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40여년 전 베트남전의 참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포 라이터 282개가 2013년 미국 신시내티에서 열린 경매에 나와 무려 3만 5250달러(3700만원)에 낙찰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다소 녹슬어 오래된 것 임을 드러내는 이 라이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참전 군인들이 직접 새겨넣은 문구들었습니다. 이 지포 라이터들에는 당시 생사를 넘나들었던 군인들의 마음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었습니다.

 

 

이 라이터는 전쟁터에서 죽음의 공포를 없애기 위해 피워 무는 담배를 위한 필수품이지만 극한 상황에서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밝혀주는 손전등 역할과 외관을 거울 대용으로 사용했고, 병사들의 전쟁 중 염분 보충을 위한 소금통으로, 야전식량(C-Ration)을 데워 먹을 때 쓰던 병사들의 필수품으로 사용됐습니다. 베트남전에서도 이 라이터는 병사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미군들에게 지포 라이터는 항상 함께한 전우이며 그들의 일부였고 부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미군들은 군의 매점에서 한개 1.8달러에 지포 라이터 1개를 구매해 이니셜 등을 새겨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미군이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던 라이터에 새겨진 낙서들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죽을따위는 두렵지 않을 만큼 나는 전우를 사랑한다."

 

▲"가슴에 총을 맞으면 '아 내가 매복 당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내키지 않지만 자격 미달인 자들에게 이끌려 불운한자들을 죽이고 은혜 모르는 놈들을 위해 죽는다."

 

▲"살기 위해 싸워 보기 전까지는 진짜 살아본게 아니다. 삶은 보호받는 자들은 모르는 맛이 있다."

"비록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지만 악을 두려워하진 않으리. 골짜기에서 제일 악동한 x새끼가 나니까"

 

▲"서핑은 나중에 해도 돼."

 

▲"공산주의 엿먹어"

 

▲"저에게 마음을 열어주세요 아니면 니네 움박들 싸그리 다 태워버릴거야."

 

▲"35킬.. 내 시체에서 이걸 찾았다면 엿먹어라"

 

▲"우리는 불가능한 미션을 받았지만 원치 않는 훈련을 미숙한 놈들로부터 받아 10분 늦었다"

 

▲"이 라이터를 내게서 빌린 놈은 나에게 소중한 그녀가 있다는 것과 비버리 데닝턴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을 가진 그 여자에게 내가 완전히 빠졌다는 것 밖에 모르겠지"

 

이 전쟁에서 부상 또는 전사한 미군의 수는 20만명을 넘습니다. 그들이 남긴 대부분의 유류품이 가족에게 가기는 불가능했습니다 . 유족들은 그들이 라이터나 소지품을 잃어버린 것을 알 수 없었으며 슬프게도 그들의 결의와 용기, 생명, 사랑을 전하는 이 메시지들이 그들 자신의 어머니나 여자 친구 또는 아내에게 전달 되지 못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피해를 남긴 파괴적인 전쟁으로 그많큼 정말 강력하고 엄청난 숫자의 무기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당시 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숫자보다 생산되는 소총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2차 세계대전 기간에 625만정이나 생산된 카빈소총이 아직도 우리나라 예비군이 향방 작전훈련을 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무기를 생산한 나라들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전차 Tank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강력함을 보여주었던 전차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더 강력해진 화력으로 전장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했으며 수많은 전차들이 전장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1. 소련 105,251 대

2. 국 88,410 대

3. 독일 67,429 대

4. 영국 27,896 대

5. 캐나다 5,678 대

6. 일본 2,515 대

7. 이탈리아 2,473 대

8. 헝가리 500 대

 

   대공포 Anti-Air Gun 

제2차 세계 대전이나 현재 대공포는 아무리 발사해봐야 유효한 타격력을 주긴 힘들고 대공포 자체 운용비는 뺴더라도 격추한 비행기보다 포탄값이 훨씬 크다고 까이는 무기체계지만 대공포를 설치하지 않으면 적 공격기/폭격기 파일럿들이 심리적으로 안심한 상태로 공격적으로 폭격을 가하고 정확도도 올라가기 때문에 꼭 필요했습니다.

1. 소련516,648 대

2. 국 257,390 대

3. 독일 159,147 대

4. 영국 124,877 대

5. 일본 13,350 대

6. 캐나다 10,552 대

7. 이탈리아 7,200 대

8. 헝가리 447 대

 

   기관총 Machine Gun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국이나 소련 등에서 통상적인 소총탄보다 구경이 크고 위력이 강한 탄을 쓰는 기관총을 개발하면서 전장에서 필수적인 역할을하며 수많은 기관총들이 전장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1. 미국 2,679,840 정

2. 소련 1,477,400 정

3. 독일 674,280 정

4. 일본 380,000 정

5. 영국 297,336 정

6. 캐나다 251,925 정

7. 영국 연방 37,983 정

8. 헝가리 4,583 정

 

