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치열한 전장에서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확한 사격 기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포격으로 땅이 흔들리고 긴장감으로 시선이 흔들리기 때문에 가늠자와 가늠쇠를 정렬시키는 정조준 사격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조준이 안된 상황에서 쏘는 총은 허공을 가릅니다. 실제로 월남전에서 미군이 적 1명을 사살하는데 사용한 탄약은 2만발이 넘었습니다. 월남전 이후 미군은 조준 시간을 최소화하면서도 정확성을 얻을 수 있는 조준 장치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스코프(Scope)라는 조준경은 존재했지만 스코프는 배율이 있는 렌즈 구조물로 작게는 2~4배, 많게는 몇십 배까지 확대해서 보는 장비로 근거리 전투에 적합하지 않으며 일반 소총에 장착할 수 없어 저격수 등 일부 장비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 바로 도트 사이트(Dot Sight)입니다. 

 

 

도트 사이트 렌즈를 통해 보면 총알이 맞을 위치에 불이 들어오게 되어 있으며 조준점이 알아서 총알이 맞을 곳만을 가리키므로 기계식 조준기와 달리 정확히 견착하지 않아도 조준선 정렬이 쉬워서 조준선을 정렬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는 장비입니다. 실제로 근거리 사격시 도트 사이트와 일반 소총 조준기의 조준속도는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일반 소총 조준기는 보통 훈련소에서 배운것처럼 조준선 정렬을 해야 하지만 도트 사이트를 사용하면 따로 조준선 정렬이 필요 없이 타깃에 도트를 맞추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이유로 단 1초로 생사가 엇갈리는 실제 전장에서 도트 사이트의 존재감은 생각보다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도트 사이트 가격이 비싸다는 점인데 도트 사이트 하나의 가격이 총기 하나의 가격과 비슷합니다. 또한 광학장비답게 세심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도트 사이트는 어디까지나 조준선 정렬을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준보조기구이기 때문에 도트 사이트를 장착하였다고 해서 사격 실력이 갑자기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병사들이 도트 사이트를 총기에 장착하면 표적을 더욱 신속하고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기 때문에 1980년 이스라엘군을 시작으로 세계 각 군은 도트사이트를 표준 장비로 도입하였으며 현재 미군을 비롯해 주요국 군대가 정규군 병사들의 표준 장비로 채택해 보급 중입니다.

 

 

특히 천조국 미군과 영국군 같은 경우는 웬만한 보병에게도 도트 사이트를 지급하고 있으며 도트 사이트를 넘어서 ACOG(저배율 스코프)까지 지급하고 있습니다. ACOG는 최소 0.X~1.5,3, 6배율 등 모델이 다양하지만 최근에는 돌격소총에 장착하는 4배율 모델이 가장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가격은 백만원을 훌쩍 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3년부터 도입했는데, 2017년 기준으로 전원 지급되는 곳은 GOP나 특수부대같은 특수한 곳뿐입니다.(최근 해병대에도 많이 지급되는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물론 천조국 미군같은 경우는 웬만한 보병에게도 도트 사이트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해방 직전에 시라소니 이성순이 일본 깡패 40여 명과 단독으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설로 내려오고 있으며 시라소니 이성순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싸움꾼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시라소니와는 비교도 안되게 용맹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단신으로 권총 2정을 들고 일본 경찰 1000명과 격전을 벌인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용맹했던 김상옥 의사입니다.

 

 

김상옥은 1889년 서울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장 및 대장간 생활과 방문 판매 등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하였고 20대 초반 대형 철물공장 사업가가 되었지만 무장독립투쟁에 가담했습니다. 사업가로써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총까지 든 것입니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상하이를 떠나면서 남긴 김상옥 의사의 말-

 

그리고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김상옥은 총독 암살을 준비했지만 정보가 누설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상하이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임시정부와의 협의 하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1923년 1월 서울에 잠입했습니다. 밀입국 과정에서 경비 경관을 사살하기도 했고 세관 검문소 보초병들을 격투 끝에 때려눕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가 서울에 잠입한 이유는 광화문 뒤편의 총독부 건물을 폭파하고 조선총독을 처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1923년 1월 12일 밤 10시 10분, 그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은신처에 숨었지만 5일 뒤인 1월 17일, 은신처가 발각되면서 김상옥은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김상옥은 놀라운 사격 실력을 발휘하면서 21명의 일본 경찰과의 총격전에서 일본 경찰 1명 사살, 3명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김상욱은 다행히 포위망을 뚫고 왕십리 이모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영화 '밀정'中)

하지만 1923년 1월 22일 새벽, 일본 종로경찰서는 김상옥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였고 결국 김상욱은 은신처가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김상옥의 놀라운 전투력을 확인했었던 일본은 1000명 이상의 군경을 동원하여 그곳을 포위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상옥은 포위망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고 혼자서 일본 군경 1000명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도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김상옥이 태어나 어릴적을 보낸 곳으로 조그만한 골목길까지 잘 알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영화 '밀정'에 등장하는 하와이피스톨 하정우 모습과 쌍권총의 달인이었던 김상옥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습니다.

