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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김정은과 측근들은 지하 벙커에서 숨어서 전쟁을 지휘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김정은은 부인 리설주와 최측근만 데리고 중국 국경 지역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김정은은 예전부터 중국으로 탈출하기 위한 지하통로까지 마련해놓았습니다.

 

 

2015년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중국과 인접한 자강도 산악지역에 많은 땅굴을 건설해놓았는데 전시에 김정은이 중국으로 도망가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자강도 산악지역에는 지하 수백 미터 지점에 여러갈래의 지하도가 있으며 이 통로는 오직 김정은의 가족과 측근들만 이용할 수 있으며 김정은의 친위대인 호위총국요원을 제외하고는 지하도의 구체적인 위치를 아는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은 1987년부터 1996년까지 묘향산에서 창성까지 총 길이 120km의 민간인들은 출입할 수 없는 고속도로를 닦았는데 이것도 탈출로입니다. 전쟁이 나면 김정일은 평양에서 순천까지 지하통로로 도망친 뒤 여기서 대동강을 넘어 묘향산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전용고속도로로 창성 특각 압록강 밑 지하통로로 중국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정은의 탈출로는 이 지하통로 뿐만 아닙니다. 최근 영국 매체 익스프레스는 미국이 북한을 향해 군사공격을 실행할 경우 김정은은 미국의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중국 국경 인근에 부인 리설주와 2명의 로켓 전문가(김락겸 北전략군 사령관, 노동당 군수공업부 부부장 김정식) 등 소수의 최측근만 데리고 땅굴이 아닌 전용기를 이용하여 중국 국경 인근에 숨을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김락겸 사령관은 "트럼프가 망령 들었다. 우리 병사들의 비위를 극도로 건드리고 있다. 화성-12형 4발로 괌 포위 사격을 가해 주변 30∼40㎞ 수역에 탄착시킬 것"이라는 발언을 하며 미국을 위협하는 ‘괌 포위사격’ 방안을 발표한 인물이고, 김정식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김정은이 중국으로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김락겸 사령관과 같은 비행기에 타고 김정은의 부인인 리설주는 김정식과 함께 다른 비행기에 탑승해 북한을 빠져나간다는 계획이라고 합니다.

 

 

만약 계획대로 김정은이 중국으로 탈출을 성공한다면 그 이후 압롭강과 인접한 중국의 은신처에서 김정은은 북한군 작전을 지휘한다고 합니다. 어찌 됐든 김정은의 계획은 자신은 중국으로 달아나 몸을 숨긴 채 인민군과 주민들을 원격 조종해 맞서 싸우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극비정보는 2016년 8월 귀순한 태영호 前영국 대사관 공사가 미 중앙정보국(CIA)과 미국의 비밀정보부 MI6을 통해 얻어냈다고 합니다.  김정은은 전용기 2대 가운데 1대는 언제든지 이륙할 수 있도록 연료를 가득 채워놓고 항상 김정은이 머무는 곳 주변에 대기하고 있으며, 여러 대의 전용열차를 통해 도피하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용기 뿐만 아니라 북한제 단발 경비행기 2대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 경비행기에도 항상 연료를 가득 채워 놓고 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김정은은 2014년에 경비행기를 만들라고 지시한 후 2015년에 직접 경비행기에 올라타 이착륙 시험비행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계속해서 김정은 전용 활주로가 매년 2개씩 건설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사실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2009년에 결혼한 김정은과 리설주는 2010년과 2013년 첫째와 둘째를 낳았는데 둘째는 2013년 북한을 방문하였던 미 농구 NBA 스타 로드먼을 통해 김주애라는 이름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올해초 셋째를 출산하면서 3명의 자식을 두고 있는데 문제는 김정은 탈출 계획에 둘째딸 김주애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3명의 자식들은 북한에 두고 떠난다는 계획입니다.

