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불리하다 보니 이기자는 생각 없이 대충 뒀는데 이겼네요

-중국 구리 九단에게 대역전승을 거둔 직후 인터뷰-

 

이세돌은 조훈현, 이창호에 이은 세계 바둑 최강의 계보를 이어가는 바둑기사입니다. 세계대회 우승 횟수가 이창호 다음으로 많고, 12세에 입단하여 한국 프로 기사 중 최연소 입단 4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1995년에 입단하지만 2000년부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세돌은 2000년에 32연승이라는 역대 연승 3위 기록을 세우며 '불패소년'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창호의 바둑이 느긋하면서도 안정적인 계산으로 끝내기를 통해 상대를 제압하는 스타일이라면, 이세돌은 압도적인 수읽기를 통한 흔들기로 난전으로 끌어들여 상대를 혼란시키고 압살해버리는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2016년 3월 9일부터 15일까지 구글 딥마인의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대국을 치렀습니다. 알파고는 이세돌 이전에 2013-2015년 중국 프로 기사이자 유럽 바둑 챔피언인 판 후이(2단)과 대국을 하였는데 5-0으로 알파고가 이겨버렸는데, 인공지능이 현역 프로 바둑기사를 이긴 건 사상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세돌 본인은 물론 커제나 이창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바둑기사가 판 후이와의 대결 양상을 기준으로 이세돌의 5-0 완승 또는 4-1로 이길 것을 자신했으나, 판 후이와의 대결 이후 알파고의 무서운 성능 향상으로 9일에 열린 1국에서 알파고가 186수 만에
불계승, 10일에 열린 2국에서도 알파고의 불계승으로 이세돌이 2패를 당했고, 12일에 열린 3국 역시 초읽기에 들어가는 접전 끝에 알파고의 176수 불계승으로 결국 3-0이 되며 알파고의 승리로 끝이 나버리며 인공지능에 압도당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바둑계의 대사탄으로 간주되던 이세돌이 한낱 기계 앞에 대굴욕을 맛보며 처참하게 박살나는 모습에, 이 때까지만 해도 바둑계 전체는 물론 인류가 인공지능 앞에 허무하게 몰락하는 게 아니냐는 비관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사상이 대한민국 전체를 강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4국에서 드디어 이세돌이 알파고를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4국에서 불리한 형세에 들어간 알파고가 승률이 낮아질수록 더더욱 잦은 실수를 하였고 이세돌은 1개 남은 초읽기로 1시간가량 버티는 대혈전 끝에 알파고를 이겨 불계승을 거두었습니다. 알파고가 팝업창으로 "AlphaGo resigns. The result "W+Resign" was added to the game information"이라는 메시지를 보이며 패배를 선언하였고 해설진들은 78수를 신의 한 수라고 평가했습니다.

 


알파고와 바둑을 하면서 오히려 기력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알파고와의 대국을 중계하던 프로 9단 해설진들이 알파고의 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세돌은 표정에서 동요를 보이며 알파고의 수를 이해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세돌이 세 판 내리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계를 제외한 인간 중에서는 최정상급의 자리를 지키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대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인공지능(AI) 알파고가 27일 세계 바둑 행킹 1위 커제(柯潔) 9단과의 대국을 마친 뒤 바둑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커제9단은 사실 이세돌 9단이 지난해 알파고와 첫 번째 대국에서 패배하자  "알파고가 이세돌마저 꺾었지만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가 하면 두 번째 대국 패배 뒤에는 "인류 대표의 자격이 없다"며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알파고에 완패했습니다.

 

 

이에 따라 알파고의 전적은 이세돌 9단과 5번기, 연초 인터넷 대국 60판, 커제 9단과 3번기, 단체 상담기까지 합쳐 모두 68승 1패로 남게 됐습니다. 알파고가 지난해 1월 네이처 논문으로 정식 데뷔하기 전 판후이(樊麾) 2단에게 5전 전승을 거둔 것까지 합하면 73승 1패입니다. 그렇게 알파고에 유일한 패배를 안긴 주인공은 이세돌 9단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전 세계 사람들의 스포츠, 바둑

그 중에서도 한국 바둑의 영웅 조훈현에 대해 아라보자


쓰고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1편 2편으로 나눠 보려고해...

한번에 쓰고 싶었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면 여러분들이 읽기에도 부담될 것 같고

쓰는 나도 힘이 들어서..ㅋㅋ

어쨌든 시작한다!!


 

 

젊은시절  여자 깨나 울렸겠다


조훈현은 전남 목포 출신의 53년 생으로 올해 나이 64세를 맞은 노장 바둑기사야


조훈현의 어린시절부터 거슬러 올라 가보자면


조훈현의 아버지 조규상씨는

바둑을 즐겨두던 사람이었어 그리 잘 두는 편은 아니었다고해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 7~8급 수준이었다고 하니까


당시 조훈현의 집은 2층집이었는데 

2층은 아버지가 쓰시던 서재가 있었어

아버지는 조카사위와 바둑을 두며 담소를 즐겼는데

서너살 무렵부터 조훈현은 아버지가 바둑을 두는걸 옆에서 지켜보며 바둑을 배웠다고 해

이때까지도 아버지는 한 번도 제대로 바둑을 가르쳐 준적이 없었어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와 조카사위가 바둑을 두는데

4살배기 조훈현이 아버지에게 거기에 두면 안된다고 훈수를 둔거야

아버지는 그말을 무시한 채 그냥 두려고 했던 곳에 두었고

나중에 바둑이 끝난 후 복기(바둑이 끝나면 수순을 거슬러 올라가며 패인을 찾아 연구하는 것)

를 하며 아까 어린 조훈현이 훈수를 두었던 곳이 큰 패착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돼


어깨 너머로 배운 4살배기 놈이 그정도 수읽기를 했다는 것에 아버지와 조카사위 모두 놀랐지


그날 이후로 조훈현의 아버지는 조훈현에게 정식으로 바둑을 가르쳐주었고

바둑판 앞에서 만큼은 어린아이 답지 않게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며 

바둑을 재밌어하는 아들을 보며 대견해했어 


어느새 비록 접바둑이지만 아버지를 이길 정도가 된 조훈현은

자신을 기원에 데려가 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라댔고

조훈현의 사촌매형인 서울대출신 고등학교 수학교사 박승곤이라는 사람이

조훈현을 기원에 데려가야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아버지, 사촌매형과 함께 어린 조훈현은

당시 목포에서 가장 유명한 기원인

'유달기원'을 찾아가지


아버지가 어린 조훈현을 기원에 데려가기 싫어했던 이유는

당시 기원은 내기바둑꾼들이 우글대는 담배연기 자욱한

시장바닥보다 더한 질 안 좋은 곳이었거든...

아마도 아버지는 조훈현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바둑으로 대성할 수 있을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거야


어쨌든 5살배기 조훈현은 그자리에서

유달기원의 원장과 9점 접바둑을 이겼고

원장은 조훈현에게 특별입장을 허락해 주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기원은 어른들이나 들락날락하는 어른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어린 조훈현도 언제든 기원에 와서 

바둑을 둘 수 있게끔 특별하게 허락을 해 준거지


그러던 중 갑자기 조훈현의 집안의 가세가 기울게 되었고

조훈현의 아버지는 

당시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가 살던 큰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가세가 이렇다보니 아버지 조규상은 바둑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던

막내 조훈현을 반드시 바둑으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에 

시장에 나가 아내와 함께 야채장사를 하며

장사가 끝나면 아들을 데리고 매일같이 당시 서울의 최대기원이었던

명동의 '송항기원'에 출퇴근을 시키게 돼

이때는 아직 한국기원이 만들어지기도 전이라

故조남철 9단이 운영하던 송항기원이 서울에서는 가장 유명한 기원이었어

 

 

 

 

故조남철 9단


잠시 故조남철 9단에 대해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조훈현이 한국바둑의 세계적 입지를 넓혔다면

조남철은 한국바둑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초대 국수(國手)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기사이자 일본 최초의 한국인 프로기사야

한국전쟁 후의 혼란했던 한국에 바둑보급을 위해 힘썼던 분이야

한국전쟁에도 참전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 자신이 운영하던

기원이 포탄에 맞아 박살이 나기도 했어

오늘날 한국기원을 설립하기도 한 분이고 

한국에 프로기사 제도와 바둑용어 정립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훈현과 같은 시대의 

프로기사인 김인, 하찬석, 윤기현 또한 

모두 조남철의 문하를 거쳤어

한국 바둑계에서 이룬 업적으로만 따지자면 

조훈현, 이창호도 그 누구도 조남철의 발끝도 못 쫓아가지

아무튼 대단한 분이야


조훈현의 아버지는 당시 그런 한국 바둑의 최강자 조남철에게

조훈현의 지도대국(접바둑으로서 고수가 하수의 기력을 알아보고 지도를 해주는 것)을 부탁하고

목포에서 올라온 바둑신동이 있다는 말에 조남철은 흔쾌히 지도대국을 승낙하지


조남철은 한 눈에 조훈현의 탁월한 기재(바둑을 두는 재능)를 알아보았고

그때부터 기원에 다니며 조남철의 밑에서 바둑을 배우게 돼


그러다 조훈현은 9세의 나이에 

제 16회 한국 바둑 프로입단대회를 통과하고

한국 프로기사로 당당히 입단을 하게 된다

이 기록은 세계 최연소 프로입단 기록으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어

보통 프로바둑계에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설이 있는데

10대에 프로입단을 하면 대성을 하고

20대에 프로입단을 하면 평범한 기사로 남는다는 거야


이 말은 10대에 프로입단을 하는 것이

엄청난 기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도 엄청 빠른거지만 조훈현은 그것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프로기사의 레벨에 오른거야

 

결국 조남철은 조훈현의 아버지에게 일본유학을 권유하게 돼

당시 50~60년대 한국은 전쟁 후의 격동의 시기였고 

바둑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반이 전무했어

조남철 본인도 일본에서 바둑을 배운 뒤 

일본에서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조훈현 정도의 기재를 가졌다면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필수라며 조훈현의 아버지를 설득하지


조남철과 같은 선구자가 없었더라면 

애초에 조훈현도 유학을 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럼 불세출의 영웅 

조훈현도 조훈현의 내제자인 이창호도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지..

물론 이건 가정이니까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어ㅋㅋ

어쨌든 여기서 조훈현의 아버지는 조훈현을 일본으로 보내는 결단을 내리게 돼


그리고 조훈현은 혈혈단신 10세의 나이로 홀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조훈현의 부모는 한국에서 일을 하며 

조훈현의 유학비를 대야 했기 때문에 함께

이민을 갈 수가 없었어...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조훈현의 집안 사정이 좋지 못했거든

그래서인지 조훈현의 일본유학이 결정되자 조선일보에서는

흔쾌히 조훈현의 항공료를 전액 지원해준다


조훈현은 당초 조남철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기타니9단의 가문의

내제자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일본 바둑계에서 기타니9단과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던 세고에 겐사쿠9단의

내제자로 들어가게 돼


故세고에 겐사쿠 9단


세고에 겐사쿠9단은 생전에 단 3명의 제자만을 거뒀어

세고에 겐사쿠 문하의 또다른 유명 기사로는 오청원9단과 하시모토9단이 있는데

이 둘은 일본 바둑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전설들이야

그 중에서도 오청원 9단은

약 20년 간 일본 바둑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엄청난 사람이야

당시 일본은 한,중,일 중 그 상대가 없을 정도로 바둑 강국이었으니

여기서 20년간 최강자라면 역대급 바둑 기사인거지

결국 세고에 겐사쿠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최강자를

모두 키워낸 인물이 돼


아무튼 조훈현이 일본에 갔을 때 

세고에 겐사쿠는 이미 70세를 넘긴 노인이었는데

제자로 받아달라는 조남철의 부탁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조훈현과 시험삼아 지도대국을 두어 본 뒤 기재를 보고 깜짝놀랐다고 해

그 당시 세고에9단은 나이가 너무 많아 은퇴한 뒤

제자를 두지 않고 휴식기를 취하는 중이었던 터라

조훈현을 거둘 생각이 없었으나

조훈현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거지


같은 시기 당초 조훈현이 들어가기로 내정되어 있었던 기타니 도장에는

세 살 아래의 조치훈이 바둑을 공부하고 있었어

일본유학이 결정되었을 때 부터 사실은 일본 최고 최대의 도장인 기타니 도장에

들어가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조훈현이 만약 세고에를 만나지 못하고

기타니 도장에 들어갔다면 조훈현과 조치훈, 

쌍조의 만남이 좀 더 빨리 이루어 졌을지도 몰라

조훈현과 조치훈은 나중에도 다루겠지만 

젊은 시절 한국의 최강자와 일본의 최강자로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거든


세고에9단은 

한국에서 온 어린 조훈현을 거둬 바둑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친아들처럼 키워

정말 자식처럼 키웠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세고에는 후에 조훈현이 병역문제로 한국으로

떠난 뒤 자택에서 목을 메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의 유서에

조훈현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기뻤다고 밝혀...


이게 무슨 뜻이냐면

바둑은 본래 중국에서 시작된 것인데

이걸 일본에 전파해준 것이 그 옛날 백제 사람들 이었거든

천년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어쨌든 세고에는 이것이 일본이 한국에

은혜를 입었다고 보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어떤 면으로는 침략으로 인해

한국에 큰 피해를 가져다 준 일본의 국민으로서

마음의 빚 또한 지고 있었다고 봐


어쨌든 그렇게 세고에 문하에서 온갖 허드렛일과

바둑공부,학업에 매진하여 일본 유학 3년만에 일본기원의 프로입단대회 또한

통과하고 당시 일본 최연소 입단기록과 타이를 이루게 돼

당시 나이는 13세...

