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NLL은 서해뿐만 아니라 동해에도 그어져 있는데, NLL 그을 때야 군사적, 정치적 판단으로 그은 거지만 동해 어민들 입장에선 NLL 북쪽 해역에서 명태가 더 잘 잡혔습니다. 안 그래도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인지라, 어민들은 자주 NLL 북측수역에서 어로작업을 했고, 이를 말려야 했던 우리나라 해군은 어쩔 수 없이 같이 넘어가서 보호작전 및 철수요구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1월 19일 언제나 그렇듯 우리나라 어선들은 명태 잡으러 NLL을 넘었고, 이에 당포함도 덩달아 넘어가서 어선들에게 북한 수역에서 내려오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PCE-56 당포함은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650톤급 초계함이었습니다

 

▲당시 당포함에 승선한 장병들 모습

 

하지만 그 순간 북한 경비정 2척이 출현했습니다. 당포함은 이들이 어선을 납북해 가려는 것으로 파악하고 즉각 대응에 들어가 북쪽으로 전진했고, 북한 경비정들은 퇴각했습니다. 사실 변변한 함정이 없었던 북한 해군은 미국으로부터 공여 받은 우리나라 해군에 대항할 수단이 별로 없었습니다.

 

▲침몰하기 전까지 명태잡이 어선들을 끝까지 보호한 당포함

 

그러나 북한 경비정들이 얌전히 퇴각한 것은 북한의 노림수였습니다. 13시 55분, 북한 해안가 포진지에서 기습적으로 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련에서 들고 온 강력한 122㎜ 해안포 10여 문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당포함 주위에 물기둥을 만들었고, 기관실을 시작으로, 스크류, 기관포탑 등이 계속 피탄당하며 당포함은 순식간에 전투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당시 당포함에 침몰 기사

 

바로 당포함도 급히 응사했으나 당포함의 무장은 3인치(76.2㎜) 포 1문, 40㎜ 6문, 20㎜ 4문에 불과했으므로 화력면에서 상대가 되질 않았고, 40㎜와 20㎜ 기관포는 아예 북한군 포대에 도달하지도 못 했으며 3인치 함포는 북한군의 포탄을 맞고 조기에 제압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북한군 포들은 해안의 진지에 잘 은폐되어 있었으므로 20발을 발사한 3인치 함포탄도 별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뒤이어, 작전 중인 다른 해군 함정들이 달려오자 북한군의 포격은 멎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당포함은 만신창이가 되어 기동 불능 상태에 놓였고, 결국
함장은 퇴함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공격으로 당포함은 결국 침몰했고, 승조원 39명이 전사했습니다. 이중 28명은 시신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어로작업에 참가했던 어민 중 몇 명이 해군에 미안하다며
자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태가 북한 수역에서 더 잘 잡히는건 여전한 사실이었고, 어선들은 계속 NLL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어로자원을 따라 남북한 어선이 NLL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90년대 들어서야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작년 중국에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이어 동해 NLL 인근 조업권도 판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당포함 사건은 북한측의 치밀하게 준비된 도발로서 비록 우리 측이 NLL을 먼저 넘었긴 했지만 경고 없이 바로 조준사격을 한다는 것은 국제적 관례를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짓이라 북한측의 책임이 컷습니다. 1999년 이후 제 1, 2차 연평해전이나 대청해전 모두 북한측이 넘어왔어도 우리나라 해군은 처음부터 조준사격을 가하지 않고 사전 경고를 먼저 보냈지만 북한 해군은 포탄으로 대답했습니다.

 

 

1970년 1월 19일, 전몰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당포함 전몰장병 충혼탑이 건립되었습니다. 그렇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해군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전사하신 분들을 추모하며, 매년 1월 19일, 강원도 고성군에서는 당포함 전몰장병 추도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천안함 46용사 뿐 아니라, 당포함 39명의 순국 장병들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101공수사단은 (101st Airborne Division)미국 중남부 캔터키주 캠프 캠벌(Capm Cambell)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중무장헬기에 의한 공중강습이 주임무입니다. 이 부대는 지난 1942년8월 남부 루이지애나주 캠프 클레어본에서 공수사단으로 창설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세계 최강 미군 육군의 역사상 가장 명성과 공적이 높은 정예사단입니다.

 

▲노르망디상륙작전 출격 전에 아이젠하워 사령관의 훈시를 듣고있는 101공수사단 부대원들

 

그리고 이 부대의 명성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울부짖는 독수리(Screaming Eagles)」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101공수사단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D-day에만 40%의 병력을 잃었지만 후방을 교란시키고 교두보를 미리 확보하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적인 작전을 이끌면서 그들의 용맹함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켓가든 작전 투입하기 전 101공수사단 부대원 모습

 

그리고 이들은 짧은 휴식을 마치고 역사상 전무후무할 최대규모의 공수작전에 투입되었는데 마켓가든 작전이었습니다. 사실 마켓가든 작전은 연합국 최대실수 중 하나로 뽑히는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101 공수사단은 아이트호벤의 다리를 점거하는데 성공하면서 선전하였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하였습니다.  당시 101 공수사단은 지리상의 이점과 풍부한 실전 경험으로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였지만 사실 무모했던 마켓가든 작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게 마켓가든 작전 종류 이후 제101 공수사단은 전선에서 물러나 프랑스 인근 지역에 배치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히틀러 최후의 도박으로 알려진 발지전투가 개시되면서 제101 공수사단은 최전방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101 공수사단은 독일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항복하라는 독일군의 전문까지 받았지만 N U T S (엿 이나 먹어라) 라는 짧고 굵은 답신을 보냈습니다.

 

1944년 6월 8일 독일군을 물리친 후의 기념사진

 

이에 분노한 독일군 지휘관은 101공수사단을 괴멸시키기 위해 며칠 동안 박격포와 야포 공격을 퍼부으며 공격을 지속했지만 101공수 사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결국 바스토뉴를 사수하였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연합군을 네덜란드 방면으로 몰아붙이고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맺겠다는 꿈을 접어야만 했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말도 안되는 독일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제 101공수사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미국은 대대적인 감군을 실시하였는데 101공수사단 역시 1045년 11월 30일 해체되었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재창설 되었습니다. 이후 미국이 월남전, 중동문제 등 각종 평화유지군 임무, 카리브해의 각종 사태, 걸프전, 테러와의 전쟁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특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펼쳐진 테러와의 전쟁에서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베트남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미 육군의 귀중한 전력으로 활약했고, 이라크 전쟁에서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들을 교전끝에 사살한 것도 101공수사단이였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대규모 공수작전에 낙하산으로 강하하는 정예보병사단에서 공수부대의 효용성이 떨어지는 현대전의 상황을 감안해서 헬리콥터를 이용한 강습을 주로 하는데 사단 내에 있는 헬기만 해도 400대 가까이 됩니다. 공격헬기만 AH-64 아파치 시리즈가 72대나 있으며 기타 정찰헬기 40여 대, 수송헬기 2000여 대를 보유하고 있어 기동성도 미 육군 내에서 최고로 꼽힙니다.

 

 

덕분에 3개여단과 지원부대 등 1만여명 규모를 자랑하는 101 공수사단은 다양한 헬기를 운용하면서 주 공략목표에 정예병력과 장비를 투입해 적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이 101공수사단의 헬기부대 전력이면 우리 대한민국 육군 항공대 총력으로도 상대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사단의 공중화력은 웬만한 중소국가의 육군력과 공군력을 합친 것 정도로 위력적이라고 군사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