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냉전이 시작하고 소련은

 

미국과 군비경쟁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두 나라는 서로 멀리 떨어져있었죠.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해군양성이 중요했어요.


 

 

미국은 많은 자본을 동원하여 해군을 구성하였습니다.

 

 매년 14척 이상의 항공모함전단을 유지했어요. 


소련군은 항공모함으로 맞대응

 

하고싶었지만 능력이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대칭전력에 주목합니다.

 

 

 

원자력잠수함은 획기적인 병기였습니다.

 

생산비용이 많이들지도않으면서

 

은밀했고, 펀치력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군은 원잠전력구축에 힘을 쏟게됩니다.

 

 

 

 

소련은 원자력잠수함을 세 종류로나누었어요.

 

 미 본토에 핵공격을 가하기위한 전략원잠(SSBN)

 

항공모함을 타격하기위한 순항미사일원잠(SSGN)


마지막으로 적 전략원잠을 사냥할 공격원잠(SSN)

 

소련 원잠전력은 85년에 그 절정을 찍었습니다. 

 



SSBN(전략원잠)전력


 

 

 

 

1.아쿨라급(나토코드 타이푼급) 3척


만재 48,000톤의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이지만,

 

 라이벌함인 미국의 오하이오급보다

 

 전략미사일 탑재량이 적습니다.


그 이유는 탑재미사일인 R-39의 소형화 실패때문이에요.

 

현재 타이푼급은 한 척만 불라바미사일

 

테스트를 위해 운용 중입니다.


 

 

 

 

2.칼마르급(나토코드 델타3급) 14척


등짝에 낙타처럼 미사일 발사대가 튀어나온 SSBN이다.

 

델타3급은 현재도 운용 중인데

 

모조리 태평양함대에 몰려있어요.


신형 SSBN 보레이급으로 대체될 예정입니다.


 

 

 

 

3.무레나M급(나토코드 델타2급) 4척


델타3급의 이전버전이에요

 

 


 

 

 

 

 

4.무레나급(나토코드 델타1급) 18척


델타급 시리즈의 원형이구요

 

델타2급보다 미사일 탑재량이 적어요.


 

 

 

 

 

5.나바M급(나토코드 양키2급) 1척


최초로 선체내에 미사일이

 

적재된 잠수함이에요

 

 

 

6.나바급(나토코드 양키 1급) 21척


양키급 시리즈의 원형이구요

 

양키2급과는 달리 액체연료 미사일을

 

 탑재해서 발사준비시간이 길어요.

 

 

 

 

 

 

7.프로젝트 658(나토코드 호텔2급) 8척


소련 최초의 원자력추진 잠수함인 노벰버급을 베이스로 만들어졌고, 수중미사일발사가 가능한 첫 소련 SSBN.

 

 

 

 

 

 

SSGN(순항미사일원잠)전력


 


 

 

 

 

 

 

 

 

1.그라닛급(나토코드 오스카1급) 2척


그라니트이라는 전봇대만한 미사일을 초음속으로

 

빵빵쏘는 괴물 잠수함이에요

 

미 항모 최대의 위협 중 하나에요.

 

 유명한 쿠르스크 잠수함이


이 잠수함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오스카2급입니다.

 

 


 

 

 

2.그로샤급(나토코드 양키 노치급) 14척


양키1급 SSBN을 SSGN으로 개량한 것입니다.


 

 

 

 

 

 

 

3.스캇M급(나토코드 찰리2급) 4척


대량생산하기 좋은 염가형 SSGN을 원한

 

소련군의 요구에 맞춰 개발된 잠수함이에요.


 

 

 

 

 

 

4.스캇급(나토코드 찰리1급) 18척


찰리2급의 이전버전.


 

 

 

 

 

 

 

 

5.안차르급(나토코드 파파급) 1척


44.7노트라는 엄청난 속도와 티타늄을 이용한 선체로

 

 깊은 잠항심도를 자랑했으나,

 

안정성 부재와 높은 가격으로 한 척만 배치된 잠수함이에요

 

 

 

 

 

 

 

6.프로젝트 675(나토코드 에코2급) 21척


최악의 신뢰성으로 유명한 잠수함으로

 

원자로에서 불이 자주났습니다.



 

 

 

 

 

7.프로젝트 659(나토코드 에코1급) 8척


에코2급의 전버전으로

 

대함순항미사일이아닌

 

대지순항미사일을 쏩니다.




SSN(공격원잠)전력


 

 

 

 

1.바라쿠다급(나토코드 시에라급) 1척


선체의 일부를 티타늄을 이용하여

 

 700m의 잠항심도를 뛰어난 잠수함이에요

 

 현재는 시에라2급이 현역으로 활동 중입니다.


 

 

 

 

 

 

2.플라브닉급(나토코드 마이크급) 1척


잠항심도 1,300m를 기록한 잠수함입니다

 

하지만 안정성이 떨어져 결국 침몰하고 말아요.



 

 

 

 

 

 

 

3.리라급(나토코드 알파급) 6척


45노트의 속력에, 잠항심도 1,200m의 바닷속 스포츠카에요

 

소련의 변태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잠수함입니다

 

 액체금속원자로를 탑재했는데,


신뢰성이 극악이라 몇 대

 

 생산못하고 금방퇴역했습니다.


 

 

 

 

 

 

 

 

 

 

4.슈카급(나토코드 빅터급) 48척


평범한 SSN.

 

한미연합훈련 당시 미국 키티호크급에

 

충돌한 적이있어요

 

현재 개량형인 빅터3급이 활동 중입니다

 

 

 

 

 

5.킷급(나토코드 노벰버급) 12척.


소련최초의 원자력잠수함이에요


 

 


 

 

 

 

 

6.나바가급(나토코드 양키1급) 3척


SSN으로 개조된 양키급.




이렇게 총 208척의 원잠전력을 보유했던 소련은

 

 미국에게 극심한 위협을주었으나,

 

 결국 경제위기로 점점 감축하어

 

현재는 36척만이 활동하고있다.


비록 숫자는 많이 줄었지만,

 

 

 야센급, 보레이급과 같은 최신함이

 

도입 중이고, 타국에 비하면 여전히

 

 많아서 무서운 전력이다.


 

 

 

춣처 및 참고자료 : 위키백과.구글 .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russia/ship-soviet-2.htm

 

1차대전기에 미국이 참가를 하게 되면서

 

 유럽전선의 참호전을 겪게됐어요.


참호전이란 구덩이를 파고 엄폐해

 

서로 며칠 길게는 몇달을 교착상태에

 

 머물러 싸우는 전투인데


각국의 참호는 일반 보병으로 뚫기에는

 

 너무 견고해서 포병의 지원을 받으면

 

보병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죠.


여기서 참호를 최대한 피해없이 신속하게 끝내기위해서

 

 각 국가는 머리를 싸맨체 고민을 하게되는데


그 중 영국에서 제일 첫번째로 총포탄과 파편을 막고

 

 포로 무장한 Mk.1 을 실전배치하게 됩니다.

 

최초의 전차라 생각했던 모습과는 다르죠


생각했던 것 보다는 그렇게 많은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여기서 대충 '탱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느정도 확립을 하게되어서

 

전차의 조상이라 불릴 수 있어요.

 

<존 조지프 퍼싱 장군>


1차대전에서 미군의 장군이었던 존 조지프 퍼싱 장군은

 

 1차대전의 참호전이나 이 전차를 보면서 미군도 말을 중심으로한

 

 

기마부대에서 화력과 장갑을 갖춘

 

 기갑부대로의 전환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미국은 처음에는 기갑부대에는 소극적이었지만

 

퍼싱의 적극적인 어필로 1차대전 말,

 

기갑부대를 창설하게됐습니다


미군의 첫 기갑부대는 크게 경전차와

 

 중전차로 구성됐는데


경전차로서는


 

르노 FT-17라는 프랑스의 경전차가 담당했어요


포탑이 돌아가고 이전 전차보다 확연히 우월한 속력은

 

 이 전차를 세계에서 손꼽히는 그때의 명전차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게 만들었어요


여러 국가에서 이 전차를 사들였고

 

미국도 그 고객중 하나였습니다.



중전차로서는


 

 

최초의 전차, 영국의 Mk.1과 같은 시리즈인

 

 영미합작 Mk.8 전차가 담당했어요.


이전차를 끝으로 이러한 형태를 한

 

전차는 찾아볼 수 없어요



최초의 기갑부대의 모습은 이러했는데


여기서 미군 기갑부대는 중전차 Mk.8 위주가 아닌

 

경전차 FT-17의 위주로 부대를 꾸리게되지만


1차대전이 끝나고 더이상 전차부대를

 

운용할 이유도 여유도 없어서 전차부대를

 

해체하기에 이르게됩니다.


2차대전이 시작하기전까지 전차부대라고

 

 부를만한 부대가 없었지만 그 공백기간동안 FT-17 경전차를

 

개량한 새로운 전차를 연구하고 만들어내는데


 

 

 

 

바로 그 결과물이 이 T1 경전차라는 탱크에요


1927년에 처음 만들어졌어요


이 전차는 미국이 만들어낸 첫 탱크라는 것에만

 

 의의를 둘뿐 실전배치가 되어

 

전장에 나서진 못했습니다


뒤를 이어 이 전차를 개량한


 

 

M2 경전차가 만들어져요


잠시 이전차가 만들어질 즘에 유럽에선

 

 어떤 전차가 만들어졌는지 한번 보고갈게요

<독일 3호전차>


 

 

 

<소련 BT-5/7>

 

 

<프랑스 B-1>



보다싶이 유럽의 전차에 비해선

 

한없이 약하고도 약한 전차였어요


미국은 2차대전이 발발하고 진주만 공습 이후 유럽전선으로

 

 뛰어들때 이 전차를 내보내진 않고 이 전차와 그나마

 

 수준이 비슷했던 일본 전차를 상대하기 위해

 

태평양 전선으로 보내졌어요

<개전당시 일본육군의 주력전차였던 89식 전차>


태평양 전선에서 M2 경전차 역시 일본군 전차를 상대로

 

 우위에 있진 못했기에 M2 경전차는 M2 경전차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M3 스튜어트 경전차

 

그 자리를 매꾸기 시작했어


 

 

태평양 전선에서의 M3 스튜어트 경전차

 

 신이났어요


일본 전차들은 2차대전 시작부터 말까지

 

 아까 사진에서 보여줬던 수준의 전차를 운용했으니까


일본을 제압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어요



그럼 유럽전선에는 뭘 보냈을까요


M2 경전차를 보내자니 확실히 밀리고


M3 스튜어트 경전차도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유럽의 전차에 비해선

 

 얇고 주포도 약했는데


이에 미국은 자신들의 기술로 일단 화력에서

 

 안밀리는 전차나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전차를 만들었어요.


 

<M3 리 전차>


유럽 전선에 적절한 급한데로 만든 전차라

 

여러 문제점이 있었지만 나온 이후

 

일단 유럽의 전차를 상대하는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고해요.


그래서인지 다음 후속 전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거의 8000대가 넘는 수량의 M3 리전차가 만들어져요


차체에 붙어있는 75mm 포가 이 전차가 급조전차라는

 

 타이틀에 비해 썩 괜찮은 실전 경험을 갖게 해 줬는데


시간이 흘러 전투가 격화되자

 

M3 리 전차는 도태되어 갔어요


그때즘 미군은 새로운 후속 전차를 내세우는데..

 

 

 

<M4 셔먼 전차>


유럽 전선에서 미군의 주력전차란

 

타이틀로 전장을 누비고


태평양 전선에선

 

일본전차들을 학살했던 전차에요

워낙 유명한 전차라 알고있는

 

남자분들도 많을거라 생각되요


나온 직후인 1941년 유럽전선의 주적이었던

 

독일 전차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 쉬웠고

 

 그시대 셔먼과 더불어 우수한 주력전차로

 

 평가되는 소련의 T-34와도 꿀릴게 없는 전차였어요


독일의 전차들을 상대로 열심히 싸워주던 셔먼을

 

전적으로 믿은체 미군은 그 이후로 별다른 신형전차 연구에

 

 발벗고 나서진않게되었어요


그치만 독일에서는 셔먼이 배치될무렵

 

 

<독일 중형전차의 끝판왕 판터나>

 

 


2차대전을 대표하는 독일의 중전차 티거전차를 연구,

 

 배치하고 있었어요


1942년 티거전차가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1943년 판터전차가 모습을 드러낼 즘에도

 

미군은 여전히 셔먼전차만 내보내서 숫적 우위에만 신경을 쓸 뿐


질적 우위에는 신경을 쓰지않아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에 서면전차들은

 

실전배치된 판터와 티거전차에게 터져나갔어요


그 이후에도 꾸준히 판터와 티거의 승무원에게

 

 좋은 경험을 줬죠.


만약 티거,판터 등이 나올즘에 미군도 연달아 새 전차를

 

 내보냈으면 지금의 판터와 티거의 명성을

 

 이어주게 할 수 없었을거에요.

 

<티거에 격파당해 궤도가

 끊어진 셔먼전차>


이에반해 소련은 티거, 판터에 대항할

 

새 전차인 IS전차를 만들어 싸우고있었어요

 

 

85mm 주포를 장착한 IS-1


1943년 배치

 

122mm 주포를 장착한 IS-2


1944년 배치



인해전술등을 비롯해 인명경시사상으로

 

유명한 소련에서도 새로운 전차로 대항한 반면에


미군이 서면의 수적 우위에만

 

집착한것이 조금 아이러니하긴해요.


그치만 미군도 아에 바보는 아니었던터라

 

새 전차 연구개발을 하긴 했었어요

 

57톤이나 되는 이 중전차는

 

 M6이라고 불리는데


성능만 본다면 웬만한 독일 전차나

 

연합국인 영국이나 소련전차에

 

비해 밀릴것이 없었어요


특히 90mm포나 105mm주포를 달 경우에는

 

티거,판터와도 밀릴게 없었다고 평가되지만..


1942년 양산준비를 끝마칠 즘에는

 

 이미 설계 자체가 구식이 되버려 양산하기 조금 애매했으며

 

이 무거운 전차를 보내느니 차라리 더 가벼운 서면을

 

더 많이 보내자는 미군의 생각 때문에

 

유럽전선으로 보내지진 못했어요.


또 다른 전차도 개발중이었는데

 

T26이라는 전차 또한 개발했었어요


1943년부터 연구개발이 잘 진행되고 있었고

 

 실전배치만 남은 상태에서


미군은 이 전차를 생산하느니 차라리 더많은 셔먼을

 

 생산하겠다고 못을 박은체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미군이 보유한 서면의 30%가 넘도록

 

갈려나갈때까지 서면을 맹신했어


 

 

 

더이상 전선에서 서면으론 버틸수가 없다는 말이 들리자

 

그제서야 T26에게 M26이라는 제식명칭을 부여하고

 

 1944년 말에 유럽전선으로 보내지지만


그땐 이미 전세가 확실히 연합국쪽으로 기운 뒤였어요


애꿎은 미군 전차병들만 필요없는

 

 희생을 했던거죠ㅠㅠ

 

<M26퍼싱>

유럽전선에서 퍼싱은 310대였다고해요

 

그중에서 격파된 퍼싱은 1대,

 

반파되어 무력화된 퍼싱이 2대


그만큼 2차대전 유럽에서의 전차중

 

퍼싱은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굉장한 전차였어요

 

애초에 너무 늦게 배치되서 독일 기갑부대랑

 

마주칠 일 자체가 없었긴 했지만


진작에 퍼싱을 보냈다면 2차대전 미군 전차병들의

 

 희생은 덜했지않을까 싶은생각이 들어요.

