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불리하다 보니 이기자는 생각 없이 대충 뒀는데 이겼네요

-중국 구리 九단에게 대역전승을 거둔 직후 인터뷰-

 

이세돌은 조훈현, 이창호에 이은 세계 바둑 최강의 계보를 이어가는 바둑기사입니다. 세계대회 우승 횟수가 이창호 다음으로 많고, 12세에 입단하여 한국 프로 기사 중 최연소 입단 4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995년에 입단하지만 2000년부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세돌은 2000년에 32연승이라는 역대 연승 3위 기록을 세우며 '불패소년'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창호의 바둑이 느긋하면서도 안정적인 계산으로 끝내기를 통해 상대를 제압하는 스타일이라면, 이세돌은 압도적인 수읽기를 통한 흔들기로 난전으로 끌어들여 상대를 혼란시키고 압살해버리는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2016년 3월 9일부터 15일까지 구글 딥마인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대국을 치렀습니다. 알파고는 이세돌 이전에 2013-2015년 중국 프로 기사이자 유럽 바둑 챔피언인 판 후이(2단)과 대국을 하였는데 5-0으로 알파고가 이겨버렸는데, 인공지능이 현역 프로 바둑기사를 이긴 건 사상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세돌 본인은 물론 커제나 이창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바둑기사가 판 후이와의 대결 양상을 기준으로 이세돌의 5-0 완승 또는 4-1로 이길 것을 자신했으나, 판 후이와의 대결 이후 알파고의 무서운 성능 향상으로 9일에 열린 1국에서 알파고가 186수 만에
불계승, 10일에 열린 2국에서도 알파고의 불계승으로 이세돌이 2패를 당했고, 12일에 열린 3국 역시 초읽기에 들어가는 접전 끝에 알파고의 176수 불계승으로 결국 3-0이 되며 알파고의 승리로 끝이 나버리며 인공지능에 압도당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바둑계의 대사탄으로 간주되던 이세돌이 한낱 기계 앞에 대굴욕을 맛보며 처참하게 박살나는 모습에, 이 때까지만 해도 바둑계 전체는 물론 인류가 인공지능 앞에 허무하게 몰락하는 게 아니냐는 비관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사상이 대한민국 전체를 강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4국에서 드디어 이세돌이 알파고를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4국에서 불리한 형세에 들어간 알파고가 승률이 낮아질수록 더더욱 잦은 실수를 하였고 이세돌은 1개 남은 초읽기로 1시간가량 버티는 대혈전 끝에 알파고를 이겨 불계승을 거두었습니다. 알파고가 팝업창으로 "AlphaGo resigns. The result "W+Resign" was added to the game information"이라는 메시지를 보이며 패배를 선언하였고 해설진들은 78수를 신의 한 수라고 평가했습니다.

 


알파고와 바둑을 하면서 오히려 기력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알파고와의 대국을 중계하던 프로 9단 해설진들이 알파고의 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세돌은 표정에서 동요를 보이며 알파고의 수를 이해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세돌이 세 판 내리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계를 제외한 인간 중에서는 최정상급의 자리를 지키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대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인공지능(AI) 알파고가 27일 세계 바둑 행킹 1위 커제(柯潔) 9단과의 대국을 마친 뒤 바둑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커제9단은 사실 이세돌 9단이 지난해 알파고와 첫 번째 대국에서 패배하자  "알파고가 이세돌마저 꺾었지만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가 하면 두 번째 대국 패배 뒤에는 "인류 대표의 자격이 없다"며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알파고에 완패했습니다.

 

 

이에 따라 알파고의 전적은 이세돌 9단과 5번기, 연초 인터넷 대국 60판, 커제 9단과 3번기, 단체 상담기까지 합쳐 모두 68승 1패로 남게 됐습니다. 알파고가 지난해 1월 네이처 논문으로 정식 데뷔하기 전 판후이(樊麾) 2단에게 5전 전승을 거둔 것까지 합하면 73승 1패입니다. 그렇게 알파고에 유일한 패배를 안긴 주인공은 이세돌 9단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전 세계 사람들의 스포츠, 바둑

그 중에서도 한국 바둑의 영웅 조훈현에 대해 아라보자


쓰고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1편 2편으로 나눠 보려고해...

한번에 쓰고 싶었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면 여러분들이 읽기에도 부담될 것 같고

쓰는 나도 힘이 들어서..ㅋㅋ

어쨌든 시작한다!!


 

 

젊은시절  여자 깨나 울렸겠다


조훈현은 전남 목포 출신의 53년 생으로 올해 나이 64세를 맞은 노장 바둑기사야


조훈현의 어린시절부터 거슬러 올라 가보자면


조훈현의 아버지 조규상씨는

바둑을 즐겨두던 사람이었어 그리 잘 두는 편은 아니었다고해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 7~8급 수준이었다고 하니까


당시 조훈현의 집은 2층집이었는데 

2층은 아버지가 쓰시던 서재가 있었어

아버지는 조카사위와 바둑을 두며 담소를 즐겼는데

서너살 무렵부터 조훈현은 아버지가 바둑을 두는걸 옆에서 지켜보며 바둑을 배웠다고 해

이때까지도 아버지는 한 번도 제대로 바둑을 가르쳐 준적이 없었어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와 조카사위가 바둑을 두는데

4살배기 조훈현이 아버지에게 거기에 두면 안된다고 훈수를 둔거야

아버지는 그말을 무시한 채 그냥 두려고 했던 곳에 두었고

나중에 바둑이 끝난 후 복기(바둑이 끝나면 수순을 거슬러 올라가며 패인을 찾아 연구하는 것)

를 하며 아까 어린 조훈현이 훈수를 두었던 곳이 큰 패착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돼


어깨 너머로 배운 4살배기 놈이 그정도 수읽기를 했다는 것에 아버지와 조카사위 모두 놀랐지


그날 이후로 조훈현의 아버지는 조훈현에게 정식으로 바둑을 가르쳐주었고

바둑판 앞에서 만큼은 어린아이 답지 않게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며 

바둑을 재밌어하는 아들을 보며 대견해했어 


어느새 비록 접바둑이지만 아버지를 이길 정도가 된 조훈현은

자신을 기원에 데려가 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라댔고

조훈현의 사촌매형인 서울대출신 고등학교 수학교사 박승곤이라는 사람이

조훈현을 기원에 데려가야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아버지, 사촌매형과 함께 어린 조훈현은

당시 목포에서 가장 유명한 기원인

'유달기원'을 찾아가지


아버지가 어린 조훈현을 기원에 데려가기 싫어했던 이유는

당시 기원은 내기바둑꾼들이 우글대는 담배연기 자욱한

시장바닥보다 더한 질 안 좋은 곳이었거든...

아마도 아버지는 조훈현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을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거야


어쨌든 5살배기 조훈현은 그자리에서

유달기원의 원장과 9점 접바둑을 이겼고

원장은 조훈현에게 특별입장을 허락해 주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기원은 어른들이나 들락날락하는 어른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어린 조훈현도 언제든 기원에 와서 

바둑을 둘 수 있게끔 특별하게 허락을 해 준거지


그러던 중 갑자기 조훈현의 집안의 가세가 기울게 되었고

조훈현의 아버지는 

당시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가 살던 큰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가세가 이렇다보니 아버지 조규상은 바둑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던

막내 조훈현을 반드시 바둑으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에 

시장에 나가 아내와 함께 야채장사를 하며

장사가 끝나면 아들을 데리고 매일같이 당시 서울의 최대기원이었던

명동의 '송항기원'에 출퇴근을 시키게 돼

이때는 아직 한국기원이 만들어지기도 전이라

故조남철 9단이 운영하던 송항기원이 서울에서는 가장 유명한 기원이었어

 

 

 

 

故조남철 9단


잠시 故조남철 9단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조훈현이 한국바둑의 세계적 입지를 넓혔다면

조남철은 한국바둑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초대 국수(國手)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기사이자 일본 최초의 한국인 프로기사야

한국전쟁 후의 혼란했던 한국에 바둑보급을 위해 힘썼던 분이야

한국전쟁에도 참전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 자신이 운영하던

기원이 포탄에 맞아 박살이 나기도 했어

오늘날 한국기원을 설립하기도 한 분이고 

한국에 프로기사 제도와 바둑용어 정립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훈현과 같은 시대의 

프로기사인 김인, 하찬석, 윤기현 또한 

모두 조남철의 문하를 거쳤어

한국 바둑계에서 이룬 업적으로만 따지자면 

조훈현, 이창호도 그 누구도 조남철의 발끝도 못 쫓아가지

아무튼 대단한 분이야


조훈현의 아버지는 당시 그런 한국 바둑의 최강자 조남철에게

조훈현의 지도대국(접바둑으로서 고수가 하수의 기력을 알아보고 지도를 해주는 것)을 부탁하고

목포에서 올라온 바둑신동이 있다는 말에 조남철은 흔쾌히 지도대국을 승낙하지


조남철은 한 눈에 조훈현의 탁월한 기재(바둑을 두는 재능)를 알아보았고

그때부터 기원에 다니며 조남철의 밑에서 바둑을 배우게 돼


그러다 조훈현은 9세의 나이에 

제 16회 한국 바둑 프로입단대회를 통과하고

한국 프로기사로 당당히 입단을 하게 된다

이 기록은 세계 최연소 프로입단 기록으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어

보통 프로바둑계에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설이 있는데

10대에 프로입단을 하면 대성을 하고

20대에 프로입단을 하면 평범한 기사로 남는다는 거야


이 말은 10대에 프로입단을 하는 것이

엄청난 기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도 엄청 빠른거지만 조훈현은 그것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프로기사의 레벨에 오른거야

 

결국 조남철은 조훈현의 아버지에게 일본유학을 권유하게 돼

당시 50~60년대 한국은 전쟁 후의 격동의 시기였고 

바둑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반이 전무했어

조남철 본인도 일본에서 바둑을 배운 뒤 

일본에서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조훈현 정도의 기재를 가졌다면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필수라며 조훈현의 아버지를 설득하지


조남철과 같은 선구자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조훈현도 유학을 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럼 불세출의 영웅 

조훈현도 조훈현의 내제자인 이창호도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지..

