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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40도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진 장진호 전투 +1

 

한국전쟁 기간 중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수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수많은 승리와 패배를 겪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참혹한 패배이자 한국전쟁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투이며 영광으로 남을만한 후퇴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가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현재까지도  독일군소련군이 벌인 독소전쟁 도중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대 동계 전투 중 하나로 꼽히며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입니다. 오늘은 영하 40도 극한의 상황에서 펼쳐진 장진호 전투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잡은 맥아더 장군은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구상합니다. 그리고 서부전선의 미 8군과 동부전선의 미 10군단이 북한군을 격파하며 압록강으로 물밀듯이 진격하면서 한국전쟁은 UN군의 승리로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UN군은 1950년이 끝나기 전에 남한과 북한을 다시 통일 시키기 위해 진격을 서둘렀습니다.

 

 

북한은 통행이 어려운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동서로 양분되어 있고 이에 따라 북진하는 UN군도 두개로 나누어졌습니다. 미 8군이 한반도의 서부해안을 따라 북진했고 한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이 동부해안을 따라 북상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군은 계속해서 미군에게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경고를 했지만 미군은 그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미국의 예상과 달리 중국군이 1950년 10월 19일 국경선을 넘어 비밀리에 북한으로 잠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미 해병대의 원산상륙에 크게 놀란 모택동은 10월 31일 만주로 이동하던 중공군 9군까지 북한으로 들어가 한국군 수도사단과 3 사단, 미 해병대 1사단을 즉시 격파하라는 무선지령을 내렸습니다.

 

 

장진호를 향해 진격하는 미 해병대 1사단 진격로

 

그리고 10월 25일 한국군 1군단이 장진호 서쪽 황초령 협곡에서 중공군과 마주치며 진격을 멈췄습니다. 당시 원산에 상륙하여 북진을 하고있던 미 해병대 1사단도 11월 2일 중공군 124사단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11월 17일 중공군 9 군은 조용히 장진호 부근에 도달하여 먼저 북한에 들어왔던 중공군 42군단과 합류하게 됩니다.

 

 

이 당시 UN군 사령관들이 추측했던 중공군의 규모는 약 3만 5천 명 정도였지만, 실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수는 무려 30만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몰랐던 미 해병대 1사단은 11월 24일 장진호 동쪽의 신흥리와 서쪽 유담리를 점령하며 진격하였습니다. 그리고 11월 27일 밤 15만의 중공군이 사방팔방에서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담리 일대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면서 아비규환이 되었고 비전투 인원을 포함 4천 여명에 불과했던 미 해병대 1사단은 궤멸 직전에 상황으로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그렇게 중공군의 대공세는 계속되었고 미 해병대 1사단은 고립된 채 상황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11월 30일 UN군 사령부는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겹겹으로 둘러쌓고 있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혹한 속에서 협곡을 따라 철수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습니다. 당시 장진호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질 정도로 기온이 낮은 곳이었습니다. 차가운 칼바람은 전차와 차량의 오일을 얼어붙게 했고 소총과 기관총의 기름이 얼어서 작동이 안 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수통의 물은 늘 얼어있었고 추위 속에서 동상환자가 속출하였으며 전사자들의 시신은 순식간에 얼어붙었습니다. 그리고 부상병에게 사용해야 할 수혈관과 모르핀도 얼어붙으면서 장진호는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혹한의 날씨는 미군뿐만 아니라 중공군에게도 가혹했습니다. 중공군은 추위때문에 보급병이 도착하지 않아 제대로 먹지도 못하였고 방한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사가 많아 동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발이 신발 밑창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중공군도 있었고 총과 손이 얼어붙는 바람에 포로가 된 중공군도 있었습니다. 결국 중공군은 미군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날씨때문에 제대로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극적으로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7연대는 12월 4일 6백여 명의 부상자들과 함께 사단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하갈우리에는 4,300명의 부상자들과 1만 명의 병력, 1,500명의 피난민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함흥까지 완벽히 철수하는 일이 남았었습니다. 당시 지휘관은 모든 전투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공중으로 철수하라는 제의를 했지만 당시 미 해병대 1사단 사단장 스미스는 해병대의 불명예라며 그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4,300명의 부상자만 수송기로 공수하고 나머지 인원은 육로를 통해 탈출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위기에 빠진 미 해병대 1사단의 소식은 전세계에 알려졌는데 중국은 승리를 확신하며 당시 전황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미 해병대 1사단장이었떤 스미스는 말 한마디로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습니다.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꾸어 공격하는 것이다"

 

 

그렇게 12월 6일 첫 집결지였던 하남우리를 출발한 미 해병대 1사단은 12월 7일 고토리에 도착하였고 12월 9일에는 중공군이 파괴시킨 수문교에 조립교를 설치해 병력과 차량을 통과시켰습니다. 그 이후에도 살인적인 혹한과 사투를 거듭하면서 철수를 이어가면서 12월 11일 함흥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미 해병대 1사단이 유담리에서 철수를 개시한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7일간 3600명의 미군이 전사,부상,실종의 피해를 입었으며 중공군은 25,000명이 사망하였고 12,500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미 해병대 1사단의 끈질긴 저항과 후퇴 작전 덕분에 중공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함흠지역 진출에 곤란을 겪었으며 덕분에 우리 국군과 UN군이 안전하게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 1사단이 전멸했다면 UN군이 한반도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결국 장진호 전투는 한반도를 구해낸 결정적인 후퇴작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