   군용트럭 

현재나 과거나  군대는 보급의 유지가 중요합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철도와 더불어 차량이라는 운송수단이 중요했습니다. 특히 트럭은 웬만한 병기와 맞먹는 중요성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미국의 트럭 생산 능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1. 미국 2,3820,311 대

2. 캐나다 815,729 대

3. 영국 480,943 대

4. 독일 345,914 대

5. 소련 197,100 대

6. 일본 165,945 대

7. 이탈리아 83,000 대

 

   전투기 Fighter Aircraft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육지에서 만큼이나 공중에서의 싸움도 치열하였습니다. 특히 유럽 대륙을 공략하기 위해서 연합군은 끊임 없이 영국 공군기지에서 전투기를 띄워야 했으며 태평양에서는 진주만 공습 이후로 일본과 미국 전투기들의 치열한 공중전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1. 미국 99,950 기

2. 소련 63,087 기

3. 독일 55,727 기

4. 영국 49,422 기

5. 일본 30,447 기

6. 이탈리아 4,510 기

7. 프랑스 1,597 기

 

 

   폭격기 Bomber

영국은 독일을 언제든지 칠 수 있는 위치에 대규모 폭격기 부대를 배치했고, 2차대전 중에 아브로 랭커스터를 비롯하여 성공적인 4발 중폭격기를 개발해냈으며 미국도 여러가지 고생끝에 B-17을 개발하여 주력 폭격기로 배치하면서 엄청난 화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 미국 97,810 기

2. 영국 34,689 기

3. 소련 21,116 기

4. 독일 18,449 기

5. 일본 15,117 기

6. 이탈리아 2,063 기

7. 프랑스 712 기

 

   수송기 Military Transport Air Craft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이젠하워가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물건으로 전투기나 폭격기가 아니라 C-47 수송기를 꼽은적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1. 미국 23,929 기

2. 소련 17,332 기

3. 독일 3,079 기

4. 일본 2,110 기

5. 영국 1,784 기

 

   항공모함 Aircraft carrier 

항공모함의 중요성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입증됐습니다. 일본은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을 시작했지만 미군의 항모는 단 한 대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결과는 결국 비수가 되어 돌아갔습니다.

1. 미국 22 대 (호위 항모들을 합치면 141 대)

2. 일본 16 대

3. 영국 14 대

 

   구축함 Destroyer 

제2차 세계대전 항공모함의 등장 이후 함재기의 발달로 인해 해전의 양상이 복잡해지면서, 점점 구축함에게는 다목적성이 요구되었으며, 그로 인해 자연스레 대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가장 잘 대응한 것은 미국 해군으로 2차 세계대전 구축함의 최고 걸작이라고 불리는 플레처급 구축함과 그 개량형 알렌 M. 섬너급은 상당한 대함능력을 보유하는 동시에 뛰어난 대잠, 대공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 미국 349 대

2. 영국 240 대

3. 일본 63 대

4. 소련 25 대

5. 독일 17 대

6. 이탈리아 6 대

 

   호위함 Escort ship 

대표적으로 미국의 피에프급 호위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의 리버급 프리깃의 설계를 기초로 건조되었으며 영국의 21척, 소련에 28척을 대여해주었습니다.

1. 미국 420 대

2. 영국 413 대

3. 캐나다 191 대

4. 독일 23 대

 

   잠수함 Submarine

독일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잠수함의 건조가 금지되었으나 나치의 재군비에 따라서 건조를 재개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해군이 사용 가능했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전력이 잠수함 함대였고 해저의 암살자라는 칭호로도 불렸습니다.

 

 

1. 독일 1,141 대

2. 미국 203 대

3. 일본 167 대

3. 영국 167 대

5. 소련 52 대

6. 이탈리아 28 대

"적과 함께 죽겠다. 나를 폭격하라"

이슬람 국가(IS)와 시리아에서 격전을 벌이던 중 러시아의 25세의 젊은 특수부대 장교가 남긴말입니다. 러시아군에 유능한 장교였던 그는 시리아 중부 지역에서 IS 근거지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자신이 있는 곳으로 아군의 공습을 유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자신이 있는 지역이 IS에 의해 포위됐음을 알고 적군과 함께 산화하는것을 선택한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유언을 교신을 통해 남겼습니다.

 

 

 

"이게 끝인가봅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제 가족과 조국에게 사랑한다고 인사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싸울 수 없을 때까지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다고 전해주십시오. 제 죽음을 복수해주십시오. 제 가족에게 제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사령관님 그럼 안녕히!"

 

 

 

자신의 죽음을 감수하면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한 이 장교의 행동이 알려지자 러시아 정부는 성명을 내고 영웅적인 전사였다고 추모하였으며 그의 용감한 행동을 매년 기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결혼한지 1년 6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새신랑이었으며 출산을 앞둔 그의 아내는 그가 시리아에서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사실도 몰랐다고 합니다. 

