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33년 1월 독일 수상에 취임한 아돌프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정말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는 동맹국이었던 일본과 함께 소련을 박살낸 후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한가운데에 미리 미래의 국경선을 협의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하였다면 세상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특히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여 세계를 정복한 뒤 베를린을 재건축하여 인구 1억 명의 거대 도시 게르마니아(Welthauptstadt Germania)를 만들어 세계의 수도로 삼기 위해 베를린 외곽에서 실제로 공사를 진행했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게르마니아는 파리나 런던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직 고대 바빌론과 이집트 그리고 로마에만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침공 이후 히틀러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도 함께했던 슈페어  

 

게르마니아의 건설은 히틀러가 총애하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당시 파리를 방문했던 히틀러는 슈페어에게 평생 꼭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이 파리였으며 파리를 파괴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게르마니아가 완성되면 파리보다 더 위대한 도시가 될테니 파리를 파괴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히틀러 생각처럼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우선 120m 폭의 중심도로를 7㎞에 걸쳐 놓고 약 100만 명이 운집할 수 있는 거대한 광장을 중심으로 500m 길이의 회랑이 있는 지도자궁, 개선문, 군사령부, 제국의회, 18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돔 건축물인 국민대회당(Volkshalle)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건물에 대리석과 화강암등의 고급재료를 사용하여 반영구적으로 건물을 유지시키려했습니다.

 

 

특히 290m짜리 돔 구조물 국민 대회관과 120m의 개선문이 압권이었는데 개선문은 평양 개선문(60m, 세계 최대의 개선문)의 2배이며, 판테온을 모델로 한 국민 대회관의 돔은 현재 세계 최대의 돔인 카우보이 스타디움(275m)보다도 더 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보다 17배나 큰 규모였으며 돔 상부에 있는 채광탑의 지름(46m)은 석재 돔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지름보다 약간 더 컸습니다.

 

 

히틀러와 슈페어는 건물을 최대한 웅장하게 보이게 원했으며, 수천년이 지나 건물이 파괴되더라도 웅장한 흔적이 남을 것을 신경썼습니다. 역사에서 퇴장한 후에도 당시 시대에 남은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존재를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공사 시작 이전에 개전이 닥쳤음에도 부지가 확보되었으며 토목 공사가 실행되었으며 계획이 실행되자 다른곳에서 멀쩡하게 지내던 15만 명을 베를린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로 변한 베를린

 

그러나 초중량 지구체라는 지반공사만 진행된채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전략자원부족 문제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전쟁 종전까지 베를린은 폭탄으로 쑥대밭이 되가면서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 내려갔고 그렇게 히틀러는 나폴레옹처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함으로써 세계 정복에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히틀러가 꿈꾸었던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는 이루지 못했지만 계획의 일부로 계획되어 건설이 진행되던 흔적이 지금 현재까지도 베를린에는 남아있습니다.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과 지하차도와 지하철 터널의 일부가 베를린 지하에 남아있습니다.)

 

 

참고로 이 당시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도 히틀러 못지 않은 높이 415m에 100층짜리 거대한 소비에트 궁전을 지으려했고 1937년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사는 중단되었고 공사 자재를 모스크바 앞에 대전차 방어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이 소비에트 궁전도 지어졌다면 당시 최고층 빌딩이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381m)를 제치고 세계 최고층 마천루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폭탄의 효과는 폭열, 폭압으로 나누어지는데 폭열은 폭심지에서만 위력을 발휘하고, 폭압의 경우 폭심지 바깥으로 방출되면서 2차 피해를 입힙니다. 지상 목표물을 공격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단단한 건물이나 지하에 있는 목표물을 타격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폭탄이 정확히 명중하지 못했을 경우 중요 목표물에는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터널이나 지하같은 목표물은 아무리 폭탄을 쏟아부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영국의 항공공학자 반즈 월리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두부분을 지표속에 박은 후 터뜨려서 폭탄의 충격파를 직접 땅에 전달하는 폭탄​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 공군은 윌리스 주장에 공감을 하였지만 정작 관심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윌리스가 말하는 폭탄은 중량 10톤이였고 이는 당시 폭격기 적재한계를 초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대 무게 9,000파운드에 폭약만 6,600파운드인 신형 폭탄 엎깁

 

그러던 중에 영국 공군의 루르 지역의 댐 폭격 작전에서 웰리스가 물수제비처럼 톡톡 튀어서 댐에 명중하도록 설계한 신형 폭탄 엎킵(upkeep)이 엄청난 활약을 펼치자 영국 공군은 윌리스가 이전에 말했던 중량 10톤의 대형 폭탄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폭파된 루르댐과 피해를 입은 하류의 모습

 

사실 당시 독일의 댐 폭파는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윌리스가 개발한 폭탄으로 독일의 댐은 무너졌고 독일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영국 공군의 전략 폭격 전투 역사상 가장 혁혁한 성과였습니다.

 

 

사실 이전에 영국 공군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은 무식한 대형 폭탄 1발보다 소형 폭탄 여러 발 투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영국 공군의 루즈댐 폭격 작전으로 영국 공군은 대형 폭탄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영국 공군은 다시 윌리스에게 폭탄의 설계안을  기존 10톤에서 5.4톤으로​ 줄이자는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5.4톤의 엄청난 대형 폭탄 톨보이가 개발되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대형 폭탄은 참호전과 요새, 땅굴 등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킨다는 의미로 지진폭탄이라 불렸습니다. 지진폭탄 톨보이는 길이 6.4m에 중량 5.4톤으로 정말 무식한 무기였습니다. 톨보이의 첫 실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펼쳐진 직후인 1944년 6월 8일 밤 독일군의 증원 또는 보급로로 사용될 수 있는 소뮈르(Saumur) 철도 터널 폭격이었습니다.

