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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중국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했다. +1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쵸프가 후계자가 되면서 사건은 시작됩니다. 흐루시쵸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스탈린 격하운동이었습니다. 즉, "독소전은 스탈린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어서 겨우 이겼던 전쟁이다"라고 말하며 흐루시쵸프는 스탈린과의 관계를 청산하려 했습니다.

 

 

이에 중국의 마오쩌둥은 흐루시쵸프에 대해 '수정주의자', '위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흐루시쵸프가 친서방노선을 택하면서 비난의 강도는 더 해졌습니다. 당시 중국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 중국 수뇌부들은 반서방노선을 국가의 기조로 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흐루시쵸프가 예전에 스탈린과는 달리 중국에 대한 지원을 점점 줄여나가면서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이 소련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하는데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에서 보여준 소련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습니다. 소련은 중국을 지원하는 척 하면서 원조를 해주지 않았고 반대로 인도에게는 전투기와 군사고문을 파견해주면서 지원해주며 중국을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여기에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의에서 중국대표는 소련에게 '반레닌주의자'라며 비난의 강도를 높였는데 이는 공산주의의 양강이 적으로 변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러던 도중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진원지는 우리나라와 멀지 않은 우수리강의 다민스키섬이었습니다.

 

 

1969년에 우수리강에서 큰 홍수가 났는데 이로 인해 강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중국과 소련의 국경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초부터 자존심 싸움을 벌였던 중국과 소련의 국경수비대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주먹다짐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총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자칫 전면전으로 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계속되는 주먹다짐에서 소련 국경수비대에게 밀리자 특수부대를 투입하는데 하필 이 특수부대가 가져간 무기가 곤봉이었습니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곤봉을 무기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중국 특수부대는 곤봉을 가져다가 소련군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대로 소련군의 눈에는 곤봉을 든 중국군이 무기를 든 적군으로 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소련군은 다음날부터 권총으로 중국군에 응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보다못한 중국은 1969년 3월 12일 3개 소대를 통해 2개 소대가 지키고 있었던 소련 국경수비대에 선제공격을 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과는 중국군 30명이 사망하고 중국군은 철수하게 됩니다. 당시 소련의 사망자는 절반수준인 14명이었습니다. 당시 중국군은 보병이었지만 소련은 기계화사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소련은 기다렸다는 듯 T-62전차, BM-21 다연장 로켓등을 통해 중국군에게 폭탄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당연히 결과는 소련의 압승. 중국군이 1천명 전사, 2천명이 부상을 당했으나 소련은 240명이 전사하는데 그쳤습니다.

 

 

당시 중국은 보병으로 싸운 반면 소련은 앞선 화력과 기술을 통해 병력이 아닌 우수한 무기로 중국을 압도했습니다. 애초에 중국을 눈앳가시로 봤던 소련은 아예 중국서부인 신장위구르지역까지 군대를 파견해 중국군을 섬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쯤에서 소련에서는 아예 중국을 지도에서 지우자는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일환으로 중국의 수도 북경에 핵을 떨어뜨리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이를 알아챈 중국 수뇌부들은 수도를 북경에서 충칭으로 옮기려 했고 실제로 충칭에는 당시 소련의 핵공격을 대비한 핵 방공호시설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은 영토를 더 차지하려다가 멸망할 수도 있는 위기에 몰렸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운이 좋았습니다. 그때 체코에서 소련에 대한 대대적인 반소운동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에 소련은 기존 노선을 바꿔 중국이 아닌 체코로 총부리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후 중국과 소련은 외교적 분쟁을 계속 벌이다가 90년대에 국경협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