 

 

한편 이 러시아 장교와 똑같은 선택을 한 전쟁영웅이 있었습니다. 바로 60년전 우리땅에서 목숨을 바친 터키군 소속의 한 영웅입니다.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소속 터키 제1여단(미 25사단 배속)의 한 포병부대 관측장교로 참전한 메흐멧 고넨츠(Mehmet Gonenc)중위는 1951년 4월 22일 중공군 제 60군 예하179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습니다.

 

▲당시 중공군과 치열한 포격전이 펼쳐진 터키군 주둔지

 

이 전투는 중공군 최대병력이 동원된 한번도에서의 마지막 공세였고 최대병력이 총동원된만큼 중공군의 공격은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중공군은 이날 터키군이 배치된 경기도 연천군 대광리 인군 장승천일대에 40여분 간의 사격을 가하였고 터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격을 끝낸 중공군은 터키군 본부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터키군 포병진지와 통신시설을 파괴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고넨츠 중위는 본부로 메세지를 보냅니다.

 

"적군은 우리가 주둔하고 있던 언덕을 점령했다. 많은 군인들이 교전중에 사망하였다. 포병부대가 발포해야하는 좌표를 주겠다"

 

그러나 고넨츠 중위가 본부에 넘긴 좌표는 바로 그가 위치한곳의 자표였습니다. 본부측은 "그곳의 좌표는 당신 중대가 있는 곳이다"라며 무전에 답했고 다시 돌아온 메흐멧 고넨츠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적군의 포로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적의 손에 넘어가도록 하지말라! 아군의 총에 죽고싶은것이 우리의 마지막 유언이다. 정확한 좌표를 다시주겠다. 모든 포병부대는 이곳에 발포해야 한다!"

 

본진을 향해 밀려가는 적을 자신의 희생으로 저지하겠다는 단호한 결의였습니다. 이후 고넨츠 중위는 연락이 두절되었고 본부는 심사숙고 끝에 고넨츠 중위가 알려준 좌표로 발포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포병부대의 군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주어진 좌표에 발포하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TOT(time on target)’였습니다. 한 좌표를 향해 동시에 하는 집중 포사격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중공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선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당시 전쟁고아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는 고넨츠 중위 모습(오른쪽)

 

발포 후 고넨츠 중위를 포함한 터키군은 장렬히 산화했고 중공군과 함께 전장에서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물밀듯이 밀려오던 중공군의 진격도 멈췄습니다. 하지만 그날 울려퍼졌던 화포의 굉음은 유난히 무겁고 슬펐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4년 고넨츠 대위(추서계급)에게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터키는 6.25전쟁에 1만 4936명을 파병해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중 741명은 전사했고 2068명은 부상을 당했습니다. 163명은 실종되고 244명은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참전한 유엔군 소속 16개국 중 사상자 인원 규모로만 네 번째였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초능력자들을 중심으로 운용되는 부대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말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일이 과거부터 있었다면 더욱 믿기지 않으실겁니다. 사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초자연적 현상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니나 쿨라기나(Nina Kulagina)라는 초능력을 가진 여성과 함께 여러가지 실험을 진행했었습니다.

 

 

 

니나 쿨라기나는 물건에 손을 대지 않고 염력만으로 물건을 움직이거나 개구리의 심박수를 서서히 멈추게 하는 등의 초능력을 가졌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초능력이 실제 작전에도 사용되었는데 소련 주재 미국대사관의 대사 집무실을 향해 극초단파 방사능을 퍼부은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당시 미국대사관 직원들은 심한 두통과 안구출혈 등의 증상을 호소하였고 CIA는 이것이 극초단파 방사능에 장시간 노출된 것이 원인임을 밝혀 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소련 붕괴 이후 비밀문건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소련의 초능력 공격이 세상에 알려져 충격을 주었습니다.

 

 

최근 CIA 기밀 해제 문서로 밝혀진 내용을 살펴보면 미국도 중앙정보국 CIA와 국방정보국 DIA를 주축으로 1970년대 초자연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비밀 프로젝트 스타게이트(Stargate)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CIA는 미 전역에서 텔레파시, 원거리 투시, 최면술 등 초능력자들을 모아 비밀부대를 창설하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당시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약 2000만 달러(약 235억원)를 투자하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CIA가 초능력자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활용한 능력은 원격시청이었습니다. 이 능력은 원거리에 있는 특정 대상이나 물체 등을 염력으로 탐색하는 것으로 이 능력을 활용하면 초능력을 가진 CIA의 요원은 CIA 건물 안에 앉아서도 수백만 리 밖, 적진의 주요 지점을 탐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적이 숨기고 있는 인질, 비밀무기, 지휘관 등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KGB는 초능력자의 힘을 빌려 사람의 심장을 멎게 하게나, 상대방을 교란시키는 등의 목적으로 활용한 반면, CIA는 주로 탐지의 목적으로 초능력을 활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CIA 초능력자 요원들은 실제로 어떤 성과를 올렸을까
  
비밀문건에서 초능력자 요원들이 찾아낸 성과 중 일부는 지워져 있었습니다. 즉 외부유출 등을 고려해 극도의 보안을 유지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들이 찾아낸 정보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사례 몇 개는 문건을 통해 확인됐습니다.
 