정말 엄청난 재능이지

그리고 매해 승단대회를 통해 단수를 올려가게 돼




그렇게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실력을 키워가던 중 

조훈현의 바둑 인생 두번째 스승인 '후지사와 슈코9단'을 만나게 된다

세고에 9단이 어린 조훈현에게 진정한 바둑의 의미와 정신적 자세를 가르쳤다면

조훈현에게 바둑의 기술과 실전싸움을 가르친 것이 바로

이 후지사와 슈코 9단이야

 

 

故후지사와 슈코 9단


정상급 바둑기사들은 보통 한두개의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후지사와 슈코는 '괴물' '괴물 슈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정상급 기사였어

마르고 날렵한 외모와는 다르게 바둑에서는 엄청난 힘을 구사하며

빠른 계산과 전투로 상대를 압살해버리는 스타일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지


우연찮게 슈코의 연구실에 들렀던 조훈현은

후지사와 슈코를 만나게 되고 한국에서 유학온 조훈현의 기재를 본

후지사와 슈코는 빠르고 정확한 조훈현의 솜씨에 감탄하게 돼

슈코는 원래부터 속기를 강조한 '속기파'였거든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늘 속기에 대해 강조를 했다고 해

빠르게 두어야 바둑에 대한 감이 날카로워 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어


그런데 조훈현은 빠르게 두면서도 정확하게 두었기 때문에

그런 그가 반하지 않을 수 없었지

조훈현은 이후로도 후지사와의 연구실에서

바둑을 공부하고 그의 영향을 받게 돼


한 번은 조훈현이 후지사와의 연구실에 찾아간 날

연구실의 멤버였던 아베 요시테루 당시 6단과 만나

당시 조훈현은 2단이었는데 이때가 아베와 명인전 예선에서 만나 이긴 후 였어

조훈현에게 패한 아베가 먼저 내기바둑을 청한 거야

그냥 두면 재미없으니 돈을 걸자는 거였어

하지만 조훈현은 내기바둑을 뒀다간 세고에 스승님께 혼난다며

내기바둑을 거절해

재밌는 건 이 내기바둑을  옆에서 종용한 사람이 바로 후지사와 슈코라는 거야

슈코는 옆에서 조훈현에게

'선생님이 아실리 없으니 걱정말고 둬라'라는 식으로

조훈현의 등을 떠밀어

조훈현의 바둑에 매료되어 있던 후지사와는 

그런 장난으로 조훈현의 실력을 더 보고 싶었던 거지


마지못해 조훈현은 아베와 백엔짜리 내기바둑을 두게 되고

앉은 자리에서 6판을 내리 발라버려

당시 프로 6단이었던 아베는 2단밖에 되지않는 조훈현에게

치욕적인 6연패를 당하고 6백엔을 주게 돼

그런데 결국 이게 세고에 스승의 귀에 들어가게 된거야

6연패를 당한 아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걸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녀

조훈현이 엄청나다는 소문을 내고 다닌거지


첫번째 스승인 세고에는 성품이 강직하고 고고한 사람이었지만

후지사와는 괴짜에다 털털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어


이 소식을 들은 세고에는 진노했고 당장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조훈현을 집에서 내쫓아버려

그따위 정신상태로는 성공할 수 없으니 한국으로 꺼져버리라는 거야

조훈현은 울고불고 빌어봤지만 결국 쫓겨나게 되었고

도쿄거리를 전전하던 조훈현은

한국식당에 들어가 설거지든 뭐든 할테니 받아달라며 부탁을 해


그렇게 접시닦이로 2주일 간 식당에서 일을 하던 조훈현은

주위 바둑계 인사들이 세고에 9단을 거듭 찾아가 조훈현의 입장을 대변해주며

내기바둑의 의도가 불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고

결국 세고에 스승은 의지를 꺾고 조훈현을 다시 집으로 불러들여


그 내기바둑 6판으로 큰 교훈을 얻게 된

조훈현은 살면서 다시는 내기바둑을 두지 않았다고 해

그 이후로 조훈현은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일본 바둑계의 신성으로 거듭나게 되었지


하지만 스승 세고에 9단에겐 근심이 있었어

그건 조훈현의 군대문제였지

일본과 달리 징병제였던 한국의 사정상

조훈현의 입대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어

물론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군대는 다녀와야 하는 것이지만

이제 막 실력이 만개하고 있는 제자를

3년씩이나 군대에 보내는 것은

제자의 실력을 썩힐 수 있다는 걱정때문이었지

스승 세고에 9단은 입대문제를 해결해보고자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결과는 헛수고였고 결국 1972년 군입대 문제로

조훈현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세고에 9단은 이때문에 식욕까지 잃고 몸저 눕게 돼

얼마나 조훈현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지


결국 조훈현의 입대 후 4개월 만에 스승 세고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에 두가지를 당부하는데

첫번째는 늙은 몸으로 더이상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않아 떠난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한국으로 떠난 조훈현을 꼭 일본으로 다시 데려와 대성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어...


그리고 위에서 말했다시피

조훈현에게 바둑을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했고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 기뻤다고 밝혔지


세고에 9단의 정확한 자살 원인은 오직 본인만이 알겠지만

애제자의 군입대와 그의 진정한 성공을 지켜보지 못하게 된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








자 여기까지가 1편이야

 


 


 

 

                                    

이세돌 九단


지난 3편에서 라이벌 구리와의 십번기에서 승리하며
침체된 한국 바둑을 되살리기 위해 
재도약의 의지를 불태운 이세돌이었어

보통 바둑기사들은 서른을 넘기면 하락세를 걷게 되는데
2014년 이세돌이 서른 둘이었어
20대 때 만큼 압도적인 우승 횟수를 보여주진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2014년까지 꾸준히 국내 기전과 세계기전에서
모두 우승을 거두며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었지



이 당시 한국 바둑계는 이세돌을 포함한
아래의 3강이 주도하는 모습이었어

 

               

박정환 九단

박정환은 93년 생으로
올해 4월까지 29개월 연속 한국 프로기사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현재 한국 바둑계 1인자야
하지만 통산 세계 대회 우승이 2회 뿐이어서
'국내용'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분명 기재는 뛰어난데 뚜렷한 개성이 없어 아직 팬들로 부터 별명이 없어
그나마 얻은 별명이 '국내용'...
사실 별명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프로기사에게 별명은 굉장히 중요해
별명이 없다는 건 그만큼 팬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이니까
기사가 가진 별명의 숫자로 그 기사를 판단하기도 해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기사 중에 하나야

 

김지석 九단

동안으로 유명한 김지석은 
89년생으로 의외로 나이가 꽤 돼
현재 박정환과 함께 한국 바둑계의 미래로 불리고 있는 기사야
예전 이세돌이 인터뷰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 최강이 될 만한 후배 기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김지석을 꼽은 적이 있다
공격적인 기풍으로 전성기 시절 이세돌과 가장 닮아있어
24세라는 이른 나이에 서울대학교 대학원 출신 일반인과 결혼하였고 
아버지가 대학교수, 어머니는 약사라는 점에서 '엄친아'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영훈 九단

이창호 이후 어린 시절 부터 형세판단 면에서 탁월한 기재를 보여
이창호의 '신산神算'이라는 별명을 이은 '소신산小神算'으로 유명했어
전투능력이나 승부감각 등은 위 두명에 비해 떨어지지만
셋 중 수읽기와 끝내기 능력은 박영훈이 가히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철한 九단


이 외에도 최철한,목진석,강동윤 등을 포함해 
확실한 최강자가 없는 춘추전국시대가 이어져 오고 있었지
한 동안 세계 최강의 자리를 지켜온 이세돌의 위세가 약해졌으나
조훈현-이창호-이세돌의 계보를 잇는 
뚜렷한 최강자가 나오지는 않고 있다

그나마 박정환이 랭킹 1위를 오랫동안 유지하며 
이세돌의 후계자로 가장 유력해 보였는데
박정환 마저도 세계대회에서는 번번이 탈락하며 
프로기사의 커리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계무대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
이세돌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8,90년대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바둑이
2000년대 부터 차츰 인기를 잃어갔고
2010년대를 지나서는 그 인기가 바닥을 치게 되는데
(현재는 이세돌 덕분에 약간 상승세에 있어)

이세돌은 이러한 한국 바둑계를
살리기 위해서는 프로 기사들이 세계무대에서 예전과 같은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수 밖에 없다며 후배 기사들을 독려했어
사실 구리와의 십번기도 뒤돌아선 바둑팬들의 관심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어

그렇게 이세돌은 십번기 이후 맞이한
첫 세계 대회인 제 19회 삼성화재배에 출전하게 된다
 

 

2014년 제 19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 진출자

 

8강에서 탈락하게 된 이세돌 九단


아쉽게도 이세돌은 이 대회에서 
8강에서 만난 중국의 강호 스웨 九단에게 패해 탈락하게 돼
스웨는 이후 4강에서 한국의 김지석 九단을 만나 패하게 되고
김지석은 결승전에서 중국의 탕웨이싱을 만난다

 

 

2014 제 19회 삼성화재배 우승을 차지한 김지석 九단
 


이 대회는 김지석이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2015년 
이세돌은 제 20회 삼성화재배에서 
다시 한 번 이 대회 우승을 노리게 되는데
바로 이 대회 4강에서 중국의 커제 九단과 처음으로 맞부딪히게 돼

 

 

 

 

 

커제(柯洁) 九단

커제는 2008년 입단한 중국의 신예 기사야
사실 입단은 2008년에 했지만
2013년 까지 별다른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어
2013년에도 삼성화재배 16강 진출 정도의 성적이 고작이었지
그리고 이듬해 2014년 중국 국내기전인 아함동산배에서 첫 우승을 차지하는데
이마저도 중국 기전중에서 마이너로 분류되는 소규모 대회였어
이때까지 중국에서는 그저 그런 기사로 평가받고 있었는데
2015년 세계대회 제 2회 바이링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첫 세계대회 우승을 거뒀어
단계적으로 실력을 키우면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갑자기 확 뜬 케이스야
그래서 작년까지도 커제는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이제는 명실상부 세계최강으로 인정받고 있지

어쨌든 20회 삼성화재배에서 이세돌과의 악연이 시작된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여기서는 이세돌의 압승이 예상됐어
커제는 입단 후 이렇다 할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고
중국 내에서 평범한 기사로 평가받던 커제가 
갑작스레 메이저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 4강까지 진출한 상황이었으니까

 

2015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준결승
이세돌 대 커제

하지만 결과는 이세돌의 처참한 2대0 패배
이런 충격적인 결과에 중국 취재진은 물론 한국 취재진 모두 놀랄 수 밖에 없었어
이때 한국에서는 이세돌이 소위 꿀대진을 만났다며 낙관하고 있었는데
이세돌이 커제에게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보고 2대0으로 발려버렸다

이때 대국을 지켜보던 검토실의 어린 기사들은
"오늘 백(이세돌)처럼만 두면 나도 이길 수 있겠다"
라며 이세돌의 형편없는 경기력을 문제삼았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상대는 당시 족보도 없이
준결승 까지 올라온 커제였으니까

준결승전 해설을 맡았던 유창혁 九단도 이세돌의 경기력을 지적했다
 

 

경기 승리 후 인터뷰에서 커제는

“어릴 때 이세돌 9단의 기보를 보며 공부를 했었다.

이번이 첫 대결인데 역시 그의 번뜩이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다만 이세돌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

결승 상대는 누가 올라와도 어렵겠지만 스웨 9단과 두어보고 싶다.

그동안 전적도 비슷해서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 현재 삼성화재배, LG배, 몽백합배를 남겨두고 있는데

백합배는 특히 중국 주최의 대회인데다 4강에 중국 선수로는 나 혼자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 욕심이 난다. 솔직히 3개 중에 하나만 우승했으면 좋겠다”라며

이세돌과의 첫 대결 소감을 밝혔어


이후 커제는 자신이 대결 상대로 원하던 스웨 九단과 결승전에서 만나

승리를 거두고 내친김에 우승까지 차지하게 된다

 

 

 

2015년 제 20회 삼성화재배 우승을 차지한 커제

이에 중국과 한국의 바둑팬들은 모두 커제를 주목하기 시작해
당시 중국 바둑계도 우리나라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압도적인 최강자 없이
스웨,탕웨이싱,판팅위,미위팅 등 다수의 기사들이
우승 경쟁을 펼치고 있었지
이때 부터는 커제도 그들과 함께 우승경쟁을 펼치는 구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세돌은 이때 까지도 커제를 그렇게 의식하지 않았어
물론 삼성화재배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중국은 예전부터 반짝 활약하다 사라지는 기사들이 많았거든
꾸준히 압도적 강세를 이어왔던 적이 한번도 없었어
물론 그것이 당시에는 한국의 최강자들이 
너무 강한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래서 이세돌은 커제도 반짝 하다 말거라고 생각했을거야
이때까지는 말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커제와 이세돌은 다시 한 번 맞붙게 되는데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결승전이었어
몽백합배는 2014년 중국에서 처음 개최된 신생 기전이야

이곳에서 이세돌은 커제에게 당한 수모를 갚아줄 좋은 기회를 얻게 되지
 

몽백합배 결승전 직전까지의 이세돌과 커제
아직도 커리어에서는 커제가 이세돌을 따라잡기엔 멀었지

 

2016년 월간바둑 2월호 표지를 장식한 이세돌과 커제

 

제 2회 몽백합배 준결승 박영훈 대 커제

커제는 여기서 한국의 강호 박영훈 九단을 꺾고 결승에 진출하게 돼
이 당시까지 커제는 중국 갑조리그에서 부터 이어진
백번으로 35연승을 이어가고 있었어
그리고 그 기세로 중국 자국랭킹 1위를 달리고 있었지

그래서 커제는 '백번불패'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지
흑번에서도 커제는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백을 잡은 커제는 좀처럼 지는 법이 없었어 
때문에 중국에서는
백의 덤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게 돼

중국은 한국과 다르게 백에게 덤으로 7집반을 주고 있어
이에 반해 한국과 일본은 덤을 6집반이다
(덤은 흑이 먼저 두어서 얻는 이득을 백에게 집을 줌으로써 상쇄시키는 것)
 

이세돌을 도발하는 커제


그런데 결승전이 열리기 전 전야제에서
커제는 결승전에 대한 자신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세돌은 확실히 스웨보다 약하다. 
그가 우승할 확률은 5%에 불과하다. 결국 내가 95%의 확률로 우승을 거둘 것."
이라며 이세돌을 도발하게 된다

이건 마치 어린 시절 이세돌을 보는 듯한 파격적인 도발이었어
과거 이세돌은 
"이세돌 본인이 생각하는 세계 최강의 기사"
를 묻는 중국 기자를 상대로