 

 

소뮈르 철도 터널에 정확히 명중한 톨보이 폭탄은 약18m의 암반층을 뚫고 들어가 터널을 완벽히 박살냈습니다. 이후 영국군은 그동안 진격을 막았던 것들을 모조리 파괴하기 위해 전선 각지에서 톨보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톨보이에게 주로 폭격당한 대상은 주로 나치 독일의 V2 기지와 프랑스 해안의 유보트 기지였으며, 특히 영국과 가까웠던 프랑스나 네덜란드 해안의 주요 유보트 기지들은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영국 공군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사용한 톨보이 숫자는 854개였습니다.

 

*지진폭탄 톨보이 실제 투발영상

 

톨보이로 인해 독일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영국은 톨보이를 맞아도 버티는 곳까지 모조리 파괴하기 위해 윌리스가 처음 제안했었던 중량 10톤의 대형 폭탄 그랜드슬램까지 양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랜드슬램은 길이 7.7m에 중량 10톤으로 톨보이보다 더 거대했습니다. 정상고도에서 투발할 시 추진제 없이 표적에 도달할 때 낙하 속도가 음속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마하 0.94)

 

 

첫 실전 투입은는 독일 베스트팔렌(Westfalen) 지방의 육상 철교였는데 톨보이 폭격도 견뎌냈던 철교였지만 빗맞은 그랜드 슬램 한방에 지반이 무너지면서 철교 교각이 완전히 내려앉았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지진 폭탄이었습니다. 그랜드 폭탄을 목표물 근처에만 떨어져도 충분한 지진효과를 일으켜주었기 때문에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총 41개의 그랜드 슬램을 주로 교량과 항구에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브레멘에 있는 잠수함 기지 폭격 당시에는 2개의 그랜드슬램이 4.2m 콘크리트를 관통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영국의 지진폭탄 톨보이와 그랜드 슬램은 독일군의 잠수함 격납고, 터널, 엄폐호, 교량 등 주요 시설을 타격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1994년 미국은 이런 영국의 지진폭탄을 뛰어넘는 20톤의 T-12 클라우드메이커라는 괴물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그랜드슬램을 2배)

하지만 T-12 클라우드메이커는 개발된지 얼마되지 않아 원자폭탄이 개발면서 한번도 실전에 투입되지 못하고 폐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진폭탄의 개념은 현재 벙커버스터를 통해 계승되고 있습니다.

 

작년 북한 원산에서 펼쳐진 에어쇼에서 미국 헬기가 등장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었습니다. 사실 북한은 과거부터 무기를 밀수해 개조하기로 유명하며 밀수 왕국이라고 불립니다. 중국과 구소련은 물론이고, 미국 무기까지 밀수입하면서 전세계 무기를 수입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강력한 대북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북한은 로켓 제조에 필수품인 타이타늄을 화물차 밑에 부착해 밀수입하는 등 기가 막힌 방법으로 무기들을 밀수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밀수 왕국이라고 불리는 북한이라도 도입하려다가 실패한 무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북한이 그토록 원했던 무기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J-10 전투기

 

북한은 2008년 중국에게 J-10 4세대 전투기를 판매해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J-10은 대당 가격이 4천만달러 수준으로 미국의 F-16C와 F-16D에 비해 훨씬 저렴해 당시 북한에게는 공군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중국은 난색을 보이며 대신에 수출전용 3세대 전투기 FC-1을 제시하면서 J-10 전투기 판매를 거부하면서 도입에 실패하였습니다.

 

 

JH-7 전폭기

 

JH-7은 1992년부터 실전 배치된 중국의 전천후 전투폭격기입니다. 2011년 김정일은 JH-7 전투폭격기 30대를 요청하였지만 중국 지도부는 북한 영공이 좁아 고성능 JH-7이 굳이 필요하지 않으며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한·미가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며 거부하였습니다.

 

 

T-62 전차

 

북한군이 운용하는 T-62는 소련에서 T-62를 개발하던 도중 중-소 국경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이 중국 쪽에 더 기대는 모습을 보여 소련측에서 T-62를 한창 수출하던 때에도 북한에 수출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북한은 끈질기게 소련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밀수왕국답게 중국군이 노획한 T-62의 자료를 전달받고 시리아 등에서 T-62를 입수하여 데드카피하였습니다. 그렇게 데드카피하여 탄생한 전차가 바로 북한의 주력전차인 천마호입니다.

 

 

T-80 전차


소련 최초로 가스터빈엔진을 실용화한 주력전차이자 80년대부터 북한이 소련에게 오랫동안 팔아달라고 부탁했던 3세대 전차입니다. 당시 소련도 자금 상황이 안좋았던 상황이라 북한에 수출하려고 했었지만 우리나라가 소련에 우호적으로 대하고 불곰사업을 진행하면서 북한에는 T-80을 안파는 조건으로 우리나라가 도입하였습니다. 당시 이 사실을 들은 김정일은 밤잠을 설쳤다고 합니다.

