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AC-130 하면  게임이나 영화로

 

 

접한 사람들이 대부분일거에요.

 

그때문인지 AC-130

 

 

배치된지 얼마 안된 신형 기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사실 AC-130은 꽤 긴 시간동안을 운용해온 기체에요

 

 

 

베트남전부터 현대전까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운용한 기체입니다^^

 

 

일단 AC-130을 설명하기전에

 

AC-130이 탄생하게된 배경을

 

제공한 AC-47 스푸키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볼게요

 

 

 

AC-47 스푸키는 C-47 스카이트레인

 

수송기를 기반으로 개조한 건쉽이에요

 

 

스푸키를 검색해보면 7.62mm 미니건을

 

3정을 장비한 기체가 많이 보이지만,

 

30구경 브라우닝 AN/M2 기관총 10정을

 

 

탑재한 기체도 있었어요

 


 

 

 

 

미니건은 이런식으로 건포드에 탑재해서 운용했어요

<AC-47의 야간 작전을 촬영한 사진>

 

보는것 만으로도 건쉽의 제압 효과가

 

상당하단걸 느낄수 있어요

AC-47은 저고도 작전을 할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베트남전동안 많은

 

피해를 입고있었고 이로인해 미군은 AC-47을

 

대체할 새로운 건쉽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런 미군의 눈에 띈 C-130은 C-47보다

 

더 큰 탑재량을 가진 수송기였고,

 

이 덕분에 C-130은 더 강력한 무장을

 

탑재하는것이 가능했습니다. 

 

AC-47보다 강력한 무장의 탑재가 가능했던 AC-130은

 

AC-47보다 높은 고도에서의 작전이 가능했어요.

 

그리하여 C-130은 최종적으로

 

AC-130으로 개조됩니다.

 

 
AC-130 이외에도 C-119 수송기를

 

개조한 AC-119 건쉽도 있지만

 

AC-130이 건쉽 II 프로그램으로 먼저 완성됐습니다.

 

 

AC-130의 베이스인 C-130은 AC-47의

 

베이스인 C-47보다 대형인 수송기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AC-130은 더 많은 탄환을

 

탑재할수 있었으므로

 

AC-47보다 더 오래동안 화력 지원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전에 투입된 AC-130의 무장은

 

4정의 7.62mm 미니건과 4문의 20mm M61 벌컨을

 

장착한 기체와 7.62mm 미니건 2정, 20mm M61 벌컨 2문,

 

40mm 보포스 기관포 2문을 장착한 기체가 있었습니다.


 

 

 <건쉽은 H형이지만 무장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1971년 10월 25일에는 AC-130A의

 

무장을 교체한 AC-130E가 베트남에 도착했어요.

 

AC-130E는 A형보다 더 강력한

화력을 투사할수 있었어요

 

AC-130E에는 2문의 20mm M61 벌컨, 1문의 40mm

 

보포스 기관포, 1문의 105mm M102 유탄포를 탑재했었습니다 

 

M102 유탄포는 현재 국군에서 굴리고 있는

 

그 105mm 포를 생각하면 됩니다.


 

 

 

 

AC-130은 튼튼해 보이는 외형과는 별개로

 

대공화기에 취약하단 단점이 있었어요.

 

C-130을 베이스로 개조한 기체였기 때문에

 

느린 속도와

 

거대한 크기로 인해 대공화기의

 

표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죠.

 

AC-130은 베트남 전쟁동안 적의 대공포와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어요

 

 

첫 손실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9년 5월 24일에 발생했습니다.

 

37mm 대공포에 의해 생긴 손실이었어요

 

AC-130은 이후 이라크 전쟁때 미해병대를 지원하던중

 

SA-7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기도 하였어요.

 


 

 

 

AC-130은 제공권이 장악된 상태에서도

 

주간 운용엔 큰 위험을 감수하여야 했어요.

 

이라크전 당시에 주간 작전도중 AC-130

 

격추된 이후로 AC-130

 

주로 야간 운용을 하게 됩니다.

 

 

 

AC-130은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이외에도

 

파나마 침공, 걸프전, 코소보 등

 

많은 곳에 투입이 되어왔고,

 

현재도 분쟁지역에서 미군을 지원하고 있어요.

 


 

 

 

AC-130은 긴 체공시간과

 

넉넉한 탄약 탑재량으로 오랜시간동안

 

지상의 아군들을 지원하는것이 가능하구요,

 

 

 
AC-130의 전술적 가치는

 

한기의 AC-130이 일개 대대를

 

전멸시키는것이 가능할 정도로 상당합니다. 

 

 AC-130은 하늘의 포병이나

 

죽음의 천사로 잘 알려져 있어요

 

 

 

 

현재 미군이 운용중인 AC-130은

 

H형 스펙터와 U형 스푸키 II,

 

W형 스팅어 II, J형 고스트 라이더가 있습니다.

 

 

 

 

1.
AC-130
은 베트남전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공중에서 미군을 지원해온

 

장수 기체들중 하나이다!

 

2.지상장비와는 다르게 공중장비는

 

빠르게 도태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AC-130은 40년간

 

많은 개량으로 현재도 현역에서

 

미군을 지원하며 활약하고 있다 

 

4.AC-130은 비정규전이 주를 이루는

 

현재의 미군 특성상 앞으로도 오래동안 운용할걸로 예상한다

5. 말했지만 AC-130은 대공화기에 취약하다

 

 6.국군이 운용하기엔 이런 기체는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AC-130보다도 빠른 속도를 가진

 

A-10조차도 맨패드와 대공포에 두들겨 맞는데,

 

A-10보다도 더 크고 느린 AC-130의 특성과

 

저고도 방공망에 집중된 북한의 방공망에

 

전면전 발발시 베트남전보다도

 

큰 손실이 생길것은 뻔하기 때문입니다. 

 

37mm 대공포에 격추된적이 있는 AC-130이 북한의

 

저고도 방공망과 맨패드를 회피하기란 어려워요.

 

 




출처 및 참고자료 : 영문위키.위키백과.구글. 


 

언제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포병!

 

엄청난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포병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볼게요

 

 

건군시기의 한국군 포병

 

건국과 건군 이후 모든 분야가

 

 그렇치만 역시 미국의 의해서

 

대한민국 땅에 화포라는 물건이

 

 들어오게 되었어요.

 

처음 들어온 재대로된 화포는 박격포나 

 

 바주카포 같은 것은 재외하면

 

사실상 M3 105MM 견인곡사포와

 

 M1 57MM 대전차포 정도였어요.

 

<한국전 발발전에 훈련중인 포병들과 M3 견인포>

 

 M3 견인곡사포는 미국에서 2400여문 정도

 

 생산이 되었던 포였는데

 

공수부대나 산악부대, 해병대등

 

가벼운 화포가 필요한 부대들을

 

 위해 만들어진 화포다 보니

 

가볍기는 하지만 사거리가 겨우 6.5KM 정도로

 

 당시 박격포보다 조금 더 날라가는 수준이었고

 

 설상가상으로 91문 밖에 인수하지 못한대다가

 

이중에 3문은 이미 고장난 상태에서

 

 넘겨진 것이었어요. 

