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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조국을 위해 총을 든 학생들이 대다수였던

 

"태극단"

 

 

 

1950년 6월29일

 

파주 어느민가...

 

4명의 중학생들이 모여 태극기에 혈서로

 

"대한민국 지하 공작대"라 적고

 

반공투쟁에 목숨을 다할것을 맹세합니다.

 

 

보통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태극단이란

 

 이름을 들으면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단체를 떠올리게될꺼에요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에 조국을 위해 싸운

 

반공유격대 "태극단"이랑은 다른 조직입니다.

 

때는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게됩니다

 

6월 27일 파주 금촌에 살고있던 경성상공중학교 4학년

 

 이순창씨는 동생이었던 휘문중학교

 

 3학년생 이순호씨와 함께

 

금촌역 부근에서 국군의 M1개런드 소총3정을

 

 습득하게 됩니다.

 

아마 국군이 퇴각하면서 버리고간

 

소총으로 생각됩니다.

 

 

 

6월 29일 국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를 완료한 후 바로그날

 

이순창, 이순호는 뜻을 모은 학생 2명

 

 경기사범학교 3학년 황상균, 김정규와 함께

 

버려진 1사단 사령부에 영내로 잠입하여

 

배낭 3개에 수류탄 10여발씩을 챙겨

 

김정규 집에다가 숨겨놓고 M.1 소총 3정과

 

수류탄 30여발을 가지고 이들 4명은

 

태극기에 "대한민국 지하 공작대" 라는

 

 혈서를 쓰고 유격대를 결성합니다

 

<경주학도병태극기서명문>

 

7월 1일 고양군(지금은 고양시) 에서는

 

중학생,교사,낙오군인들이 유격대를 결성하게됩니다.

 

7월 5일 공무원이었던 이장복을 중심으로

 

고양군 일산리에서 학생,공무원 등이

 

 "태극단"(일명T.K)을 결성하게됩니다.

 

하지만 통합된 세력이 아닌 따로 활동하던

 

세력들이고 총도 안쏴본 이들은 세력도

 

 

전투력도 미약했었죠.

 

 


 

 

(구월산유격대 예하 동키부대)

 

8월 이들은 이장복을 단장으로  "태극단" 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유격대로 재편되어

 

활동을 시작하게됩니다.

 

구성은 1개 본단, 1개 별동대,12개 지단

(수색, 능곡, 행주, 백마, 송포, 산남, 교하, 청석, 금촌, 광탄, 문산, 철도)

 

부대원들은 학생, 교사, 경찰, 낙오군인

 

그밖의 공무원과 농민, 상인 등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극단에는 대다수를

 

차지하던건 학생들이었고

 

부대원 수는 240여명까지 늘어났게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사진은 구월산유격대 여성대원들)

 

신규정씨 등 9명의 여자유격대원들이

 

 존재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기록된 대원 숫자이고

 더 있을꺼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규정(숙명여대)등을

 

 비롯해 서울여상, 동명여중,성신여중 등등

 

여학생들이었고

 

이 아가다(김병찬소령 부인), 김병숙(김병찬소령 여동생)

 

 같은 군인가족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대원들의 규모는 9.28수복 이전까지

 

240명으로 경기관총1정과 각 소총54정

 

수류탄 270여발 실탄 수천발을 보유한

 

큰 결사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사를 전담하는 일도 했지만 몇몇은

 

실제 남자들과 함께 유격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나이 성별 직업에 상관없이

 

그들은 오직 자유대한을 위해 싸웠던겁니다.


 

 

이들은 태극문양이 찍힌 머리띠를 썼고

 

 

태극단이라는 완장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7월말 북괴 의용군으로 징병당한 30여명의

 

 민간인을 구출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북한군 통신선을 끊어 북한군 통신망을 방해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처단하고

 

관공서에서 총격전을 하고

 

유엔군이 북진하자 북한군

 

패잔병 소탕작전에도 참가합니다.


 

 

 

그들의 대표적인 작전은 경의선을 철로 끊어 수송을 방해하는거였고


 

 

 

행주나루에서 북한군의식량수송선을

 

침몰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물리적인 작전뿐만 아니라

 

 

삐라들을 제작해서 북괴점령 지역에 뿌리는

 

 심리전도 수행했는데

 

유엔군이 참전했다.

 

곧 북진할것이다.

 

이런 내용들로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적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적을 위해 일하고 있다면

 

바로 나와 도망쳐라 이 포고를 준수하지 않으면

 

가족과 함께 멸살을 면하지 못할것이다"

 

라는 경고성 삐라들을 인민위원회 건물벽과

 

주요 도로변에 부착하여 공산분자들을

 

당혹케 하였습니다.

 

이게 경고가 아닌 현실로 들어난 사건이 있어요

 

국군이 북진을 하면서

 

 

다시 수복되자 경찰과 태극단이 고양시에 있는

 

 금정굴에서 부역혐의자와 가족들 153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건

 

학살당한 사람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있었겠지만 무고한 민간인들도 있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가서

 

9월19일

 

철도 교환원 유춘화씨가 태극단에 첩보를 보냅니다.

(유춘화씨도 여성 태극단원)

 

내용은

 

"피랍인사들을 태운 열차가 수색역을 지나 북쪽으로 향한다"

 

라는 내용이였습니다.

 

태극단은 경의선을 끊고 습격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목표열차가 아닌

 

북괴군 탄약을 만재한 12량의 열차가 오고 있었고

 

열차는 곧 끊긴 경의선에 탈선하게됩니다.

 

태극단은 유엔군에 첩보를 보내

 

 

유엔공군이 열차를 폭격하는 전과도 올리게됩니다.

 

1950년 10월 말에

 

태극단은 국군에 무기를 자진반납하고

 

해체하며 3개월의 짧은 활동을 마치게됩니다.

 

짧으면서도 굵직했던 그들...

 

항상 좋았던것만은 아닙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유격대원 45명이 부역자들의 밀고로

 

북한군에 잡혀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부역자들의 밀고로 전우를

 

잃어버린 태극단 입장에서는 분노할만하고

 

그게 금정굴 학살로 나온거겠죠..

 

고양시의회에서 태극단유공자 지원조례랑

 

 금정굴희생자 지원조례 모두 계류됐다고 합니다

 

빨갱이를 왜 도와주냐? vs 살인마들을 왜 도와주냐?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앙금은 지속되고 있어요

 

전 태극단이 어찌보면 지금 대한민국의

 

 오래된 갈등을 보여주는 축소판인거 같습니다


 

사진 출처: http://korean.visitkorea.or.kr/kor/inut/inutdiyTravelLeaderList.kto?articleId=62517&func_name=view

 

고양시 일산구 덕이동에는 정부에서 지정한

 

제1호 반공유적지  "현충공원"이라고 있는데

 

여기에 학살당한 45명과 전사한 6명의

 

 태극단원들이 잠들어 있어요

 

(51개의 무덤중에 몇몇은 시신없는

묘임 못찾은 시신들이 많다고 합니다)

 

시간있으면 한번쯤 가보는것도 좋을꺼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태극단과 한국전쟁 시절 태극단은

 

시기도 성격도 다르지만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바로


 

 

내 나라를 위해 일어났던 어린 학생들...

 

교복이 전투복이 되고

 

연필대신 총을 잡았던

 

모든 학도병들 ...


 

 

감사합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구글.http://blog.naver.com/dubuioi/220496074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