 

그렇게 3시간 35분 동안 김상옥은 쌍권총을 들고 인근의 지붕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1000 대 1의 총격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 군경 16명이 쓰러졌습니다. 홀로 1000명 이상을 상대하면서 그중 16명을 쓰러뜨린 것은 그야말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김상옥의 전투력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쏜 총알 11발을 몸에 맞은 김상옥 의사는 탄환이 떨어지자 결국 마지막 남은 총알을 가슴에 겨누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자결, 순국했습니다. 그렇게 서른 네살 청년이 고향 땅에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1000명 이상을 홀로 상대하면서도 적의 총에 죽지 않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니, 이 전투의 승자는 김상옥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던 종각역 8번출입구 앞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순국하는 당시에도 일본 경찰이 김상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잘 나타나는데 김상옥은 마지막 총알로 자결 한 후에도 양손에 권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멀리서 이 모습을 본 일본 경찰은 김상옥이 살아 있을까봐 다가가지 못했고, 결국 김상옥의 어머니를 보내 생사를 확인하게 했다고 합니다.

 

기온이 많이 내려가는 겨울철에 운전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차량 유리에 뿌옇게 서리는 김입니다. 뿌옇게 변해가는 유리가 전방시야 확보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 측면 사이드미러 시야까지도 가리기 때문에 김서림을 빨리 제거하지 못하면 큰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운전 경험이 적은 초보운전자 분들은 유리창에 김이 서리기 시작하면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량 유리창에 김이 서리는 이유는 유리창 내부와 외부의 온도차이, 그리고 차량 실내의 습기 때문입니다. 여름 장마철 날씨에는 주로 유리 바깥쪽에 김이 서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간단히 와이퍼를 작동시켜 김서림을 제거할 수 있지만 겨울철 김서림은 주로 유리 안쪽면에 발생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리를 알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겨울철 유리 안쪽에 김이 서리는 이유는 차량 내부에 습도가 비교적 높고 차량 유리창이 너무 차가워 공기가 유리창을 만나 쉽게 응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차량 내부 습도를 낮추고 유리창 온도를 높이면 됩니다.

 

 

유리창 온도를 낮추기 위해선 히터 송풍구를 차량 유리쪽 방향으로 맞추면 됩니다. 운전석 중앙에 위치한 공조기 버튼들을 살펴보시면 앞 유리창 방향으로 바람이 나가게 하는 버튼이 있습니다. 이 버튼을 누르면 차량 앞유리와 측면유리쪽에 위치한 송풍구에서 바람이 나오게 됩니다. 차량 유리쪽으로 따듯한 바람을 나가게 해 유리창 온도를 높여주면 김서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에어컨(A/C)을 가동시켜 차량 내부 습도를 낮춰 줍니다. 에어컨은 온도를 낮추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줄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에어컨은 온도를 낮출 뿐만 아니라 내부 습도를 낮추는 제습의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에어컨을 가동시킨 후 온도를 높이면 따뜻한 바람이 나오면서 내부 습도를 낮출 수 있습니다.

 


평소 차량 유리에 김서림이 많이 발생하시는 분들은 공기순환을 내부순환이 아닌 외기유입으로 유지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차량 내부와 외부 공기의 상태를 비슷하게 유지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차량 유리에 김이 서리는 이유는 말씀드린데로 내부와 외부 공기의 상태 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방법들은 차량의 컨디션이나 날씨, 내부 습기 상태에 따라 적용방법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에어컨을 키고, 온도를 높이고, 송풍위치를 유리창으로 하고 외기유입으로 유지해야 김서림이 제거될 수 있고, 다른 상황에서는 외기유입만으로도 김서림을 충분히 예방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김서림 방지제를 유리창에 바르는 것도 물론 김서림 방지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유리 안쪽면에 먼지가 많으면 김서림이 더욱 쉽게 발생되기 하기 때문에 유리 안쪽을 자주 닦아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는것도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겨울철 아침마다 많은 운전자들이 꽁꽁 얼어버린 자동차 앞유리와 씨름을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어떤분들은 출근시간에 늦을까봐 앞유리 성에 제거를 하지 않고 운전대를 잡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안전운전을 위해서는 성에를 제거하고 운전하셔야 합니다.