 

당시 미국이 한국에 막대한 군수지원을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로 

 

 그 이전에는 미국내 악성재고를

 

 넘기는 수준이었어요.

 

 M1 57MM 대전차포는 영국군이 사용하던

 

 6파운드 대전차포를 미국이 복제생산을 한 것으로

 

2차 대전당시 많이 쓰인 것이지만

 

이미 2차대전 당시에도 위력부족으로

 

 도태가 시작되던 화기였고

 

제고로 처박혀 있던 것을 한국군에 인계한 것이죠.

 

 수량도 100여문 정도였어요.


 
 

<M1 57MM 대전차포와 대전차포병들>

 

이 것으로는 당연히 T-34 전차를 격파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군 대전차포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응전하여서 의외로 궤도를 파괴하거나

 

전차의 관측창을 격파하는 등의 사격으로

 

북한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북한군 T-34전차를 향해 57MM 대전차포탄을

 장전하는 포병들..거의 자살공격이나 다른 바 없었다.>

 

 야전부대에서는 57MM 대전차포가

 

크게 고전을 하자 급히 미군으로부터

 

당시 최신형이었던 M20 3.5인치 바주카포를

 

인수하여 일선부대에 보급하였고

 

금방 전과를 올리기 시작합니다.


 

 

<M20 3.5인치 슈퍼바주카포와 한국군 사수들.

앞에 서있는 사수는 M3 기관단총을 휴대하고 있다. >

(M20은 80년대까지 한국육군에서  

현역으로 사용되었다)

 

 한국군이 3.5인치 대전차 로켓으로 최초의 전과를

 

 거둔 것은 1950년 8월 대구 북방 가산 전투에서였는데,

 

 8월 초 한국 육군1사단은 미군으로부터

 

 3.5인치 대전차 로켓 3문을 최초로 인수했습니다.

 

 1사단 12연대에서 사수·부사수·탄약수 2명 등

 

4명으로 구성된 대전차특공조 세 개를 편성,

 

일주일 동안 특별 훈련을 거쳐

 

8월9일 최초로 실전에 투입했습니다.

 

12명의 대전차특공조 대원은 특공대장 김성룡 대위의

 

 지휘 아래 대구 북방 석적부락 부근에서

 

단숨에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하는 전과를 처음 올렸습니다.

 

 낙동강전투와 인천 상륙작전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북괴군전차가

 

 전멸해 버려서 57MM 대전차포도 점차 전장에서

 

 사라지고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형 화포가

 

 속속 한국군에 지원되기 시작합니다.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 신응균 중장

 

 

여기서 잠깐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라고 불린

 

 신응균 예비역 중장에 대해서 알아보고갈게요. 

 

 일본육사 53기이므로

 

박정희 대통령보다 4기수 선배였어요.

 

그리고 일본군내에서도 인정을 받은

 

 엘리트 장교로써 일본육군과학교를 이수하고

 

포병장교로써 근무하였고 대본영에서도

 

잠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육군내에서도 총명한 신응균을

 

무척 아껴서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참모장교로

 

 주로 근무할 수 있었다고합니다.

 

 1945년 당시 미군의 오키나와 공격에 맞서

 

수비군의 중포부대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그의 부대는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에 초토화되고

 

살아남은 부하들과 산으로 올라가 게릴라전을 하다가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일본인 여성에게 구조되어

 

 1946년까지 은거생활을 하기도 하였어요.   

 

 신응균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노라노의

 

 전남편이기도 하였다습니다.


 

<30대 시절 노라노>

 

  1945년 그가 오키나와에서 전사한 것으로 생각한

 

시댁의 압박으로 노라노는

 

강제 이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노라노의 증언에 따르면 유족보상금과 연금을

 

막 시집온 며느리에게 나누어 줄수 없어서

 

그랬다고 하는데 당사자만 알 일이죠.

 

 

 신응균은 이후 진명여고에서 수학교사를

 

 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자 돌연 집을 나와

 

 육군에 이등병으로 입대를 하였습니다.

 

주변의 지인들이 한사코 장교임관을

 

독려하였지만 일본군출신임을

 

속죄하여야 한다면서 계속 사병으로 근무하다가

 

 전쟁이 임박해지고 확군이 시작되자

 

 결국 포병장교로 임관합니다.

 

 그는 군내 신망을 받았고 바로 포병사령관으로써

 

 한국전쟁에 참전하였고

 

박정희 소령도 한때 신응균의 제자이자

 

 부하장교로 근무하였습니다.

 

그 시기의 한국군 포병의 체계를 잡고 미군과는

 

 약간 다른 한국군 포병의 기초와 뿌리를

 

 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응균은 51년 미국군사유학을 다녀왔고 59년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나 5.16혁명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신응균을 기억하고 그를 중요하게 쓰셨습니다. 

 

 

 

 

한국전 발발 이후 미군 포병장비의 도입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낮은수준에

 

 포병화기만 가지고 있던 한국군은

 

122MM 곡사포로 무장한 북한군에게

 

 크게 밀릴 수 밖에 없었고 상황이 심각해지자

 

미군에서 긴급히 50년 7월부터 M2 105MM

 

견인곡사포 13문을 시작으로 한국군 포병화력을

 

공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중에 가장 많은 공급은 단연 105MM M2 견인포였어요.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수량이 생산된 모델이고

 미군내에 치장물자도 충분하였구요.

 성능도 당시 동급 화포중에 가장 성능이 좋았어요.


 

 

무게가 2톤 정도로 가벼운 편이었고

 

 사거리도 11KM로 나쁘지않은 수준이었습니다.

 

RAP탄을 사용하면 14.6KM까지 날라갑니다.

 

추진장약과 탄두가 일체형이다보니 장전속도도 빨라서

 

분당 3발에서 빨리 속사를 하면 10발까지

 

 사격을 할 수 있는데 이런 속사 능력

 

 때문에 이 구식화포를

 

21세기인 현재까지도 도태시키지 않고

 

 운영을 하고있어요.

 

50년 9월부터 이미 구식인 M3 곡사포를

 

 대체하여 한국군의 주력화포가 되었습니다.


 

 

 

<휴전후 1950년대 중반 1사단의 105MM 견인포>


 

 M2 견인포는 중복명칭이 많아 후에  M101로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M2 / M101 / KM101 모두 같은 포에요.

 

 

 미국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살리기위해

 

한국 전쟁 기간에 육군장비만

 

M2 105㎜ 곡사포 1,127문을 비롯하여

 

 M114 155㎜ 곡사포 303문, M1 소총 47만여 정

 

 M1/M2카빈 21만9000여 정

 

M1919A4 경기관총 7700여 정 등

 

필수 장비의 대부분을 지원했구요.

 

여기에 3억4300만 발의 M1 소총탄 등

 

 막대한 양의 탄약까지 지원했어요.

 

 이승만의 외교력과 미국의 한국 수호의지는

 

지금의 국제사회의 기준으로는

 

 정말 경이로운 수준이었죠

 

 1950년 당시 한국군 포병대의 숙원사원은

 

 미군의 M114 155MM 견인포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백선엽이나 신응균과 같은 전선의

 

야전장교들은 미군의 155MM포의 위력에

 

큰 감동을 받은 상태였고 미군에게

 

155MM 견인포 원조를 강력히 요청하였지만

 

미군입장에서도 워낙 중화기라서 쉽게

 

인도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한국전 당시 한국군의 M114 155MM 곡사견인포>

 

이 때 밴플리트장군과 같은 친한파 장교들의 많은 도움으로

 

155MM 견인포가 한국군에도 303문이

 

 종전시까지 인계되었습니다..