 1. 초능력 요원들은 원격시청을 통해 구소련의 세미팔라틴스크(현 카자흐스탄의 도시명)에 숨겨진 연구센터를 찾아냈습니다. 이는 이전에는 알아내지 못했던 정보로 큰 성과를 올린 것으로 기록됐습니다. 이 연구시설에서 소련은 핵폭탄 폭발실험 등을 진행했으며 주변에는 공항이 있었습니다. 초능력자들은 원격시청으로 이곳에 공항이 있다는 것도 정확히 알아맞혔습니다.

 


2. 1991년 걸프전에선 사담 후세인의 은신처를 찾아내는데도 CIA의 초능력 요원을 활용했습니다. 초능력 요원들이 원격시청으로 찾아낸 단서 등이 후세인이 숨어 있는 위치를 찾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습니다. 물론 초능력 요원들의 정보에 다른 정보를 종합해 확인한 것이긴 했으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1994년에는 초능력 요원들에게 북한의 핵무기 제작에 사용될 플루토늄 저장소의 위치를 찾으라는 임무가 부여됐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숨겨 둔 이 플루토늄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플루토늄 저장소는 찾지 못했지만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과 생화학무기 저장소를 찾는 임무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 북한이 파 놓은 지하 땅굴의 정확한 용처를 파악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CIA의 초능력자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는 오랜 기간 정보수집에 도움을 줘 왔음에도 일부 정부 관계자들은 그 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면서 결국 1995년 CIA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는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중단의 사유는 다른 정보분과에 비해 비용대비 성과가 좋지 않고 특히 그 정확성이 떨어지기 때문이였습니다. 실제로 제3의 연구기관이 통계적으로 분석해 보니 227명의 초능력자들 정확도가 15%에 불과했었습니다.
  

 


숨겨졌던 이 스타게이트 프로젝트가 최근 다시 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2001년 발생한 9·11테러 발생 이후였습니다. 스타게이트의 초능력 요원이 1983년 원격시청 임무 중 2001년 발생할 9·11테러를 예언했다는 내용이 미국 인터넷 매체와 전직 국방부 과학자 등을 통해 공개되면서 화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공식적으로 초능력을 사용하여 수사기관에서 사용한적이 있습니다.  1978년 부산 초등학생 납치사건인데 당시 경찰이 납치된 아동을 찾는 데 소위 말해 용하다는 김중산이라는 도사를 찾아가 탐문수사한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 납치된 아이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 형사가 도사와 함께 아이를 33일 만에 찾았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동아시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을 이를 기회로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방위 예산은 6년째 증가 추세입니다. 매년 사상 최대 방위예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자위대에 큰 문제가 있는데 일본은 2차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라 무기를 수출하지 못하면서 무기 가격이 성능에 비해 엄청 비쌉니다.

 

 

사실 무기라는 것은 연구 개발 비용이 큰 비중을 차지만 대량생산할수록 1기당 가격이 감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헌법으로 인해 무기를 비축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자위대원의 인원수 이상으로는 무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이 일본산 무기의 살인적인 가격의 주 원인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나라들처럼 많이 생산하여 비축하던가 해외 판매를 한다거나 하는 수단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비싼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일본 무기들은 가격대비 성능도 좋지 않으며 문제점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일본 자위대에 가장 큰 단점이 되고 있는 자국산 무기 몇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62식 기관총

일본 자위대에서 저주받은 기관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 기관총은 무게도 무거워 자위대 대원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총입니다. 총열이 너무 쉽게 과열되는 데다 때때로 운반중이나 발사 중에 자동분해 되기도 해 부품을 테이프로 고정시켜 사격한다고 합니다. 또한 조금만 먼지가 끼어도 그 즉시 작동을 멈추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게 자위대 현역 기관총이며 그리고 한정당 가격이 200만엔 우리돈으로 2000만원 넘는 가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400만원이면 만드는 기관총을 5배 이상 들여서 만든다는 뜻입니다. 


 

 

 

   64식 소총

경합금을 많이 쓴 탓에 자동소총이면서 자동사격에 적합지 않다는 희한한 소총입니다. 게다가 전용탄을 쓴다는 것부터 가격상승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전용탄이라는 것이 위력을 줄인 탄인 약장탄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부품 개수만 해도 50개가 넘어가 병사 개개인이 분해,조립,수입도 못하고 정비병에게 보내서 정비해야 합니다.


