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미국의 비밀 해제된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한국전쟁 당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 중공군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1950년 10월 중순, 평양을 탈환한 유엔군과 국군은 압록강을 향해 진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많은 피를 흘린 한국전쟁에 마지막 승리가 눈앞에 보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은 이 무렵 압록강을 넘어 첫 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전력을 과대평가 했던 UN군은 후퇴의 후퇴를 거듭한 끝에 38선 일대까지 밀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UN군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다시 낙동강 방어선까지 물러날 의사를 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UN군과 국군은 평택-삼척에 이르는 37도선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습니다.

 

 

문제는 이 당시 미국 본토에서는 위험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12월 22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공의 참전의도가 한번도에서 유엔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진 이상, 유엔군은 한반도를 포기하고 완전히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중공군이 금강까지 진출하게 될 경우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수립, 약 백만명의 한국인을 이주기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국군의 반발을 우려했던 미국은 한국정부나 일선 야전 부대에는 정식 통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군은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37도선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던 우리 국군은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된다면 지난 여름에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할것이라는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선 부대나 장병들은 37도선 바로 뒤에 있는 금강은 그다지 중요한 방어선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건 금강 부근까지 밀릴경우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 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극적인 반전이 찾아오게 되는데 중공군은 우리 국군의 절박한 상황을 몰랐고, 전열 재정비를 위해 서울에서 진격을 멈췄습니다. 이 시기 신임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UN군과 국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승리할수 있는 소규모 국지전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계속된 패배와 그로 인한 후퇴로 곤두박질 치고 있던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작은 승리가 절실히 필요 했기 때문이였습니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움직임이 둔화된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강한 미 25사단 27연대 전투단이 투입되었는데 이를 작전명 울프하운드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울프하운드작전은 한국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됩니다.

 

 

1951년 1월 15일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며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개시된 이틀간의 수색작전의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수원 부근에서 맞닥뜨린 중공군은 상상이상으로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겨졌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아군에게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후속대책을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현 전선에서 반격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리지웨이 사령관의 울프하운드 작전으로 벼랑 끝에 몰려있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대동아제국 건설 야망에 불탔던 일본은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일본은 국가 주권을 상실한채 연합국의 점령지로 전락했습니다. 전쟁일 일삼던 군국주의 국가 일본에게 그것은 파산이었습니다. 그리고 항복과 동시에 군대는 해산하였고 군인들은 무장해제되었으며 일본의 모든 군수공장들도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일본 거리에는 일자리와 먹을 것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특히 6백만에 이르던 일본 군인들의 생계는 더욱 절박했습니다. 일본은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위한 헌법을 정하는 일보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일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문을 닫았던 군수공장들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났습니다. 이는 미국이 일본을 한국전쟁을 위한 기지로 이용하면서 일본은 거대한 보급섬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쿄 시내에 처음 슈퍼마켓이 생길 만큼 경기가 호전되었고 미군에 고용된 일본인들이 30만명, 조달한 물자가 16억 달러, 무기와 군수품 24억 달러, 무려 62억 달러의 특수를 노렸습니다. 그렇게 한국전쟁 특수 덕분에 일본에는 벼락부자가 많이 생겼으며 당시 많은 투자가 이루어진 덕분에 지금 일본 대기업의 기초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10월 일본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유엔 회의에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영국, 호주, 프랑스 등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연합국들 조차 일본의 참전에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일본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태평양 전쟁의 전범국가였기 때문에 일본에게 다시 무기를 쥐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참전했던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일본군의 참전설이 제기된 것은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1950년 북한군에 의해서였습니다. 1950년 10월 소련의 외교문서를 살펴보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의 문제에 관하여 항의하라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가브릴 크르트코프씨는 자신이 직접 일본 포로를 심문하였으며 그 일본군은 50여 명의 부하를 데리고 있는 장교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일본인들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구일본 해군 260명이 해상보안청장의 명령으로 긴급 소집되어 일본 특별 소해대라는 이름으로 모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모노세키항에서 동 트기전부터 출항을 준비하였으며 300톤급의 전선과 소해정을 타고 일본 근해를 지나자 미 제7함대와 합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한창 교전 중인 적진의 한복판 원산이었습니다.

 

▲원산 상륙 작전을 위해 동원된 미 해병 수송선들이 원산항이 있는 영흥만에 정박해있는 모습

 

당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은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진격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가장 큰 문제는 유엔군 부대에 대한 원활한 보급이었습니다. 집중포화로 초토화 된 북한 지역은 대부분의 도로가 끊겨져서 육로로 보급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보급이 원활했던 부산항은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신속한 보급을 위해 원산상륙작전이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원산의 상륙을 막는 기뢰였습니다.

 

▲1950년과 1951년에 원산 앞바다에서 기뢰소해장비를 견인하고 작업하는 모습

 

당시 원산 앞바다에는 무려 3천 개의 기뢰가 집중 부설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미 해군사령관은 일본 정부에 소해정 참전에 관한 협조를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최고의 기뢰 제거 능력을 가지고 있던 일본소해대를 한국전쟁에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뢰는 육지의 지뢰와 비슷한 것으로 바다 속을 떠다니다가 부딪히면 폭발하는데 일본 소해대는 이 기뢰를 그물로 건져올려서 처리했습니다.

 

 

 

사실 일본의 소해대 파병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패망 이후 전세계와 국민들에게 전쟁포기 서약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특별 소해대는 비밀로 승인되어 조직적으로 파병되었으며 모든 것은 극비에 부쳐졌습니다. 그리고 10월 25일 미군은 원산상륙에 성공하였습니다. 이후 미군의 상륙이 있을 때마다 일본 특별 소해대가 먼저 출동해서 기뢰를 제거했습니다. 한국전쟁 동안 53척의 소해정이 동원되었고 1,250여 명의 소해대원이 참전했습니다.

 

 

▲패전 후 미국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일본왕 히로히토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 이유로 희생하며 미군 작전에 참전했던 것일까... 당시 일본은 패전 이후 아직 미국에게 점령당한 채 강화조약도 맺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일본의 최고 통치자는 천황이 아닌 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어떻게든 맥아더에게 협력하여 강화조약을 맺고 독립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그리고 일본은 전쟁협력이라는 실적을 통해서 한국전쟁에 일본이 기여했다는걸 발판삼아 한국문제를 둘러싼 정치회담에서 발언권을 획득하겠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951년 9월 8일 일본은 마침대 미국 등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패전 5년 만에 주권을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제국주의 패망과 함께 전범국가로 전락한 일본은 1억 국민의 총참회와 함께 전쟁을 포기하기하고 탈바꿈하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일본은 육해공 자위대 인원 30만 명, 군사예산규모 세계 3위. 하지만 군대가 아닌 자위대로 불리는 일본은 아직도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일본의 재무장은 없었을 겁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경제가 급속도로 살아났고 자위대 전당기라 할 수 있는 경찰예비대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에 자위대란 이름으로 바뀌는데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는 일본군대 재무장의 첫걸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자위대는 1998년에 사상 최초로 육해공 자위대 통합훈련을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가상작전 시나리오는 모 국가에 탈환된 동해의 섬을 탈환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건 독도가 아니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