 

 

 

 

한국육군의 아버지라 불린 밴플리트 대장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 >

 

 밴플리트는 그외에도 한국군과

 

한국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하였습니다.

 

 미군 1일 포격량을 5배가 늘리는 밴플리트포격을

 

 구사하여 미의회로부터 출석요구를 받기까지 하였고

 

 1951년에 경남 진해에 육군사관학교를

 

재신축하여서 한국군 사관생도를 양성시켰죠.

 

 이때 배출된 신임소위들이 바로 전두환과 노태우

 

 김복동 같은 육사11기 장교들이었습니다.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기장 큰 문제가

 

장교들의 경력이 너무 짧다는데 있다고 보고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영관급 장교들은 미국유학을 갈 수 있도록 주선해주고 전선의 위관급

 

장교들도 OBC /  OAC (초군반/고군반) 교육을

 

 다시 받도록 배려하였는데요.

 

이때 신응균과 박정희도 미국에서

 

군사유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군

 장교단 앞에서 화동을 보고 있다.>

 

 

1950년대 미국군사유학을

 

다녀온 많은 영관급 장교들은

 

훗날 한국군의 엘리트 장교단으로 성장하였고

 

 5.16혁명의 주도세력이 되었습니다.


 

<한국전 당시 용맹을 떨친 박태준 중령.  당시 만 24세였다.>

 

 포병장교들은 양성이 아주 어려운 편이고

 

수학적 소양과 지식은 물론 냉철한 판단력과 공간감각이

 

필요한 일이어서 한국군 수뇌부들은 일찍이

 

포병병과의 양성이 노력을 하였고

 

많은 우수한 보병장교들이

 

포병으로 전과를 하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당시 박정희 대령이었습니다.

 


 

 

<한국전 당시 박정희 중령. 맨 오른쪽이다.>

 

밴플리트는 퇴역후에도 57년에 코리아소사이어트를

 

 설립하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으로

 

한국을 지원하였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

 

 한국의 재철소와 발전소등 중공업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습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김종필을 보내서 밴플리트를 방문시켰는데

 

 

 이때 많은 미국산업계 인사들과의

 

인맥을 주선해주었다고 합니다.



 

 밴플리트가 이토록 한국군과 한국의 발전에 경이로운 지원을

 

 한 것은 개인적인 사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밴플리트의 외아들 제임스 공군중위가 52년 4월 3일

 

 B-26을 조종하고 북한의 순천지역의 군용열차를

 

야간폭격하는 임무를 수행중 북한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고 실종처리 되었다고해요.


 

<B-26 폭격기>


 재임스중위의 네 번째 출격이면서

 

최초의 단독 폭격임무였습니다

 

 그의 B-26폭격기는 03:00쯤

 

김포공항 레이더에 잡혔고, 03:30분에는 주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새로운 예비 표적을 받고

 

 날아갔으나 그 후 레이더에서 사라졌어요.

 

밴 플리트는 10:30분 미5공군사령관

 

 에베레스트 중장에게 이 소식을 듣고도,

 

다음날 4월 5일 내색없이 국군2군단 창설식에

 

참석했다고해요. 그는 아들이 실종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죠.

 

밴플리트 장군은 결국 더큰 피해를 막기위해

 

 아들의 수색작전의 중단을 직접 명령하였다고해요.

 

 이 것은 당시 회의에 참석하였된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벤플리트의 한국군 지원정책과 한국전의

 

적극적인 전투행위는 워싱턴의 비판을

 

 자주 받았다고합니다.

 

 당시 워싱턴은 유럽의 NATO육성과 소련군의

 

 유럽전선에 대응하는 데 주력하는 입장이었고

 

밴플리트의 한국군지원은

 

자신들의 역량을 소모하는 것이라

 

 믿었고 한국전에 빠른 휴전에만 골몰하고 있었어요.


 

 

 

 

<1953년 8군 사령관직의 퇴임을 앞두고

 전쟁고아원을 방문한  밴플리트 대장.>

 

하지만 밴플리트는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53년 3월 퇴임할 때까지 엄청난 지원을

 

한국군에 쏫아부었고 훗날

 

한국육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됩니다.

 

 

 

 

미국 군사원조 화포시대

 

 이런 미국의 군사원조품중에는 105MM 견인포 이외에도

 

 중요한 장비들이 많았습니다.


 

 

 


 

 

 

M2A1 4.2" 박격포는 군사원조로 한국군에 도입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포병에서 운영을 하였어요.

 

군필남자들은 잘 알겠지만 박격포는

 

 보병이 운영하는 화포입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의 차량보급률이 너무 낮았고 보병부대는

 

대부분 도보나 우마차 정도로 이동하는 수준이어서

 

도저히 4.2" 박격포를 보병부대에서 운영할 수가

 

없어서 포병에서 함께 운영을 하였죠.

 

 1964년이 되어서야 겨우 보병연대

 

 전투지원중대에서 운영이 가능해졌습니다.


 

 

<파월 해병2여단의 4.2" 박격포>

 

 4.2 인치는 구경이 105MM 견인포보다 커서

 

 사거리는 짧지만 고폭탄의 위력이

 

훨씬 강해서 중요한 화력지원수단으로

 

 고지전에서 크게 활약을 하였어요.

 

 

 M114 155MM 곡사견인포는 1951년 5월에

 

 처음 한국군에 도입이 되기

 

시작하였는데 강력한 위력으로 한국군에게는

 

금쪽같이 귀중한 포였습니다.


 

 

 

<최대 3분에 4발을 발사할 수 있어서 발사속도가 느린 것이

 흠이지만 고폭탄의 위력이 워낙 강하여서

 중요한 공격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파월 포병과 M114 155MM 견인포>

 

 한국전 이후에는 미군이 철수하거나 장비를 교체할 때마다

 

물려받아서 거의 1000문을 보유하게 되었고

 

지금도 사용중입니다.


 

 

<소량이기는 하지만 8인치 M115 곡사포도 휴전이

 가까워지는 1953년에 50여문이 한국군에 인도되었다>


 

<한국전 당시 8인치 곡사견인포>

 

 사거리가 16KM정도에 운영인원이 16명이나

 

 필요한데다가 무게만 14.5t이 나가는 포는

 

 분당 발사속도는 최대 3분에 2발에 불과함에도

 

2000년대까지 현역으로 사용되었는데 고폭탄의 위력이

 

155mm견인포에 비해 거의 1.7배 정도에 반경79m를

 

 초토화할 수 있는 위력이어서

 

 군단포병대에서 아주 아끼며 사용되었습니다


 

일단 고폭탄의 위력면에서는 지금기준으로도 엄청 강력하다.


 

 

<군단포병 8인치 견인포의 야간사격. 