 

 

1945년 9월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전승 퍼레이드에서

 

소련은 새로운 전차를 선보이는데

 

IS-3 라는 IS 전차시리즈의

 

새로운 전차를 선보여요.


쐐기장갑을 채용해서 정면장갑은

 

적 포탄에 피격당할시 그대로

 

탄을 튕겨버릴 가능성을 높였고


주포는 2차대전에서 티거와 판터와 맞설만큼

 

강력했던 122mm 주포를 장비했어요


당장에 2차대전이 끝나고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이 맞서는 냉전이 드리우는데

 

이 전차의 잠재력은 자유진영이 알 수가 없었고


이는 전후 새로운 무기경쟁에 다다르게돼요


전차도 빠질 수 없었고 미군은 IS-3에

 

대항할 새로운 전차들을 개발연구하는데

 

 힘쓰게되는 발판이 됐어요

 

 

 

T34.T29.T30은 2차대전시 개발하던

 

미군 중전차들이에요


셋이 서로 비슷하게생겼어요.


T29는 105mm 주포를 장착한 미군 중전차 계획이고

 

 T34는 120mm 주포, T30은 155mm주포를 장착한

 

 미군 중전차 계획이였어요


대전에는 참가하지 못한 전차들이지만

 

기술 보존을 위해 대전후까지 있었고


미군은 그중 120mm 주포를 장착한

 

 T34에 관심을 가져요


T34의 기술을 쪼끔 참고해서

 

 IS-3에 대항할 중전차를 만드게되는데 이것이

M103 중전차에요!


개발 속도가 빠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6.25전쟁 발발이후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1951년 첫 시제품이 나왔고 1953년

 

300대가 공장에서 나왔지만


이 전차가 그렇게 맘에 들진 않았는지

 

 한국땅을 밟게되진 못했어요


이후 여러 개선을 거쳐 M103 이란 이름을

 

정식으로 받고 미군의 첫 제식 중전차가 탄생돼요


(퍼싱은 중형전차로 분류)


 소련에서는 M103과 비교해 장갑은

 

 별로 안밀리는 MBT, 주력전차 T-54가 등장해요


 

 

나올 당시에 스펙만 보면

 

최고의 중형전차였어요


반구형 포탑이라

 

포탑의 방호력은 아주좋았고


차체도 100mm 경사장갑이라

 

물렁한것도 아니었어요


또한 이때쯤에는 세계에서 중전차는 점점

 

 도태되가고 공수주 모두 탁월한 '주력전차'라는

 

 개념으로 전차를 통일해가고 있었어요


이쯤되면 중형전차, 중전차, 구축전차로

 

나뉘는게 무의미해지기 시작하죠


그런 이유로 M103은 300대정도를 끝으로

 

 생산이 되지않아요

 

처음이자 마지막 중전차가 되버린거죠



여담으로 T-54/55는 12만대가 만들어졌어 요

 

여태 만들어진 전차중

 

가장 많이 만들어진 전차에요


MBT, 주력전차 개념이 확립되어 갈 동안

 

 미국은 퍼싱을 토대로한 새로운 중형전차

 

계획을 세우는데..



퍼싱전차가 적지만 나름 겪은 실전 경험에서

 

 독일중전차에게 큰 타격을 입혀서 좋은 전차로

 

 평가되나 싶었지만


2차대전 이후 퍼싱에게도

 

문제점이 있다는걸 알았어요


특히 엔진의 출력이 전차를 버티기엔

 

문제가 있었고 그에따라 기동성이나

 

신뢰성에 문제가 있었다고해요


 1948년 1월 계획이 세워지고

 

1948년 5월에 퍼싱의 전 부분을 개량한

 

시제전차가 나와요


단 4개월만에 이 모든게 끝내졌다고하는데

 

 1차대전부터 2차대전기까지의

 

 미군 전차 연구개발속도를 보다가

 

 지금 연구개발속도를 보니 굉장히 놀랍죠


그만큼 IS-3와 같은 소련의 새로운 전차에

 

대해 경각심을 품고 있기도했고

 

4개월만에 연개구발이 이뤄진 이 전차는

 

 M46 패튼으로 불리게되고 625전쟁 발발이후

 

 퍼싱과 함께 투입되어

 

북한의 T-34계열 전차를 학살했어요

 

6.25당시 호랑이 위장을 한

< M46 패튼>



한국전에서 활약으로만 보면

 

바로 미군의 주력전차가 되는게 맞지만


바로 뒤에 나온 공수주 모두 M46패튼보다

 

 한수 위인 M47 패튼에게

 

주력전차의 자리를 주게되요


M47 패튼을 연구개발할때까지도

 

 미군은 그렇다할 주력전차 개념이 확립되있지 않았고

 

 여전히 M47 패튼 중형전차로 분류했었어요

 

지금이야 주력전차로 분류되긴 하지만

<M47 패튼>



애초에 M46패튼은 당장에 IS-3나 T-54등에

 

맞설 수 있는 전차를 만들기위해 급히 만든

 

 탱크라면 M47패튼은 전후 신형전차

 

계획중 일부였어요


그래서 연구개발에 시간이 있었고


그래도 동시기에 만들어진 탱크라 M46 패튼과

 

M47패튼 차체를 보면 좀 비슷해요.

 

M47 패튼에게 약간 더 경사가 져있지만


그러면서 포탑이 완전 다른 형태가 됐는데

 

포탑의 측면 앞쪽에 달린 귀같은게 보이죠


저게 M47 패튼으로 오면서 가장 발전한 부분이라

 

할수있는 거리측정기인데


2차대전기에 포수가 거리를 예상하고 포를

 

 쏴야했다면 M47부터는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하고

 

포수의 조준에 도움을 줬어요


그렇지만 새로나온 부품인만큼 탈도 많았는데

 

포탑 전면에 배치시킨탓인지 포의 반동과

 

 차체의 떨림때문에 저 조준기가 많은

 

고장을 일으켰다고해요


너무 안좋은 연비도 문제점중 하나였는데

 

 기름 232갤런(878리터)을 갖다부어도

 

 130키로밖에 못움직였어요;;


여담으로 우리나라 첫 주력전차에요

 

비록 지금은 전량 퇴역했지만..


이러한 문제점이 지적되고 2년만에

 

8000대가량이 생산되고서 생산을

 

갑작스럽게 멈추게돼요


이미 연구개발중이던 새로운 전차가 있었어요


 

<M48 패튼>



이후 문제점이 개선된 M48 패튼이 나온 이후

 

M47패튼은 미국에선 퇴역하고

 

다른 자유진영에 팔려나가게돼요


M48패튼은 1950년 12월부터 개발을 시작해서

 

1951년 4월에 첫 시제품이 나올정도로

 

 연구개발이 빨랐던 전차에요


M103의 프로토타입에서 건져온 기술때문에

 

M103과 닮았어요


아무튼 1952년부터 배치가 시작됐고


M47에서 큰 문제점이었던 거리측정기의

 

 위치가 포탑 측면 중간으로 가게되면서 개선됐고


엔진이나 변속기의 신뢰성이

 

그시대 물건 치곤 정말 좋았다고해요


M47부터 이어진 안좋은 연비는 여전하지만

 

이후 계량형 M48A3 부터는

 

 연료를 디젤엔진으로 바꿈으로서 해결됐어요


베트남전과 같이 미군이 직접 실전경험을 거친 전차며

 

 서방제 주력전차의 완성품이라 볼 수 있을정도로

 

준수하고 많이 생산된 전차에요


그렇지만 냉전이 심화될수록 공산진영에대한

 

 미국의 두려움은 날로만 커져갔어요


특히 T-54/55와 M46,7,8 과 맞붙으면

 

 누가 이길지 그때는 장담을 못했어요.


공산진영 주력전차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가져야한다고

 

 느낀 미군은 또 M48의 문제점을 개량한

 

새로운 전차 연구개발에 나서게됩니다.

 

 

베를린에서 서로의 구역을 맞대고

 대치중인 M48과 T-54



M48 패튼은 얼마간 자유진영을 보호하는

 

주력전차의 자리에 있었지만

 

문제점이 없었던건 아니에요


지옥같은 연비는 말했고 포탑의 선회에 이용되는

 

 유압장치의 내구성이 약해 여차하면 유압장치의

 

기름이 새어나가 불이 붙을수도 있었어요


다른 문제점으론 M48의 주포는

 

2차대전때부터 써오던 90mm 포를 기반으로한 포였어요


T-54의 주포는 새로이 개발된 100mm 주포를 썼고


주포 구경이 크다고 무조건 쌘건 아니지만

 

소련의 100mm 주포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새로이 개발될 후속전차에는 더 강한 주포를

 

장비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되요.


그중 미국의 눈을 사로잡던게 1950년

 

 중기에 개발된 영국의 105mm 로열 오디난스 주포였어요


후속전차의 주포가 그렇게 결정되고

 

M48의 자잘한 문제점등을 개선한 1959년

 

새로운 후속전차가 등장해요


 

 

<M60>



M60이란이름을 받은 후속전차는

 

 M48의 연비나 화력,

 

방호력등에서 개선이됐어요


그렇지만 포탑은 M48 패튼전차의 후기형 포탑과

 

거의 같은걸 쓰기에 아직은 그렇게

 

큰 개선점이 보이지않지만..


 

 

바로뒤, 1961년에 M60A1이 나오게돼요


M48 패튼의 포탑은 105mm포를 달고도 넉넉했지만

 

더 105mm 주포의 운용에 욕심을 부린 미국은

 

 M60A1 부터는 보다 더 대형화된 포탑을 장비해요


바뀐 포탑은 M48 패튼의 포탑보다

 

 더 방호력을 갖췄고 또한 더욱 컸기에

 

105mm 운용에 있어서 자유로웠어요

 

 내부가 커서 장전수가 포탄을 나르기 쉬웠고


또한 105mm 포탄을 더 구겨넣을수 있게됐어요


M60의 문제점을 꼽으라면 엔진의 출력이였는데

 

전차에 비해 엔진의 출력이 넉넉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주행이나 등판에 있어선 다른 전차와

 

비교해서 약간 떨어졌다고합니다.


그렇지만 M60 전차는 자유진영에서

 

하이엔드급 성능을 뽐내는 대표 전차가 됐어요


이 후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의 M48 패튼전차가

 

 대전차 미사일에 피격되어 포탑 유압장치의 기름이

 

줄줄새어 불이 붙고 저질스런 연비에 고통받는등

 

이스라엘이 자칫하면 밀릴 위기에 있었는데


미국이 급하게 중동으로 파견한 M60은

 

중동의 공산진영 전차를 쓰는 아랍의 T-54/55 전차들을

 

 박살내면서 그 성능을 자랑해요


그렇게 M60이 뛰어난 성능으로 자유진영을 지킬때

 

서독과 미국은 미친 전차 계획을 세우는데..

 

 

< MBT-70 >



MBT-70이라는 1970년대를 휘어잡을

 

 주력전차 계획이였어요


미국과 서독의 합작품이었는데

 

일단 이 전차가 완성된다면 여태까지 만든 전차의 성능을

 

모조리 뛰어넘는 최강 전차가 됐을거에요


얼마나 강한 전차냐고 묻는다면..


일단 장갑이 주조용접으로 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공간장갑, 즉 장갑을 덧대는 방식으로 이뤄져있어요

 

 이로인해 그때 한창 쓰이고 연구되던 HEAT(대전차고폭탄)에

 

대해서 면역을 갖추게됐죠


잠깐 다른 얘기로 세면 HEAT탄은 보병이 휴대하고 다니는

 

 개인용 중화기에도 장착할 수 있는 대전차탄이였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전차 장갑에 붙어 폭발하는 탄이이에요

 

관통력을 쉽게 확보할수 있었고


2차대전에도 쓰였던 탄이고 전 후 이 탄이

 

'보병'도 쓸 수 있고 강력한 관통력때문에

 

어차피 전차를 만들어봐야 HEAT탄에 뚫릴게 뻔한데

 

 전차 장갑을 늘려봐야 소용있겠어?

 

그냥 장갑을 얇게만들고 전차를 빠르게 만들자는 생각을

 

 전차설계자들에게 심어줬어요.

 

심하게는 전차 무용론까지 거론됐고


하지만 HEAT탄에게도 약점은 있었는데

 

장갑에 붙어있을시 장갑과의 거리가 너무 멀거나

 

가까우면 그 관통력이 현저히 떨어졌어요


그 약점을 이용한것이

 

MBT-70에 쓰인 공간장갑이었고


그치만 장갑을 두껍게 만들고 덧대기까지했는데

 

그럼 또 엄청 느릴꺼라생각이되는데

 

MBT-70은 그것도 아니었어요


1500마력엔진을 장비해서 70km/h까지

 

주행할수 있는 기동성을 확보한거죠


게다가 장전은 자동장전장치가 있어서

 

장전수 필요없이 전차장,포수,운전수

 

이렇게 3명으로도 전차를 운행할 수 있었고


그치만 이 미친 계획을 1960년대에

 

실현하자니 너무 버거운거였죠..


M60의 가격은 대당 약 20~30만달러였지만

 

 MBT-70 한대의 가격은 혼자서 100만달러나 했고


조밀한 기계가 많이 포함되있다보니

 

정비의 난이도나 비용에있어서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잔고장도 심했고


그래서 일단 MBT-70 계획은 폐기되지만..


미국은 1971년 MBT-70의 기술력에서 따온

 

새로운 전차를 개발하기로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1981년


 

 

 

 

<M1 에이브람스>


 


휴 드디어 나왔어요.

 

 M1 에이브람스


이 전차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거에요

 

뉴스에도 미군 지상군 보여주면서

 

한번쯤은 얼굴 비추는 탱크고


지금 미국 전차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주력전차에요


장갑부터 비범한데

 

에이브람스는 최초로 '복합 장갑'이라는

 

것을 채용해요


여러가지 소재를 조합하여 복합적으로

 

만들었다하여 복합 장갑이라 불리는데


철갑탄과 대전차고폭탄,

 

HEAT탄에 큰 면역을 보여줘요


사실 복합장갑 자체의 구상은 2차대전때부터

 

있었지만 이후 영국의 '초밤' 연구소에서 연구개발됐어요


엔진은 MBT-70과 같은 출력을 내는

 

1500마력 가스터빈 엔진을 사용한다고해요


그때문에 63톤이 넘는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속도가 70km/h 가까이 된다고합니다.


