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나름 신경 써서 관리하는 자동차에 나도 모르는 새 크고 작은 흠집이 난 걸 발견하면 차주들은 가슴이 아픕니다. 남들이 아무리 티도 안 난다고 해도 작은 흠집도 내살에 상처가 난것처럼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빨리 해결해야 됩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제거해야 할지. 괜히 내가 손댓다가 더 흠집이 커지는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그냥 방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서도 자동차 흠집을 간단하게 제거하는 방법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미세한 흠집은 치약

 

문 손잡이나 보닛에 생긴 생활기스는 미세한 흠집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치약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치약 속에 들어 있는 연마재는 차량용 컴파운드에도 들어있는 성분으로 스크래치 제거에 효과를 발휘합니다. 일단 치약을 극세사 또는 융 수건 등에 묻혀 흠집 부위에 살짝 문질러주면 작은 흠집은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세게 문지르면 긁힌 자국이 남을 수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깊은 흠집은 붓펜

 

붓펜은 치약으로 어려운 깊은 흠집이 났을 경우 사용합니다. 붓펜은 대형 마트나 차량용품전문점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차량 별로 정말 다양한 색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차량 색상과 동일한 붓펜을 구매해야 합니다. 차량의 색상은 차량의 앞문과 뒷문 사이 또는 뒷 창문, 엔진룸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미리 확인하고 구매하셔야 됩니다. (진주색상 같이 펄이 들어간 제품은 먼저 기본색상을 칠하시고 다 마른후에 펄 색상을 다시 칠해주셔야합니다.)

 

 

  범위가 넓은 흠집은 컴파운드

 

컴파운드란 일반적으로 도장 면을 미세하게 갈아서 광택 작업 전 도장면의 오염물, 미세 기스를 제거하는 연마재를 말합니다. 만약 페인트가 벗겨져 손톱에 걸릴 정도의 깊은 흠집이라면 컴파운드로는 불가능합니다. 컴파운드를 사용하기 전 차량에 남아있는 미세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세차를 하고 컴파운드를 사용할 때는 소량을 극세사천이나 부드러운 스펀지 등에 묻힌 뒤 차량의 흠집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문질러줘야 합니다. 이후 광택 및 코팅 작업 순으로 마무리하면 됩니다.

 

 

  페인트 흠집은 물파스

 

굳이 여름이 아니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파스를 이용하여 자동차 잔흠집을 제거할수 있습니다. 물파수는 차체에 파인 흠집이나 스크래치보다는 다른 차량에서 묻어난 페인트 등으로 인한 흠집 제거에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물파스로 흠집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마른 수건도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마른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내 먼지를 제거하고 페인트가 묻은 부위에 물파스를 바른 뒤 마른 수건을 이용하여 페인트를 닦아낸다는 느낌으로 문질러주면 됩니다.

 

오늘 알려드린 방법이라면 저렴한 가격으로 언제든지 셀프로 흠집제거가 가능합니다. 더 이상 흠집에 속상해 하지 마시고 흠집이 나면 바로 바로 지워주시면 되겠죠^^

 

가난한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무런 연줄 없이 능력만으로 미 육군 항공대와 미 공군 장군까지 지냈던 전설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 중 도쿄 대공습을 지휘해 일본을 초토화시킨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 장군입니다. 그는 1906년 11월 5일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육군 ROTC를 거쳤으며 1940년에 대위, 1941년에 소령까지 빠르게 진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이 진주만 공습으로 폭격을 당하게 되면서 미국은 즉시 일본과 추축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당시 르메이는 육군항공대 중령으로서 제8공군 지휘관이었습니다. 르메이는 전투를 위해 영국에 도착하여 첫번째 출격을 하였는데 자신이 지휘하는 B-17 폭격기들에게 목표에 도달하면 폭격이 끝나기 전까지 회피 기동을 포기하고 대형에 맞춰 직선으로 비행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가장 앞장서서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출격했습니다.

 

 

사실 말도 안되는 너무 위험한 명령이었지만 르메이는 독일군 88mm 대공포의 예상 격추율을 계산해본 결과 비행단이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탄착률이 종전의 2배로 늘어나고 목표 상공에서 7분간 직선 비행을 하면서도 대공 사격에 폭격기 한 대도 잃지 않는 성공을 거두면서 르메이 중령은 고속 승진을 이어갔고 1943년 말 준장으로 진급해 장군이 되었고, 1944년에 37세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소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1945년 그 당시 전략 폭격의 당대 최고 전문가였던 르메이는 일본 본토 폭격의 최적임자로 제21폭격기사령관이 됩니다. 부임 직후 르메이는 기존의 일본 본토 폭격작전을 분석한 결과 저고도 폭격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고고도 정밀 폭격이 아닌 저고도 폭격을 해야 했던 이유는 당시 일본 상공에서 정밀 폭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좋은날이 얼마 되지 않았고 아무리 맑은 날에 최신예 정밀폭격용 관측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정밀폭격의 명중률은 저고도 폭격보다 떨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으려면 공장 뿐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전쟁 수행원까지 제거해야 하는데 고고도 정밀 폭격은 주요 전략타겟 몇 개만 부수고 끝날거란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비싼 가격의 고고도 폭격기를 투입해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미 공군 전력은 육군과 해군에 계속 종속되어 영원히 독립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저고도 폭격을 결심합니다.

