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지금 현재 하늘은 현존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라 불리는 스텔스 전투기들의 경쟁으로 치열합니다. 하지만 이런 스텔스 전투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몇 안됩니다. 그중에 중국은 불법카피로 짝퉁 무기들만 생산하다가 군사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였고 현재는 스텔스 전투기까지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 최초의 제트 전투기 생산국이자 최고의 항공기 부품 기술력을 자랑하는 독일에 제트엔진에서 핵심적인 최신 장비와 기술을 수출까지 하게되면서 중국의 첨단 기술력이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이 자랑하는 전투기 F-22 랩터에 이은 세계에서 두 번째 스텔스 전투기인 젠-20은 2011년 1월 첫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F-22, F-35 를 뒤이어 미국 외의 국가 중에선 첫번째 양산배치되는 스텔스 전투기이기도 합니다. 젠-20은 공중급유를 통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며 장거리 순항미사일 발사 기능도 갖추고 있습니다. 젠-20 전투기의 가장 큰 장점은 가격인데 약 1768억 원로 추정되는 미국 F-22가격에 절반도 안되는 354억∼589억 원선으로 추정됩니다.

 

 

 

미국 전문가들은 2020년이나 되어야 중국제 5세대 전투기가 나오리라고 예상했다가 10년 먼저 나오자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젠-20은 공개 비행이 이후 미국의 스텔스기 F-35의 기술과 디자인을 베꼈다는 의혹을 받으며 역시 중국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중국은 젠-20 전투기는 아시아 방공망 대부분을 무력화할 수 있는 첨단 전력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자좀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젠-20 스텔스 전투기가 작년 중국의 후베이성 한 시골 마을에 등장하면서 중국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외형은 아무리 봐도 중국 스텔스 전투기 젠-20이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진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UFO를 발견한 것보다 더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젠-20 전투기는 동네 주민인 구춘린씨와 친구 2명이 제작한 전투기 모형이었습니다. 일본의 산게이 신문은 저런 낡은 공장에서 어떻게 스텔스 전투기를 제작했다는게 놀랍다는 내용으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형 스텔스 전투기는 20m 밖에서는 실제 젠-20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하였으며 젠-20과 크기도 똑같았습니다.

 

 

구춘린씨는 어릴적부터 전투기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으며 커서 전투기 비행사가 되어 자신의 전투기를 갖는게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늦게나마 전투기 모형 제작을 통해 이루고 싶어서 시작하였지만 많은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친구 2명과 처음 전투기 전투기 형태를 정밀하게 제작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좌절도 많이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꿈만 생각하고 모형 전투기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고 젠-20의 옆 날개 유입구와 꼬리 부분의 벡터 노즐 및 외부 도장까지 전투기 모형을 그대로 재현하였고 결국 완성도 높은 모형 스텔스 전투기가 탄생하였습니다. 구춘린씨는 그래도 한때 광고 디자인 일을 하면서 배운 기술이 모형을 제작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함께한 친구 두명은 용접 일을 해왔기 때문에 정밀한 모형 제작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전투기 모형이지만 주요 구조는 강철로 제작하였으며 5톤 이상의 강철이 들어갔으며 주요 골격을 세우고 도장까지 14개월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전투기 모형을 제작하는데 우리나라 돈으로 약 3500만원이 들었지만 그들은 꿈을 이뤄 너무 기쁘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중국에는 구춘린씨와 같이 모형 전차를 만들거나 정말 비행이 가능한 헬기를 직접 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북한, 이라크 경우를 살펴보아도 핵 개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경비와 세월도 문제지만 국제적인 압력이 심합니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대 핵 강국들은 1968년 7월 핵확산방지조약(NPT)을 만들고는 다른 나라가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규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어떻게 핵을 보유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1947년 영국에서 독립한 인도는 1950년대만 해도 핵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으며 간디는 인간이 핵폭탄으로 멸망하지 않는 길은 모든 나라가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인도는 절대로 핵을 개발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었습니다. 또한 1954년 미국이 태평양 마셜 군도에서 대기중 핵실험을 했을 때 세계 여론을 동원해 미국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과 인도 네루 총리

 

그러나 누구보다 간디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인도 초대 총리 네루는 국방력이 강력해야한다고 생각하였고 인도가 독립하기 이전부터 영재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내면서 원자력 전문가를 양성하였으며 인도 여러 대학에 원자력학과까지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 초반에 원자력위원회를 만들고 대규모 핵 연구 단지를 조성하였으며 결국 1956년 비밀리에 첫 원자로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62년 국경분쟁에서 중국이 인도를 제압하면서 1964년 중국은 핵실험을 성공시켰으며 1965년이 되자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도의 안보 불안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러자 결국 1974년 인도는 라자스탄 사막에서 첫 핵실험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핵실험을 실시한 인도는 다른 핵 보유국처럼 새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폭파 실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핵 독주가 깨졌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이 실험으로 실질적인 핵 보유국이 된 인도는 이후에도 미사일 같은 핵탄두 운반 수단을 속속 개발했습니다. 물론 막대한 경비는 인도에게 큰 부담이었지만 인도는 멈추지 않고 핵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도는 핵활동을 자제했으나 파키스탄이 핵무장을 추진하면서 1998년 다시 핵실험을 실시하였고 2006년 인도는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1950년대에 파키스탄은 미국의 공산권 봉쇄정책에 매우 중요한 동맹국이었고 때문에 안보를 미국과의 동맹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그런데 1965년 카슈미르에서 인도와 싸워 패배하였고 미국과의 동맹이 약화되자 비밀리에 핵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 파키스탄은 이렇다 할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큰 성과가 없었으며 1972년 파키스탄은 또다시 인도와 싸워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1973년 인도 대통령 부토는 과학자 회의를 소집하였고 압둘라 칸디르 칸 박사를 주도로 파키스탄은 핵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습니다. 칸 박사는 원자력 관련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했었는데 그곳에서 우라늄 농축 기술을 훔쳐 파키스탄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칸 박사는 파키스탄 대통령의 후원을 받아 독일과 영국에서 우라늄 농축 기술과 장비를 수입하고 중국에서 원폭 설계를 들여오는 등 핵 개발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1976년 8월 미국은 파키스탄에게 프랑스에서 핵재처리 시설을 들여오려는 계획을 취소하지 않으면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면서 파키스탄은 핵 개발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을 맞았지만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하는 기지를 인접국인 파키스탄에 세우면서 파키스탄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 되었고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묵인했습니다. 결국 1985년 10월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수준으로 우라늄을 농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CIA는 이런 사실을 미 정부에 보고했지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6년 10월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원조를 계속하라고 승인했습니다.

