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올해로 제2연평해전이 발생한지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대한민국 서해 연평도 부근 NLL(북방한계선) 북서쪽 방향 일대에서 북한 해군 서해함대 8전대 7편대 소속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의 85mm 전차포 선제 포격 도발로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 참수리 357정은 기지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최초 보고된 바로는 4명 전사, 19명 부상, 실종 1명, 무사고 4명이었지만 실종된 한상국 상사가 SSU 대원들에 의해 바다 속에 가라앉은 357정의 조타실에서 발견되었고, 의무병 박동혁 수병이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6명 전사, 18명 부상으로 피해가 늘어났으며 참수리 357정이 침몰했습니다. 이처럼 제2연평해전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잊을 수 없으며 잊어선 안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당시 2002 한일 월드컵 특수를 노린, 방송사들의 시청률 경쟁에 의해 교전 소식은 국민들에게 깜짝 소식이 되긴 했지만 큰 이슈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공중파로 대표되는 방송3사 또한 제2연평해전을 단신으로 처리하고 당일 있었던 3,4위 결정전 중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확전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국가에서 일어나는 재해 등의 위험 사건을 가장 먼저 관심 있게 다뤄야 할 공중파가 위험한 상황을 알리지 않은 채 시청률에만 치중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3연평해전에 대비해서 우리 해군의 전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 함정이 바짝 접근해 대전차 로켓포인 RPG-7로 함정을 공격할 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북한 함정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원거리에서 타격할 수 있는 대함유도탄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윤영하함급(400t급) 유도탄고속함은 레이더에 잘 탐지되지 않는 스텔스 선체에 76㎜ 함포와 대함유도탄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스크루로 기동하던 함정의 추진 방식도 워터제트로 변경되어 더 빠르고 자유자재의 기동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15년전 서해 최일선 NLL의 경비는 130t급의 참수리 고속정(PKM)이 맡았지만, 지금은 400t급 유도탄고속함(PKG)과 210t급 신형 고속정(PKMR)으로 교체됐습니다. 그리고 NLL의 초계 임무를 수행한 1천t급 초계함(PCC)과 1천500t급 호위함(FF)을 2천500t급 호위함(인천급·FFG)과 2천800t급 호위함(대구급·FFG)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들 신형 호위함은 사거리 150㎞의 전술함대지 유도탄을 장착하고 있는데 북한이 육상에서 해상으로 미사일과 각종 포를 발사하면 해상에서 북한의 지상 지휘시설과 지원세력을 응징할 수 있으며 북한 잠수함 탐지 능력이 향상된 소나(음파탐지기)를 장착하였습니다.

 

 

그리고 2016년 6월에 인수한 AW-159 신형 해상작전 헬기 4대를 올해 2월부터 작전 배치하였는데 신형 해상작전 헬기 AW-159는 스파이크 대함유도탄을 장착해 공기부양정을 비롯한 북한 함정을 정밀 타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W-159는 우리나라에 도입된 항공기 중 처음으로 최대 364km까지 탐지할 수 있는 다기능 위상배열레이더(AESA)와 전자광학 열상 장비를 탑재해 원거리 정밀 감시능력을 갖춤과 동시에 체공 시간도 링스보다 대폭 늘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해군이 보유한 북한 잠수함 탐지용 P-3 해상초계기해상초계기는 항구에 정박 중인 함정과 움직이는 육상 표적을 식별할 수 있는 다목적 레이더, 고배율 적외선 및 광학 카메라, 함정은 물론 지상 공격이 가능한 유도탄을 장착하고 있는데 2002년 당시 8대였지만 현재는 16대로 증강됐습니다.