 조명탄이 필요없을 정도다. >


 

<포구를 떠나는 거대한 포탄이 보인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정말 거대하고 강력한 포임을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치만 M59 155MM견인포도

 

 한국군에게 53년에 50여문이 인계되었어요.


 

 

 

사거리가 23KM에 분당 2발을 발사할 수 있었는데

 

군단급 포병화기로 요긴하게 사용되었고

 

한국군이 국산화한 KM114가 대량 생산이

 

 되면서 80년에 퇴역하였어요.

 

일부는 전시물로 사용중이고  극히 일부만

 

 치장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국군에 인계된 포병장비중에 좀 특이한 놈이

 

있는데 바로 M36 대전차 자주포에요.


 

 

<한국군의 M36 대전차 자주포>

 

이 놈은 전차처럼 생기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포병장비인 대전차 자주포에요.

 

2차대전 당시 독일의 5호전차 판터, 6호 전차 타이거같은

 

 야수전차들에게 미군기갑부대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고 응급처치로 만들어진

 

 자주포로 대공포로 쓰이던 90포를

 

 대전차포로 개조한 것을 부착하여

 

포병이 운영하였던 장비였습니다.


 

 

 

<나치 독일의 야수 타이거탱크. 

이녀석 잡을려고 만든 것이 M36이다.>


 

 

당시 미군에서는 M36을 이미 퇴역시키던 상태여서

 

제고가 충분하였고 한국전 기간중

 

 264대가 인계되었어요.

 

 당시 한국군 포병이나 기갑이나 보병 모두

 

아직 병과 구분이 명확하지않은

 

 시절이었고 그 정도로 체계도 잡혀있지도 않던 시절이었죠.

 

기갑병과는 있었지만 겨우 경장갑차 정도 밖에 없던

 

 시절이어서 이 자주포를 기

 

갑병과에서 운영을 하였습니다.

 

 M36이 도입될 시기에 이미 북괴군의 전차들이

 

대부분 미군의 전폭기나 전차에 격파된

 

 시기여서 M36은 자주포로써 운영이 되었어요

 

 특히 강력한 직사화력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분쇄하거나 고지전에서

 

북한군 진지를 초토화시키는 전법으로

 

아주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한국전 당시 한국군의 M36>

 

치열한 한국전이 휴전된 이후에 219대의 M36이

 

살아남았고 미군으로부터 M47을 인계받을 때까지

 

기갑부대의 중요한 장비로 사용되었고

 

 1959년에 퇴역을 하였습니다


 

 

<1957년 중부전선의 M36 자주포진지.>


 

<1950년 후반의 한국군

M36자주포와  승무원들>

 

 M36은 엄청난 구식장비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까지 예비치장되었습니다. 

 

 M36의 주포가 지금도 현역으로

 

 사용되는 90MM대전차포이다보니

 

현재도 엄청나게 재고로 가지고 있는 포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M36 자주포와 동일한 90MM 대전차포를

사용하는 M348A3K 전차. 아직도 현역이다>.

 

 

 

 

 

 

한국군 곡사자주포 시대의 시작


  60년대 초는 한국도 격변기였지만

 

다른 곳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냉전이 극으로 치달아서 쿠바에서 핵미사일건으로

 

 미해군과 소련해군이 전쟁 할뻔하고 ,

 

중동에서는 유태인들과 샌드니거들의

 

대규모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1967년 6일전쟁 당시 아랍동맹군을 향해

 돌격하는 이스라엘군의 M50 개조셔먼.>

 

 북한은 이미 후루시초프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었고 북한군의 전력은

 

한국전 당시보다 더욱 한국군을

 

압도하는 상황이었어요.

 

쉽게 알려주면 한국군이 M1소총으로 땅야땅야 할 때

 

 AK-47소총을 들여와서 드르르륵 갈기는

 

 수준이었던 것이죠.

 

  이때 박정희대통령은 J.F케네디와

 

한국군의 파병을 협상하셨어요.

 

주한미군의 월남차출을 막고  한국군의

 

실전경험을 위한 대통령의 도박이었습니다.

 


 

 

<파월 해병 2여단 장병들>

 

 월남에서 전사한 5,000여명의 희생덕에

 

 결국 대한민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미친 빨갱이들로 지키고 후손에게 번영을

 

 남긴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미국은 당시 국제 왕따였어요. 심지어는

 

영국도 미국의 파병요청을 거절하던 시기였습니다.

 

호주와 뉴질랜드, 태국군이 파병은

 

 하였지만 숫자상 미미했죠.

 

한국군은 연인원 32만명이 참전하였고

 

5만의 병력을 상시주둔하였습니다.

 


 

 

 

즉 한국군의  8%가 항상 월남에서 정글을

 

치고 북배트남군과 배트콩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월 해병 포병들>

 

69년부터 미군이 썰물처럼 철수를 시작하였고

 

 70년부터는 사실상 한국군이

 

자유연합군의 최대군대였고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하였어요.

 

72년에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승리한 안케패스는

 

당시 자유연합군이 승리한

 

거의 유일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미 다른 동맹군대들도 철수를 하였고

 

 월남군은 엄청나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죠.

 

 미군도 상당한 성의표시를 하고 있었어요.

 

 66년에 처음으로 M110 자주포가 넘겨지기 시작하였고

 

총 99대가 한국군에 인계되었습니다.

 

당시 미군에게도 비교적 신형장비였고

 

 전술핵포탄을 쏠 수 있어서 미군도

 

 금쪽같이 아끼던 장비였어요.

 

  13명의 운영이 필요한 중포였고 강력한 위력의

 

8인치 (203MM)곡사포가 부착된 놈으로

 

포탄의 위력만큼은 지금 기준에도

 

 엄청난 놈이었죠.

 

16.8KM/ RAP탄 30KM의 사거리를

 

가졌고 분당2발 발사가 최대였구요.

 

 포탄이 워낙 커서 이 이상의 속도로

 

발사는 불가능하였어요.

 

한국군은 금쪽같이 아끼며 사용하였고

 

 군단 직할 포병이 2000년대 중반까지

 

현역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지금은 퇴역을 하여서 일부는 외부전시물로

 

사용중이고 일부는 치장되고 있습니다,

 

미군으로부터 인계받은 포탄제고가

 

 너무 많아서 한동안은 계속 치장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워낙 구형이고

 

 아무런 방호장갑이 없는

 

덕분에 자주포병들이 이동할 때 포상위에

 

 방울방울 매달려서 눈,비 다맞고 이동을합니다;;


 

 

자주포치고는 방열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노가다도 좀 많았다고 .


 

 

M110과 M548 탄약운반차가 항상 세트로 다녔다. 지금은 둘다 예비 치장장비다.

 

1971년에는 M107 175MM 자주포도 인계되었는데

 

 미군에서도 괴물자주포로 통하는 물건이었어요

 
 

 

 

 

사거리도 30KM/ RAP탄 40KM에 달하는

 

 괴력을 가졌고 강력한 전술핵포탄을

 

사격하는 놈이었어요.

 

90년대까지 주한미군 포병들과 함께 실제로

 

 핵포탄 사격훈련도 하였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군단 포병여단의 M107>

 

물론 사격속도가 최대 분당 2발이라서 지금 기준으로는

 

별로지만 67KG에 달하는 고폭탄을

 

 날리는 굉장한 놈이었어요.