 

   미네베아 PM-9 

 

단순함과 저렴함으로 유명한 이스라엘제 우지 기관단총의 라이센스 생산품인데, 정작 프레스 방식을 사용하지 않다보니 해당 기관단총의 가격은 89식 소총보다도 비쌉니다. 가격은 40만엔 즉 우리돈으로 400만원가격이나 하는데 이는 최고의 기관단총이라 불리는 MP5 기관단총이나 MP7, P90보다 더 비싼가격입니다.


 

   89식 소총

 

64식 소총의 후계로 개발된 자동소총으로 5.56mm NATO탄 사용, M16과 호환되는 탄창구조, 양각대를 이용한 안정적인 사격성능 등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소총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정당 가격은 약 35만엔으로 338만원정도인데 우리나라 K2 소총 가격이 높게 잡아도 66~90만원선인걸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가격입니다. 또한 자잘한 부품이 지나칠 정도로 많아서 잔고장도 많고 그 부품들도 상당히 비쌉니다.

 

한국전쟁 기간 중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수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수많은 승리와 패배를 겪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참혹한 패배이자 한국전쟁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투이며 영광으로 남을만한 후퇴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가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현재까지도  독일군소련군이 벌인 독소전쟁 도중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대 동계 전투 중 하나로 꼽히며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영하 40도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진 장진호 전투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잡은 맥아더 장군은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구상합니다. 그리고 서부전선의 미 8군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이 북한군을 격파하며 압록강으로 물밀듯이 진격하면서 한국전쟁은 UN군의 승리로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UN군은 1950년이 끝나기 전에 남한과 북한을 다시 통일 시키기 위해 진격을 서둘렀습니다.

 

 

북한은 통행이 어려운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동서로 양분되어 있고 이에 따라 북진하는 UN군도 두개로 나누어졌습니다. 미 8군이 한반도의 서부해안을 따라 북진했고 한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이 동부해안을 따라 북상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군은 계속해서 미군에게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경고를 했지만 미군은 그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미국의 예상과 달리 중국군이 1950년 10월 19일 국경선을 넘어 비밀리에 북한으로 잠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미 해병대의 원산상륙에 크게 놀란 모택동은 10월 31일 만주로 이동하던 중공군 9군까지 북한으로 들어가 한국군 수도사단과 3 사단, 미 해병대 1사단을 즉시 격파하라는 무선지령을 내렸습니다.

 

 

장진호를 향해 진격하는 미 해병대 1사단 진격로

 

그리고 10월 25일 한국군 1군단이 장진호 서쪽 황초령 협곡에서 중공군과 마주치며 진격을 멈췄습니다. 당시 원산에 상륙하여 북진을 하고있던 미 해병대 1사단도 11월 2일 중공군 124사단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11월 17일 중공군 9 군은 조용히 장진호 부근에 도달하여 먼저 북한에 들어왔던 중공군 42군단과 합류하게 됩니다.

 

 

이 당시 UN군 사령관들이 추측했던 중공군의 규모는 약 3만 5천 명 정도였지만, 실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수는 무려 30만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몰랐던 미 해병대 1사단은 11월 24일 장진호 동쪽의 신흥리와 서쪽 유담리를 점령하며 진격하였습니다. 그리고 11월 27일 밤 15만의 중공군이 사방팔방에서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담리 일대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면서 아비규환이 되었고 비전투 인원을 포함 4천 여명에 불과했던 미 해병대 1사단은 궤멸 직전에 상황으로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그렇게 중공군의 대공세는 계속되었고 미 해병대 1사단은 고립된 채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1월 30일 UN군 사령부는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겹겹으로 둘러쌓고 있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혹한 속에서 협곡을 따라 철수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습니다. 당시 장진호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질 정도로 기온이 낮은 곳이었습니다. 차가운 칼바람은 전차와 차량의 오일을 얼어붙게 했고 소총과 기관총의 기름이 얼어서 작동이 안 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수통의 물은 늘 얼어있었고 추위 속에서 동상환자가 속출하였으며 전사자들의 시신은 순식간에 얼어붙었습니다. 그리고 부상병에게 사용해야 할 수혈관과 모르핀도 얼어붙으면서 장진호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혹한의 날씨는 미군뿐만 아니라 중공군에게도 가혹했습니다. 중공군은 추위때문에 보급병이 도착하지 않아 제대로 먹지도 못하였고 방한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사가 많아 동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발이 신발 밑창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중공군도 있었고 총과 손이 얼어붙는 바람에 포로가 된 중공군도 있었습니다. 결국 중공군은 미군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날씨때문에 제대로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극적으로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7연대는 12월 4일 6백여 명의 부상자들과 함께 사단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하갈우리에는 4,300명의 부상자들과 1만 명의 병력, 1,500명의 피난민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함흥까지 완벽히 철수하는 일이 남았었습니다. 당시 지휘관은 모든 전투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공중으로 철수하라는 제의를 했지만 당시 미 해병대 1사단 사단장 스미스는 해병대의 불명예라며 그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4,300명의 부상자만 수송기로 공수하고 나머지 인원은 육로를 통해 탈출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위기에 빠진 미 해병대 1사단의 소식은 전세계에 알려졌는데 중국은 승리를 확신하며 당시 전황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미 해병대 1사단장이었떤 스미스는 말 한마디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습니다.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꾸어 공격하는 것이다"

