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안녕하세요

 

초창기 대한민국 국군의 장성 중 한명이었던

 

이형근이 자신의 회고록인 '군번1번의 외길'을

 

월간 중앙에 연재하면서 말미에 언급한내용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25일을 전후해

 

한국군에서 발생한 석연치 않은 사건들에

 

대해서 지적한 내용입니다.

 

 

이형근은 당시 한국군 내부에 간첩내지는

 

북한과 동조하는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군 전문가 및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형근이 주장한 미스테리에 대해 분석 및

 

연구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연구 결과 대부분의

 

내용은 이형근이 사건 자체를 잘못 인식하였거나

 

초창기 한국군 및 정부의 능력 부족에서 비롯된

 

미숙함과 불운이 겹친것으로 판명하여 이후

 

학술적가치가 사실상 없어진 상태입니다.

 

이번에 그 미스테리 10가지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려고 합니다.

 

 

한국전쟁 첫번째 미스테리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4-5월까지는

 

이형근이 지휘한 8사단뿐만 아니라 다른

 

사단에서도 적의 대규모 남친 징후가 보인다는

 

보고가 잇따랐을 것입니다.

 

 

8사단의 경우 1950년 3월-5월 태백산맥으로

 

침투한 이호재 부대의 잔당과 김무현 유격대를

 

토벌하던 중 생포한 포로들을 심문한결과

 

이구동성으로 적의 대규모 남침을 거듭 예고했기

 

때문에 이 정보를 육본에 수차례 보고했으나

 

반응이 없었다고합니다.

 

 

 

 

한국전쟁 두번째 미스테리

 

각급 주요 지휘관의 이른바

6월 10일 인사이동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꺼번에 많은 인사를 단행한것이

 

문제라는 점입니다.

 

 

 

 

 

한국전쟁 세번째 미스테리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6월 13일부터 6월 20일에 걸친 전후방부대

 

교대 역시 부적절한 조치였습니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지휘관들이 적정이나

 

지형은 커녕 부하들의 신상파악조차도 할수가

 

없었습니다. 두번째 미스테리와 일맥상통한데

 

부대교체도 조금씩해야하는데 너무 한꺼번에

 

많은 부대를 동시에 교체하는 바람에

 

전력공백을 야기했습니다.

 

 

 

 

한국전쟁 네번째 미스테리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하여 남한은

6월 11일부터 6월 23일까지

비상경계령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6월 10일 이른바

 

'조국통일투사 체포사건'에 대해 평양 방송이

 

맹렬한 비난과 무력행사 위협을 해왔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6월23일 김일성이 남침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도록 결정된 날 자정에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점입니다.

 

 

 

 

 

한국전쟁 다섯번째 미스테리

 

이런 위기상황에서 육본은

비상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습니다.

 

 

정말 황당한것은 육본 정보분석과에서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육군참모총장에게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한국전쟁 여섯번째 미스테리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월 24일 밤에 열렸습니다.

 

 

육군 장교클럽 낙성파티를 연다고

 

전 후방 고급 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참석 장교들은 6월 25일 새벽가지 술과 댄스를

 

즐겼으며 일부 미 고문관과 한국 장교들은

 

2차를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형근 대장도 초청장을 받았지만 시기적으로

 

너무 엉뚱하다고 판단하여 불참하였다고합니다.

 

 

 

 

한국전쟁 일곱번째 미스테리

 

적이 남침 이후 대한민국 군군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투입해 불필요한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지만 군사적 기초상식을

 

깬 작전지도였다고합니다.

 

 

 

한국전쟁 여덟번째 미스테리

 

적의 공세로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에서 허위방송

 

 

6월 25일 - 27일 우리 중앙방송은 국군이

 

반격하여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했습니다.

 

 

 

 

한국전쟁 아홉번째 미스테리

 

우리측의 한강교 조기폭파

 

 

전술의 원칙상 폭파나 차단은 퇴각군의

 

퇴로를 막기위해 추격군이 감행하는 법인데

 

한강교는 우리측이 그것도 한강 이북에

 

국군만 믿고 있는 많은 시민 그리고 병력과

 

군수물자를 방치한채 서둘러 폭파했습니다.

 

 

더구나 대통령 ,정부고관, 육군참모총장이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한강이남으로 도피한뒤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은 전술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용납될수없는 하책이며

 

반역행위였습니다.

 

 

 

 

한국전쟁 열번째 미스테리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상형 집행

 

 

최창식 대령은 육군 참모총장의 명력에

 

복종 한강교를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때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시기엿는데 이런 경황을 틈타

 

책임 소재도 가리지 않은 채 미리 처형한 것은

 

정치적 북선이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