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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 8월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하였습니다. 북한의 거듭된 대남 도발로 인해, 국산 무기 개발 및 생산능력 확보와 같은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설립한지 1년이 조금 넘은 1971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을 통해 ADD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당시 한국의 제반 사정은 정말이지 열악했지만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무기를 12월 30일까지 만들라는 지시였습니다. 11월에 지시해서 연말까지 만들어오라는 무기는 바로 M2카빈 10정, M1 소총 2정, M1919A4 및 M1919A6 각 5정, 60mm 박격포 M19 4문, M26 6분, 경량 60mm 박격포 2문, 3.5인치 로켓포 4문, Mk.2 수류탄 300발, M18A1 20발, M15 대전차지뢰 20발이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지시였습니다.

 

 

 

하지만 ADD의 연구원들은 약 40일간 피땀 흘려 이것들을 진짜 만들어냈습니다. 지시를 받자마자 시제품 설계·제작에 착수, 정말 번개같이 작업을 진행해서 12월 14일에 시제품을 완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과제는 박격포 4문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ADD연구원들은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국산 병기들을 바라본 박정희 전 대통령은 환희 웃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우리가 만들어낸 병기들이야"라고 말하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2월 24일 기적적으로 만든 시제품 무기들로 실사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결과는 성공이였습니다. 사고나 고장 없이 바주카는 멀쩡히 발사되고 표적에 박혀 폭발했습니다. 그렇게 1차 번개사업은 성공하였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에 "1976년까지 최소한 이스라엘 수준의 자주국방 태세를 목표로 총포, 탄약, 통신기, 차량 등의 기본 병기를 국산화하고, 19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 정밀 병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2차 번개사업은 1차에 비해서는 다소 순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미군이 기술지원팀을 ADD에 파견하고, 이들을 통해 각종 기술 자료를 얻었고, 도면들도 FMS(대외군사판매)를 통해 입수하게 되어 일이 여러모로 순탄해졌습니다. 덩달아 연구원들도 활기를 띄고, 사업도 잘 굴러갔습니다. 그렇게 2차 번개사업까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러 질곡을 겪었지만 어쨌든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무기 국산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2012년에 번개사업이 다시 진행되었습니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이에 대한 대응용으로 긴급 소요제기 되어 사업 명칭 만큼이나 번개처럼 진행된 사업이였습니다. 연평도 포격 사건 직후 비밀리에 청와대의 직접 지시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 탐색개발 수준에서 번개사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후 공개사업으로 전환되어 '차기 전술유도무기' 라는 사업명칭으로 일반 획득사업으로 따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번개사업 중 탐색개발 이후 재 검토로 인하여 지속적인 소요제기가 나타난 분야는 그나마 새로운 사업으로 전환되어 계속 개발하게 되었고, 이로인한 방산개발이 이루어진 성과 자체는 인정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