무장은 M60과 동일한 105mm 주포를 사용하는데

 

원래는 120mm 주포를 사용하려 했지만

 

첫 모델인 M1 에이브람스는

 

 105mm 주포를 달고 공장에 나오게 되요


자잘한 장비로 레이저 거리 측정기,

 

탄도계산용 컴퓨터와 열상 조준경등

 

여러모로 신경을 참 많이 쓴 전차에요


 

 

 

<M1A1 에이브람스>



M1의 애초에 기획했던 무장보다 더 약한 주포를

 

기획대로 120mm 주포로 개량한 M1A1 에이브람스에요


이외에도 M1 에이브람스에 화생방방호시스템이

 

추가됐고 전차내의 고장을 감지하는 시스템,

 

 그리고 피격시 위험을 줄이기위해 탄약적재함과

 

연료통의 부분을 분리했어요


 

 

1991년이후 M1A1 에이브람스는

 

안그래도 단단한 복합장갑에

 

 열화우라늄을 넣은 복합장갑을 사용하게돼요


 

<한미합동훈련중 M1A2>



1995년에는 포수와 전차장이 독립된 움직임

(전차장-관측 및 지시, 포수-조준 및 사격)

 

을 할 수 있는 헌터-킬러 시스템이 도입되고

 

장갑이 더 강화된 M1A2가 등장해요


헌터킬러 시스템의 도입은 다른 나라치곤 늦은편인데

 

소련은 전후 모든 전차에,

 

우리나라는 1988년 제식화된

 

 K1 전차에도 헌터 킬러 기능이 있었어요


이 외에도 M1A2로 건너오면서

 

각 승무원을 위한 화면,

 

 조종수용 열영상 장비,

 

차내 정보 시스템등을 갖추게돼요


현존 최강의 탱크라고 불리는데

 

어쩌면 다른 나라의 최신 전차에게

 

 없는 귀중한 실전 경험이

 

M1A2를 최강의 전차로 만드는거같아요


다음 개량형 M1A3은 2020년에 계획되있다하니

 

 그땐 어떤 괴물이 되서 돌아올지 기대해볼만해요!

 

 

 

 

 

 

출처 및 참고자료: 구글. 나무위키. 위키백과. 두산백과사전


 

 


 

 

 



 

Fabbrica D'Armi Pietro Beretta S.p.A.

 

일명 " 피에트로 베레타 社 "

 

이탈리아의 총기 회사입니다.

 

유명한"콜트", "베레타" 모두 총기 이름이 아닌,

 

총기회사의 이름이에요.

 

다만 그 회사에서 만들어진 권총들이 회사이름보다

 

 더 유명해서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는거죠.

 

 

1526년 설립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중 하나이에요.

 

16세기 당시 군에 납품한 영수증이 아직도

 

본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니 정말 끈질긴 역사를

 

자랑합니다.

 

현재까지 설립자의 후손들이

 

경영하고 있는 이탈리아 명품 기업이에요.


 

 

 

 

베레타 92SB-F, 92F ( M 9 )

 

제조국 : 이탈리아

 

제조사 : 베레타

 

길이:217mm

 

총열 길이:125mm

 

무게:970g

 

구경:9mmx19 Parabellum

 

장탄수: 10,15,17,18,20발


 

 

유명한 권총답게 많은 파생형, 업그레이드 모델들이 존재하지만

 

 이 글에서는 가장 많이 알려진,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베레타 92F 에 대해서 알아볼거에요.

 

미군의 제식권총 M9과 같은 버젼으로써

 

여러분들도 이 모델이 가장 익숙할거에요.

 

 

길이는 20cm 정도, 무게는

 

거의 1kg에 달하는 대형 자동권총이며

 

사용탄환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9mm 파라블럼 탄환을 사용하고 있어요.


 

 

 

 

<전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권총탄인 9mm 파라블럼 탄환>

 

 

베레타92라고 해서 1992년에

 

제작된줄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은 1972년에 공개된 생각보다

 

 오래된 권총이에요

 

<2차대전 독일군의 제식

권총이었던 발터 P-38>

 

이 권총은 제식화된 군용권총

 

최초로 더블액션 방식을

 

 도입했으며 현대 권총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권총이에요

 

 

베레타 社에서 이 녀석의 외부, 내부를

 

상당 부분 참고해서 만들어낸게 베레타

 

 <선상에서 M9 사격 훈련 중인 미 해군 수병들>


 

 

 

 

<베레타로 사격중인 미군>

 

 

 

1911년부터 1985년까지

미군의 제식권총이었던 콜트 M1911A1

 

45구경의 강한 탄환을 사용하며 높은 신뢰성을 가진 권총으로,

 

 한국전쟁을 거쳐 한국에서 아직도 사용중이에요.

 

 

 

 

1911년부터 80년 가까이 미군의 제식권총 자리를

 

지켜온 콜트 M1911(A1)의 강한 반동,

 

 적은 장탄 수, 노후화 등을

 

문제로 미군에서는 새로운 제식 권총

 

채용을 공고하는데, 과거부터 그래왔지만

 

 요즘에도 미군의 제식 총기 테스트는

 

"고문 테스트" 라고 불릴 정도로 혹독해요.

 

총열 교체없이 500발의 발사,

 

 진흙탕에 처박았다가 발사가능 여부,

 

윤활유를 제거하고 발사가능 여부,

 

혹한 지대에서 사용가능 여부 등등

 

다양한 방법을 다 동원하는

 

지옥의 테스트에요.

 

 

<SIG SAUER 社의 P226>

 

최종적으로 심사대에 오른 권총은

 

 SIG SAUER 社의 P226과 베레타 社의 베레타 92 였어요.

 

P226은 지금도 NAVY SEAL 등에서

 

사용하는 최고의 권총 중 하나이지만,

 

 비싼 가격 등을 이유로 결국

 

베레타 92가 제식권총으로 선정되었어요.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 중 하나인

 미국의 NAVY SEAL

 

 

그러나, 한가지 에피소드가 존재해요.

 

1986년, 유명 정치인들과 군 지휘부 앞에서

 

훈련 시범을 보이던 네이비 씰 대원의

 

베레타가 사격 중 돌연 폭발해버려요.

 

박살난 슬라이드에 얼굴 부위를

 

 맞은 대원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버려요.

 

제식 채용된지 1년 된 권총이 높으신 분들 앞에서

 

폭발해 군인이 쓰러지자 보통 문제가 아니였죠

 

곧바로 베레타의 안정성이 도마에 올랐고,

 

베레타 社 에서는 공장의 품질조사와

 

 더불어 품질을 향상시키고, 만약 폭발하더라도

 

슬라이드가 사수 방향으로

 

날아오지는 않도록 수정했어요.

 

하지만 그런 사고는 심심찮게 발생하였고,

 

결국 베레타 M92FS 모델이 나오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가뜩이나 베레타의 성능에 의심을 가지고 있던

 

 NAVY SEAL 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베레타를

 

버리고 P226이나 콜트 계열의 권총으로  갈아타버려요.

 

그리고 유명한 어록이 전해집니다.

 

 

" 이탈리아제 쇠맛을 보기 전엔 진정한 물개가 아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여러가지 추정이 있는데,

 

베레타 社의 미국 공장의 품질검사를

 

 날림으로 할뿐더러 품질이 좋지 않아서이다!

 

NAVY SEAL에서 장약을 많이 넣은 9mm 탄환을 사용했다!

 

심지어 타 총기 회사의 로비로 의도된 사건이다 !

 

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아무튼, 베레타는 아직까지 미군의

 

제식권총 M9으로써 잘 사용되고 있어요^^.


 

 

 

 

 

베레타의 특징은 슬라이드 부분을

 

 자세히 보면 총열이 노출되어 있어요.

 

이는 슬라이드와 총열의 마찰이 없어서

 

빠른 연사가 가능하며, 사격감을 부드럽게 해줘요.

 

 

또 대부분의 유명 권총이 그렇듯 구조가

 

단순하여 자동권총 치고는 고장도 적은 편이에요.

 

미군의 제식권총으로 채용될 정도면

 

말 다한거죠..^^

 

 

최근 들어 미국의 특수부대를 시작으로 9mm 탄환의

 

 너무 약한 살상력이 문제가 되고 있어요.

 

반동이 적고 명중율이 좋은 대신,

 

파괴력이 낮아 방탄복에 쉽게 막히고,

 

대인 저지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일부 미군들은 다시 45구경

 

콜트 계열 권총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미군 제식 권총답게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부탁 가능한데,

 

 최신 모델에는 바렐 밑에 레일이

 

기본으로 탑재가 되어 나오지만,

 

레일이 없는 모델이라도 따로

 

 레일을 부탁할 수 있어요.


 

 

 

 

<베레타의 전용 언더 마운트 레일>

 

권총 같은 경우, 레이져를 장착하면

 

 굉장히 빠른 조준이 가능해요.


 

 

 

 

<한-미 군사 합동 훈련 중 미군의

베레타를 만져보고 있는 한국군>

 

 

 

 

베레타는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에 출연했어요

 

 

  <영웅본색 中> 주윤발이 베레타로 쌍권총을사용하는장면.

 

<영웅본색>의 리메이크 <무적자 中> 송승헌 베레타를 사용해요

 

 

<피망의 아바온라인에 등장하는 베레타 M92FS >

 

FPS 게임에서 M4A1, AK-47 등과

 

 빠짐없이 나오는 권총 중 하나에요.

 

서든에서는 데저트 이글에 묻혀버렸지만,

 

아바에서는 오베 때부터 지금까지

 

국민 권총으로 쓰일 정도로 인기가 좋은 권총이죠.

 

 

마지막으로 베레타의 모델건을 알아볼게요


 

 

일본 마루이 社의 베레타 M92FS 모델과

베레타 아이녹스 모델

 

가스건이고, 마루이 제품답게

 

가스 기화율도 좋고

 

생각 이상의 성능을 보여주지만,

 

베레타 社와 라이센스가 체결되지 않아

 

 베레타 社의 각인이 들어있지 않아요


 

 

일본 Western Arms (WA)

社의 베레타 M92FS 모델

 

최고의 리얼리티를 자랑하지만,

 

 가스 기화율 등은 좋지 않은 않아요.

  

실총과 구분이 안 갈 정도에요.


 

 

 

중국 KJW 社의 베레타 M92FS

 

풀메탈에 싼 맛으로 굴리기엔 적당한거같아요.

 

이상 세기를 뛰어넘은 명작 베레타에 대해 알아봤어요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구글 , 네이버 "무기의 세계", 나무위키, 두산지식백과

 

 


 

 

안녕하세요

 

벌써 14년이란 시간이 지난 정말

 

 안타까운 사건 연평해전에대해

 

포스팅하려고합니다.

 

2002년에 일어난 사건이

 

2008년이 되어서야

 

서해교전에서  연평해전이라 명칭으로

 

개칭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도 못했던 사건이였어요..

 

나라를 지킨 영웅들에 대해

 

알아보는 글을 쓰려고합니다!

 

 

제1차 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북한경비정 4척이 어선20척과

 

 함께 NLL 2km 해역까지 내려왔습니다.

 

이에 해군고속정초계함

 

동원하여 이들을 저지하고

 

북쪽으로 밀어내기위해 선체를 직접 부딪혀서

 

 밀어내는 방식으로 북한함을 NLL밖으로

 

내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교전수칙의 해군은 선체밀어내기

 전법으로 대응하는모습>

 

이 과정에서 선체를 부딪힌 북한함정이

 

 25mm 기관포로 사격을 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어요.

 

당시 참수리 325호의

 

정장인 안지영소령 및 승무원

 

 일부가 부상을 입었지만 초계함과 함께

 

북한 어뢰정 한척과 중형경비정 한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지휘관 : 해군작전사령관 중장 서영길

2함대사령관 소장 박정성

고속정 편대장 소령 정순용

참수리 325 정장 대위 안지영

전력 : 포항급 초계함

참수리급 고속정

피해규모 : 참수리급 고속정 2척파손

7명부상

 

북한군

 

북한군 지휘관 : 불명

전력 : 청진급 경비정

신흥급경비정

상하이-2급경비정

등산곶경비정

대청급경비정

피해규모:1척침몰5척파손

20명 전사(추정)

30명 부상(추정)

 

 

 

 

당시 승리에는 장비의 질이 차이가

 

 크게 작용했었죠

 

모든무기가 수동식이였던 북한군

 

우리 해군의 배를 명중시키기가 어렸웠고

 

우리 해군의 장비는 자동화되어 북한군의 배를

 

자동주준하여 맞출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해군의 대승!

 

그러나...

 

북한의 계획된 도발 2차 연평해전

 

북한은 그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3년동안 만반의 준비를하고

 

계획적으로 도발을 준비하였습니다.

 

<영화 연평해전中 축구응원장면>

 

2002년 6월29일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4강전 경기가 있었던 당일.

 

 

 

북한군의 경비정 두척이 NLL을

 

또 다시 침범하게됩니다.

 

1차 연평해전의 패배의 원인을

 

알고있었던 북한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우리 해군의 배를 이길수없다고 판단!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합니다.

 

화력이 부족한 경비정에 탱크포를

 

달아서 화력을 보강하고

 

떨어지는 명중률을 보안하기위해 우리해군

 

배를 가까운곳으로 유인하게됩니다.

 

<북한군은 배에 전차1포탑을 장착할정도로

많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은 우리 해군의 교전수칙의

 

문제점을 이미 알고있었어요.

 

<영화 연평해전 中>

 

먼저 발포하지 않을것을 알았던거죠..

 

다가오며 시위 기동을 하고있던

 

참수리 357호를 조준하기 시작했습니다.

 

 

 

NLL을 침범한 북한의 등산곶 684호에게

 

경고방송을 하며 시위기동을 하던 우리해군의

 

참수리357호는 가까운곳에서 기회를

 

 노리던 등산곶 684호에게 선재공격을 당하고맙니다.

 

 

북한함정의 이상징후를 눈치 챘지만

 

 교전수칙때문에 선재공격을 할 수가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군의 85mm 전차포의 기습으로

 

윤영하 대위(당시계급)가

 

그 자리에서 전사하게 되었고,

 

기습으로 인해 엔진이 정지하고

 

동력이 나가버린 참수리호에서도

 

어떻게든 전투를 하려던 와중

 

21포와 22포의 황도현 중사와 조천형 중사가

 

 북한군의 집중 사격을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관실내연사로 북한군의 공격에

 

 직접 기관총을 들어 응전했던 서후원 하사도

 

북한군의 공격에 가슴이 뚫려 전사하게 됩니다.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상병도

 

부상당한 전후들을 위해 여기저기서 분투하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게 됩니다.

 

 

분투(奮鬪)그리고 승리

 

부장이었던 이희완중위는 다리가

 

 잘려나간 와중에도 함정을 지휘했습니다.

 

어떤 병사는 손가락이 잘려나간 와중에도

 

 총으로 응사를하며 치열하게 싸웠고

 

부상을 당한 다른 병사들도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영화 연평해전中 한상국하사>

 

결국 북한의 함정에 큰 피해를

 

 입히며 북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수리 357호도 피해가

 

심각하여 결국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최초보고로는 4명 전사,

 

19명 부상, 1명 실종, 4명 무사고 였습니다.

 

이후 실종되었던 한상국 하사가

 

 발견되었고, 전사처리 되었습니다.