"조훈현,이창호,요다 9단 정도가 세계최강이라 불릴 만한 기사들이다."
라고 답변하며 중국 기사를 언급하지 않은 적이 있거든

결국 그 중국 기자가 당시 중국 최정상급 기사였던
"마샤오춘 9단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질문하자
"아 마샤오춘은 빼주세요"
라며 중국언론을 도발했던 적이 있어

이에 화가난 중국기자는
"그럼 일본에서 활약한 오청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그의 기보를 공부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라며
도발을 멈추지 않았지

한국팬의 입장에서는 재밌는 일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도발을 당한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어
이 때문에 이세돌은 지금도 중국팬들에게 감정이 좋질 않아
그나마 이세돌이 과거에 쓰촨성 지진에
우승상금 전액을 기부했던 일로 조금 감정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아마도 커제는 상대가 과거에 중국을 도발했던 이세돌이었기에
이런 도발을 서슴치 않을 수 있었을 거야
만약 상대가 중국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신처럼 추앙받았던
이창호였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싶어

그렇게 화제를 낳으며 시작된 몽백합배 결승전 제 1국

 

제 2회 몽백합배 결승전 제 1국

공교롭게도 이 대국에서 커제는 백을 잡게 되었고
이세돌은 흑번으로 시작하게 되었어
백번에서 35연승을 달리며 무적의 모습을 보이고 있던 커제를 상대로는
출발이 좋지 못했지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1국(장면도 1~143)

이세돌은 이 대국에서 처음부터 엄청난 공격을 퍼부으며
커제를 흔드는 작전을 펼치게 된다
커제는 흑을 쥐었을 때와 백을 쥐었을 때
기풍의 차이를 보여왔어
흑을 쥐었을 때는 초반부터 상대를 공격해서 실리로 앞서나가는 전략을 주로 썼고
백번일 때는 처음부터 단단하게 수비적으로 나가서 덤 7집반의 이점을 살리는 전략을 취했어
이세돌은 이런 커제의 전략을 알고 있었고
커제에게 초반부터 쉽게 집을 내주면 안된다고 판단을 한거지

이세돌에게 공격을 당하며 집으로 많이 손해를 본 커제는
좌변의 흑대마를 잡아야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커제도 물러서지 않고 흑대마를 집요하게 공격하며 접전을 펼치게 돼
하지만 흑의 143수로 인해 백은 역으로 중아에 큰 집을 내주게 되었고
이 수가 결국 승착(승리를 결정짓는 수)이 되어
143수 만에 커제는 돌을 거두고 만다

사실 이세돌은 젊은 시절 공격 일변도의 기풍을 보였다면
서른을 넘기면서 부터는 그 기풍이 바뀌어서
수비적으로 실리를 취하는 기풍으로 바뀌게 되었거든
물론 이때까지도 상황에 따라 전투를 안한 것은 아니지만
전투보다는 상대의 공격을 역으로 받아치는
타개 위주의 기풍을 보이게 돼

보통 바둑 기사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기풍이 바뀌는 일이 흔하게 있어
전투와 실질적인 이득(집)을 선호했던 기사가 나중에는
타개와 세력을 선호하게 되고
속기를 중시하던 기사가 장고를 하게 되고
장고를 하던 기사는 속기로 두게 되고
이상하게 보이지만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이세돌은 대국 전 도발에 대한 영향이었는지
상대에 대한 맞춤 전략이었는지
과거 '리틀 전신'으로 불리던 그 때의 이세돌 처럼
시종일관 커제를 공격해 커제에게 항복을 받아내며
커제의 백번 35연승 또한 여기서 멈추게 된다

이세돌이 먼저 승리를 거두며 기분좋은 출발을 보였어
그리고 다음날 이어진 제 2국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2국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2국(장면도 1~143)


1국에서 흑으로 기분좋은 승리를 거두었던 이세돌은
흑번에서는 백번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커제였기에
이 날도 이세돌의 승리가 예상됐어
그리고 실제로 이세돌이 대국 중반부터 중앙의 흑집을 부수며 
승기를 잡아 지기 힘든
유리한 상황을 연출해내며 2연승을 거두는 듯 싶었지만
흑의 131수로 좌상귀의 백이 모두 잡히게 되어
161수 만에 이세돌은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세돌은 대국 후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내가 겪은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가장 큰 역전패를 당했다."
라며 소감을 밝혔고
당시 해설을 맡았던 박정상 九단은 
"이기는 길이 무수히도 많았는데 도대체 왜 졌는지 모르겠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을 정도였어


그렇게 승부는 1대1로 팽팽해졌어
이틀 후 속개된
결승전 제 3국은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3국

이 바둑은 이세돌이 중앙의 흑대마를 살릴 수 있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 처럼 보였지만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커제는 집요하게 
이세돌의 흑대마를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이세돌이 집 손해를 거듭하며
결국 돌을 거두고 말았어


이후 이어진 제 4국

이후 이어진 4국에서 이세돌은 다른 때보다 더 비장해 보였어
2대1로 승부가 벼랑 끝 까지 몰렸기 때문도 있지만
2국의 대역전패 후 이어진 3국의 아쉬운 패배

아마 전 날의 패배를 기점으로 
이세돌은 커제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
'그저 겁없는 패기의 신예기사'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호적수'로서 생각을 바꾼거지

사실 나는 이세돌이
그동안 커제를 얕보고 있었다고 생각해
말도 안되는 역전패를 당한 것도 그렇고

앞서 커제가 삼성화재배에서 이세돌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후의 행보를 보아도 결과론적으로 커제는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

바둑격언 중 가장 유명한 '경적필패輕敵必敗'라는 말이 있어
'적을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한다'는 뜻이지
이세돌은 다시 한 번 이 격언을 세기고 4국에 임했으리라 생각해

결국 4국의 결과는 162수만의 백 이세돌의 불계승이었다
승부는 결국 제 5국 결승국까지 가서야 가려지게 되었어
 

 

제 2회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 제 5국(장면도 1~281)

시작된 승부는 초반부터 치열했어
양 쪽 모두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기에 최강수로 나올 수 밖에 없었지
전투는 거듭되었고
집의 균형은 계속해서 유지됐어
승부를 알 수 없었던 것이지
하지만 중반 이후 상중앙 백의 넉점(76,78,80,116수)이
흑에게 끊어 잡히게 되며 흑의 집이 크게 불어났고
우열을 가릴 수 없던 승부에서 백이 상당히 불리해져 버렸어
만약 이것이 결승국이 아니었다면 이 때 백이 돌을 던졌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불리했지

하지만 여기서 지면 그대로 끝이나는 상황이었기에
이세돌은 끝까지 추격했고 끝내기에서 상대의 실수를 유도해
결과를 뒤집는 수 밖에는 없었어
그 와중에 흑을 쥔 커제가 끝내기에서 245수째 작은 실수를 하며 
오히려 백이 반집승을 거둘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어
승부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상황까지 이어졌지

이 부분에서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는데
한국과 중국의 계가 방식이야

이 몽백합배는 중국에서 개최되기 때문에 
중국식 바둑 룰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중국식은 한국,일본식과 계가(집을 세는 것) 방식에 약간 차이가 있어

 

한국과 일본식의 계가


우선 위 사진은 정확히 따져서 완벽한 계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설명하자면
한국식으로 계가를 할 때는 
먼저 내가 따낸 상대의 돌(사진에서 빨간색으로 체크해놓은 돌)을 상대의 집에
메우고 각자 만들어진 
집(내 돌로 둘러싸인 안의 빈공간의 점 개수)을 세서 
서로의 총합에 백의 경우에는 덤까지 합산해서
총 집의 수를 비교하게 돼 

반면 중국식은 내가 따낸 상대의 돌은 상관치 않고
반상 위에 있는 자신의 돌 수를 세게 돼
뭐 어차피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야
상대의 죽은 돌로 집을 메우는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고 반상의 각자의 돌을 세는 것이나 결과적으로는 같아
(중국식에서는 돌이 먹히게 될 경우 자신의 돌이 줄어드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부분의 차이 때문에 마지막에 커제는
반패(서로 따내야 하는 집,끝내기 중 가장 이득이 작은 곳)를 잇지 않고
공배를 메워 자신의 돌을 늘리며 이득을 보게 된다

쉽게 말해서 끝내기에서 
한국식으로는 하면 손해가 되는 행동으로
중국식에서는 오히려 이득을 볼 수 있어

이걸로 결국 이세돌이 딱 반집 패배를 하고 말아

 

 

결승국 후 이세돌과 커제의 모습
 
이세돌의 패배 후 한국 언론에서는
'한국식 룰로 했으면 마지막에 이세돌이 이겼을 것이다'라며 
자위를 했지만
이세돌은 수년간 중국리그에서 활동해 온
한국기사 중 누구보다 중국식 바둑을 잘 두는 기사야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중국식과 한국식 룰을 
오해해서 졌다는 것은 변명 조차 될 수가 없어

게다가 중국식 룰에서는 덤이 7집반인 백이 확실히 유리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상태에서 이세돌이 백을 쥐고 패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세돌의 '완패'였어
물론 마지막에 역전승을 거둘 수도 있었기에 
아쉬움은 많이 남지만
커제가 실력으로 이세돌을 완벽히 꺾었다고 밖엔 볼 수가 없었다
 

몽백합배 우승 직후 인터뷰에 응하는 커제

그런데 대국 후 오히려 커제는
"역시 이세돌은 최강의 기사다. 그의 바둑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라며
이세돌을 인정해주고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소감을 밝혀
그리고 논란이 되었던 대국 전의 '5%' 발언에 대해서는
"그 당시 이세돌이라는 강자에게 기세에서 밀릴 수 없었다.
기세를 위해 과장을 했던 것."이라며
자신의 도발에 대한 해명도 덧붙였다

만약 커제가 승리후에도 이세돌이 별 볼일 없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면
오히려 커제를 인정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런데 이런 우승 소감을 듣고난 후 에는 
모두가 커제를 최강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몽백합배의 우승으로 
커제는 한 순간에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

이세돌은 패배 후 인터뷰에서
"커제는 강하다.확실히 이번에는 나의 완패다.
그러나 다음번엔 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반격 의지를 보였어

이때까지
이세돌은 계속되는 대회 일정으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어
그리고 다들 잘 알다시피 몽백합배 이후 
올해 3월에 구글의 알파고와 대국을
예정지은 상태였기에
이세돌은 당초 타 대회 참가를 하지 않고 잠시 휴식기를 갖도록 되어 있었지

하지만 계획은 금방 어긋나 버렸어

휴식을 계획하고 있던 이세돌은 
후원사인 농심과 한국기원의 지속적인 간곡한 부탁으로
대표 선발전에 참가하지도 않았던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한국 대표팀에 와일드카드로 뒤늦게 승선하게 돼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개막식


당시 한국 대표팀의 멤버로는
백찬희 初단, 민상연 四단, 최철한 九단, 박정환 九단
그리고 이세돌 九단이 있었어 

 

 

 

 

 

 첫 세계 무대에 부담감이 컸던 탓인지 백찬희는 대국 내내 끌려다니다 패하고 말았어
백찬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일본의 이치리키 료는 연달아 중국의 판윈뤼를 꺾고
한국의 2장 민상연과의 대결에 나선다

 

당초 대회에 나서는 마음가짐에 대해
"팀의 허리를 맡고 있는 만큼 절대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뱃심으로 밀고나가겠다."라는
당찬 각오를 밝힌 민상연이었기에
한국 팬들은 먼저 한국에 패배를 안겨준 이치리키 료를 반드시 잡아주길 기대하고 있었어 





그리고 결과는


연이은 한국 팀의 2연패
순식간에 믿었던 신예기사 둘이 연달아 패하며 한국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이치리키 료는 중국의 우광야를 맞아 패배하였고
한국의 3장으로 나서게 된 최철한으로서는 큰 부담감을 안은 채 승부에 임하게 되었지

 

 

 

한국 대표팀의 첫 승을 거두는 최철한

이어지는 한국의 최철한과 중국의 우광야의 대국은
최철한의 121수 만의 흑 불계승으로 최철한의 압승으로 끝이 났어

 

 

하지만 2연승을 거둔 최철한은 이어진 중국의 구리와의 대결에서 아쉽게 패하고 만다
이제 한국 대표팀은 박정환과 이세돌만이 남은 상황
물론 최철한이 제 몫을 해주었고 한국에겐 아직 최강의 카드 둘이 남긴 했지만
다소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어
반드시 박정환이 최소 두명이상은 잡아주거나
될 수 있는 한 많은 승을 거두어 주어야만 했지
293수 까지 가는 대 혈투끝에 두집반 차이로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아쉬운 패배를 당하고 말아
이세돌 다음으로 믿고 있던 박정환이
최철한을 꺾었던 구리에게
어이없이 무너져 버리고 한국은 위기를 맞게 되었지

이세돌과의 대국을 바라고 있던 구리는 3연승 후 
일본의 2인자 무라카와 다이스케 八단을 만나 무너지게 되어
아쉽게도 구리와 이세돌의 대국은 성사되지 못했어
국내 1인자였던 박정환의 충격적인 패배 이후

일본에는 현재 일본의 2인자인 무라카와 八단과
부동의 1인자 이야마 유타 九단이 남아있었고

중국에는 롄샤오 七단과 이세돌의 천적 커제 九단이 남아 
이세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대표팀의 우승을 위해서는
이세돌이 연달아 네명을 모두 꺾어야 하는 상황

이는 곧 과거 이창호의 6회 농심 신라면배 
'상하이 대첩'과 같은 상황이었다

약 10년만에 재현되는 역사적인 상황에
바둑계는 한껏 달아오르게 되었어
과연 이세돌이 '제 2의 상하이 대첩'을 이루어 낼 수 있을지
온 바둑팬들의 기대가 모아졌지

보통의 기사라면 그 중압감에 짓눌려 무너져 버렸을테지만
이세돌은 달랐어
그는 천성적으로 팬들의 관심을 즐기며
위험한 승부를 오히려 반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마도 선배 이창호만이 이룰 수 있었던 기적같은 역전우승을
자신도 이뤄낼 수 있다는 그 상황에 감사했을 이세돌이었다

이 당시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결전을 2주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알파고와의 대결은 잊고 오직 농심배에 사력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밝혀

[

 

 

 

