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제가 6사단 출신이라 그런지

 

6사단에대해서 글을 자주 쓰는거같네요^^;;

 

 

 

이번엔 한국전쟁당시 청성부대 6사단

 

활약에대해 빠르고 쉽게 써보도록할게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

북괴 김일성(金日成)의 명령으로

 

완전무장한 20만의

 

 북한군이 기습남침을 시작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북괴군은 국군보다

 

약 2배 병력 수준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북괴군의 병력 중 3만여 정도는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전했었던

 

베테랑들이었습니다.

 

또한,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해 온 김일성의 노력으로

북괴군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으로

 

 완전무장한 상태였습니다.

 

 

이에 반면,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

 

 부담을 느낀 미국은 국군에게 군수물품 및

 

 

무기를 지원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결국 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병력 면에서도,

 

장비 면에서도 열세인 상황이었고


 

전쟁 발발과 동시에 국군은 동시다발적인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는 즉 북한군의 연속적인 승리와

 

대한민국이 위태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에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등장하니,


그것은 바로 김종오(
金鍾五) 장군이

 

 이끄는 6사단의 활약이었습니다

 

 

 

 

신화의 시작, 춘천대첩


 

 

북괴군의 초기 남침 전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북괴군 제1군단은 서부전선에서 서울을 공략하고,


 

북괴군 제2군단은 동부전선에서

 

춘천을 공략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 주력의 후미를 차단,

 

제1군단과 협력하여 격멸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6월 28일,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점령하였고


국군의 주력은 북괴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서울을 포기하고 남으로, 남으로

 

계속하여 후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6월 30일이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승전으로 전세가 유리했던

 

 그들은 왜 국군을 추격하지 않았던걸까요

 

 

그 이유는 김종오(金鍾五) 장군 예하

 

6사단 장병들이


춘천에서 북한군 제2군단 병력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성공,


북괴군의 전쟁 전략에 대한 막대한 차질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하루 전인 6월 24일.


 

채병덕(蔡秉德) 육군참모총장은

 

그동안 유지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합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외출 및 외박,

 

휴가를 가지 못했던 장병들이


일제히 무더기로 군을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이는 개전 초기 국군은 인원 편제가 부족한 상태에서

 

 적을 맞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김종오(金鍾五) 장군은 개전 발발 2주 전,

 

 6사단장에 부임하였고


'전쟁이 임박했다'는 판단 하에

 

장병들에 대한 정신교육,


전쟁에 대비한 진지공사와 장병들의 외출 및

 

 외박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여


전쟁이 발발하자 혼란없이 적군에 대한

 

전투를 차질없이 시행할 수 있었던겁니다.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은

 

춘천에 주둔한 6사단 7연대에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은 철저한 방어준비가 되어있는

 

7연대 병력들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심일(沈鎰) 소위가 이끄는 특공대에 의해

 

 자주포(SU-76) 2대가 파괴당하고 맙니다.

 

 

(가운데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

당시 북괴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은

 

강원도 인제로 진격해있던 상황이었는데


북괴군 제2군단장

 

김광협(金光俠)은 제2사단이

 

춘천 제압에 실패하자


제7사단을 춘천으로 불러들이게 되고,

 

 제7사단은 인제에 최소의 병력만 남기게 됩니다.

 

 

 

제2사단의 공격은 잘 막아내었으나,

 

제7사단이 원군으로 합세하여


춘천을 공격하자 신성모(
申性模) 국방부장관은

 

 6사단에 대한 철수 명령을 하달합니다.


 

 

 

이미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었고,

 

아군의 주력이 패퇴한 상황에서


 

6사단만이 춘천에서 전과를 올리고 있었으나,

 

오히려 적에 의해 6사단이 포위되어

 

 

격멸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6사단은 6월 29일 춘천을 포기,

 

7월 1일 충주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게 끝이 아니였습니다.