 

 

T-90 전차

 

2001년에 북한 김정일은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과 함께 전차생산공장을 둘러보면서 레이더 항법시스템, T-90 전차를 대여 또는 판매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당시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불곰사업을 진행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칼에 김정일의 부탁들 거절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김정일은 소련 때처럼 무기를 무상으로 공급해달라는 식이었으며 만약 대여나 판매도 뻔뻔하게 외상으로 해달라고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독일은 프랑스가 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하자 자연스럽게 양면전쟁에 위험성이 높아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 계획 수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군 참모총장 슐리펜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슐리펜 계획'을 고안해냅니다. 이 슐리펜 계획은 일단 전선이 프랑스, 러시아 양쪽으로 형성되는 것을 막기위해 우선 프랑스와의 전면전에 집중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프랑스를 점령하고 전력의 10% 가량을 동부로 돌려 최대한 러시아의 공세를 지연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이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한테 밀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슐리펜은 독일군 전력의 10%만으로도 러시아군을 충분히 막아낼 만하다고 착각했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까지 끌어들인다면 러시아는 절대 뚫기 힘들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전근대적인 행정체계와 부실한 철도수송망을 고려해 예비군의 동원, 편성, 훈련, 최전선까지의 수송까지 최소 2달 이상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아주 만약 러시아의 전력이 예상보다 강력하면 동프로이센과 쾨니히스베르크는 내주고 최대한 시간을 벌고 프랑스를 39일안에 밀어내고 42일까지 완벽하게 프랑스를 점령한 뒤 주력군을 빠르게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빠르게 프랑스를 점령하는게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일단 중부전선 지역을 회피하고 우익에 전력을 집중하고 대우회를 통해 파리를 북부에서 포위한다면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슐리펜 계획의 핵심은 42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프랑스를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프랑스의 자금지원으로 러시아가 철도망을 확충하면서 실제적인 시간제한은 갈수록 짧아져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당시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가 이전부터 슐리펜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슐리펜 계획을 본인 멋대로 수정하였고 계획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몰트케는 기존의 슐리펜 계획의 우익과 좌익의 병력 비율은 7:1이었는데 그것을 3:1로 변경하였고 1, 2군을 각각 18개에서 13개 군단으로 축소하였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총동원이 의외로 빠르자 동부전선에도 우익에서 5개 군단을 빼내 우익을 더 축소시켰으며 후방에 있던 6개의 예비병력을 좌익 지원 위치로 이동시키면서 슐리펜 계획에서 프랑스 포위의 핵심인 우익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축소시켰습니다.

 

 

이렇게 슐리펜 계획이 변경되면서 40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강대국 프랑스를 점령하고 바로 동부로 달려가 러시아까지 상대한다는 계획은 사실상 불가능으로 바뀌었습니다. 

 

*빌헬름 2세(좌측 첫번째)

 

그리고 당시 독일 3대 황제 빌헬름 2세가 참모총장 몰트케에게 계획 변경을 요청했지만 몰트케는 수많은 시간표로 서로 이은 계획을 그렇게 단시간 안에 못 바꾼다고 답변하며 계획을 그대로 밀어부쳤습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그 날 밤 뒤늦게 황제 빌헬름 2세가 '영국과 타협할 수 있다. 군대를 멈춰라!'라고 명령했지만 몰트케는 반쯤 넋이 나가서 '폐하, 이미 시작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네델란드에서 벨기에로 진격 중인 독일군

 

실제로 그 순간 독일군 일부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렇게 독일은 당시 중립을 지키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까지 쳐들어가면서 영국까지 독일에 개전을 선포하면서 상황은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경악한 독일 3대 황제 빌헬름 2세는 뒤늦게 몰트케를 참모총장에서 해임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 원수를 참모총장으로 교체해버렸습니다.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파리 광장에 집결한 택시들

 

결국 벨기에의 저항으로 전선이 벨기에에 묶였고,  1914년 9월 6일~9월 10일 동안 센 강 방어선에서 버티고 있던 프랑스는 파리에서 택시 부대가 끌고 오는 신병까지 받으면서 온 힘을 다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정말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밀려오던 독일군을 방어하는데 기적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단기결전을 노린 슐리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각자 측면을 치기 위해 독일과 연합군은 피로 피를 씻는 4년 간의 참호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참호전 속에서 굴렀던 아돌프 히틀러는 극도로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1939년 전격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키면서 전선을 서쪽으로 한정하고 파리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결국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프랑스 침공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난 2003년 당시 국방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핵 추진 잠수함 건조 계획을 보고했습니다. 당시 계획은 프랑스 원자력 잠수함 바라쿠다급을 모델로 한 한국형 원자력 잠수함 3척을 2020년 전에 실전배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획을 보고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흔쾌히 승인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한국형 원자력 잠수함 개발 사업은 국방부 장관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한 날짜를 따서 ‘362 사업’이라고 명명돼 비밀리에 착수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잠수함에 탑재할 원자로로 러시아 OKMB사의 원천기술로 개발된 스마트 원자로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함체는 프랑스의 바라쿠다급 원자력 잠수함을 모델로 삼았으며 선체 중간에 미사일 수직발사대(VLS) 12기를 장착하고 사정거리 500km의 한국형 잠대지 순항미사일을 탑재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362 사업은 1년 여 만에 종료됐습니다. 비밀 사업이었는데 한 언론의 보도로 외부에 노출됐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나라 국방부는 기자회견을 열어 원자력 잠수함에 대해 '독자적인 핵추진 잠수함 개발은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도 위배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3500t급 잠수함 추진을 위해서는 전기나 디젤로도 충분한데 남북한 비핵화선언을 위배하면서까지 한국이 독자적으로 핵추진 잠수함을 개발할 이유가 없다'며 한국형 원자력 잠수함 개발에 대해 부인했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2006년까지 개념 설계를 마친 뒤 2007년부터 건조에 착수해 2012년 1번함을 실전배치하고 2~3년 간격으로 2번함, 3번함을 진수해 우리 해군은 벌써 원자력 잠수함 3척을 확보했었을 것입니다. 정말 아쉬움이 많이 남은 비밀 사업이었습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현재 우리나라의 원자력 잠수함의 꿈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오늘 프랑스 바라쿠다급 원자력 잠수함 자체 개발로 가닥을 잡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2003년 당시에는 물론 디젤 잠수함도 독자적으로 설계, 제작해 본 적 없는 우리나라가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15년 지난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됩니다.

