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보다빨리상륙하라! 인천상륙작전
안녕하세요 오늘은 세계의
명작전중 손꼽히는 작전
코드네임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
작전인천상륙작전에대해 써볼게요.
우리민족 최대의 격변이었던 6.25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몰아붙히며 끝날것처럼
보였던 전쟁이 뒤집어지게 만든
역사적인 작전이 인천상륙작전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는 해병대>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북한군은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됩니다.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칠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당장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타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 명이 되지 않았어요.
<그당시 낙동강 전선>
산을 저지선으로 삼을 경우
북한군이 샛길 등으로 산을 쉽게
넘어가서 아군을 역포위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수비를 할 때는 적이 보이므로 유리하지만,
역공을 하려면 도강부터 해야
하고 적에게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도 쉽지 않았고,
북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려 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국군 및 UN군은 마땅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을 시작할 경우, 38선까지
도달하는데만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 기간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지경이었다고합니다.
<맥아더장군>
맥아더장군은 전쟁 직후 한강에
이르러 전선을 시찰할 때 구상했었던
인천상륙작전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이 후보로 있었습니다.
전북 군산으로 상륙작전을
감행 할려고 했으나
극동사령관겸 태평양 사령관이었던 멕아더 장군은
적의 심장부에 가까운
인천상륙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어요.
작전계획을 확정하기 위한
최종 검토과정에서 유엔군 총사령부의
상부기관인 미합동참모본부는 인천상륙은
큰 모험이라고 하면서 작전하기에 훨씬 안전하고
또 성과가 확실시되는 군산으로
상륙하라고 종용하였습니다.
유엔군 총사령부의 참모진과 해군 및
해병대 장교들 사이의 중론은
인천상륙만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인천은 세 지역 가운데에서 가장 멀고
깊은 곳이어서 작전을 지원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뿐만 아니라,
조수·간만·지형 등 자연조건도
불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죠.
인천의 험준함
1.조수간만의 차가 최고 수치는 9m,
최소 수치도 7m라서 대한민국 2위의 수치이므로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상륙군이
수백미터 이상을 엄폐물도 없이
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그리고 밀물 때 상륙한 상륙선은 다음
밀물이 올 때까지 좌초하므로 적의
반격시 탈출하기도 힘들다.
2.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갯벌은 수백미터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도보 및 차량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
3.위 두 항을 이유로 선발대는 상륙 후
최소 9시간 동안 어떠한
지원이나 보급도 받을 수 없다
4.상륙지 주변에 모래사장은 없다고 봐야 하고,
보통은 돌로 쌓은 높은 방파제와
축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배타고 방파제에 다가가서 사닥다리 놓고
올라가는 전근대적 공성전을 벌여야
상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방어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5.방어시설이 잘 갖추어진 항구를
직접 점령하는 것은 디에프 상륙작전
이후 거의 금기시된 일이며,
설령 상륙이 성공적이더라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르면서 인천을 점령해야
하는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
<디에프상륙작전 아픔은 2년 후
흔히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 일컬어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안이함으로 인해 겪은 아픔은 너무 컸다>
6.썰물이 되면 선박이 통행할 수 있는
수로가 비어수로라고 불리는
좁은 통로에 국한되므로
상륙작전을 하는 선박 및 지원포격을 하는
선박이 모두 좁은 단일 통로에 밀집한다.
이는 방어군의 해안포 입장에서는
그냥 고정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어수로의 유속이 매우
빨라서 주의하지 않으면 엇 하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배가 떠내려가기 일쑤다.
이렇게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특징이라는
특징은 거의 모두 보유하는 바람에
일부 참모는 과장삼아
"성공율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그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했던겁니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았습니다.
그는 인천상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불리한 점 때문에 공산군도
인천 일대에 대한 방어를 소홀히 할 것이며,
따라서 그 허점을 찔러 기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던거죠.
또한, 인천은 서울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어서
유엔군이 한번 경인지구를 장악하게 되면
북한 공산군의 병참선을 끊어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가장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어요.
미합동참모본부의 수뇌들은 인천상륙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면서도,
현지 야전 지휘관에게 최대한의 작전 재량권을
부여해 주는 미국 군부의 오랜 전통과,
대일전(對日戰)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원수에 대한 신망으로 인하여,
그의 계획을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승인하게되었던겁니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 뿐이었습니다.
