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을 계기로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나갔습니다. 분단 과정을 거치면서 대한민국과 북한은 치열한 첩보 활동을 벌였습니다. 1950년 이후 남북한 곳곳에서 활동했던 간첩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였습니다. 이들은 정보 수집, 반정부 지하조직 구축, 요인 살해, 납치, 파괴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정확히 대한민국내에서 얼마나 많은 간첩이 활동했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간첩으로 오인당하거나, 정권의 필요에 의해 조작된 사건도 있기 때문에 검거된 간첩 숫자 역시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국정원 <검거 간첩 연도별, 기관별 통계> 등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검거된 간첩은 4495명에 달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북한에 침투시킨 요원은 생환자 포함 1만1273명입니다. 물론 북한이 보낸 남파 간첩의 경우, 검거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투입됐을 것으로 보입니다.

 


남파 간첩의 숫자는 주로 1950년대(1674명), 1960년대(1686명)에 집중돼 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절입니다. 1970년대에 검거 간첩은 681명으로 줄어듭니다.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했던 1980년 대에는 340명,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에는 114명의 간첩이 검거됐습니다.

 


표면적으로 1970년대 들어서 검거된 간첩이 줄어든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성과 중 하나인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전 세계적 해빙 무드에 맞춰 남북한의 관계도 다소 개선됐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976년 이후 간첩으로 자수하거나 체포, 사살된 사람은 약 700명인데, 그중 침투 단계에서 사살된 사람이 130여 명이었습니다. 검거된 직파 공작원은 10여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재일교포, 해외 취업 등을 통한 우회 간첩 사건이나, 월북자 가족 관련 간첩 사건, 납북 어부 간첩 사건 등이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지만 1974년 무려 47명을 검거해 3명을 사형시켰던 '울릉도 간첩 사건'은 재심 법원에서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게 41년만에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문제는 무죄를 확정받은 5명 가운데 3명은 이미 숨졌으며 한명은 1977년 사형이 집행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숱한 간첩 조작 사건의 진상이 더디지만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중입니다. 


 


황장엽이 간첩이 5만명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황장엽은 그런 얘기는 한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간첩을 잡는게 어렵지만 대한민국에서도 1년에 간첩 10여명, 협조자 3~5명 정도는 꼬박꼬박 잡히고 있다고 합니다. 국정원의 경우 간첩사건 하나당 5~8명 정도의 부서를 구성하며 2,3년씩 한 간첩을 추적합니다. 이 과정에서 도청, 미행 등 초법적인 감시수단, 주민등록 기록 등 정부 차원에서나 얻을 수 있는 개인정보를 동원합니다.

 

대한민국에서의 간첩신고는 국번없이 111(국가정보원), 112(대한민국 경찰청), 1337(국군기무사령부)으로 가능합니다. 간첩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내색하거나 떠보지 말고 간첩신고를 해야합니다. 다만 요즘에는 첩보전이 점점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이 간첩을 판별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점입니다.

 