 

 

한미 원자력 협정이 개정됨에 따라 우리나라도 우라늄을 20% 미만 농축할 수 있게 됐습니다. 20% 농축 우라늄은 원자력 잠수함의 동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한계선입니다. 미국, 러시아 같은 나라의 원자력 잠수함은 농축도 90% 짜리 우라늄을 연료로 쓰지만 프랑스의 원자력 잠수함은 농축도 20% 우라늄을 사용합니다. 농축도 20% 우라늄 기반의 원자력 잠수함도 실전 능력이 입증됐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미국의 버지니아급이나 영국의 아스튜트급 또는 프랑스의 바라쿠다급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해도 좋겠다는 생각했었는데 모두 원자로 농축도 95%이상의 원자로를 운용하고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연속 수중 작전 기간이 거의 무제한인 원자력 잠수함을 우리나라가 보유한다는 것은 북한에게 치명적 위협입니다. 영해 깊은 곳에 오래 숨어 있어도 정찰위성으로 탐지하기 어렵고, 불쑥 잠대지 미사일로 공격하기 때문에 적이 대처할 시간도 없습니다. 미 해군 원자력 잠수함이 국내에 입항하면 북한과 중국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꼭 갖고 싶은 무기 체계이지만 기술과 국제 정치역학 등의 문제로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꿈이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이 반발하겠지만 주변들의 반발을 생각하기보다 우리나라는 주변국의 위협을 더 우려해야 되는 상황입니다. 다시 시작 된 대한민국 원자력 잠수함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중국 해군은 공식적으로 1949년 4월 23일 창군되었으나 독립 군종이라기보다는 육군의 부속부대에 가까웠습니다. 중국 해군은 2000년 이후 중국군 현대화가 시작되면서 변화하였으며 현재 항공모함과 차세대 주요 군함 전력을 늘리며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과거 무식해보였던 중국 해군은 이제 찾아보기 힘듭니다.

 

 

중국 해군은 발트해에서 러시아 해군과 사상 첫 연합훈련을 진행하는 등 급성장하는 해군력을 자랑하며 미국을 자극하며 큰소리를 치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국은 첫 항공모함 랴오닝에 이어 독자 기술로 제작한 새 항모를 진수시켰으며 4척이 추가로 건조중입니다. 미국 싱크탱크 신미국안보센터(CNAS)는 2030년이면 중국 해군 함정 수가 500척으로 미국(350척)을 앞지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최근 수년간 중국 해군이 전력을 급격하게 증강하는 이유 중 첫번째는 바로 대만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은 대만의 독립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중국 해군의 항공모함 전단 등장으로 인해 대만이 가장 큰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만은 이제 서쪽뿐만 아니라 대만 섬 전체를 대상으로 방어력을 구축하고 중국의 항공모함 전단에 대한 방어에 신경쓰고 있습니다. 

 

 

문제는 중국의 항공모함 전단뿐 아니라 중국군의 상륙전 능력도 엄청난 위협입니다. 중국이 만약 대만을 침공한다면 순식간에 3-4개 사단 병력이 상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을 따라 해병대 병력도 대규모로 늘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사시 중국군이 대만을 제압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미 해군의 7함대를 필두로 한 강력한 미 해군력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일대의 복잡한 영유권 분쟁도 겹쳐 있습니다. 중국은 일본, 베트남, 필리핀 등 거의 모든 방향에서 인접국가와 해양 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1974년부터 중국은 남중국해 일대에서 영유권 문제로 주변국가와 무력충돌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국 주변의 해역은 거의 모두가 폭발 직전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외 군사 전문가들은 중국 해군이 장기 계획 아래 단계적으로 작전범위 확대를 노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1단계는 일본,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보르네오로 이어지는 1도련선(島鍊線)까지를 중국 해군이 통제하는 것이 목표이며 2단계에는 오가사와라 제도, 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로 이어지는 2도련선까지 통제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3단계는 2도련선 밖까지 장거리 전진방어를 한다는 계획입니다.

 

 

 

이런 중국 해군의 전략은 미국에도 위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면 전세계 바다를 통제하겠다는 미국의 해양전략과 정면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한 곳의 바다에서라도 통제권을 잃는다면 바다를 통해 유럽, 중동, 아시아로 자유롭게 군사력을 배치, 이동, 투사하려는 미군의 군사전략에 구멍이 뚫리는 만큼 이는 미국으로서도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더구나 남중국해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미국의 동맹국들에도 거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해상교통로의 길목입니다.

 

 

하지만 중국 해군의 계획은 쉽지 않아보입니다. 중국의 항공모함 킬러 둥펑-21 초음속 탄도탄, YJ-13 초음속 대함미사일은 미 해군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미 해군은 SM-6 함대공 미사일로 탄도탄 요격에 성공하는 등 더 두터운 방패를 완성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지스함 숫자도 중국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수직발사기 90셀에 SM-2 함대공 미사일, 토마호크 미사일 시호크 대잠 헬기 등을 탑재한 알리버크급 이지스 구축함만 현재 62척이 배치하고 있으며 현재 F-35 스텔스 전투기를 탑재할 수 있는 강습상륙함을 계속 건조하고 있습니다.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서 중국의 해군력이 이미 한국과 일본, 인도를 합한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분석한 기사가 나오면서 큰 화재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해군력은 사실 일본 해상자위대 전력조차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물론 중국 해군은 백년 동안 고대했던 항공모함 꿈을 실현하였 랴오닝함은 미사일 구축함 3척, 미사일 호위함 3척, 공격용 핵잠수함 2척, 상륙함 1척과 함께 항공모함 전단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이즈모함은 만재 배수량 2만4000톤으로 길이가 248미터, 폭 38미터로 거의 준항공모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현재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F-35B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즈모함을 전투기가 이륙하기 편하게 스키점프대 모양의 활주로로 바꾸거나 고열에 견딜 수 있도록 갑판을 내열 처리하여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거나 새로운 강습상륙함을 건조하여 F-35B를 운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외에도 잠수함, 수륙 양용함, 구축함 등 중국과 일본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강력한 과학기술에다 탄탄한 산업기술을 갖추고 있으며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이용해 성능이 뛰어난 최신 무기를 계속 늘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 해군과 오랫동안 풍부한 연합 훈련 경험을 갖고 있어 작전능력도 한 수위로 평가됩니다. 이처럼 중국 해군은 아직 일본 해상자위대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우며 미 해군에 비하면 중국 해군은 아직 위협적인 전력은 아닙니다.