 

6사단 19연대 소속 조달진(趙達珍) 일병은

 

 

자신을 포함한11명의 특공대를 구성,

 

6월 28일 10시경 홍천 말고개를 지나던


북괴군 전차대열에 육탄 공격을 감행,

 

적 전차 4대를 파괴하고 6대를 노획하는

 

 성과를 이루게됩니다.

-그를 비롯한 육탄 11용사

 

현장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춘천에서의 승리는 적군의 발을

 

 멈추게 하였으며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남침에 대한 논의와


 

 패퇴한 국군이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게 하는 등의

 

소중한 시간을 벌인 전투였으며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춘천에서의 패배를 겪은 북괴군 지휘관들은

 

 일제히 교체되게 됩니다.

 

 


 (김무정 - 훗날 김일성에 의해 숙청 당한다.)

춘천에서 패배한
김광협(金光俠) 대신

 

 김무정(金武亭)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으며


 

제2사단장 이청송 대신 최현(崔賢)이 임명되었고


제7사단장 전우 대신
최춘국(崔春國)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제7사단은 제12사단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대통령 부대표창 1호 

 

 충청북도 음성군 무극리 전투

 

 


 

 

임부택(林富澤) 장군은

 

 당시 6사단 7연대장이었습니다.


7연대는 춘천에서 철수하여 7월 4일,

 

충주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쉴 틈도 없이 7연대에

 

 김종오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
"우리를 따라 내려온

 

북괴군 제15사단을 격퇴하라."

7연대 병력들에게는 쉴 틈도 없이

 

또 다시 막중한 임무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1950년 7월 7일

644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6사단 7연대 2대대 병력 앞으로


 

웬 여성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김재옥(金在玉)
이었으며

 

 동락국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녀는 2대대장
김종수(金鍾洙) 소령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북한군 15연대 병력들이

국민학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에 김종수 소령을 비롯한 2대대의

 

각 중대장들은 김재옥이 제공한 정보에 대한

 

 사실여부를 파악하였더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 북한군이 경계병도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2대대 병력들은 동락국민학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적15사단

 

48연대 병력에 대한 기습을 실시하였고

 

 

 

북괴군 천여 명을 사살하고

 

중장비를 획득하는 등의 성과를 얻는데성공합니다.

 

 

이 전투에서의 성과로 국군은

 

 북한군이 사용하던 소련제 무기를 획득하였고


정부는 이 무기를 UN안전보장이사회에 보내

 

 

 

소련이 북한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 알리게됩니다.

 

국군이 반격한 전투 중 최초의 승전보를

 

 접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제7연대 전 장병에 대한 1계급 특진과

 

대통령 부대표창 1호를 수여하였습니다.


 

김재옥 여교사는 이때의 전투에 참여했던

 

이득주(李得周) 소위와 결혼하게 됩니다.

 

 

 

 

 

 

 

 

 

 

가자, 압록강으로!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장군의 지휘 하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였으며…


 

 

1950년 9월 28일

국군은 서울을 탈환합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北進)

 

 시작하게됩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군 수뇌부는 북으로,

 

 북으로 도망을 쳤고


국군은 통일을 위하여 북한군을 추격하며

 

 

압록강을 바라고 진격했습니다.


 

1950년 10월 22일

6사단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장군이

 

지휘하는 수색대대원들이


평안북도 묘향산 부근에서

 

 김일성의 캐딜락을

 

 노획하는데에 성공합니다.


 

 

1950년 10월 26일

국군 제6사단 7연대 제1대대는

 

압록강 초산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압록강 물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헌수하게 됩니다.


국군과 UN군 중 이들을 제외하고는

 

압록강에 도달한 부대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통일은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얼마 안 있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날 비극은 시작됩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뼈저린 6사단의 패배


 

 

 

김일성의 구원 요청을 수락한 택동(毛泽东)

 

 중공군을 한국전쟁에 개입시키게됩니다.