 

겨울철 앞유리 성에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성에 방지 커버를 구입하셔서 씌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박스나 신문지를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주차시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아침 볕이 잘드는 곳에 주차하시는 것도 성에 예방에 좋은 방법입니다.

 

 

만약 성에가 겼다면 성에 제거제를 사용하시는 것이 좋지만 만약 성에 제거제가 없으시다면 자동차 시동을 키고 내부 온도를 높여 성에를 녹여내야 합니다. 성에가 녹은 다음에는 와이퍼를 닦아 내시면 됩니다. 출근시간이 급하신분들은 히터가 아니라 에어컨을 트는 것이 성에 제거하는데 더 빠릅니다.

 

 

간혹 신용카드 등으로 성에를 제거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 방법으로는 깨끗이 제거되지 않으며 앞유리에 손상이 갈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모두 겨울철 올바른 자동차 관리로 안전운전 하시길 바랍니다.

 

최근 북한의 계속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로 인해 전술핵 재배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정부는 전술핵 재배치는 검토하지 않는다며 선을 긋고 있으며 국제법적으로도 한반도 전술핵 배치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이 전술핵 한반도 재배치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백악관에서는 우리나라 정부가 요구한다면 26년만에 전술핵 재배치를 검토할 수 있다고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미국은 1991년 한반도에서 철수했던 구형 핵포탄, 핵 지뢰, 미사일 탄두 등 전술 핵무기는 모두 폐기했고 현재는 B-61 시리즈만 500기가량 운용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B-61 모드 11은 1997년 개발된 북한의 벙커 및 핵시설 파괴용 지하관통폭탄입니다. 만약 미국이 보유중인 B-61 일부를 한반도에 배치하면 북한은 물론 중국,러시아와의 전략적 핵균형도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지만 1976년 프랑스의 계약 파기로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계약 파기는 표면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핵심 기자재들을 다른 국방 장비들과 함께 숨겨서 반입에 성공하였으며 1979년 2월 핵개발이 88%까지 완성되었지만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의 핵무기 개발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핵 군축학자 찰스 퍼거슨 미국과학자연맹(FAS) 회장은 핵무기 4330개를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경북 경주 월성에 있는 4기의 가압중수로형 원자로에서 그동안 추출해 쌓아놓은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면 무기급 플루토늄 26t을 얻을 수 있으며 핵무기 4330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월성 원자로에서는 매년 핵무기 416개를 만들 수 있는 2.5t의 준무기급 플루토늄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수소폭탄 제조에 필요한 중수소와 삼중수소도 상당량 확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이라도 결심만 한다면 플루토늄 재처리 공장을 4~6개월 내에 완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수준 높은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면 초고속 전자 기폭장치도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우리나라의 원자력 설비용량 세계 5위, 운전기술 세계 1위 수준입니다. 이에 따른 핵폭탄 제조 잠재력은 세계 10위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핵폭탄 제조 잠재력은 핵개발을 위한 기술력과 경제력을 종합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에 버금가고, 핵무기를 보유한 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보다 이 잠재력이 훨씬 높습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서균렬 교수의 주장으로는 자신이 핵무기 도면과 3차원 도면을 가지고 있으며 약 1조원의 예산과 1000여 명의 인력만 있으면 6개월이면 수소폭탄을 만들 수 있으며 1년이면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으며 1년이면 전술핵무기와 전략핵무기도 개발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정말로 우리나라가 북한과 중국에 의해 계속 코너에 몰리고 일본이 핵무장 카드를 꺼낸다면 우리나라도 핵무장 대열에 들어서게 되지 않을까요 

 

바이애슬론은 18세기 후반 노르웨이, 스웨덴 국경지대에서 양국의 수비대가 즐기던 스키와 사격 훈련에서 유래된 경기입니다. 군사 이미지가 강렬하다 보니 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에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960년대에 들어서야 남자부에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바이애슬론은 남녀 개인, 남녀 스프린트, 남녀 추적, 남녀 단체출발, 남녀 계주, 혼성계주 등 총 11개 세부종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선수들은 평창에서 총 11개 금메달을 놓고 설원 위에서 경쟁을 펼칩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바이애슬론 종목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평창월드컵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바이애슬론의 새로운 별로 등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러시아판 안현수라 불리는 러시아 출신 바이애슬론 선수 티모페이 랍신의 존재때문입니다.

 

 

티모페이 랍신은 올해 2월 법무부의 특별귀화 심사를 통과하면서 대한민국 바이애슬론 국가대표가 되었습니다. 랍신은 바이애슬론 선수층이 두꺼운 러시아에서 2008년부터 2016년까지 국가대표를 지냈으며 최고의 선수들이 기량을 겨루는 바이애슬론 월드컵에서 통산 6차례 우승을 차지한 뛰어난 선수입니다.