 


이에 북한군은 연평도에서 서북쪽으로 4.5㎞ 지점에 있는 갈도(무인도)에 진지를 구축하고 122㎜ 방사포 6문과 병력 50∼60여명을 배치하였습니다. 북한군의 
122㎜ 방사포는 사거리가 20㎞로, NLL 이남 지역에서 작전하는 우리 해군의 유도탄고속함 등 함정을 직접적인 사정권에 넣고 있습니다. 또한 연평도에서 동북쪽으로 12㎞ 떨어진 무인도인 아리도에도 20m 높이의 철탑에 고성능 영상감시 장비와 레이더를 그리고 20여명의 특수부대원을 배치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리 해군은 한반도의 화약고로 불리는 서해 NLL 주변에서 과거 두 차례의 해전과 같이 제3의 연평해전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3차 연평해전이 벌어진다면 대한민국 해군의 대승이 예상되며 북한군부는 더 이상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재래식 동력함인 CV-63 키티호크(Kitty Hawk)가 2009년 퇴역하면서 미국의 모든 항공모함들이 핵추진함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을 만큼 이제는 의의가 많이 감소하였지만 엔터프라이즈는 세계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961년 취역하였으니 벌써 50여년 가까이 바다를 누비고 있는 셈인데, 수차례에 걸쳐 실전 투입도 되었고 한반도에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에도 등장하여 그 위용을 뽐내고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엔터프라이즈인 CVN-65 가 미 해군 최초의 엔터프라이즈는 아닙니다. 통상 해군의 군함명은 인물명, 지역명, 역사적 사건명 등 여러 사유로 결정되는데 그렇게 작명된 수많은 선명 중에서도 두고두고 기억하여야 할 가치를 지닌 특별한 선명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해군의 충무공 또는 이순신과 같은 함명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영예로운 선명을 지닌 군함이 퇴역하면 새로운 군함이 선명을 승계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세계최강 미 해군에서는 엔터프라이즈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 되는데, 미 해군 함명들 중 가장 많이 계승 되어온 이름이며 또한 이름에 걸맞게 많은 전공을 세웠던 선명이기도 합니다. 1775년 5월 18일 영국으로부터 노획한 70톤짜리 소형 범선이 최초로 엔터프라이즈로 명명된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을 승계하여 왔습니다. 2012년 12월 1일에는 미 해군의 8번째 엔터프라이즈 CVN-65가 버지니아주 노포크 군항에서 퇴역하였는데 버락 오바마까지 참석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미 해군 불침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라는 함명이 미국의 차세대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의 3번함으로 계승될 것이 선언되었습니다.

 

 

 

사실 엔터프라이즈 중에서 전사에 그 명성을 길이 남긴 것은 7호 엔터프라이즈인 항공모함 CV-6 입니다.  1938년 5월 12일 요크타운 클래스 ( Yorktown Class )의 2번 함으로 취역한 CV-6는 미드웨이해전에서 승리를 엮었고 솔로몬해전에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미 해군의 전설이 된 함정입니다. 바로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이 불침의 영광과 전통이 되도록 만든 주인공이었습니다.

 

 

미 해군에 비하면 역사가 일천한 우리 해군은 앞에서 언급한 충무공처럼 역사적인 인물 외에는 승계하여 사용할 만큼 전통 있는 함정명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록 함정명은 아니지만 함번으로 한국 해군의 전설이 되고 있는 자랑스러운 이름이 있습니다. 1999년 발발한 제1연평해전과 2009년 벌어진 대청해전에서 연거푸 대승을 이끈 참수리 325호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특히 참수리 325호의 승전이 빛난 이유는 아군의 피해는 거의 전무한 상태로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전쟁이후 남북 정규군간의 최초 충돌이었던 1999년 1차 연평해전은 국군에게 더 할 수 없는 자신감을 이끌었는데 당시 북한 경비정을 패퇴시킨 것이 바로 참수리 325호였습니다. 그리고 2009년의 대청해전은 잘못된 교전 규칙으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은 승리였던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의 아쉬움을 한방에 날려 보낸 쾌거였습니다.

 

 

참고로 대청해전 당시 북한 경비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 있던 해군 고속정 4척 가운데 ‘참수리 325호’만을 표적으로 삼아 선제공격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군 당국은 "북한 경비정은 우리 고속정 4척 중 참수리 325호를 겨냥, 25㎜와 37㎜ 함포 50여발을 쏴 이 중 15발이 명중되었는데 당시 북한군이 NLL을 넘기 전부터 참수리 325호를 목표로 삼아 도발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었습니다. 

