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평상적으로 군용수통은 단독군장이나 완전군장시 탄띠에 착용하게 됩니다. 여름에 힘든 훈련에 수통에 담긴 물은 지친 장병들에게 달콤한 휴식을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현재 우리 대한민국 국군은 개량형 알루미늄 수통과 플라스틱 수통의 두 종류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예전 육군본부 국정감사에서 수통에 대한 미생물 배양 결과를 공개하였는데 의외로 플라스틱 수통에서는 균이 자라지 않았지만 알루미늄 수통에서는 바실러세러우스균이 검출되었습니다. 플라스틱 수통의 경우 내구성이 낮고 장기간 사용할 경우 냄새가 베이는 단점이 있지만 우리 장병들의 건강을 위해서는 알루미늄수통보다는 개량형의 플라스틱 수통이라도 개발되어 하루 빨리 보급되어야 합니다.

 

 

정말 수통 하나로 나라를 지키는 장병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현재도 사용되는 수통 중 상당수가 30년 넘게 사용된 골동품들이며 수통에 대한 별도의 세척 기준도 없어서 세정제나 세정도구도 지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통의 위생 문제로 인해 실제 부대에서는 수통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훈련소에서야 지급품만으로 생활해야 하니 수통을 사용해서 물을 마시지만, 일선 부대에서 수통은 보여주기식 군장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훈련을 FM으로 한다면 수통 충만 규정으로 인해 수통에 물은 가득 채워놓지만, 정작 물을 마실 때에는 컵이나 페트병 등의 다른 용기를 사용해 마시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급된 물품이 그 위생문제로 인해 사용되지 않으며 오히려 짐이 되는 상황이 정말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낡은 수통에 대한 문제는 10년전부터 국정감사를 통해 지속해서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개선은 아직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방부의 규정을 보면, 군용 수통은 별도의 사용 연한이 없어 파손 등으로 더 사용할 수 없을 경우에만 교체가 가능하며 30년~40년 동안 사용되어 수통 외면이 마모되고 수통 내부에 세균이 득시글거려도 규정상 교체는 불가하다고 합니다.

 

 

수통의 개당 가격은 9천 원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국방부는 예산 부족을 이야기하며 수통 문제의 해결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국 군 골프장에서 전동 카트를 구입하는 것에만 사용된 금액이 약 160억 원이 넘었다고하고 매년 전동카트 관리에만 4억6천만 원이 들어가며, 잔디나 클럽하우스 관리 등 전반적인 시설 유지비까지 포함하면 연간 약 350억 원 이상이 골프장 유지에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평균 9천 원인 수통을 대한민국 모든 국군장병에게 지급할 경우, 필요한 예산은 약 50억 원 수준입니다.

 

 

 

세계 최강의 군수물자 개발/생산력을 보여주고 있는 미군 역시 2000년 대 초반까지만 해도 수통을 사용하긴 했지만 현재는 카멜 백이라는 휴대가능한 물주머니를 이미 보급완료하였습니다. 카멜백은 배낭처럼 등에 메고 다니며 긴 취수관을 통해 음료를 입으로 빨아먹을 수 있는 형태이며 보온/보냉 효과가 뛰어나 장시간 시원한 음료를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카멜백은 전시나 특수훈련시에만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평소에는 수통을 사용할까? 아닙니다. 미군은 그냥 생수를 사다 마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보급을 자랑하는 미국의 위엄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치 독일와 일본은 추축국의 양대 주력국가였습니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까지 침공한 것을 계기로 나치 독일일본이탈리아가 군사 동맹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을 목표로 뒀던 히틀러는 이제 눈을 돌려 소련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장군들은 무모한 짓이라며 히틀러를 설득하려했지만 히틀러는 오직 자신만의 생각대로 계획을 실행에 옮겨나갔습니다.

