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우리나라의 경우 휴전국이라는 특수성과 북한군 편성이 육군 위주로 편성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자연스럽게 육군에 더욱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 또한 공군과 해군은 유사시에 미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산이나 여러가지 문제에서도 육군의 입김이 해군, 공군보다 강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 육군의 포병전력은 확실히 강력하며 화력덕후라고 불리기까지 합니다. 전 세계 전차 보유 수량을 살펴보면 1위 러시아, 2위 중국, 3위 미국, 4위 북한으로 북한이 우리나라(14위)보다 육군 기갑전력이 더 강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3세대 이상 전차 보유 수량으로 살펴보면 미국이 1위, 러시아 2위, 우리나라가 3위이며 북한 전차 대부분은 성능이 떨어지는 2세대 전차입니다. 북한이 비대칭 전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주요 함대의 위치

 

이처럼 모든 나라들의 군사력은 나라의 상황과 지형, 주변 국가에 따라서 육군력, 해군력, 공군력이 모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일본은 막강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정식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고 자체 방어라는 명목 하에 자위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해상자위대는 공격용 무기체계를 보유하지 않고도 미국과 러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 3위의 전력을 자랑합니다.

 

 

아무리 중국 해군의 전력이 급상승했다고 하더라도 일본 해상자위대의 전투력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만약 일본이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전환시키고 원자력 추진 잠수함과 공격용 미사일 등을 운용한다면 그 격차는 더 벌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해상자위대 뿐만 아니라 항공자위대도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해외에서는 우리나라 공군보다 더 일본 항공자위대 전력을 더 우위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육상자위대 전력은 상대적으로 초라합니다. 우리나라 육군과 비교 자체가 안되는 수준입니다. 일본이 해군력, 공군력에 힘을 쏟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합니다. 바로 섬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육상자위대는 적군의 상륙작전을 방어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대륙 방어 전통에서 벗어나 해군력,군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의 육군 전력은 세계 1위 수준으로 강력합니다대부분 군사전문가들은 러시아보다 중국 육군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병력 수로는 세계 최대이며 전차, 장갑차, 자주포 보유 수량을 살펴보면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중국이 이처럼 육군력에 집중한 이유는 인도와 국경분쟁으로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충분하며 현재는 러시아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 협력을 하고 있지만 또다시 국경 문제로 마찰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행보를 살펴보면 육군보다는 해군, 공군에 더 힘을 싣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은 대규모 상륙작전을 자주 실시하고 자국의 해병대인 해군 육전대 병력을 지금의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늘리면서 대만을 언제든지 침공할 수 있다는 압박을 주고 있으며 일본과 센카쿠 열도를 두고 치열하게 영토 분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중국이 이러는 이유는 남중국해부터 확실히 장악한 후 태평양 진출을 하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중국은 줄곧 전세계를 무대로 작전을 펼치고 해양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대양 해군 건설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현재 중국 해군의 목표는 신형 항공모함 건조와 동시에 구축함대와 호위함대 증설, SSN, SSBN 세력 확대입니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2030년 전에 항공모함 전투단 4개를 보유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최근 중국 차세대 항공모함의 주력 호위함 건조가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또한 과거 중국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지상군 위주로 참전하였고 (미군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이 공군을 지원하지 않았음) 결국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의 계속되는 공습에 3천8백대에 달하는 군수지원용 트럭을 거의 파괴당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후 중국은 전투기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배정하고 전투기 개발에 힘을 쏟았습니다.

 

지금 현재 중국 공군은 다양한 능력(불법 개조, 불법 카피)을 통해서 서방 공군과의 격차를 빠르게 좁혔으며 2010년대에 들어서 5세대 전투기인 J-20과 J-31을 개발하였고 2017년 9월에는 J-20 스텔스 전투기까지 실전 배치하였습니다.