 

한상국 하사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을때

 

침몰한 배에서도 끝까지 조타기를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상국 하사가 전사한 장소>


박동혁 상병은 온몸에 100여개

 

이상의 파편이 박혀있었고

 

 이 파편들의 무게를 합치면 3kg이

 

넘었다고 합니다.

 

 결국 박동혁 상병도 병원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대한민국

 

지휘관 : 정장 해군 대위 윤영하

부정장 해군 중위 이희완

병력: 초계함 2대

고속정 6대

피해규모: 참수리 고속정 357호 침몰

6명 전사

19명 부상

 

 

북한군

 

지휘관 : 대위 김영식

병력 : 경비정 2대

피해규모 : 등산곶 684호 파괴

13명 전사

25명 부상

 

 

연평해전의 전사자들

 

최후에 병상에서 숨을 거둔 박동혁 상병을 끝으로

 

정장 윤영하 소령(추서계급), 조타장 한상국 중사,

 

황도현 중사, 조천형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전사자는 총 6명이 되었습니다

 

 

 

정권에게 외면을 받은 전사자들과 유가족

많은분들이 알고있다시피

 

영결식에 당시 대통령이

 

참가하진 않았습니다.

 

 

당시 월드컵 폐막식과 일본과의 정상회담이 있었고

 

 대한민국이 문제없이 안전하다는 제스쳐라는 것과

 

정상회담간 외교적인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는

 

 행동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후에 추모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건을

 

우발적인 사고였다는 식으로 무마하려는 태도,

 

 북한감싸기 등등

 

충분히 비난받을 행동을 사서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사자들의

 

유가족에게 가정먼저 유일하게 위문편지를 보냈던 사람은

 

한국의 정치인도, 군관계자도 아닌 주한미군 사령관이었죠.

 

 

 

교전 후 한달이 지나도록 한국인이 보낸

 

 위문편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SBS에서 다룬후 그제서야

 

정치인들의 위문편지들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대통령과 총리, 국방장관등 각료진등이 영결식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대통령은 추모식에 단한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유가족에 대한 처우

 

 

전사자들을 순직자로 적용한 보상등으로

 

 유족들이 받은 평균 보상금은

 

3천만원대였다고 합니다.

 

 

국가의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군인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에 한상국 중사의 부인은

 

결국 이민을 가게 됩니다

 

<당시 정부의 태도는 유가족을 두번 울리는 짓이었습니다.>

 

 

교전수칙의 변경

 

 참수리 357호가 피해를 입은 가장 큰 원인이었던

 

교전수칙의 변경이 그 이후 이루어 지게  됩니다.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으로 되어 있던 교전수칙은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으로  단순화 되었습니다.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반복되어선 안됩니다.>

 

 

북한의 또다른 도발 대청해전

 

연평해전 7년후의 2009년 북한은 

 

또다시 NLL에서 도발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교전수칙이 바뀐 우리군은 피해없이 

 

북한군에게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357호의 생존자들

 

 연평해전 전투에서 참전하여 살아남은

 

박경수 중사는 이후에도 계속 해군으로

 

복무했으며 가족들의 반대에도

 

 함정근무를 계속 했습니다.

 

그러나 재배치된 근무지가 천안함이었고

 

결국은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생존자인 이희완 소령은 한쪽 다리를 잃게 되었으나,

 아직 군에 남아 교관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신형 유도탄 고속정

 

전사한 6명의 용사들은 해군의

 

신형 유도탄 고속정에 함명으로 명명되어

 

다시금 서해를 지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국을 지키다 희생된

 

그분들에게 지금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소개할 권총은요

 

너무나도 유명한 데저트 이글이란 자동권총입니다.

 

서든어택에도 나오는총으로 많은 분들도 알고계실거라 생각이되네요^^

 

 

그럼 현시대 가장 강력한 자동권총

 

 데저트이글(Desert Eagle)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게요.

 

Desert Eagle (데저트 이글)

 

제조사 : IMI , IWI, Sako Deffense ..(이스라엘, 미국)

 

개발시기 : 1982년

 

무게 : 1.9kg (장전 시 2kg 이상)

 

길이 : 273mm

 

사용탄환 : 50AE , 44 Magnum,  41 Magnum, 440 Cor-bon, 357 Magnum

 

장탄 수 : 7발 (50구경) 8발 (44매그넘) 9발 (357매그넘)

 

 

 

데저트 이글은 현재 전세계에서

 

정식 생산된 자동권총 중 가장 강력한 탄환을

 

사용하는 권총이입니다.

 

딱 봐도 느껴지는 포스가

 

역시 세계최강 자동권총답죠?

 

물론 리볼버 중에서는 파이퍼 첼리스카 라던지,

 

 S&W M500 이라던지..

 

심지어 산탄권총인 Raging Bull 까지

 

더 무시무시한 놈이 많아서

 

가장 강력한 권총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앞서 제원에서 봤듯이,

 

 데저트 이글은 5종류의 총탄을

 

사용할 수 있는 버젼이 있는데

 

다 설명하기는 힘들고,

 

가장 많이 알려진 50구경 버젼에 대해 리뷰할게요.

 


 

1982년, 미국 매그넘 리서치(Magnum Research) 社에서

 

설계 개발하고 이스라엘 IMI 社에서 제조한 데저트이글

 

사냥용 또는 레저용으로 개발, 제작되었습니다.

 

 

초기의 모델은 357 매그넘 탄환만을

 

사용하기 위한 모델이었고,

 

이후 점차적으로 44매그넘과 50구경 탄환을

 

사용하는 모델에 이르게 되었지죠

 

 

무게는 1.9 kg으로 무거운 편이지만

 

이는 비장전 시 무게이며, 사용탄환에 따라

 

다르지만 장전 시 최소 2kg 이상 나가는 놈이에요.

 

 

사실 2kg 아령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 무겁다고 호들갑이야 라고 생각하겠지만

 

저걸 허리에 차고 다니면

 

허리가 끊어질거같다고 말을해요. 

 

애초에 권총이란 부무장으로 사용되거나,

 

호신용 또는 은밀히 활동할 때 사용하는 물건인데

 

이렇게 무거워서는 가지고 다니는것 조차 힘들다는 거에요.

 

(포르투갈 특수부대에서 357 매그넘 데저트이글을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는 해요.)

 

 

참고로 콜트 M1911A1의 무게는 1.1kg,

 

베레타 M9의 무게도 이와 비슷한 수준이에요

 

길이는 거의 30cm에 이르는 거대한 놈으로,

 

무게 나가는 만큼 엄청 커서

 

휴대하기도 매우 번거로워요.

 

같은 이유로 호신용으로도, 전투용으로도 휴대,

 

사용하기 힘든 물건이죠.

 

 

따라서 오로지 레져 사격용이 아닌 경우,

 

갱들이 과시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가장 오른쪽에서 1,2번째가 데저트 이글에서

 

사용할 수 있는 50구경 탄환과 44매그넘 탄환이에요.

 

흔히 사용되는 9mm 탄환과 45구경 탄환에

 

비해 압도적인 덩치를 자랑합니다.

 

45구경 탄환만 해도 파워와 대인

 

 저지력에서 전혀 밀리지 않을 탄환임을 감안했을 때,

 

44매그넘과 50구경 탄환의 실용성에

 

충분히 의심이 갈만하죠?

 

 

실제로 인간에게 쏘기에는  44매그넘조차

 

 비인격적일만한 강한 탄환이에요.

 

애초에 사람 잡기 위해 만들어진 권총이 아니니, 

 

이 쯤하고 넘어가도록 할게요.

 

 

총신과 노리쇠, 탄창 부분만 바꿔주면 50구경 탄환,

 

 44매그넘 탄환, 357매그넘 탄환 등

 

 5종류의 탄환 모두 사용가능 합니다.

 

 

 

데저트 이글보다 훨씬 더 괴물같은 놈인

 

 S&W M500 권총이에요.

 

현재 정식생산된 권총 중에서는

 

가장 강한 탄환을 사용하는 놈입니다.


 

 

 

 

왼쪽의 탄환은 500 S&W 탄으로,

 

 앞서 설명한 S&W  M500에 사용되는 탄환이에요.

 

50구경 탄환과의 차이가 보이죠?

 

500 S&W 탄환도 레저용으로 나온 탄환이지만,

 

50구경 탄환을 사용하는 데저트 이글이 나온 이후 잠잠하던가 싶던

 

'미친놈 총' 시장에 새로운 획을 그은 괴물 중에서도 괴물이에요.


 

 

<데저트 이글에 사용되는 50AE 탄환의 모습>

 

 데저트 이글 M16중 누가 더 쌜까 궁금해하는사람이많아요. 

  

답을 말해보자면, 총구 에너지는 50구경 탄환이

 

 5.56mm 탄환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에요.

 

5.56mm 탄환의 운동에너지는 1600~ 1700 J 이며

 

 7.62mm 탄환은 2000~2500 J 입니다.

 

데저트 이글의 50구경 탄환의 총구 에너지는

 

 1600 ~ 2200 J 내외로 강력한 편이죠.

 

 

다만 인체에 맞을 경우 탄속이 더 빠른 소총탄이

 

몸 내부의 근육과 내장을 다 찢어버리는 반면

 

50구경 탄환은 그래도 태생이 권총탄이기에

 

 탄속은 떨어져 관통력부터 소총에 비해 약해요.

 

이는 결국 탄속과 구경의 한계라고 볼 수 있어요.


 

 

 

 다시 데저트 이글의 설명으로 돌아갈게요.


 

 

<데저트 이글의 프로토 타입 모델>

 

 

데저트 이글은 처음에는 미국의 매그넘 리서치 社에서

 

 설계되어 이스라엘의 IMI 社에서

 

하청을 받아 제작되었지만 (82~96),

 

이후에 미국의 사코 디펜스 社에서

 

 제작이 됩니다. (96 ~ 00)

 

그러나 사코 디펜스 社가 제너럴 다이나믹스에 매각되면서

 

 다시 IMI 社에서 제작, 또 IMI 社에서 분사한 IWI 社에서 제작되다

 

현재는 미국의 Kahr Arm 社에서 제작되고 있어요.

 

물론 생산사가 바뀌면서 모델도 계속 바뀌어왔지만

 

어찌됐든 간에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권총이라 볼 수 있어요. 


 

 

 

재미있는 사실은, 데저트 이글은 일반적인 권총의 작동구조가 아닌,

 

소총의 작동구조인 가스피스톤과 회전식 노리쇠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왜 이렇게 설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이제껏 권총에 사용하기엔 무리인

 

탄환을  획기적으로 사용해보기 위함인걸로 추측되요.

 

아무튼 이 시도는 어느정도 잘 맞아 떨어져서,

 

신뢰성 있고 원활히 작동하는데는 부담이 없으나

 

흙과 먼지에 의한 오염에 취약하고 강한 탄환 때문인지

 

 잘못하면 잼이 상당히 자주 걸리게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매니아 층이 강한 권총인만큼, 데저트 이글

 

 여느 권총보다 커스텀 버젼이 많은 권총이에요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또는 건스미스를 통해 커스텀한 모델이며,

 

따로 요청할 경우 금장 모델도 구입할 수 있어요.


 

 

 

<데저트 이글의 금장 버젼 모델의 모습>

 

흑인들이 스웩 스웩하며 휘두를거 같은 느낌이 드네요

 


 

 

 

 

최신형 모델 데저트 이글>

 

상단부에 피카티니 레일이 기본으로 달려나오는데,

 

데저트 이글은 슬라이드 자체가 블로우백 되는게 아니라

 

뒷부분만 움직이기 때문에 상단에 다른 장비의

 

 장착 없이 레일이 달릴 수 있어요.

 


 

<슬라이드 스톱된 데저트 이글의 모습>

 

슬라이드 뒷부분만 블로우백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는 데저트 이글의 작동구조인

 

가스피스톤 방식과 연관이 있는거죠.


 

 

일부 사람들이 데저트 이글을 한 손으로 잡고 쏘면

 

손목이 부러진다는 이야기를 진짜 믿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확실하게 말하자면 대답은 "No" 에요.

 

강한 탄환을 사용해서 반동이 강한  권총이긴 하지만,

 

 한 손으로 잡고 쏠 경우 손목이 부러질 정도라면,

 

이런 총은 대량생산 되지 못했죠.

 

소송당해서 회사가 벌써 망했겟죠?

 

 

물론 강한 반동으로 인해 제대로 파지 하지 않고

 

 쏠 경우 총을 든 손이 사수 쪽으로 튕겨 날아오르기 때문에

 

얼굴에 부상을 입을 확률은 높아요.

 

 

리볼버의 경우 반동을 흡수할 장치라고는

 

그립에 고무를 붙이는 경우가 고작이지만,

 

자동권총의 경우 슬라이드가 블로우백 되며

 

상당수 반동을 흡수하기에 비슷한 탄환을 사용하는 경우

 

자동권총이 더 반동이 낮습니다.

 

 

외국 동영상에서 가끔 데저트 이글

 

 양손으로 사격하는 아저씨가 나오기도 하는데요.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거죠.


 

 

 

 

 

 

<개인이 디자인한 데저트 이글의 바리에이션 버젼>

 

뭐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저럴거면 차라리

 

 소총을 가지고 다니는게 나을 듯 해요.

 

 

 

 다음으로는 데저트 이글이 등장하는 매체에 대해 알아볼게요

 

데저트 이글은 파워풀한 외관 상 꽤 많은 매체에 등장하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알만한 부분을 추려서 볼게요.


 

 

<영화 쉬리 中  최민식 씨가 사용하는 데저트 이글>

 

슬라이드 밑에 장착한 흰색 장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레이져 정도로 추정되요

 

의외로 <쉬리>는 당시 한국영화 답지않게

 

총기에 바리에이션이 부착된 경우가 많아요.

 


 

 

 

영화 레지던트 이블 2,3 中 

LJ 라는 흑인이 사용하는 권총이 금장 데저트 이글

 

두번째 사진을 보면 44매그넘 버젼인걸 알 수 있어요.

 

4에서는 엄브렐라 웨스커 회장이 44매그넘

 

데저트 이글을 양손으로 쏘기도 해요.

 

 

<KBS 드라마 아이리스中 탑이 사용하던 데저트 이글>

 

당시 드라마를 보면서 데저트 이글을 눕혀서 쏘기도 하고,

 

 원거리에 있는 적들을 정확히 맞추는

 

모습을 보고 실소했던 기억이...

<영화 바브와이어中(1996) 데저트 이글을

쌍권총으로 사용하시는 누님>

 


 

피망의 FPS 게임 아바에 등장하는 데저트 이글과

 서든어택에 등장하는 데저트 이글의 모습

 

 

 

 

마지막으로 데저트 이글의 모델건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게요

 

일본 마루이 社의 데저트 이글

 

크롬 버젼과 블랙 버젼 모두 존재하는데,

 

마루이의 제품답게 리얼리티와 무게감은 아주 괜찮은 편이에ㅛ.

 

가스를 충전해서 사용하는 가스건으로,

 

현재도 구하기 쉽고 물량이 많은 편입니다.

 

또 노말 가스를 써도 반동이 굉장한 강한 편이에요.