 

 

그렇게 1941년 6월 22일 그렇게 소련을 기습 침공하여 초반은 순조롭게 소련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히틀러가 장군들의 말을 경청치 않아 전략상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또한 전쟁이 지속화 되면서 독일군들은 혹독한 소련의 겨울 추위를 맛보게 됩니다 이로인해 독일군들이 얼어 죽고 장비의 고장도 잦아지게되버렸습니다. 또한 독일에서 소련까지 보급품을 보내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뿐더러 소련의 포위 전술로 인해 보급선 마저 끊기게 되버렸습니다. 결국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 6군이 포위되어 항복하는 바람에 독일은 후에도 여러 작전에서 소련에게 지속적으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세계의 강대국 반열에 올라있던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하였지만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며 패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독일은 소련을 상대하였고 일본은 미국을 상대하였지만 둘다 패배하였습니다. 사실 당시 추측군은 미 본토 침공 계획을 세웠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추측군이 세웠던 미 본토 침공 계획이 이루어져 미국을 공격하였다면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치 독일과 일본이 세웠던 미 본토 침공 계획 시나리오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시나리오

 

일본군이 알래스카에 있는 미 해군 기지인 더치만(Dutch Harbor)을 통해 항모전단을 보냄과 동시에 독일에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함대와 유보트 전대로 미 동부 해안을 공격 및 교란하는 합동작전이었습니다. 비교적 해군력이 약한 독일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펼치고 일본은 알래스카를 통해 캐나다를 넘어 미국 본토로 남진하고 미 서부 주요 도시들인 시애틀, 샌 플나시스코와 로스 앤 젤레스 등을 점령하는 시나리오였습니다. 이 작전이 유일하게 부분적으로 시도된 작전입니다. 


 

 

 두번째 시나리오

 

이 작전은 정면 공격으로 불리는 시나리오인데 일본 본토에서 출진한 항모전단이 진주만을 점령후 기지로 삼아 미 서부를 침공하는 계획입니다. 계획중엔 독일 해군이 인도양을 통해 일본 해국과 합류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고 캘리포니아 주가 주요 타겟이였습니다. 그러나 항모전단만으로 태평양을 건너야했음으로 가장 실현성이 낮은 시나리오였습니다.


 

 

 세번째 시나리오

 

독일 해군과 합친 일본 해군이 남평양을 루트로 삼아 파나마 운하를 공략하고 에콰도르에 상륙하여 그대로 멕시코를 넘어 미 본토로 북진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미 서부 주요 도시들이 타겟이었고 작전중 진주만을 공략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네번째 시나리오

 

독일 해군이 주력이 되어 미국 본토를 침공하는 계획입니다. 우선 독일 공군과 해군 잠수함 전단이 스코틀랜드를 공격해 영국 해군의 발목을 잡고있을때 독일 함대가 도버만을 무사히 통과하여 아프리카로 향합니다. 그와 동시에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과 이탈리아군이 공동작전으로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고 일본 함대가 지중해로 들어올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놓습니다. 그후 서부 아프리카에서 독일 함대와 합류하고 마지막으로 비시 프랑스 해군과도 합류해 거대 연합 함대를 만들어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출진해 브라질로 향합니다. 그대로 브라질에서 북진해 만나는 연합군 함대를 격파후 캐러비안 섬들을 점령하여 전진 기지로 삼고 뉴 올레온스로 가서 미시시피 강을 통해 미국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이 네번째 시나리오는 미 본토 침공 계획 중 가장 큰 작전 계획이었습니다.


 

 다섯번째 시나리오

 

가장 복잡한 방법으로 독일 함대는 북 대서양에서 남쪽으로 꺽어 아프리카로 가고 일본 함대는 네번째 시나리오처럼 수에즈 운하를 통해 지중해를 건너 독일 해군과 합류합니다. 독일측에선 25척의 군함을 네갈래로 나눠 침공할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여섯번째 시나리오

 

마지막 시나리오입니다. 이 작전 역시 일본 해군과의 공동작전입니다. 우선 일본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거쳐 지브롤터의 영국 요새를 점령합니다. 영국 요새 점령은 일본 해군과 독일 육군이 공동작전을 펼칩니다. 이브롤터 해협을 건넌 일본 해군은 독일 해군과 공군이 영국을 공격하며 주의를 끄는동안 도버 해협을 무사히 건너 독일로 향한후 두 함대가 연합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침공 및 점령후 기지로 삼아 두 갈래로 나눠 캐나다를 침공합니다. 한쪽에선 세인트 로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한쪽에선 허드슨만을 통해 캐나다로 들어갑니다. 각자 일본과 독일 육전대는 캐나다에 상륙하고 연합 함대는 오대호에서 작전을 펼칩니다. 주요 타겟은 시카고와 디트로이트등의 대도시들이었습니다.