일본의 무라카와 다이스케 八단과 중국의 롄샤오 七단을 연이어 꺾은
이세돌 九단

자신보다 약체로 평가받던 일본과 중국의 기사들을 연이어 꺾어낸
이세돌은 당초 피로누적으로 휴식을 계획하고 있던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어
두 대국 모두 압도적인 기량차이를 보여주며 힘이 넘치는 바둑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일본의 주장
이야마 유타 九단과의 대국은
제아무리 이세돌이라 해도 쉽게 승리를 예측 할 수 없었어

 

 

현재 현재 일본바둑 부동의 1인자 이야마 유타 九단

이야마 유타는 현재 일본 내의 모든 기전을 독식하고 전관왕을 달성하며
홀로 외로운 독주를 펼치고 있는 일본 내에서는 유일무이한 1인자
아무리 일본 바둑이 한국과 중국에 밀렸다고 해도
이야마 유타 만큼은 그 무게감이 남달랐어 

그렇게 이전의 두 대국과는 다르게 시작된 이야마 유타와의 대결
 

 

박빙의 승부가 예상됐던 승부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둔 이세돌

하지만 결과는 이세돌의 압승이었어
물론 이야마 유타도 강했지만 이세돌은 차원이 달랐다

반신반의 하며 '제 2의 상하이 대첩'을 기대하던 한국의 바둑팬들은
이세돌이 정말로 해낼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어

이제 중국의 주장 커제만 넘으면 한국이 역전우승을 거두고
이세돌은 이창호에 이어 다시 한 번 세계무대에 역사를 쓰게 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세돌 개인에게도 다음 대결은 분명히 중요했어
이전 대결에서 커제에게 번번이 무릎 꿇으며
승부사로서 치욕을 당했던 이세돌이었기에
커제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
여러가지 의미로 이세돌은 놓칠 수 없는 승부였다
 

하지만 질 수 없는 것은 커제도 마찬가지였어
농심배는 개인전이 아닌 바둑기전 유일의 국가 대항 단체전
첫 출전에서 중국의 주장으로서 자신의 손으로 자국의 우승을 결정짓고 싶었을 테니까
더군다나 중요한 대회마다 마주치던
이세돌과의 승부였으니 그 의미는 더 했지
 

제 17회 농심 신라면배 최종 결승국
이세돌 대 커제

서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승부가 그렇게 시작되었어
사실 이전의 승부때도 늘 그랬지만
대국의 초반은 커제가 앞서나가게 되었어
사실 커제의 가장 강점은 초반 포석에 있어
반대로 이세돌은 초반 포석에 약하고 중반 전투에 가장 강한 모습을 보이지



초반 포석에서 많은 손해를 본 이세돌은
중반 전투에서 만회를 꾀했어
하지만 커제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빠르게 두어가며
이세돌을 시간으로 압박했어
결국 이세돌은 바둑을 난전으로 이끌어 역전을 노렸지만
커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초반 벌어진 차이를 극복해내지 못하고 패하고 말아

 

우승을 확정지은 후 기뻐하는 커제

커제는 이세돌과의 승리로 중국에 우승을 선사함과 동시에
이번 대결까지 이세돌과의 상대 전적에서 8승 2패로 거듭 앞서 나가게 된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상 이세돌은 커제에게 못 당한다는 말 밖엔 할 수가 없는 상황

바둑계의 판도는 이 패배로 완전히 커제의 중국에게로 넘어가고 말았어

이세돌의 나이가 거듭 아쉽게만 느껴졌다

1997년 러시아의 세계 체스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가 
IBM 社의 인공지능 딥블루(Deep Blue)에게 패하는 순간


아시아권에 바둑이 있다면 
서양에는 대표적인 보드게임으로 체스가 있지
1997년 미국의 IBM이 개발한 딥블루는 인간 체스챔피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어
이때에도 인간이 인공지능에 곧 지배를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많이 나왔어
하지만 이 역사적인 대결도 금방 잊혀졌지


잠시 잊혀졌던 이 역사적인 사건을 이후로
다시 펼쳐지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
그것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의 의미였어
 

이세돌과 알파고(Alpha Go)

인공지능 개발자들에게 있어 바둑의 세계는
크나큰 도전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어
오목,장기,체스 인간이 즐기는 보드게임 중 대표적인 것들은
이미 모두 인공지능에게 추월당한 상황이었지만
바둑만큼은 예외였거든

지금까지 바둑은
그 경우의 수가 무한해서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여겨졌어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이 처음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였지만
그 실력은 형편없었고
알파고가 나오기 전 까지도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구글의 자회사인 '딥 마인드Deep Mind'가
올해 초 이세돌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지

사실 인공지능 사업은 2000년대 부터 지속적으로
주목 받아왔던 차세대 사업시장이야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기술로서 
생산,의료,금융,유통 등 거의 모든 사업에 접목시킬 수 있는
엄청난 잠재성을 가진 사업분야였기 때문에 미국은
이미 예전부터 사람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 돈을 쏟아붇고 있었지

 

 

IBM 社의 차세대 인공지능 '왓슨Watson'

현재 인공지능 사업은 구글과 IBM의 양강구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먼저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은 왓슨쪽이었어

 

 

2011년 미국 제퍼디쇼에 출연해 퀴즈 세계 챔피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왓슨

2011년 미국의 인기 퀴즈쇼 '제퍼디 쇼Jeopardy Show'에 출연해
퀴즈 챔피언들을 꺾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 수준만큼 도달했다는 것을
대중들 앞에서 증명해내지
이 덕분에 IBM은 주가가 급등했고
인공지능사업 경쟁에서 IBM이 한 발 앞서나가게 된다

 

현재 인공지능 사업의 주요 적용분야인 의료기술

왓슨은 이미 미국에서
의료산업에 적용되어 암환자들을 위한 프로젝트에 사용되고 있어
구글의 알파고는 개발단계였던 것에 비해
왓슨은 이미 상용화 단계까지 접어든거지

 

 

왓슨이 의료기술에 특화되어 있다면 구글은 인공지능을 통해
수 년 전부터 무인자동차 시스템을 개발해왔어
그리고 현재 무인자동차 시스템은 개발이 끝나서
법적 제도만 갖춰진다면 언제든 상용화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고 해

 

구글의 무인자동차

구글은 이러한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을 만한
'계기'가 필요했어
세계인의 이목을 끌 수만 있다면 
그 엄청난 '관심'이 엄청난 '투자'로 이어질테니까

그 계기가 될 수 있을 만한 것을 고민하던
구글이 선택한 것이
바로 '바둑'이었어

 

 

 

알파고와의 대결을 발표하는 자리의 이세돌

'알파고' 자체는 바둑을 주 목적으로 개발된 인공지능이 아니야
단지 인공지능의 학습방식이 얼마나 인간의 그것에 가까운 지를
보여주기 위해 인간 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바둑'을 활용한 것 뿐이지

 

2015년 10월 유럽 바둑챔피언 판후이 二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알파고

이세돌과의 대결 전에 이미 알파고는
유럽 바둑 챔피언 판후이를 꺾으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

하지만 판후이는 본래 중국에서 최약체로 평가받던
프로기사였기에 아무리 유럽 챔피언이라지만
인간을 대표할 만한 기력은 되지 못 했어
때문에 이때까지도 인공지능의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판후이의 기력이 형편없어서 패배한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대결 전 자신감을 내비치는 이세돌

그래서 이세돌도 처음에는
알파고를 상대로 '5대0 혹은 4대1'의 승리를 자신있게 예측할 수 있었던 거지
알파고 바로 이전의 인공지능들은
프로기사를 상대로 호선은 어림도 없고
접바둑으로도 될까말까한 수준이었기에
이세돌이 이런 자신감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어

나도 이때까지는 당연히 이세돌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결과는 4:1로 이세돌의 처참한 패배
 

 

알파고와의 패배 후 괴로워 하는 이세돌

이세돌의 바둑을 예전부터 지켜봐 왔지만
이때 만큼 힘들고 괴로워 보인 적이 없었어
아무리 이세돌이
팬들의 관심과 승부에 걸린 부담감을 즐기는 타고난 승부사라 할지라도
알파고와의 대결은 자신의 바둑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이었니까

하지만 이세돌은 완전무결해 보였던 알파고를 상대로 1승을 거두며
알파고의 파훼법을 어느 정도 제시해주었어
그러나 알파고는 지금도 계속 개발 중이고 성장하고 있기에
인간과 인공지능의 승부를 다시 한다 해도
인간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사실 아무리 바둑이 복잡한 게임이라해도
인공지능의 발전을 인간의 힘으로 막는 것은 불가능이었어
다만 그것이 생각보다 빨리 온 것 뿐이지
이세돌이 알파고에 패했다고 해서
바둑이 끝나는 것은 아니야
알파고에게 졌다고해서 사람들이 바둑을 즐길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대결이 끝난 후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있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개발자 데미스 하사비스

이세돌은 대결 후에 구글의 개발진들을 향해 깊은 존경심을 전한다는
소감을 밝혔어
인공지능이 도달한 수준을 직접 느끼며 패배 후에 괴롭기도 했지만
반대로 즐겁게 승부에 임하기도 했다고 해

구글의 개발자들 역시 인간 대표로 대결에 나선 이세돌에게
깊은 존경심을 밝혔지

 

친필 사인이 담긴 바둑판을 선물하는 이세돌

그렇게 역사적인 대결은 마무리 되었고
이세돌은 올해 개최되는 응씨배에서 우승을 거두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해

이세돌이 두고두고 아쉬워 하는 것이 응씨배 우승이거든
이세돌이 꼭 이 대회에서 우승했으면 좋겠다
이세돌에게 관심이 많은 게이들은 
이 대회를 챙겨보면 보는 재미가 더 할거라 생각해




'한국 바둑계 최강자의 마지막 계보를 잇는 기사'
'승부를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위협을 즐기는 승부사' 

불의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의 인생에서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어

 

 

                     이상으로 바둑 정보글 시리즈 마지막 [쎈돌 이세돌]편이 


 


그럼 [쎈돌 이세돌] 3편을 시작한다!!

이세돌 九단


지난 2편
패도무문의 최강자였던 이창호를 처음으로 꺾고 
세계대회 타이틀을 거머쥔 뒤
2002년,2003년 세계대회 후지쯔배 2연패 등
국내외 기전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이창호의 독주를 견제하기 시작했던 이세돌이었다

이제 이세돌의 다음 목표는
과거 조훈현,서봉수,유창혁,이창호가 차례로 차지했던
'응씨배'였지
2000년 제 4회 응씨배를 우승했던 이창호가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고
 

제 3회 응씨배 우승자 유창혁 九단

 

제 4회 응씨배 우승자 이창호 九단

그런 이창호를 얼마전 LG배에서 꺾은 이세돌은
이제 최후의 등용문 응씨배만 우승하게 된다면
앞선 최강자들과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바둑 팬들의 예상이 이어졌어
정말 단순히 기재로만 본다면
전광석화와 같은 수읽기, 승부의 흐름을 읽는 감각은
조훈현 이후 최고의 천재성을 보이고 있던 이세돌이었기에
주위의 관심은 이처럼 남달랐다

하지만 예상은 크게 빗나갔고 
이세돌은 
2004년 제 5회 응씨배 예선 1회전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게 되는데
참고로 이 대회는 전기 대회 때 이창호에 막혀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던 중국의 창하오가
한국의 최철한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제 5회 잉창치배 세계 바둑 선수권 우승을 차지하는 창하오 九단


2004년은 이세돌에게 있어
치욕적인 한 해가 되고 말아
이세돌이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이 시기에 갑작스럽게 급제동이 걸리며 
나서는 국내외 대회 마다 줄줄이 탈락했고 
거의 넘어설 수 있을 것 처럼 보였던 
이창호라는 벽의 높이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간신히 중국의 왕시 五단을 꺾고 
제 9회 삼성화재배 에서 우승하며
체면치레를 하긴 했지만
4년 마다 열리는 응씨배가 개최되며 다른 때 보다 
유난히 많은 세계 대회가 열렸던 한 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두고두고 아쉬운 한 해가 아닐 수 없어
 

 

제 9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우승을 거머쥔 이세돌 九단

이세돌에게는 지우고 싶은 한 해였던 
이 2004년에

중국 갑조리그(프로바둑리그)에서
이세돌은 후에 자신과 숙명의 라이벌이 되는
중국의 구리 九단을 처음 만나게 된다

 

제 9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우승을 거머쥔 이세돌 九단

이세돌에게는 지우고 싶은 한 해였던 
이 2004년에

중국 갑조리그(프로바둑리그)에서
이세돌은 후에 자신과 숙명의 라이벌이 되는
중국의 구리 九단을 처음 만나게 된다

 

구리(古力) 九단

구리에 대해 잠시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83년생으로 이세돌과 동갑내기에 
공교롭게도 프로 입단년도 또한 95년도로 이세돌과 같아

중국의 창하오와 뤄시허를 견제할 수 있는 신예기사로 촉망받았던
그는 2006년 LG배를 우승하며 첫 세계대회 타이틀을 획득한다
2016년 현재 커제 九단이 등장하기 전 까지 부동의 중국 1인자였어

구리 九단은 그 실력에 걸맞지 않게 '최강의 아마추어'라는 
이상한 별명을 갖고 있는데
이건 그가 항상 어이없는 역전패를 자주 당해서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야
(보통 아마추어들이 이런 실수를 많이 해)

초반 포석과 중반 전투 그리고 전체적인 판을 구성하는 감각은 
라이벌인 이세돌을 능가한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지녔지만
후반 끝내기로 갈수록 약점을 드러내며 
다 잡은 승리를 놓친 적이 많았어

'조훈현에게 녜웨이핑이 있었고
이창호에게 창하오가 있었다면
이세돌에게는 구리가 있었다.'

