이만 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북한은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비대칭 체계에 자꾸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지금 현대까지 전쟁에서 전투기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전쟁에서 배트남전을 제외하고 모두 공군전력이 우세를 보인 국가가 승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1차,2차 세계대전 공중전의 규모가 엄청나게 컷는데 그 공중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에이스라고 부릅니다. 에이스는 통상 기종에 관계없이 적기 5대를 격추한 조종사에게 부여되는 칭호입니다. 그들중 상위 1%를 슈퍼에이스 또는 격추왕이라 부르는데 말 그대로 공중전의 천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장을 누볏던 기체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전설적인 기체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영원히 기억되는 전설적인 네임드 기체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의 갤베 14

 

한스-요아힘 마르세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독일 공군의 슈퍼 에이스입니다. 공인 격추수는 158대로 독일 공군 중 서방 전투기를 가장 많이 격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철십자 훈장을 비롯한 각종 훈장이 따라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특별한 권리도 주어졌습니다.

 

 

바로 자신의 기체에 개인 도색을 하는 권한이었는데 마르세유는 자신이 탑승하는 Bf109F/Trop에 자신의 번호를 황색으로 써넣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황색 14번으로 영국 사막 공군에게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붉은 기체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동일 육군 항공대의 에이스로 1918년 4월 21일 격추당할 때까지의 총 격추수 80기로 1차대전 에이스중 1위였습니다. 타고다닌 전투기를 항상 빨갛게 칠하고 다녀서 붉은 남작(Der Rote Baron)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리히트호펜의 인지도는 그냥 유명한 에이스 수준이 아니라 전국적인 아이돌 수준이었는데 금발의 미남이라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으며, 육군 병사들조차 리히트호펜의 사인을 받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게임에서도 이 붉은 기체가 자주 등장하며 수많은 영화에도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에 코르키란 챔피언의 스킨으로도 나왔습니다.


 

  에리히 하르트만의 검은 튤립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슈퍼 에이스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격추왕이었던 에리히 하르트만은 검은 악마로 불렸는데 위에 설명한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과 더불어 전 세계 공군 역사에서 에이스를 논하는데엔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 공식 격추 기록은 무려 352기로 격추 전과 300기를 넘긴 사람이 에리히 하르트만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Gerhard Barkhorn)단 두 사람이고, 바르크호른이 301기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에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전투기를 검은색 계통으로 도색하였으며, 기수에 '검은 튤립'이라 불리게 되는 독특한 도색을 했던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딘 헤스 소령의 신념의 조인

 

이 신념의 조인은 대한민국 공군의 전설적인 기체이자 거의 유일한 네임드 기체입니다. 탑승자는 미 공군딘 헤스 소령이지만 소속은 엄연히 대한민국 공군의 기체입니다. 이후 딘 헤스 소령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로는 김두만 대위가 이 기체를 몰았습니다. 기종은 North American F-51D 머스탱으로 한국전쟁 발발 후 AT-6 건국기나 L-4같은 훈련기만 보유하고 있던 공군의 전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미국에서 급히 지원하여 만들어진 BOUT-1 대대 소속이었습니다.

 

딘 헤스 소령은 우리나라 공군 조종사들의 애국심에 감명받아 한국공군 소속 기체에 탑승하여 작전을 나갔고, 이후로 딘 헤스 소령은 모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기체를 타고 250여회나 출격했습니다.  그리고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라는 이름은 딘 헤스 소령의 좌우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그려넣은 것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