 

 

물론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당시 르메이는 일본본토 폭격을 전담하는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이었고 독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르메이 의견대로 도쿄 대공습을 저고도 폭격으로 야간에 실시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3월 9일, 346기의 B-29 폭격기가 이륙, 그중 279기의 폭격기가 1,600여 톤의 네이팜탄을 도쿄 시가지에 투하했습니다. 당시 공습으로 사망자만 8만에서 10만에 달할 정도였고, 건물 267,000여 채가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르메이는 일본이 정신차리고 방공망을 재조정하기 전에 타격하기 위해 3월 11일에 310기의 B-29를 투입하여 나고야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으며 3월 13~14일에는 오사카, 3월 16~17일은 고베, 3월 18~19일은 다시 나고야를 폭격하였습니다. 불과 10일만에 일본의 주요도시 4개를 완전히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 도시가 미공군의 다음 공격 목표입니다. 오른쪽 사진에 찍힌 도장은 공습예고가 뿌려진 도시

 

그렇게 대규모 공습 이후 르메이는 일본 전역에 폭격 경고문을 뿌렸습니다. 당시 폭격 경고문이 일본 민간인들에게 준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르메이는 폭격 경고문에 적혀진 도시를 꾸준히 폭격을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5월 23~25일에 걸친 대공습에서 500기가 넘는 B-29 폭격기가 도쿄를 융단폭격하였으며 5월 29일에는 519기의 B-29 폭격기가 요코하마를 폭격하였습니다. (당시 전투기 P-51 머스탱이 100기 이상 동행하면서 폭격기들을 호위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6월 초가 되면서 르메이와 21폭격기사령부 지휘부는 더 이상 폭격할 대도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폭격이 끝났다는 것이 아니였고 대도시는 끝났으니 중소도시를 폭격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웬만한 도시에는 빠지지 않고 B-29가 날아갔습니다. (B-29의 공격을 받지 않은 곳은 홋카이도 정도...) 이후 B-29에 의해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습니다.

 

*1963년 자신이 폭격했던 도쿄를 다시 찾은 르메이 장군

 

*미군 전략사령부(United States Strategic Command : USSTRATCOM) 사령부 복도에 걸려져 있는 르메이 초상화

 

지금 그를 히틀러도 울고 갈 전쟁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르메이는 냉전 시대 미 공군의 기틀을 세워 지금 미 공군이 미군 전력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데 큰 공적을 세운 명장입니다.

 

*르메이의 별명이 Big Cigar로 불리는 이유는 시가나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자주 사진에 찍혀서 입니다.

 

오랜시간 일본은 르메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지만 그는 사실 엄청난 애처가이자 딸바보였다고 합니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로 1972년 7월 남북공동성명까지 1만명을 넘는 공작원을 북한에 보내, 7,726명을 실종처리했습니다. 과거에는 북파공작원들의 근무 사실조차 부정되었으며 2002년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최초로 내려졌지만 아직도 그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대한민국을 위해 계급과 군번이 없이 대한민국 비밀 특수부대 5를 소개드립니다.

 

 

  502 비둘기 편대

 

1970년대 해군은 뛰어난 장병들만 착출하여 신체검사와 체력검정을 실시한 뒤 불합격자는 다시 부대로 보냈으며 통과한 인원들은 우리나라 지도에 표기되지 않았던 D라는 섬에서 北공작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당시 거주하던 주민 모두를 다른지역으로 이주) 그들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면 죽는다'라는 슬로건 아래 조국을 위해 무인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소속은 502 비둘기 편대였습니다.

 

 

훈련은 28주 과정이였는데 주로 잠수훈련, 항해기법, 기술정비, 폭약설치, 무귀환 훈련, 유사지역침투훈련, 탈출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그들이 직접 현지에 침투해 사진을 촬영해오는 임무 외 어떠한 작전을 펼쳤는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게 없으며 일정기간 근무 후 일반부대로 돌아가 그 곳에서 전역했다는 기록만 남아있습니다.


 

 

  812 망치 부대

 

북한이 전담 횡강도 무장간첩침투 및 미 정찰기 SR-71 격추시도를 하자 우리나라 전두환 신군부는 1982년초 기존방어개념의 작전을 공격정 방어개념으로 바꾸면서 해병 정예요원들로 이루어진 응징보복 부대 812 망치부대를 양성하였습니다. 이들은 1982년 1월 혹한기 동계해상 훈련을 시작으로 완벽한 임무완수 후 생환을 위해 인간이하의 지옥훈련을 받았습니다. 특히 홀로 산악지대에서 장기 은닉하며 뱀이나 들쥐 등을 잡아먹고 연명하는 연습을 반복했습니다.

 

(1983년 연평도 막사 앞 망치부대원)

 

이들은 '모조리 죽여라!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로'라는 구호 아래 가혹한 훈련을 이겨내며 진정한 인간병기가 되었으며 아군이 보호할 수 없는 NLL 선상을 넘어들며 스크린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북한군에게 잡힐 경우 자폭하기 위해 수류탄 2발씩 옷고리에 안전핀을 묶고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 당시 북한은 망치부대를 막기위해 해안방어에 북한군 1개 사단을 추가로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84년 남북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망치부대는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803 선갑도 부대

 

선갑도 부대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을 기점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어진 부대(정식 명칭은 육군 첩보부대 산하 902정보부대 803대)입니다. 이들 부대원의 차출 조건은 현역을 제외한 남자 중 처자식이나 부모가 없어야 되며 남들보다 뛰어난 신체조건을 갖춰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교도소 죄수들 중심으로 공작원들이 차출되었습니다.

 

 

이들은 영국 첩보부대 MI5와 미국의 CIA를 목표로 말도 안되는 수준의 가혹한 훈련을 받았으며 훈련 도중 사망하는 요원들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1969년 대북침투작전을 위해 백령도로 출정하였지만 작전 취소되었고 2년이 지나 1971년 8월 해체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이들의 공식적인 기록은 당연히 남아있지 않으며 당시 선갑도 대원 중 한명은 '우리들은 얼굴없는 공작원이었으며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와 다름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실미도 684 부대

 

684 부대도 위에 설명했던 803 선갑도 부대처럼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창설되었습니다. 당시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803 선갑도 부대, 해군은 해군은 UDU, 해병에서는 MIU를 창설하였고공군에서는 684 부대를 창설하였습니다. 당시 실미도 부대의 훈련은 제2325전대가 담당했습니다.