구리는 라이벌이었던 이세돌을 무척 좋아했어
항상 세계대회나 행사에서 
이세돌과 만나면 먼저 나서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고
대회 참석 차 한국에 오면 늘 이세돌부터 찾아간다고 해

 

 

2008년 구리 九단의 결혼식에 한국 기사로는 유일하게 초대받은 이세돌 九단

이런 둘의 일화 중에 하나는 
어느날 구리가 이세돌과 18번째 대결 전날 전야제 기자회견장 에서

"나는 2월 3일 생이고 당신은 3월 2일 생이니 

내가 형이고 당신이 동생이다. 나는 앞으로 5년, 10년 

아니 더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우리가 더 가까운 사이로 지내길 바란다."며 

이세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어


함께 있던 취재진과 관객들이 하나같이 구리에게 

"그럼 동생을 안아줘라!"고 말하자 

구리는 자연스럽게 팔뚝을 벌려 이세돌을 껴안았지


 

2015년에는 
이세돌과 '십번기十番棋'라는 역사적인 승부를 겨루게 되는데
이 부분은 뒤에 자세히 언급될 내용이야

 

 

이세돌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증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중국의 최강자

그런 구리와의 첫 만남에서 이세돌은 완패를 당하고 말아
당시 이세돌은 잠시 침체기를 걷고 있었고
구리는 2003년 중국 천원전을 우승하며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었어

후에 이 둘은
수도 없이 많은 대회에서 마주치게 되는데
상대전적은 이세돌이 미세하게 앞서고 있

 

 

 

한중일 프로기사 역대 통산 세계대회 우승 횟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통산 세계대회 우승 횟수는 구리보다 이세돌이 훨씬 앞서고 있어
역대 세계대회 최다 우승자는 이창호이고
이세돌이 이창호의 기록을 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어
이제는 바둑기사로서 이세돌도 적지 않은 나이라서
앞으로 이창호가 세계 대회 우승트로피를 추가하지 못 한다고 가정하고
아마도 저 기록을 깨려면 마흔 전 까지는 깨야 할텐데
올해 이세돌이 서른넷이니까


아무튼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침체기를 뒤로하며 맞은 
2005년
이세돌은 작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다시 한 번 우승 행진을 달리게 되는데

2005년
제2회 도요타덴소배 우승 
제6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
제18회 후지쯔배 우승 
제2회 중환배 준우승
 
2006년 
제7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 
제19회 후지쯔배 4위 
제2회 한국물가정보배 
우승 
제25회 KBS 바둑왕전 
우승 
제11회 GS칼텍스배 
우승
2007년
제3회 도요타덴소배 우승
2006년 바둑대상 최우수기사상 수상
제8회 맥심커피배 우승
KB국민은행 2007 한국바둑리그 주장
제19회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
제3회 한국물가정보배 우승
제35회 강원랜드배 명인전 우승
2008년
제36회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 우승
제12회 삼성화재배 우승
제12회 LG배 세계기왕전 우승
제20회 TV바둑아시아 우승
2009년
제52회 국수전(國手戰) 우승
제13회 삼성화재배 우승


침체기를 완벽히 걷어내며 
비로소 완전한 최강자의 면모를 갖추게 돼
2000년대 후반 이창호는 이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고
바야흐로 이세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어
그렇게 전성기를 달리던 이세돌은

 

2009년 
돌연 '한국바둑프로리그'에 불참을 선언
일체 한국에서 개최되는 기전에는 참가하지 않고 
한국 바둑계를 떠나버린다

이 결정으로 온 바둑계는 충격에 빠졌어
한국 바둑을 이끌어 가고 있던 최강자가 돌연 바둑계를 떠나버린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
그런데 한술 더 떠 이세돌은 
한국에서는 활동하지 않겠다면서 중국리그에는 계속 참가하며
모든 이들의 공분을 샀어

또한 이세돌이 소속되어 있던 한국 프로팀은 
졸지에 에이스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팬들은 이러한 무책임한 이세돌의 행동들에 거센 비난을 가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말도 안되는 행동들이
계속해서 거듭되었다

 

2009년 휴직계 제출 관련 기자회견에 나선 이세돌 九단

이러한 일련의 논란에 대해 해명하고 정식으로 중국 활동을 포함한 
바둑기사로서의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자 이세돌은 기자회견을 갖게 돼

인사말 전문에서 
"저를 아끼고 사랑해준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들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대회진행에 물의를 일으키고 피해를 끼쳐 스폰서분들께도 정말 고개숙여 사과드립니다. 
저는 그동안 루머 소문에 신경쓰고 싶지않아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심정을 알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어

이세돌은 프로대회 주최사, 후원사, 바둑팬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세번 씩이나 하게 된다

또 한국에서는 활동하지 않으면서 중국에서는 활동했던 것에 대해

"휴직기간과 관계없이 계약이 있어, 계속 둘 수 밖에 없었다. 한국리그와 중국리그의 차별은 절대 아니다. 
중국리그는 계속 참가하는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한국기원의) 다른 조치가 취해진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겠다. 
중국리그의 경우 바둑두기 최적의 조건이다. 제한시간도 그렇고 주장전으로 펼쳐지는 시스템도 그렇고. 
한국리그는 사실 상위 랭커들에게는 별로 매리트가 없는 기전.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에서 내가 최상의 가치가 있을 때 선수로 뛰고싶다."

"지금까지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많은 대화를 하겠다."
라며 거듭 팬들에게 사과를 해

이렇게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세돌은 약 1년 반 가량
바둑계를 떠나게 되는데


사실 이렇게 된 모든 문제의 발단은 이세돌이 아닌 
한국기원과 원로기사들에게 있었어




문제의 원인을 찾자면 한국의 프로제도가 
탄생하는 곳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
 

 

 

2009년 휴직계 제출 관련 기자회견에 나선 이세돌 九단

이러한 일련의 논란에 대해 해명하고 정식으로 중국 활동을 포함한 
바둑기사로서의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자 이세돌은 기자회견을 갖게 돼

인사말 전문에서 
"저를 아끼고 사랑해준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들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대회진행에 물의를 일으키고 피해를 끼쳐 스폰서분들께도 정말 고개숙여 사과드립니다. 
저는 그동안 루머 소문에 신경쓰고 싶지않아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심정을 알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어

이세돌은 프로대회 주최사, 후원사, 바둑팬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세번 씩이나 하게 된다

또 한국에서는 활동하지 않으면서 중국에서는 활동했던 것에 대해

"휴직기간과 관계없이 계약이 있어, 계속 둘 수 밖에 없었다. 한국리그와 중국리그의 차별은 절대 아니다. 
중국리그는 계속 참가하는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한국기원의) 다른 조치가 취해진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겠다. 
중국리그의 경우 바둑두기 최적의 조건이다. 제한시간도 그렇고 주장전으로 펼쳐지는 시스템도 그렇고. 
한국리그는 사실 상위 랭커들에게는 별로 매리트가 없는 기전.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곳에서 내가 최상의 가치가 있을 때 선수로 뛰고싶다."

"지금까지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고 많은 대화를 하겠다."
라며 거듭 팬들에게 사과를 해

이렇게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세돌은 약 1년 반 가량
바둑계를 떠나게 되는데


사실 이렇게 된 모든 문제의 발단은 이세돌이 아닌 
한국기원과 원로기사들에게 있었어




문제의 원인을 찾자면 한국의 프로제도가 
탄생하는 곳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


 

서봉수와 조훈현

서봉수는 그나마 어느정도 마셨지만
조훈현은 소주 한 잔만 마셔도 몸을 못 가누는 편이라
둘 다 술을 즐기지 않았고
이때부턴 후배들에게 우승 후 술을 사던 관례가 사라지게 돼

우승이란 우승은 둘이 다 해먹으면서
돈은 돈대로 안쓴다며
다른 기사들의 불만이 커지게 된다

그래서 한국기원 측은 이때부터
우승상금에서 일정 금액을 떼어가게 돼
(이 금액이 언론에 정확히 발표는 되지 않아서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꽤 많은 액수였던 것으로 보여)

명목은 한국기원 운영비용과 '기사회'라는 프로기사 복지회 사용기금이었어

기사회는 나이많은 기사들을 위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일정 나이를 넘기면 이곳에서 연금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돈을 젊은 기사들의 우승상금에서 충당한다는게 문제였어

프로기사의 특성상 일정 나이를 넘으면 
사실 대회에서 성적을 낸다는 것이 힘들어
보통 우승은 20~30대에 가장 많이 하게 되는데
자연히 어린 기사들은 나이든 기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었지
그런데 웃긴건
연금이라는 건 현역을 은퇴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것인데
프로기사들은 은퇴라고 할 것이 없어
나이가 들어도 은퇴를 하지 않고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도 
심판이나 해설 등으로 부수입을 챙길 수 있거든
그런데 연금은 연금대로 받고
은퇴는 은퇴대로 안하고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지

옛날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조훈현은
젊은 시절 이렇게 우승상금을 반강탈 당하면서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어
당연하게 생각했지
그리고 이창호도 스승이 가만히 있는데
자신이 나설 수는 없었기에 꼬박꼬박 돈을 줄 수 밖에 없었지
그리고 애초에 이창호는 집안이 부유했어

또 하나의 문제는 '기보저작권'에 있었어
기보라는 것은 대국의 수순을 정리한 것인데
대국이라는 것은 두 대국자가 만들어내는 것이니
당연히 그 저작권 또한 선수들 본인에게 있는 것이 맞는 일이었지
하지만 이 기보에 대한 저작권이
한국기원 측에 있다는 것이 문제였어
이세돌은 이 부분도 문제를 삼았다

이런 잘못된 구조를 근본부터 비판하고 나선 거야
하지만 이세돌 또한 자신이 몸담고 있던 이러한 한국기원의 부조리를
외적으로 공론화 시키고 싶지는 않았고
자신의 선에서 마무리 짓고자 했는데

이로써 예전 승단대회를 거부할 때 부터
한국기원에 미운털이 박혔던 이세돌과
한국기원과의 보이지 않는 완력싸움이 벌어지게 돼

이 과정에서 조훈현은 이세돌을 찾아가
이세돌의 행동에 대해 나무랐다고 해
'자신도 젊을 때 다 당했던 것인데 네가 뭔데 왈가왈부하냐'
대충 이런 논리였지

이 때문에 이세돌은 한국기원 측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한국 대회에 대한 전면 불참 선언을 하게 된 것이었어
아무리 한국 최강자라고 해도 이세돌이 괴씸했던 한국기원 측은
모든 일을 이세돌의 탓으로 돌려 언플을 했고
이세돌은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어 공공의 적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결국 일은 한국기원과 원로기사들이 벌려놓고
욕이란 욕은 이세돌이 다 먹게 돼
이세돌은 늘 '불의에 대해선 할 말은 해야한다'라는 주의였기 때문에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후배들 에게도 이러한
말도 안되는 관례가 이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해

이 일이 마무리 된 후에도 한국기원의 언플로 흐지부지 되어 버려서 
이세돌은 한 동안 팬들의 수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이세돌이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바둑팬들이 더러 있다
 

 

 

기자회견 중인 이세돌

보수적인 바둑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어떻게 응징을 당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어
이에 이세돌은 한국 바둑계에 염증을 느끼고 형 이상훈을 통해
한국기원 측에 정식으로 휴식계를 제출했다
휴직 기간은 1년 6개월,
2010년 12월 31일 까지였어

 하지만 이 일로 불안해진 것은 한국기원 측이었어
이세돌이 떠나자 각종 세계대회에서 중국 기사들이 타이틀을 휩쓸기 시작했거든
이세돌은 또 당장 자신들의 가장 큰 수입원 이기도 했고
어느정도 이 일에 대한 내막이 팬들에게 알려지며
한국기원 또한 비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때문에 한국기원은 이세돌을 거듭 찾아가 휴직을 만류했고
결국 이세돌은 휴직 6개월 만인 2010년 1월 반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복귀 후 이세돌은 그간의 공백기가 무색할 만큼의 실력을 과시하며
소속팀인 '신안 천일염'팀의 첫 프로리그 우승을 이끌게 된다
그리고 이세돌은 시즌 MVP를 수상하게 된다

 

2010년 한국바둑프로리그 시즌 MVP를 수상하는 이세돌 九단

그리고 이어진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도 한국 대표팀으로 출전하게 되는데

 

 

태릉 선수촌에 입성한 이세돌과 이슬아

 

 

체력 훈련 중인 박정환과 이세돌

아시안 게임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바둑기사로서는 이례적으로 태릉 선수촌에 입성하여 체력 훈련도 받게 돼

 

 

이세돌 九단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단체전 부문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고
이세돌은 원래 중학교 중퇴로 병역을 면제받은 상태였기에 관계 없지만
함께 출전했던 조한승 九단(당시 군 복무중)
박정환 九단 등은 여기서 병역 면제 혜택을 받게 된다
이창호도 이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 획득에 보탬이 되었어
 

 

 

중국의 창하오 九단과 대국 중인 이창호 九단


그리고 이세돌은 이후

2010년 
제6회 한국 물가정보배 우승
제1회 olleh KT배 우승 
제2회 BC카드배 
우승 
2011년 
제6회 원익배 십단전 
우승  
제2회 olleh KT배 우승(2연패) 
제3회 BC카드배 
우승(2연패) 
제8회 춘란배 
우승
제10회 농심 신라면배 우승
2012년
제17회 GS칼텍스배 우승
제3회 olleh KT배 우승(3연패)
제40회 하이원 리조트배 명인전 우승
제16회 삼성화재배 우승
2013년
2014년
제32회 KBS 바둑왕전 우승
제15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
제1회 렛츠런파크배 우승
제26회 TV바둑아시아 우승


무관에 머물렀던 2013년을 제외하고 꾸준한 우승가도를 보이며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켜가게 된다

그리고 2014년 이세돌은 앞서 언급했던 
라이벌 구리 九단과의 '십번기十番碁'의 혈전을 갖게 된다

이 십번기는 바둑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어
 

 

 

2014년 십번기를 치르게 된 이세돌 九단과 구리 九단
 

 

오청원과 기타니 미노루의 십번기 모습
세기의 대결로 불리며 당시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십번기는 예전 일본에서 두어지던 승부의 형식 중 하나로
'치수 고치기'가 그 목적이야

'치수'라는 것은 대국이 벌어지기 전 
대국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상대가 나보다 기력이 높다면 
어느정도 핸디캡을 주어야 하는지 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치수에는

'호선(互先)'
나중에 두는 백에게 덤을 주고 선수의 효를 상쇄하여 
흑과 백이 '호각'으로 겨루는 방식, 현재의 프로대국은 모두 호선으로 이루어 진다
'선상선(先相先)'
세 판을 기준으로 하수가 흑,백,흑의 순서로 쥐어 흑을 한 번 더 둘 수 있게 하는 경우
'정선(定先)'
나중에 두는 백에게 덤을 주지 않는 방식, 백에게 덤이 없으므로 상수가 백을 쥐고 하수가 흑을 쥐게 된다