 

이에 압록강까지 홀로 진격했던 7연대는

 

 순식간에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고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으며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불행히도 그 당시 김종오 장군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자신의 6사단을 지휘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김종오 장군은 6사단장에서 물러나게 되고

 

 

 

후임으로 장도영(張都暎) 장군이 6사단장에 임명됩니다.


 

 

 

국군과 UN군은 어렵게 점령했던

 

38선 이북의 영토를 포기하고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중공군은 이를 계속하여 추격했습니다.


 

 

 

1951년 4월 22일

제6사단은 강원도 화천군에서

 

중공군과의 전투를 벌였으나


화천리 전투에서 패배
하게 되고

 

또 다시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때의 패전으로 6사단은

 

 미군들의 조롱을 받게 되었습니다.

 

 

 

 

 

 

 


決死의 다짐, 용문산 전투

 

 

 

6사단은 화천리 전투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개전 초기 춘천에서 북한군을 막아내고,

 

 충북 음성에서 최초의 승전을 거두고


국군과 UN군 중 아무도 하지 못했던

 

압록강 진격을 이뤄냈던 부대였건만,

 

하루 아침에 패배하여 미군의 조롱을

 

받는 부대가 되어버렸으니….

하지만, 6사단은 얼마 안 있어

 

중공군에게 설욕을 함과 동시에

 


6.25전쟁에서 발생했었던 전투 중

 

 

 최고의 전과를 이뤄낸 전투를 치루게 됩니다..

 

 

 

1951년 5월 17일

중공군 제63군 예하 3개 사단

(187, 188, 189)이

 

아군 제6사단 2연대 병력들이 사수하고

 

 있는 용문산을 공격하게됩니다.

중공군은 2연대가 점령하고 있는

 

 용문산을 공격하였는데,


2연대 병력들이 도망치지 않고

 

용문산을 지키는 것을 보고서는


용문산이 국군의 주 방어선이라고 착각,

 

'저 곳을 뚫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6사단 장병들은 중공군에게 설욕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용문산을 지키기 위해


방탄에
'결사(決死)'
라는 글자를

 

새기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용문산 전투 후 포로가 된 중공군들)

당시 중공군은 2연대가 지키고 있던

 

용문산을 계속하여 공격하였는데,


용문산 양 옆으로는 아군 제7연대,

 

제19연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은 미처 이 사실을 몰랐고

 

2연대만 뚫으면 된다고 판단하여


용문산만 하염없이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아군 제7연대와 제19연대는

 

 일제히 양 옆에서 튀어나와


용문산을 집중공격하고 있던

 

중공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중공군은 때 아닌 아군의 기습에 놀라

 

5월 21일, 퇴각을 하게 됩니다.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용문산을 지키고 있던

 

 2연대 병력도 산에서 내려와


6사단은 2연대, 7연대, 19연대 병력들이

 

모두 합류한 상태로


퇴각하는 중공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화천 저수지까지 추격하게 됩니다.

이 전투로 중공군

 

17,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2,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국군의 피해는 아군 전사(戰死) 107명,

 

부상 494명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투의 승전보를

 

 듣고서는 화천 저수지의 이름을

 

 

 '파로호(破虜湖)'라고 하였습니다.


'오랑캐(중공군)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이였습니다.

 

 

 

이 전투로 6사단은 중공군에

 

 설욕함과 동시에

 

 

 

한국전쟁 역사상 최고의 성과

 

얻는 등의 역사를 쓰게 됩니다..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후

6사단은 강원도 홍천, 경기도 포천 등에

 

 주둔하다가 1966년, 철원으로 이동하여

 

 

 지금 현재까지 주둔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서울을 함락시켰던

 

 

 북한군 정예 제4사단이

 

 

 

바로 6사단 바로 전방에 주둔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73년 11월 20일

GOP 초병 경계를 서고 있던 상병 이기태,

 

 일병 김효섭미상 폭음을 청취하여

 

 상부에 보고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미상 폭음 청취

 

보고가 들어오자


군에서는 7연대 GOP 지역에

 

북한군의 땅굴을 의심하여

 

 시추 작업을 실시하였고


1975년 3월 19일,
제2땅굴
을 발견하였습니다.