 

 

684 부대원들은 북한 특수부대보다 앞서기 위해 30㎏의 모래배낭을 메고 양 발목에도 각 5㎏의 모래주머니를 차고 훈련을 받았으며 야간행군을 포함해 시간당 13㎞를 주파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전세계 어느 특수부대원과 비교해도 기량이 뒤지지 않는 일당백 최정예 요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설된지 3년 4개월이 지나 부대원들은 하극상을 일으키고 청와대로 진격하다가 자폭하여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MIU 부대

 

MIU 부대는 육/해/공 어느 곳을 막론하고 즉각 침투해 임무를 완수하는 살아서 대한민국 최고의 전천후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해병대원 중 우수하고 강인한 자를 중심으로 선발되었으며 북한 8군단같은 특수부대를 일격에 격퇴하고 주석궁에 침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선발과정에서 훈련과 작전 중 사망해도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보호하기 위해 외아들과 장남은 제외되었습니다.

 

 

평상시 임무수행을 위해 40~50명을 항상 유지했으며 훈련중 부상을 입거나 사망해 결손인원이 생길 때마다 인원을 보충해 동일한 능력과 힘을 유지했으며 모든 요원들은 훈련시 “나라는 위해 몸바치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에 보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유서를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1975년10월 부대내에서 사병이 당직사관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MIU부대도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보면 회전시 쏠림이나 휘청거림, 운전대의 느슨한 느낌이라던지 핸들링이 새 차일때만큼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자동차를 타다 보면 방지턱도 넘게 되고 움푹 파인 웅덩이도 지나가게 되다보면 당연히 타이어에 충격이 가게 되고 이럴때마다 자동차 타이어가 고정되어 있는 원래의 각도가 조금씩 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타이어의 각도가 틀어진 상태로 운전을 하다보면 타이어 이상 마모를 일으키며 심할 경우 타이어가 터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는 조향장치의 노후화에 따른 정비 및 조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점검이 바로 휠 얼라이먼트인데 휠 얼라이먼트는 쉽게 설명드리자면 자동차 타이어를 처음 출시될 상태와 똑같은 방향으로 정렬해주는 작업입니다. 자동차를 리프트에 올려서 타이어마다 기계를 장착하고 마치 피아노를 조율하듯이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증상이 있을 때 휠 얼라이먼트 점검을 받아야 할까

휠 얼라이먼트는 자신의 차량이 주행 시 차량이 한쪽으로 쏠리거나 타이어에 편마모가 발생할 경우, 핸들이 안정되지 못하고 흔들리는 경우, 승차감이나 연비가 떨어지는 경우, 차량이 사고나 타이어/부품교환이 있었을 경우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편마모가 발생해서 타이어를 교체했는데 휠 얼라이먼트 점검을 받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원인을 치료하지 않은 환자처럼 다시 편마모가 발생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휠 얼라이먼트는 10,000 ~ 20,000km 주행 시 또는, 1~2년 정도의 주기를 기준으로 점검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운전자 주행 습관이나 차량 상태, 차종(트럭, SUV) 따라 이 주기는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대부분 2~4만km를 주행하고휠 얼라이먼트 점검을 받고 있으며 저도 별다른 이상이 없을 경우 4만km에서 점검을 받습니다.

 

그리고 휠 얼라이먼트 점검을 정비업체 맡기고 신경 안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조금이라도 휠 얼라이먼트에 대해 알고 가시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캠버(Camber)

캠버란 휠 의 윗쪽에 (the top of the wheel)수직상태에서 얼마나 안쪽으로 또는 바깥쪽으로 기울어져 있는가를 말합니다. 전륜의 양측 타이어 하단이 지면을 중심으로 위쪽이 벌어지면 포지티브 캠버, 아래쪽이 벌어지면 네거티브 캠버라고 합니다.

 


토우(Toe)

토우란  두 휠 이 평행상태에서 얼마나 안쪽(toe-in)으로 또는 바깥쪽(toe-out)으로 향해 있는가 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토 인이 심하면 타이어 바깥쪽 마모가, 토 아웃이 심하면 타이어 안쪽 마모가 진행되므로 차량 진행방향과 수평이 되도록 각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캐스터(Caster)

자동차 옆면에서 봤을 때 타이어 중심축의 기울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지면과 직각을 만드는 중심축의 기준이 뒤쪽으로 기울어졌다면 포지티브 캐스터, 앞쪽으로 기울어졌다면 네거티브 캐스터라고 합니다. 해당 각도가 틀어질 경우 떨림 현상이 나타나는데요. 각도가 0에 가까울수록 주행이 안정적입니다.

 


휠 얼라이먼트 점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간단한 작업같은데 정비업체에서 서비스로 제공하지 않는 이유는 휠 얼라이먼트 점검하는 기계 가격이 엄청 비싸다고 합니다. 또한 휠 얼라이먼트 점검은 전문 기술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니 비용을 지불하고 당당하게 전문화된 서비스를 받으시는 것이 좋겠죠. 
 

 

마지막으로 가끔 휠 밸런스와 휠 얼라이먼트의 차이점을 이해 못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휠 밸런스는 휠과 타이어를 결합할 때 생기는 무게중심을 맞춰 균형을 잡아주는 작업을 말합니다. 휠 밸런스는 타이어를 교체할 때 무상으로 해주거나 타이어 개당 만원이하 비용이 발생하며 휠 얼라이먼트는 승용차 경우 3~7만원 정도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휠 얼라이먼트 점검으로 인해 연비가 더 좋아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얼라이먼트 점검 비용보다 더 큰 금액을 절약할 수도 있습니다.물론 비용보다는 안전때문에 받으셔야 합니다. 타이어와 휠은 자동차를 운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품입니다. 내 자동차에는 큰 이상없다고 그냥 넘기지 마시고 정기적인 휠 얼라인먼트 점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6·25전쟁 당시 16개나라가 참전하여 우리나라를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틀뒤에 미국의 참전을 시작으로 캐나다, 콜롬비아,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터키,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총 16개국이 참전했습니다.