이렇게 세가지가 있고

그 외에 한 점 부터 아홉 점 까지의 접바둑이 있어
접바둑은 하수가 흑을 잡고
기력의 차이에 따라 몇 점을 먼저 착수한 뒤 
대국을 시작하는 것을 말해
물론 이 때에도 백에게 덤은 없다


십번기에 나서는 두 기사는
처음에 호선으로 시작했다가
패하면 선상선 정선 등으로 치수를 점차 내리게 돼

결국 여기서 패한 사람은 영원히 상대보다 '하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
여기서 패배하는 기사는 죽을 때 까지 '~보다 하수'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지
다음에 만날 때는 전에 십번기에서 승리했던 승자가
패자에게 한 수를 접어주게 되니까
프로기사로서 이만한 치욕은 없지
참고로 일본에는 이 승부에서 패배를 거듭해서 자신의 성까지 갈았던 기사가 있다

명예를 목숨보다 중요시 하던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바둑식 '캐삭빵'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부담이 큰 십번기는 두어지지 않게 돼
특히 프로기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그런데
알고보면 이렇게 무시무시한 승부가
이세돌과 구리 사이에 성사되게 돼

사실 이 승부가 논의되기 시작한 당시
주위에서는 너무 무리한 승부라며 우려가 나왔어
그도 그럴 것이 타이틀 매치도 아니고 그저 두 기사가 합의 하에
치르는 친선 대국인데 이겨봤자 본전이고
반대로 지는 쪽은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얻게 되니까

 

 

십번기의 시작 전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는 이세돌과 구리


때문에 이세돌과 구리는 십번기를 시작하기 전에
팬들에게 이번 승부를 명예를 걸고 하는 
본래의 십번기로 생각하지 말아주길 당부했어

대신 두 기사는 이번 승부의 상금을 '승자가 전부 가져가는 방식'으로 정했지
지는 쪽은 중국과 한국을 오고가는 승부에 필요한
비행기 값 외에는 일체 받지 못하고
승자가 우승상금 500만 위안(한화 8억 5천만원)을 독식하는거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있던 라이벌인 이세돌과 구리는
이무렵 바둑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고민을 똑같이 느끼고 있었거든

어느새 지루해져 버린 승부의 인생에
새로운 자극제가 필요했던 거야

이 십번기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이끌어 내기도 좋은 승부였어

결국 이 십번기의 최종승자는



 

 

8국을 승리하며 종합전적 6대2로 십번기의 우승을 거머쥔 이세돌 九단


1,2국을 승리하고 3,4국을 패배한 이세돌이
나머지 대국을 내리 승리하며 먼저 6승을 기록했고
승부는 6대2로 이세돌이 승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하는
십번기 승자 이세돌 인터뷰 내용

- 우승 소감은? 
"세계대회는 자주 우승할 수 있지만, 이런 영광스런 10번기에서 승리를 했다는 건 기분이 다르다. 
기쁘다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겠지만, 다른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 패한 구리에게 한마디를 한다면? 
"승패를 떠나서 나를 상대해 준 구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구리가 없었다면 10번기 자체가 없었다. 가슴 깊이 감사한다." 

- 10번기 여정을 돌아본다면? 
"10번기가 시작할 때 두 사람 모두 컨디션이 안 좋은 상황이었다. 이제는 앞으로가 중요할 것 같다. 
구리가 졌으니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지만 저력이 있는 기사이므로 그래도 빠른 시간 내에 올라설 수 있다고 본다. 
구리나 나나 앞으로 더 잘해야 이번 10번기가 의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오늘 대국이 어땠나. 후반이 복잡했다. 
"굉장히 어려웠다. 후반에 흑이 좋아질 수도 있었다. 
마지막은구리가 초읽기에 몰렸고
나는 10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큰 잘못 없이 마무리 할 수 있었다."

- 이번 10번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바둑은 
"5국이다. 먼저 2승을 했을 때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후 3,4국과 다른 기전에서 2패를 당하는 등 내리 4연패를 했다. 
5국은 형세가 굉장히 나빴는데 운 좋게 역전할 수 있었고 
그 바둑의 승리가 10번기 우승의 결정적인 판이 되었다." 

-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딸인가 아내인가? 
"기왕이면 딸이라고 해야겠죠." (웃음)

- 최근에 자주 지는데 체력에 문제가 있나? 
"작년 춘란배와 삼성화재배에서 준우승에 머문 것은 다른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체력이나 나이, 이런 것들은 아직 큰 문제가 아니다. 세계대회와 10번기에서 10번기 쪽에 더 비중을 두었다. 
둘 다 성적을 잘 낸다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다. 
지금부터 잘해야 한다. "

- 휴식이 필요할텐데 다른 계획은 있나? 
"10월에 바로 삼성화재배가 있다. 바로 10번기 이후의 첫 대회이기 때문이다. 
사실 8국을 졌다면 모르겠지만 이겼으니 당연히 삼성화재배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이 대회를 마치고 좀 쉴 예정이다."

- 다시 10번기를 치를 수 있을까? 
"스폰서가 생긴 후의 문제다. 당장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일단 상대가 없다. 
10번기라는 것은 단순히 일인자라고 해서 두어지는 게 아니다. 
용호상박의 상대가 있고, 또 두 사람의 업적이 비슷해야 한다. 
최하 세계대회 5개 이상은 우승한 상대여야 하지 않을까?"

- 10번기에 등장한 사람이 중국 일본 사람뿐이었는데 이제 70년 만에 10번기를 소화한 첫 한국인이다. 느낌은? 
"굉장히 영광이다. 지금도 상황이 힘겨운데, 오청원시대는 부담이 엄청났을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번에 이겼으니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

- 마지막으로 바둑팬들에게 
"바둑팬 여러분 그리고 니장건 회장님, 구리, 기자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한국바둑의 침체기에 10번기를 이긴 것은 의미가 큽니다. 
중국바둑과의 대결에서 지는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지만
이제부터는 중국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고 동료기사들도 앞으로 많은 승전보를 전해드릴 것입니다. 
바둑팬 여러분 사랑합니다."



여기까지 3편!


 

 

                                         

[쎈돌 이세돌] 2편 시작한다!!
 

이세돌 九단

지난 1편에서
이세돌은 첫 세계 대회 결승전이었던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에 진출했다

사실 이 LG배는 이세돌에게 여러가지 의미로 뜻깊은 대회야

 

96년 입단 직후 LG배 창설기념 조훈현 九단과의 기념대국 장면
정선(백에게 덤이 없는 일종의 접바둑)으로 조훈현과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당시 바둑팬들이 가장 기다렸던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라섰던 이창호와 32연승을 달리던 
'무패소년' '리틀 조훈현' 
이세돌의 첫 세계 타이틀 전
 

 

LG배 결승 5번기 제 1국

이세돌은 이 대결 직전까지 파죽지세의 기세를 보이고 있었어
결승전에 올라오기 까지 
중국의 창하오, 루이나이웨이, 저우허양을 연달아 꺾고 결승전에 진출하며
"내 적수는 이창호 사범님 밖에는 없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가 더 센것 같다."라며
당시 신예 바둑기사로서는 파격적인 도발을 하며 
바둑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었지

하지만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돌한 신예의 패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반면 이창호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스승 조훈현의 시대를 종식시키며
92년도 부터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올랐어
수 많은 타이틀을 따냈고 
2000년
세계 최강의 등용문, 응씨배 마저 거머쥐며 
이창호가 패도를 걷고 있던 시절
그의 앞길은 어떤 문으로도 가로막혀 있지 않아 보였다 

당시
이세돌은 '뛰어난 유망주'
이창호는 '최강의 일인자'
승부는 뻔해보였어
누가봐도 이창호의 압승이 유력한 상황
이세돌은 첫 세계대회 결승전에 진출한 것 만으로도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지

하지만 이세돌은 그 정도에 만족하는 기사가 아니었다는 게 문제야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우러러보던 이창호라는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어

 

 

매서운 눈빛의 이세돌 당시 三단


위 사진처럼 이세돌은 대국 중에 자주 상대를 매섭게 쏘아보곤 해
바둑이 안 풀릴 때나 상대가 알 수 없는 묘한 수를 두었을 때
그는 상대를 매섭게 관찰해
상대가 반상의 어느 곳을 응시하는지
나의 어느 약점을 파고들 것인지
상대의 약점이 어느 곳인지
어느 곳에 두어야 가장 고통스러워할지
표정을 보면 어느정도 느껴진다고 해
천성적으로 상대의 약점을 알아채는 재능을 가진 이세돌이었어

바둑계에서는
바둑을
'수담 手談을 나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바둑은 곧 '손으로 나누는 이야기'라는 것

반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아
몇시간 씩 바둑을 두다보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노리는지 서로의 손 끝에서 느껴지기 마련이지

 

이창호와 이세돌

하지만 이창호는 당시 '石佛 돌부처'로 불리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던 기사
전성기 시절 이창호는 100수 앞까지도 수읽기가 가능했다고 한다
100수 앞을 내다보고 두는 100수 전의 수
보통의 기사라면 그 수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었을거야
이 무렵에는 해설가들 조차 이창호의 한 수 한 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설해내지 못 할 때가 많았어
'방금 저 수는 무슨 수죠?'

또한
이창호는 대국 중에 절대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해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에 맞춰두는 이세돌과는 달리
상대에 관계없이 오로지 자신의 바둑을 두어가는 이창호
무엇이 맞다고 할 수는 없어
이렇게 이세돌과 이창호는 작은 부분에서도 큰 부분에서도 차이점을 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상극의 대결

이창호와 이세돌의 첫 대국은
 

이창호와 이세돌

하지만 이창호는 당시 '石佛 돌부처'로 불리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던 기사
전성기 시절 이창호는 100수 앞까지도 수읽기가 가능했다고 한다
100수 앞을 내다보고 두는 100수 전의 수
보통의 기사라면 그 수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들었을거야
이 무렵에는 해설가들 조차 이창호의 한 수 한 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설해내지 못 할 때가 많았어
'방금 저 수는 무슨 수죠?'

또한
이창호는 대국 중에 절대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해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에 맞춰두는 이세돌과는 달리
상대에 관계없이 오로지 자신의 바둑을 두어가는 이창호
무엇이 맞다고 할 수는 없어
이렇게 이세돌과 이창호는 작은 부분에서도 큰 부분에서도 차이점을 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상극의 대결

이창호와 이세돌의 첫 대국은

 

제 5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제 2국 

그러나 다음날 이어진 제 2국의 결과 또한 이창호의 완패

이 5번기에서 이세돌의 승리를 예측했던 사람은 없었어
모든 이가 최강자 이창호의 승리를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상황에 나온
이창호의 2연패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말았지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충격적인 연패를 당한 이창호 본인 이었을거야
승리 후에도 언제나 시종일관 표정을 짓지 않던 석불이
2연패 후 찡그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말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에 당혹스러움이 역력해 보였다

2001년 LG배 2연승 후 월간바둑의 표지를 장식한 이세돌 당시 三단 


신선한 충격을 받은 바둑계는 새로운 천재의 탄생이라며 이세돌을 추켜세웠고
이창호를 '뚫린 방패'라고 표현하며 위기론이 대두되었어


3국은 약 두 달 뒤에 속개되었다
당시 LG배는 결승 5번기를 1차로 1,2국을 진행하고 중간에 시간을 가진 뒤
2차로 나머지 대국을 마무리했어
 까마득한 후배에게 2연타를 얻어맞은 이창호의 표정은 결연해 보였다
반면 2연승을 거두고 있었던 이세돌은
내친김에 3연승으로 끝내버리기 위해 
"3국은 제게 있어 결승국입니다. 이곳에서 끝을 내겠습니다."
라며 승부욕에 불을 지폈지

이 날의 바둑 역시
이세돌이 초반 부터 승기를 잡으며 모든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어
공교롭게도 TV에서는 이창호의 스승 조훈현이 대국을 해설 중이었는데
조훈현은 중반 이후 대국의 상황에 대해 
"이세돌 三단의 우승이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 할 정도 였다

하지만 이창호라는 벽은 그렇게 쉽게 무너져 주지 않았다
대국이 중반에서 끝내기로 넘어갈 때 쯤
이세돌은 초읽기에 몰렸고 연속 두 번 실착(실수)을 하게 돼
이전에도 손이 너무 빠르게 나오는 탓에
가끔 나오는 경솔한 수가 단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던 이세돌이었어
그런데
하필 그때 실수가 연달아 두번이나 터져 버렸다

이창호는 이런 후배의 실수에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창호는 이세돌의 빈틈을 후벼팠고
이세돌은 초반부터 중반까지 다 잡았던 우승컵을
제 손으로 내동댕이 쳐버렸다
 

3국을 승리한 후 인터뷰 중인 이창호


이 날 인터뷰에서 이창호는 
"전반적으로 바둑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내일은 실수없이 더 좋은 바둑을 둘 수 있도록 하겠다."
라며 승리에 대한 안도감을 밝혔다

거의 손 안에 다 들어왔던 첫 우승컵을 놓쳐버린 이세돌은
망연 자실한 표정으로 대국장을 떠났어

그리고 이틀 뒤 이어진
제 4국에서도 이세돌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초반부터 맹공을 퍼부었으나
이창호 식 타개에 막혀 결국 제 풀에 지쳐 쓰러져 버리고 말지
결국 종합전적 2 대 2로
승부는 균형추를 다시 맞추게 되었어

이어진 제 5국은
나흘 뒤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렸다

제 5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제 5국

2연승 후 2연패를 당한 이세돌은
이미 그 기세가 꺾여버린 상태였고
오히려 기세는 이창호에게로 넘어와 있었어
이창호는 관록을 뽐내며 이세돌을 압도했고 242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두게 된다

패배 후 이세돌은
"이번 결승전은 오랫동안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이 세 번의 패배가 나의 바둑인생에 보약이 될 것 같다."
"역시 이창호 사범님이 상대하기 가장 까다롭다."라며
승부 전에 자신이 이창호 보다 더 강하다며 도발해오던 모습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됐다

2연패 후 3연승을 거두며
짜릿한 역전 우승을 차지한 이창호
하지만 최강자 이창호를 벼랑 끝 까지 몰아붙이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세돌 또한 값진 경험을 얻게 되었다