 

2000년대 이전까지 세계 최대 무기 수입국이었던 중국이 최근 5년 새 무기 수출 비중을 두배 이상으로 크게 늘리면서 세계 무기 수출 3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물론 1위 미국(33%), 2위 러시아(23%)와 차이가 크지만 3위(중국6%)에 올랐다는 자체가 놀랍습니다. 중국이 이렇게 무기 수출이 늘어난 이유는 바로 동남아 국가들이 중국제 무기들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무서운 점은 중국 무기 수출은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렴해서 잘 팔리는 Made in China 무기에 대해 소개드리겠습니다.

 

 

  ZDK-03 조기 경보기

 

중국은 파키스탄 공군이 요구한 스펙에 따라 조기 경보기 ZDK-03을 개발하여 파키스탄에 수출하였습니다. ZDK-03 조기경보기는 360도 전역을 커버하는 능동주사 레이더 (Active Electronically Scanned Array Radar)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조기 경보기는 첨단 정보화 기술이 집약된 군사 장비로 가격이 상당히 비싸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조기 경보기를 운영하는 국가는 몇 안됩니다. 그런데 중국이 조기 경보기를 자체 생산해 수출하는 점은 칭찬할만 합니다. 

 

 

  S20 잠수함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뛰어난 잠수함 설계 경험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은 중국의 S20형 보통 동력 잠수함 8척을 구매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태국은 중국과 총 10억달러(1조885억원)에 달하는 잠수함 수출 계약을 맺었습니다. 중국은 자국산 잠수함을 수출하기 위해 잠수함 2척을 사면 하나는 공짜(2+1) 또는 잠수함에 탑재 가능한 무기를 같이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있습니다.

 

 

  FD-2000 지대공 미사일

 

FD-2000은 중국이 개발한 중장거리 지대공 미사일 훙치-9의 수출형입니다. FD-2000은 최대 사정거리 200㎞로 고도 30㎞ 이내에서 적국 항공기와 전술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어 중국판 패트리엇(PAC3) 미사일로 불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놀랍게도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과 입찰 경쟁에서 이기고 터키에 FD-2000을 수출하였습니다. FD-2000은 무게 1.300㎏, 길이 6.51m, 최대 사정거리 200㎞, 최대 사정높이 30㎞, 최대 속도 마하 4.2를 자랑합니다.


 

  FC-1 샤오룽 전투기

 

중국이 독자 개발한 전투훈련기 샤오룽 전투기는 길이 14.5m, 높이 4.6m, 날개 길이 9.5m로 원거리 및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이용해 공중전을 할 수 있으며 공대지 미사일과 대함 미사일 및 폭탄을 장착하고 대지, 대함 공격을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샤오룽 전투기가 우리나라 T-50 고등훈련기가 자리잡고 있는 시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최근 아프리카와 동남아에서 사오룽 전투기 주문을 받았으며 전투기 생산 라인의 계약 협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중국은 제트엔진의 핵심 부품인 터빈 블레이드 제조 기술과 장비를 독일에 수출하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인류 첫 제트 전투기를 생산한 국가이자 세계 최강 제조업 국가인 독일에 제트엔진 기술을 수출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의 한 군사전문가는 중국은 1700대 이상의 군용기를 운용 중이며 제트 엔진을 자꾸 만들다 보니 기술이 좋아진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CH-3, CH-4, 윙룽 드론

 

중국은 CH-3, CH-4, 윙룽같은 군사용 드론을 미얀마와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나이지리아 등에 꾸준히 수출하고 있습니다. 윙룽은 윙룽의 경우 20시간 비행이 가능하고, 200㎏의 화물을 수송할 수 있으며 대당 100만달러로 3000만달러 정도인 리퍼에 비하면 엄청나게 저렴합니다. 이러니 성능이 미국산에 좀 못하다고 하더라도 엄격히 통제돼 사기 힘든 미국산보다 중국산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CH-3는 날개 너비 8m에 무기 탑재량이 60~80kg이며 체공시간은 12시간이며 최고 상승고도는 4km입니다. CH-4 드론은 동체 내부 폭탄창에 위성유도 폭탄 두발을 비롯해서 동체 외부 날개 밑에 두 발의 '블루 애로 7/9' 대전차 미사일를 탑재하여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합니다. 또한 동체 전방 하부에는 전방감시용 광학전자 센서 터릿이 전후 좌우 사방을 감시하는데 감시 센서는 20km 밖 사람 크기의 표적을 1080화소 크기로 식별합니다.