 

 

아주 만약에 한반도에서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한다면 어느나라가 대한민국을 돕기위해 달려올까요. 한반도에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253전 무패를 기록한 에티오피아, 지금까지 꾸준히 6.25전쟁 참전을 기념하고 있는 벨기에, 비록 미국의 강요로 6.25 전쟁에 참전했지만 횡성 전투, 인제 전투, 데우산 전투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네덜란드는 만약 제2차 한국전쟁이 한 달이상 지속되면 참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콜롬비아는 50년이 넘도록 진행된 내전이 종식된지 이제 1년이 넘어서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형제의 나라로 불리는 터키도 쿠데타와 IS, 크르드족으로 인해 사회안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뉴질랜드는 작년 쌍용훈련에 병력 60명을 보내긴 하였지만 참전 가능성이 낮습니다. 이 외 프랑스, 룸셈부르크, 그리스, 태국, 남아공도 여러가지 이유로 참전할 가능성이 낮아보입니다. 그렇다면 제2차 한국전쟁 발발시 바로 짐 싸들고 달려올 나라는 어디일까요.


  캐나다

캐나다는 1867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에 병력을 파병하고 있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걸프전, 아프카니스탄전 등에 참전했으며 유엔 회원국중에 꾸준히 유엔평화유지군에 참가하고 있는데 미국의 최우방 동맹국입니다. 올해 6월에 우리 해군의 율곡이이함, 강감찬함이 캐나다 해군 오타와 함, 위니펙함 등과 함께 연합기동훈련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호주

호주는 태평양 지역에선 상당한 군사 강국입니다. 현재 미국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슈퍼 호넷을 쓰는 나라이며 특수부대인 SASR은 영국 SAS와 맞먹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2017년 10월 11일 호주 국방장관이 한국군과의 합동훈련을 늘리는 방식으로 양국 간 군사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해돌이-왈라비라는 이름의 우리나라와 호주 해군의 연합 해상훈련이 2012, 2013, 2015년에 이어 올해 11월에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2013년부터 우리나라와 호주는 꾸준히 북한의 핵ㆍ미사일 위협에 맞선 안보 협력 방안을 두고 회의를 열고 있습니다.


 

  영국

영국은 6.25 전쟁 당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나라입니다. 작년 미국과 함께 우리나라 영공에서 연합 훈련인 '무적의 방패' 훈련을 하며 호흡을 마추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의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는 북한군 전투기를 방어하고 한국,미국 전투기는 북한의 주요 표적을 포격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스티븐 힐리어 영국 공군 참모총장은 영국 공군이 6.25 전쟁 후 처음으로 한국에 날아와 훈련을 한것이 한국 전쟁 때 맺어진 양국 관계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영국은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최신 항공모함 HMS 퀸엘리자베스함을 파견할 수 있으며 만약 전시 상황이 벌어질 경우 전시 상황에 동원할 수 있는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포함한 모든 최신형 장비들을 동원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필리핀

필리핀은 6.25전쟁 당시에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빠르게 파병을 보낸 국가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와 관계도 굉장히 우호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년 미국, 호주, 일본, 우리나라와 함께 연합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필리핀에 F-5 제공호 8대, T-41 초등훈련기 15대, 군용트럭 157대, 물개급 상륙정 1척, UH-1H 기동헬기 20대, 참수리 고속정, 포항급 초계함 등을 무상공여해주었습니다. 필리핀에서 우리나라까지 약 3시간 30분이면 수송기를 통해 파병이 가능합니다.


  일본

6.25 전쟁 기간 중 주일 미군 기지로부터 한반도로 약 100만 번 정도의 출격이 진행됐으며 투하된 폭탄은 70만 톤에 이르렀으며 전쟁 막바지인 1953년 1월 일본 내 미군기지는 무려 733개에 달했습니다. 일본은 한미훈련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제2차 한국전쟁 발발시 미국과 함께 가장 먼저 참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 미사일에 대한 정확한 추적과 분석을 위해 10월 24~25일 한.미.일 해군이 같이 북한 탄도미사일을 탐지·추적하는 미사일 경보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11월 미국의 항공모함 3척이 투입되는 한.미.일 해군 연합 군사훈련은 우리나라의 거부로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미국

소련과의 냉전 시기에 치룬 한국전쟁은 초강대국 미국으로서도 쉽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미국은 총 178만 9000여 명이 참전하였으며 전사자 3만 6940명, 부상자 9만 2134명 등 총 13만 7250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 현재 주한미군의 전력도 막강하며 유사시 한반도에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는 미군 증원전력은 전쟁 발발 90일 안에 미 육군, 해군, 공군과 해병대를 포함하여 병력 약 69만 명, 함정 160여 척, 항공기 2,000여 대가 한반도에 파견됩니다.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해병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해병대는 자국 정부가 국력을 투사할 때 가장 먼저 투입되는 강습상륙부대입니다. 해병대는 다른 방어성격의 부대와 달리 선공을 해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임무가 주어지기 때문에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전투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해군 지원과 전용 항공 그리고 지상무기를 바탕으로 뛰어난 기동성을 갖추고 있으며 전장에서 이들이 가져다주는 전력적 가치는 상상이상입니다. 특히 요즘과 같은 비대칭적 전장과 연안작전의 시대에는 더더욱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가들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해병대가 가져다주는 장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자국 해병대의 규모와 능력을 증강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해병대 전력을 최적화하는데 필요한 상륙함과 군수지원이 부족한 나라들이 많기 때문에 각 국가별 해병대 능력 및 지원 수준 그리고 해병대 규모 모두 다양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단숨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해병대를 갖춘 국가 TOP10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0 인도네시아 해병대

창설년도 1945년

병력규모 13,000여명

13,000개 이상의 섬들로 이루어진 열도국가인 인도네시아의 해병대는 인도네시아 방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해군 당국 관할 아래 해병대는 두개의 대대와 하나의 독립 여단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병력규모도 계속해서 증강될 예정이며 현재 총 4척의 LPD 상륙함, LST (Landing Ship, Tank) 18척 및 LCU (Landing Craft Utility) 14척의 전력을 보유 중입니다. 특히 인도네시아 해병대하면 수색대대가 유명한데 해병대에서 최소한 2년 이상 복무한 장병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3Km 잠수수영이나 결박수영 등이 포함된 약 9달에 걸친 강도높은 훈련을 통과한 인원들이 모여있습니다. 