 

 

 

사실 대한바이애슬론연맹이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가장 공을 들여 영입한 티모페이 랍신은 법무부 특별 귀화 심사가 늦어지면서 2016~2017시즌 우리나라 국적으로 거의 출전하지 못했으며 5월에는 무릎 통증으로 수술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랍신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사격, 식사, 스트레칭, 스키 연습, 식사, 마사지를 반복하며 체력을 보강하는데 엄청난 훈련을 하였고 올 시즌 월드컵 대회에서 호성적을 내며 에이스의 면모를 한껏 과시하고 있습니다.

 

12월 3일 스웨덴 외스테순드에서 열린 월드컵 1차 대회 남자 10㎞ 스프린트에서 13위에 올라 대한민국 남자 선수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15일 랍신은 프랑스 안시 르 그랑 보르낭에서 열린 2017~2018 IBU 월드컵 3차 대회 남자 10㎞ 스프린트에서 23분22초00을 기록해 전체 106명 중 8위에 오르면서 대한민국 남자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국제바이애슬론연맹(IBU) 월드컵 대회 톱10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12월 17일 3차 월드컵 남자 15㎞ 매스 스타트에서 30명 중 28번째로 들어왔습니다. 1위 푸르카드 마르탱(프랑스·36분 30초 3)보다는 4분 22초 1 뒤처진 40분 52초 4로 골인했습니다. 15일에 열린 남자 10㎞ 스프린트에서 대한민국 남자 바이애슬론 사상 최고 순위인 8위를 기록한 상승세를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남자 바이애슬론 대표팀은 현재까지 1장의 평창동계올림픽 출전권만 확보하여 티모페이 랍신의 출전이 유력한 상황입니다. 때문에 우리나라 남자 바이애슬론 대표팀은 4∼6차 월드컵에서 1장의 출전권을 추가로 얻는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푸른눈의 대한민국 국가대표 티모페이 랍신이 최초로 바이애슬론 매달을 대한민국에 안겨줄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USS 미주리(BB-63)전함은 미 해군이 마지막으로 건조한 전함이자 현재까지 미 해군의 상징적인 전함입니다. 미주리 전함은 1940년 아이오와급 3번함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에 브루클린 뉴욕 해군 공창에서 건조가 시작되어 1944년 6월 11일에 취역하였습니다. 이후 각종 테스트와 관숙 항해를 거친 뒤 12월 14일 출항하여 바로 태평양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일본 해군의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기 위한 이오지마 전투에서 화력지원을 시작으로 3월 18일 일본 본토를 공격하면서 아군 항공모함으로 접근하는 일본군 전투기 4기를 격추하였습니다. 이후 전장에서 계속 활약하다가 7월 10일에 도쿄를 기습하였으며 7월 15일에는 수상함 최초로 일본 본토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일본 본토에 대한 포격을 7월 25일까지 무차별로 가했으며 8월에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일본은 항복하게 되었습다. 그리고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미주리 전함은 점령함대 기함 임무를 일시적으로 1번함 아이오와에게 넘긴 뒤 29일 항복 조인식장으로 쓰이기 위해 도쿄로 입항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2일 미주리의 함상에서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와 참모 등으로 이루어진 일본 대표단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후 대서양 함대에 배속되어 항해훈련을 주로 하다가 1949년 9월 23일부터 1950년 1월 17일까지 오버홀(정비)을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미주리 전함은 8월 19일 UN군에 합류하기 위해 노포크에서 출항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14일 일본 서쪽에서 UN군과 합류하여 미군 전함 최초로 한국 영해에 진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는 날 미주리 전함은 삼척 앞바다에서 삼척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10월 12일부터 26일까지 청진과 단천에 포격을 가했으며 그 뒤에는 원산을 포격했습니다. 12월 23일에는 흥남 앞바다에서 미군 제3보병사단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철수하는 것을 지원했습니다.

 

 

그렇게 1951년 3월 19일까지 미주리 전함은 항공모함 호위와 지원 포격 임무를 수행하다가 잠시간 임무에서 해제되어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1952년 10월 17일 미주리 전함은 오버홀을 다시 받고 요코스카로 돌아와 7함대 사령관 클라크 제독의 기함이 되었습니다.