 

 

미국의 경우 당연히 육.해.공 전력 모두 강력합니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위해 전 세계를 아프리카, 중부, 유럽, 북부, 태평양, 남부라는 6개 권역으로 나누고 통합전투사령부를 두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해외 주둔 미군은 각 주둔지에 따라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이런 식의 통합사령부를 둔 나라는 미국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10개의 항모 전단을 운용하고 있으며 유사시 분쟁지역에 다량의 무기를 신속히 공급하기 위해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 사전배치전단까지 배치해놓고 있습니다. 이렇듯 전 세계가 미국의 작전 지역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육군보다는 해군과 공군 전력에 더 집중될 수 밖에 없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 지휘부가 정말로 두려워 했던 것은 자신들이 더이상 북쪽으로 후퇴할 곳이 없다는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또한 미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미국이 베트남을 절대 집어삼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당시 자신들과 전쟁을 하던 미군보다 베트남 위에 위치한 중국군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베트남을 침공, 병합하여 1천여년 간 지배하였으며 또 다시 베트남에 쳐들어와서 20여년 간 통치한 끝에 쫓겨나긴 했지만 언제나 베트남의 종주국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런 중국이 만약 자신들을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베트남 전쟁에 전면개입을 한 다음 자국 영토라고 우기면서 강제합병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1979년 2월 17일, 중국이 5개 사단, 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베트남을 전면 침공

 

베트남이 친중국노선을 걷던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중국이 발끈하여 1979년에 중월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소련의 압박을 의식한 중국의 일방적인 전쟁 포기로 끝났지만 그 이후에도 1990년대까지 계속 국경에서 산발적인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중국이 지켜준다는 보장은 절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베트남은 중국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2014년 5월 2일 중국은 파라셀 제도 인근에 10억달러짜리 석유시추 장비(해양석유 981)를 설치하였습니다. 중국은 자원개발 자체보다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속셈이 컸습니다. 여기에 베트남은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중국이 불법 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중국은 파라셀 제도는 중국의 고유한 영토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파라셀 제도는 매우 작은 섬이기 때문에 일반인이 거주하지 못하지만 매장된 자원의 경제적 가치는 엄청난 산호초의 작은 섬으로 사실 베트남 영토였지만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74년 1월 19일에 중국이 이 곳을 점령했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베트남과 중국, 대만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에 화가 난 베트남은 초계함을 현장에 보내어 중국에게 장비 철수를 요구했으나 중국은 함정 3척을 보내서 베트남 선박을 들이받고 물대포 등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2014년 5월 7일 중국은 항공기와 헬리콥터를 보내어 베트남 측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이런 양측의 충돌은 5월 12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베트남 경비대원 9명이 부상을 입고 선박 8척이 파손되었습니다.

 

 

베트남 경비대원 부상 소식을 들은 베트남 시민들은 5월 10일 하노이의 중국대사관 앞에서 100여 명이 격렬하게 항의를 시작하였고 다음 날인 5월 11일 베트남 중부 후에, 다낭에서 수천 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5월 13일이 되자 베트남 남부 빈즈엉 성 산업공단에서 약 2만 명이 시위를 벌이는 등 시위 규모가 커지면서 시위 참가자들은 한자 간판이 붙어 있는 기업을 중국 국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로 시위를 엄격히 통제해 왔으나 이 시위는 베트남 정부가 분노한 국민들을 고려하여 시위를 허용하였습니다. 이 시위 기간동안 베트남 해커들이 며칠에 걸쳐 중국 정부 홈페이지 여러 곳을 공격하여 중국 기업 홈페이지에는 베트남 국기가 휘날리는 이미지 등으로 바뀌는 상황까지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자국을 떠나 세계에 퍼져 있는 베트남 인들은 여러 나라에서 중국을 규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종로구와 부산, 광주 등에서도 중국 규탄 시위를 열렸습니다. 홍콩에서는 베트남 교민 50명이 혈서를 쓰고 시위를 하였으며 독일, 일본, 미국에서도 베트남인들의 시위는 멈춰질 줄 몰랐습니다.


 

이후 과열된 시위로 인해 베트남에 있던 중국 공장들은 불타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베트남 근로자 4명, 중국인 16명이 사망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사태가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지자 중국은 5월 18일 베트남에 머무르고 있는 중국인 3,000명을 본국으로 귀환시켰으며 5월 19일 1만 톤급 대형 선박을 파견하여 중국인 4천 명을 추가로 본국으로 귀환시켰습니다.