물론 이건 가정이니까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어ㅋㅋ

어쨌든 여기서 조훈현의 아버지는 조훈현을 일본으로 보내는 결단을 내리게 돼


그리고 조훈현은 혈혈단신 10세의 나이로 홀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조훈현의 부모는 한국에서 일을 하며 

조훈현의 유학비를 대야 했기 때문에 함께

이민을 갈 수가 없었어...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조훈현의 집안 사정이 좋지 못했거든

그래서인지 조훈현의 일본유학이 결정되자 조선일보에서는

흔쾌히 조훈현의 항공료를 전액 지원해준다


조훈현은 당초 조남철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기타니9단의 가문의

내제자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일본 바둑계에서 기타니9단과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던 세고에 겐사쿠9단의

내제자로 들어가게 돼


故세고에 겐사쿠 9단


세고에 겐사쿠9단은 생전에 단 3명의 제자만을 거뒀어

세고에 겐사쿠 문하의 또다른 유명 기사로는 오청원9단과 하시모토9단이 있는데

이 둘은 일본 바둑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전설들이야

그 중에서도 오청원 9단은

약 20년 간 일본 바둑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엄청난 사람이야

당시 일본은 한,중,일 중 그 상대가 없을 정도로 바둑 강국이었으니

여기서 20년간 최강자라면 역대급 바둑 기사인거지

결국 세고에 겐사쿠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최강자를

모두 키워낸 인물이 돼


아무튼 조훈현이 일본에 갔을 때 

세고에 겐사쿠는 이미 70세를 넘긴 노인이었는데

제자로 받아달라는 조남철의 부탁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조훈현과 시험삼아 지도대국을 두어 본 뒤 기재를 보고 깜짝놀랐다고 해

그 당시 세고에9단은 나이가 너무 많아 은퇴한 뒤

제자를 두지 않고 휴식기를 취하는 중이었던 터라

조훈현을 거둘 생각이 없었으나

조훈현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거지


같은 시기 당초 조훈현이 들어가기로 내정되어 있었던 기타니 도장에는

세 살 아래의 조치훈이 바둑을 공부하고 있었어

일본유학이 결정되었을 때 부터 사실은 일본 최고 최대의 도장인 기타니 도장에

들어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조훈현이 만약 세고에를 만나지 못하고

기타니 도장에 들어갔다면 조훈현과 조치훈, 

쌍조의 만남이 좀 더 빨리 이루어 졌을지도 몰라

조훈현과 조치훈은 나중에도 다루겠지만 

젊은 시절 한국의 최강자와 일본의 최강자로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거든


세고에9단은 

한국에서 온 어린 조훈현을 거둬 바둑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친아들처럼 키워

정말 자식처럼 키웠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세고에는 후에 조훈현이 병역문제로 한국으로

떠난 뒤 자택에서 목을 메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의 유서에

조훈현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기뻤다고 밝혀...


이게 무슨 뜻이냐면

바둑은 본래 중국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걸 일본에 전파해준 것이 그 옛날 백제 사람들 이었거든

천년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어쨌든 세고에는 이것이 일본이 한국에

은혜를 입었다고 보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어떤 면으로는 침략으로 인해

한국에 큰 피해를 가져다 준 일본의 국민으로서

마음의 빚 또한 지고 있었다고 봐


어쨌든 그렇게 세고에 문하에서 온갖 허드렛일과

바둑공부,학업에 매진하여 일본 유학 3년만에 일본기원의 프로입단대회 또한

통과하고 당시 일본 최연소 입단기록과 타이를 이루게 돼

당시 나이는 13세...

정말 엄청난 재능이지

그리고 매해 승단대회를 통해 단수를 올려가게 돼




그렇게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실력을 키워가던 중 

조훈현의 바둑 인생 두번째 스승인 '후지사와 슈코9단'을 만나게 된다

세고에 9단이 어린 조훈현에게 진정한 바둑의 의미와 정신적 자세를 가르쳤다면

조훈현에게 바둑의 기술과 실전싸움을 가르친 것이 바로

이 후지사와 슈코 9단이야

 

 

故후지사와 슈코 9단


정상급 바둑기사들은 보통 한두개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후지사와 슈코는 '괴물' '괴물 슈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정상급 기사였어

마르고 날렵한 외모와는 다르게 바둑에서는 엄청난 힘을 구사하며

빠른 계산과 전투로 상대를 압살해버리는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지


우연찮게 슈코의 연구실에 들렀던 조훈현은

후지사와 슈코를 만나게 되고 한국에서 유학온 조훈현의 기재를 본

후지사와 슈코는 빠르고 정확한 조훈현의 솜씨에 감탄하게 돼

슈코는 원래부터 속기를 강조한 '속기파'였거든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늘 속기에 대해 강조를 했다고 해

빠르게 두어야 바둑에 대한 감이 날카로워 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어


그런데 조훈현은 빠르게 두면서도 정확하게 두었기 때문에

그런 그가 반하지 않을 수 없었지

조훈현은 이후로도 후지사와의 연구실에서

바둑을 공부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돼


한 번은 조훈현이 후지사와의 연구실에 찾아간 날

연구실의 멤버였던 아베 요시테루 당시 6단과 만나

당시 조훈현은 2단이었는데 이때가 아베와 명인전 예선에서 만나 이긴 후 였어

조훈현에게 패한 아베가 먼저 내기바둑을 청한 거야

그냥 두면 재미없으니 돈을 걸자는 거였어

하지만 조훈현은 내기바둑을 뒀다간 세고에 스승님께 혼난다며

내기바둑을 거절해

재밌는 건 이 내기바둑을  옆에서 종용한 사람이 바로 후지사와 슈코라는 거야

슈코는 옆에서 조훈현에게

'선생님이 아실리 없으니 걱정말고 둬라'라는 식으로

조훈현의 등을 떠밀어

조훈현의 바둑에 매료되어 있던 후지사와는 

그런 장난으로 조훈현의 실력을 더 보고 싶었던 거지


마지못해 조훈현은 아베와 백엔짜리 내기바둑을 두게 되고

앉은 자리에서 6판을 내리 발라버려

당시 프로 6단이었던 아베는 2단밖에 되지않는 조훈현에게

치욕적인 6연패를 당하고 6백엔을 주게 돼

그런데 결국 이게 세고에 스승의 귀에 들어가게 된거야

6연패를 당한 아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걸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녀

조훈현이 엄청나다는 소문을 내고 다닌거지


첫번째 스승인 세고에는 성품이 강직하고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후지사와는 괴짜에다 털털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어


이 소식을 들은 세고에는 진노했고 당장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조훈현을 집에서 내쫓아버려

그따위 정신상태로는 성공할 수 없으니 한국으로 꺼져버리라는 거야

조훈현은 울고불고 빌어봤지만 결국 쫓겨나게 되었고

도쿄거리를 전전하던 조훈현은

한국식당에 들어가 설거지든 뭐든 할테니 받아달라며 부탁을 해


그렇게 접시닦이로 2주일 간 식당에서 일을 하던 조훈현은

주위 바둑계 인사들이 세고에 9단을 거듭 찾아가 조훈현의 입장을 대변해주며

내기바둑의 의도가 불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고

결국 세고에 스승은 의지를 꺾고 조훈현을 다시 집으로 불러들여


그 내기바둑 6판으로 큰 교훈을 얻게 된

조훈현은 살면서 다시는 내기바둑을 두지 않았다고 해

그 이후로 조훈현은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일본 바둑계의 신성으로 거듭나게 되었지


하지만 스승 세고에 9단에겐 근심이 있었어

그건 조훈현의 군대문제였지

일본과 달리 징병제였던 한국의 사정상

조훈현의 입대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어

물론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군대는 다녀와야 하는 것이지만

이제 막 실력이 만개하고 있는 제자를

3년씩이나 군대에 보내는 것은

제자의 실력을 썩힐 수 있다는 걱정때문이었지

스승 세고에 9단은 입대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결과는 헛수고였고 결국 1972년 군입대 문제로

조훈현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세고에 9단은 이때문에 식욕까지 잃고 몸저 눕게 돼

얼마나 조훈현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지


결국 조훈현의 입대 후 4개월 만에 스승 세고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에 두가지를 당부하는데

첫번째는 늙은 몸으로 더이상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않아 떠난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어...


그리고 위에서 말했다시피

조훈현에게 바둑을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했고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 기뻤다고 밝혔지


세고에 9단의 정확한 자살 원인은 오직 본인만이 알겠지만

애제자의 군입대와 그의 진정한 성공을 지켜보지 못하게 된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








자 여기까지가 1편이야

 


 


 

 

타임머신이 있다면 1750년대로 돌아가 보자


전화는 물론 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곳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소리로 고함을 지르거나 하늘로 대포를 쏘아야 했었다타임머신을 타고  시절로 도착 하였다면  사람을 데리고 2015년으로 돌아오자이제  사람을 데리고 서울 한복판을 같이 걸어보자많은 사람들은 스마트  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으며 길거리에는 자동차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고 온갖 네온 사인들이 눈을 부실 정도로 즐비하다.

 

1750년도에서   사람의 반응은 어떨까?

아주 놀랠까아마 너무너무 충격적이라 죽을 수도 있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 사람은 1750년대로 돌아갔지만 질투심에 자기도 똑같이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사람을 놀래 키고 싶다타임머신을 타고 1500년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1750년으로 데리고 왔다.

 

1500년도에서   사람의 반응은 어떨까?

중세 시대의 발전을 보고 물론 놀랠 꺼다하지만 죽을까아마 놀래서 죽지는 않을  이다.

 

이것이 바로 수확가속의 법칙 (Law of Accelerating Returns )이다시간이 갈수록 기술발전 속도가 가속이 붙는 법칙이며 미국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레이몬드 커즈와일 (Raymond Kurzweil) 의해 제시 되었다그에 따르면 21세기에 이룰 과학 발전은 20세기에 이룬 과학발전보다 1000 가까이 된다고 한다만약 그가 맞는 다면우리가 만약 지금 15 뒤인 2030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다면 우리는  1750년에서  사람과  같은 반응 2030년을 보고 너무너무 놀래서 죽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들은 에이 고작 15년후인데  세상이 바뀐다고 울부짖겠지만 시간적 정서적 여유가 있는 여러분들이라면 천천히  따라 와라.


 

우리가 과학발전에 있어 쉽게 착각하는 3가지 이유이다.

 

1)      우리는 역사적인 발전을 생각할  직선적인 발전시간을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설명을 했듯이 과학 발전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직선이 아니라 포물선 이다. 1500년도와 1750년도 사이의 과학 발전 속도와 1750년과 21세기 초반의 사이의 과학 발전 속도는 확연히 다르다.

 

2)      과학 발전 속도에 있어서 S-Curve 등한시 한다.

 

 

 

커브에는 3가지 단계가 있다.

1.      느린 성장

2.      빠른 성장

3.      성숙 완료

 

처음으로 인터넷이 소개  것은 20세기 후반이었으며, 1995년과 2007 사이에 마이크로 소프트구글페이스북  인터넷을 기반으로  사업이 급성장 하였으며 스마트 폰으로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다이것이 2단계 빠른 성장의 단계이다하지만 2008년에서2015년사이에는 체감상으로  발전을  느낀 것은 사실인데 우리가 3단계를 지나 1단계에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우리는 이제 2단계로  준비가 되었으며 눈부신 과학발전을 앞두고 있다.

 

 

3)      우리는 미래의 변화에 있어서 역사적인 경험을 토대로 예측한다.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수 있다고 하면  ㅁㅈㅎ!  먹을 것이다왜냐하면 지구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사람 아니 모든 생물들은  죽었으니까하지만 같은 맥락으로 비행기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날지 못했다지구가 평면인줄 알았다하지만 지구는 둥글다.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알았다하지만 지구는 우주에서 먼지도 아니다.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으로 가는 

 

인공지능 (A.I) 대해서 많이 들어는 보았을 것이다. A.I 대해서 다룬 책이나 영화도 많았지만 사람들이 A.I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많이들 착각하는 요소에 대해서 알아보자.

 

1)      A.I 영화에서 허구의 대상으로 많이 접하였다.