 

실제로 독일은 U-보트를 통해서 미 서부해안을 정찰하였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독일이나 일본이 육군에 치중하는 것보다 해군에 역량을 쏟아부어서 1940년 이전에 미국을 쳤더라면 당시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던 미국은 아마 힘든 싸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67년이 되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아픈 기억임과 동시에 꼭 알아야 할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6.25 한국전쟁은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나라가 없어질 뻔 했던 정말 큰 위기였습니다. 그 당시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을 작고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던 유엔 참전 용사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아이들을 보면 한국전쟁이 북침인지 남침인지도 헤깔려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모두가 한국전쟁에 대해 잊지말아야 사실 5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1.  6.25 한국전쟁은 남침이다.

 

6.25 한국전쟁이 남침이다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던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에게 남침과 북침에 대한 용어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용어의 헷갈림 현상이 나타나는 가장 큰 원인은 아마 인터넷에 익숙해져 줄여 말하는 습관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남침=남한이 침략한 것, 북침=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69%의 고교생 응답자가 6.25 한국전쟁을 북한이 침략해온 것이라는 내용은 알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못 알고 북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남침입니다.


 

2.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를 도운 나라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도운 나라 63개국 중 병력을 지원한 16개국의 나라들을 중점적으로 보면,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터키,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총 16개국이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습니다. 유엔참전용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우리나라 곳곳에는 참전국의 참전기념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참전했던 16개국에도 참전기념비가 건립되어 있습니다.


 

3.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생명

 

1950년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여 동안 계속된 전쟁은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낳았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6·25 전쟁 기간 국군 사망자는 13만7천899명에 달합니다. 이 가운데 육군은 13만5천858명이었으며 해군과 공군은 각각 1천903명, 138명이었습니다.

 

 

국군 참전자가 모두 몇명인지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지만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전쟁 기간 경찰도 3천131명이 전사했으며 7천84명이 실종됐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북한군에 맞서 싸운 유엔군 사망자는 3만7천902명입니다.


 

4.  한국전쟁의 주범은 김일성

 

사실 6.25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지에 관한 진실은 1991년 구소련이 무너지기 전 까지만 해도 논란 속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북한은 남한과 미국이 먼저 일으켰다고 하고 남한은 북한이 먼저 침략한 것이라며 팽팽히 맞서왔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남한과 북한 모두 침략전쟁으로 통일을 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였습니다. 그러나 1991년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 정부는 수백 점의 한국전쟁관련 자료들을 공개하였고 한국전쟁의 진실이 처음으로 기록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자료를 살펴보면 1950년 1월, 김일성은 남한을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전쟁을 하게 해달라고 스탈린을 찾아 갔으며 그동안 김일성의 전쟁의지를 반대해 오던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마음을 바꾸어 김일성의 전쟁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단서가 있었습니다. 만약 미국이 참전한다고 하더라도 소련은 참전하지 않으며 대신 중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우리 민족에게 참혹한 불행과 고통을 주었습니다.


 

5.  미국이 선정한 6.25전쟁 4대 영웅

 