 

 다만 그만큼 가스를 너무 많이 먹어요.


 

 

 

 

한국 아카데미 社의 데저트 이글 실버 / 골드 버젼

 

 

20세 이상용인데, 리얼리티는 기대하지마세요.

 

올 플라스틱이에요^^:

 

가격대는 1만원 대로, 데저트 이글이 궁금한 분들은

 

구입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리뷰 마치도록 할게요!

 

 

일부 참고, 인용된 사진 및 설명자료 출처

 

사진 : 구글 및 엔하위키, 해외 실총 판매 사이트

 

설명 : 네이버 블로그 및 엔하위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자

 

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

 

 보병전투장갑차의 발전사를

 

한번알아보려구합니다!

 

 

 

 

 

20세기 중반만 하여도 한반도는

 

세계에서 2등이라면 서러울 못사는나라였고

 

 

 당연히 미국지원으로

 

장갑차를 받아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때 처음 받은 물건은

 

2대전 당시 엄청 굴러다녔던

 

M8 그레이하운드 정찰장갑차와

 

M3 보병장갑차였습니다.

. 


 

 

 

<광복후 상륙한 미육군의 M8장갑차>

 

 49년 당시 주한미군이 쓰던 것들을

 

에치슨 선언 이후 미군이 철수하면서

 

우리에게 M8 27대와 M3 12대를

 

남긴 것을 주워서 육군본부 직할

 

독립기갑연대가

 

 창설한 것이 한국군 기갑의 시초였습니다.


 

 

 

 

<여순반란 진압에 투입된 M3 장갑차..

사진의 기관총은 M1919>

 

 

 물론 당시의 사정상 연대전체가

 

 기계화된 것은 아니었고

 

1개대대만 장갑수색대대로

 

편성을 하고 2대대는 기병대대,

 

 3대대는 도보 수색대대로 편성하였는데

 

 당시 가장 전장에서 가장 활약을 한 것은

 

기병대대였다고 합니다.


 

 

<기갑연대 기병대대의 장교들.. 전부 승마바지를 입고있다.>

<행군중인 기병대대>

 

M8 37MM 직사포와 M1919경기관총으로

 

 무장을 하였는데

 

이동하는 기관총진지로써 역할을 충분히 하여서

 

 북진기간 동안 많은 활약을 하였습니다.

 

 일부는 T-34 전차와 직접 전투를

 

벌여서 일부 손상을 입히는 등

 

 낮은 성능에 비하여

 

 상당한 활약을 한 편입니다.

 

 M3 보병전투 장갑차는 수량도

 

아주 적었고 대부분 낙동강 전투에서

 

 손실되어 큰 활약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립 기갑대대는 선전을 한 것은 사실이고

 

흥남 철수 때까지 최대한 전력을 유지하여

 

전투에 임하였고 흥남에서 기갑대대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자폭시킨 후

 

수송선으로 탈출하여서 대부분의

 

 장비를 손실하게 됩니다.

 

 한국전 이후 이승만의 외교력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지고

 

 밴플리트와 같은 친한파장군이

 

 미군내 많아지면서 많은 군사원조를

 

받게 되는 데 한국전 기간 중 대부분 손실되었던

 

M8 정찰장갑차와 M3 반궤도보병장갑차를

 

 다시 보급받게 됩니다.

 

 

 

 

<50년대 중반 국군의 날 행사 당시 M8 정찰장갑차>

 

 M8의 사용기간은 자료마다

 

차이가 많은 데 60년대 후반까지

 

 일선장비에서는 퇴역을 하고 80년대까지는

 

 치장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M3의 경우 공급 수량이 많치 않았지만

 

 77년까지 수도방위사령부에서 운영되었고

 

 계열차량인 M16 자주대공기총도

 

 1/2 기갑여단의 대공장비로

 

운영되다가 발칸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수방사의 M3 장갑차.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개량한 기관총방패가 달려 있다.>

 

 당시 한국군이 롤모델로 삼았던

 

이스라엘의 사례를 잠깐 보자면

 

 비슷한 안보위협이 있던 한국과는

 

달리 미본토에 거의 고철수준으로

 

 막대한 양이 방치되어 있던 M3반궤도장갑차를

 

헐값에 쓸어와서 계량하고

 

정비하여 대량배치를 하고

 

90년대까지 최일선에서 사용을 하였는데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당시 전반적으로 우수하였던

 

 이스라엘의 공업수준 덕분에 가능하였습니다.


 

<1973년 4차 중동전 당시 M3 장갑차>

 

 

 

<1973년 4차 중동전 당시 M3 장갑차>

 

 

 

<M3는  최근까지도 현역이었다.. 2000년대에도 상당량이 운영되었습니다. >

 

 

 

 M3는 독일군이 사용하던

 

하노마그 장갑차가 유럽에서 대활약을

 

하는 것을 보고

 

 프랑스의 반궤도차량을 본따서

 

대량 생산을 하였던 장갑차였습니다.

 

 

<나치독일군의 하노마그 장갑차>

 

2차대전 당시 독일 장갑척탄병 사단에서

 

대활약하였고

 

2차대전 이후에도 70년대까지

 

동유럽에서 현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는 자체생산까지

 

하면서 운영을 하였습니다.

 

<독일 하노마그는 기관총 뿐만 아니라 대전차포까지

탑재가 가능한 범용성이 아주 우수하였던 장갑차였다.>

 

 

 하노마그가 접지면이 크고

 

험지돌파력이 좋았던 것에 반해

 

 M3는 강철케이블이 들어 있는

 

 고무제 궤도에 접지면이 작아

 

속도는 70KM로 다소 빨랐지만

 

험지돌파력은 다소 딸리는 수준이었고

 

탁트인 지형의 중동과는

 

달리 도로가 열악하고

 

 산이 많은 한국의 지형에는

 

적절하지 않은 장비였습니다.

 

 한국군이 천제일우의 기회를

 

잡은 것은 월남전인데

 

참전의 대가로 미군의 M113 장갑차를

 

처음으로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M113은 나토를 위시한 서방세계에

가장 많이 보급된 보병장갑차였고

 베스트셀러였다.>

 

 먼저 주한미군 차량을

 

인수하였고 동시에 월남에서

 

수도 기계화보병사단이 현지 인수하여서

 

월남에서 80여대의 장갑차를

 

 직접 전투에 사용을 하면서 기계화보병전투를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베트남의 도로를 질주하는

수도기계화 보병사단의 M113>

 

 

당시 주월 한국군은 기존 장비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총방패를 만들어 장착을 하는 등

 

 실전에 맞게 계량하여

 

 아주 요긴하게 사용을 하였습니다.

 

.

<한국군 특유의 기총사수방패가 설치된 모습>

 

 M113장갑차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장갑차로 불리는 걸작인데

 

완전궤도식에 64KM의 속도를 낼 수 있고

 

 알루미늄합금 장갑을 사용하여서

 

 무게도 가벼워서 별도의 장비가 없어도

 

 물살이 강하지 않은

 

 하천은 둥둥떠서 도하가 가능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지금도 미군이 쓰는 장수무기체계입니다.


 

 

<맹호 M113과 미군부사관들>

 

 한국군은 월남전 기간중에

 

한국본토에서도 추가 도입이 계속 되어

 

기갑여단의 주요장비로 편성되었습니다.

 

 M113 2000년대 초까지는 현역으로

 

사용되었지만 국산 K200 2200

 

가까이 도입되면서 지금은 거의 퇴역을 하고

 

 치장장비로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후방사단의 장갑중대에

 

극히 일부 차량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80년대 팀스피리트 훈련당시 M113과 기계화보병들 >

 

 

수도 방위 사령부의 M113 장갑차>

 

당시 한국군이 돈이 없다고 무조건

 

미군 장비만 얻어서 사용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북한군이 대규모의 특수부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것을 첩보를 통하여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었고

 

후방지역 작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시가전에 적합한 차륜형 장갑차의

 

도입도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미군에는 적절한 무기체계가

 

 없어서 유럽제를 수입하기로

 

 결정을 하고 미국 몰래

 

국방과학연구소 직원들이 유럽을 돌면서

 

후보차종을 선정하였는데

 

서독의 UR416을 도입하기로 하였으나 

 

나토에서 유럽제군수물자의 역외

 

수출을 엄격히 제한하여서

 

 도입을 실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당시 요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이탈리아의 피아트

 

접촉을 하여서 CM6614차종을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나토의 미군 감시망을 피해서

 

극비리에 주요부품을 분산 수출하고

 

 서류를 조작하여서

 

한국으로 도입하는 대 성공합니다.

 

72년 당시 공업수준으로는

 

이 놈을 조립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도전이었죠.

 

 당연히 뻔뻔스럽게 조립관련 기술+@

 

요구하였고 돈이 아쉬웠던 피아트

 

 당시 귀중한 장갑판 제조기술과 강철케이블이 들어간

 

전투용타이어 제조기술을 넘기게 되었고

 

이 기술은 훗날 K200을 비롯한

 

다른 한국군 장비의 개발에 요긴하게 쓰이게됩니다.


 

 

 

 

 

 

 

 힘들게 부품을 들여와서

 

400대나 양산한 물건이었지만

 

야전부대의 평가는 좋치 못하였습니다

 

당시의 기술수준이 아직 높지 못하여서

 

 잔고장등 불만사항도 아주 많았고

 

이놈을 운영한 초급기갑장교들이

 

한국군의 수뇌부로 성장하면서

 

 이런 차륜식 장갑차에

 

대한 기피를 가져오게 됩니다.

 

 KM900은 시속 100KG의 속도로 달리고

 

 10명의 보병을 수송하여

 

신속히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무기체계로

 

 많은 수량이 퇴역을 하였지만

 

 아직도 수방사등의 야전부대에서 200여대

 

 정도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다른 차륜형 장갑차로

 

 교체될 것을 예상되고 있고

 

 이미 현대로탬에서 후속차량을

 

시제차량까지 만들어 둔 상태입니다.

 

 

 

       한국산 장갑차 시대의 태동.

 

 70년대 중반 미군은 한국군에게

 

아주 솔깃한 떡밥을 던졌어요.

 

월남전이 끝나고 미본토에는

 

처치곤란 할 정도로 많은 수량의

 

 M113이 방치에 가까운 상태로 치장되고 있었고

 

미국은 동맹국에게 싸게 처분하려고 하였고

 

이스라엘은 이미 떡밥을 물어서

 

미국에서 M113을 쓸어가고 있는 중이었죠.

 

예전에 M3 장갑차고철을 쓸어갔듯이


 

<미국 중고무기 성애자 이스라엘 육군의 M113.>

 

 이스라엘은 약 13,000 각종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로

 

 전군의 3보앞 승차가 가능한 군사국가입니다다.

 

<이스라엘의 M113 계량형 젤다 장갑차>

 

 한국군도 국방과학연구소들 실무진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실사확인에 들어갔는데

 

 치장시설을 확인한 한국군 관계자들은

 

 크게 실망하였다고 합니다. 

 

M113이 기본형에서 각종 계열

 

 차량들이 미국답지 않게

 

아주 방치에 가까운 상태에서 현황조차 없이

 

방치되어 있던 것이었다고합니다.

 

 

<이런식으로로 치장해 놓았다고 보면 되요.>

 

미군당국자는 뻔뻔스럽게 거지들의

 

 호의를 배푼다는 식으로

 

그냥 쓸어가서 대충 고쳐서 쓰라는 입장이었고

 

 화가나서 귀국한 ADD 실무자는

 

 M113의 도입을 반대하고 자체개발쪽으로 정책을

 

 수립하여야 한다는 보고를 올려

 

 당삼 국방부와 육본에서 난리가 났는데

 

이스라엘처럼 싸게 도입하여서

 

북한군의 기갑부대를

 

막아야한다고 아주 성화였요

 

 ADD도 믿는 구석은 있었습니다.

 

이미 한국군은 대량의 M113을 운영하면서

 

 창정비를 직접하면서 많은

 

 기술을 미국으로부터 정비목적이라고

 

 속이고 받아둔 상태였고 또 친한파에

 

 뼈속까지 반공주의자였던 많은 미군기술진들이

 

 미군당국의 반대에서 많은 기술을

 

공식/비공식적으로 한국군에

 

 넘기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이 것은 당시 많은 ADD 관계자의

 

증언에서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국방부도 반신반의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오원철 수석등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K200사업이 ADD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ADD가 핵심 기술과 전력요구사항을

 

 대우중공업에 넘기면서 사업이 급진전되었습니다.


 

대우중공업에서 천신만고 끝에 K200양산에 성공하여

80년대부터 기계화보병사단에 집중배치된 K200 보병장갑차.

승차전투가 가능하도록 총안구가 설치된 것이보인다.

 

 대우중공업은 당연히 이런 장갑차를

 

 만들어 본적도 없지만

 

 맨땅에 헤딩 하면서 사업을

 

시작하였고 M113을 만들었던

 

 미국 FMC AIFV를 약간 참조하여서 K200

 

개발하는데 결국 성공합니다.

 

한국의 K200성공은 미국방산업계를

 

놀라고 하였고

 

당연히 FMC가 가장 화나있었습니다.

 

 

 당시  FMC는 한국이 자신의 신형장갑차

 

 AIFV M113을 해적카피 떠서

 

 K200을 만들었다고 미군당국에 성토하고

 

 길길이 날뛰는 상황이었고

 

결국 FMC의 실사단이 대우중공업을

 

 방문하여 확인을 하게 되었는데

 

유럽의 장갑기술과 독일제 상용버스엔진을

 

군용규격으로 개조하여

 

장착한 엔진등 많은 부분이 FMC의 제품과

 

 다른 독자설계의 제품이었고

 

결국 인정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네덜란드 육군의 AIFV>

 

 FMC사의 AIFV는 미군에

 

판매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네덜란드와 터키에 대량 수출되어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미군이 쓰는  M2 브레들리의

 

 염가판이라고 보면 맞아요.

 

   K200은 당시 한국의 방산공업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한 역작이었고

 

 걸작이었다고 생각이됩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적지 않지만

 

장점이 많은 장갑차입니다.

 

일단 장갑방호력이

 

M113보다 확실히 강해졌구요.

 

 K200을 수입한 말레이시아군이 보스니아에서

 

14.5MM 기관포탄에 얻어맞았지만

 

가볍게 방어했어요! 이미 실전에서

 

장갑방호력이 검증이 되었던거죠.

 

 

  그리고 가벼운 차체에 강력한

 

버스엔진을 달아서 출력이 엄청나고

 

 평지에서 74KM의 속도로 달릴 수 있고

 

내리막에는 110KM까지 나오는 것으로

 

 궤도형차량으로는 세계 TOP CLASS수준입니다.

 

 공격력은 AIFV나 미군의 M2 브레들리가

 

기관포을 달고 다닌 것에 비하여

 

 약한 편이지만 M2 중기관총과

 

1~3정의 M60 혹은 K13 경기관총을

 

부착할 수 있어서 이동하는 기관총진지로

 

사용된 수 있을 만큼

 

 기관총화력이 아주 강력한 것이 특징입니다.