 

 

이후 1953년 1월 2일까지 단천, 청진, 선진, 원산, 함흥, 흥남지역에 해상 포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5월 6일 노포크로 귀항하였으며 미주리 전함의 한국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이후 미주리는 주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항해훈련을 하다가 1954년 9월 18일 퓨젯사운드 해군 공창에서 오버홀을 받고 1955년 2월 26일 퇴역하여 예비 전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주리 전함은 태평양 예비함대에 배속되어 브레머튼에 정박하여 연간 10만 명 정도의 관광객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위풍당당하던 미주리 전함의 모습은 다시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잠들어있던 미주리 전함을 1984년에 다시 깨웠으며 미주리 전함은 1986년 5월 1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재취역했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디에고 가르시아, 이집트, 터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나마 등 8개국에 돌아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1990년에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에 다시 방문하여 부산에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였고 1991년 1월 미주리 전함은 아라비아만에 도착하여 이라크군을 향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28발 발사하였습니다. 그리고 2월에는 미주리 전함의 상징인 16인치 주포 사격을 하였습니다.

 

 

당시 16인 주포 사격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로 처음 쏘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걸프 전쟁 동안 미주리 전함은 765발의 16인치 포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2월 28일 이라크가 항복하면서 전쟁도 끝나고 미주리 전함도 귀환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에 대한 안보 위협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국방비 삭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유지비가 많이 드는 아이오와급 전함들이 퇴역하기 시작하면서 47년 동안 전세계 전쟁터를 돌아다닌 미주리 전함도 1991년에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 마지막 임무는 바로 50년 전 진주만에서 1941년 12월 7일 숨진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주리 전함의 마지막 공식 항해는 미국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1992년 3월 31일 롱비치에서 마침내 미주리 전함은 정말로 퇴역하였습니다. 미주리 전함은 2차대전으로 3개의 종군휘장을, 한국 전쟁으로 5개의 종군휘장을 수여받았습니다. 현재 미주리 전함은 진주만의 포드 섬에 정박해 전쟁 기념관으로 사용중이며 미주리라는 이름은 현재 버지니아급 잠수함 중 한 척이 물려받아 활동 중입니다.

 

전투기가 이륙하는 활주로는 아스팔트만 깔아놓은 크고 긴 도로로 보이지만 이륙 착륙 시에 지면에 가해지는 충격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활주로는 매우 단단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고속도로에 착륙을 하면 착륙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습니다. 활주로의 최소 규격은 길이 245 m (804 ft), 폭 8 m (26 ft)이며 전투기를 이륙시키기 위한 활주로 길이는 최소 1,500m입니다.

 

 

이처럼 활주로는 전투기가 이륙하거나 착륙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때문에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먼저 주요타격대상 중 하나가 바로 공군의 비행장입니다. 북한군은 개전 초기 융단폭격을 통해 활주로를 못쓰게 만들어 우리 공군 전투기들이 이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포격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공군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부대가 있습니다.

 

 

바로 활주로 피해복구반입니다. 피해복구반은 활주로가 포격 당할 경우 활주로의 피해상태를 조사하고 파괴된 활주로의 잔해를 치우고 폭파구를 복구자재로 메워 전투기가 이륙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활주로 피해복구반은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평소에 빠른 시간내에 활주로 피해복구를 위해 훈련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보통 120여 명의 병력과 덤프트럭, 로더, 그레이더, 롤러, 불도저, 굴착기 등 많은 중장비가 한꺼번에 동원돼 일사불란하게 실제와 다름없이 훈련을 반복합니다.

 

 

또한 전투기가 이륙하는데 무서운 적은 바로 새떼입니다. 전투기가 이착륙할 때 활주로 주변에 날아다니는 새는 전투기의 엔진에 빨려 들어가면서 엔진고장을 일으키고 외부에 부딪혀 기체를 파손시켜 전투기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새를 쫓는 전담팀 배트맨조가(BAT- Bird Alert Team) 존재합니다.

 

 

시속 370㎞로 상승하는 항공기에 900g의 청둥오리 한 마리가 충돌할 때 항공기가 받는 순간 충격은 4.8t이나 됩니다. 전투기 동체는 물론, 조종실 유리에 조류충돌이 일어날 경우 그 충격의 여파로 동체는 찌그러지고 조종실 유리는 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새를 쫓는 일 만큼 중요한 임무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활주로의 이물질(FO, Foreign Object)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새와 마찬가지로 작은 이물질이라도 전투기 엔진에 흡입되면 엔진에 치명적인 손상을 줄 수도 있으므로 하루에 수시로 활주로를 청소합니다.