1990년대 최대 간첩사건인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 당시 사건의 장본인은 거물 남파간첩 이선실(여·1916년생)이었습니다. 반세기에 걸친 남북 첩보사에서도 그는 가장 완벽했고, 또 드라마틱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약 30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공작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실수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선실은 1990년대 남파공작원 중 최고위급으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습니다. ‘남한 내 합법적인 북한 전위정당을 구축한다’는 목표로 일본에 건너간 뒤 1980년 재일교포 ‘신순녀’로 신분을 위장하고 남한에 침투했습니다. 이후 남한과 일본을 오가며 민중당 대표를 맡고 있던 간첩 김낙중,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 등 400여명을 포섭해 북한을 지지하는 대중정당과 지하당 구축을 시도했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1992년 이 사건을 조사해 이선실과 협력한 김낙중, 손병선 등 124명을 검거했습니다. 하지만 이선실은 사건이 불거지기 전인 1990년10월 17일경 강화도 해안에 대기 중이던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귀환하면서 공작원으로서의 30년 활동을 화려하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렇게 북한에 복귀한 이선실은 영웅이었습니다. 이선실은 북에 북귀 직후 자신의 30년 공작원 세월을 뒤돌아 봤는지 평양 김일성 동상 앞에 서서 한동안 깊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북한의 영웅이 된 이선실은 김정일로부터 공화국 2중영웅, 국기훈장 1급,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고, 북 통일전선부 산하 대남연락소 남파간첩 교육을 담당하며 공작원 양성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는 돌연 자신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당 경공업부로 배치됩니다. 경공업부 책임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였습니다. 이선실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오랜 기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동했던 그에게 있어서 공화국의 현실은 처참했습니다. 그녀가 경공업부에 배치됐을 때, 북한은 집단 아사사태를 야기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상부에 외자유치와 개혁개방을 주장했는데 김경희를 비롯한 지도부의 눈에는 곱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북한에 ‘심화조 사건’이 터졌습니다. 심화조 사건이란 1996~1999년 사이 발생한 사상 검증 대학살 사건입니다.  심화조 사건은 단순한 사상검증 사건이 아니고 김일성 사후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는 혼란기, 공포를 통해 권력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기획되었는데 해당 기간 동안 당의 본류에 벗어난다는 명목으로 당 인사 2만 5000명이 제거되었습니다. 

 

 

주동자는 공교롭게도 김정은 권력이양 시기 죽음을 당한 장성택 당시 당 부부장이었습니다. 장성택은 자신의 최측근 채문덕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을 앞세워 이러한 광란의 살육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영웅이었던 이선실은 심화조 사건 말미였던 1999년 ‘간첩’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미제의 간첩으로 남한의 지하조직을 파괴하고 내부(북한)를 와해시키기 위한 임무를 띠고 침투된 자.’ 

 


일평생 북한을 위해 남한의 지하조직을 공고히 한 공으로 영웅이 된 그녀의 혐의는 간첩이었고 이선실은 당시 여든을 훌쩍 넘긴 노파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처형이 아닌 고문 중 사망했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도 북한은 수많은 방법으로 무력도발을 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수많은 북한 무장공비들이 침투한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침투에 성공항 무장공비들은 산간 마을로 들어가 주민들을 모아놓고 김일성 찬양을 선전.선동 하면서 주민들을 당에 강제로 가입시켰습니다.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하면 우리나라 군경과 예비군의 강력한 소탕작전에 지리멸렬한 무장공비들은 육로를 통해 북상을 하였습니다. 당시 첨단무기를 사용했던 무장공비들이 남긴 무기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면도 무장공비(1970년)

 

 

1970년 안면도에 침투한 북한 남파 간첩선과 무장공비, 간첩단을 토벌하고 노획한 노획물입니다. 충남 서산 안면도 나루터에서 육군 병력이 북한 공작선을 기다리던 간첩을 생포하여 심문한 결과 거물급 간첩 두 명을 월북시킬 간첩선이 내왕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아군 지원병력과 경찰, 예비군 등으로 토벌대를 조직하여 침투를 시도하던 간첩선을 격침시키고 호위월북차 간첩선편으로 내려온 무장공비 3명을 전원 도벌하는 전과를 세웠으며 공비 토벌과 동시에 고정간첩단 21명을 일망 타진하였습니다. 당시 노획한 노획물은 공비가 공작선으로 사용했던 일제 야마하 모터보트, 공작금 6,3000, AK소총 2, 카메라, 무전기, 소련제 야간투시기, 신분증, 만년필, 권총과 실탄 등이었으며 또한 공비들이 타고온 간첩선에서 일본산 페니실린 2병이 발견되었는데 병에는 페니실린이라 쓰여있었지만 독약이었다고 합니다.

 

 임진강 무장공비(1983년)

 

 

1983년 임진강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를 사살하고 노획한 장비들입니다. 잠수복차림으로 남침한 3인조 무장공비들은 임진강 하구를 헤엄쳐 임월교 부근까지 침투, 철책을 절단하려다 다리 위를 지키고 있던 아군 초병에 의해 포착되었고 아군 초병은 수류탄을 던져 공비들을 전원 토벌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노획물은 체코제 기관단총과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 수류탄, 카메라와 필름 여섯 통, 아군 위장복 3벌과 사복, 라디오 등이었는데 이중에는 전도면도기와 우리나라 의료보험증까지 있었습니다.