 

도하중인 K200. 최근에는

대전차 공격력을 높이기 위해

사진처럼 러시아제 매티스M 미사일

을 탑재한 차량도 많이 보입니다.

 

 K200은 군이 요구하는 다양한 계열차량의

 

 좋은 플렛폼이 되어주기도 하였어요.

 

 많은 계열차량이 K200을 기반으로

 

개발/양산되었고 기본형 1,700대 계열차량까지

 

2,200여대가 배치되어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습니다.

 

4.2" 자주박격포차. 참고로 4.2" 박격포탄의 위력은

 105MM 견인포탄보다 훨씬 강력하다.

 

 물론 보병전투장갑차로써

 

화력이 약한 편이었고

 

 대우에서 많은 강화모델의

 

시험차량을 개발하였지만

 

예산문제와 군의 요구수준에

 

비해 성능이 떨어져서

 

결국 도입은 되지 않고 K21 개발로

 

 이어지게 됩니다.

 

 K200은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부품수급/정비등이 100% 가능하여

 

가동률면에서 아주 우수한 운영성적으로 보여주었고

 

 기술적 모험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국산 장비를 개발하고 양산배치하는 것으로

 

 국방정책이 바뀌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우중공업이 독자적으로 육군에 제시한 화력강화형 모델.

결국 채용되지 못하였어요.

 

 

 

해병대 장갑차의 발전사

 

 

 

 

 

 

 해병대가 장갑차를 처음 지대로

 

도입한 것은 LVT-3가 처음이었습니다.

 

 

 

<70년대 한국 해병대와 LVT-3>

원래 뚜껑이 없는 장갑차에 상판 장갑을

 달아서 방어력을 높힌 모델이었다.

 

 

 

 

미해병대가 신형 LVT-5를 도입하면서

 

퇴역장비를 군사원조로 받은 것인데

 

보급에서 항상 육군에게 밀리던

 

해병대에서 끔찍이 아끼면서 운영을 하였고

 

 80년때 중반까지도 현역을 장수하였습니다.

 

 74년 신형 LVT-7이 도입된 이후에도

 

 10년 이상을 더 현역을 운영한 것으로

 

아무래도 전세계에서 한국군이

 

가장 오래 운영을 하였을 것입니다.

 

지상 속도가 40KM에 수상속도가 9KM에다가

 

 M1919기관총 하나 달려있는

 

약한전력이였지만 정말 잘 관리하여서

 

 오래 잘써먹은편입니다.

 

 

<뒤에보이는 장갑차LVT5>

 

<미군 LVT-5 앞에서 사진찍는 해병대원>


 

 

 

한국해병대는 월남에서 LVT-5로 미해병대와 함께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지만

 

직접 운영을 하지는 않았어요.

 

 74년 바로 LVT-7를 도입하여

 

2000년대까지 운영하고 퇴역시키고

 

지금은 신형 LVT-7개량모델을 현역을 쓰고 있습니다.

 

 

 

<80년대까지 한국해병대의 주력이었던 LVT-7 초기형 >

 

저 샤크마우스를 외국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엄청 좋아한다고 하네요 ㅎ


 

 

 

'

<LVT-7 후기형.. 일부는 아직 현역입니다.>

 

<현대 한국 해병대의 KAAV7>

 

KAAV7의 경우 방어력과

 

화력이 강화된 형태로 상륙후에도

 

해병보병의 화력지원이

 

가능하도록 40MM자동유탄포와

 

12.7MM중기관총이 강화된 개량형입니다.

 

물론 해병대가 상륙돌력장갑차만

 

쓰는 것이 아니고

 

 

육군과 동일한 K200계열 장갑차도

 

사용중입니다.

 

 다만 상륙장갑차처럼 바다를

 

 해치고상륙할 수 있는 수상기동능력이 없고

 

 

 파도에 매우 취약하므로 상륙함을

 

통해 얌전한 상륙만 가능합니다.

 

지상전투 지원용이라고 보면 맞아요.

 

 


 


 

대공장갑차의 발전

 

 한국군은 전쟁후 미군으로부터

 

 M16 대공장갑차를 인계받아 

 

 창설을 하였던 기갑여단의

 

방공무기로 요긴하게 사용하였고

 

70년대 중반 ADD가 발칸포의 국산화에 성공을 하면서

 

 

견인식 발칸에게 교체가 되어 퇴역을 하였습니다.

 

 

<M16 대공장갑차>

 

 

<박정희대통령과 승전포> 

 

 그러나 4연장 중기관총 대공포의

 

 무기체계는 도태되지않고

 

 계속 사용되어 지금은 승전포라는

 

 이름으로 2 1/2트럭에 탑재되어

 

 여전히 현역으로 사용중이고

 

유용한 대공/대지화기로 사용중입니다.

 

 

 

<M16이 떠났어도 승전포는 계속 다른 차량에

기생하여서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켰다.>

 

 

 

<지금은 두돈반 위에서 사용중이다>

 

4차 중동전 당시 이스라엘군의

 

이집트군의 강력한 대공미사일에 의해

 

재공권을 상실하였었고

 

이집트공군의 폭격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

 

이때 M163 자주발칸이 투입되어

 

겨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합니다.

 

한국군도 K200의 생산과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80년대 중반에

 

 K263을 양산하여 기계화부대의

 

 방공망을 강화하였습니다.

 

 

<K263 자주발칸>

 

 

 

 이에 만족하지 않은 육군은

 

 K30비호와 천마를 개발하여

 

현재 각각 160/100여대를 운영중입니다.

 

 

 

 

소련이 준 뜻하지 않았던 선물 불곰사업시대

 

 냉전에서 소련이 망하면서

 

독립국가연합을 거쳐 왕거지가 된

 

 러시아는 자존심을 버리게 됩니다.

 

  한국도 손님으로 받게 되는

 

 꿈 같은 상황이 오고야 말았고

 

냉전시대 빨갱이 동맹국에도 절대 안팔았던

 

최신형 T-80U BMP-3

 

 헐값에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지금도 동부전선에서 열심히 굴러다니는 T-80U전차>

 

한국군특유의 지렁이 위장이

 

 의외로 아주 잘 어울리네요.

 

<화차에 결박되어 어디론가 개끌려가는 BMP-3>

 

 한국군 기갑장교들과 ADD에 의해

 

 이들 장비들은 들어보자마자

 

해체을 당하였고 이때 모은 DATA

 

K2흑표와 K21 개발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T80U전차의 경우 실제로 운영을

 

하여보니 많은 장점이 있었다고

 

 하였지만 종합전투력면에서

 

 한국군의 K1 수준으로

 

 확인되어 더 이상 수입이

 

안되었지만 BMP-3는 경전차에

 

가까운 화력을 인정받아 2차 불곰사업까지 벌여

 

 총 60대를 들여오게 되었어요.

 

여담인데 당시 러시아 수송기들이

 

 장갑차를 하역한 후에

 

 초코파이와 도시락라면을 꽉꽉

 

쓸어담아서 귀국하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BMP-3 100MM 저압포에

 

 30MM기관포를 부무장으로

 

 하는 강력한 화력에 70KM의 기동력,

 

우수한 수상기동능력으로

 

주목을 받았고 한국군이 선호하는

 

 러시아무기 1순위였습니다.

 

100MM 저압포는 운동에너지탄의

 

 위력은 약하였지만

 

 대구경의 고폭탄을 날리는

 

투발수단으로는 아주 효과적이었고

 

 부무장이었던 30MM기관포도 강력하여

 

한국군 기갑장교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측면방호력이 약하고

 

승차보병이 위로 하차할 수 밖에 없어

 

 적탄에 쉽게 노출된다는 점 등등

 

단점도 많아서 K21이 결국 개발됩니다.

 

 

 

 

 

세계최강의 보병전투 장갑차 K21

 

 한국군도 경제력에 걸맞는 보병전투장갑차를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하였고

 

 그래서 마침내 등장한 것이 K21이었습니다.

 

 

 

K21은 사실 스웨덴의 CV9040

 

영향을 강하게 받은 차량입니다.

 

장갑차가 효과적으로 잘 수 있는

 

최대 구경의 자동포가 40MM라고 보고

 

 최대한계치의 대구경포를 탑재한 것으로

 

화력면에서 최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0MM 자동포로 무장한 스웨덴 육군의 CV9040 장갑차>

 

 

 영국의 워리어가 사격통제장치가 망하여

 

화력투사가 아주 약한 것을 간파하고

 

 

비호자주대공포의 대공기관포용

 

 사격통제장치지상용으로

 

다운그레이드한 FDS를 장착하여서

 

제한적인 대공사격까지 가능한 수준입니다


 

 

 

 

 

 

<급탄기구와 사격통제장치가 

안좋은 영국육군의 워리어 장갑차>

 

최근에 영국군이 돈을 더 투자하여

 

포탑을 뜯고고치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동간 사격, 대공사격, 연발 사격까지

 

최고 수준으로 화력을 가지게 되었구요.

 

미군의 M2 소구경 기관포인 것을

 

 볼 때 미군무기체계를 능가하는

 

 강력한 장갑차로 개발중인

 

국산 대전차 미사일까지 탑재하면

 

전차사냥꾼으로도 전장운영이

 

가능한 장갑차량입니다.


40MM 자동포도 워낙 대구경이다보니

 

전차포와 같은 대전차철갑탄을

 

사용할 수 있고

 

 북한군의 T-55 T-62계열 정도는

 

 미사일없이 자체포로도

 

어느정도 격파가 가능한 수준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독자생산한 포와 포탄급탄기구>

 

처음 개발을 시작할 때는 BMP-3

 

강력한 화력이 육군에서 100MM저압포와

 

 30MM기관포 조합으로 가자고

 

주장을 하기도 하였지만

 

 종합화력면에서 40MM 자동포가

 

더 강하다고 판단하여 진행되엿습니다.

 

이 것은 소련육군의 BMP-1의 사례을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기도 합니다.

 

 1967년 등장한 BMP-1은 당시 차원을

 

 달리하는 73MM 저압포를 장착하여

 

 이 저압포라는 것이 작은 자체에

 

 무리하게 장착하기

 

위해 포탄피에 장약을 줄인 것이다보니

 

 운동애너지가

 

최악이었고 명중률도 아주 안좋았습니다.

 

 

 

 

 

<핀란드군의 BMP-1 장갑차>

 

 소련도 중동전에서 실전경험을 토대로

 

 BMP-2부터는 30MM 자동포 변경하여서

 

아프간전쟁에서 아주 효과를 보았었던 것입니다

 

약간 위력이 센 73MM 포보다

 

 차라리 연발로 쏴데는 30MM자동포가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BMP

 

 사례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이었고

 

한국육군도 강력한 자동포체계로

 

방향을 잡고 진행을 한 것이죠.


 

 

핀란드육군의 BMP-2. 30MM 기관포로 무장 >

 

 K-21은 강력한 독일제 엔진을

 

부착하여 시속 70KM로 주행이 가능하고

 

상당히 대형이어서 다른나라의 경쟁차량보다

 

많은 9명의 보병이 탑승가능합니다.

 

 자력도하능력을 부여하려고 하다보니

 

 

장갑이 약해져서 특히

 

 측면 방호력이 다소 약한 편입니다.


 

 

 

M2 브레들리의 뒤를 따라가는 K21.

차량 자체가 상당히 커서 보병수송능력도

 M2보다 훨씬 우수합니다


 

 

 

실제로 미군의 M2 장갑차의 실내는 아주 비좁아서

 

사람을 구겨넣다시피한 설계였다고합니다.

 


 

 

최근에 한국군 무기체계가

 

 미군을 앞서는 것들이 많다보니

 

미국 장교들이 자주 놀러와서 살펴보고 있다.

 

 

출처 및 참고자료:구글.나무위키

 

 

 

 

 

 

2015년 2월 2일,

 

미국 NFL 슈퍼볼 광고에서 군수업체

 

노스롭 그루먼社의 30초짜리

 

차세대전략폭격기의 CF가 광고되었습니다.

 

 


광고에서는 YB-35, 현존 최강의 폭격기

 

 B-2 그리고 X-47B 무인스텔스기를

 

차례로 보여주며 사내 1급기밀인 LRS-B사업

 

후보기종의 실루엣을 공개했습니다.


노스롭 그루먼은

 

"이제껏 세계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폭격기가 만들어진다."

 

라며 사업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나타내보였습니다.

 


장거리전략폭격기는 전략핵잠수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더불어 미국의 3대 전략무기체계로써

 

전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으로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길수 밖에 없는 무기입니다. 


하지만, 미 공군이 보유한 폭격기들이

 

노후화되고 좀 더 발전된 개념으로

 

 설계된 기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어지자

 

 미국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폭격기들을


새로운 차세대장거리전략폭격기를

 

도입하여 대체하는

 

 LRS-B(Long Range Strike-Bomber) 사업의

 

업체 선정에 나서고 있습니다.


대당 도입가 5-6,000억원에

 

대한민국 국군 1년치 국방예산의

 

 약 2배에 달하는 59조원을

 

 연구개발비로 투입하여 오는

 

2025년부터 100여대를 실전배치


하는 매우 거대한 사업입니다.


현재, 이 사업의 대결구도는

 

 B-2를 개발하여 납품한 적이 있는

 

노스롭 그루먼와 보잉-록히드마틴이

 

 태그팀을 결성하여 대치하고 있어요.





현재 미 공군의 장거리전략폭격기로 활동하고 있는 기체는, 


 

 

 

 

B-52. 1952년 첫 비행,

 

1955년 미 전략공군사령부에

 

배치가 된 지 60여년이 흐른 폭격기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폭격기입니다.


'노인학대' 라는 말이 나올만큼 지

 

난 60년동안 수많은 기체보강과

 

기골교체들이 이루어져 생산당시

 

장착되어있던 파츠들은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폭격기중 가장 큰 폭장량과

 

상대적으로 뛰어난 유지보수성에서

 

오는 효용성 덕에 미 공군은 2045년까지

 

B-52의 운용계획을 잡고있어요.


 

 

B-1B Lancer. 1960년대 말 개발에

 

착수하여 70년대에 시제기가

 

나왔으나 카터 전 대통령이

 

죽여버렸던 기체에요.


하지만 81년부터 레이건 전 대통령이

 

 전략공군사령부에 배치를

 

결정함에 따라 다시 부활하여 100여대가 생산되어

 

 86년에 실전배치가 된 기체입니다.


B-1B도 현재 노후화로 달려가고 있는 실정이고

 

LRS-B사업을 통해 배치되는 기체는

 

이 B-1B의 일부를 대체합니다.