 

 

문제는 여름에는 폭염을 견뎌야 하며 겨울에는 강추위를 이겨내야 합니다. 사방이 트인 활주로는 더위와 추위가 실제보다 더 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지는 못하지만 배트맨들은 언제나 가장 일찍 활주로에 들어와 가장 늦게 떠나며 자신들이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미 해병대에서는 현재까지 카를로스 헤스콕(Carlos Norman Hathcock)을 최고이자 전설적인 저격수로 부르고 있습니다. 헤스콕은 One Shot, One Kill이라는 말을 만든 인물입니다. 베트남 전쟁중 그의 공식 사살전과는 93명으로 미국 기준 제4위이나, 당시 미국 사살판정기준이 별도의 장교가 사살을 직접 확인해야지만 인정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 사살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아, 총 전과는 300명을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트콩들은 헤스콕을 하얀 깃털(white feather)이라고 부르며 두려워 했으며 헤스콕을 잡기위해 개인으로서는 최고금액인 3만달러의 현상금을 걸기까지 했습니다. 헤스콕은 베트남전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지만 지금도 전설적인 인물로 불리는 이유는 불가능한 임무를 해냈기 때문입니다. 일명 '자살 임무'

 

(왼쪽M21 SWS를 들고 있는 헤스콕)

당시 제대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 헤스콕은 위험천만한 단독 작전에 자원하였습니다. 그런 임무에 나서면 목숨을 잃기 마련이지만 헤스콕은 동료들이 죽는게 싫어서 혼자 나섰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해야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작전 장소는 적진 속으로 수킬로미터 들어간 곳이었으며 임무는 본부에 있는 북베트남 육군 장군을 사살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임무에 성공한다고 해도 지원군이 없었기 때문에 자살 임무로 불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헤스콕이 기적으로 북베트남 장군을 사살하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복귀까지 할 수 있는 확률은 1%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헤스콕은 적진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북베트남 육군 장군의 본부까지는 1.8킬로의 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헤스콕은 적진에 도착하자마자 지도와 정찰 사진으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의 계획은 1.2km를 기어간 다음 저격을 감행할 계획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목표지점까지는 640m거리였습니다. 그리고 단 한 발로 북베트남 육군 장군을 사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위치를 발각당하지 않는다면 그는 얕은 협곡을 따라 도망칠 생각이었습니다.

 

 

헤스콕은 계획을 세운 뒤 목숨을 걸고 적진을 향해 포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적군들이 살피지 않는 곳을 찾아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9미터 떨어진 곳에서 헤스콕이 두려워하던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적군 순찰병이 가까운 곳까지 온것입니다. 그때 순찰병에게 발각당한다면 헤스콕은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하지만 순찰병이 끌고온 순찰견들까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이후 헤스콕은 사흘간 안 먹고 안 자고 계속 포복한 끝에 사격 위치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남았었는데 목표의 신분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헤스콕은 리더들은 손가락 질을 좋아하고 손가락 질하며 말한다는 특징을 생각하고 금방 목표를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헤스콕은 단 한 발로 북베트남 육군 장군을 사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람의 방향을 고려해 목표의 가슴 왼쪽을 겨냥했습니다. 만약 빗나가거나 상처만 입힌다면 작전은 실패였습니다. 헤스콕은 기술적인 호흡으로 심박수를 떨어뜨렸습니다. 심장이 안 뛰는 순간에 총을 쏴야 정확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해스콕은 총을 쐈습니다. 음속의 두 배로 날아간 총알은 총성이 들리기도 전에 북베트남 육군 장군 가슴에 박혔습니다.

 

 

이제 헤스콕에게 도망가는 일만 남았었습니다. 그런데 사격 위치 주변 왼쪽, 오른쪽에는 기관총이 각각 2대씩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베트남 육군 장군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베트콩들은 모두 반대편으로 가는 동시에 기관총을 쏘았습니다. 그 이유는 헤스콕 반대편에는 나무가 있었고 헤스콕이 있는 위치는 평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헤스콕은 완벽하게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였습니다.

 

 

헤스콕이 나흘 동안 들키지 않은 것도 대단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640m 거리에서 쏜 한 발이었습니다. 헤스콕은 베트남전에서 물위를 달리는 고속보트 위에서 대략 700m거리밖의 베트콩을 저격하기도 하였으며 헤스콕은 M2 중기관총으로 세계 최장거리 저격기록(약 2,300m)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참고로 이 기록은 35년이나 흘러서야 겨우 깨졌습니다.

 

예비군은 말 그대로 예비로 존재하는 군대라서 현역병처럼 24시간 내내 군인으로 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전쟁 등 병력 부족 등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군인으로 바뀌는 존재입니다. 또한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쌓아둔 군 경험과 감각이 잊혀질 수 있으니 능력 유지를 위해 일정 시기마다 정해진 기간동안 일정 수준의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비군 훈련을 가게 되면 정말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일단 첫번째로 이상하게 군복을 입고 예비군 훈련장을 가면 몸이 평소보다 유난히 무겁고 기운이 없습니다. 군복만 입었을 뿐인데 완전군장을 매고있는 듯한 무게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점심식사만 마치고 나면 대다수 예비군들이 좀비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잠을 잡니다. 그리고 예비군 교육 시간 동안에도 그 졸음은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이런 졸음은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입구만 벗어나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번째, 분명히 집을 나와서 예비군 훈련장에 도착할 때까지 푸근하던 날씨가 훈련장에 갈때마다 강추위 날씨로 변합니다. 그래서 년차가 좀 있는 예비군들은 기모가 빵빵한 후드티를 안에 입고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깔깔이까지 챙겨입고 오는 예비군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예비군 훈련장만가면 본능적으로 PX음식이 땡깁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PX로 향하게 됩니다. 사실 평소 편의점에서 거들떠도 안 보던 냉동식품이었는데 너무 먹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웬만한 메이커 치킨보다 슈넬치킨이 더 맛있게 느껴집니다.