10월은 기후관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로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9월 15일로 결정되었습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기본 계획을 확정한 후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어요.
그리고 8월 26일 상륙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10군단을 공식적으로 편성하였습니다.
미 제10군단의 주요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었어요.
<서울시가지전투중인 제1해병사단 병사>
미 제7보병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에 많은 장교 및 기간요원들을 차출당하여
그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청년 8,000여 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훈련시킨 후 배치시켰습니다.
이들이 바로 카투사(KATUSA)의 시초입니다.
한편 국군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제1해병연대와 국군 제17연대입니다.
인천상륙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에 대한 수로, 해안조건,
방파제 및 북한군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첩보대를 파견하여
인천연안에 대한 각 섬들과 해안을
정찰하여 관련 정보를 확보하였어요.
당시 인천지역에는 월미도에
제226독립육전연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연대로 하여금
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인천시에는 제87연대가
방어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어요.
미 제10군단은 북한군의 인천 방어 병력을
약 1,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북한에게 상륙작전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일이 있으며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해군과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진행하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동원했고,
그 결과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한/미 해병대가
처음 상륙했을때 당장 인천 일대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는 병력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 정도밖에 없었던겁니다.
물론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인천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나 늦어서 몇 개 부설하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기뢰 부설함들이 들켜서 공격을 받고,
부설한 기뢰도 거의 다 발견돼서
조기에 제거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상륙부대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즉 9월 5일부터 북으로는 평양에서부터
남으로는 군산까지, 인천을 포함한 서해안의 상륙작전
가능지역에 폭격을 실시하였어요.
9월 12일부터는 미국과 영국의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하고, 동해안 전대는 9월 14일과
15일 삼척 일대에 맹포격을 가하며
그렇게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는거였죠.
<함포사격중인 전함>.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9월 15일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의 함정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하였습니다..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다.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안의 교두보 확보였어요.
제1단계(월미도상륙) :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을하였고.
새벽5시 45분에는 미 제15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가 지역에 폭격을 감행합니다.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어요.
오전8시 월미도를 점령하고
오전 11시 15분 소월미도까지 점령을합니다.
<F4U 콜세어 >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하엿고.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 106명이 포로로 잡혔고,
네이팜탄 투하 및 기총소사로 민간인의 피해가 컸습니다.
제2단계(레드비치상륙)
9월 15일 14시 30분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합니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 17연대와
해병 제 1연대는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서 상륙을 대기하였습니다.
H-아워 8분 전에 제5연대전투단은 차량 및
병력상륙정을 타고 공격개시선을
넘어 레드 비치로 돌진했어요.
해병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하면서 방파제 뒤편을 공격했습니다.
해변에 접근하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들은
만조에 편승할 수 있었고 적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고합니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제5연대는
인천 시가지 소탕, 해안 경비를
맡으며 작전을 진행해갔습니다.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효율적인 전략으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갔습니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인천항의 주요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고
인천항의 도크를 확보하였으며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모두 소탕하였습니다.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유엔군과 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히 성공시켰습니다.
이 때 총 지휘는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국군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들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했다고합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고.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천은 다음날 아침까지 완전히 해방되었으며,
북한군의 이렇다 할 반격은 전혀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 결과 인천에서 유엔군이 입은 손실은
전사 21명에 실종 1명, 부상 174명에 불과했어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인천상륙작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버금가는
성공적인 작전이엇습니다
이후 멕아더 장군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인
한만국경을 원자탄으로 공격하자라고
했지만 미국의 트루먼대통령은 못 마당하여
멕아더 장군을 미국 본국으로 소환하게 됩니다
<트루먼대통령>
인천상륙 작전에는 미군을 주축으로
하여 지금은 월미도가 섬이 아니지만
그당시는 섬이었으며 인천의 월미도에
상륙하여 인천을 탈환하고
우리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그당시 인천을 향하여 수하늘이 검은 연기로
안보일 정도로 많은 함포 사격을 감행하고
북한군의 저항을 별로 받지 않고
인천에 상륙했다라 합니다^^
6.25전쟁에 가장 위대했었던 작전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조금있으면 개봉하는 인천상륙작전 영화도 꼭 보러가고싶네요..
참고 및 출처:위키백과.두산백과.한국민족문화대박과.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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