 

군단급 포병의 핵심자주포로 수량은 50량 정도를

 

 운영하였다고합니다


 

 

 

M110/M107 모두 미군에서는 90년대 초에

 

 퇴역을 하였는데 이 때 100여대의

 

 예비차채와 60만톤의

 

포탄을 한국군에 넘겨주어서 엄청나게

 

쟁겨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M107도 K9이 실전배치되면서 퇴역을 하였지만

 

한반도 통일결전에 순간에는 치장시설에서

 

 나와서 엄청난 포격을 할 것이 틀림없어요^^.


 

<M110과 M107은  항상 국군의 날 주인공이었다.>

 

 

 번개사업 그리고 국산화포시대

 

 6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소련의 지원에 취한

 

 김일성은 자기 환갑잔치는 서울에서 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어요.

 

사실 이말이 헛소리는 아닌 것이 미군이 이미

 

 월남전에서 자신감을 골로 보내고

 

 고립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고

 

주한미군도 호시탐탐 철수하려고 하였기 때문이엇죠.

 

 월남전도 점점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있었고

 

 미국의 지원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하였어요.

 

그동안 꽁짜로 원조하던 장비들을

 

돈주고 사가라고 하기 시작한 거죠.


 

박정희대통령은 깊은 시름에 빠졌어요.

 

미국이 한국군의 월남참전의

 

대가로 한국군의 현대화와

 

장비확충, 차관지원, 한국업자의 월남사업지원등의

 

 양해각서인 브라운 각서의 이행도

 

저조해지는  심각한 상황이었죠.

 

실제로 워싱턴에서는 한미상호조약이고

 

나발이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라고 성화였고

 

71년 미 7사단이 철수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합니다...

 

이제 미2사단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 오면서

 

국방을 더 이상 미군에 의지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오고말아요..
 

 박정희대통령은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자주국방의 계획을 세우는데 이 때 설립된 것인

 

ADD 국방과학연구소에요..

 

박정희대통령은 자신의 포병 스승이자

 

 일본육사 선배인 신응균을 부르게됩니다.


 

 

 

 

신응균 소장. 무척 미남이어서 청년 장교시절부터

 

 여성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오키나와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중에 일본여자에게 구조되어

 

 살아남은 것도 이해가 갑니다.

 

신응균은 1959년 중장으로

 

예편후 한동안 직업외교관의 길을 가고 있었어요.

 

 신응균은 의외로 한국현대사의 많은 페이지에

 

 등장을 하는데 주서독대사시절 재독한국인들과 함께

 

서독의 광부/간호사 파견에도

 

 많은 역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박정희대통령으로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신응균 ADD소장>

 

 신응균이 소장으로 취임하면서

 

 먼저 연구진을 찾아다녀야 했어요..

 

당시 의뢰를 받았던 대학교수란 자들은

 

전부 대한민국에서는 화포를 만들수 없다는

 

패배주의적 발언한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거지나라에 인재가 있을리가 없었고

 

민간 / 군 모두 쓸만한 인재들이 없어서

 

한참 고생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육사/해사/공사의 현역장교

 

이공계교관들을 차출해서

 

특무부대 건물 한칸을 빌린 사무실에

 

처넣은 것이 ADD의 시초였어요.

 

당시 끌려온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책상하고 의자만 있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는 간단했어요.

 

예비군 20개사단을 무장할 장비를

 

 당장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M16은 오원철 수석이 중앙정보부를 시켜서

 

만든 베트남의 위장고철회사에 밀반입한 것을

 

 역설계해서 시제품을 만든 후에

 

설계도를 미국콜트사에 받아내었지만,

 

60만정만 만들 수 있었고 1985년까지만

 

면허생산을 할 수 있어서 예비군용으로

 

M1, 카빈, M1919, 박격포, 3.5인치 로켓포를

 

 미군몰래 역설계해서 양산해서 공급하는 계획이었죠.


 

 

번개사업으로 만든 시제 국산총기

(미제복제)를 시찰하시는 박정희대통령

(출처:동아일보)

 

 공돌이들을 갈아넣어서 소병기들은 겨우

 

 성공하였지만 각하는 예비군도 포병을 편성해야한다고

 

지시하셔서 처음으로 105MM 곡사 견인포

 

 복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알보병이었던 예비군에게도

 

105MM 견인포를 배치하실 계획이었습니다.

 

 총기하고 포는 차원을 달리 하는 물건이고 하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ADD의 해군사관학교출신

 

 구상회 연구원이 미대사관을 통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ADD의 구상회 해군소령.

 

훗날 대한민국 육군화포와 탄도미사일사업을

 

주도하게 됩니다.

 

ADD 부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구상회연구원은 포병대에서 105MM 견인포를

 

 하나 가져와서 완전분해를 한 후에

 

역설계를 하였어요.

 

 포신깍을 가공장비가 없어서 일본에서 기계를

 

 수입하고 또 ADD 직원들이 청계천상가에서

 

 미군기술교범 같은 것을 수거해서

 

천신만고 끝에 1973년 허름한 구로동 대한중기

 

 공장에서 처음 시제 M101 105MM 곡사견인포를

 

 완성한 것이 한국군 화포의 시초가 되었어요.

 

대한중기는 훗날 기아그룹에 인수되어 기아중공업으로

 

사명이 변경되었고 현재는 현대그룹에 인수되면서

 

 지금은 '현대위아'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당시 브라운각서의 이행차원에서 한국군에 있는

 

 미군장비의 정비와 부품조달의

 

기술지원하기위해 Clyde D. Hardin을

 

 단장으로하는 기술지원팀 5명이 ADD에 파견되어 있었어요.


 


 

 

Clyde D. Hardin 단장.

 

하딘은 2차대전에 미해군으로

 

참전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단원이었던 Urich는 미육군 대령출신으로

 

 총포전문 병기장교출신이었어요.

 

 처음에 하딘은 ADD가 105MM 견인포를

 

개발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심드렁한 반응이었어요,

 

 하지만 105MM 견인포 시제품이 나오고

 

젊은 연구원들이 아무런 안전장비없이 목숨을 걸고

 

시험사격을 직접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미군의 도면이나 기술자료를

 

넘기기 시작했어요.

 


 

 

<다락대 사격장에서 국산 105MM 견인포를

 시험사격중인 ADD 직원들>

 

 같은 엔지니어끼리 통하는 것이 있었고

 

이들은 곳 친한파로 변신하여서 막대한 자료를

 

 넘기고 도면해석기술과 자신의 노하우를 넘겼어요.

 

 당시 하딘팀의 이런 지원을 미군당국에서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감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어요.

 

 하딘팀은 미국의 방산기밀자료까지 자신들의 권한으로

 

 최대한 수집하여서 넘기기 시작하였고

 

결국 Urich가 넘긴 극비자료가

 

결국 미군당국에 감시에 발각이 되면서

 

하딘팀 5명은 미국으로 강제송환되고 말아요..

 

후에 이들 대신 현역장교들로 구성된

 

JUSMAK-K팀이 들어오는데 이들은 기술지원보다는

 

 오히려 ADD의 감시와

 

 본국보고에 주력하였었어요.