 

 

제2땅굴 시추 작업동안 꽃다운 생명들이

 

 전사(戰死)하기도 했습니다.

6사단은 1966년 철원 축선을 담당한 이후로

적의 침투를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은 부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현재의 이 순간.


6사단은 철원 축선의 철책선을 담당하며

 

365일 24시간 완전경계작전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

 

맞서 용문산을 지켜내고,


중공군을 격파한 그들의 전공

 

 


 

투광등 불빛 아래 고생하는 GOP 대대원들….

그대들이 있어 이 나라가 존재합니다

 

 

雖死不敗 靑星鬪魂

압록강 물을 다시 마시자!


 

 

사진및자료출처: 육군블로그 아미누리. 구글. 위키백과

6.25 한국전쟁 중 일반인들에게는

 

 많이 잘 알려지지않은

 

용문산 전투에 대해 써보려고해요

 

 

 

 

6사단용문산 전투

 

1951.5.17~ 1951.5.21  경기도 가평군 용문산

 

 

국군 6사단 VS 중공군 187.188.189 사단

 

군대에대해 잘모르시는분들을위해 하나 설명드릴게요

 

분대<소대<중대<대대<연대<사단<군단

 

예하부대 3~4개가 뭉치면 한개의

 

 상급부대가 생각하시면되요.

 

ex) 3개의 대대 = 1개연대 , 3개의 연대 = 1개의사단

 

 

<당시 6사단장 장도영 준장>

 

평은 그렇게 좋은 장군은 아니였어요.

 

용문산전투가 바로 장도영준장의

 

 최대업적일꺼라 생각되요.

 

 

51년 4월말 1차 춘계대공세를 실패한 중공군은


다가오는 5월에 2차 춘계대공세를 펼치게 되는데


그 장소가 바로 군사,교통의

 

 요충지였단 용문산 일대에요.

 

6사단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춘천-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저지하면서 유명세를 떨친 사단이었어요


 

 

 

하지만 6사단은 이전에 사창리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기에


 

장병 모두가 결사 (죽기를 각오) 라는 문구를


철모나 머리띠에 적고 나서 전투에 임합니다.


 

 

 

 

주 저항선에는 7연대19연대가 위치해 있고


그 위로 2연대 1대대는 미사리 2대대는 울럽산

 

3대대는 353고지에 진지를 구축했어요.

 


 

 

 

 

2연대 1대대중공군 187사단

 

공격을 해오자


적 한개 연대 급을 격파하고 나산까지 후퇴를 합니다.


대대가 연대급을 격파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거죠;

그 시각 중공군 188사단

 

공격으로 2연대 2대대


 

무려 하루라는 시간 동안 버티고 버티다

 

끝내 427 고지로 후퇴를 합니다

 

<중공군의 도하>

출처 : 6.25 60주년 사업단


 

역시나 한개 대대가 사단급을

 

 상대로 하루를 버틴것도

 

 역시나 엄청나고 말도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리 지형을끼고 싸웠다고해도

 

 한대대가 한사단급을 상대로

 

가능하다는게 신기할정도입니다.


그리고 원래 작전은 후퇴하게 될 경우

 

사단의 주 저항선 이남까지 후퇴해라

 
이거 였는데 2연대 독단적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바로 후방의 고지로 들어가서 항전을 하게 되는겁니다


 

 

역시나 중공군 187사단188사단

 

2연대 섹터를 공격했어요.


여기서 중공군은 상대가 방어가

 

너무 탄탄하다고 느꼈고


그러다 보니 2연대의 독자적 저항선을

 

6사단의 주 저항선이라

 

착각을 해서후방에 있던 예비사단인

 

189사단 까지 공격에 가세.

 

국군 2연대 VS 중공군 3개 사단이 싸우게 됩니다.

 

병력차이만 어마어마 함에도

 

불구하고 결사 정신과


후방의 화력지원 밑 공군 공습으로

 

끈질기게 방어를 합니다.

