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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전설이 된 백마부대 +1

 

베트남전 상황이 점점 진흙탕으로 변해가자 미국도 동맹국으로 병력을 지원받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였습니다. 그리고 1964년 5월 존슨 미국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파병을 정식 요청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처음에 맹호부대만 보내려고 했는데 해병대 측이 참전 의사를 강하게 표명한 데다가 채명신 파월 사령관까지 해병대도 전투 경험을 갖게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상부에 건의하면서 해병대 청룡부대까지 파병하였습니다.  

1966년 9월 3일. 서울 중앙청 앞 광장에 도열한 백마부대

이후 미국 험프리 부통령이 서울로 급하게 날아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월남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1개 사단을 추가로 증파해 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맹호부대, 청룡부대에 이어 육군 9사단 백마부대의 베트남전 참전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66년 9월 3일 백마부대 출정식에서 고등학생, 연예인,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장병들의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며 무운장구를 빌었습니다. 시내는 발딛을 틈 없이 인파로 가득했으며 시민들의 응원이 이어졌습니다.

"군인 아저씨, 이기고 돌아오세요."

 "공산군에게 대한남아의 기백을 보여주시오."

"무운을 빕니다. 다치지 말고 돌아오세요."

-월남전과 한국, 백마부대 참전자 수기 -

 

그렇게 백마부대는 1966년 9월 16일 부산 3부두에서 출발하였고 1966년 9월 22일 베트남 나트랑에 상륙하였습니다.  이후 백마부대는 1967년 1월 29일 혼바산에서 벌인 백마 1호작전을 비롯하여 1967년 7월 9일 투이호아에서 벌인 홍길동 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 작전 등

 

 

1973년 3월 11일 철수할때까지 211,714회(대부대 전투 478회, 소부대 전투 211,236회)에 걸쳐 끝없는 전투를 치루며 엄청난 전과를 올리면서 천하무적 백마부대라는 전설을 남겼습니다. 특히 1967년 3월 8일부터 5월 31일까지 2개월간에 걸쳐 맹호부대와 함께 군단급으로 실시한 오작교 작전이 유명합니다. 

 

 

당시 1번국도가 핵심 교통로였기 때문에 반드시 베트콩을 소탕 평정하여 도로를 개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백마부대가 1966년 9월에 배치되면서 맹호부대와 백마부대간의 상호 연계와 지역 안정화를 위해서 판랑와 퀴논간 사이 약 400km구간 1번국도의 개통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남베트남이나 미국으로서도 1번국도의 개통은 남베트남의 물류수송등이나 군사작전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군들도 1번국도를 개통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지만 맹렬한 베트콩들의 반격으로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미군들은 자신들도 못한일을 한국군이 작전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미군 장교들은 현재 1번국도 개통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3월 8일 백마부대 28연대가 베트콩이 취약한 후방지역에서 소탕작전을 시작하였고 3월 15일 맹호부대는 5개 대대의 병력을 연대마다 차출하여 송꺼우 남단 3km에서부터 대규모 소탕작전을 진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월 17일 백마부대는 1번 국도로 계속 북진하면서 투이호아와 밀접한 1번국도 외곽의 서쪽과 북쪽에서 북진의 기반과 맹호부대와 연계를 위한 소탕작전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런데 4월 10일 백마부대 28연대 3대대 11중대가 작전을 마치고 복귀하여 기지에서 쉬고 있었는데 베트콩들이 침투하여 내무반(생활관)에 소련제 방망이 슈류탄이 투척되면서 아군 12명이 전사하고 22명이 부상을 입는 큰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실탄 통행금지

이에 화가 난 맹호부대와 백마부대는 빠른 작전수행을 보이며 연결작전에 들어갔고 맹호부대는 608명 사살 272명 생포의 전과를 올렸으며 백마부대는 265명 사살 145명 생포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총 873명 사살하였으며 아군은 35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이후 맹호부대 선봉인 26연대 3대대 11중대가 M113 6대를 앞세워서 남진을 백마부대 선봉인 28연대 2대대 7중대가 북진을 시작으로 투이호아 18km 북쪽의 1번 국도 지점의 호아다 마을에서 만나는 작전을 시작하였고 5월 31일까지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당시 작전 지역내 베트콩들은 모두 소탕되면서 오작교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오작교 작전 성공으로 남베트남 중부 해안 도로가 완전히 개통되었고 야간에도 민간버스들과 트럭들이 활발하게 움직일수 있는 기반이 확보되었으며 한국군은 1번 국도를 중심으로 북쪽 봉선~판랑까지 총 6800㎢의 작전면적으로 작전활동이 확대되었습니다. 이 작전은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물류수송-경제-통치영향력을 강화하는 결정적 작용을 했기 때문에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들에게는 매우 큰 타격이 된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이 작전에 대해서 미국은 물론 많은 해외 언론들이 한국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는 "나의 군대 생활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한국군의 오작교 작전이며 전략적인 방침과 장병들의 완전 무결한 전술적인 행동으로 상상할 수 없는 베트남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라고 공식 석상에서 여러차례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현재도 베트남 닌호아에서 1번도로를 타고 투이호아 방향으로 가다보면 조그만 언덕이 있습니다. 그 언덕은 예전 백마부대 비행장 옆입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조그만 길로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가면 통신용 송신탑이 세워져 있고 창살너머로 백마 전적비가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