 

 철원 무장공비(1992년)

 

 

노태우 정권이 막바지로 흘러갈 무렵인 19925월 철원에 침투한 3인조 무장공비를 사살하고 노획한 장비와 무기입니다. 공비들은 각자 사병과 장교 계급장을 붙인 우리나라 군복으로 위장하고 침투를 시도하던 중 백골부대 수색대에 걸려 선제사격 후 아군과의 총격전 끝에 두 명이 사살되었고 나머지 한 명도 도주중 사살, 3명 전원이 토벌되었습니다. 무장공비에게 노획한 장비는 국적 불명의 M-16소총 3, 미제 권총(콜트 45구경) 2, 브라우닝 하이파워 (캐나다산 권총) 1, 일제 비디오카메라 1대 등이었습니다.

 

 부여 정각사 무장공비(1995년)

 

 

1995년 남파간첩을 호위하며 월북하기 위해 부여 정각사 인근에 침투한 무장공비에게 노획한 장비들입니다. 10월 24일 공비가 나타났다는 신고를 접수한 경찰 112타격대는 하산하던 공비와 조우하여 총격전을 벌인 끝에 무장공비 김동식은 다리에 총상을 입어 현장에서 생포되었고 도주하던 공비 박광남은 3일 뒤 아군 토벌대(203 특공여단)에 의해 사살됨으로써 완전히 소탕되었습니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던 우리나라 경찰관 나성주 경사, 장진희 경사 두 분이 순직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노획한 장비는 단파 라디오와 난수표, 암호문 등의 장비와 독침, 브라우닝 권총 등과 공작금이였습니다.

 

 임진각 무장공비(1995년)

 

 

새벽 1시 35분 경 임진강 자유의 다리 인근에서 침투 중이던 무장공비가 국군 초병의 경계에 포착되었고 2시 20분 경 예의주시하던 초병의 감시에 포착되었는데 낮은 포복으로 절벽을 기어오르던 공비가 수류탄을 던지려 시도하자 두 국군 초병은 수류탄 두 발을 던지고 75발 가량의 총격을 가해 공비를 사살하였습니다. 공비에게 노획한 무기는 총번없는 M-16 소총과 탄창 7, 총탄 210, 미제 M-26 수류탄과 캐나다산 브라우닝 권총, 일제 캐논 카메라와 500mm, 300mm 망원 렌즈 등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중사계급장이 붙은 국간 위장복이 있었는데 며칠 후 잔당 한 명이 군사 분계선을 넘어 월북하였다고 합니다.

 

 정각사 무장공비(1995년)

 

 

1995년 부여 정각사 인근에 침투한 무장공비 박광남을 사살하고 노획한 물건들입니다. 남파간첨을 호위 월북하기 위해 부여 정각사 인근에 침투한 2인조 무장공비 김동식은 우리나라 112 타격대와 총격전 끝에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생포되었으며 경찰의 수색망을 피해 도주한 다른 무장공비 박광남은 3일 후인 10월 27일 아군 토벌대(203 특공여단)에 의해 머리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되었지만 연무대 국군 통합병원으로 압송, 치료도 중 사망하였습니다. 노획물은 한화 9만원과 미화 1,500달러, 브라우닝 소음권총 1, 서울 지하철 노선도, 전화카드 등이였습니다.

 

 괘방산 무장공비(1996년)

 

 

괘방산 무장공비 비트에서 발견한 노획품입니다. 실탄을 비롯하여 총번이 없는 M-16소총과 일제 토키나 300mm 렌즈, 필름 여덟 통이 노획되었는데 노획한 필름에는 아군 레이더부대를 비롯한 영동 화력발전소, 안인역 등 강원도 내의 중요 거점이 촬영되어 있었습니다.

 

강릉 무장공비(1996년)

 

 

강릉무장공비를 토벌하고 노획한 일제 전자장비입니다. 이 장비는 일제 후지논 야시경과 캐논 500mm 렌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