 

현존 최강의 스텔스폭격기 B-2. 1987년 첫 시험비행,

 

 1993년 실전배치되어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최강의 자리를 유지하고있는 B-2.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B-2에 대해 더 자세히알고싶다면

http://kimssine51.tistory.com/61

 


 

 

 

 

이와 같이 B-2를 제외한 B-52전량과 B-1B일부를

 

 대체하게 될 미국의 차세대전략폭격기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20년까지는


시제기가 나와서 초도작전능력(IOC)를

 

획득해야 하고

 

 2020년대 중반까지는 완전작전능력(FOC)를

 

 획득해야 F-35의 양산계획에 따른


미 공군의 전력구성계획이 맞물려 목표하는

 

공군 전력의 구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미 공군은 언제나 항공전력에 있어서

 

최고의 성능을 목표로 해왔는데,

 

문제는 이것이 항상 걸림돌이 된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기술과 개발하려하는

 

기술의 조합에 따른 수많은 시간낭비,

 

 예산낭비를 지켜봐온 미 공군은 적시에

 

원하는 성능의 폭격기를 배치하기 위해선


기존의 기술들이 가지는 안정성만이

 

개발의 신속성을 보장해준하고

 

보았기에 LRS-B는 현재 당장

 

적용가능한 기술과 새로이 개발이

 

완료된 기술을 조합하여 폭격기를

 

설계한다는데에 주안점을 주고 있어요.

 

 

사실, LRS-B의 후보기종에 대한 정보들은

 

모두 기밀사항이기 때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요.


향간에는, 무인기로 개발이 된다는 설도 나돌았으나

 

지금은 유인기로 확정이 났고 초음속 폭격기로 개발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이 많습니다.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으나 초음속 '순항'이 아닌

 

초음속 '대시'(Dash)를 통해 LRS-B 후보기종이

 

 타겟으로 삼고 있는 중-러의 방공망에서


생존성 증가를 위해 빠르게 치고

 

 빠진다는 식의 요구성능을 제시했다는

 

말이 있으나 공식적으로

 

미 공군이 발표한 적은 없습니다.


노후화된 ALGM(핵순항미사일) 을

 

대체하는 LRSO(차세대 핵순항미사일)은

 

 향후 LRS-B에 탑재되어 순항미사일이 가지는

 

 뛰어난 저피탐성과


자유낙하핵폭탄에 비해 플랫폼으로

 

하여금 뛰어난 생존성을

 

 보장하는만큼 인티그레이션은 확정적입니다.


다만, F-135엔진의 탑재는

 

현재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으로 보아

 

탑재가 거의 유력하고 알려진 바는 아니지만

 

선행개발은 B-2를 납품한적이 있는


노스롭 그루먼에 맡겼을 가능성이 크며,

 

사업의 입찰역시 노스롭 그루먼사가

 

따낼것으로 확신합니다




LRS-B사업은 미국의 3대 전력획득사업중 하나이며

 

미 국방부 무기획득순위

 

1순위에 올라와있고 2013년 11월

 

미 공군 참모총장 마크 웰시는


LRS-B사업에 대해

 

"합당하다는 확실한 납득이 없는 한

 

그 어떤 사업상의 변경도 없을것"

 

 이라며 연방정부 예산자동삭감(시퀘스터)으로


향후 10년간 약 524조원의 국방예산이 삭감되어도

 

LRS-B사업은 그대로 유지할 것 이라며 사업에

 

 대한 강한 확고함을 나타냈다고합니다.



 

 

 

사진출처 : 구글

 

 

 

 

때는 1980년 3월 31일,

 

6명의 아랍인들이 런던 교외의 한 모텔에 투숙하게 되는데 이들은

 

바로 "아라비스탄 민주혁명해방전선(DRFLA)"이라 불리는

 

이란 내부의 분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라비스탄이 뜻하는 건 이란 남서쪽 후제스탄이라 불리는 지방의 옛이름인데

 

대부분이 페르시아인으로 구성된 이란 내부에서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땅이었고

 

예전부터 이란정부에 맞서 독립을 요구해오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제스탄 지방은 유전지대였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부가 이곳을 통해

 

이란으로 흘러들었고 따라서 이란 정부는 독립을 시켜줄 생
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분쟁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DRFLA는 그 와중에 탄생한 무장테러단체입니다.

 

 

보라색 테두리가 이란의 후제스탄 지방이구요.

 

1847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에 양도되었습니다



1979년 이란은 이란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팔레비 왕조가 실각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질서의 전제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주변국들은 이란 혁명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치는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가장 경계를 했던 나라는 접경국
인 이라크였는데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혁명 이후 문화혁명을 통해 반이슬람 세력을

 

탄압하는 등 이란을 중동짱깨로 부상시켰습니다.


이라크는 시아파 인구가 대다수인 이란과 마찬가지로 과반수가 넘는

 

시아파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음에도 사 고담 후세인의 쿠데타 때문에

 

소수의 수니파 정부의 지배를 받아야 했는데,

 

후세인은 이란에서 일어난 시아파의 혁명이

 

이라크 내부로 전파되어 폭동이 일어
나지 않을까 우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라크가 이란의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해주고

 

이란이 이라크 내부의 폭도들을 지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후세인과 호메이니의 이런 대립구도는 정치군사적 긴장을 초래했고,

 

결국 1980년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란 공군의 F-14 톰캣 전투기. 이란 혁명 이후 F-14의 기술은

 

소련으로 넘어가서 Su-27 전투기의 레이다 
시스템을 완성하게 됩니다.



1980년 3월 입국한 6명의 아랍 테러리스트들은 특별한 군사적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높은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오합지졸의 집합체였고

 

리더인 오엔 알리 모하마드만 유일하게 대학문턱을 밟아본 사람이었습니다.

 

이놈들은 1달 전부터 영국에 들어와 쇼핑과 여자들만나기
,

 

음주가무에 한동안 빠져지내다가 

 

본래의 목적을 실천하기 시작하는데

테러리스트 리더 오엔 알리 모하마드



이들은 4월 30일 아마도 이라크 대사관을 통해 전달된 것으로

 

보이는 무기를 수령하고 곧바로 프린세스 게이트에 있는 주영 이란 대사관으로 직행합니다

 

소련제 권총과 기관단총, 파쇄수류탄으로 무장하고 대사관 정문으로 난입하여 경비를 보고

 

있던 메트로폴리스 순경 한 명
을 간단히 무장해제시키고 26명의 민간인-대부분이 아랍인,

 

대사관 직원-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7분만에 런던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고 테러범 리더인 오엔과 전화를 통한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 최초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란은 후제스탄을 독립시키고 억류중인 아랍인 91명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으면 대사관을 폭파하고 인질을 모두 죽이겠다!'


근데 왜 하필이면 영국대사관이였을까요 

 

큰 이유는 없었던 것 같고 영국 내에 많은 무슬림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과 영국언론의 전달력을 빌어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서구사회
에 확실히 전달하고 싶었던 걸로 보여집니다.

 

<1979년 미 대사관의 성조기가 불타고 있는모습>

 

당시 이란은 미 대사관직원들을 6개월째 테헤란에 억류중이었고,

 

호메이니는 주영 이
란대사관 점거 사태를 CIA와 MI6가

 

후제스탄 분리주의자들과 함께 공모한 보복성 공격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아무튼 사건 하루만에 각료들과 각 분야의 고문들로 구성된 위기관리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마가렛 대처가 부재인 관계로 내무장관 윌리엄 화이트로가 의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처는 비록 이란 대사관이 해외 영토로 취급되긴 하지만 영국 법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공권
력 투입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대사관 실내를 재현한 목조 세트가 건설되어 SAS팀의 모의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마가렛 대처 수상과 22대대 SAS대원들>



첫째날에 오엔은 BBC뉴스데스크에 전화를 걸어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밝혔고

 

얼마 뒤에는 몸이 안좋은 인질 2명을 밖으로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경찰은 대사관의 다른 전화선을 모두 끊고 오엔과 협상을 계속하는 동시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느라

 

벽에 드릴을 뚫기
도 했는데 테러범들이 이 소리에 의심을 품자

 

공항공단의 협조를 얻어 비행기를 건물 저공으로 통과시키는 등 노이즈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1950년 창설된 SAS는 이전까지 전세계에 그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테러범들은 곧 요구사항을 바꾸어 영국 언론이 자신들의 성명을 공개적으로 방송해줄 것과

 

아랍 대사를 통한 자신들의 안전한 출국을 요청했습니다.

 

영국정부는 일단 요르단, 알제리, 쿠웨이트, 레바논 등의 대사와 접촉하여

테러리스트들 하고 대화해주길 부탁했지만 요르단으로부터는

 

할수없다는 답변과 다른나라들은 일단 상의해보겠다는 대답만왔다고합니다.


외교가 진전이 없는 가운데 테러범들의 성명은 둘째날 저녁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왜곡된 부분이 많았는지 오엔이 전화를 걸어 

"날 속이다니, 넌 나쁜 아이야!"하며 날뛰자 BBC는 성명을 다시 발표하기로 했고,

 

경찰은 그 대신 두 명의 인질을 추가로 풀어달라는 요구를 얻어내어

 

2명이 더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DRFLA의 성명문을 기자에게 넘겨주는 테러범.

 

이들은 총 5명의 인질을 풀어줬습니다>




넷째날이 되자 영국정부는 다른 아랍국가들로부터

 

테러리스트와 이야기해볼생각이없다는 답변을 받게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SAS는 대사관 건물의 시공업자와 풀려난 인질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종합하여 돌격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테러리스트
의 숫자, 위치, 무장 등을 파악하는데

 

인질들의 정보가 매우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 테러범들은 이란 외교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받는데,

"우리는 인질로 잡힌 이란 국민 여러분들이 순교자가 될 준비가 되었다고 믿는다 "

한마디로 구출할 생각이 없었던 거였죠.

테러범들은 45분 내로 아랍 대사를 불러주지 않으면 인질 한 명을

 

죽이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게됩니다.

 

  영국 당국은 협상이 이미 결렬되었음에도 외교부가 아랍 대사와 계속 접촉하고 있다는

 

가짜뉴스를 흘려보내면서 시간을 끌지만

 

결국 이란인 한 명이 처형당하게됩니다.

 

 
대처는 영국 경찰의 현장지휘권을 국방부로 이양하는 것을

 

허락하게 되는데 이는 곧 SAS의 투입을 승인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인접 건물에서 대사관 후미를 정찰중인 SAS>



SAS의 돌격플랜은 건물의 정면과 후면에서 동시에 기습하는 것이었어요.

 

4인1조 3개 팀으로 이루어진 레드팀은 옥상에서 레펠링을 통해 2층 
발코니로 진입,

 

3층과 4층까지 소탕하기로 되어있었고, 3개 조로 구성된 블루팀은 1층과 지하 담당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님로드 작전(Operation Nimrod)'이라고 알려집니다.>




오후 7시 대사관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SAS팀은 이어폰을 통해 작전개시를 뜻하는

 

"런던 브릿지"를 동시에 수신했습니다.

 

돌격팀 리더의 GOGO
하는 외침과 함께 SAS팀들은

 

저격수의 엄호를 받으면서 동시에 정해진 위치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층 진입을 대기 중인 SAS>


건물 진입은 대사관 천장 중앙의 유리돔을 통해 섬광탄(스턴 그레네이드)

 

2개가 터지는 것을 신호로 동시다발적으로 기습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2층 발코니로 진입하기로 된 레드팀 한 명이 위치를 잡다가

 

실수로 유리를 깨뜨리는 바람에 오엔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섬광
탄을 기다리기도 전에 건물로 진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CS탄과 섬광탄을 건물로 던져넣긴 했지만

 

바닥 카펫에 뿌려진 등유에 불이 옮겨 붙었고

 

팀 리더는 레펠 도중 줄이 걸리는 바람에 화염에 노출되어 방독면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방독면을 벗고 CS가스로 가득찬 실내를 맨얼굴로 들어가는 근성을 보여줬다고합니다.

 

 

 

<가장 왼쪽에 혼자 방독면 벗고 있는 팀리더>



이제 섬광탄이 터지고 건물 정면 발코니에 폭약을 설치한 블루팀이

 

엄청난 폭발과 함께 실내로 진입하면서 마침 서있던

 

오엔을 사살했고 다른 팀들도 문을 부시고 CS탄과 섬광탄을

 

던지면서 맡은바 구역을 소탕하기 시작했습니다.

창문을 깨고 실내로 진입한 레드팀은 눈앞에 테러범이

 

어벙하게 서있는 것을 보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기고장때문에 총알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즉시 9밀리미터 권총을 꺼내 사살에 성공합니다.

 

 

<창문으로 진입하는 블루팀>



이제 테러범들은 전보실에 모여있는 인질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는데,

 

한 명이 총에 맞자마자 신속하게 진입한 레드팀의 사격으로

 

 머리가 관통됬고 나머지 테러범들은 무기를 버리고 대피하는 인질들의 인파에 섞여서,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인질들의 도움으로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상황이 진압되자 SAS팀은 인질들과 함께 건물밖으로 대피했고

 

카메라를 피해서 조용하게 사라졌습니다.

 

 

 

<사건 이후 이란 대사관의 모습. 엄청난 폭발의 흔적>




모든 작전은 17분만에 끝났지만 그 여파는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돌격 도중에 사망한 인질은 1명, SAS팀 사상자는 부상1명에 불과했고,

 

테리러스트 5명 사살 1명 체포라는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로 마무리된 경우였는데

 

위기관리위원회가 처음 예측한 40퍼센트의 인질 사
망률에 비교하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수있습니다.

체포된 테러범은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27년을 복역한 뒤

 

가석방되어 엄청 늙은모습으로 겨우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합니다. 

 

영국은 그를 이란으로 송환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그동네에서 처형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88년도 인권조례에 따라 참정권 없이

 

영국에서 살아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이란은 일주일 전 미국의 델타포스가 테헤란에 억류된 미 대사관

 

직원들을 구출하려다 실패한 사건을 빌미로 주영 이란 대사관 점거사태

 

미국과 영국이 이에 보복하고자 모의한 것이라며 비난하는 바람에

 

서구권과 이란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지만 마가렛 대처는 이 
사건을 통해 공권력의

 

적시 적절한 투입과 정부기관의 긴밀한 협조, 명확히 구분된 책임분담을 보여주어

 

영국의 위신을 높이고 보수당
의 지지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SAS가 원하지 않는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과는 반대로

 

DRFLA의 존재는 후제스탄 분쟁의 이슈와 마찬가지로 잠깐 떠오르는가

 

싶었지만 
곧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에 온세상의 관심이 쏠리면서

 

다시 조용하게 묻혀버렸습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구글

 

 

 

드레스덴 폭격은 영국이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에 가한 폭격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영 연합군

 

 폭격기대의 대규모 폭격작전이구요

 

 종전 직전인 1945년 2월 13일~2월 15일

 

 걸쳐 행해졌구요

 

 유럽 전선의 폭격 작전 중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작전이자

 

가장 크게 논란을 일으키는

 

작전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피난민들이 넘쳐나던 도시에 폭격을 가해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이 죽었죠

 

그당시 드레스덴에는 폭격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피난민들이 엄청 모여있었다고합니다..

 

 

 

드레스덴은 작센공국의 수도로,

 

유럽의 보석이라 할만큼

 

아주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1945년 2월 13일

 

밤 10시경 영국본토를 출발한

 

 영국의 "랭캐스터 폭격기"

 

234대가 드레스덴 상공에 



들어서고, 그 곳은

 

유럽의 보석이 아닌 불지옥으로

 

 순식간에 바뀌어버렸습니다.