 

 

그렇게 12월 6일 첫 집결지였던 하남우리를 출발한 미 해병대 1사단은 12월 7일 고토리에 도착하였고 12월 9일에는 중공군이 파괴시킨 수문교에 조립교를 설치해 병력과 차량을 통과시켰습니다. 그 이후에도 살인적인 혹한과 사투를 거듭하면서 철수를 이어가면서 12월 11일 함흥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미 해병대 1사단이 유담리에서 철수를 개시한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7일간 3600명의 미군이 전사,부상,실종의 피해를 입었으며 중공군은 25,000명이 사망하였고 12,5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미 해병대 1사단의 끈질긴 저항과 후퇴 작전 덕분에 중공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함흠지역 진출에 곤란을 겪었으며 덕분에 우리 국군과 UN군이 안전하게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 1사단이 전멸했다면 UN군이 한반도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결국 장진호 전투는 한반도를 구해낸 결정적인 후퇴작전이었습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개 졸병이었던 히틀러는 철저한 반 유태인 사상과 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적 기질로 독일의 정권을 잡은 후 2차 대전에서 폐할 때까지 갖은 만행을 저질렀지만 기계와 자동차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의 자동차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 열리는 모터쇼를 빠지지 않고 찾아가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우토반의 건설을 진두 지휘했으며 1930년대 세계 자동차 경주에서 독일이 우승할 수 있도록 자동차 업계를 독려했습니다.

 

 

그런 히틀러는 수많은 자동차 가운데 메르세데스 벤츠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벤츠를 좋아하는 이유가 벤츠를 타고 가다 다른 차와 충돌했는데 벤츠만 멀쩡하고 다른 차는 완파되면서 벤츠를 가장 믿었으며 벤츠의 창업자인 칼 벤츠가 최초로 가솔린 자동차를 개발한 독일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틀러는 특히 1933년부터 2차 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까지 벤츠에서 개발한 벤츠770 리무진을 애용했습니다. 벤츠770 길이는 6m, 너비는 2m나 되는 8인승 차이기 때문에 Grosser(독일어로 '거대한')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차를 움직이기 위해 슈퍼차져를 장착하여 230마력을 내는 7.7리터 8기통 엔진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편안한 승차감을 위해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4륜 독립 서스펜션이 적용되었습니다.

 

 

또한 벤츠는 키가 1m 68cm였던 히틀러를 위해 히틀러가 즐겨 앉는 앞자리 조수석은 높게 만들어졌고 오픈카 모델의 양 옆에 발판을 따로 설치해 쉽게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하였으며 히틀러는 이 차를 27대나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수십만명의 나치당원과 군대가 벌이는 퍼레이드나 사열식때마다 770 오픈카를 타고 앞자리에 서서 특유의 포즈로 사열을 즐겼습니다. 그가 한번 행차하면 보통 5∼6대의 770리무진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도 벤츠 770 리무진을 6바퀴형으로 개조해 타고 다닐 정도로 히틀러는 벤츠의 매니아였습니다

 

또한 이 벤츠 770 리무진은 언제나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방탄차로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히틀러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방탄차를 이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방탄 리무진은 철판의 두께가 4㎜, 유리 두께는 25㎜였습니다. 각각의 타이어는 20개의 독립된 공기실로 나눠져 있어 총알을 맞아도 끄떡없이 달릴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차의 무게는 5톤이나 되었지만 슈퍼차져를 장착한 엔진 덕분에 최고속도는 160km/h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히틀러는 방탄 타이어를 쿠션이 좋은 보통 타이어로 교체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장치가 하나 더 있었는데 자동차 뒷쪽에는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 서치라이트는 뒤에서 불순한 차량이 추격해올 경우 그 운전자의 눈을 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194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히틀러의 차량은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되면서 히틀러는 자신이 즐겨타던 벤츠 770을 포기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독일 국민을 위해 개발한 소형차 폴크스바겐을 타고 다녀야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히틀러가 2차 대전 당시 유럽을 여행할 때 사용했던 차량들 가운데 벤츠 770 1대가 독일 빌레펠트에 사는 한 수집가의 차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9년 러시아의 한 억만장자에게 약 95억원이라는 가격에 팔렸습니다. 이 벤츠 770가 서류나 사진을 통해 진짜 히틀러의 자동차임을 확인했으며 등록번호표도 당시 넘버인 1A 148461이 그대로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세를 결정지을 대공방전이 도리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얼마 앞두고 말도 안되는 신무기를 쏟아내던 히틀러에 맞서 영국도 신무기를 개발하게 됩니다. 영국이 개발하는 신무기는 독일군이 지키고 있는 거대한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독일군 방어선에 방벽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높이10피트(3m), 두께7피트(2.1m)의 콘트리트 벽을 파괴할 수 있어야 하며 상륙정에서 발사가 가능하며 자가 추진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개발진들은 위에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최소 1톤 이상의 폭약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1톤 이상의 폭약을 방벽으로 운반하기위한 무기를 개발하게 됩니다. 무기의 이름은 판잰드럼(Panjandrum)이었습니다. 참고로 판잰드럼은 1893년에 나온 판잰드럼이라는 뮤지컬의 주인공이 신고나오는 신발이름입니다. 