 

초반에 말했듯이 3개연대가

 

모여야 1개사단입니다..


 

<미 포병대의 지원 사격 >


 

 

 

그런데 중공군 3개 사단이 총력을

 

다해서 한개 연대를 치는걸알고

 

기회다 싶어 주 저항선을 지키던

 

 7연대19연대는 적의 후방을 쳤어요.

 

중공군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자신들보다

 

 많은 병력이라고 착각을 하고는


스스로가 와해되서 대규모의 피해를 입고


21일이 되자 도망을 치게 됩니다.

 

이 여세를 몰아 국군 6사단

 

 70~80km 까지 추격하고


이 때부터 미군도 적극적으로 가세합니다.


결국 화천호에서 퇴로가 막힌 중공군 대부분을 섬멸해요


 

 

 

 

이렇게 해서 전투는 24일 까지 이어져요.


용문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용문산 전투


추격 끝에 섬멸하게 되는 것을

 

파로호 전투라고 불리는데


용문산 전투 안에 파로호 전투

 

포함 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국군 피해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

 

중공군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

 

1명당 100명 이상 죽였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전과라고 할 수 있죠.

 

<용문산 전투가 끝난 후 제 6사단 2연대 1대대

중화기소대 장병들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미지 출처=유용원의 군사세계)

 

단일 전투로서 이만한 전과는 한국전쟁 통틀어

 

그 예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대승이였습니다..


 

 

 <중공군 포로>

<중공군 포로>


 

<승전 소식 후 이곳을 찾은 이승만 대통령 (뒤에 타있는 사람이 당시 장도영 준장)>

 

 

중공군을 섬멸한 장소가 화천호이지만

 

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오랑캐를 무찌른 호수) 라 명명해서


이 곳의 명칭이 지금까지도 파로호라고 불리고 있어요

 

 

 

 

<그 후에 세워진 기념비>

 

<용문산전투전적비>


 

좌.장도영 장군  우.박정희 장군

(이 때는 박정희보다 높은 자리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부의장.  )

 

 

 

장도영 장군은 후에 국방부장관 까지 오르지만

 

박정희와 권력다툼하다 쫒겨나고

 

미국에서 생을 마감합니다.(치매도 온다)

 

아무튼 비운의 인생을 살다가신 분이죠.

 

<푸른별 제6사단 청성부대>

 

지금까지 용문산전투에대해 알아보았는데요..

 

6사단출신으로써 정신교육때 많이들었전투였지만

 

많은사람들이 모르기에 한번 써봤습니다..

 

인천상륙작전.낙동강전투등처럼 기

 

억되야할 전투라고 생각됩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 나무위키.구글


 

 

6.25하면 보통 인천 상륙작전이나

 

낙동강전선 다부동전투,

 

아니면 백마고지 전투 같은거

 

 많이 떠올리는게 일반적인데

 

나는 6.25 전쟁의 방향을 결정지은건

 

다름아닌 6사단의 춘천전투라고 봅니다.

 

6사단이 춘천에서 북괴 2군단을 발라버리면서

 

 적의 주요 전략을 완전히 뒤틀어버렸고,

 

그 덕에 그나마 남은 병력과 장비를

 

 추스려서 낙동강 전선이라도

 

 구축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6.25 개전 당시, 북괴의 개전 초 전략입니다.

 

서울을 위시로한 서부전선에는 시가지도 있고,

 

 국군도 3개 사단이나 있고, 인구도 많아

 

징집 땜빵이 쉬울 것으로 보이니

 

이곳 전선을 모루로 삼고

 

동부전선의 2군단을 망치로 삼아

 

춘천을 거쳐 수원방향으로 우회하여

 

서부전선 국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려던 게

 

 북괴의 주 전략이었습니다.