 

 

 

도시 전체에 카펫를 깔듯 빈틈 없이 폭탄을 쏟아

 

붓는다는 뜻의 "융단 폭격(Carpet bombing)"

 

이라는 말이 생겨난 현장입니다. 

 

 초흥행을 한 대작영화를 일컫는 신조어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말도 이 썬더클랩작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어떻게 유래 된 것이냐,  

 

폭탄 1발이 도시의 한구획(Block)을


날려(Bust) 버릴  만큼 엄청난 화력을 가지고있어

 

 Block+Buster라는 말이 탄생했습니다.

 

 


234대의 랭캐스터 폭격기들의

 

폭격이 다끝난 후,

 

3시간뒤 무려 500여대의 영국폭격기가

 

추가폭격을 감행했습니다.



 

 

< 드레스덴에 폭격을 감행하는 미 제 384 폭격기 편대 >

 

그렇게 다끝나는가 했지만 끝이 아니었고 


이번엔 미국의 B-17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 311대가 두차례에 걸쳐 


파괴하지 못한 나머지 구역을

 

 깔끔하게 없애 버렸습니다. 

 

<드레스덴 폭격 장면>



작전명 『Thunder Clap』..

 

이름처럼 천둥소리와 함께

 

유럽의 아름다운 보석이 새까만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 라이프매거진에 실렸던, 폭격 전의 드레스덴 >

< 폭격 후 모습 >

 

 

폭탄이 터질때에는 1000도씨의

 

온도로 도시전체가 불타오르고

 

시체들은 녹았다고합니다..

 

사람들은 녹은도로에 다리가

 

붙어 떨어지지않는다며

 

괴로워했다고합니다..



 

 

< 폭격으로 인해 잿더미로 변한 드레스덴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한 모습 >


 당시 레스덴의 인구는 총 64만,

 

도시의 80%이상이 파괴되었고

 

 2만 5천명~ 6만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연합군의 집계를 믿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방공호에서 발견된 새까맣게 타버린 여자의 시체>

 

시민의 절반이상이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주장도 


꽤나 설득력 있을만큼 3차공습에서는

 

피난민을 겨냥한 기총소사도 불사

 

 했다고 전해집니다.

 

 

<유모차에 있는 아기들을 돌보다 같이 타죽은 엄마>


 

 

 

 

 

작전의 지휘관은 영국 하더 해리스 장군으로

 

 1942년 퀼른 공습 ,

 

43년 함부르크 대공습, 드레스덴을 포함 


총 60만명에 이르는 사상자는 낸 인물입니다.

 

"나는 사람을 죽이라고 이자리에 앉혀졌다"

 

"적국의 민간인이라도 적은적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그런적을위해 눈물을 흘릴필요없다."

 

이런말을 할정도로

 

그는 아주 악명이 높았다고합니다.

 

그래서 별명이 '폭탄해리스'또는

 

 '영국의악마'로 불러지기도합니다.

 

<화장하기 전의 시체들을 찍은 사진>

 

이 작전이 소련군의 독일 진군을

 

 도와주기 위한 방편이라 했지만 


지금도 이작전에대한 논란이 일고 있으며,

 

융단 폭격으로 독일군의 사기를 꺾는 의도, 혹은 


영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독일의 도시하나를

 

 논스톱으로 폭격하여 연합군의 작전수행,비행능력을 


보여주려는 야심이었다는

 

 말도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전쟁후 자신의 폭격전술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크게 실망한 해리스는 1948년 남아프리카로 건너갔고

 

1953년 까지 남아프리카 해운 회사에서 근무 하였습니다.

 

 영국 공군 교회 앞, 해리스의 동상을 세웠는데

 

동상의 제막은 엘리자베스 왕대비가 하였습니다.

 

제막당시 누군가가 "해리스는 전범이다!"라고

 

소리를 쳐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동상은 반대자들의 위협속에서

 

24시간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아서 해리스의 동상에 빨간색

스프레이로수치스럽다는 뜻의 Shame이 적혀있습니다.>


 

 

 

 

< 무참히 짓밟힌 드레스덴을 바라보는

여인상,친철을 의인화한 동상이라고한다 >

<폭격후의 드레스덴 희생된 시민들 >

 

< 어느 지하실에서 소사한 일가족들.. >


 

 

 

<현재의 드레스덴 >


 

프린트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

역사는 사기꾼들로 가득차 있다.

 

그가 살아있으면 우린 죽는다.

 

 그렇다면 그가말한 사실만 다 기록되고

 

우리 것은 기록되지 않겠지.

 

-존 프라이스 대위-

 


 

출처 및 참고자료:구글.나무위키

 

영화에서 나올법한 전설의 스나이퍼

 

 대해알아볼꺼에요..

 

정말 영화에서 비추어지는

 

 멋진모습에 Sniper..

 

하지만 현실에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모습의 전설의 스나이퍼들이 있었습니다.

 

 

스나이퍼 (저격수)는 멀리

 

 떨어진 표적을 겨냥해서


단 한 발로 임무를

 

완성하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훈련 된 전투 요원입니다

.

영화에서 보던 그런 스나이퍼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아님 거짓말일까요?

 

세계 전쟁사에서 이름을 떨친 스나이퍼

 

에 대해  알아보도록해요!

 

 

 

 

 

 


 

1. 전설이 된 미 해병대 저격수

"카를로스 해 스콕 Carlos Norman Hathcock II"

 

 

카를로스 해스콕은 공식 전과

 

93명 사살 비공식 300명을

 

 자랑하는 미 해병대의 전설적인 저격수입니다

해스콕의 작전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적의 세력권에 있는

 

평야 1km를 3 일간에 걸쳐  포복으로...

 

안전한 사정권인 목표물 600m까지  전진해서...

 

야영지에서 나오는 적의 사령관 가슴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기고, 1 발로 명중시킨 일이라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저격에 성공하고 나서의 과정이에요


자신들의 사령관이 저격수에 암살을 당하자


열받은 베트공군이 그를 잡으려고

 

  수색을 시작했지만,

 

해스콕은 황급히 뛰어서 철수하지 않고,


다시 포복으로 천천히 철수를 해서

 

 무사 귀환 했다고 합니다.

 

3일간 물만 마시고, 대소변도 

 

업드린 상태에서 포복중에 해결 하면서

 

귀환 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합니다..

 

<이아재임>

 

이 사람은 원샷 원킬 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으로,

 

  "흰 깃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배트남전 당시만 해도, 숨어서 적을 공격 한다고 해서,


스나이퍼들을 치킨(겁쟁이) 라고 했다고 해요.


해스콕은  그런 비아냥을 의식 했는지....

 

 

 

 

모자에 항상 흰색 깃털을 달고

 

 

작전을 수행해서 붙은 별명이라고 합니다.ㅎ

 

 


 

여러개의 전설 같은 일화를 남겨서...

 

상대방인 베트공군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는데,

 

이에 열폭한 베트공 사령부는 해스콕을 잡기 위해

 

베트공 전 군에서 12명의 저격수를 뽑아서,


 

특수훈련을 시키고, 얘들을 시켜서

 

해스콕을 죽이려고했다고해요.

 

서로 쫓고 쫓기는 상황이 몇번 있다가...


결국, 베트공 저격수중 가장 뛰어난

 

저격수인 "코브라" 라고

 

 불리는 저격수와 1:1 대치 상황까지 가게 됬는데,

 


이 코브라 라고불리는 베트공의

 

 저격수도 실력이 대단 했고,

 

해스콕을 향해서 먼저 발사를 했다고해요.

 

그런데, 총알은 해스콕의 수통을 관통하고...

 

재빠르게 해스콕은 총탄이 날아온 곳으로 응징...

 

해스콕이  상대방의 스코프(저격용 망원경)을

 

관통해 눈에 명중 시켰다고 해요

 

 

 

 

 

해스콕과 코브라의 싸움은

 

여러 영화나 소설의 모델이 되었다고합니다.

 

미국에 귀국 후에는 해병대 스카우트 스나이퍼

 

 학교 설립에 전력하고 후진 양성에 힘 썼는데,

 

미군의 현대전에서의 스나이퍼의

 

 거의 모든 것을 재확립 했다고

 

하는 전설의 인물이입니다.


 

 

 

 

2. 전투 중 최장 저격 기록을 가진 영국 근위 기병대

 "크레이그 해리슨 Craig Harrison"

 

 

2009 년 11 월 영국 근위 기병대의

 

 크레이그 해리슨은


2 명의 탈레반 병사의 저격에 성공한 것으로,

 

 기네스 기록을 수립하게 되요

 

저격 거리는 2.47km인데,

 

이 거리는 8.59mm 총탄이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3 초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군대서 총 쏴본 남자들은 알겠지만,

 

총알 발사되고 3초면 총알이

 

 상당히 많이 날라가는거에요


사용한 저격 소총은 L115A3이며,

 

유효사격 거리는 914m 였는데,

 

 거의 3배 거리에 있는 적을 저격했다고합니다.

 

 

 (그사이에 기록이 깨져서

 

현재의 최장 기록은 2012 년에 호주 군 SAS의

 

 병사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달성 한 2815m라고 합니다.)

 



 

 

 

 

 

 

 

 

 

 

3. 100 일 이내에 505 명을 사살하고 적군에서

"하얀 사신"라는 별명으로 불린 핀란드 스나이퍼

 

 

 

 

"하얀 사신 死神"이라는

 

별명의 핀란드군 저격수로

 

개조 한 소총을 들고 핀란드와 소련 사이에

 

발발 한 겨울 전쟁 (1939-1940)에서


확인 전과 505명 사살이라는 세계 최고 기록을

 

수립 한 진짜 괴물 같은 저격수입니다.

 

이 기록은 일조 시간이 매우 짧은

 

계절에  영하 40 도의

 

혹한 속에서 불과 100 일 미만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요.

 

그는 저격 중에, 하얀 입김이 나와서

 

자신의 위치가 발각 될까봐 

 

 입안에 눈을  넣고 저격을 했다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1940 년 3 월 6 일, 러시아 저격수에 역관광을 당해

 

 왼쪽 턱을 관통하고 뺨의 절반을 잃었다고 해요

 
사경을 헤메다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휴전이 선언 된 3 월 13 일의 일이라구해요..


 

 

 

 

 

4. 1 발의 총탄으로 6 명을 획득 한 영국인 스나이퍼 "저격병"


 

 

 

2013 년 12 월, 영국의 저격수가

 

 단 한 발의 총탄으로

 

 6 명의 탈레반 병사를 처치하는

 

만화 같은 일이 일어 났습니다. 

 
이것은 자폭 테러범의 기폭 스위치를

 

저격 폭탄을 폭발시키는 기술이었는데,


그는  20 세의 저격병 (지정 사수)으로 

 

850m 거리에서 20kg의

 

폭발물을 폭발시켜 탈레반의 공격을 막고....


 

테러범들을 단체로 사망시켯다고해요

 

 

 

 

 

 

 

 

 

 

 

5. 소련이 낳은 사상 최강의 여성 스나이퍼

"류드밀라 · 미하이로부나 · 빠부리첸코 

Людмила Михайл?вна Павлченко"

 

 

1941 년 6 월 독일의 소련 령 침공이

 

시작 되었을 때 


류드밀라 · 빠부리첸코는 키예프 대학에서

 

 역사를 배우는 24 세의 학생이었어요
 
간호사 되고 싶었지만  간호사 선발에서 떨어지고,

 

당시는 아직 드물었던 여군의 길을 선택하게되요.

 
당시 러시아 군은 2,000 명의

 

여성 저격수가 있었지만,

 

살아 남은인원은 500 명 뿐이었는데,
 


그녀도 그 중 한 명으로,

 

제 2 차 세계 대전에서 적의 저격수 36 명을

 

 포함한, 확인 전과 309명 사살이라는

 

 기록을 남겨서 여자 저격수로는 전설이에요.


종전 후 외교 홍보의 일환으로

 

캐나다와 미국에 부임 했고,

 

  미국 대통령에 초대 된 최초의 소련 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6. 벽 너머에 3 명의 병사를 쏘아 맞힌 미 해병대

'스티브 라이헤트Steve Reichert "

 

2004 년 4 월 9 일 이라크

 

군의 기습을 받았을 때,


미 해병대의 스티브 라이헤트 이등 중사는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폐기된 원유 저장 탱크에 올라가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어요.

 

근데 인근에서 건물 뒤에 대구경 기관총으로

 

무장 한 3 명의 이라크 병사가

 

매복하고있는 것을 발견 했다고 합니다.

 

벽돌 벽 때문에 직접적인 저격이 어려운 상황에서


라이헤트는 감각을 활용해서 벽돌 벽

 

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기로 했어요

 

뭐 달리 방법이 없었는지...

 
그 결,  1 명은 철갑탄으로 벽을

 

관통해 저격되고  관통,

 

나머지 2 명은  벽의 파편이 명중해서

 

 3명 모두 사망했다고해요

 

 

 

 

 

 

 

 

 

 

 

7. 255 사살을 자랑하는 미군 역사상 최고의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


 

미 해군 특수 부대 SEALs의 크리스 카일은

 

2003 ~ 2009 년 이라크 종군 동안

 

 공식 전과 160명

 

사살을 포함한 전체 255명 저격을 성공해서

 

공식기록상  미군 사상 최다 기록을

 

가진 저격수입니다.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진 2 차 팔루자 전투에서만

 

 40 명의  저격에 성공 했구요

 
라마디 전투에서 그의 소문이

 

이라크 병사 사이에도 퍼져,

 

"라마디의 악마 '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그 목에 2만달러 이상의 현상금까지 걸렸다고 합니다.


2008 년 사다르 시티 교외에서 1,920m 거리에서,

 

 로켓 발사기 병에 명중시킨 저격은

 

지금도 전설로 통한다고합니다.

 

카일은 2013 년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는

 

25 세의 전직 해병대 병사 에디 레이 루스의 사격지도 중,


  갑자기 정신질환을 일으켜 돌변하는바람에 

 

총으로 사살 되었다고해요.ㅠㅠ

 

 

제대 후 쓴 자서전 "네이비실즈 최강의 저격수 '는

 

 베스트 셀러가 되고,


영화'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아마 영화를 본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8. 860m의 거리에서 총알을 17m 굽혀

저격에 성공한 영국 해병대 '맷 휴즈Matt Hughes "


 

 

이라크 전쟁 초기 영국 해병대가 자랑하는,

 

사격의 명수 맷 휴즈 하사는 이라크 병사의

 

 전진을 막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초강풍이 불고 있어서

 

명령을 성공 시키려면 바람의

 

흐름을 완벽하게 읽어야 하는

 

 아주 열악한 상황이었다고해요.
 
이 악조건 속에서 휴즈는 총을 발사해요.

 

 스나이퍼 라이플 L96에서

 

발사 된 7.62mm 탄은

 

공중에서 17m정도 휘어서  이라크 병사의

 

가슴을 관통시켜 저격을 했다고합니다.


정말 만화같은 일이 벌어졋죠.


휴즈는 풍속과 풍향의 탄도를 계산하고, 

 

860m의 목표물을 저격하기 위해 총을

 

발사해야 할 방향을 산출해서 저격을 한건데...


이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한일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습니다..

 

 


 

출처:구글.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