 

 

네번째, 예비군 대다수가 평소엔 좀비 그 자체이지만 일정 조건(휴식이나 px이용 혜택)만 충족되면 이게 아까 그 좀비와 동일인물인지 눈을 의심케 하는 활약상을 선보이곤 합니다.

 

 

한 사례를 소개드리면 2014년 구미시 모 훈련장에서는 통신병 출신 예비군들이 2개조로 나뉘어서 1개 조는 100% 예비군만, 나머지 1개 조는 현역이 섞여서, 진 쪽이 한번 더 치는 쪽으로 해서 광대역 안테나 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비군만 있는 조가 우습게 이겨버렸다고 합니다. 아무리 현역같은 군기는 사라졌다고 하나 클라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비군 훈련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매년마다 끊임없이 나오는 부실한 예비군 식사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낮은 예비군 교통비는 과거 국회에서도 꾸준히 지적되었지만 크게 바뀐게 없습니다. 국가의 부름에 달려가는 예비군들에게 지급하는 교통비도 더 인상되면 좋겠습니다.

 

북한 공군은 병력만 11만명이며 전투기 820여 대, 정찰기 30여 대, 공중기동기 330여 대, 헬리콥터 300여 대, 훈련기 170여 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공군과 단순히 전투기 숫자로 비교하면 두배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 공군은 현재 4개 비행사단, 2개 전술수송여단, 2개 공군저격여단, 방공부대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평양~원산 이남 기지에 전투임무 기종의 약 40%를 전진 배치해 기습공격이 가능한 능력과 태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공군과 붙는다면 레이더와 전자장비 무장의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공군은 주력 전투기 KF-16이나 F-15K에 대한 업그레이드가 실행/계획하고 있고 F-35A를 도입하기로 했기 때문에 북한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할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은 공군 병력과 전투기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의 공군전력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전투기

  MiG-15 300대 이상 보유

MiG-15 전투기는 현재 전투기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군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폭용으로 개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MiG-15의 무서운 점은 바로 생산단가입니다. 북한은 이미 MiG-15 전투기 숫자가 수백대 단위로 보유하고 있기때문에 MiG-15 전투기를 자폭용으로 사용한다면 그 피해를 완전히 막기는 어렵습니다.


 

  MiG-17 100여 대 보유

MiG-17 전투기는 1952년 소련에서 생산되었으며 MiG-15의 개량형이기 때문에 겉으로도 큰 차이는 없습니다. MiG-17는 6.25 전쟁에서 활약한 전투기로 MiG-15와 함께 북한 공군의 보조전력으로 분류됩니다. 


  MiG-19 90여 대 보유

MiG-19 전투기는 1955년 소련에서 생상한 초음속 전투기로 북한 이웅평 대위가 몰고 귀순한 전투기로도 유명합니다. 현재 황해도 곡산비행장에 많이 배치되어있어 고속(최대속도 마하 1.45)으로 남하하면 5분안에 서울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노후화가 심각하고 부품 공급에 큰 어려움이 있어 비행훈련 도중 추락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MiG-21 150여 대 보유

MiG-21 전투기는 중국이 우호관계를 위해 북한에 지원해준 것들로 최신형은 아니고 비교적 구형인 MiG-21PF, MiG-21bis, 그리고 중국제 J-7, 복좌 훈련기인 MiG-21U 등 총 190여 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보유한 MiG-21의 대부분이 J-7이라고 오해하지만 J-7은 40대 정도입니다.


 

  MiG-23 56 대 보유

MiG-21 전투기는 1980년대 중반 북한은 MiG-21를 소련으로부터 도입하였습니다. 가변익을 채용한 것이 특징이며 하방 탐색과 공격이 가능합니다. 시계 외 교전 능력이 탁월하며 순간 최대 마하2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습니다. 연평도 포격 당시 출동해 우리나라 공군의 F-15K, KF-16와 대치했었는데 RWR(레이더 전파를 수신하여 자신이 탐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비)를 장착하고 있었는지 F-15K가 레이더를 조사하자 도망갔습니다.