스타워즈터미네이터, A.I 그리고 스페이스 오디세이 까지 영화에서 허구나 상상의 대상으로 많이 접하였다 미래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로봇으로 접하였다.

 

2)      A.I 범위가 넓다

우리가 흔히 쓰는 계산기부터 자동주차 기능 까지 모두다 A.I 라고 말할  있다우리는 실제로 A.I 일상 생활에서 많이 다루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그럼이제 A.I 로봇으로 그만 생각하자로봇은 껍데기 이며 A.I 로봇의  로봇의 운영가동 시스템이다.


 


A.I 종류

 

1)      Artificial Narrow Intelligence (ANI)


 

 

 

A.I 사이에 narrow,  활용범위가 좁은 A.I이며 Weak A.I라고 부르기도 한다오직 하나의 기능밖에 수행할  없다이미 세계 체스 챔피언을 이긴 A.I 등장하였는데 A.I에게 바둑을 두라고 한다면 너가 체스 한판 하자!” 라고 명령할 때까지  어떤 기능도 하지 않을 것이다.


 

2)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


 

 

 

A.I 사이에 general 붙었다이제 보통 사람이   있는 문제 해결생각이해그리고 일상적인 대화도 가능하며 ANI보다 만들기 아주 아주 어렵다한번 등장하면 인간의 많은 부분들을 대체  것이다.


 

3)      Artificial Superintelligence (ASI)

 

 

 

A.I 사이에 super 붙었다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지능을 훨씬 능가하며인류가 영생할지 아니면 멸종할지 달려 있는 존재이다.

 


 

현재 A.I 발전 상황

 

우리는 지금 ANI 세계에 있으며 여러 종류가 있다.

 

1)      자동 주차 시스템

2)      스마트 

3)      이메일 스팸 필터

4)      구글 번역

5)      자동비행 시스템

6)      페이스북 뉴스피드

7)       챔피언 

 

 외에 수천 가지가 있는데 우리 일상생활에 완벽히 융화되어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ANI에서 AGI 가는 

 

우리 인간은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높은 빌딩을 짓고우주로 인류를 쏘아 보내며그리고 우주탄생의 비밀도 밝혀 냈다우리의 뇌는 현재까지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뇌로 컴퓨터를 발명하였다


복잡한 곱셈을 한꺼번에 많이   있는 컴퓨터만들기 쉽다하지만컴퓨터 밑으로 지나가는 바퀴벌레를 감지 하여 우왕 일베충이다사진 찍고 일베가야지 케케케” 이렇게 반응하는 컴퓨터를 만들기는 아주 어렵다현재 Google에서는 수십억 달러를 AGI 발명하는데 쏟아 붙고 있는데 언어 번역이나 금융 상황 예측  계산을 요구하는 시스템 개발보다 우리가 생각을 하지 않고 힘이 들지 않는 시각움직임그리고 주위를 자각을   있는 시스템 계발에 힘을 싣고 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우리는 밑의 사진을 보고


 

 

 

아하 바위구나”  인식 하지만 컴퓨터가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2차원적인 하얀색회색 그리고 검정색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ANI에서 AGI 발전 시킬수 있을까?


 

1)      컴퓨터 계산 능력의 향상

 

 

 

인간의 뇌가   있는 계산 능력만큼 컴퓨터 계산 능력을 향상 시키는 방법이다현재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1000 가치의 컴퓨터가 인간의  능력의 1/1000 정도에 불가 하지만 2025 10년이면 인간의 뇌의 한계능력에 맞먹는 컴퓨터가 등장한다첨부된 사진은무어의 법칙이며 18개월의 주기로 마이크로 칩에 저장할  있는 데이터의 양이 18개월 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법칙이다하지만 만약 황의 법칙이 진실에  가깝다면 2025년이 아니라  빨리 뇌의 한계능력에 맞먹는 컴퓨터가 등장  것이다.


            

2)      영리하게 만들기

 

1.      뇌를 복사한다.

 

 

 

시험   전교 1 하는 아이가 옆에 앉아 있다답안지가 노무노무 선명하게 보인다답을 그냥 배겨 (복사해버린다이와 같이 뇌를 스캔하여 3-D 모델로 재탄생 시켜 컴퓨터와 융합시켜 버리는 방법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까지  있을까인간의 뇌에는 대략 100조개의 신경세포가 있고편형동물의 뇌는 302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는 그것 조차 모방하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지수의 힘을 무시하지 말라지렁이의 뇌를 정복하면쥐의 뇌로원숭이의 뇌로그리고 인간의 뇌를 정복할 때까지 얼마  걸릴 것이다.


 

2.      진화를 이용한다.


 

 

 

이제 전교 1등의 답을 배기지 말고 전교 1등의 공부 방법을 따라 해보는 방법이다적자 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 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환경에 가장  적응 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 남는다는 의미를 가진 문구 인데 컴퓨터에 적용을 시킬 수가 있다컴퓨터집단들에게 어떤 업무가 주어 지고 가장  처리 능력이 빠르고 성공적인 컴퓨터들을 모아서   능력을 섞어  성공 적인 컴퓨터를 만들어 낸다자동화  평가와 번식(?) 통해 가장 성공적인 컴퓨터만 남게 되며 퇴화된 컴퓨터는 사라지게 된다.


 

3.      컴퓨터에게 모두 넘겨줘라.


 

 

 

자신의 능력을 향상 시킬  있는 방법만을 연구하는 ANI 만들어 내는 것이다조금 있다가  설명을 하겠다.

 

 

 

 

이제 우리가 가까운 미래에 AGI 개발 하였다고 하자. AGI 앞서 설명 했듯이 보통 사람이   있는 문제 해결사고이해그리고 일상적인 대화도 가능한데 인간보다 이점이 많다.

 

하드웨어적인 측면

 

반응 속도


우리가 불을 만지면 뜨겁다는 반응이 즉시 오지 않고 아주 조금 있다가 오는데 신경세포의 전달이 120m/s 움직이기 때문이다반면 AGI내부의 신경전달 메시지 전달은 빛의 속도이다.

 

크기와 저장소


우리의 뇌는 성인이 되면  이상 자라지 않는다하지만 AGI들은 필요에 따라  뿐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크기가 조절 가능하며메모리 저장크기는 비교가 불가하기 떄문에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튼튼함


우리의 뇌는 잠을 통해 휴식을 취한다나이가 들수록 몸과 뇌가 약화 되지만 AGI 부품만 교체 되면 새것처럼 가동 된다.

 

 

소프트웨어인 측면

 

업그레이드


인간이 무엇인 가를 숙달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AGI 그저 다운로드만 받으면 된다.

 

사회성


인간이 다른 동물들을 제치고 지구를 지배할  있었던 가장  이유  하나는 소통으로 인한 사회성이다인간도 영상통화 등으로 멀리 있는 다른 인간과 소통 가능하지만, AGI 아주 빠른 속도로 서로 데이터를 주고 받으며 소통한다.



 

AGI의 출현


인간들 사이에서도 지능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AGI 출현하기  인간의 지능 차이는 이렇게 묘사   있다.


 

 

 

보다시피 아인슈타인 (Einstein)  바보 (Dumb Human) 지능 차이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AGI 보편화 되고 인간과 AGI 경계가 애매해 지기 시작하면 이런 현상이 생긴다.


 

 

 

아인슈타인과 바보 동네형의 지능이 거의 같아 졌다.

 

그렇다면 다음은??

 

AGI에서 ASI 가는 

 

이제부터 다룰 내용들은 조금 무서워   있다.


이전에 자기 발전만 하는 ANI 대해서 잠시 소개를 하였다. AGI들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시스템이나 정보가 있으면 즉시 자동 다운로드   있게 된다수확가속의 법칙에 의해 AGI 지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AGI ASI 업그레이드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ASI 인간보다 170000  영리한데 우리는 이제 지구정복자의 위치를 AI에게 완벽히 넘겨 주게 된다우리 인간의 뇌가 겨우 wifi 발명했다면 우리보다 몇만배 이상 똑똑한 컴퓨터들은 상상도 못할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출처


waitbutwhy.com

Nick Bostrom – Superintelligence: Paths, Dangers, Strategies
James Barrat – Our Final Invention
Ray Kurzweil – The Singularity is Near
J. Nils Nilsson – The Quest for Artificial Intelligence: A History of Ideas and Achievements
Steven Pinker – How the Mind Works
Vernor Vinge – The Coming Technological Singularity: How to Survive in the Post-Human Era
Nick Bostrom – Ethical Guidelines for A Superintelligence
Nick Bostrom – How Long Before Superintelligence?
Moshe Y. Vardi – Artificial Intelligence: Past and Future
Russ Roberts, EconTalk – Bostrom Interview and Bostrom Follow-Up
Stuart Armstrong and Kaj Sotala, MIRI – How We’re Predicting AI—or Failing To
Susan Schneider – Alien Minds
Stuart Russell and Peter Norvig – Artificial Intelligence: A Modern Approach



 


인공지능의 시대가 다가 온다.

 

 

 

                                    

이세돌 九단


지난 3편에서 라이벌 구리와의 십번기에서 승리하며
침체된 한국 바둑을 되살리기 위해 
재도약의 의지를 불태운 이세돌이었어

보통 바둑기사들은 서른을 넘기면 하락세를 걷게 되는데
2014년 이세돌이 서른 둘이었어
20대 때 만큼 압도적인 우승 횟수를 보여주진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2014년까지 꾸준히 국내 기전과 세계기전에서
모두 우승을 거두며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었지



이 당시 한국 바둑계는 이세돌을 포함한
아래의 3강이 주도하는 모습이었어

 

               

박정환 九단

박정환은 93년 생으로
올해 4월까지 29개월 연속 한국 프로기사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현재 한국 바둑계 1인자야
하지만 통산 세계 대회 우승이 2회 뿐이어서
'국내용'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분명 기재는 뛰어난데 뚜렷한 개성이 없어 아직 팬들로 부터 별명이 없어
그나마 얻은 별명이 '국내용'...
사실 별명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프로기사에게 별명은 굉장히 중요해
별명이 없다는 건 그만큼 팬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니까
기사가 가진 별명의 숫자로 그 기사를 판단하기도 해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기사 중에 하나야

 

김지석 九단

동안으로 유명한 김지석은 
89년생으로 의외로 나이가 꽤 돼
현재 박정환과 함께 한국 바둑계의 미래로 불리고 있는 기사야
예전 이세돌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 최강이 될 만한 후배 기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김지석을 꼽은 적이 있다
공격적인 기풍으로 전성기 시절 이세돌과 가장 닮아있어
24세라는 이른 나이에 서울대학교 대학원 출신 일반인과 결혼하였고 
아버지가 대학교수, 어머니는 약사라는 점에서 '엄친아'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영훈 九단

이창호 이후 어린 시절 부터 형세판단 면에서 탁월한 기재를 보여
이창호의 '신산神算'이라는 별명을 이은 '소신산小神算'으로 유명했어
전투능력이나 승부감각 등은 위 두명에 비해 떨어지지만
셋 중 수읽기와 끝내기 능력은 박영훈이 가히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철한 九단


이 외에도 최철한,목진석,강동윤 등을 포함해 
확실한 최강자가 없는 춘추전국시대가 이어져 오고 있었지
한 동안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켜온 이세돌의 위세가 약해졌으나
조훈현-이창호-이세돌의 계보를 잇는 
뚜렷한 최강자가 나오지는 않고 있다