 

 

그렇게 반중시위가 잠잠해지는 듯 했지만 5월 26일 파라셀 제도 부근 해역에서 조업 중이던 베트남 어선 1척을 중국 어선 40여 척이 둘러싼 뒤 들이받아 침몰시키면서 잠잠해지던 반중시위에 또 다시 불을 지피게 되었고 이에 중국은 7월 16일 꼬리를 내리고 파라셀 제도 인근에 설치했던 석유시추설비의 임무가 완료돼 철수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베트남 발표자료에 따르면 시위가 발생한 5월 베트남을 방문한 중국인 수는 전년도 동월에 비해 29.53 퍼센트 감소했지만 상반기 외국인 부동산 투자액은 전년도 대비 65 퍼센트 증가하였고 국가 전체 경제성장률 또한 외국인들의 지속적인 직접투자와 제조업 부문의 수출호조로 안정적 수치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당당하게 맞서는 베트남을 상대로 중국은 절대로 가벼이 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불과 4년도 지나지 않은 사건입니다. 현재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와 미국, 중국을 몰아낸 강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이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반 육군의 경우 신병 훈련이 육군훈련소나 각 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이뤄지지만 진정한 해병대가 되기 위해서는 해병대 교육훈련단을 거쳐야 합니다. 해병대 교육 훈련단 입구에는 '해병대 미래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라는 문구가 눈에 확 띕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 교관을 D.I(Drill Instructor)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 D.I 들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해병이 되고자 도전한 신병들에게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라고 자주 외칩니다. 이처럼 대한민국 해병대는 전통과 긴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슬로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 잡는 해병대'

 

1950년 8월 16일 북한군 2개 연대가 경남 통영 시내를 기습 공격하자 대한민국 해병대가 단독으로 반격에 나선 통영상륙작전을 다룬 기사가 미국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에 실린 한국전쟁의 전황 보도 중 한 줄이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1920~1966)이 우리 해병대를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그들은 아마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국내 신문사들은 이 기사를 번역해 보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 구호는 지금까지 우리 해병대를 대표하는 슬로건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은 원래 미 해병대 구호에서 유래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해병대가 60년이 넘도록 사용한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해병대 전우회에서는 이 슬로건 아래 모여 각종 사회봉사활동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신화를 남긴 해병'

 

1966년 2월 해병대 11중대는 베트남에서 펼쳐진 짜빈동 전투에서 2개 연대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을 뿐만 아니라 적 243명을 사살하고, 다양한 무기를 노획하여 한·미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으며 중대 사병 총원이 1계급 특진의 명예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UPI통신 등 외신들은 이 전투를 ‘신화를 남긴 해병대(Mythological Story)’라고 보도하면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또 다른 슬로건이 탄생하였습니다.


 

'무적 해병'

 

1951년 6월4일 강원도 양구 도솔산(1148m) 지역은 휴전회담에서 대두될 군사분계선의 위치선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군사 전략지였습니다. 우리 해병대는 야간공격으로 적의 저항선을 하나씩 침몰시켰으며 6월 19일 도솔산 적 진지에 대한 마지막 야간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난공불락 같던 도솔산 암벽진지가 우리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미 해병대 제1 사단장 토마스(Gerald C. Thomas) 소장은 “한국 해병대가 아니었으면 이 전략적 요지를 우리 수중에 넣지 못했을 것”이라고 극찬하였고 이승만 대통령도 직접 도솔산을 방문해 해병대 1연대에 부대표창을 수여하고 "무적해병"의 친필 휘호를 내렸습니다.


 

 

'안되면 될 때 까지'

 

해병대는 부여된 임무는 반드시 완수하고 만다는 사명감과 특유의 강한 충성심으로 지금까지 제시된 목표를 한 번도 완수하지 못한 적이 없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부대입니다. ‘안되면 될 때까지’는 해병대가 창설이후 열악한 환경과 조건을 극복하면서 6·25전쟁과 베트남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이룩하며 만들어 낸 슬로건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해병'

 

해병대는 전력을 바다에서 육지로 투사해 해안두보를 확보하는 상륙작전이 중심입니다. 상륙작전은 적지 가운데에서도 상륙하기 좋은 거점은 일반적으로 적의 우주방어가 구축이 되어 있는데 그 곳을 대놓고 뚫어내는 작전이기 때문에 그만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해병대 슬로건입니다. 해병대 특유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00% 지원자로 구성되는 해병대의 강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용어로 해병대 특유의 교육훈련‚ 전우애‚ 충성심 등에서 나온 슬로건입니다. 또한 타군과 차별화되는 해병대의 명예와 전통 속에서 자기 자신이 해병대의 일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해병대 입대 경쟁률은 10 대 1을 넘나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해병대 일원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작지만 강한 해병대'