 

 

그렇게 현재 인도와 파키스탄은 100개가 넘는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나라는 오랫동안 핵 경쟁과 분쟁 속에서 가장 위험한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이념을 가지고 대립한 냉전 시절과는 다르게 이 두나라는 종교적인 적대감을 갖고 있으며 3천2백㎞에 걸쳐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팽팽한 긴장감이 흐리고 있습니다.

 

전차가 점령한 목표지점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병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장갑차가 등장했으며 오늘날 지상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기체계로 자리잡았습니다. 우리 육군의 경우 과거 미국의 M-113 장갑차와 차륜형 장갑차 KM-900을 운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후 군전력증강사업인 율곡 사업을 통해 1984년 최초의 국산 장갑차인 K-200을 개발해 육군에 배치하였습니다.

 

*1984년 최초의 국산 장갑차 K-200

 

K-200 장갑차는 당시 전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보병전투차량으로 설계되었으며 다양한 계열 차량이 생산되었습니다. 현재 2,000여 대 이상이 생산되어 육군과 해병대 그리고 공군에서 운용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형 보병전투장갑차를 모토로 내세웠던 K-200 장갑차는 다른 나라의 보병전투차량과 비교했을 때 화력과 방호력에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오히려 보병을 전장에 실어나르는 병력수송장갑차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2007년 국방과학연구소(ADD) 안흥시험장 K-21 개발완료 보고회

 

우리 군은 1999년 K-200 장갑차의 제한된 성능으로는 미래 전장에서 제대로 된 전투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차기보병전투장갑차(Next Infantry Fighting Vehicle)를 개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개발 비용은 1999년부터 2007년 개발 완료 때까지 총 910억이 투입되었고 2005년 초에 시제차량이 제작되면서 K-21이라는 제식명칭이 부여되었습니다.  

 

*40mm 주포사격

 

기존의 K-200 장갑차 방어력도 약하고 무장도 12.7mm 기관총이 최고무장일 정도로 전투보다는 보병의 수송이 주목적이었습니다. K-21 장갑차는 이전 K-200 장갑차에 비해 기동성과 화력, 방호력이 대폭 향상되었습니다. 특히 화력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한 함포 노봉의 개량형 40mm 기관포를 주포로 사용을 하며 망각(Fire & Forget) 방식의 탑어택 대전차미사일을 2발까지 탑재하고 있어 적 장갑차와 전차는 물론이고, 복합기능탄을 사용하면 적의 헬기까지 격추시킬 수 있습니다. 장갑이 얇은 2세대 전차정도는 정면에서도 상대가 가능합니다.

 

 

이처럼 전 세계에 실전 배치된 장갑차들과 비교해보면 K-21 장갑차의 공격력은 최정상급입니다. 하지만 방어력은 비슷한 중량의 장갑차 중에서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장갑차의 화력이 전반적으로 약한 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면은 10미터 상공에서의 152밀리 공중폭발탄의 파편에 견딜 수 있으며 하부는 대인지뢰에 대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장점은 강과 하천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을 고려하여 수상부양장치를 장착, 급속도하작전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리고 최대 시속 70km를 자랑합니다. K-21은 유사시 북한군이 방어진영을 갖추기 전에 임진강, 예성강, 대동강, 청천강 등 4개의 강을 신속하게 도하하고 중공군의 개입까지 막을 수도 있습니다.

 

 

전투중량이 25톤인 K-21 장갑차는 차체 설계가 거대해진 덕분에 승무원 3명과 기계화보병 9명이 탑승할 수 있으며 이런 보병 수송 능력은 전 세계 장갑차 중 최고 수준입니다. 거기에 승하차도 편리해서 한번에 한명씩 오리걸음으로 걸어 나와야 하는 다른 나라 장갑차와 다르게 고개만 살짝 숙이면 한번에 2명씩 빠르게 승하차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K-21 장갑차는 주야간 정밀조준장치, 위협자동탐지적외선 센서, 피아탐지장치 등을 장착하여 적을 먼저 보고 먼저 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네트워크 중심전으로 변화하고 있는 전장의 현실을 반영하여 정보체계와 지휘통신체계가 연동된 전장 관리 체계(BMS: Battle Management System)를 장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