 

9 필리핀 해병대

창설년도 1950년

병력규모 7,000여명

인도네시아처럼 보호해야할 섬이 많은 필리핀은 7천명 이상의 병력을 가진 해병대를 보유 중입니다. 특징이라고 하면 페키티 티르시아 칼리라 불리는 검술 기반의 전투무술이 군용무술로 채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해상 수송 및 강습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해병대보다 순위가 높은 이유는 미국 해병대와 합동 상륙 훈련을 펼치며 지속적으로 미 해병대에서 필리핀 해병대에 대테러 장비들을 공여해주고 있습니다.


 

8 포르투갈 해병대

창설년도 1621년

병력규모 1,400여명

포르투갈은 비교적 작은 병력으로 구성된 2개의 해병대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해병대는 독립사령부를 보유하고 있고, 모병도 달리하고 있습니다. 주요 화기는 G-3 소총과 MG-3 기관총이며 특수부대에 한해서 M4카빈을 사용합니다. 대전차 무기는 칼구스타프 84mm 무반동포와 밀란 대전차 미사일, 지대공 미사일은 fim-92 스팅거 MANPAD, 수륙양용차량은 미 해병대와 같은 LARC-5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7 프랑스 해병대

창설년도 1966년

병력규모 2,500여명

대다수 국가의 해병대가 해군 함정 승선전투요원으로 출발한것과는 달리 프랑스 해군의 경우 해병대와는 별도로 해군소총부대라는 부대를 운용해서 운용했고 프랑스 해병대의 경우 해군함정 승선전투와는 관계없는 식민지 주둔군 부대, 즉 원정작전 상륙부대로서의 개념으로서 출발했기 때문에 지금도 프랑스 해병대는 해군이 아닌 육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프랑스 해병대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 주둔하여 외인부대와 함께 프랑스 신속대응전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6 스페인 해병대

창설년도 1537년

병력규모 5,300여명

무적함대에서 보병 및 기병, 포병 등 육군 훈련을 받은 육전수병들은 해전 시 적 함정에 올라가 백병전을 벌이는 임무를 하였는데 이것이 해병대의 기원입니다. 현재도 스페인은 제대로 된 해병대를 가진 대표적 국가이며 대한민국 해병대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해병대는 미 해병대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해병대는 스페인 해병대입니다.


 

5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년도 1949년

병력규모 27,000여명

병력 규모면에서 전세계 해병대 중 미 해병대에 이어 두번째로 많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중국이 해군육전대 병력을 10만명으로 대폭 증강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나라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라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투력 하나만큼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체수송능력은 열악한 수준입니다. 독도함 기준으로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전차가 고작 2대이며 미국의 도움 없이는 상륙작전 1회에 고작 천여명 정도를 투입할 수 밖에 없습니다.


 

4 러시아 해병대

창설년도 1705년

병력규모 12,000여명

1705년 피터 1세에 의해 창설된 러시아 해병대는 태평양 함대에 제55사단, 북해함대에 1개여단, 발틱해함대에 1개여단, 흑해에 1개연대, 카스피해에 1개여단이 배치되어 있으며 별도로 수도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1개 대대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러시아 해병대 전투능력은 전세계가 인정할 정도로 우수하지만 장비가 노후되고 인원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 미 해병대처럼 강력한 상륙작전은 힘듭니다.


 

3 네덜란드 해병대

창설년도 1665년

병력규모 3,100여명

네덜란드 해병대는 우리나라 해병대처럼 정규상륙보다는 영국 해병대나 미국 네이비 씰처럼 소수 정예 방식으로 구성된 특수부대에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장갑차량 250여대와 중형 상륙정 17척을 보유하고 있으며 네덜란드 해병대 여단 중 1개 대대가 영국의 제3 특공여단과 통합되어 영국/네덜란드 강습상륙전력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2 미국 해병대

창설년도 1775년

병력규모 182,000여명

1775년 필라델피아에서 창설되면서 시작되었으며 지금 현재는 다른 나라에서는 항공모함으로 사용하는 4만t 강습상륙함이 10척이나 되며 거기에 F-35B 스텔스기와 F/A-18을 운용하고 있으며 원정군 편제를 사용해 대륙을 건너 타국을 우선적으로 침공하는 작전을 수행하며 해병대의 개념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부족할게 없으며 전투력도 상당하기 때문에 대규모 특수부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1 영국 해병대

창설년도 1644년

병력규모 7,700여명

영국 해병대는 영국 해군(Royal Navy) 소속의 정예 전투부대입니다. 1960년대 이후 해병대 내에서 코만도부대를 확대하여 기존의 해병대 소속 보병부대들 중 제1강습상륙단, 539 강습전대 및 소수의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를 코만도여단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래서 현재 영국 해병대의 전투부대는 대부분 해병코만도(Royal Marine Commando)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해병대는 산 마르코 (San Marco) 연대로 불리는 해군보병부대와 육군의 강습상륙부대가 혼성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리스의 라이벌인 터키는 현재 해군의 강습상륙전력을 증강시키는 중이라고 입니다. 대만 해병대는 해외파병보다는 중국의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 작전이 주목적이며 중국의 라이벌로 급부상하고 있는 인도는 의외로 해병대 병력이 고작 1천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중남미 지역의 경우, 해안을 가진 국가 거의 모두 다 해병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두번씩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경우는 해병대가 없습니다.