 


 

이 밖에도 중국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에 PLZ-45 자주포를 수출하였으며 휴대형 대공 미사일, 로켓포, 대함 미사일 등 수많은 무기들을 수출하고 있으며 많은 나라들의 중국산 무기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의 첨단 무기가 이렇게 발전한 것은 미국 내 중국계 과확자들과 러시아의 첨단 무기 공급이 가장 큰 이유였는데 이제는 미국과 러시아를 무서운 속도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1951년 휴전 협상이 진행되면서 공산군과 UN군의 대규모 공세는 멈추었습니다. 그 당시 양측 모두 상대를 궤멸시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전선을 유지한 채 휴전을 하기로 암묵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선을 유지한다고 해서 양측의 교전이 멈춘 것은 아니였으며 조금이라도 중요한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고지 전투가 지속되었습니다. 그 치열한 고지 전투 가운데 정말 후세에 영원히 전해질 전설적인 고지 전투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베티고지전투

국군 36vs 중공군 800의 신화

주요부대 제1사단 전진부대

 

베티고지전투는 중공군의 최후 공세인 7·13공세 당시 중공군 1군단 예하 1사단이 임진강 서안 고양대 부근의 국군1사단 11연대의 전초 베티고지를 공격하자 김만술 소위를 비롯한 소대 병력이 이틀간 백병전을 펼친 끝에 대대 규모의 중공군을 격파한 방어전투입니다. 서부전선의 요충지였던 베티고지는 그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 간에 이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치열했습니다.

 

 

김만술 대위(당시 계급은 소위)

 

김만술 소위의 소대가 베티고지에 투입되었을 당시에 3개의 봉우리중 중앙과 동쪽은 제 1 보병사단이 사수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서봉은 중공군에게 빼았긴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사실상 1개 소대로 그 수많은 중공군을 공격하는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으나 김만술 소위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합니다. 바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것이었습니다. 항상 공격에 급급했던 중공군은 예측하지 못한 공격에 당황하였고 김만술 소대는 8부 능선을 돌파하여 서봉을 탈환했습니다.

 

 

 

서봉을 탈환 후에 김만술 대위는 바로 소대원들에게 방어선 구축을 명령하고 19시 30분 중공군은 서봉 재탈환을 위하여 2개 중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중공군 중대는 야포와 박격포의 지원을 받았으나 김만술 소위는 상부에 포격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그마저도 포격으로 인해 통신두절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총과 수류탄으로 대항하던 김만술 대위의 소대는 중공군 2개 중대가 공격해오자 백병전을 통해 방어에 성공하였습니다. 2개 중대가 박살나자 화난 중공군은 2개 대대를 투입하였는데 대략 800명정도 되는 인원이었습니다. 김만술 소위는 소대원들에게 참호에 들어갈것을 명령하였고

상부에는 진지에 계속해서 포격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김만술 소대는 소총과 수류탄이 모자라자 철모와 야전삽 , 개머리판 손에 닥치는데로 무기가 되는것을 집어서 중공군을 사살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전투는 19시 30분에 시작되어 13시간 동안 새벽 동이 틀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4차례 막아내고 승리하였습니다. 비록 소대원 36명중 24명이 전사하였지만 중공군 피해는 전사 314명, 부상 450명, 포로 3명으로 엄청났습니다.

 

 

 

 

425고지 전투

휴전선을 35km 북상시키다.

주요부대 제7사단 칠성부대

 

화천 425고지 고지전은 정전협정을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벌어진 마지막 전투입니다. 425고지는 강원도 화천군 북방 철책선 1.2km 앞 비무장지대(DMZ)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 전력 공급원인 화천댐에 이르는 요충지였습니다. 중공군 135사단은 전략고지인 425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특유의 인해전술을 펼치는 등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국군 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장이었던 김한준 대위는 60밀리미터 박격포를 이용해 1개 중대 병력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섬멸하였으며 196명 중대원들은 굳건한 의지와 단결로 사흘간에 걸친 최후의 격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국군은 화천댐을 사수하고 휴전선을 38선으로부터 35km나 북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9사단 백마부대

  주인이 12번이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주요부대 백마고지전투

 

1952년 10월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9사단이 중공군 내 정예 부대라 불렸던 중공군 38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열흘 동안이나 이를 막아내며 고지를 사수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국군 9사단은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아 이를 물리치는 동안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국군 1포병단의 화력지원과 유엔 공군의 항공근접지원하에 끈질기게 저항하던 중공군 1만여 명을 격멸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포격으로 민둥산이 된 백마고지)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의 전투기간 동안에만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습니다. 6.25 전쟁 중 단일 최다 포탄소비 전투이며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제 법정은 중국이 주장하는 남중국해 영유권은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강력하게 반발하며 지금도 남중국해 해역의 90%를 차지하는 남해 구단선(중국이 혼자 남중국해 주변을 따라 그은 선)을 기준으로 영유권을 주장하며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공섬까지 건설하고 남중국해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을 전개하면서 지속적으로 무력시위를 펼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더 위로 북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남중국해 위에는 우리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위치한 이어도가 있습니다. 이어도는 섬이 아니라 마라도에서 서남쪽으로 149km, 해수면 아래 약 4.6m에 위치한 수중 암초입니다. 2003년 6월에 우리나라의 해양과학 기지가 건설되었으며 중국과의 현재 분쟁지역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만약 두 나라의 수역이 겹칠 경우 그 중간지점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중간선의 원칙 상 이어도 부근 해역은 당연히 우리나라 관할 지역입니다. 중국 퉁다오는 이어도와 247km 떨어져 있으며 마라도에서 이어도는 149km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과거 중국 지도에는 이어도 인근 해역이 중국 측 해역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자신들이 우리나라보다 인구가 30배나 많고 면적이 100배나 크다는 이유로 이어도는 당연히 자신들의 소유라고 말도 안되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이토록 남 중국해와 이어도에 집착하는 이유는 중국의 해상 진출로가 일본,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 막혀 있어 미국의 포위망을 뚫고 태평양과 인도양 지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남 중국해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이어도가 지닌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작년 12월 18일 중국의 H-6 전략폭격기 2대, J-11 전투기 2대, TU-154 정찰기 1대 총 5대가 이어도 인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진입해 우리군 F-15K와 KF-16 전투기 편대를 긴급 출격하자 JADIZ에도 진입해 비행하다가 선회한 다음 다시 KADIZ를 거쳐 중국 방향으로 빠져나갔던 사건이 있었으며 올해 1월 29일에도 중국 군용기 1대가 이어도 인근 KADIZ을 침범하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중국은 이전에도 이어도 인근 KADIZ를 수십 번이나 진입했습니다.