그나마 박정환이 랭킹 1위를 오랫동안 유지하며 
이세돌의 후계자로 가장 유력해 보였는데
박정환 마저도 세계대회에서는 번번이 탈락하며 
프로기사의 커리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계무대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
이세돌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8,90년대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바둑이
2000년대 부터 차츰 인기를 잃어갔고
2010년대를 지나서는 그 인기가 바닥을 치게 되는데
(현재는 이세돌 덕분에 약간 상승세에 있어)

이세돌은 이러한 한국 바둑계를
살리기 위해서는 프로 기사들이 세계무대에서 예전과 같은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수 밖에 없다며 후배 기사들을 독려했어
사실 구리와의 십번기도 뒤돌아선 바둑팬들의 관심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어

그렇게 이세돌은 십번기 이후 맞이한
첫 세계 대회인 제 19회 삼성화재배에 출전하게 된다
 

 

2014년 제 19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 진출자

 

8강에서 탈락하게 된 이세돌 九단


아쉽게도 이세돌은 이 대회에서 
8강에서 만난 중국의 강호 스웨 九단에게 패해 탈락하게 돼
스웨는 이후 4강에서 한국의 김지석 九단을 만나 패하게 되고
김지석은 결승전에서 중국의 탕웨이싱을 만난다

 

 

2014 제 19회 삼성화재배 우승을 차지한 김지석 九단
 


이 대회는 김지석이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2015년 
이세돌은 제 20회 삼성화재배에서 
다시 한 번 이 대회 우승을 노리게 되는데
바로 이 대회 4강에서 중국의 커제 九단과 처음으로 맞부딪히게 돼

 

 

 

 

 

커제(柯洁) 九단

커제는 2008년 입단한 중국의 신예 기사야
사실 입단은 2008년에 했지만
2013년 까지 별다른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어
2013년에도 삼성화재배 16강 진출 정도의 성적이 고작이었지
그리고 이듬해 2014년 중국 국내기전인 아함동산배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는데
이마저도 중국 기전중에서 마이너로 분류되는 소규모 대회였어
이때까지 중국에서는 그저 그런 기사로 평가받고 있었는데
2015년 세계대회 제 2회 바이링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첫 세계대회 우승을 거뒀어
단계적으로 실력을 키우면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갑자기 확 뜬 케이스야
그래서 작년까지도 커제는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이제는 명실상부 세계최강으로 인정받고 있지

어쨌든 20회 삼성화재배에서 이세돌과의 악연이 시작된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여기서는 이세돌의 압승이 예상됐어
커제는 입단 후 이렇다 할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고
중국 내에서 평범한 기사로 평가받던 커제가 
갑작스레 메이저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 4강까지 진출한 상황이었으니까

 

2015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준결승
이세돌 대 커제

하지만 결과는 이세돌의 처참한 2대0 패배
이런 충격적인 결과에 중국 취재진은 물론 한국 취재진 모두 놀랄 수 밖에 없었어
이때 한국에서는 이세돌이 소위 꿀대진을 만났다며 낙관하고 있었는데
이세돌이 커제에게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보고 2대0으로 발려버렸다

이때 대국을 지켜보던 검토실의 어린 기사들은
"오늘 백(이세돌)처럼만 두면 나도 이길 수 있겠다"
라며 이세돌의 형편없는 경기력을 문제삼았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상대는 당시 족보도 없이
준결승 까지 올라온 커제였으니까

준결승전 해설을 맡았던 유창혁 九단도 이세돌의 경기력을 지적했다
 

 

경기 승리 후 인터뷰에서 커제는

“어릴 때 이세돌 9단의 기보를 보며 공부를 했었다.

이번이 첫 대결인데 역시 그의 번뜩이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다만 이세돌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

결승 상대는 누가 올라와도 어렵겠지만 스웨 9단과 두어보고 싶다.

그동안 전적도 비슷해서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 현재 삼성화재배, LG배, 몽백합배를 남겨두고 있는데

백합배는 특히 중국 주최의 대회인데다 4강에 중국 선수로는 나 혼자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 욕심이 난다. 솔직히 3개 중에 하나만 우승했으면 좋겠다”라며

이세돌과의 첫 대결 소감을 밝혔어


이후 커제는 자신이 대결 상대로 원하던 스웨 九단과 결승전에서 만나

승리를 거두고 내친김에 우승까지 차지하게 된다

 

 

 

2015년 제 20회 삼성화재배 우승을 차지한 커제

이에 중국과 한국의 바둑팬들은 모두 커제를 주목하기 시작해
당시 중국 바둑계도 우리나라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압도적인 최강자 없이
스웨,탕웨이싱,판팅위,미위팅 등 다수의 기사들이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었지
이때 부터는 커제도 그들과 함께 우승경쟁을 펼치는 구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세돌은 이때 까지도 커제를 그렇게 의식하지 않았어
물론 삼성화재배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중국은 예전부터 반짝 활약하다 사라지는 기사들이 많았거든
꾸준히 압도적 강세를 이어왔던 적이 한번도 없었어
물론 그것이 당시에는 한국의 최강자들이 
너무 강한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래서 이세돌은 커제도 반짝 하다 말거라고 생각했을거야
이때까지는 말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커제와 이세돌은 다시 한 번 맞붙게 되는데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결승전이었어
몽백합배는 2014년 중국에서 처음 개최된 신생 기전이야

이곳에서 이세돌은 커제에게 당한 수모를 갚아줄 좋은 기회를 얻게 되지
 

몽백합배 결승전 직전까지의 이세돌과 커제
아직도 커리어에서는 커제가 이세돌을 따라잡기엔 멀었지

 

2016년 월간바둑 2월호 표지를 장식한 이세돌과 커제

 

제 2회 몽백합배 준결승 박영훈 대 커제

커제는 여기서 한국의 강호 박영훈 九단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게 돼
이 당시까지 커제는 중국 갑조리그에서 부터 이어진
백번으로 35연승을 이어가고 있었어
그리고 그 기세로 중국 자국랭킹 1위를 달리고 있었지

그래서 커제는 '백번불패'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지
흑번에서도 커제는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백을 잡은 커제는 좀처럼 지는 법이 없었어 
때문에 중국에서는
백의 덤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게 돼

중국은 한국과 다르게 백에게 덤으로 7집반을 주고 있어
이에 반해 한국과 일본은 덤을 6집반이다
(덤은 흑이 먼저 두어서 얻는 이득을 백에게 집을 줌으로써 상쇄시키는 것)
 

이세돌을 도발하는 커제


그런데 결승전이 열리기 전 전야제에서
커제는 결승전에 대한 자신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세돌은 확실히 스웨보다 약하다. 
그가 우승할 확률은 5%에 불과하다. 결국 내가 95%의 확률로 우승을 거둘 것."
이라며 이세돌을 도발하게 된다

이건 마치 어린 시절 이세돌을 보는 듯한 파격적인 도발이었어
과거 이세돌은 
"이세돌 본인이 생각하는 세계 최강의 기사"
를 묻는 중국 기자를 상대로

"조훈현,이창호,요다 9단 정도가 세계최강이라 불릴 만한 기사들이다."
라고 답변하며 중국 기사를 언급하지 않은 적이 있거든

결국 그 중국 기자가 당시 중국 최정상급 기사였던
"마샤오춘 9단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질문하자
"아 마샤오춘은 빼주세요"
라며 중국언론을 도발했던 적이 있어

이에 화가난 중국기자는
"그럼 일본에서 활약한 오청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그의 기보를 공부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라며
도발을 멈추지 않았지

한국팬의 입장에서는 재밌는 일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도발을 당한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어
이 때문에 이세돌은 지금도 중국팬들에게 감정이 좋질 않아
그나마 이세돌이 과거에 쓰촨성 지진에
우승상금 전액을 기부했던 일로 조금 감정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아마도 커제는 상대가 과거에 중국을 도발했던 이세돌이었기에
이런 도발을 서슴치 않을 수 있었을 거야
만약 상대가 중국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신처럼 추앙받았던
이창호였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싶어

그렇게 화제를 낳으며 시작된 몽백합배 결승전 제 1국

 

제 2회 몽백합배 결승전 제 1국

공교롭게도 이 대국에서 커제는 백을 잡게 되었고
이세돌은 흑번으로 시작하게 되었어
백번에서 35연승을 달리며 무적의 모습을 보이고 있던 커제를 상대로는
출발이 좋지 못했지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1국(장면도 1~143)

이세돌은 이 대국에서 처음부터 엄청난 공격을 퍼부으며
커제를 흔드는 작전을 펼치게 된다
커제는 흑을 쥐었을 때와 백을 쥐었을 때
기풍의 차이를 보여왔어
흑을 쥐었을 때는 초반부터 상대를 공격해서 실리로 앞서나가는 전략을 주로 썼고
백번일 때는 처음부터 단단하게 수비적으로 나가서 덤 7집반의 이점을 살리는 전략을 취했어
이세돌은 이런 커제의 전략을 알고 있었고
커제에게 초반부터 쉽게 집을 내주면 안된다고 판단을 한거지

이세돌에게 공격을 당하며 집으로 많이 손해를 본 커제는
좌변의 흑대마를 잡아야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커제도 물러서지 않고 흑대마를 집요하게 공격하며 접전을 펼치게 돼
하지만 흑의 143수로 인해 백은 역으로 중아에 큰 집을 내주게 되었고
이 수가 결국 승착(승리를 결정짓는 수)이 되어
143수 만에 커제는 돌을 거두고 만다

사실 이세돌은 젊은 시절 공격 일변도의 기풍을 보였다면
서른을 넘기면서 부터는 그 기풍이 바뀌어서
수비적으로 실리를 취하는 기풍으로 바뀌게 되었거든
물론 이때까지도 상황에 따라 전투를 안한 것은 아니지만
전투보다는 상대의 공격을 역으로 받아치는
타개 위주의 기풍을 보이게 돼

보통 바둑 기사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기풍이 바뀌는 일이 흔하게 있어
전투와 실질적인 이득(집)을 선호했던 기사가 나중에는
타개와 세력을 선호하게 되고
속기를 중시하던 기사가 장고를 하게 되고
장고를 하던 기사는 속기로 두게 되고
이상하게 보이지만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이세돌은 대국 전 도발에 대한 영향이었는지
상대에 대한 맞춤 전략이었는지
과거 '리틀 전신'으로 불리던 그 때의 이세돌 처럼
시종일관 커제를 공격해 커제에게 항복을 받아내며
커제의 백번 35연승 또한 여기서 멈추게 된다

이세돌이 먼저 승리를 거두며 기분좋은 출발을 보였어
그리고 다음날 이어진 제 2국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2국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2국(장면도 1~143)


1국에서 흑으로 기분좋은 승리를 거두었던 이세돌은
흑번에서는 백번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커제였기에
이 날도 이세돌의 승리가 예상됐어
그리고 실제로 이세돌이 대국 중반부터 중앙의 흑집을 부수며 
승기를 잡아 지기 힘든
유리한 상황을 연출해내며 2연승을 거두는 듯 싶었지만
흑의 131수로 좌상귀의 백이 모두 잡히게 되어
161수 만에 이세돌은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세돌은 대국 후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내가 겪은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가장 큰 역전패를 당했다."
라며 소감을 밝혔고
당시 해설을 맡았던 박정상 九단은 
"이기는 길이 무수히도 많았는데 도대체 왜 졌는지 모르겠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을 정도였어