 

미국은 한국이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죠.


본국으로 돌아간 하딘은 방산연구자로써

 

계속 일을 하였고 자신의 연구논문과

 

기술자료집을 한국ADD에

 

기증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종종 방문하여

 

ADD에서 강연을 하시는 등

 

한국에 대한 많은 도움을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하였다고 해요.

 

  이 과정에서 신응균 ADD소장이 과로로 건강을

 

망쳐 결국 쓰러지고 마는 등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합해서 1977년에 대한중기에서

 

KM101 105MM 곡사견인포가 양산되었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어요.


 

 

 

105MM 견인포는 포탄과 추진장약이 한덩어리여서

재장전이 엄청빠르다. 물론 견인포병들의

강한 체력은 기본 옵션이다.

 

 105MM 곡사 견인포는 군사원조로 받은 것까지 합하면

 

 거의 3000문을 가지고 있고, 너무 수량이 많아서

 

 1000문은 전시예비치장을 하고 2000문은

 

동원사단이나 향토사단에서 사용중이에요.


 

 

 

<보병사단 포병연대에서 지금도 잘만 쓰고 있다.

사격DATA가 많이 축적되어서 엄청 잘맞는다고 한다.>


 

<중량이 가벼워서 UH-60으로도 충분히 수송이 가능하다.> 

 

 

 미군이 105MM급 화포를 전부 퇴역시키면서

 

미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포탄을 넘겨받아서

 

앞으로 수십년은 더 현역으로 사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ADD는 자신감에 충만해서

 

KM114 155MM 곡사견인포도 바로 국산화에 성공하고

 

 1977년에 국산 155MM 견인포로 장비한

 

 포병대대를 창설하는데 이르렀어요.


 

 

<KM114는 지금도 동원사단의 주력견인포로 운용중이다>

 

 

 

자체개발 견인포 KH-178, KH-179의 성공.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ADD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최고의 견인포를

 

 만들기로 독하게 마음을 먹고

 

시작한 것이 KH-178이었어요.


 

 

M101의 포신을 연장하고 각종 구성품의

 

 성능을 계량하고 강화하는 형태로

 

ADD와 기아중공업이 중심이 되어

 

개발이 된 KH-178은 당대 최고의

 

105MM 곡사견인포였어요.

 

 사거리가 14.7KM/RAP탄 18KM에 발사속도도

 

 최대 분당 15발 사격이 가능한 엄청난 속도를

 

가진 최고의 105MM 견인포였어요.

 

 1983년에 개발성공한 화포는 한국군보다는

 

 인도네시아와 칠레등 수출용으로

 

 더많이 만들어졌어요.

 
 이미 한국군포병은 105MM 포로는

 

성이 안차는 상황이었고 북한포병을

 

대포병사격으로 분쇄하기위해 보다

 

 강력한 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KH-179 155MM 곡사견인포입니다.

 

 KM114를 기본으로 포신을 연장하고 구성품을

 

강화한 것으로 M114보다

 

1톤만 중량이 증가한 것에 반에

 

거의 2배길이의 거대한 포신을 장착하고 있고

 

 나토표준 155MM 포탄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사거리는 23KM/RAP 30KM로

 

북한의 대부분의 화포들과

 

 대포병사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어요.

 

 발사속도도 분당 최대 4발이어서

 

 중화포치고는 아주 빠른 편입니다.

 

몰론 포병들의 고릴라 같은 팔힘과 강한 체력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죠

 

 

 

 

 

 한국군 포병대에서는 KH-179의 성능에

 

크게 만족해서 수출용으로 주로

 

생산된 KH-178와는 달리

 

1000여문 가까이 생산되어 대부분 사단포병연대에

 

 배치되었고 당연히 지금도 일선에서 사용되고 있어요.


 

 

철주를 박아줘야 한다.


 

 

 

 

발사!

 

지금은 K9이 대량배치되면서

 

 K55 자주포가 사단급까지

 

 내려오면서 지금은 점차 후방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이에요.

 

 

 

 

정말 방열할 때 보면 '저것이

진짜 포병이구나'라는 생각이 누구나 들거에요.


 

 

 

수출도 재법 잘되어서 동남아국가와 중동국가에

상당히 많이 수출했고 지금도 구매문의가

 자주 들어오고 있다고해요


 

 

 

대통령의 특별지시속에 만들어진

 

K-136 구룡다연장 로켓포


박정희 대통령께서 갑자기 북괴군이

 

보유한 것과 동일한 다연장 로켓을

 

개발할 것을 ADD에 지시하셨어요.

 

당시 ADD는 맨붕에 빠지게 되는데 각하의 명령에

 

따라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무기를

 

개발하고 만들어온 ADD연구진이지만

 

다연장은 정말 미지의 영역이었어요.

 

지금이야 저 정도야 껌이지~라고

 

 할 수 있지만 사연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방국가에서는

 

서독이외에 다련장이라는 장르를

 

 취급하는 나라가 없었어요

 

 그것이 다 이유가 있는데 다련장 로켓포라는

 

것이 단시간에 엄청난 고폭탄을 갈기는 맛이 있지만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명중률이 좋지않고

 

자원의 낭비가 상당히 심한 무기인 것이

 

사실이고 항공기의 발달도

 

그다지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미국도 2차대전때 약간 만들어 쓰다가

 

 버렸기 때문에 물어볼 곳도 없었죠.

 

 우리의 ADD는 다시 맥가이버 빙의하여 자료를

 

찾기위해 서독을 가서 자료달라고도 해보고

 

 첩보사진으로 소련군이 많이 사용하는 BM-21 방사포 사진

 

을 연구하기도 하고 엄청 고생을했다고해요.


 

 

<ADD가 많이 참조한 소련제 BM-21 방사포>

 

 여러분들도 박정희대통령이

 

 포병장교출신인 것은 잘 알거에요.

 

한반도 전장은 인류역사상 아주 좁은 횡심에

 

막대한 병력과 장비가 집결한 전장이고 예비군까지

 

 집결하면 정말 미어터질 지경이 됩니다.

 

인류최대의 전장이라는 2차대전 독소전장도

 

 이 정도의 병력집결도는 나오지 않을 거에요.

 

 군간부출신 남자들은 북한군 전술 배우면서

 

 군포군 / 연포군 / 사포군이라는 용어를

 

공부한 적이 있을겁니다.

 

군단이나 사단의 예하포병을 집결하여서

 

화력투사를 한다는 개념인데 워낙 포장비가

 

 많고 제대가 많다보니

 

어느정도 집결하여서 운영할 수 밖에 없어서

 

이런 개념이 나오는 거에요.


 

 

즉 좁은 한반도의 전장에서 다련장로켓은

 

 상당한 위력이 있다는 것이

 

대통령의 판단이었죠.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인데 당시 한국군은

 

비밀리에 소련제 BM-21 1대와 포탄을

 

입수하는데 성공하여서

 

 비밀리에 개발에 성공을 거두었죠.

 

국군의 구룡은 상당히 BM-21가 비슷하게

 

생겨먹게 된 것이이죠^^.


 

 

 구룡은 일단 단기간에 158문이 생산/배치가

 

되어 군단급 직할 포병의 핵심화력이 되었어요.