 

▲영국이 생각한 판잰드럼의 모습

 

판잰드럼은 1톤의 폭약을 장전한 드럼 양쪽에 직경10피트(3m)의 거대한 바퀴가 장착되어 있었고 전체중량 4000파운드(1800kg)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체 추진력은 바퀴의 림에 설치한 고체연료로켓이 회전력을 주어 전진하는 방식으로 시속97km/h속도까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야심차게 탄생한 영국의 신무기 판잰드럼의 최초 테스트가 엄청난 기대속에 1943년 9월7일에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무기 개발국의 보안 경고에도 불구하고 첫 테스트는 휴가를 얻은 사람들이 자주 오고 가는 해변가에서 실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상륙정에서 발진한 판잰드럼은 얼마 못 가 오른쪽 바퀴의 로켓이 떨어져나가면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넘어졌고 떨어져나간 추진로켓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실 판잰드럼은 기본적인 아이디어에서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켓의 추력이 판잰드럼을 전진시키는데 쓰이는게 아니라 바퀴에 회전력을 주는데 사용되는 구조가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이런 방식은 로켓이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추력 불균형으로 인해 방향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회전하는 바퀴는 작은 돌 하나에도 순식간에 방향이 바뀌는 것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참한 실패에도 영국은 3주후 중앙에 바퀴 하나를 추가하고 추진 로켓을 늘린 개량모델을 다시 테스트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로켓이 떨어져나가고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바다로 돌진해 폭발하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끈기를 지녔던 판잰드럼 개발진은 포기하지 않고 중앙의 바퀴를 다시 제거하고 두 바퀴를 케이블로 연결하고 양쪽에 보조막대를 달아 방향유지능력을 강화하고 로켓부착부분을 보강하는등 새로운 개량모델을 테스트하였는데 다행히 앞으로 전진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한번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개발진은 개발을 계속해 1944년 1월 해군관계자들과 과학자들은 물론 공식사진사들 앞에서 최종시험을 겸한 공개 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하지만 최종시험에서 판잰드럼은 처음에 순조롭게 나아가는것 같았지만 로켓이 떨어져나가면서 비틀거리더니 작은 모래구덩이에 빠지면서 오른쪽으로 꺾여 관계자들을 향해 돌진했고 제독과 장군들은 혼비백산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기는 소동끝에 다행히 바다쪽으로 방향이 틀어진 판잰드럼이 사방으로 로켓을 날리며 폭발하는 결과로 끝났고 , 결국 수십만 파운드가 날아간 뒤에야 프로젝트가 중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2009년에 판잰드럼을 최초 테스트하였던 해안에서 레플리카의 실증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속도는 느리지만 중간에 안 넘어지고 직진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래도 만약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 판잰드럼이 사용되었다면 상륙작전이 오히려 실패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히틀러는 영국 본토 항공전의 실패로 더 이상 영국을 점령할 수 없게 되었고 연합국 해군 전력을 차단해 상륙을 사전 저지하는 것도 힘들어지자 연합국이 프랑스에 상륙하는걸 저지하기 위해 거대한 대서양 방벽(Atlantic Wall)이라는 방어선을 구축하게 됩니다.

 

 

구간은 프랑스의 비스케이만에서 네덜란드와 독일의 국경까지, 실제적으로는 노르망디에서 시작하여 파 드 깔레까지 이어지는 총 연장이 3,860Km에 이르는 거대한 방어선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방벽을 건설을 시작하였는데 바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전문가도 아니였는데 불필요한 간섭을 자주 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일 내 자원수급 문제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량 콘크리트나 철강이 필요한 요새를 짓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런 방어선을 당장 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대량으로 소모하면서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는 독일군의 상당수 고위층의 의견때문에 공사의 진척도는 바닥을 달렸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이 패배하면서 궁지에 몰렸던 에르빈 롬멜 장군이 새로 만들어진 B집단군의 사령관이 되었고 분위기가 좀 바뀌게 되었습니다. 원래 롬멜 장군은 대서양 방벽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성공해서 프랑스를 교두보를 만들면 더 이상 독일이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결정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건설물자와 장비는 히틀러가 중시했던 파 드 칼레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채널 제도에 집중되었습니다. 물론 채널 제도에는 중장갑을 갖춘 해안포 진지를 설치하는 등 대서양 방벽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방어진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할 노르망디는 물자도 제대로 못 받아서 제대로 된 요새시설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계획했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대서양 방어 방벽을 독일의 지원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돌파했습니다.