  MiG-29 40여 대 보유

소련이 미국의 F-16/18의 대항마로 개발한 전투기로 지금 현재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전투기 중 유일한 4세대 전투기입니다. 그러나 F-15K에 비해 항공전자장비가 크게 떨어지는데다 일단 체급이 많이 차이나기 때문에 F-15K의 위협은 되지 못합니다.


 

 공격기

  A-5 40여 대 보유

중국에서 MiG-19기를 개량하여 지상공격 전용기로 개발한 기체입니다. 주익에는 각각 23mm기관포 1기총씩(총 2기총)을 탑재하고 있으며 동체아래 4군데 하드포인트가 있어 250kg급 폭탄을 장착하여 운용 할 수 있습니다. 개전초반에 우리 육군에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Su-25 36 대 보유

수호이 Su-25는 수호이사가 제작한 공격기로 탱크킬러로 잘 알려진 미 공군의 A-10과 자주 비교되는 모델입니다. 1인승, 쌍발엔진에, 최대이륙중량은 KF-16, A-10C과 비슷한 20톤입니다. 북한은 아시아 최초로 Su-25를 도입하여 순천공군기지 등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폭격기

  IL-28 80여 대 보유

디자인은 완전 구식이지만 우수한 성능 덕분에 60여 년간 여러나라에서 운용되고 있으며 현재 북한의 주력 폭격입니다. 물론 날라다니는 관 수준이지만 북한의 히든카드인 핵무기를 유일하게 투하할 수 있는 폭격기입니다.


 헬기

  Mi-2 140여 대 보유

북한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에 폴란드 PZL사로부터 Mi-21 헬기를 도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Mi-2 헬기를 혁신 -2직승기로 부르는데 북한이 자체 생산한다는 정보도 있으나 아마 부품상태로 들여와 북한에서 조립 생산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유사시 저격여단 병력을 우리나라 공군기지에 침투시키는 임무맡고 있습니다.


  Mi-8 20여 대 보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헬기로 기체 외부에 무장장착대 6개가 있으며 로켓포와 대전차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서해 5도와 밀접한 곳에 Mi-8 헬기를 집중 배치하고 있습니다.


  Mi-26 4 대 보유

 MI-26은 양산형 헬리콥터 중 가장 거대한 헬기이며 최대 수송중량이 20톤이 달해 장갑차를 비롯한 기계화 전력을 수송할 수 있습니다. 보병의 경우 최대 90명까지 탑승이 가능하며 완전무장한 공수특전단의 경우 40-50명이 탑승 가능합니다.


  MD-500D 80여 대 보유

북한 1983~85년에 서독 회사를 통해 500MD를 밀수입하였는데 2013년 7월 27일, 정전 60주년 기념일에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작년 북한 원산 에어쇼에서는 9K11 Malyutka 대전차 미사일을 장착한 모습도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부품을 구할 수가 없어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다고 합니다.


 수송기

  AN-2 300여 대 보유

AN-2는 날개가 천으로 덮여 있어 레이더 반사면적이 적기때문에 레이더에 탐지될 확률이 낮으며 복엽기로 설계되어 단거리 이착륙 성능이 뛰어납니다. 유사 시 북한 특수부대의 침투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2017년 8월 25일에는 백령도, 대연평도 점령 훈련에서 An-2가 북한 특작부대원을 초저공 낙하하는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AN-24 6 대 보유

평상시에는 AN-24는 고려항공에 소속되어 있지만 전시에는 북한공군으로 모두 동원되어 병력수송에 투입되며 북한은 이 AN-24 기종을 전자전용으로 개조하여 전시에 우리나라의 레이다망과 통신시설을 마비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결론

  북한공군 위협적인 점

무엇보다 북한 공군의 양적인 우위 자체가 위협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나라 공군전력과 비교해 대부분의 기종들이 노후하고 성능도 떨어지지만, 전쟁 초기 양적인 우위를 이용한 기습적인 도발을 한다면 질적인 우위로만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습니다. 특히 MiG-15와 MiG-17의 경우 부품을 북한이 직접 생산하고 정비도 용이해 가동률이 오히려 높아 실제로 전장 종심이 짧은 한반도에서 제한된 공중요격과 대지공격 등에 운용될 수 있습니다. 

 

  북한공군 단점

북한 공군은 연료 유류부족으로 정찰은 물론이고 통상적인 훈련조차 거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종사의 연간 비행 훈련 시간이 평균 12~15시간(우리나라는 130시간 이상)에 불과하며 수시로 전투기가 추락하는 등 극심한 성능 저하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공군이 보유한 MiG기를 비롯한 모든 구소련제 전술기들은 제대로 된 사양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낮은 성능을 발휘하도록 개조된 기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