 

325호라는 함번이 정식 함명이 되기는 곤란한 점이 있겠지만 이미 325호는 한국 해군에게 함번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훗날 고속정들이 노후화 되어 퇴역하더라도 미 해군의 엔터프라이즈처럼 후속함정에게 325호의 전통이 승계되어 계속 사용됨으로써 그 용기와 기백이 영원히 알려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1999년 6월 15일 오전 9시경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군의 도발로 벌어진 남북 함정간의 해전으로 당시 한국 해군은 7명이 부상, 고속정이 경미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반면 북한 해군은 어뢰정 1척과 경비정 1척이 침몰하고 다른 경비정 3척도 심각한 타격을 입고 퇴각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게 제1차 연평해전은 우리 대한민국 해군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제1차 연평해전이 13년이 지난 2002년 6월 29일 도합 2척의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정과 등산곶(육도) 388호정이 NLL을 10㎞ 침범하였고 이에 해군 고속정 4척이 교전수칙대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 참수리 358정은 즉시 대응 사격을 하려 했지만 북한 경비정이 357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너무 가까운 거리라 사격 통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제2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대한민국 해군 6명 전사, 18명이 부상당했으며 참수리 357정이 침몰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군은 13명이 전사, 25명이 부상당했으며 등산곶 684호정이 심하게 파손되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해군의 피해가 컸지만 그래도 제2차 연평해전도 대한민국 해군이 승리하였습니다.

 

 

이후 제2차 연평해전은 제1차 연평해전의 참패를 만회하려는 의도에서 계획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게 이후 조사에서 드러났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해군은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돼 있던 교전 수칙을 2004년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과→경고사격→격파사격'의 3단계로 단순화시켜 현장 지휘관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즉각 대응 능력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2009년 11월 10일한반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대청도 인근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북한 해군 고속정 간에 교전이 벌어졌는데 일부 얼론에서는 제3연평해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대한민국 국군 합동참모본부에서는 대청해전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북한 함정의 NLL침범횟수는 천안함 피격사건 이후인 2011년과 2012년 각각 5회에 불과했는데 2013년 9회로 늘어나더니 2014년 13회 2015년 14회로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2016년에는 우리나라 해군과 북한군이 NLL에 대한 단속과 경비를 강화하고 있으며 해상 충돌 가능성도 커지면서 긴장감도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만약 제3차 연평해전이 벌어진다면 제1차, 제2차 연평해전과 어떻게 다른 결과가 나올까요. 만약 북한이 또 다시 서해 북방한계선에서 도발을 한다면 파도가 비교적 잔잔하고 꽃게성어기인 3월~6월과 10월~11월이 가장 유력합니다. 제1차 연평해전 도발일이 1999년 6월 15일, 제2차 연평해전 도발일은 2002년 6월 29일, 제3차 연평해전 도발을 시도했던 날은 2004년 7월 14일이였습니다. 따라서 6월과 7월 사이가 가장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도발형태는 과거와 유사하게 북한경비정과 북한어선단이 우리해역을 다시 침범하면서 시작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위기동과 경고사격으로 함포교전이 발생하고 제3차 연평해전에서는 유도탄 미사일 등 양쪽 피해가 제1차, 제2차 연평해전보다 피해가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북한군이 경고방송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남하를 한다면 우리 해군은 제2차 연평해전과 다르게 경고사격을 주저하지 않고 강력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북한군에게 기습공격을 당하지 않는 이상 우리나라 해군은 제2차 연평해전에서 북한의 기습적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이름을 붙인 유도탄 고속함의 뛰어난 성능과 능력으로 북한군 함정을 압도할 것입니다. 정말 제3차 연평해전이 벌어진다면 대한민국 해군의 대승이 예상되며 북한군부는 더 이상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거친 파도, 강추위와 싸워가며 NLL 해역을 사수하는 해군 장병과 해병대 장병들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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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벌써 14년이란 시간이 지난 정말

 

 안타까운 사건 연평해전에대해

 

포스팅하려고합니다.

 

2002년에 일어난 사건이

 

2008년이 되어서야

 

서해교전에서  연평해전이라 명칭으로

 

개칭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도 못했던 사건이였어요..