 

 130MM 36연장 로켓을 18초만에

 

퍼불 수 있는 강력한 놈이었는데

 

 사거리만 초기형이 22KM,

 

후기형은 36KG에 달하는 대다가

 

 64KG의 고폭탄을 날리는 강력한 놈이죠.

 

 제인연감에 올라갈 정도로 서방세계에서는

 

 독보적인 놈이었어요

 

 물론 지금 나오는 최신형 천무에 비하면

 

구식이다보니 아쉬운 부분도 많은 것이 사실이에요.

 

일단 장전을 포병들이 일일이 한발씩 포신에

 

넣어야 하는 데 상당한 노가다이고 시간도 오래 걸려요..


 

다련장포병의 얼굴에서 힘듬이 느껴진다.


 

 

 

그리고 고폭탄 역시 인마살상용만 생산이 되어서

 

 전차와 같은 중장갑장비를 완전격파가

 

 약간 어려운 편이에요.

 

아직까지는 워낙 제고포탄들이 많아서

 

전혀 퇴역할 기미가 없는 무기체계이고

 

 한동안 대한민국을 지킬예정입니다.

 

 

 K55 자주포의 도입


8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군의 신형 KH-179의 성능에

 

 크게 만족을 하고 있었고 신나게

 

야전포병부대에 보급을 하고 있었어요.

 

한국군의 첩보망에 북괴가 자주포를 엄청나게

 

대량 배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분석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성능이야 조잡하지만

 

 북한포병의 절반은 자행포로써 배치를 마무리한

 

상태라는 충격적은 내용이었어요.


 

 

 

<북한군의 170MM 자주포. 

 사거리 54KM에 자동장전장치가 달린 자주포다.>

 

소련군이 쓰다버린 해안포를 받아서 T55전차위에

 

 올린 형태로 사거리는 길지만 명중률이

 

 낮고 발사속도도 느리다고합니다.

 

당시 ADD에도 자주포 개발을 위한 선행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당장 짧은 기간내에 개발을 해서

 

 배치하는 것은 무리인 상황이었어요.

 

 한국군에는 M107 / M110 자주포가 있기는

 

 하였지만 수량이 너무 적고 구식이라

 

 당장 장만을 하여야 하였어요.

 

일단 물색을 해보았는데 서방군대들은

 

전부 미국의 M109를 사서쓰고 있는 상황이었죠.


 

 

 

면허생산권을 미국에 부탁하여 받기로했는데 

 

 단 조건은 주포와 포탑부 일부는 미국에서

 

 사서쓰는 조건이었어요.

 

당시 주포를 생산하는 미국공장이

 

워싱턴주에 있었는데

 

 그곳 하원의원이 동네경제 망한난다고

 

 주의회에 양해각서고 나발이고

 

그 동네공장에 있는 포를 해외에서 생산을

 

 못하게 법안을 내놓았는데

 

이게 통과가 된 것이죠...

 

결국 주포는 기아중공업에서 KH-179 155MM 포신을

 

 잘 만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사서달아야 했어요.

 

당시 생산입찰은 삼성항공이 받아서 정말 4~5년의

 

 단기간에 1,180대나 뽑아댔는데

 

미국도 놀랄 정도의 생산속도였다고 해요.

 

K55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

 

면허생산을 하였고 지금은 세계최대의 운영국입니다.


 

K55는 원래 18KM/RAP 24KM 사거리에

 

 최대 분당 4발을 쏘는 준수한 놈이었어요.

 

방열이나 사격재원 넣는 것은 반자동식으로

 

 K9에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낫던거였어요.

 

 기존 자주포와는 달리 밀폐형 포탑이 있고

 

 알루미늄 합금장갑으로 포병들의 방호력도 좋아졌죠. 

 

 삼성항공에서 면허생산을 위해 많은 기술자료를

 

 미국으로부터 받아서 기술력도 엄청나게

 

 축적할 수 있었어요.

 

 세월이 지나 지금 다른 M109도입국들은

 

창정비를 못해 전전긍긍하고

 

가동률이 떨어지고 있지만

 

 한국군 생산라인과 정비시설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지금도 가동률이 좋은 상황이에요.

 

독일/이스라엘/다른 유럽국가들이 부러워 한다고해요^^

 

한국에서 잘 만들어쓰다보니

 

이름도 M109를 버리고 K-55라는

 

독자이름으로 사용중이에요.

 

 단 주한미군은 곧 죽어도 절대 K-55라고

 

 안부르고 M109A2K라고 부르고 있어요.

 

 세월이 강산을 2번은 바꾸면서 K-55도 연식이 되었고

 

K-9에 점차 주력의 지위를 넘기고 있지만

 

절대 이 정도만 쓰고 버릴 포방부가 아니었어요.

 

 K-9을 개발하면서 축적된 기술을 K-55에 드리부어서

 

 개량하는 개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올리는 데

 

 K55A1개량사업이에요.

 

혹은 PIP개조사업이라고도 부르고 있어.

 

목표는 K55를 K9의 70%정도로 성능을

 

높히는 개조작업입니다.

 

 주요내용은 이래와 같다.

 

1. 포의 차제/현수장치/주퇴복좌기를 강화하여 최대사거리 32KM연장하고


2. 방열속도를 K9급으로 강화하고 (약 45초) 아예 스페이드도 때버림.


3. GPS를 달아서 측지속도를 단축시키고


4. 사격통제장치를 K9급으로 교체하기
 
  거의 미군의 주력인 M109A6 팔라딘보다 우수한 성능의

 

 자주포로 대개조를 한다는 것인데 전량을

 

 지금도 개조중이라고 합니다.

 

 

 

 MLRS M270의 직도입과 국산

신형 다련장 천무

 

걸프전에서 한국군 포병장교들은

 

다른 건 몰라도 MLRS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깜놀한 상황이었어요.

 

사실 MLRS를 보고 그냥 구룡보다

 

좀더 쌔겠지 정도였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로켓탄의 위력이 한국군이 쓰는

 

155MM 곡사포8발을 동시에 쏘는 것보다

 

 강력하였던 것입니다.

 

한발을 쏘면 그것이 공중에서 자탄으로 분해되면서

 

 포탄낙하지점을 완전히 초토화하는 물건이었죠. 

 

 정말 왠만하면 자체개발을 하던가,

 

아님 최소한 면허생산이라도 하는

 

대한민국이지만 MLRS만큼은

 

정말 급하게 사서 총 58대를 도입하였어요.


 

 


 

 

 


일단 주한미군과 완벽하게 동일한 무기체계여서

 

탄약보급이나 정비까지 큰 문제는 없는 상황이에요.

 

한때 한국군은 MLRS에 너무 놀라서 1개 대대 위력이

 

 155MM 곡사포 36개 대대  위력이 난다고 난리도 아니었죠.


 

 

 

사거리 45KM의 다련장탄은 물론

 

 사거리 160/300KM짜리 에이테킴스 로켓탄도

 

 장만한 상태에요.

 

총12연장의 로켓포탄을 발사가 가능하고

 

 구룡과 달리 로켓발사관을 통채로 넣었다 뻬는

 

 방식이라 재장전에 신형은 3분이면

 

가능하다고합니다.

