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는 지금 현재 우리나라의 유명한 메이커 사단 중 하나이며 전국에서 대통령 부대표창을 가장 많이 수상한 부대입니다. 유명한 만큼 1989년 여름 첫 방송을 시작했던 "우정의 무대" 1편도 백마부대에서 시작했으며 현재도 대한민국 군부대 중에서 가장 영상물에 많이 등장한 부대입니다.

 

 

백마부대 역사는 6.25전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정확히 두 달이 지난 10월25일. 28연대(대전), 29연대(공주) 및 30연대(청주)를 기간으로 하여 창설된 이들은 대둔산 지구(전북 완주군)에 사령부를 설치, 즉시 남쪽에 잔류하고 있던 공비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뛰어들어 첫 전과를 세웁니다. 그러던 중 1951년 1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이후 휴전협상이 맺어지기 전까지 공산군의 대공세에 맞서 철원평야와 금화지구의 진지를 고수해냄으로써 그 소임을 다하였습니다.

 

 

그 중 중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되는 395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간에 걸쳐 중공군 3개 사단과 격돌한 공방전으로, 총 27만여 발에 달하는 포격과 754회의 항공지원이 치러졌습니다. 그 결과, 13000여 명에 달하는 적이 사살되었고 이후 중공군은 새로운 고지쟁탈전을 단념하게 됩니다. 이때 양측 포격으로 인해 벌거숭이가 된 고지를 본 미군들은 그 형상이 마치 백마 같다고 하여, 이 395고지에 White Horse Hill(백마고지)이란 별명을 붙였습니다. 이후 백마고지탈환전에서 죽은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자 육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와 함께 백마부대란 이름을 얻게 됐습니다.

 


그리고 백마부대는 월남파병부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존슨 정부는 당시 파병된 한국군의 활약을 주시하면서 베트남의 작전환경에 한국군이 가장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이어서 베트남 전쟁의 국제전적 성격을 부각시키면서 미국 내 반전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한 방안 등을 고려해 한국군 전투부대의 증파를 요청해왔습니다. 동시에 1966년 2월 22일 남베트남 정부에서도 한국군 1개 전투사단에 대한 추가파병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왔고, 결국 동년 8월 30일 부산항에서 1진이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백마부대는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합니다.

 

 

곧 9사단은 10월 8일까지 닌호아 일대에 전개됐고, 그 결과 주월 한국군은 남베트남 중부 해안의 핵심지역을 담당해 미군과 함께 베트남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게 되었습니다. 그중 1967년. 장비/화력/경험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보다도 적은 희생으로 월등한 전과를 세워 미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게 만들었던, 주월 한국군 최초의 군단급 작전인 '오작교 작전'에서는 3개 대대를 투입하여 맹호부대와 함께 42일간에 걸친 장기전을 치러, 월맹군에 의해 장악돼 있던 뚜이호아-퀴논 사이의 1번 국도를 다시 복구한 것은 물론 사살 925명, 포로 425명, 귀순 297명의 전과를 올리며 작전 주도권을 확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홍길동 작전으로 월맹군 5사단 예하 95연대와 베트콩 85연대 및 게릴라 2개 중대를 급습하여 섬멸하고 98정의 다목적화기와 359정의 개인화기를 노획했습니다. 1973년 귀국 전까지 실시된 수차례의 대부대작전 및 소부대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적 사살 13500여 명, 포로 700여 명, 귀순 800명, 각종 화기 7000여 점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파병 기간 중 총 100,376명의 백마부대원들이 참전하였고, 이들은 맹호부대와 함께 심리전과 대민지원활동에도 힘을 보태어 월남정부의 평정 및 지역개발 사업지원에 기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9년 11월 절대 뚫리지 않을것같던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 (KCTC)의 전갈부대를 뚫고 최초로 3참호까지 돌파했습니다. 당시 백마부대 이등병이 야간 전투상황이 발생했는데 혼자서 전갈부대원 11명을 사살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현재는 경기도 고양시파주시 일대에 주둔하며 완벽한 강안 경계임무를 맡고 있습니다.