 

미 육군에는 그린베레(Green Berets), 미 해군에는 네이비 씰(Navy SEALs)이라는 특수부대가 존재하지만 특수부대 못지않은 혹독한 훈련을 받은 소수정예로 불리는 미 해병대에도 특수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미 해병대에는 레이더스(Raiders)와  포스리컨(Force Recon)라는 특수부대가 존재합니다. 이들은 미국이 만약 선제공격을 하게 되면 가장 앞장서서 침투하는 부대이기도 합니다.

 

 

 

포스리컨은 정말 소수정예 중에 소수이기 때문에 인원이 적어 2개의 중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뛰어난 해안 침투 능력을 자랑하며 엘리트 부대라 불리는 미 해병대에서도 정식적, 육체적으로 모두 뛰어난 대원만 포스리컨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레이더스도 소규모 부대로 해안 침투, 직접적인 전투가 주 목적인 포스리컨과는 다르게 현지에서 비정규군과 함께 작전을 펼치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포스리컨은 베트남전쟁 중에는 저격·기습·요인납치 등 해군의 네이비실과 같은 특수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걸프전,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전쟁 등에 참여하여 수색, 저격 등 임무를 갖고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관한 정보는 우리나라 707 특임대와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레이더스는 미 해병대 최초의 부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해병대가 이미 특별한 부대인데 무슨 별도의 정예부대가 따로 필요하냐는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당시 영국 특수부대 코만도가 엄청난 활약을 펼치자 당시 미 대통령 루즈벨트의 지시에 따라 당시 정예부대 해병대 중에서도 최정예 병력들만 선발해 레이더스라는 엘리트 특수부대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창설된 레이더스는 엄청난 지원과 함께 해병대에서 최우선 순위 대접을 받았습니다. 레이더스에서 요청하면 어떤 신무기든 아낌없이 보급되었고 해병대 내 타 부대 정예 인원 차출에도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최정예 부대인 만큼 엄청난 극한 훈련을 받았으며 손쉽게 적진 한가운데 투입되어도 믿을 수 있는 전력이었습니다.

 

 

물론 1942년부터 1944년 2월까지 짧은 기간을 활동하고 해체되었지만 많은 전공을 남겼습니다. 레이더스는 미드웨이 해전 당시 2대대의 일부 중대들을 미드웨이 섬 방어에 투입되기도 하였으며 일본령 길버트 제도의 마킨 환초에 잠수함을 통해 2대대를 투입시켜서 소규모의 주둔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성공리에 회수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과달카날 전역에서 무려 29일간(1942. 11. 6 ~ 1942. 12. 4)의 연속된 적지 강행정찰을 수행하였고 정찰기간 동안 5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면서 전사자 16명, 교환비 30:1이 넘는 놀라운 전과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미군은 1943년 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본격적으로 반격작전을 준비했고 일본 역시 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전방 기지들의 요새화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 해병대는 레이더스와 같은 소수정예보다는 제대로 된 지원화력을 갖춘 정규전 편성의 일반 해병부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처음부터 해병대 안에 또 다른 특수부대 레이더스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태평양 해역군과 해병대 수뇌부는 레이더스를 일반 해병대대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레이더스의 역사는 1944년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레이더스가 해체되고 7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2014년 오래전 잊혀졌던 옛 전통의 이름을 다시 살린다는 이유로 해병대 특수작전연대의 부대 명칭이 레이더 연대(Marine Raider Regiment)로 부대명이 바뀌면서 레이더스라는 부대명이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물론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미군 특유의 방식으로 탄생한 지금의 레이더스는 예전 레이더스와는 다르지만 이름만 들어도 가슴뛰게 만드는 레이더스라는 명칭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도로에 난 구멍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구멍을 포트홀(pot hole)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포트홀은 달리는 자동차 안전에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자동차 서스펜션과 타이어, 휠의 파손부터 크게는 차체 전복과 같은 대형사고까지 유발하여 도로 위의 지뢰라고도 불립니다. 이런 포트홀이 생기는 이유는 아스팔트는 물에 취약한 특징이 있는데 비가 내리면 자연스럽게 아스팔트 틈새에 빗물이 스며들게 되고 이후 과적 차량 등에 의해 강한 압력이 생기면서 약해진 아스팔트가 떨어져 나가게 되면서 포트홀이 생기게 됩니다. 겨울에는 폭설이 내린 이후에 포트홀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포트홀은 이미 바닥에 나있는 구멍이기 때문에 막상 맞닥뜨리면 이를 피하거나 피해를 100% 막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포트홀은 운전자 시야에 잘 안들어오는 경우도 많고 만약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아도 거리가 가까워 멈추기 힘든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포트홀을 피하려고 차선을 변경하다가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포트홀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장마철이나 겨울철에 타이어를 자주 점검하며 급제동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운전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포트홀을 발견한다면 뒤따르는 자동차에게 수신호나 비상등을 통해서 위험 신호를 주는 배려도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 포트홀 사고로 인해 타이어가 터지거나 휠, 조향장치가 파손 등 자동차가 손상되었다면 당황하지마시고 먼저 포트홀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사진 촬영 및 동영상 촬영으로 증거를 수집해야 합니다. 직접적인 증거(포트홀/차량의 파손 부위 촬영과 사고 당시 블랙박스 영상)가 있으면 조사를 거친 뒤 각 지자체가 가입한 '배상책임보험'으로 보험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비업체를 방문하여 꼼꼼하게 점검을 받고 수리를 받은 뒤 견적서와 영수증을 보관합니다.