제 5회 LG배는
이창호의 국내외 통산 타이틀 100회 차지라는 기록과 
그렇게 풍성한 화제거리를 낳으며 마무리 되었다
약 6개월 뒤 국내기전인 '제 20기 KBS 바둑왕전'에서
다시 만난 이창호와 이세돌의 대결은
이창호의 2:0 승리로 싱겁게 마무리 되고 만다

이후 이세돌은 다음해인 2002년
주요 세계기전 중 하나인 '후지쯔 배'에서 첫 세계 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감을 높였다

 

 

제 15회 후지쯔배에서 유창혁 九단을 상대로 우승컵을 거머쥔 이세돌 당시 三단

우승 후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세돌은
"확실히 세계 최강은 접니다."
라며 다시 한 번 이창호를 도발했다
이세돌의 이전까지는 이런 스타일의 기사가 없었어
바둑은 예禮와 도道를 중시하는 스포츠
무엇보다 바둑기사가 갖춰야 할 기본적 소양은 '겸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세돌은 그러한 틀을 깨고
프로에게 있어 쇼맨십이란 무엇인가를 팬들에게 일깨워준 첫번째 기사였다

팬들은 이런 이세돌의 당돌한 모습을 오히려 반겼고
이세돌의 이런 당돌한 모습은 매력 포인트가 되어 그의 개성이 되었어
하지만 후에 이런 모습은 해외팬들로 하여금
이세돌에 대한 반감을 갖게 만들어
특히 중국은 아직도 이세돌을 엄청나게 싫어해
이창호 만큼 중국기사들을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였고
또 승리를 거둔 후에 중국을 상대로 도발에 망설이지 않았거든 


그리고 이듬해 
2003년
이세돌은 지난 5회 대회에서 자신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준 
이창호와 다시 한 번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7회 LG배 결승전에서 다시 만나게 된 이창호와 이세돌

준결승에서 동기 조한승 三단을 꺾고 결승에 먼저 진출한 이세돌

이창호는 당시 주목받던 신예 기사였던 원성진五단을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지난 번에는 2연승 후 
뒷심 부족으로 3연패 하며 우승컵을 내준 이세돌이었지만
이미 작년 후지쯔 배에서 유창혁 九단을 꺾고 
첫 세계 대회 우승을 맛본 이세돌은 자신감이 충만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세돌은 자신에게 세계 대회 타이틀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던 이창호를 상대로
확실한 복수극을 펼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어

 

제 7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 제 1국

그렇게 시작된 1국은
지난 번 이창호와 이세돌의 대결의 양상과 같았어
언제나 공격을 주도하는 것은 이세돌
그리고 그 공격을 막아내며 타개(위기를 해쳐 나가는 것)해 나가는 것은 이창호였지

흔드느냐 막아내느냐
분명 창과 방패의 대결이라는 비유가 필요한 그들의 대국이었어

초반 승기를 잡은 것은 공격을 주도하던 이세돌이었다
지난 번 패배 이후 초반에 이창호를 흔들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세돌은 매우 거세게 이창호를 흔들었고
이창호는 중반 이후에는 초읽기에 몰려 이미 패색이 짙어져 버렸지

하지만 이창호는 쉽게 돌을 던지지 않고 바둑을 끝내기까지 끌고갔고
지켜보던 이들은 이창호가 돌을 너무 늦게 던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했어
이에 이창호는
"중반 이후 초읽기에 너무 빨리 몰려서 정확한 형세판단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는데
누구보다 형세판단에 능한 기사였던 이창호로서는
말이 안되는 변명이었다
분명 이창호도 이 대국이 자신의 패색이 짙어졌다는 것은 느꼈을 테지만
과연 이세돌이 얼마나 성장했을지 가늠해 보고자 했을 터였다
아마도 이창호는 이번 결승전 또한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절감했을거야 

 

제 7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 제 2국

이어진 2국에서는 이창호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세돌이 무섭게 성장하며 이창호의 턱 밑에 칼을 들이밀 때 까지
정상을 지키던 이창호 또한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
이세돌의 공격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바둑을 두어가며 이세돌의 실수를 이끌어내 
반격에 성공했다

그렇게 1차 라운도 1,2국을 1대1의 스코어로 마무리한 이세돌과 이창호는
약 한달 후 2차 라운드를 치르게 돼

 

제 7회 LG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 제 3국

3국은 종반의 종반을 거듭하며
치열한 끝내기 승부로 가게된다
패싸움을 거듭하며 서로 초읽기에 몰렸던 이 대국은
265수 만에 이세돌의 흑 불계승으로 끝이 나게 돼
(보통 180~200수를 넘어가면 끝내기에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2국에서 반격에 성공했던 이창호로서는 맥이 확 빠지는 순간이었어
게다가 이창호는 '끝내기의 승부사'
미세한 승부에서 누구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이창호였어
미세한 끝내기 승부에서 이세돌에게 패했다는 것에
이창호는 패배의 아픔이 곱절로 다가왔을거야

 

 

제 7회 LG배 세계 기왕전 결승 5번기 제 4국

이세돌이 종합전적 2승 1패로 앞서가며 맞게 된 4국
3국과 마찬가지로 대국은 접전에 접전을 거듭했어
여기서 패배하면 그대로 우승을 내주게 되는 
이창호 또한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고
반드시 이곳에서 우승을 결정지어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으려는 
이세돌 또한 물러설 곳은 없었다


결국 4국의 승자는
 

 

제 7회 LG배 세계 기왕전 시상식
우승 이세돌 三단 
준우승 이창호 九단


이세돌이 승리를 거두며
처음으로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을 따내는 순간이었다
이세돌은 이 대회에서 몇가지 기록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때까지 이창호는 제 1회 LG 배를 시작으로
1,3,5회를 우승하여 홀수 회차 대회를 모두 우승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창호의 기록을 깨버렸고
이창호의 후배 기사중에서는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 결승전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둔 기사로 기록되었다

 

 

상금과 상패를 받고있는 이세돌과 이창호



우승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이세돌은
"이창호 사범님이 역시 최강이다."라며 
오히려 또다시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어

이하는 우승 직후 인터뷰 내용 발췌
(월간바둑 구기호 기자 - 2003년 월간바둑 5월호)

- 이번 결승전만 놓고 보면 영락없이 세력바둑으로 오인받기 십상인데...
자신이 추구하는 기풍의 진짜 색깔은? 
[PS.닉네임 '리틀조'가 말해주듯 이세돌 6단(우승후 3단 승단)의 기풍은 
전신(戰神)으로 통하는 조훈현 9단과 매우 흡사하다. 엷은 듯 하지만 타개가 탁월하고 치고 빠지기에 능하며 
때론 상대를 거칠게 몰아붙여 단박에 승부를 결정짓는 등 탁월한 몸싸움 실력을 겸비했다. 
이번 결승전에서도 네판 모두 이창호 9단의 대마를 잡는 괴력을 선보였다.]
"실리와 세력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바둑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실리바둑으로 갈 건지 아니면 세력바둑으로 가든지 결정할 뿐이다. 
이번 결승에선 판을 짜다 보니까 두텁게 두었을 뿐이다."

-형세가 유리하면 적당히 타협해 판을 닦아 나가기 마련인데... 
평소 바둑을 보면 형세가 유리해 굳이 수를 내러가지 않을 상황에서도 돌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PS. 끈임없이 최선의 수를 찾는 노력은 어쩌면 프로, 전문기사들의 사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문기사도 사람인지라 유리하면 '부자 몸조심'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평소 이세돌의 모습은 달랐다.]
"수가 보이면 손이 근질근질해 참지를 못한다.(대부분 그것으로 승부가 끝나지만) 
그래서 역전패를 당해도 어쩔 수 없다."

-후배기사와의 대국때 부담을 많이 느끼는가?
(결승전 대국에서 조훈현,이창호,유창혁,이창호 9단은 가장 큰 부담으로 하나 같이 후배기사와의 대국을 꼽았다. 
선배기사와 두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데,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아니면 제자등 어린기사와 둘 때면 심리적으로 편치 않다고 고백했었다.)
"나보다 어린 상대가 꽤 있지만 어려봐야 세살 정도 차이다. 큰 부담을 못 느낀다."

- 이번 결승전 준비는 어떻게 했고, 앞으로 목표는?
[큰 대국을 앞두면 누구든 스케줄 관리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이번 결승전에 대비해 두 기사는 나름대로 스케줄을 관리했을 텐데... 
대국일정으로만 보면 이창호가 좀 더 빡빡했다.]
"2년전 LG배 세계기왕전 기보를 반복 검토하며 이번 결승전에 임했다. 
올해 목표였던 LG배 우승을 이뤄 기쁘다. 다른대회에서도 잘해 볼 생각이다.


같은 해 이세돌은
당시 송태곤4단을 결승에서 꺾고 후지쯔배 2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2002년 제 15회 우승에 이어
2003년 제 16회 후지쯔 배 우승을 차지하는 이세돌

이무렵 이세돌은 
계속해서 승단대회에 참가를 거부하고
三단에 머물러 있었는데
대회 일정도 바쁜 와중에 불필요한 승단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한국기원의 참가 명령을 거부했어

이때까지 프로기사들은 단수를 올리려면
매년 열리는 승단대회에 참가해 
다른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승단을 해야했다
사실 승단대회의 존재이유에 대한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나
현역 프로기사가 직접 한국기원을 상대로
거부의사를 밝힌 것은 이세돌이 처음이었다

세계 대회에서 저단자가 연이어 고단자들을 꺾어 나가니
언론은 더욱더 승단대회의 불필요성을 제기했고
한국기원 입장에서도 난처한 상황이 계속되었어

결국 2003년 한국기원은 승단규칙에 
'세계대회 우승시 三단 승단, 준우승 시 一단 승단의 특별승단을 인정한다.'
라는 조항을 추가했고
후지쯔 배의 우승을 통해 이세돌은 
三단에서 七단으로 승단한 뒤
이후 최단 시간 내에 九단까지 승단하게 된다

이 조항은 후에 '이세돌 법'으로 불리며
한국기원은 아예 승단대회 자체를 폐지하고
국내외 주요 기전의 예선 및 본선 성적을 기준으로 승단심사를 진행하여
자동으로 승단이 될 수 있게끔 조항을 고치게 된다

이때부터
프로기사들은 승단대회의 부담을 덜고 대회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 
프로기사 중 九단의 숫자가 대폭 늘어나게 된다
이세돌의 큰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 부분이야

그리고 이세돌은
후지쯔 배 2연패 이후
이세돌은 최정상급의 궤도에 오른듯 타이틀 수집을 시작하게 된다
다음 해인 2004년에는 왕시 5단을 상대로 2대0 승리를 거둬
세계 기전인 삼성화재배에서 우승을 거두고
2005년 창하오 九단을 상대로 도요타 덴소 배에서 우승
2005년 국내기전 맥심 입신최강전에서 우승



이세돌은 곧
이창호의 패도에 거대한 문이 되어
이창호의 시대를 위협하는 무서운 다크호스로 거듭나게 돼

 

반면
2004년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내며
중국에서 '상하이 대첩'이라는 역사를 만들어낸
6회 농심신라면 배를 한국의 역전 우승으로 이끈 이창호

아직은 선배 이창호가 위용을 떨치고 있던 2000년대 중반
이세돌은 언제쯤 이창호를 누르고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2편 끝

 

그럼
대한민국 바둑기사 
세계 최정상 계보의 마지막 승부사
이세돌


[쎈돌 이세돌] 1편 시작한다!


이세돌 九단


이세돌은 전남 신안군 비금도라는 섬에서 자란 
83년생 올해 나이 34살을 맞는 프로 바둑기사야
태어나기는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고
이세돌이 두살배기 시절 비금도로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게 돼
사실상 고향은 비금도인 셈이지

이세돌(李世乭)

그 이름을 보면 바둑기사라는 직업과 
묘하게도 잘 어울리지
이건 그의 아버지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야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세돌의 목 뒤에는
삼각형 모양으로 점이 세 개가 있다고 해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는 '둘째 차돌', '셋째 세돌' 이렇게 지었는데
나중에 보니 여러가지로 의미로 들어 맞았던 거지
이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

'돌'이라는 글자는 사실 본래 중국 한자에는 존재하지 않는 글자야
'돌 석石'자에 '새 을乙'자를 받침 처럼 넣어 만든 우리나라식 한자거든
그래서 이세돌이 과거에 중국 기전에 나갔을 때는  石자로 바꾸어 표기 했었어
요즘은 돌을 그대로 표기 해주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이창호를 '大李', 이세돌을 '小李'라고 부르기도 해

大李未走 小李又至 (대리미주 소리우지)
큰 이씨가 아직 가지 않았는데, 작은 이씨가 또 나타났다.
ㅡ 중국 체육주보(중국의 신문사)에 나온 표제

이창호 때문에 공한증에 시달리고 있던
2000년대 초
중국으로서는 이세돌이라는 또다른 괴물이 또 나타났다며
이세돌의 성장을 보도하기도 했어

가끔 이 자를 이세돌의 아버지가 이세돌의 이름을 짓기 위해 
새로 만든 한자라고 잘못 알고있는 바둑팬들이 더러 있는데
이건 이세돌의 아버지가 만든 한자가 아니라 
조선시대 부터 우리나라에서 이름에 써오던 한자야
조선 말 의병장인 신돌석(申乭石) 또한 이름에 같은 한자를 써





그리고
어린 시절 이세돌이 자란
이 비금도라는 섬은 목포에서도 쾌속선을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더 들어가야 나오는 곳이야

 

비금도 전경 


아름답지않나?
하트모양 해안으로 유명한 섬이야
갯바위 올라가서 낚시도 하고 바둑도 두며 
노년에 유유자적하면 딱 좋겠다
사실 비금도는 그전까지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니었는데 
이세돌 덕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지
알파고 전 이후에는 그 관심이 더 늘어나서 요즘 관광객도 많이 찾아온다고 해
요즘 이세돌의 어머니가 기분이 아주 좋으시단다
어머니는 현재도 비금도에 지내고 계셔

서해안의 섬 답게
주민들은 어업과 염업(천일염 생산)
농업(비금도는 소금과 시금치가 특산물)을 
생업으로 삼고있어
이세돌의 부모님도 귀향 후에 이곳에서 시금치 농사를 지으셨다고 해