그렇게 승부는 1대1로 팽팽해졌어
이틀 후 속개된
결승전 제 3국은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3국

이 바둑은 이세돌이 중앙의 흑대마를 살릴 수 있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 처럼 보였지만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커제는 집요하게 
이세돌의 흑대마를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이세돌이 집 손해를 거듭하며
결국 돌을 거두고 말았어


이후 이어진 제 4국

이후 이어진 4국에서 이세돌은 다른 때보다 더 비장해 보였어
2대1로 승부가 벼랑 끝 까지 몰렸기 때문도 있지만
2국의 대역전패 후 이어진 3국의 아쉬운 패배

아마 전 날의 패배를 기점으로 
이세돌은 커제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
'그저 겁없는 패기의 신예기사'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호적수'로서 생각을 바꾼거지

사실 나는 이세돌이
그동안 커제를 얕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말도 안되는 역전패를 당한 것도 그렇고

앞서 커제가 삼성화재배에서 이세돌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후의 행보를 보아도 결과론적으로 커제는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

바둑격언 중 가장 유명한 '경적필패輕敵必敗'라는 말이 있어
'적을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한다'는 뜻이지
이세돌은 다시 한 번 이 격언을 세기고 4국에 임했으리라 생각해

결국 4국의 결과는 162수만의 백 이세돌의 불계승이었다
승부는 결국 제 5국 결승국까지 가서야 가려지게 되었어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5국(장면도 1~281)

시작된 승부는 초반부터 치열했어
양 쪽 모두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기에 최강수로 나올 수 밖에 없었지
전투는 거듭되었고
집의 균형은 계속해서 유지됐어
승부를 알 수 없었던 것이지
하지만 중반 이후 상중앙 백의 넉점(76,78,80,116수)이
흑에게 끊어 잡히게 되며 흑의 집이 크게 불어났고
우열을 가릴 수 없던 승부에서 백이 상당히 불리해져 버렸어
만약 이것이 결승국이 아니었다면 이 때 백이 돌을 던졌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불리했지

하지만 여기서 지면 그대로 끝이나는 상황이었기에
이세돌은 끝까지 추격했고 끝내기에서 상대의 실수를 유도해
결과를 뒤집는 수 밖에는 없었어
그 와중에 흑을 쥔 커제가 끝내기에서 245수째 작은 실수를 하며 
오히려 백이 반집승을 거둘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어
승부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상황까지 이어졌지

이 부분에서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는데
한국과 중국의 계가 방식이야

이 몽백합배는 중국에서 개최되기 때문에 
중국식 바둑 룰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중국식은 한국,일본식과 계가(집을 세는 것) 방식에 약간 차이가 있어

 

한국과 일본식의 계가


우선 위 사진은 정확히 따져서 완벽한 계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설명하자면
한국식으로 계가를 할 때는 
먼저 내가 따낸 상대의 돌(사진에서 빨간색으로 체크해놓은 돌)을 상대의 집에
메우고 각자 만들어진 
집(내 돌로 둘러싸인 안의 빈공간의 점 개수)을 세서 
서로의 총합에 백의 경우에는 덤까지 합산해서
총 집의 수를 비교하게 돼 

반면 중국식은 내가 따낸 상대의 돌은 상관치 않고
반상 위에 있는 자신의 돌 수를 세게 돼
뭐 어차피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야
상대의 죽은 돌로 집을 메우는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고 반상의 각자의 돌을 세는 것이나 결과적으로는 같아
(중국식에서는 돌이 먹히게 될 경우 자신의 돌이 줄어드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부분의 차이 때문에 마지막에 커제는
반패(서로 따내야 하는 집,끝내기 중 가장 이득이 작은 곳)를 잇지 않고
공배를 메워 자신의 돌을 늘리며 이득을 보게 된다

쉽게 말해서 끝내기에서 
한국식으로는 하면 손해가 되는 행동으로
중국식에서는 오히려 이득을 볼 수 있어

이걸로 결국 이세돌이 딱 반집 패배를 하고 말아

 

 

결승국 후 이세돌과 커제의 모습
 
이세돌의 패배 후 한국 언론에서는
'한국식 룰로 했으면 마지막에 이세돌이 이겼을 것이다'라며 
자위를 했지만
이세돌은 수년간 중국리그에서 활동해 온
한국기사 중 누구보다 중국식 바둑을 잘 두는 기사야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중국식과 한국식 룰을 
오해해서 졌다는 것은 변명 조차 될 수가 없어

게다가 중국식 룰에서는 덤이 7집반인 백이 확실히 유리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상태에서 이세돌이 백을 쥐고 패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세돌의 '완패'였어
물론 마지막에 역전승을 거둘 수도 있었기에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커제가 실력으로 이세돌을 완벽히 꺾었다고 밖엔 볼 수가 없었다
 

몽백합배 우승 직후 인터뷰에 응하는 커제

그런데 대국 후 오히려 커제는
"역시 이세돌은 최강의 기사다. 그의 바둑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라며
이세돌을 인정해주고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소감을 밝혀
그리고 논란이 되었던 대국 전의 '5%' 발언에 대해서는
"그 당시 이세돌이라는 강자에게 기세에서 밀릴 수 없었다.
기세를 위해 과장을 했던 것."이라며
자신의 도발에 대한 해명도 덧붙였다

만약 커제가 승리후에도 이세돌이 별 볼일 없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면
오히려 커제를 인정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런데 이런 우승 소감을 듣고난 후 에는 
모두가 커제를 최강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몽백합배의 우승으로 
커제는 한 순간에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

이세돌은 패배 후 인터뷰에서
"커제는 강하다.확실히 이번에는 나의 완패다.
그러나 다음번엔 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반격 의지를 보였어

이때까지
이세돌은 계속되는 대회 일정으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어
그리고 다들 잘 알다시피 몽백합배 이후 
올해 3월에 구글의 알파고와 대국을
예정지은 상태였기에
이세돌은 당초 타 대회 참가를 하지 않고 잠시 휴식기를 갖도록 되어 있었지

하지만 계획은 금방 어긋나 버렸어

휴식을 계획하고 있던 이세돌은 
후원사인 농심과 한국기원의 지속적인 간곡한 부탁으로
대표 선발전에 참가하지도 않았던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한국 대표팀에 와일드카드로 뒤늦게 승선하게 돼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개막식


당시 한국 대표팀의 멤버로는
백찬희 初단, 민상연 四단, 최철한 九단, 박정환 九단
그리고 이세돌 九단이 있었어 

 

 

 

 

 

 첫 세계 무대에 부담감이 컸던 탓인지 백찬희는 대국 내내 끌려다니다 패하고 말았어
백찬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일본의 이치리키 료는 연달아 중국의 판윈뤼를 꺾고
한국의 2장 민상연과의 대결에 나선다

 

당초 대회에 나서는 마음가짐에 대해
"팀의 허리를 맡고 있는 만큼 절대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뱃심으로 밀고나가겠다."라는
당찬 각오를 밝힌 민상연이었기에
한국 팬들은 먼저 한국에 패배를 안겨준 이치리키 료를 반드시 잡아주길 기대하고 있었어 





그리고 결과는


연이은 한국 팀의 2연패
순식간에 믿었던 신예기사 둘이 연달아 패하며 한국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이치리키 료는 중국의 우광야를 맞아 패배하였고
한국의 3장으로 나서게 된 최철한으로서는 큰 부담감을 안은 채 승부에 임하게 되었지

 

 

 

한국 대표팀의 첫 승을 거두는 최철한

이어지는 한국의 최철한과 중국의 우광야의 대국은
최철한의 121수 만의 흑 불계승으로 최철한의 압승으로 끝이 났어

 

 

하지만 2연승을 거둔 최철한은 이어진 중국의 구리와의 대결에서 아쉽게 패하고 만다
이제 한국 대표팀은 박정환과 이세돌만이 남은 상황
물론 최철한이 제 몫을 해주었고 한국에겐 아직 최강의 카드 둘이 남긴 했지만
다소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어
반드시 박정환이 최소 두명이상은 잡아주거나
될 수 있는 한 많은 승을 거두어 주어야만 했지
293수 까지 가는 대 혈투끝에 두집반 차이로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아쉬운 패배를 당하고 말아
이세돌 다음으로 믿고 있던 박정환이
최철한을 꺾었던 구리에게
어이없이 무너져 버리고 한국은 위기를 맞게 되었지

이세돌과의 대국을 바라고 있던 구리는 3연승 후 
일본의 2인자 무라카와 다이스케 八단을 만나 무너지게 되어
아쉽게도 구리와 이세돌의 대국은 성사되지 못했어
국내 1인자였던 박정환의 충격적인 패배 이후

일본에는 현재 일본의 2인자인 무라카와 八단과
부동의 1인자 이야마 유타 九단이 남아있었고

중국에는 롄샤오 七단과 이세돌의 천적 커제 九단이 남아 
이세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대표팀의 우승을 위해서는
이세돌이 연달아 네명을 모두 꺾어야 하는 상황

이는 곧 과거 이창호의 6회 농심 신라면배 
'상하이 대첩'과 같은 상황이었다

약 10년만에 재현되는 역사적인 상황에
바둑계는 한껏 달아오르게 되었어
과연 이세돌이 '제 2의 상하이 대첩'을 이루어 낼 수 있을지
온 바둑팬들의 기대가 모아졌지

보통의 기사라면 그 중압감에 짓눌려 무너져 버렸을테지만
이세돌은 달랐어
그는 천성적으로 팬들의 관심을 즐기며
위험한 승부를 오히려 반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마도 선배 이창호만이 이룰 수 있었던 기적같은 역전우승을
자신도 이뤄낼 수 있다는 그 상황에 감사했을 이세돌이었다

이 당시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결전을 2주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알파고와의 대결은 잊고 오직 농심배에 사력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밝혀

[

 

 

 

일본의 무라카와 다이스케 八단과 중국의 롄샤오 七단을 연이어 꺾은
이세돌 九단

자신보다 약체로 평가받던 일본과 중국의 기사들을 연이어 꺾어낸
이세돌은 당초 피로누적으로 휴식을 계획하고 있던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어
두 대국 모두 압도적인 기량차이를 보여주며 힘이 넘치는 바둑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일본의 주장
이야마 유타 九단과의 대국은
제아무리 이세돌이라 해도 쉽게 승리를 예측 할 수 없었어

 

 

현재 현재 일본바둑 부동의 1인자 이야마 유타 九단

이야마 유타는 현재 일본 내의 모든 기전을 독식하고 전관왕을 달성하며
홀로 외로운 독주를 펼치고 있는 일본 내에서는 유일무이한 1인자
아무리 일본 바둑이 한국과 중국에 밀렸다고 해도
이야마 유타 만큼은 그 무게감이 남달랐어 

그렇게 이전의 두 대국과는 다르게 시작된 이야마 유타와의 대결
 

 