 

나라를 지킨 영웅들에 대해

 

알아보는 글을 쓰려고합니다!

 

 

제1차 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북한경비정 4척이 어선20척과

 

 함께 NLL 2km 해역까지 내려왔습니다.

 

이에 해군고속정초계함

 

동원하여 이들을 저지하고

 

북쪽으로 밀어내기위해 선체를 직접 부딪혀서

 

 밀어내는 방식으로 북한함을 NLL밖으로

 

내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교전수칙의 해군은 선체밀어내기

 전법으로 대응하는모습>

 

이 과정에서 선체를 부딪힌 북한함정이

 

 25mm 기관포로 사격을 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어요.

 

당시 참수리 325호의

 

정장인 안지영소령 및 승무원

 

 일부가 부상을 입었지만 초계함과 함께

 

북한 어뢰정 한척과 중형경비정 한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지휘관 : 해군작전사령관 중장 서영길

2함대사령관 소장 박정성

고속정 편대장 소령 정순용

참수리 325 정장 대위 안지영

전력 : 포항급 초계함

참수리급 고속정

피해규모 : 참수리급 고속정 2척파손

7명부상

 

북한군

 

북한군 지휘관 : 불명

전력 : 청진급 경비정

신흥급경비정

상하이-2급경비정

등산곶경비정

대청급경비정

피해규모:1척침몰5척파손

20명 전사(추정)

30명 부상(추정)

 

 

 

 

당시 승리에는 장비의 질이 차이가

 

 크게 작용했었죠

 

모든무기가 수동식이였던 북한군

 

우리 해군의 배를 명중시키기가 어렸웠고

 

우리 해군의 장비는 자동화되어 북한군의 배를

 

자동주준하여 맞출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해군의 대승!

 

그러나...

 

북한의 계획된 도발 2차 연평해전

 

북한은 그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3년동안 만반의 준비를하고

 

계획적으로 도발을 준비하였습니다.

 

<영화 연평해전中 축구응원장면>

 

2002년 6월29일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4강전 경기가 있었던 당일.

 

 

 

북한군의 경비정 두척이 NLL을

 

또 다시 침범하게됩니다.

 

1차 연평해전의 패배의 원인을

 

알고있었던 북한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우리 해군의 배를 이길수없다고 판단!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합니다.

 

화력이 부족한 경비정에 탱크포를

 

달아서 화력을 보강하고

 

떨어지는 명중률을 보안하기위해 우리해군

 

배를 가까운곳으로 유인하게됩니다.

 

<북한군은 배에 전차1포탑을 장착할정도로

많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은 우리 해군의 교전수칙의

 

문제점을 이미 알고있었어요.

 

<영화 연평해전 中>

 

먼저 발포하지 않을것을 알았던거죠..

 

다가오며 시위 기동을 하고있던

 

참수리 357호를 조준하기 시작했습니다.

 

 

 

NLL을 침범한 북한의 등산곶 684호에게

 

경고방송을 하며 시위기동을 하던 우리해군의

 

참수리357호는 가까운곳에서 기회를

 

 노리던 등산곶 684호에게 선재공격을 당하고맙니다.

 

 

북한함정의 이상징후를 눈치 챘지만

 

 교전수칙때문에 선재공격을 할 수가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군의 85mm 전차포의 기습으로

 

윤영하 대위(당시계급)가

 

그 자리에서 전사하게 되었고,

 

기습으로 인해 엔진이 정지하고

 

동력이 나가버린 참수리호에서도

 

어떻게든 전투를 하려던 와중

 

21포와 22포의 황도현 중사와 조천형 중사가

 

 북한군의 집중 사격을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관실내연사로 북한군의 공격에

 

 직접 기관총을 들어 응전했던 서후원 하사도

 

북한군의 공격에 가슴이 뚫려 전사하게 됩니다.

 

의무병이었던 박동혁 상병도

 

부상당한 전후들을 위해 여기저기서 분투하다

 

북한군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게 됩니다.

 

 

분투(奮鬪)그리고 승리

 

부장이었던 이희완중위는 다리가

 

 잘려나간 와중에도 함정을 지휘했습니다.