 

1940년 늦은 봄 당시 전격전을 앞세운 독일군은 천하무적이었습니다. 덴마크·노르웨이에 이어 세계 최대의 육군국인 프랑스마저 꺽은 상태였습니다. 프랑스에 나가 있던 영국 원정군은 6월 초 탱크와 야포는 물론 소총까지 버리고 됭케르크에서 간신히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애타게 끌어들이고 싶어한 미국은 굳건히 중립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히틀러의 다음 목표가 영국이라는 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했습니다. 독일군은 ‘바다사자 작전’으로 이름붙인 영국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도버 해협을 넘어 일단 상륙에 성공하면 중화기와 병력이 부족한 영국 육군에겐 승산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해군은 영국군이 훨씬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해군이 하늘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 전투는 스페인 내전에서부터의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독일 공군의 실력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날렵한 모습의 메사슈미트 Bf109E전투기는 상공을 지배했습니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내려꽂히는 슈투카 Ju87 급강하폭격기는 연합군 탱크와 포병에게 악몽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네덜란드의 도시 로테르담을 단 하루에 쑥대밭으로 만들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전의를 상실케 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와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은 독일 공군이 영국 상공의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런던 세인트폴 성당 앞의 건물 옥상에서 독일 공습을 감시하는 영국 병사

 

<영국 침공 당시에 독일은 5개 항공군을 보유했는데 1개 항공군 전력이 어지간한 국가의 공군력을 능가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8월 12일 히틀러는 마침내 전면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영국 본토, 특히 런던을 포함한 잉글랜드 남서부가 독일군 쌍발폭격기로 뒤덮였습니다. 수십 대, 때론 100대 이상 무리를 지은 하인켈 He111, 도르니에 Do17 폭격기들이 레이더 기지와 비행장, 산업시설을 겨냥했습니다.

 

 

15일엔 1000대가 넘는 독일기들이 날아들면서 영국 항공전 최대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곧 영국의 싸움(Battle of Britain)이 시작될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

 

 

하지만 영국은 본토 항공전에 대비해 히든카드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바로 스핏파이어 전투기였습니다. 스핏파이어 전투기는는 허리케인처럼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장착한 단발 전투기로 Bf109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전투기였습니다.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영국 파일럿들의 놀라운 활약을 두고 윈스턴 처칠이 남긴 말-

 

 

그리고 암울했던 영국에 승리의 희망을 불어 넣은 건 2000명이 안되는 젊은 조종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영국 전투기 한대가 추락할 때 독일 폭격기나 전투기 세 대가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조종사를 전투에 다시 투입할 수 있었지만 독일 조종사 대부분은 복귀가 불가능했습니다. 이 결과 승무원 손실비가 영국 1대 독일 12까지 벌어졌습니다.

 

▲1940년 10월 22일 독일 주간뉴스

 

하지만 장기전으로 가면서 오래 대비해 온 독일이 유리했습니다. 영국으로선 전투기는 어떻게든 공급한다 해도 조종사 부족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보충되는 조종사가 전사나 부상당한 조종사의 3분의 1 밖에 안됐습니다. 항공기 공장에 대한 야간 공습으로 생산 차질도 심각했습니다.

 

 

이렇게 불리하던 영국을 구원한 것은 우연한 사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8월 25일 새벽, 길을 잃은 독일 폭격기가 우연히 런던 한복판 스퀘어마일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런던 폭격을 금지하고 있던 히틀러는 당황했고 처칠은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처칠은 25일 밤부터 29일까지 영국군 폭격기들을 베를린으로 보냈습니다.

 

 

“베를린에 적기의 폭탄 한발 떨어지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히틀러도 런던에 대한 보복 폭격을 지시했습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만신창이가 돼가던 영국 공군의 숨통을 틔워준 결정이 됐습니다. 독일이 건드리지 않는 레이더 기지와 비행장·지휘소를 바탕으로 영국 공군이 더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졌어, 우리는 이미 전쟁에 진거야"

-독일 공군 장군 헤르만 괴링-

 

 

그렇게 10월 말까지 100여일간 이어진 영국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은 1887대의 전투기를 전투나 사고로 상실했습니다. (영국 공군은 1547대) 보유 전투기와 폭격기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물량이었습니다. 탑승한 조종사와 승무원 손실은 더 뼈아팠습니다. 독일 공군은 남은 대전 기간 내내 이 손실을 만회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전역은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만약 히틀러가 런던 폭격 대신 비행장과 관제소에 대한 공습을 계속했다면 방공방은 무너지고 독일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영국이 항복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또한 이후에 영국이라는 교두보가 없다면 미국이 참전한다 해도 노르망디 상륙 같은 대규모 작전을 펼치기가 난감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