박빙의 승부가 예상됐던 승부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둔 이세돌

하지만 결과는 이세돌의 압승이었어
물론 이야마 유타도 강했지만 이세돌은 차원이 달랐다

반신반의 하며 '제 2의 상하이 대첩'을 기대하던 한국의 바둑팬들은
이세돌이 정말로 해낼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어

이제 중국의 주장 커제만 넘으면 한국이 역전우승을 거두고
이세돌은 이창호에 이어 다시 한 번 세계무대에 역사를 쓰게 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세돌 개인에게도 다음 대결은 분명히 중요했어
이전 대결에서 커제에게 번번이 무릎 꿇으며
승부사로서 치욕을 당했던 이세돌이었기에
커제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
여러가지 의미로 이세돌은 놓칠 수 없는 승부였다
 

하지만 질 수 없는 것은 커제도 마찬가지였어
농심배는 개인전이 아닌 바둑기전 유일의 국가 대항 단체전
첫 출전에서 중국의 주장으로서 자신의 손으로 자국의 우승을 결정짓고 싶었을 테니까
더군다나 중요한 대회마다 마주치던
이세돌과의 승부였으니 그 의미는 더 했지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 결승국
이세돌 대 커제

서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승부가 그렇게 시작되었어
사실 이전의 승부때도 늘 그랬지만
대국의 초반은 커제가 앞서나가게 되었어
사실 커제의 가장 강점은 초반 포석에 있어
반대로 이세돌은 초반 포석에 약하고 중반 전투에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이지



초반 포석에서 많은 손해를 본 이세돌은
중반 전투에서 만회를 꾀했어
하지만 커제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빠르게 두어가며
이세돌을 시간으로 압박했어
결국 이세돌은 바둑을 난전으로 이끌어 역전을 노렸지만
커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초반 벌어진 차이를 극복해내지 못하고 패하고 말아

 

우승을 확정지은 후 기뻐하는 커제

커제는 이세돌과의 승리로 중국에 우승을 선사함과 동시에
이번 대결까지 이세돌과의 상대 전적에서 8승 2패로 거듭 앞서 나가게 된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상 이세돌은 커제에게 못 당한다는 말 밖엔 할 수가 없는 상황

바둑계의 판도는 이 패배로 완전히 커제의 중국에게로 넘어가고 말았어

이세돌의 나이가 거듭 아쉽게만 느껴졌다

1997년 러시아의 세계 체스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가 
IBM 社의 인공지능 딥블루(Deep Blue)에게 패하는 순간


아시아권에 바둑이 있다면 
서양에는 대표적인 보드게임으로 체스가 있지
1997년 미국의 IBM이 개발한 딥블루는 인간 체스챔피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어
이때에도 인간이 인공지능에 곧 지배를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많이 나왔어
하지만 이 역사적인 대결도 금방 잊혀졌지


잠시 잊혀졌던 이 역사적인 사건을 이후로
다시 펼쳐지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
그것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의 의미였어
 

이세돌과 알파고(Alpha Go)

인공지능 개발자들에게 있어 바둑의 세계는
크나큰 도전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어
오목,장기,체스 인간이 즐기는 보드게임 중 대표적인 것들은
이미 모두 인공지능에게 추월당한 상황이었지만
바둑만큼은 예외였거든

지금까지 바둑은
그 경우의 수가 무한해서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여겨졌어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이 처음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였지만
그 실력은 형편없었고
알파고가 나오기 전 까지도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구글의 자회사인 '딥 마인드Deep Mind'가
올해 초 이세돌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지

사실 인공지능 사업은 2000년대 부터 지속적으로
주목 받아왔던 차세대 사업시장이야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기술로서 
생산,의료,금융,유통 등 거의 모든 사업에 접목시킬 수 있는
엄청난 잠재성을 가진 사업분야였기 때문에 미국은
이미 예전부터 사람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 돈을 쏟아붇고 있었지

 

 

IBM 社의 차세대 인공지능 '왓슨Watson'

현재 인공지능 사업은 구글과 IBM의 양강구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먼저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은 왓슨쪽이었어

 

 

2011년 미국 제퍼디쇼에 출연해 퀴즈 세계 챔피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왓슨

2011년 미국의 인기 퀴즈쇼 '제퍼디 쇼Jeopardy Show'에 출연해
퀴즈 챔피언들을 꺾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 수준만큼 도달했다는 것을
대중들 앞에서 증명해내지
이 덕분에 IBM은 주가가 급등했고
인공지능사업 경쟁에서 IBM이 한 발 앞서나가게 된다

 

현재 인공지능 사업의 주요 적용분야인 의료기술

왓슨은 이미 미국에서
의료산업에 적용되어 암환자들을 위한 프로젝트에 사용되고 있어
구글의 알파고는 개발단계였던 것에 비해
왓슨은 이미 상용화 단계까지 접어든거지

 

 

왓슨이 의료기술에 특화되어 있다면 구글은 인공지능을 통해
수 년 전부터 무인자동차 시스템을 개발해왔어
그리고 현재 무인자동차 시스템은 개발이 끝나서
법적 제도만 갖춰진다면 언제든 상용화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고 해

 

구글의 무인자동차

구글은 이러한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을 만한
'계기'가 필요했어
세계인의 이목을 끌 수만 있다면 
그 엄청난 '관심'이 엄청난 '투자'로 이어질테니까

그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한 것을 고민하던
구글이 선택한 것이
바로 '바둑'이었어

 

 

 

알파고와의 대결을 발표하는 자리의 이세돌

'알파고' 자체는 바둑을 주 목적으로 개발된 인공지능이 아니야
단지 인공지능의 학습방식이 얼마나 인간의 그것에 가까운 지를
보여주기 위해 인간 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바둑'을 활용한 것 뿐이지

 

2015년 10월 유럽 바둑챔피언 판후이 二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알파고

이세돌과의 대결 전에 이미 알파고는
유럽 바둑 챔피언 판후이를 꺾으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

하지만 판후이는 본래 중국에서 최약체로 평가받던
프로기사였기에 아무리 유럽 챔피언이라지만
인간을 대표할 만한 기력은 되지 못 했어
때문에 이때까지도 인공지능의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판후이의 기력이 형편없어서 패배한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대결 전 자신감을 내비치는 이세돌

그래서 이세돌도 처음에는
알파고를 상대로 '5대0 혹은 4대1'의 승리를 자신있게 예측할 수 있었던 거지
알파고 바로 이전의 인공지능들은
프로기사를 상대로 호선은 어림도 없고
접바둑으로도 될까말까한 수준이었기에
이세돌이 이런 자신감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어

나도 이때까지는 당연히 이세돌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결과는 4:1로 이세돌의 처참한 패배
 

 

알파고와의 패배 후 괴로워 하는 이세돌

이세돌의 바둑을 예전부터 지켜봐 왔지만
이때 만큼 힘들고 괴로워 보인 적이 없었어
아무리 이세돌이
팬들의 관심과 승부에 걸린 부담감을 즐기는 타고난 승부사라 할지라도
알파고와의 대결은 자신의 바둑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이었니까

하지만 이세돌은 완전무결해 보였던 알파고를 상대로 1승을 거두며
알파고의 파훼법을 어느 정도 제시해주었어
그러나 알파고는 지금도 계속 개발 중이고 성장하고 있기에
인간과 인공지능의 승부를 다시 한다 해도
인간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 아무리 바둑이 복잡한 게임이라해도
인공지능의 발전을 인간의 힘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이었어
다만 그것이 생각보다 빨리 온 것 뿐이지
이세돌이 알파고에 패했다고 해서
바둑이 끝나는 것은 아니야
알파고에게 졌다고해서 사람들이 바둑을 즐길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대결이 끝난 후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있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개발자 데미스 하사비스

이세돌은 대결 후에 구글의 개발진들을 향해 깊은 존경심을 전한다는
소감을 밝혔어
인공지능이 도달한 수준을 직접 느끼며 패배 후에 괴롭기도 했지만
반대로 즐겁게 승부에 임하기도 했다고 해

구글의 개발자들 역시 인간 대표로 대결에 나선 이세돌에게
깊은 존경심을 밝혔지

 

친필 사인이 담긴 바둑판을 선물하는 이세돌

그렇게 역사적인 대결은 마무리 되었고
이세돌은 올해 개최되는 응씨배에서 우승을 거두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해

이세돌이 두고두고 아쉬워 하는 것이 응씨배 우승이거든
이세돌이 꼭 이 대회에서 우승했으면 좋겠다
이세돌에게 관심이 많은 게이들은 
이 대회를 챙겨보면 보는 재미가 더 할거라 생각해




'한국 바둑계 최강자의 마지막 계보를 잇는 기사'
'승부를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위협을 즐기는 승부사' 

불의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의 인생에서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어

 

 

                     이상으로 바둑 정보글 시리즈 마지막 [쎈돌 이세돌]편이 


 


그럼 [쎈돌 이세돌] 3편을 시작한다!!

이세돌 九단


지난 2편
패도무문의 최강자였던 이창호를 처음으로 꺾고 
세계대회 타이틀을 거머쥔 뒤
2002년,2003년 세계대회 후지쯔배 2연패 등
국내외 기전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이창호의 독주를 견제하기 시작했던 이세돌이었다

이제 이세돌의 다음 목표는
과거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가 차례로 차지했던
'응씨배'였지
2000년 제 4회 응씨배를 우승했던 이창호가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고
 

제 3회 응씨배 우승자 유창혁 九단

 

제 4회 응씨배 우승자 이창호 九단

그런 이창호를 얼마전 LG배에서 꺾은 이세돌은
이제 최후의 등용문 응씨배만 우승하게 된다면
앞선 최강자들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바둑 팬들의 예상이 이어졌어
정말 단순히 기재로만 본다면
전광석화와 같은 수읽기, 승부의 흐름을 읽는 감각은
조훈현 이후 최고의 천재성을 보이고 있던 이세돌이었기에
주위의 관심은 이처럼 남달랐다

하지만 예상은 크게 빗나갔고 
이세돌은 
2004년 제 5회 응씨배 예선 1회전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참고로 이 대회는 전기 대회 때 이창호에 막혀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던 중국의 창하오가
한국의 최철한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제 5회 잉창치배 세계 바둑 선수권 우승을 차지하는 창하오 九단


2004년은 이세돌에게 있어
치욕적인 한 해가 되고 말아
이세돌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 시기에 갑작스럽게 급제동이 걸리며 
나서는 국내외 대회 마다 줄줄이 탈락했고 
거의 넘어설 수 있을 것 처럼 보였던 
이창호라는 벽의 높이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간신히 중국의 왕시 五단을 꺾고 
제 9회 삼성화재배 에서 우승하며
체면치레를 하긴 했지만
4년 마다 열리는 응씨배가 개최되며 다른 때 보다 
유난히 많은 세계 대회가 열렸던 한 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두고두고 아쉬운 한 해가 아닐 수 없어
 

 

제 9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우승을 거머쥔 이세돌 九단

이세돌에게는 지우고 싶은 한 해였던 
이 2004년에

중국 갑조리그(프로바둑리그)에서
이세돌은 후에 자신과 숙명의 라이벌이 되는
중국의 구리 九단을 처음 만나게 된다

 

제 9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우승을 거머쥔 이세돌 九단

이세돌에게는 지우고 싶은 한 해였던 
이 2004년에

중국 갑조리그(프로바둑리그)에서
이세돌은 후에 자신과 숙명의 라이벌이 되는
중국의 구리 九단을 처음 만나게 된다

 

구리(古力) 九단

구리에 대해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83년생으로 이세돌과 동갑내기에 
공교롭게도 프로 입단년도 또한 95년도로 이세돌과 같아

중국의 창하오와 뤄시허를 견제할 수 있는 신예기사로 촉망받았던
그는 2006년 LG배를 우승하며 첫 세계대회 타이틀을 획득한다
2016년 현재 커제 九단이 등장하기 전 까지 부동의 중국 1인자였어

구리 九단은 그 실력에 걸맞지 않게 '최강의 아마추어'라는 
이상한 별명을 갖고 있는데
이건 그가 항상 어이없는 역전패를 자주 당해서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야
(보통 아마추어들이 이런 실수를 많이 해)

초반 포석과 중반 전투 그리고 전체적인 판을 구성하는 감각은 
라이벌인 이세돌을 능가한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지녔지만
후반 끝내기로 갈수록 약점을 드러내며 
다 잡은 승리를 놓친 적이 많았어

'조훈현에게 녜웨이핑이 있었고
이창호에게 창하오가 있었다면
이세돌에게는 구리가 있었다.'