 

 

중국이 이처럼 마음껏 KADIZ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일단 강력한 공군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공군은 4세대 전투기를 포함해 400여 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 세계 공군력 열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강력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재 주적은 북한이기 때문에 전투기 대부분 북한의 감시와 견제를 주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넘보는 이어도를 확실히 지키기 위해서 우리 공군도 대비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어도 방어를 위해 우리 공군에 가장 필요한 3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공중 급유기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공중 급유기입니다. 이어도는 제주도에서 거리가 150km지만 한반도 본토에서는 270km나 떨어져 있으며 실제 요격에 나설 F-15K 전투기가 있는 대구기지에서는 520km나 떨어져 있습니다. 대구기지에서 연료를 가득 채우고 이어도까지 가면 아무리 연료를 아껴도 이어도 상공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20분에 불과합니다. 우리 공군이 170대 넘게 보유한 KF-16은 이보다도 작전가능시간이 짧습니다.  

 

 

전투기 작전 시간을 늘리는데 공중 급유기는 필수입니다. 우리 공군에는 아직 공중 급유기가 한 대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군은 20년 전부터 정부에 공중급유기 사업 예산까지 반영해 달라며 강력히 요구했었지만 4대 도입은 숫자가 적어 무의미하다는 등의 이유로 11차례나 좌절되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2015년 유럽 에어버스D&S의 공중 급유기 A330 MRTT 4대를 1조4천881억원을 투입해 2019년까지 도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A330 MRTT는 길이 58.9m, 폭 60.3m로 전세계에서 차세대 공중 급유기로는 가장 큽니다. 참고로 A330 MRTT와 경쟁했었던 KC-46A는 길이 50.5m, 폭 47.6m였습니다. A330 MRTT의 급유 능력을 전투기 대수 기준으로 살펴보면 F-15K는 21대, KF-16는 41대로 엄청납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은 우리 공군 규모에 비해 공중 급유기 숫자가 부족한 편입니다.  

 

 

중국은 공중 급유기를 10대, 일본은 4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2대를 추가로 도입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우리 공군과 비슷한 영국은 공중 급유기만 11대를 갖추고 있으며 전투기가 100대도 안되는 호주는 이미 5대를 보유하고 있지만 2대를 더 도입할 예정입니다. 심지어 싱가포르 공군도 전투기를 151대 보유하고 있지만 이미 공중 급유기 KC-135R 4대를 보유한 상황이며 우리나라가 도입하는 A330 MRTT 6대를 추가로 도입할 예정입니다.

 

 

  조기 경보통제기

 

그 다음으로 중요한게 조기 경보기입니다. 피스아이는 한반도 전역의 1000여 개 표적을 동시에 탐지할 수 있으며, 탐지 거리는 500㎞에 달합니다. 우리 공군은 E-737 피스아이를 항공통제 능력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때문에 2017년 7월부터 E-737의 세부분류명칭을 공중 조기 경보통제기에서 항공 통제기로 변경하였습니다.

 

 

우리 공군은 2011년 9월 피스아이 1호기를 도입한 이후 그해 12월과 2012년 5월에 각각 2, 3호기를 도입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4호기를 도입해 현재 4대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어도 남쪽까지 제대로 된 탐지하기에는 우리 공군이 보유한 E-737 피스아이 4대로는 북한만을 감시하기에도 버겁습니다. 

 

 

또한 그 4대도 2015년부터 4년 주기로 60일짜리 정기검사를 받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가동률이 떨어졌으며 2016년부터는 1대씩 돌아가면서 7개월간 창정비를 받고 있습니다. 4대 중 1대가 수리를 받으면서 가동률이 최대 75%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현재 E-737 피스아이 2대~4대 추가 도입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서 추가 도입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입니다.  

 

 

  전략 공군기지

 

확실한 이어도 방어를 위해서는 제주도 전략 공군기지 건설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주도에 공군기지 건설이 힘들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도 시민단체와 주민들의 반대가 매우 심했으며 2007년 정부와 제주도가 서귀포시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건설지로 확정한 이후 9년 만인 2016년이 돼서야 겨우 해군기지가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제주 2공항의 공군기지화 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자 시민 단체들은 직접 사실관계를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공군기지 건설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동차 회사들이 원가절감보다는 기술력 발전에 매진하면서 소비자들에게 호평을 받는 국산 자동차들이 정말 많이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잔고장도 심하지 않아 카센터에서 싫어했던 자동차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실 그런 자동차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년식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예전 국산 자동차들을 보면 다시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외제차 부럽지 않았던 국산 명차 TOP10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0〃GM대우 토스카 초기형

 

총 2,200억의 개발비용을 투입하여 2006년 출시되었다가 2010년 말에 단종된 GM대우의 전륜구동 중형차입니다. 토스카는 호주에서 수입차량 답지않게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상당한 판매량을 자랑했으며 현재까지 수출을 포함하여 약 43만대가 판매되었습니다. 토스카의 가장 큰 장점은 시동 엔진음을 비롯해 주행 소음 등은 웬만한 대형 승용차보다도 오히려 적었으며 강한 안전성이었습니다.  중고차 시장에서도 성능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9〃현대 그랜져 3세대 XG

 

그랜저는 쏘나타와 함께 현대 자동차를 대표하는 차종으로 1986년에 처음 출시되어 32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이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중 1998년 10월 1일에 출시된 그랜져 XG는 고급스러우면서 스포티한 느낌도 함께 살리는 디자인으로 단종되기까지 약 7년간 30만 대가 판매되었습니다. 특히 디자인은 고려청자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곡선과 직선이 잘 조화된 차체에 당시 국내에서 스포츠카 외에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프레임리스 도어가 정말 이뻐보였던 모델이였습니다.