 

 

포트홀로 인한 피해는 도로를 관리하는 지자체를 통해 보상받야 하는데 이때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준비물을 준비해서 배상 청구를 진행해야 합니다. 참고로 일반 자동차전용 도로의 경우는 각 지자체 시설관리공단, 강변북로, 올림픽대로와 같은 도시고속도로는 각 지역 도로관리청, 동, 서, 남, 북부 간선도로와 같은 4차선 도로는 서울시 도로사업소, 2차 선 이하의 도로는 각 구청 도로관리소를 통해 보상청구를 하시면 됩니다.

 

 

이때 필요한 준비물은 피해자 자필 경위서, 피해차량 사진, 사고현장 사진, 피해차량 수리견적서 및 영수증, 자동차견인확인서나 보험사 긴급출동확인서, 사고 당시 블랙박스 영상, 자동차등록증 사본이면 됩니다. 그리고 보통 보상을 받기까지 2~3개월 정도 소요됩니다. 문제는 국가 배상 신청을 하더라도 증거 서류가 미비하거나 사고 인과 관계가 불분명하면 기각돼 보험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니 증거 수집이 가장 중요합니다.

 

미국 해병대는 미국의 7개 현역복무 기관 중 하나이며 182,000명의 현역과 38,500명의 비상근 예비역을 자랑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미 해병대의 전투력을 보고 악마의 개(Devil Dogs)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은 본토와 주일미군 등 전체병력 가운데 해병대 70% 이상의 증원전력을 전개할 계획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매우 든든한 전력입니다.

 

 

미국은 매년 2천명 이상의 지원자가 해병대 장교로 임관하고, 매년 3만8천명의 해병대 신병들이 훈련소에 입소해 훈련을 받습니다. 해병대 신병의 경우 부트 캠프(Boot camp)로 알려진 샌디에이고와 패리스 아일랜드 해병대 신병훈련소, 이렇게 두 곳의 신병훈련소 중 한 곳에서 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 곳 훈련소들은 훈련 강도가 너무 강해서 탈락자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탈락률이 15%정도로 매우 높은 편)

 

 

 

해병대 신병 훈련은 13주로 미군에서 가장 긴 신병 훈련입니다. 일단 훈련소로 입소한 후 체육훈련복과 개인청결도구 등을 지급받으며 머리를 거의 대머리식으로 깎게 됩니다. 이후 인화기 지급및 예방접종이 실시되며 초기 체력평가 시험이 실시되는데 턱걸이 3회, 반 윗몸일으키기 2분내에 45회, 그리고 1.5마일 완주를 13분 30초내에 마쳐야 합니다. 

 

 

그리고 각 훈련대로 배치되어 훈련교관들을 소개받는데 중대장의 소개와 중대장이 훈련교관들을 소개하고 이들을 상대로 '훈련교관 선서'를 행한 후 훈련병들을 인개합니다. 이때 부터 교관들은 훈련병들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군기를 잡기 시작하는데 우리나라 해병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명높은 해병대 기초군사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4 주차 정신단련

 

13주 기초군사훈련 중 첫 4주 동안은 군기확립기간으로서 훈련병들이 민간인 시절에 가졌던 행동가짐이나 정신태도가 용맹한 해병대에 맞게 개조됩니다. 당연히 얼차려가 다반사로 일어나며 해병대 훈련 교관들의 악명이 왜 그렇게 높은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 기간에는 엄청난 체력훈련도 함께 하고 4주째가 되면 레펠링과 눈물 찍! 콧물 찍!하는 화생방 훈련이 실시되는데 당연히 화생방 훈련에 불합격 된 훈련병은 다시 화생방 훈련을 받아야 되며 만약 두 번째에도 불합격이 되면 훈련병에서 완전히 탈락됩니다.

 

 

 

  5~8 주차 사격·야외

 

주로 사격훈련과 야외훈련이 집중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사격훈련은 200야드, 300야드, 그리고 500야드 (각각 180, 270, 그리고 460미터)에 위치한 목표물들을 명중시키는 것으로 점수를 매겨 합격여부를 결정하고 해당사격급수 뱃지가 수여됩니다. 실패해도 다시 한번 기회를 주지만 만약 2차시험에서도 실패할 경우 5~8 주차 훈련을 다시 처음부터 받아야 합니다.

 

 

합격한 훈련병들은 야외훈련을 받게 되며 이때는 지옥같은 각종 야외 체력훈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군대 훈련 중 끝판왕이라 불리는 유격훈련보다 강도가 몇 배는 더 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9~12 주차 야전훈련

 

이때부터 본격적인 야전훈련이 이루어지고 이와 연계된 각종 체력훈련 역시 병행됩니다. 독도법과 지형 항행법, 그리고 위장전술 등을 배우고  마지막에 체력시험까지 합격해야 합니다.

 

 

  13 주차 종합훈련

 

해병대 기초군사훈련의 마지막 종합야전훈련으로 총 54시간, 약 2박 3일로 진행됩니다. 이 기간동안 치뤄지는 야전훈련은 그동안 훈련병들이 습득한 훈련을 기조로 해서 다양한 실전상황을 연출, 여기에 대입한 모의야전훈련격으로 실시됩니다.

 

 

문제는 이 훈련기간동안 총 8시간의 수면(하루 8시간이 아니고 훈련기간 동안 주어지는 총 수면시간이 8시간), MRE 3회 지급(열량이 높은 전투식량), 그리고 총 48마일(약 77km. 서울~천안정도)의 행군은 훈련병들을 극한으로 몰아넣습니다. 여기에 장애물 돌파, 탄약통 운반, 고지점령, 야간침투훈련을 함께 수행해야 됩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지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해병대 훈련에서도 마지막 주에 잠도 하루에 몇 시간 정도밖에 못 자고, 밥도 제한배식으로 줄어들고 각개전투훈련 같은 힘든 훈련을 하고 마지막에 천자봉을 올라가는 극기주 훈련이 있습니다.

 

 

만약 이 훈련까지 마치게 되면 정식으로 해병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의 예식을 치루게 되는데 이떄 미 해병대의 문장인 EGA(지구, 독수리, 닻) 핀이 주어집니다. 