 

이세돌의 가족사진
어머니 앞에 안겨있는 꼬마가 이세돌


이세돌은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어
사진에는 없지만 위로 큰 누나가 한 명 더 있어
바둑에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 故이수오 씨가 
어린 시절부터 자식들에게 바둑을 가르쳐서
이세돌의 가족들은 어머니 박양례 씨를 빼고 모두 바둑 실력이 수준급이야
(어머니는 바둑이 하도 재미가 없어보여서 한 번도 배우질 않으셨대)

사진의 우측 상단에 서 있는 큰 형은 이세돌과 같은 프로 바둑기사야

이상훈 九단

젊은 시절
프로기사로서의 성적은 평범했지만
그래도 프로 9단 이라는 것은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은퇴할 때 까지
9단까지 못 올라가고 끝나는 프로기사도 엄청 많거든
프로 9단을 '입入신神'이라고도 부르는데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이야
그정도로 이르기 힘들다는 거지
 
현재는 선수생활은 하지 않고 
바둑 프로리그 '신안 천일염'팀의 감독직을 맡고 있어
참고로 이세돌은 현재 신안 천일염 팀 소속의 에이스야
 

 

 

이세나 
월간바둑 편집장

그리고 작은 누나 이세나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큰 누나 이상희 씨 또한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어)
현재 바둑 관련 매체인
'월간 바둑'의 편집장을 맡고 있어
기력은 아마 6단 정도 된다고 해
(참고로 아마추어 단급은 7단까지 있다)

 

큰 누나 이상희 씨 또한 아마 5단급 실력에 
작은 형 이차돌 씨도 아마 5단급 실력이라고 알려져 있어
아마 5단이 어느 정도 급 이냐면
보통 바둑을 중계하는 여성 캐스터들이 아마 5~7단 정도 기력을 보이는데
남성 프로바둑기사 해설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바둑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인 거지
가끔은 옆에서 남자 프로해설들이 보지 못한 수를 찾아내곤 해

그래서
여성 캐스터들 중에는 프로기사의 바로 전 단계인 연구생 출신들이 많아
프로기사를 준비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 
캐스터나 바둑 매체 관련직 쪽으로 전향하는 여류기사들이 많거든
(일게이들이 좋아할 만한 여자 캐스터에 대한 내용은 글 마지막에 따로 정리하도록 할게)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이수오 씨와 바둑을 두고있는 삼형제


작은 형인 이차돌 씨는 사실 어려서 이상훈, 이세돌과 함께
프로기사를 꿈꿨는데
바둑책 한 번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아마 5단급 실력에 도달했다고 해
그런데 동생 이세돌은 바둑을 배운지 2년만에 형 이차돌의 실력을 앞질러버리고
3년만에 호선(백에게 덤을 주고 흑백이 대등하게 싸우는 것)으로 
아버지를 이기는 수준까지 이르지
이런 동생을 보고 작은 형은 마음 속으로 프로기사의 꿈을 접었다고 해

그러다 어느날 아버지가 
"차돌아 너는 아무리 봐도 머리가 나빠서 바둑은 안되겠다"라며 
목포 고등학교에 진학시켜버렸어
후에 아버지가 머리가 나쁘니 공부나 하라고 한 이차돌 씨는 
고등학교 진학 후 서울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을 한다
참고로 이세돌은 바둑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했어
(형제 중에 머리가 나쁜 편이었던 작은 형이 서울대 컴공이라...)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들 모두가 
이렇게 수준급의 바둑 실력을 갖추고 있다니 참 놀라운 일이지
한 집안에 프로기사가 한 명 나오는 일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프로 바둑기사가 둘 씩이나 나오고
또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명문대에 진학했으니
이세돌의 집안이 보통 머리는 아닌 것 같아

이러한
알토란 같은 자식들을 키워낸 장본인인
이세돌의 아버지 이수오 씨는
비금도로 귀농 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목포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교직에 몸 담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날
돌연 교편을 내려놓고 비금도로 가족들과 함께 귀농을 결정해
주위에서는 자식들 교육을 위해 빚을 내서 서울로 올라가도 모자랄 판에
교직까지 그만두고 섬으로 들어간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거듭 만류했다고 해

하지만 결국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걸 보면 
이수오 씨가 비범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아
다른 직업도 아니고 교사였던 아버지가
서울이 아닌 서해의 외딴 섬을 아이들의 교육 장소로
택했다는 것을 보면 말이지
 

소년 조훈현

 

소년 이창호


조훈현의 아버지가 그랬고 이창호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언제나 미래의 위업에는 과거의 보이지 않는 결단이 뒤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특별한 성공을 거두는 이들은
늘 남들은 택하지 않는 특별한 길을 걷기 마련이지
이세돌 또한 그랬어

 

 

소년 이세돌

이세돌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처음 아버지로 부터 바둑을 배우게 돼
아버지는 매일 같이 어린 이세돌에게 사활문제를 숙제로 내주며
농사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숙제를 확인하고 
함께 바둑을 두며 이세돌에게 바둑을 가르쳤다고 해
그러다 숙제를 틀리기라도 하면 불호령이 내려졌고
어린 나이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울면서도
끝까지 손에서 바둑알은 놓지 않았다고 해

작은 누나 이세나 씨가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이세돌은
또래 친구들이 해변가에서 뛰어놀 때도
늘 혼자 방 안에 앉아 바둑판 앞에서 사활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다고 해
누나는 그런 막내 동생을 보며 늘 안쓰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의 냉철한 훈련과
포기하지 않는 그의 끈기덕에
지금의 이세돌이 있을 수 있었을거야

프로기사가 되고 난 후
이세돌은
비록 자신이 중학교를 중퇴하고
학교에서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지만
"내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라고 
말했어





이세돌이 일곱살이 되던 해인 
1989년도
그 무렵 서울은 
중국에서 돌아온 국민적 영웅을 맞으며 한 바탕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어

 

 

 

제 1회 잉창치 배 세계 바둑 선수권 우승 자축 카퍼레이드

어린 이세돌은 TV에 나오는 
조훈현의 세계 대회 우승 카퍼레이드 모습에 매료되었어
'멋있다. 정말 멋지다. 나도 꼭 저 사람처럼 되고싶다.'

이세돌은 이때 처음으로 프로기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해

이렇게 보면
세계 바둑 최강의 계보를 잇는
조훈현과 이창호, 이세돌이 
참 묘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
 

 

 

아버지 이수오 씨와 어린 시절 이세돌
1991년 KBS 바둑 큰 잔치에 참가한 모습


1991년도
아버지는 국민학교 2학년에 올라간 이세돌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 오게 돼
더 이상 작은 섬에서는 이세돌이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거야

 

 

서울에서 생활 중이던 소년 이세돌
 

당시 형 이상훈은 먼저 서울에 올라와
90년도
15세의 나이로 프로에 입단하여 프로기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형 이상훈과 함께 이세돌은 이때부터 서울에서 지내며
'권갑용 바둑도장'에서 
권갑용 사범의 밑에서 바둑을 수학하게 돼

 

 

권갑용 8단
이세돌의 바둑 스승이야
후진양성에 힘써 93년도에 한국기원 으로부터 
'바둑문화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조훈현의 시대에는
바둑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일본유학이 불가피했고
이창호의 시대에는
프로기사의 내제자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이 무렵에는 한국에도 바둑도장들이 생겨나게 돼
이세돌이 수학한 권갑용 바둑도장 출신의 다른 유명 프로기사로는
 

 

 
최철한 9단
 

 

원성진 9단
최철한, 박영훈과 함께 일명 '송아지 삼총사'로 불리며
(세 명 모두 85년생 소 띠)
신예 기사 때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
 

 

박정환 9단
현재 국내 바둑기사 랭킹 1위를 달리며
28개월 연속 랭킹 1위를 기록하고있다
(국내 신기록)
하지만 세계 대회에서는 번번이 탈락하며 '국내용' 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지석, 백홍석, 이영구, 윤준상, 강동윤 9단 등
수 많은 프로기사 및 우승자를 배출하며 
현재 한국 프로기사 랭킹
상위 열 명 중 여섯 명이 권갑용 사범 도장 출신일 정도로
우리나라 3대 명문 바둑 도장 중 최고로 손꼽히는 곳이야
2003년에는 국내 최초로 도장 출신 프로기사 총합 단수가 100단을 돌파했어
현재도 계속해서 우수한 인재를 배출해내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지
참고로 나머지 두 곳은 '허장회 바둑도장'과 '김원 바둑도장'이야


아무튼
이세돌은 권갑용 사범의 밑에서 3년 간 바둑을 공부하며
92년도 부터 4번째 도전만에 
95년도
만 12세의 나이로 프로기사로 입단하게 돼
(역대 최연소 5위의 기록)

이세돌 9단의 입단 동기로는 조한승 9단이 있는데
조한승이 이세돌 보다 한 살이 많아
어렸을 적 부터 붙어 다녀서 지금도 둘은 매우 친해
 

 

조한승 9단

조한승 9단은 동기인 이세돌 9단에 비해
우승 횟수가 적어서 최정상급의 실력을 가진 기사라고 볼 수는 없어
하지만 유연하고 쉽게쉽게 두는 자신만의 확고한 색깔이 있는 것은 큰 장점이지
때문에 '유연한 승부사' '반상위의 신사'등의 별명으로 불렸어 

우승 성적은 많지 않지만
그의 성품 만큼은 누구 못지 않은 대인배야

2008년 주요 세계 기전 중 하나인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 대회' 결승에서 
동기 이세돌 9단과 만나 아쉽게 패했는데
이세돌 9단 과 조한승 9단은 우승,준우승 상금 전액을
쓰촨성 지진피해 복구에 쓰일 수 있도록 전달하였고
2010년에는 군복무 중 출전했던 GS 칼텍스배의 준우승 상금 1200만원을
천안함 유족들에 전달했어
그리고 2012년에는 
국수전 우승상금 4500만원을 전액 유니세프 
봉사단체에 기부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단체전 부문 금메달을 획득
27사단 이기자 부대 수색대대 복무 중(상병) 병역 면제 혜택을 받게 된 조한승
좌측의 인물은 일베에서도 유명한 전인범 전 27사단장
현재는 중장 진급 후 육군 제 1 야전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 중이야
 

2012년 여러 기부활동으로 사회에 모범이 되어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는 조한승 9단
 

프로입단 동기인 이세돌과 조한승

이세돌과 함께 지내며 동생의 바둑을 봐주던 형 이상훈은
마침내 동생이 프로 입단을 결정짓게 되자 이틀 후
곧 바로 군 입대를 하게 돼
때문에 이세돌은 입단 후 곧바로 혼자 지내게 되었지

이세돌은
어려서 부터 집에만 있어서 주위에 연락할 만한 친구도 없었어 
더군다나 섬에서 자라 난생 처음 서울에 올라오다 보니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입단 동기인 조한승 9단이 이세돌 9단을 친동생 처럼 많이 챙겨줬다고 해
이세돌 9단은 그런 조한승 9단을 많이 따랐지

입단 직후 초初단 시절에는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해

이때까지 승단은 매해 치뤄지는 한국기원 자체적으로 치뤄지는
승단대회를 거쳐서 합격해야
승단이 됐거든

3년 후인 1998년도에
이세돌은 2단으로 승단을 하게 돼

그리고 그 해 3월 2일 이세돌의 생일날
비금도에서 이세돌의 아버지 이수오 씨가 세상을 떠나게 돼
서울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던 이세돌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이무렵 실어증에 걸리게 된다
함께 지내던 형 조차도 군에 가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세돌은 초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어
그 후유증으로 이세돌은 지금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처음 이세돌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여자 목소리 같은
얇은 목소리에 놀라기도 해

이세돌은 처음엔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요즘은 오히려 목소리 덕에 사람들이 자신을 더 많이 기억해줘서
그의 얇은 목소리가 맘에 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세돌은 거기서 무너지지 않고 
이듬해 곧바로 3단 승단

2000년도 부터 비로소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파죽의 32연승을 달리며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무패소년' '리틀 조훈현' 등의 별명을 이때 얻게 돼
지금도 그렇지만
신인 시절에는 지금 보다 더한 공격형 기사였거든
속기파 공격형 기사였던 이세돌은 
조훈현의 젊은 시절 장기인 쾌속의 수법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어

이세돌은 신인시절 부터 이창호와 자주 비교가 됐어
"이창호가 흑도黑道라면 이세돌은 백도白道류의 기사다"
이창호의 바둑은 검고 무거운 느낌이 강한 바둑이거든
그 깊이가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깊다 못해 그의 바둑에서는 음울함 마저 느껴진다는 평이 있을 정도였어

반면 이세돌의 바둑은
빠르고 날렵한 전광석화 같아서
언제나 환하게 빛나는 순백의 돌과 같았지
사실 이러한 평가는 이창호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신인 시절
공격형 기풍의 스승 조훈현, 유창혁과 비교되며 처음 쓰였었는데
이창호가 1인자에 올라선 후 이세돌이 등장했고
이창호와 이세돌이 비교되며 흑도와 백도의 표현 또한 다시 등장했어
 

신인 시절 이세돌의 모습

이세돌은 사진을 봐도 항상 웃는 표정이 많아
장난끼가 많고 통통튀는 성격은 언제나 주목을 받기에 좋았지
하지만 이창호는 언제나 잘 웃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지 않았어
성격적인 부분에서도 기풍에서도 둘은 극 과 극에 서있었지

사람들은 
언제나 상극의 대결에 열광해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를 좋아하지

'신과 악마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최강의 창이냐 최강의 방패냐'

이창호와 이세돌 또한 그랬어
그래서 이 둘의 첫 대결이 언제쯤 펼쳐질지 늘 귀추가 주목됐지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
이세돌은 무섭게 성장했고
금새 이창호가 서 있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됐지

2001년
'제 5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많은 바둑팬들이 기다리던
이창호와 이세돌의 첫 대결이 펼쳐지게 된다
창이냐 방패냐
수 많은 관심이 이 승부에 집중됐어

 

제 5회 LG배 결승전 제 1국
 

매서운 눈빛의 이세돌



최강의 방패와 최강의 창이 처음으로 맞부딪혔던 순간



마지막에 서 있는 건 어느 쪽일까




1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