 

 

8〃기아 프라이드 1세대

 

프라이드는 1987년부터 2017년까지 생산했던 기아자동차의 대표적인 소형차 모델입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잔고장이 없는 차량으로 정말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단종 시점에 조사한 잔존 비율에서 국내 차종 중 1위였습니다. 소형차 치고는 출력도 좋아서 중형차들이 당시 악명이 높았던 대관령을 에어컨 끄고 창문 열고 넘을때 프라이드는 에어컨 켜고 넘었다는 전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프라이드의 좋은 이미지를 많은 분들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7〃기아 쏘렌토 1세대

 

싼타페와 함께 현재도 대한민국의 국민 SUV 쏘렌토입니다. 커먼레일에 터보조합이라 밟는대로 나가는 마초같은 성능을 자랑했습니다. 작정하고 밟으면 제로백 7초까지 돌파하는 말도 안되는 가속력을 보여준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디자인도 생각보다 괜찮아서 기아자동차의 북미, 유럽시장 판매량 신장에 크게 일조했습니다. 그리고 초창기 쏘렌토는 당시 획기적으로 프리옵션제를 시행하기도 했으며 덕분에 수동변속기 풀옵션도 가능했습니다. 

 

 

6〃현대 클릭

 

현대에서 막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20대 초중반을 타겟으로 개발한 전륜구동 소형 해치백 차량입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좋은 인기를 얻은 모델로 특히 유럽 지역에서의 단단한 주행 성능과 괜찮은 연비와 출력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03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소형 승용차 부문에서 올해의 차 상, 스코틀랜드의 소형차 부문 올해의 차 상, 덴마크 베스트셀러 상과 2005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같은 상을 한번 더 수상하는 등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5〃현대 갤로퍼

 

현대정공(현대모비스)과 현대자동차에서 1991년 10월부터 2004년 1월까지 생산했던 프레임 타입 4WD SUV입니다. 출시 당해인 1991년에 약 3개월 동안만 무려 3000대 가까이 판매를 기록하며 쌍용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만 생산하던 4WD 시장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고, 그 이듬해인 1992년에는 총 2만 4천대가 판매되면서 국내 4WD 시장의 52%를 차지하며 4WD 시장을 장악하였습니다.  당시 4WD 차량과 대형 상용차만 제작하던 쌍용자동차는 한 때 회사가 갤로퍼로 인해 존폐 위기까지 처하기도 했습니다.

 

 

4〃현대 쏘나타2

 

쏘나타는 2018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나오고 있는 가장 오래 된 자동차 모델입니다. 그 중 1993년 5월 14일에 디자인과 성능사양으로 출시된 쏘나타2는 곡선을 대거 도입한 익스테리어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에어백, 전동 조절식 미러, ECS 시스템 등 당시 첨단 편의사양들도 대거 탑재되면서 3년간 60만대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특히 디자인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아서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역대 쏘나타 시리즈 중 최고의 디자인으로 쏘나타2가 최고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기아 스포티지 1세대

 

 1993년에 출시되어 세계 최초의 도심형 SUV라고 불렸던 기아자동차의 준중형 SUV입니다. 25년째 생산하고 있으며 국산 SUV 중 최장수모델입니다. 차체의 무게가 가볍고 엔진의 힘이 좋은 것이 특징입니다. 당시 출시된 SUV차량들의 크기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갔는데 스포티지는 무게가 가볍고 엔진의 힘도 좋아 가속감이나 주행감이 경쾌한 편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약 9만대, 해외에서 약 45만대가 팔리면서 해외수출 물량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2002년 실질적인 후속 모델인 쏘렌토가 나오기 전까지 꾸준히 판매되었습니다.

 

 

2〃현대 아반떼 2세대

 

아반떼는 현대자동차의 생산 차량 중 최초로 2014년 10월 통산 판매량 1천만대를 넘어선 대한민국 대표적인 준중형 세단입니다. 그 중 1995년 3월 16일에 출시 된 아반떼 1세대는 보통 구아방이라고 불리며 국산화율 99.9%로 현대 엑센트에 이어 두 번째 완전 국산화 모델입니다. 역대 아반떼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현대자동차 최고의 역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출시하자마자 첫 날부터 3,669대를 팔아 돌풍을 일으켰고, 계약대수도 11,600대로 신차 출시 처음으로 1만대를 넘길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등장 초기에는 눈망울 모양의 브레이크 등이 상당한 이뻐보였습니다.

 

 

1〃르노삼성 SM520

 

1998년 3월 28일 삼성그룹의 자동차 사업 진출과 함께 선보인 중형 세단입니다.  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고 정부가 주도한 대기업간의 빅딜 실패로 단종이 거론되며 생산이 잠시 중단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엔진 무상보증 기간을 당시 업계 최장인 5년 10만km로 늘리는 자신감을 내보였고 실제로 엄청난 엔진 내구성을 인정받으며 순식간에 중형차 시장 점유율 국내 2위로 뛰어오르기도 했습니다. 당시 자동차 마니아로 유명한 이건희 회장에 덕분에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 등한시 되어 왔던 부품의 품질에 각별히 공을 들인 것으로 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