 

 

하지만 꼭 노르망디가 아니더라도 연합군의 상륙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군이 아무리 잘 막는다고 하더라도 3,869km에 이르는 거대한 구역을 한정된 독일의 군대가 수비한다는 것은 불가능이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분산되어있었고 연합군은 엄청난 밀집도를 가지고 취약한 부분 한 곳을 돌파하기 때문에 에초에 그 넓은 구역을 방어한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또한 독일은 상륙작전을 저지하는 것보다 소련에 대한 침공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많은분들이 방벽 덕분에 상륙 이후 연합군을 한달여간 저지할 수 있었으며 만약 노르망디 지역에까지 본격적으로 방벽 건설이 되었으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시한 당시 상황을 보면 이 대서양 방벽이 완벽하게 요새화가 완성되었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수도 있고 상륙작전이 실패했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연합군은 여기에 쓰인 방벽 구조물중 철근빔으로 만들어진 대전차장애물을 활용하여 '헷지 차퍼' 혹은 ' 헷지 블로 커터'라는 전차 장비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이 대서양 방벽이 많이 남아있는 이유 중 첫번째는 철거공사비용이 천문학적이여서 감당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케아(IKEA)는 스웨덴 잉바르 캄프라드가 창업한 가구 및 생활 소품을 판매하는 세계 최대의 가구업체입니다. 매년 세계에서 생산되는 목재 중 1%가 이케아 가구에 쓰일 정도로 엄청난 인기와 소비량을 자랑합니다. 이케아의 가장 큰 장점은 북유럽풍 디자인의 가구를 정말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쉽게도 광명시에 하나밖에 없었지만 올해 10월 19일에 고향점이 오픈하면서 매장이 두개로 늘었으며 이케아는 2020년까지 1조2000억원을 투자해 대전, 부산 등 5개 매장을 더 열 계획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케아에서 꼭 사야할 가성비 최고의 아이템 10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라크(LACK) 보조테이블

가격 9,000원

이케아 라크 시리즈는 모두 저렴한 편인데 이 라크 보조테이블은 유독 저렴합니다. 저렴한 가격에 깔끔하고 튼튼해서 거실, 주방에서 모두 만족스럽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LERSTA 스탠드 조명

가격 17,900원

보통 분위기 연출하기 좋은 스탠드 조명을 구입하려면 최소 5만원부터 시작입니다. 그런데 심플한 디자인에 스탠드 조명을 이케아에서는 17,900원에 득템할 수 있습니다.


 

 

   LERBERG 선반

가격 1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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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TERA 미니양초랜턴

가격 3,900원

한 때 대란을 일으켰던 미니양초랜턴입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펜션에 가면 볼 수 있는 아이템인데 이케아에서 3,900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으로 득템할 수 있습니다.


 

   MULIG 옷걸이 행거

가격 9,900원

심플한 디자인으로 기능성과 멋을 갖춘 이 행거는 욕실이나 밀폐된 베란다와 같은 습한 공간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곳에서 사용할 수 있으며, 플라스틱 다리받침이 있어서 바닥에 흠집이 생기지 않습니다.


 

   RASKOG 기저귀함

가격 39,900원

개그우먼 이국주가 나혼자산다에서 사용하면서 화제가 되었던 국민 기저귀함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미용실에서 자주 사용하고 요즘엔 애기 키우는 집에서 정말 많이 사용합니다. 색깔도 깔끔해서 인테리어에도 좋으며 특히 바퀴가 달려서 필요한 곳으로 이동이 편리합니다.


 

 

   RAJTAN 양념통

가격 1,900원

이케아 양념통이 4개에 1,900원입니다. 이만한 가성비 최고의 아이템은 찾기 힘듭니다. 유리로 되어있어서 깔끔하고 양념이 다 보이구요 다른것도 담아도 참 예쁠거 같습니다.


 

   JUSTINA 의자패드

가격 4,900원

인터넷에서도 이케아 유스티나를 검색하면 5~6천원 정도의 가격으로 구매가 가능하지만 이케아에 직접 방문하시면 4,900원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 의자패드는 딱딱한 의자에 올려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쿠션재, 단열재 목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인 폴리우레탄 폼을 내장재로 사용했고 패드 커버는 100% 면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욕실메트 BADAREN

 

가격 4,900원

이케아 욕실메트 BADAREN도 나쁘지 않은 가격으로 질도 아주 좋습니다. 자주 갈아줘야 하는 욕실매트를 저렴한 가격으로 여러장 구매해서 교대로 사용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케아 PS 수납장 

 

가격 69,900원

정말 확 끌리는 디자인의 수납장으로 도어를 잠글 수 있어서 귀중품 분실 위험도 한결 덜 수 있습니다. 가장 장점은 전선을 정리할 수 있는 출구가 있어서 깔끔하게 전선을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