 

어떤 병사는 손가락이 잘려나간 와중에도

 

 총으로 응사를하며 치열하게 싸웠고

 

부상을 당한 다른 병사들도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영화 연평해전中 한상국하사>

 

결국 북한의 함정에 큰 피해를

 

 입히며 북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수리 357호도 피해가

 

심각하여 결국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최초보고로는 4명 전사,

 

19명 부상, 1명 실종, 4명 무사고 였습니다.

 

이후 실종되었던 한상국 하사가

 

 발견되었고, 전사처리 되었습니다.

 

한상국 하사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을때

 

침몰한 배에서도 끝까지 조타기를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상국 하사가 전사한 장소>


박동혁 상병은 온몸에 100여개

 

이상의 파편이 박혀있었고

 

 이 파편들의 무게를 합치면 3kg이

 

넘었다고 합니다.

 

 결국 박동혁 상병도 병원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대한민국

 

지휘관 : 정장 해군 대위 윤영하

부정장 해군 중위 이희완

병력: 초계함 2대

고속정 6대

피해규모: 참수리 고속정 357호 침몰

6명 전사

19명 부상

 

 

북한군

 

지휘관 : 대위 김영식

병력 : 경비정 2대

피해규모 : 등산곶 684호 파괴

13명 전사

25명 부상

 

 

연평해전의 전사자들

 

최후에 병상에서 숨을 거둔 박동혁 상병을 끝으로

 

정장 윤영하 소령(추서계급), 조타장 한상국 중사,

 

황도현 중사, 조천형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전사자는 총 6명이 되었습니다

 

 

 

정권에게 외면을 받은 전사자들과 유가족

많은분들이 알고있다시피

 

영결식에 당시 대통령이

 

참가하진 않았습니다.

 

 

당시 월드컵 폐막식과 일본과의 정상회담이 있었고

 

 대한민국이 문제없이 안전하다는 제스쳐라는 것과

 

정상회담간 외교적인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는

 

 행동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후에 추모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건을

 

우발적인 사고였다는 식으로 무마하려는 태도,

 

 북한감싸기 등등

 

충분히 비난받을 행동을 사서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사자들의

 

유가족에게 가정먼저 유일하게 위문편지를 보냈던 사람은

 

한국의 정치인도, 군관계자도 아닌 주한미군 사령관이었죠.

 

 

 

교전 후 한달이 지나도록 한국인이 보낸

 

 위문편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SBS에서 다룬후 그제서야

 

정치인들의 위문편지들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당시 대통령과 총리, 국방장관등 각료진등이 영결식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대통령은 추모식에 단한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유가족에 대한 처우

 

 

전사자들을 순직자로 적용한 보상등으로

 

 유족들이 받은 평균 보상금은

 

3천만원대였다고 합니다.

 

 

국가의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군인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에 한상국 중사의 부인은

 

결국 이민을 가게 됩니다

 

<당시 정부의 태도는 유가족을 두번 울리는 짓이었습니다.>

 

 

교전수칙의 변경

 

 참수리 357호가 피해를 입은 가장 큰 원인이었던

 

교전수칙의 변경이 그 이후 이루어 지게  됩니다.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으로 되어 있던 교전수칙은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으로  단순화 되었습니다.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반복되어선 안됩니다.>

 

 

북한의 또다른 도발 대청해전

 

연평해전 7년후의 2009년 북한은 

 

또다시 NLL에서 도발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교전수칙이 바뀐 우리군은 피해없이 

 

북한군에게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357호의 생존자들

 

 연평해전 전투에서 참전하여 살아남은

 

박경수 중사는 이후에도 계속 해군으로

 

복무했으며 가족들의 반대에도

 

 함정근무를 계속 했습니다.

 

그러나 재배치된 근무지가 천안함이었고

 

결국은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생존자인 이희완 소령은 한쪽 다리를 잃게 되었으나,

 아직 군에 남아 교관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신형 유도탄 고속정

 

전사한 6명의 용사들은 해군의

 

신형 유도탄 고속정에 함명으로 명명되어

 

다시금 서해를 지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국을 지키다 희생된

 

그분들에게 지금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