 

이게 성공했다면 장비를 버렸더라도

 

 병력이라도 건진 1사단이나 7사단, 수도사단이나

 

 피난민들은 뒤에서 북괴 1군단, 앞에서 북괴 2군단을

 

 만나 포위 섬멸당했을 것이고, 한반도 남부에 있던

 

서너 개 사단은 집결하기도 전에 휩쓸리고,

 

김일성의 장담대로 8월 15일에

 

북괴군은 부산까지 도달했었겠죠.


이를 위해서는 망치의 진격로상에 있는

 

 6사단을 초전에 격파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북괴는 서부전선보다도 더한 병력집중을 시켰습니다.

 

 6사단 하나 잡으려고 2개 사단에다가 자주포,

 

모터찌클연대까지 증원시켰고 예비사단까지 뒀습니다.

 

 병력격차가 세배쯤 났을거에요


 

 

 

근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춘천지구를 방어하던 6사단 7연대는

 

 북괴 2사단의 초전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소양강 도하를 준비하던 적을 상대로

 

 오히려 아군이 역 도하하여

 

기습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심일소위 및 특공대가 한국전쟁

 

최초의 적 기갑 격파 타이틀도 따냈습니다.


거기에 적의 진격로를 예측했던

 

 6사단 포병대대가 성공적인 화력지원을 수행해,

 

강안을 따라 진격하던 북괴 6연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수십문의 북괴 곡사포 및

 

 대전차포 등을 격파하는 성과도 올렸습니다.


인제-홍천지구를 방어하던 6사단 2연대는

 

배속받은지 고작 일주일도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방어작전에 돌입하여, 많은 피해를 입긴

 

 하였으나 적 12사단의 공격을 저지해냈습니다.


사단 예비였던 19연대는 춘천과 인제를

 

오가며 효율적으로 예비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춘천에서 북괴 2사단이 소멸당하자, 북괴는 12사단에서

 

 일부 전력을 빼내어 춘천 쪽으로 돌렸고,

 

그동안에 6사단 예비였던 19연대가 춘천에서

 

인제-홍천쪽으로 이동하고, 6사단 포병대대도 일부를

 

 이동하여 인제-홍천방면을 지원. 여기서도 매우 효과적인

 

포병대대의 지원에 힘입어 오히려

 

적 12사단 잔류병력까지 괴멸시켰습니다.

 

개전 3일도 안되서 사단 두개가 사라졌죠

 

망치와 모루를 하고싶었던 것 같은데

 

 망치가 파괴됬죠 ㅎ


이때 더 소름돋는게 있는데, 춘천과 인제를 왔다갔다

 

 하면서 연대급 적을 궤멸시키고 적 포병도

 

 소멸시키던 6사단의 포병대대 전력은

 

사거리 10km도 안되는 105mm

 

 M3 견인곡사포 13문이 전부였습니다.

 

꼴랑 13문가지고 이리쪼개고

 

저리쪼개서 적시에 적소에 화력지원.


 

 

 

비록 서울이 함락되긴 했으나,

 

6사단이 적 망치의 핵심 진격로였던 춘천을 방어하고

 

오히려 망치를 때려잡아버렸기 때문에,

 

 서부전선의 아군 병력을 상당수 보존하는데 성공했고,

 

기습 상륙한 적에게 포위되었던 8사단은 병력과

 

 장비를 상당수 보존하며 대관령을 타고

 

철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고 때맞춰 도착한

 

 미군의 지원을 받아 굳히기를 시전했죠.

 

북괴의 공세종말점은 거기였고, 낙동강 전선은

 

 좁은 전선폭과 전선의 형태가 예비대를

 

굴리기 매우 적절했던 까닭에, 당시의

 

 치열한 전투랑은 별개로

 

 매우 효율적인 방어선이었습니다.

 

이후에는 다들 알다시피 북진이었고...

 

6.25 전쟁 초 북괴의 전략을

 

6사단이 완전히 뒤엎어 놨습니다

 

만약 안그랬으면 낙동강 전선이고

 

뭐고 한국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6사단의 춘천전투는 널리 알려져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