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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용기를 실천한 진정한 군인 +1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에는 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용기를 실천한 진정한 군인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한 진정한 군인분들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이원등 상사

 

이원등 상사는 1935년 경상북도 경주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후 1959년 육군 공수특전단에서 공수기본 교육을 수료하고 1961년 미국 포트리 육군군사방위학교에서 낙하산 정비교육을 수료했습니다. 이원등 상사는 152회의 강하 기록을 보유한 특전인인 동시에 한국 최초의 스카이다이버였습니다.

 

 

그러던 1966년 2월4일 한강변에서 고공강하 훈련이 있던 날 제 1공수특전여단 소속이었던 이원등 상사는 조장으로서 6명의 교육생들과 함께  C-47 수송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원등 상사는 살을 파고들 듯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고도 4,500 피트 상공에서 강하했습니다. 그러나 찬 겨울 공기를 가르고  강하하는 쾌감을 채 느끼기도 전에 이원등 상사는 바로 앞에 강하하고 있던 조원 김병만 중사가 낙하산을 개방하지 못한 채 몸의 균형을 잃어 회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강 노들섬에 세워진 이원등 상사의 동상

 

당시 강하기록이 152회나 되는 베테랑으로 강하조장이었던 이원등 상사는위험에 처한 동료를 못 본 척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낙하산이 급작스럽게 펴지면서 이 상사의 팔이 줄에 걸려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급속도로

낙하하는 바람에 이 상사는 자세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이원등 상사는 지상에 너무 접근해 있었습니다. 결국 이원등 상사는  자신의 낙하산이 미처 산개되기 전에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한강의 2미터 두께의 얼음판 위로 떨어져 산화 했습니다.

 

 

 

 

  강재구 소령

 

강재구 소령은 1965년 한국군 1개 사단의 월남 파병이 결정됨에 따라 맹호부대 제1연대 제10중대장에 보직되었습니다. 그해 10월 4일 베트남으로 파병을 앞두고 홍천군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했는데 부임 전 제1군 부사관학교에서 수류탄 교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누구보다 수류탄의 위력과 유의사항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고 당시 강재구 소령이 신고 있던 군화

 

그런데 훈련 중에 한 이등병이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실수로 놓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손을 몸 뒤쪽으로 올린 상태에서 놓친 터라 수류탄은 불행히도 몸 뒤로 빠져 중대원들 쪽으로 굴러갔고 그 광경을 본 강재구 소령은 본능적으로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막았습니다. 수류탄은 매정하게 터져버렸고 강재구 소령은 중대원 100여 명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했습니다. 강재구 소령이 몸을 날려 수류탄의 파편을 막아준 덕에 주위에 있던 중대원들은 큰 부상이나 사망자 없이 전원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인호 소령

 

이인호 소령은 1966년 8월 11일 청룡부대는 투이호아 일대에서 해풍작전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3대대 정보장교였던 이인호 대위는 생포한 여자 베트콩이 제공한 정보에 의해 1개 소대를 이끌고 베트콩이 숨어있는 동굴을 수색하던 중 캄캄한 동굴 속으로부터 적의 수류탄이 날아왔습니다.

 

*해풍작전중 동국수색을 하는 이인호 소령의 전사직전 모습

 

*이인호 소령 장례식


하지만 이인호 대위는 침착하게 수류탄을 재빨리 주워 던져 베트콩 5명을 사살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날아온 또 하나의 수류탄을 처치할 겨를도 없이 폭발할 것을 직감하자 이인호 대위는 부하들에게 "모두 엎드려!" 라고 고함치며 터지는 수류탄 위에 자신의 몸을 덮쳐 버렸습니다. 이인호 소령은 그렇게 자신을 희생해 대원들의 생명을 살렸습니다.그의 살신성인 정신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고 전군의 귀감이 됐습니다. 이후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고 대위에서 소령으로 특진했습니다.

 

 

  김도현 소령

 

김도현 소령은 1992년 공군사관학교 44기로 입교하였고 졸업 후 F-5의 전투조종사로 복무하다 2005년 2월부터 블랙이글스에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2006년 5월 5일, 공군 수원 비행장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블랙이글스의 에어쇼가 있었고 김도현 소령은 A-37B에 올라 이륙하였습니다. 하지만 11시 51분 경 각종 비행을 선보이다 나이프 엣지(Knife Edge)라는 기동을 시도하였는데 김도현 소령의 기체는 상승하지 못하고 활주로로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김도현 소령은 탈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콕핏에 남겨져 오른손에 조종간을 쥐고 왼손에 스로틀 레버를 잡은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김도현 소령이 끝까지 콕핏에 남았던 이유는 만약 자신이 탈출하고 기체의 방향이 약간이라도 틀어지면 관람석에 앉은 천여 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3천여 명의 관객들이 크게 다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상희 대위

 

이상희 대위는 당시 제1전투비행단 소속으로, 정식으로 파일럿이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밟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 12월 13일 오후 3시경 광주 상공에서 F-5A 4번기에 탑승하여 훈련 비행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상공에서 훈련비행을 마친 뒤 착륙하려다 동료가 몰던 다른 공군기와 충돌했습니다. 상대 공군기에 타고 있던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비상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희 대위는 덕흥 마을의 밭에서 전투기와 함께 산화했습니다. 이후 기체의 잔해에서 회수된 블랙박스 기록에 따르면 마지막에 탈출을 결심했으나 민가를 확인하고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 “전방에 마을이 보인다. 탈출 불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장렬히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산화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마을 주민은 충돌한 비행기 중 한대가 추락지점을 찾듯이 방향을 바꿨으며 만약 그대로 추락했더라면 민가를 덮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한주호 준위

 

한주호 준위는 교육훈련대에서 18년간 교관경력을 비롯해 특공대 팀장, 교육훈련반장, 특임대대 지원반장 등을 거쳤고, 2000년 준위로 임관했습니다. 청해부대원들은 항상 다른 후배보다 먼저 앞장서서 작업하는 한주호 준위에게 젊은 오빠라고 불르며 잘 따랐습니다. 그러던 2010년 3월 27일 한준호 준위는 천안함 피격사건 하루 뒤 새벽 백령도로 급히 파견됐습니다.

 

 

당시 한주호 준위는 잠수요원으로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현장의 상황을 둘러보고 누구보다 바다의 무서움을 잘 아는 그였지만 깊은 찬 바다 속에 갇혀 있을 후배들을 생각하면 잠시도 지체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여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내가 들어간다" 짧고 간결한 한마디와 함께 구조작전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함수 부분에서 탐색구조작업을 펼치다 잠수병으로 실신해 미 해군 구난함에서 치료를 받던 중 오후 5시쯤 순직하셨습니다. 구조작업 전에 한주호 준위는 동료들과의 통화에서 '오늘 안으로 모든 실종자들을 책임지고 구조해내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