구리는 라이벌이었던 이세돌을 무척 좋아했어
항상 세계대회나 행사에서 
이세돌과 만나면 먼저 나서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고
대회 참석 차 한국에 오면 늘 이세돌부터 찾아간다고 해

 

 

2008년 구리 九단의 결혼식에 한국 기사로는 유일하게 초대받은 이세돌 九단

이런 둘의 일화 중에 하나는 
어느날 구리가 이세돌과 18번째 대결 전날 전야제 기자회견장 에서

"나는 2월 3일 생이고 당신은 3월 2일 생이니 

내가 형이고 당신이 동생이다. 나는 앞으로 5년, 10년 

아니 더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우리가 더 가까운 사이로 지내길 바란다."며 

이세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어


함께 있던 취재진과 관객들이 하나같이 구리에게 

"그럼 동생을 안아줘라!"고 말하자 

구리는 자연스럽게 팔뚝을 벌려 이세돌을 껴안았지


 

2015년에는 
이세돌과 '십번기十番棋'라는 역사적인 승부를 겨루게 되는데
이 부분은 뒤에 자세히 언급될 내용이야

 

 

이세돌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증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중국의 최강자

그런 구리와의 첫 만남에서 이세돌은 완패를 당하고 말아
당시 이세돌은 잠시 침체기를 걷고 있었고
구리는 2003년 중국 천원전을 우승하며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었어

후에 이 둘은
수도 없이 많은 대회에서 마주치게 되는데
상대전적은 이세돌이 미세하게 앞서고 있

 

 

 

한중일 프로기사 역대 통산 세계대회 우승 횟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통산 세계대회 우승 횟수는 구리보다 이세돌이 훨씬 앞서고 있어
역대 세계대회 최다 우승자는 이창호이고
이세돌이 이창호의 기록을 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어
이제는 바둑기사로서 이세돌도 적지 않은 나이라서
앞으로 이창호가 세계 대회 우승트로피를 추가하지 못 한다고 가정하고
아마도 저 기록을 깨려면 마흔 전 까지는 깨야 할텐데
올해 이세돌이 서른넷이니까


아무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침체기를 뒤로하며 맞은 
2005년
이세돌은 작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다시 한 번 우승 행진을 달리게 되는데

2005년
제2회 도요타덴소배 우승 
제6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
제18회 후지쯔배 우승 
제2회 중환배 준우승
 
2006년 
제7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 
제19회 후지쯔배 4위 
제2회 한국물가정보배 
우승 
제25회 KBS 바둑왕전 
우승 
제11회 GS칼텍스배 
우승
2007년
제3회 도요타덴소배 우승
2006년 바둑대상 최우수기사상 수상
제8회 맥심커피배 우승
KB국민은행 2007 한국바둑리그 주장
제19회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제3회 한국물가정보배 우승
제35회 강원랜드배 명인전 우승
2008년
제36회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 우승
제12회 삼성화재배 우승
제12회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제20회 TV바둑아시아 우승
2009년
제52회 국수전(國手戰) 우승
제13회 삼성화재배 우승


침체기를 완벽히 걷어내며 
비로소 완전한 최강자의 면모를 갖추게 돼
2000년대 후반 이창호는 이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고
바야흐로 이세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어
그렇게 전성기를 달리던 이세돌은

 

2009년 
돌연 '한국바둑프로리그'에 불참을 선언
일체 한국에서 개최되는 기전에는 참가하지 않고 
한국 바둑계를 떠나버린다

이 결정으로 온 바둑계는 충격에 빠졌어
한국 바둑을 이끌어 가고 있던 최강자가 돌연 바둑계를 떠나버린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
그런데 한술 더 떠 이세돌은 
한국에서는 활동하지 않겠다면서 중국리그에는 계속 참가하며
모든 이들의 공분을 샀어

또한 이세돌이 소속되어 있던 한국 프로팀은 
졸지에 에이스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팬들은 이러한 무책임한 이세돌의 행동들에 거센 비난을 가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말도 안되는 행동들이
계속해서 거듭되었다

 

2009년 휴직계 제출 관련 기자회견에 나선 이세돌 九단

이러한 일련의 논란에 대해 해명하고 정식으로 중국 활동을 포함한 
바둑기사로서의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자 이세돌은 기자회견을 갖게 돼

인사말 전문에서 
"저를 아끼고 사랑해준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들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대회진행에 물의를 일으키고 피해를 끼쳐 스폰서분들께도 정말 고개숙여 사과드립니다. 
저는 그동안 루머 소문에 신경쓰고 싶지않아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심정을 알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어

이세돌은 프로대회 주최사, 후원사, 바둑팬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세번 씩이나 하게 된다

또 한국에서는 활동하지 않으면서 중국에서는 활동했던 것에 대해

"휴직기간과 관계없이 계약이 있어, 계속 둘 수 밖에 없었다. 한국리그와 중국리그의 차별은 절대 아니다. 
중국리그는 계속 참가하는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한국기원의) 다른 조치가 취해진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겠다. 
중국리그의 경우 바둑두기 최적의 조건이다. 제한시간도 그렇고 주장전으로 펼쳐지는 시스템도 그렇고. 
한국리그는 사실 상위 랭커들에게는 별로 매리트가 없는 기전.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에서 내가 최상의 가치가 있을 때 선수로 뛰고싶다."

"지금까지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많은 대화를 하겠다."
라며 거듭 팬들에게 사과를 해

이렇게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세돌은 약 1년 반 가량
바둑계를 떠나게 되는데


사실 이렇게 된 모든 문제의 발단은 이세돌이 아닌 
한국기원과 원로기사들에게 있었어




문제의 원인을 찾자면 한국의 프로제도가 
탄생하는 곳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
 

 

 

2009년 휴직계 제출 관련 기자회견에 나선 이세돌 九단

이러한 일련의 논란에 대해 해명하고 정식으로 중국 활동을 포함한 
바둑기사로서의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자 이세돌은 기자회견을 갖게 돼

인사말 전문에서 
"저를 아끼고 사랑해준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들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대회진행에 물의를 일으키고 피해를 끼쳐 스폰서분들께도 정말 고개숙여 사과드립니다. 
저는 그동안 루머 소문에 신경쓰고 싶지않아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심정을 알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어

이세돌은 프로대회 주최사, 후원사, 바둑팬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세번 씩이나 하게 된다

또 한국에서는 활동하지 않으면서 중국에서는 활동했던 것에 대해

"휴직기간과 관계없이 계약이 있어, 계속 둘 수 밖에 없었다. 한국리그와 중국리그의 차별은 절대 아니다. 
중국리그는 계속 참가하는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한국기원의) 다른 조치가 취해진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겠다. 
중국리그의 경우 바둑두기 최적의 조건이다. 제한시간도 그렇고 주장전으로 펼쳐지는 시스템도 그렇고. 
한국리그는 사실 상위 랭커들에게는 별로 매리트가 없는 기전.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에서 내가 최상의 가치가 있을 때 선수로 뛰고싶다."

"지금까지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많은 대화를 하겠다."
라며 거듭 팬들에게 사과를 해

이렇게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세돌은 약 1년 반 가량
바둑계를 떠나게 되는데


사실 이렇게 된 모든 문제의 발단은 이세돌이 아닌 
한국기원과 원로기사들에게 있었어




문제의 원인을 찾자면 한국의 프로제도가 
탄생하는 곳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


 

서봉수와 조훈현

서봉수는 그나마 어느정도 마셨지만
조훈현은 소주 한 잔만 마셔도 몸을 못 가누는 편이라
둘 다 술을 즐기지 않았고
이때부턴 후배들에게 우승 후 술을 사던 관례가 사라지게 돼

우승이란 우승은 둘이 다 해먹으면서
돈은 돈대로 안쓴다며
다른 기사들의 불만이 커지게 된다

그래서 한국기원 측은 이때부터
우승상금에서 일정 금액을 떼어가게 돼
(이 금액이 언론에 정확히 발표는 되지 않아서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꽤 많은 액수였던 것으로 보여)

명목은 한국기원 운영비용과 '기사회'라는 프로기사 복지회 사용기금이었어

기사회는 나이많은 기사들을 위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일정 나이를 넘기면 이곳에서 연금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돈을 젊은 기사들의 우승상금에서 충당한다는게 문제였어

프로기사의 특성상 일정 나이를 넘으면 
사실 대회에서 성적을 낸다는 것이 힘들어
보통 우승은 20~30대에 가장 많이 하게 되는데
자연히 어린 기사들은 나이든 기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었지
그런데 웃긴건
연금이라는 건 현역을 은퇴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것인데
프로기사들은 은퇴라고 할 것이 없어
나이가 들어도 은퇴를 하지 않고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도 
심판이나 해설 등으로 부수입을 챙길 수 있거든
그런데 연금은 연금대로 받고
은퇴는 은퇴대로 안하고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

옛날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조훈현은
젊은 시절 이렇게 우승상금을 반강탈 당하면서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어
당연하게 생각했지
그리고 이창호도 스승이 가만히 있는데
자신이 나설 수는 없었기에 꼬박꼬박 돈을 줄 수 밖에 없었지
그리고 애초에 이창호는 집안이 부유했어

또 하나의 문제는 '기보저작권'에 있었어
기보라는 것은 대국의 수순을 정리한 것인데
대국이라는 것은 두 대국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니
당연히 그 저작권 또한 선수들 본인에게 있는 것이 맞는 일이었지
하지만 이 기보에 대한 저작권이
한국기원 측에 있다는 것이 문제였어
이세돌은 이 부분도 문제를 삼았다

이런 잘못된 구조를 근본부터 비판하고 나선 거야
하지만 이세돌 또한 자신이 몸담고 있던 이러한 한국기원의 부조리를
외적으로 공론화 시키고 싶지는 않았고
자신의 선에서 마무리 짓고자 했는데