 

그리고 궤도차량베이스라서 진동이

 

 적어서 명중률도 최고였어요.

 

구룡의 경우 인마살상용 고폭탄만 있었지만

 

MLRS의 경우 이중목적고폭탄이어서

 

전차나 장갑차를 터트리는 게

 

 가능한 강력한 로켓탄이에요.

 

포방부에서는 더 사들이고 싶었지만 포탄/ 차량 모두

 

 가격이 너무 비싸서 결국 포기하여

 

M270를 굴린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국형 다련장 발사체인 천무를 개발하게 됩니다.


 

 
 

<신형 국산 다련장 로켓포 천무.. 워낙 신형이어서 

엄청 강한 놈이란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끝판왕 K-9의 개발


 

 

 

 

 

국산 자주포의 개발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어요,

 

당연히 그 중심에는 ADD가 있었죠

 

70년대부터 선행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KH-179가 대성공을 거두고 M109까지

 

 국산화에 성공을 거두자 ADD의 연구진들은

 

 야전포병장교들과 구체적인 요구성능을

 

 체크해 나가기 시작하였어요.

 

당시 이미 미국은 꿈의 자주포인

 

크루세이더 계획이 있었고 갓독일은 PZH2000사업을,

 

 영국은 AS90사업을 진행을 하던 시기였는데

 

 한국은 약간 후발주자의 위치였었죠.

 

 ADD와 포병, 삼성항공은 이제는 꿀릴게 없다는

 

 입장이었고 의욕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어요.

 

당시 ADD의 목표성능발표에

 

육군 포병장교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적극적으로

 

국방부를 설득하였고 예산확보에 성공하여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던거죠.

 

 그와중에 미국은 럼스펠트 국방장관이

 

 가볍고 기동력있는

 

장비로 개편하는 중이어서 크루세이더계획을

 

 백지화한 상황이었어요.

 

크루세이더는 일단 가격이 너무 비쌋어요.

 

 PZH2000을 4~5대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싸서 결국 취소시킨 것인데

 

 이 것으로 미군수뇌부와 국방부가 정면대결을

 

하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었고 결국 럼스팰트가

 

사임하는 결과가 발생하였죠.

 

결국 이 일로 주한미군에 한국군 포병에게

 

무시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죠.


 

 

 

 

 

<순탄치 않은 재임시절은 보낸 럼스팰트 국방장관>


 

물론 이게 전부 럼스팰트의 잘못은 아닌 것이

 

미국방산업체들이 정치권에 로비를하면서

 

 엄청나게 폭리를 취하는게 사실이고

 

 이미 미군도 학을 띄는 상황이죠.

 

심지어 많은 친미국가들도 미국제무기를

 

외면하면 지경이이에요. 

 

 지금 미공군 훈련기사업도

 

미국업체들이 엄청난 개발기간과

 

 천문학적인 가격을 부르면서

 

미공군을 질리게 하였고

 

 결국 한국이 T50을 앞세워 강력한 후보로

 

입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에요

 

 

  92년 당시 미국의 방산업체들도

 

한국의 움직임을 눈치까고 공동개발제의를

 

 하는등 분주하게 접촉을

 

시작하였지만 ADD와 삼성항공 모두 추후 수출진행에

 

 발목이 잡힐까봐 모두 거절하였다고해.요

 

야심차게 개발을 90년대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다른 국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었어요.

 

육군과 국방부에 약속한 전력일정인

 

 98년에 맞추어 박차를 가하였죠.

 

 

 


 

 

K10 탄약수송장갑차를 통하여 자동 송탄이 가능하다

 

 K9은 외화별이에도 재미를 봐서 터키에

 

기술수출을 하였는데 그동안 독일제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던

 

터키군은 K2흑표전차와 함께 한국군의 무기체계로

 

가져오게 되어서 독일을 따돌리고 방산거래의

 

활성화가 가능해진 소득을 얻었죠


 

 

<포신 길이에서 이미 넘사벽이다.>

 

 

 현재 노르웨이군 입찰에 참여 중인데 

 

 스위스의 M109G, 독일의 PZ2000, 

 

케사르자주포와 경쟁중이에요.

 

M109G와 케사르자주포 성능이 별로고

 

독일의 PZH2000은 발사속도과 포탄적재능력이

 

K9보다 아주 약간 앞서지만 기동력이 딸리고

 

가격이 2배가 넘으므로 K9이 유리한 상황이에요.


 

 

 

<독일연방군의 PZH2000>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주포중에 

 

 유일하게 가격이 2배 비싼

 

독일의 PZH2000만이 K9과 대등한 수준이어서 

 

 많은 외화벌이가 가능할 전망이에요.


 

 

 

<영국 육군의 AS-90>

<

 

폴란드의 경우 포탑은 영국에서 AS-90을

 

도입하고 차재는 국산을 쓰기로 하였는데

 

 폴란드 방선업체가 성능과

 

납기준수에 실패를 하면서 어부지리로  폴란드군으로부터 

 

 차제를 120대 주문받아서 팔아먹고 있어요.

 

 그리고 인도군에서도 약 100여대의

 

발주협상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

 

 

 

K9은  K55와 비슷한 수량을 배치할 예정이고 이미

 

운영을 한지가 10년이 넘어서

 

개조작업이 예정되어 있어요.

 

 

 

 

 

105MM 똥포 아직 안죽었다.

105MM 자주포 개조사업

 

한국군에서 약 3,000문의105MM 견인포가 있고

 

 이중에 1000문은 치장중이에요.

 

 즉 아직도 2,000문이 시퍼렇게 굴러다니고

 

있는 것인데 천조국으로부터 받은 것,

 

국내생산한 것까지 모두 350만발의

 

포탄재고가 한국에 있다고합니다.

 

지구상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거에요.

 

즉 퇴역을 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는 상황인거죠.

 

그래서 포방부에서 약 500문을 5톤 포차에

 

결합하는 개조작업을 하기로 하였고 

 

 보병연대에 4.2" 박격포를 퇴역시키면서

 

이 빈자리에 105MM 자주포 포병대대를

 

 편성하는 것으로 계획중입니다. 

 

 

 

이 자주포는 기존 견인포에 비해

 

운영포병을 11명에서 5명으로 줄이고 K9과 같은

 

신형사격통제장치를 달아서 대포병전에서도

 

전투가 가능한 수준으로 개조하는 작업이죠. 

 

 장전을 재외하고는 모두 K9급의 자동방열,

 

 재원입력이어서 약 56초만에 초탄 발사가

 

가능한 수준이에요.

 

장갑판도 부착해서 포병의 생존성도 높힐 계획이에요.

 

 이것이 예정대로 진행이 되면

 

보병연대의 화력이 강해지면서

 

더 이상 사단사령부의 노예가 아닌

 

연대전투단으로써 탈바꿈하는 거죠.

 

 한화태크윈에서 사업을 받아서 하고 있는데

 

외화벌이를 위해 수출판촉도 열시미 하고 있는 중이에요.

 

 주로 동남아나 남미같은 개도국에서

 

많이 문의가 오고 있다고합니다.

 

 

드디어 세계3위 포병강국 대한민국

 

 포병에 대해 알아보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