 

2010년 11월 1일 해병대 사령부는 해병대는 다른 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지만 작전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수정예의 의미를 강조한 '작지만 강한 해병대' 공식 표어로 정하였고 지금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군 전투기가 피격되거나 고장을 일으켜 불시착하게 될 경우 만약 조종사가 바다 위 혹은 험한 산악지대에 고립되었다면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가는 특수부대가 존재합니다. 공군 소속의 특수부대 제6탐색구조비행전대 항공구조대(SART)입니다. 이 부대는 한반도 전역의 탐색구조임무를 맡고 있는 유일무이한 회전익 항공기 기종을 운용하는 특수부대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적진은 없다
동료만 있을 뿐이다

어둠과 절망 속에 있는 그들을 위해

내 곧 가리라
내 목숨은 버려도
조종사 목숨은 살린다
나는 대한민국 탐색구조원이다

 

‘내 목숨은 버려도 조종사는 구한다’라는 모토는 다른 특수부대와는 달리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그들의 임무입니다. 이들은 조종사가 아무리 위험한 적진 한가운데 떨어졌어도 구조하기 위해 달려갑니다. 보통 적지에 있는 조종사 한 명을 구조할 때는 구조대원은 물론 구조헬기 두 대와 전투기 여섯 대, 공중통제기 한 대, 그 외 지원 전력까지 막대한 인원과 물량이 투입됩니다.

 

 

조종사는 꼭 지켜야할 소중한 생명이며 조종사 한 명을 양성하는데 60억 원 이상의 비용과 막대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전쟁에서 조종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조종사가 보유한 엄청난 양의 군사정보와 지식이 적에게 넘어가면 아군에게 심각한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항공구조사들은 1분 1초가 중요한 구조 상황에서 실수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도 완벽한 임무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훈련 과정은 매우 혹독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합니다. 항공구조사가 되기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을 가진 공군 부사관 중에서 선발하여 1년동안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공군소속의 특수부대지만 고공강하훈련, 잠수(SCUBA)훈련, 해상구조훈련, 산악구조훈련, 빙벽구조훈련 등의 훈련은 물론 의사에 버금갈만한 응급치료법을 배우는데 그 동안 절반 이상이 탈락합니다. 만약 이 모든 교육과 훈련을 통과한다면 항공구조사의 상징인 붉은 베레모를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전 상황에 대비한 특수 훈련과 기타 실전 훈련을 거쳐 최소 5년 동안의 훈련을 받아야 실제 구조작전에 투입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만큼 위험천만하고 난이도가 높은 작전을 수행하는 만큼 장비도 첨단 장비를 착용합니다. 707특임대, UDT와 동일한 옵스코어 FAST 헬멧과 K1A 기관단총에 레일과 손잡이를 달아 사용하며 2017년부터는 멀티캠 전투복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항공구조대 구성은 231 비행대대, 233 비행대대, 235 비행대대, 항공구조대, 정비대대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231비행대대는 주로 전투탐색구조, 전술공수, 대량 환자공수 임무를 수행하며 233비행대대는 블랙호크 헬기를 한국형 탐색구조헬기로 개량한 HH-60P 탐색구조헬기를 주기종으로 사용하여 주.야간 기상조건 가리지 않는 전천후 임무를 수행합니다.

 

 

235비행대대는 주․야간 탐색구조 임무는 물론, 해상 탐색구조 및 장거리 항법 임무, 산불진화와 외부화물공수와 같은 전술공수 임무 등 전천후 임무를 수행합니다. 또한 한반도 내에서 발생한 미군 조종사의 구조도 전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항공구조대는 평시에도 혹독한 훈련과 함께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긴급 상황 시 전천후 구조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부대창설 이래 60여 년간 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의 재난과 태풍 셀마 등과 같은 재해에서 무려 5000여명에 달하는 귀중한 인명을 구조하였습니다. 이처럼 강도 높은 훈련으로 어떤 상황속에서도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그들이 있어서 너무 든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