미국이 선정한 6.25전쟁 4대 영웅은 맥아더 장군, 리지웨이 장군, 백선엽 장군, 그리고 북파공작원의 대부 김동석 대령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의 급박한 상황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재량권으로 최대한 많은 전투력을 투입하여 한국군의 급격한 붕괴를 막았으며 이후 UN군 총사령관으로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으로 평가받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후퇴를 허락지 않는 반격작전의 용장’으로 불렸으며 공수단 군복에 수류탄을 달고 다니며 한국전쟁을 지휘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 최고의 영웅으로 꼽힙니다.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이 패하여 낙동강 전선이 뚫렸다면 대한민국은 1950년 8월에 멸망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동석 대령은 철저한 비밀을 요구하는 첩보부대의 일원으로 6·25전쟁 기간 동안 생사를 넘나들며 보통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현행 법령에는 군인들은 자신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 필요한 최적의 보건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많은 군필자들은 우리나라 군 의료체계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군의관이 제대로 진단할 수 있는 환경부터가 열악합니다. 그러다 보니 오진률이 민간의원보다 높으며 장비가 부족하다 보니 정밀진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부사관급 이상의 간부들은 웬만하면 군병원에 안가게 되고 장병들도 민간병원에 가고 싶어 하지만 그러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기에 휴가를 내고 민간병원에 가서 진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장기 복무를 신청하여 복무하고 있는 군의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군의관들은 병계급과 마찬가지로 징병되어 온 인력들인데 이 특수 전문직인 군의관이 징병되어 들어온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가 됩니다. 사회적으로 의료사고에대한 비판적인식이 팽배해지고 있으며 빈약한 군의료체계로 군의료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현 상황에서 직업군인들은 의료사고를 군의관 책임으로만 치부하고 본인들의 지휘책임은 회피하는 추태가 군내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의관들이 고생하는 용사들에게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현재 군 의무시설은 기본적인 진료 요건도 갖추지 못한곳이 태반입니다.

 

 

의료의 발전은 곧 장비의 발전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정확한 감별진단에 있어 장비의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하지만 군대에는 이런 장비가 구비된 곳이 거의 없어, 군병원에조차 일정 이상의 장비가 없는 수준입니다. 한창 건강한 청년들이 모인 군대라는 특수성상 대부분의 병들은 사실상 운이 좋게도 약 몇 봉 처방해 주거나 약을 발라주는 걸로 나아지기에 장비 개선이 더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군에서 보급되는 약품의 종류가 제한적이라서 그 약들로 치료를 해야하며 민간병원에서는 잘 쓰이지 않게 된 구식 약도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국군병원 약제과에는 약이 비교적 다양한 편이며 만약 희귀한 약이라 구하지 못할 경우 국군의무사령부 민원게시판에 올리면 여러 방향을 통해 구해줍니다.

 

 

국군대전병원, 국군수도병원급의 대형 군병원에선 주말 공휴일 제외 매일 3~4건 이상의 수술을 자주하고 있지만 문제가 많습니다. 원래 군대 이야기라는 게 과장이 심하게 들어가기도 하지만 어쩌다가 군의관에게 수술받았다는 얘길 들어보면 치질 수술 도중에 괄약근을 잘못 베어내 평생 기저귀를 차게 되었다든가, 어딜 잘못 건드려 식물인간이 되었다든가, 맹장수술 받으려고 전신마취 받았다가 마취사고로 사망하게 되거나, 손가락 한개 수술하다가 한팔 전체가 마비되거나, 손가락 3개를 완전히 썩혀버리거나, 아킬레스건 치료때 소독을 제대로 안 해줘서 발을 못 쓰게 되었다는 등등 거짓말같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중 상당수가 실제로 법원에 소송이 제기된 사례들입니다.

 

 

2012년 제25보병사단에서 GOP 총기오발사건이 발생했는데, 총상을 치료할 수 있는 군의관이 단 2명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었습니다. 피해자 김 이병은 총상치료병원 찾느라 무려 4시간이 지체됐고, 과다 출혈로 자칫 목숨까지 잃을 뻔했습니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군의관의 첫번째 존재 이유가 바로 총상 환자 치료인데 이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군 의료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구조적 원인 중 가장 큰 하나가 바로 일반 장병들이 진료를 받기까지 진입 장벽이 높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군 의료관리체계에 대한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를 살펴보면 진료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한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관련한 질문에 훈련병의 28.4%, 일반병의 31.6%, 입원병의 46%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군 내부에선 아플 때 아프다고 표현하면 선임병·간부 등 상급자의 눈치를 받는 경우도 많으며 아프면 꾀병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도 안되는 선입견이 깔려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은 꾸준히 제기 되었음에도 2017년 현재도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군 의료체계가 민간과 벌어진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예산투자가 한 번쯤은 이뤄져야 하며 진료경험이 풍부한 민간의사가 장병을 치료할 수 있는 민군협진제 구축이 필요해보입니다. 민간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후방은 군 병원을 모두 폐지하고 부대와 가장 가까운 민간병원에서 진료를 받도록 하고 후방병원에 근무하는 군의관을 모두 전방부대에 배치한다면 지금보다 세심한 진료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