이로써 예전 승단대회를 거부할 때 부터
한국기원에 미운털이 박혔던 이세돌과
한국기원과의 보이지 않는 완력싸움이 벌어지게 돼

이 과정에서 조훈현은 이세돌을 찾아가
이세돌의 행동에 대해 나무랐다고 해
'자신도 젊을 때 다 당했던 것인데 네가 뭔데 왈가왈부하냐'
대충 이런 논리였지

이 때문에 이세돌은 한국기원 측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한국 대회에 대한 전면 불참 선언을 하게 된 것이었어
아무리 한국 최강자라고 해도 이세돌이 괴씸했던 한국기원 측은
모든 일을 이세돌의 탓으로 돌려 언플을 했고
이세돌은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어 공공의 적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결국 일은 한국기원과 원로기사들이 벌려놓고
욕이란 욕은 이세돌이 다 먹게 돼
이세돌은 늘 '불의에 대해선 할 말은 해야한다'라는 주의였기 때문에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후배들 에게도 이러한
말도 안되는 관례가 이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해

이 일이 마무리 된 후에도 한국기원의 언플로 흐지부지 되어 버려서 
이세돌은 한 동안 팬들의 수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세돌이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바둑팬들이 더러 있다
 

 

 

기자회견 중인 이세돌

보수적인 바둑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어떻게 응징을 당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어
이에 이세돌은 한국 바둑계에 염증을 느끼고 형 이상훈을 통해
한국기원 측에 정식으로 휴식계를 제출했다
휴직 기간은 1년 6개월,
2010년 12월 31일 까지였어

 하지만 이 일로 불안해진 것은 한국기원 측이었어
이세돌이 떠나자 각종 세계대회에서 중국 기사들이 타이틀을 휩쓸기 시작했거든
이세돌은 또 당장 자신들의 가장 큰 수입원 이기도 했고
어느정도 이 일에 대한 내막이 팬들에게 알려지며
한국기원 또한 비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때문에 한국기원은 이세돌을 거듭 찾아가 휴직을 만류했고
결국 이세돌은 휴직 6개월 만인 2010년 1월 반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복귀 후 이세돌은 그간의 공백기가 무색할 만큼의 실력을 과시하며
소속팀인 '신안 천일염'팀의 첫 프로리그 우승을 이끌게 된다
그리고 이세돌은 시즌 MVP를 수상하게 된다

 

2010년 한국바둑프로리그 시즌 MVP를 수상하는 이세돌 九단

그리고 이어진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도 한국 대표팀으로 출전하게 되는데

 

 

태릉 선수촌에 입성한 이세돌과 이슬아

 

 

체력 훈련 중인 박정환과 이세돌

아시안 게임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바둑기사로서는 이례적으로 태릉 선수촌에 입성하여 체력 훈련도 받게 돼

 

 

이세돌 九단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단체전 부문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고
이세돌은 원래 중학교 중퇴로 병역을 면제받은 상태였기에 관계 없지만
함께 출전했던 조한승 九단(당시 군 복무중)
박정환 九단 등은 여기서 병역 면제 혜택을 받게 된다
이창호도 이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 획득에 보탬이 되었어
 

 

 

중국의 창하오 九단과 대국 중인 이창호 九단


그리고 이세돌은 이후

2010년 
제6회 한국 물가정보배 우승
제1회 olleh KT배 우승 
제2회 BC카드배 
우승 
2011년 
제6회 원익배 십단전 
우승  
제2회 olleh KT배 우승(2연패) 
제3회 BC카드배 
우승(2연패) 
제8회 춘란배 
우승
제10회 농심 신라면배 우승
2012년
제17회 GS칼텍스배 우승
제3회 olleh KT배 우승(3연패)
제40회 하이원 리조트배 명인전 우승
제16회 삼성화재배 우승
2013년
2014년
제32회 KBS 바둑왕전 우승
제15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
제1회 렛츠런파크배 우승
제26회 TV바둑아시아 우승


무관에 머물렀던 2013년을 제외하고 꾸준한 우승가도를 보이며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켜가게 된다

그리고 2014년 이세돌은 앞서 언급했던 
라이벌 구리 九단과의 '십번기十番碁'의 혈전을 갖게 된다

이 십번기는 바둑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어
 

 

 

2014년 십번기를 치르게 된 이세돌 九단과 구리 九단
 

 

오청원과 기타니 미노루의 십번기 모습
세기의 대결로 불리며 당시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십번기는 예전 일본에서 두어지던 승부의 형식 중 하나로
'치수 고치기'가 그 목적이야

'치수'라는 것은 대국이 벌어지기 전 
대국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상대가 나보다 기력이 높다면 
어느정도 핸디캡을 주어야 하는지 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치수에는

'호선(互先)'
나중에 두는 백에게 덤을 주고 선수의 효를 상쇄하여 
흑과 백이 '호각'으로 겨루는 방식, 현재의 프로대국은 모두 호선으로 이루어 진다
'선상선(先相先)'
세 판을 기준으로 하수가 흑,백,흑의 순서로 쥐어 흑을 한 번 더 둘 수 있게 하는 경우
'정선(定先)'
나중에 두는 백에게 덤을 주지 않는 방식, 백에게 덤이 없으므로 상수가 백을 쥐고 하수가 흑을 쥐게 된다


이렇게 세가지가 있고

그 외에 한 점 부터 아홉 점 까지의 접바둑이 있어
접바둑은 하수가 흑을 잡고
기력의 차이에 따라 몇 점을 먼저 착수한 뒤 
대국을 시작하는 것을 말해
물론 이 때에도 백에게 덤은 없다


십번기에 나서는 두 기사는
처음에 호선으로 시작했다가
패하면 선상선 정선 등으로 치수를 점차 내리게 돼

결국 여기서 패한 사람은 영원히 상대보다 '하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
여기서 패배하는 기사는 죽을 때 까지 '~보다 하수'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지
다음에 만날 때는 전에 십번기에서 승리했던 승자가
패자에게 한 수를 접어주게 되니까
프로기사로서 이만한 치욕은 없지
참고로 일본에는 이 승부에서 패배를 거듭해서 자신의 성까지 갈았던 기사가 있다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시 하던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바둑식 '캐삭빵'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부담이 큰 십번기는 두어지지 않게 돼
특히 프로기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그런데
알고보면 이렇게 무시무시한 승부가
이세돌과 구리 사이에 성사되게 돼

사실 이 승부가 논의되기 시작한 당시
주위에서는 너무 무리한 승부라며 우려가 나왔어
그도 그럴 것이 타이틀 매치도 아니고 그저 두 기사가 합의 하에
치르는 친선 대국인데 이겨봤자 본전이고
반대로 지는 쪽은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얻게 되니까

 

 

십번기의 시작 전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는 이세돌과 구리


때문에 이세돌과 구리는 십번기를 시작하기 전에
팬들에게 이번 승부를 명예를 걸고 하는 
본래의 십번기로 생각하지 말아주길 당부했어

대신 두 기사는 이번 승부의 상금을 '승자가 전부 가져가는 방식'으로 정했지
지는 쪽은 중국과 한국을 오고가는 승부에 필요한
비행기 값 외에는 일체 받지 못하고
승자가 우승상금 500만 위안(한화 8억 5천만원)을 독식하는거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있던 라이벌인 이세돌과 구리는
이무렵 바둑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고민을 똑같이 느끼고 있었거든

어느새 지루해져 버린 승부의 인생에
새로운 자극제가 필요했던 거야

이 십번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이끌어 내기도 좋은 승부였어

결국 이 십번기의 최종승자는



 

 

8국을 승리하며 종합전적 6대2로 십번기의 우승을 거머쥔 이세돌 九단


1,2국을 승리하고 3,4국을 패배한 이세돌이
나머지 대국을 내리 승리하며 먼저 6승을 기록했고
승부는 6대2로 이세돌이 승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하는
십번기 승자 이세돌 인터뷰 내용

- 우승 소감은? 
"세계대회는 자주 우승할 수 있지만, 이런 영광스런 10번기에서 승리를 했다는 건 기분이 다르다. 
기쁘다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겠지만, 다른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 패한 구리에게 한마디를 한다면? 
"승패를 떠나서 나를 상대해 준 구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구리가 없었다면 10번기 자체가 없었다. 가슴 깊이 감사한다." 

- 10번기 여정을 돌아본다면? 
"10번기가 시작할 때 두 사람 모두 컨디션이 안 좋은 상황이었다. 이제는 앞으로가 중요할 것 같다. 
구리가 졌으니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지만 저력이 있는 기사이므로 그래도 빠른 시간 내에 올라설 수 있다고 본다. 
구리나 나나 앞으로 더 잘해야 이번 10번기가 의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오늘 대국이 어땠나. 후반이 복잡했다. 
"굉장히 어려웠다. 후반에 흑이 좋아질 수도 있었다. 
마지막은구리가 초읽기에 몰렸고
나는 10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큰 잘못 없이 마무리 할 수 있었다."

- 이번 10번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바둑은 
"5국이다. 먼저 2승을 했을 때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후 3,4국과 다른 기전에서 2패를 당하는 등 내리 4연패를 했다. 
5국은 형세가 굉장히 나빴는데 운 좋게 역전할 수 있었고 
그 바둑의 승리가 10번기 우승의 결정적인 판이 되었다." 

-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딸인가 아내인가? 
"기왕이면 딸이라고 해야겠죠." (웃음)

- 최근에 자주 지는데 체력에 문제가 있나? 
"작년 춘란배와 삼성화재배에서 준우승에 머문 것은 다른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체력이나 나이, 이런 것들은 아직 큰 문제가 아니다. 세계대회와 10번기에서 10번기 쪽에 더 비중을 두었다. 
둘 다 성적을 잘 낸다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 
지금부터 잘해야 한다. "

- 휴식이 필요할텐데 다른 계획은 있나? 
"10월에 바로 삼성화재배가 있다. 바로 10번기 이후의 첫 대회이기 때문이다. 
사실 8국을 졌다면 모르겠지만 이겼으니 당연히 삼성화재배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이 대회를 마치고 좀 쉴 예정이다."

- 다시 10번기를 치를 수 있을까? 
"스폰서가 생긴 후의 문제다. 당장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일단 상대가 없다. 
10번기라는 것은 단순히 일인자라고 해서 두어지는 게 아니다. 
용호상박의 상대가 있고, 또 두 사람의 업적이 비슷해야 한다. 
최하 세계대회 5개 이상은 우승한 상대여야 하지 않을까?"

- 10번기에 등장한 사람이 중국 일본 사람뿐이었는데 이제 70년 만에 10번기를 소화한 첫 한국인이다. 느낌은? 
"굉장히 영광이다. 지금도 상황이 힘겨운데, 오청원시대는 부담이 엄청났을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번에 이겼으니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

- 마지막으로 바둑팬들에게 
"바둑팬 여러분 그리고 니장건 회장님, 구리, 기자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한국바둑의 침체기에 10번기를 이긴 것은 의미가 큽니다. 
중국바둑과의 대결에서 지는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지만
이제부터는 중국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고 동료기사들도 앞으로 많은 승전보를 전해드릴 것입니다. 
바둑팬 여러분 사랑합니다."



여기까지 3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