 

 

이후 극한 훈련을 이겨내고 진정한 해병대가 된 이들을 위해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때 먹고싶은 만큼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허락됩니다.

 

 

이후 최종 개인검사가 진행되며 가족면회도 가능해 집니다. 또한 훈련병들이 훈련교관과 관련한 훈련때 경험한 우스웠던 일이나 군기때문에 함부로 표현할 수 없었던 상황을 연극형식으로 재현해 즐기는 행사도 펼쳐 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료식이 진행되며 진정한 미국 해병대탄생을 알리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승전 4개국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을 4개로 쪼개어 분할점령 및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베를린은 소련 점령지역 한복판에 있었지만 수도라는 특성상 역시 4등분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동서 진영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습니다.

 

 

특히 소련은 당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보여주는 미국의 마셜 플랜(유럽을 재건 시키기 위한 자금 지원 계획)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3개국이 공동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서독에 도입하고 마셜 플랜을 집행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소련은 만약 자신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3개국이 합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결국 소련은 1948년 1월 베를린행 영국과 미국의 열차를 멈춰세우기 시작했으며 3월 20일 소련은 베를린 소재 연합국 통제 이사회에서 탈퇴하였고 3월 25일 베를린과 서방 연합국의 점령지대 사이를 오가는 열차를 통제해버렸습니다. 6월 18일에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를 봉쇄하고 소련 점령당국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으면 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렇게 6월 24일 서베를린에 최소한적으로 이뤄지던 생필품의 공급이 전면적으로 중단되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모스크바에 있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권력자 스탈린의 결정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소련은 핵개발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종전 3년 만에 더 벅찬 전쟁을 치른다는 건 역부족이었기에 서방과의 새로운 전쟁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으나 나중에 서방과의 관계나 독일 문제에 있어 연합국보다 우위를 차지할 필요성은 있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소련의 이런 말도 안되는 베를린 봉쇄(BerlinBlockade)로 인해 인구 200만의 대도시 서베를린은 졸지에 굶주리게 되는 상황이 되버렸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연합국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와 영국도 소련처럼 본토에서 전쟁을 치른 상태였고 미국도 백악관 회의에서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피할 수 없으며 베를린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사실 미국도 소련과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당시 서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 병력만 50만이었고, 동독에 전개한 소련군 전체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반면 미국은 종전 후 급속한 감군으로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쟁은 피하길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피하고 베를린 봉쇄를 풀기위해 대규모 공수작전이 제시되었으나 일 평균 3,600톤의 물자를 서베를린으로 공수해야 한다는 보고에 좌절해야 했습니다. 설사 공수작전을 감행한다 해도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으며 수송기들이 중간에 소련기의 방해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를린 공수 강행을 공군에 지시했습니다.

 

 

'전세계의 C-54 조종사들한테 전한다.

지금 즉시 독일로 날아오도록!'

 

미국은 전쟁이 끝나고 퇴역시켜 창고에 두었던 수송기들을 모조리 꺼내고 퇴역한 예비역 파일럿들을 재소집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유럽공군사령관 르메이의 진휘와 함께 말도 안되는 물량의 공수작전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작전개시 단 1달만에, 작전에 투입된 미군 수송기는 1,000여 대에 육박했습니다.

 

 

미국의 1일 공중수송능력은 1천톤은 가뿐히 넘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면서 미국의 말도 안되는 물량은 소련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습니다. 1월에만 171,000톤, 2월에 152,000톤, 3월에 196,223톤의 물자가 각각 공수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수 물자는 초기엔 식량과 석탄 등의 필수품으로 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종사였던 게일 핼버슨(Gail Halvorsen)중위를 시작으로 조종사들이 개인적으로 가져간 사탕이나 초콜릿 등을 손수건으로 싸서 공중에서 베를린에 떨어뜨렸고 이후 수많은 조종사들이 사탕과 초콜릿을 낙하산으로 베를린에 떨어뜨렸습니다.

 

 

 

"얘들아! 아저씨가 내일도 여기로 사탕을 싣고

올테니까 여기서 꼭 기다려"

 

베를린 아이들에게는 게일 핼버슨은 영웅과 같은 존재였으며 아이들은 그의 수송기를 건포도 폭격기(raisin bomber)라고 불렀습니다.

 

 

*군것질 낙하산을 만들고 있는 게일 핼버슨 미 공군 중위

 

이 작전이 알려지면서 베를린 시민과 독일 국민들의 지지가 커졌고 미국 국민의 대중적인 지원이 쏟아졌습니다. 미국 제과협회에서는 게일 핼버슨 중위에게 필요한 물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은 후 수톤 규모의 초콜릿과 사탕, 껌을 지원했고, 미국 학교에서는 사탕과 껌을 매단 낙하산을 만들어 독일의 미군 공군기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1949년 1월까지 모두 25만 개의 군것질 낙하산이 공중에서 투하하되었습니다.

 

*베를린 아이들을 만난 게일 핼버슨 미 공군 중위


이런 말도 안되는 물량을 바라본 스탈린은 미국의 공수를 방해하고 봉쇄를 유지하려면 전투기를 동원해 직접 요격하는 방법뿐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미국과의 전면전쟁을 의미했기에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고 결국 봉쇄 8개월만인 5월 12일 봉쇄령을 해제하였습니다. 그렇게 소련의 베를린 봉쇄는 대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미국의 가공할 경제력과 동원력만을 재입증 시켜주었습니다. 이후 스탈린은 죽을 때까지 미국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회피했습니다.

 

 

베를린 봉쇄 기간 동안 연합국 공군은 총 27만 8228회의 비행을 통해 물자 232만 6406톤(미국 공군178만 3573톤, 영국 공군 54만 1937톤)을 공수했습니다. 이 작전기간동안 미국은 사고로 수송기 17기를 잃고 31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영국은 8대의 수송기와 39명의 파일럿들을 잃었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공수작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